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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양 강좌 스크랩 현대불교 역사 개괄(퍼온글)
관음주 추천 0 조회 76 07.06.30 15: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90년대말 불교와 2000년대의 비전 >


90년대는 94년을 기점으로 전후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미 1983년에 ‘비상종단’을 통해 한번 제기된 바 있는 ‘개혁’이 종단의 첨예한 화두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서의현 원장의 3선 연임 시도를 계기로 촉발된 개혁운동은 공권력의 일방적 편들기를 이겨내어 개혁회의를 출범시키게 된다.

개혁회의는 종단의 민주화, 자주화 등 4대 과제를 제시하고 제도 정비를 통해 총무원장을 선출한 후 평화적으로 종권을 이양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혁종단이라는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하에서도 크고 작은 이권 다툼은 쉬지 않았고, 불교방송 공금횡령사건, 여의도 불교문화센터 등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종권 소외세력의 불만은 98년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폭발하였다.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 저지를 위해 모였던 반대 세력중 일부 세력이 총무원 청사를 점거한 조계사 폭력사태가 발발한 것이다. 점거측은 종정의 교시를 무기로 ‘정화개혁회의’를 출범시켰지만 중앙종회와 집행부측은 승려대회를 통해 종정을 불신임하고 선거일정을 진행하였고 사태는 1개월 만에 공권력 투입으로 점거세력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종식되었다.

선거에서는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이 분쟁에는 종정 권한 강화를 도모하는 측, 종권 소외 세력의 종권확보 기도, 멸빈, 제적 등 중징계자의 사면요구, 총무원 권한 약화를 바라는 일부 본사의 움직임 등 다양한 세력이 얽혀 사태를 극한까지 몰고갔다. 99년 총무원장 선거과정에 대한 법원 판결로 종단 분규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고산 총무원장은 1년여 만에 중도 사퇴하고 선거를 통해 정대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하였다.



<한국불교근대사>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들어온 불교는 많은 혼란과 번창을 반복하면서, 근세를 맞이하게 된 불교계는 1988년 5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그 대안으로 전통사찰관리법이 발효되면서 어느 정도 관권의 예속으로부터 자립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이해 12월 말에는 10/27법란에 대한 국무총리의 사과를 받아 내게 되는데 이는 사회의 민주화 바람과 불교계 내부의 응집된 대응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의 참혹한 배불정책과 일제치하에서의 사찰령이 이 땅의 불교를 말살하려는 시도였다면 1954년5월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이승만의 유시로 점화된 소위 불교정화정책의 회오리는 다시 한번 관권이 불교계를 유린하도록 하는 빌미를 주게 되었고, 그 여파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는 1988년까지 이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불교계가 자립의 분수령을 이루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전통사찰관리법이 발효된 직후인 1989년부터 1997년 까지의 불교계 흐름을 논하기로 한다.



<불교방송의 시작>

이 시기에 일어난 불교계의 가장 큰 변화는 불교방송,불교T.V개국, 성철스님의 입적, 서의현 스님체제의 총무행정의 붕괴와 개혁종단의 출범을 들 수 있다.그리고 또 다른 관건의 불교편향정책과 이에 따른 훼불사건 등이 대종을 이룬다. 1990년 5월 이땅의 불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불교방송이 개국을 하고 첫 방송을 하게 되니 동토에 전래된 이후 가장 큰 경사가 되었다.초기의 가청권은 서울과 그 인접지역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제 부산,광주,대구,청주의 지방 방송국이 잇따라 설립되어 전국을 가청권으로 하는 전국방송망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불자들은 가정에서 방송을 통하여 조석으로 예불을 하고, 고승대덕의 설법과 저명한 법사,교수의 불교학 강의를 앉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불교방송국의 대작불사를 이룩해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 땅의 모든 불자들이 원력이 하나로 결집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조계종을 비롯한 많은 종단과 불교진흥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화합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즉 방송의 의결기구인 이사회의 이사장은 승려중에서 보하고 방송경영의 책임자인 사장의 추천권은 불교진흥원이 가진다는 원칙을 합의해 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승단과 재가가 조화롭게 의결기구의 수장과 경영의 책임을 양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불교방송이 개국을 한 지도 10여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불교방송은 그 동안 교리강좌,법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불자의 신앙심 고취는 물론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 왔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적 자립기반이 취약한 것이다. 사실 방송국은 개국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진흥원으로부터 매년 5억원 내지 10억원의 지원금을 받고 있음이 사실이다. 시설투자비까지 합하면 70억원 이상의 지원을 받은 셈이다. 불교방송국이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임직원 전체가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정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불교방송이 음성만을 전달하는 라디오 매체인 데 비하여 1995년3월 개국한 불교T,V 방송국은 영상매체라는 점에서 크게 대조를 이룬다. 통도사와 각급 본사 그리고 많은 종단이 참여하여 자본금38억원의 주식회사로 출범한 불교T,V 는 수차에 걸친 주식공모를 통하여 170억원의 자본금을 확보한 것이다.개국특별프로그램으로 종정스님과 특별대담,한국사회와 불교의 역할에 대한 특별좌담회 등의 방영을 시작함으로써 하루10시간씩의 정규방송에 들어갔다. 불교텔레비젼은 가톨릭, 기독교와 동시에 케이블T,V로서 채널을 허가받았으나,현재 불교T,V는 타 종교보다 시청률면에서 앞설 뿐 아니라 30여개 일반 채널 중에서도 우수방송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불교T,V가 우수한 영상물을 방영하고 시청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경영부문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초기 케이블T,V 각급 채널의 인,허가와 설립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케이블T,V는 유선방송이므로 각 가정에 케이블이 설치되어야 수신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치밀한 계획없이 허가 설립에 대한 일정을 앞당겨 놓은 것이다. 케이블T,V는 이러한 당국의 오판으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경제적 손실을 떠맡게 되었고 불교T,V도 예외없이 자금의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최저200만 가구 이상의 유료 시청자가 확보되어야 수지를 맞출 수 있다는 케이블T,V프로덕션의 입장에서는 97년말 현재 유료시청자 80여만 가구로서는 경제적 자립을 감당할 수 없음이 자명한 이치라 할 수 있다. 불교T,V는 케이블T,V프로덕션 연합회와 연대하여 정부를 상대로 계속 이러한 난제를 풀어가고 있지만 구조적인 적자요인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어쨌든 불교방송과 불교T,V가 각각 음성과 영상을 통하여 전국의 불자가정을 찾아 법음을 전하고 있음은 교계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불교방송과 불교T,V가 현재 제반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불교계의 전 사부대중이 지혜와 힘을 모아 위법망구의 자세로 임한다면 1600년 불교역사에 우뚝한 초공간의 법당이 더욱 큰 광명을 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성철스님의 열반>

1993년 11월4일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추앙을 받아 온 조계종 종정 성철 큰스님이 열반에 드셨다. 스님의 열반은 불교계 뿐 아니라 전 국민의 비통을 몰고 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1년 조계종 종정직을 수락하고 추대식장에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신 채 사자후한 이 법어는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가슴 속에 화두로 남아 있다. 스님은 1912년 경남산청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 1030년 진주중학을 졸업한 뒤 일제하 젊은 시절을 사상적 방황기로 보냈다. 이 시기 스님은 승찬대사의 "신심명"과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읽고 캄캄한 밤중에 태양을 만난 듯 환희하고 생가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 대원사를 찾아 평생수행의 외로운 길에 들어선다. 불가의 예법을 잘 모르던 스님이 속복을 입은 채 대원사 방 한칸을 차지하고 수행에 들어가자 본사인 해인사에서는 이인이 나타났다는 공론이 돌고 결국 스님은 해인사에서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게 된다. 당시 해인사에는 백용성, 송만공 스님등 선지식들이 계셔서 훌륭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고 본다.

성철 큰스님은 1935년 인연을 맺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말년을 보냈다. 스님은 10여년간의 장좌불와, 묵언 등의 수행에 추호의 빈틈이 없었으며 기존 불서의 해석은 물론 영,독,일,중국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여 현대물리학,심리학,심령학 등 외전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스님은 수행하는 일 외에는 사람들은 잘 만나지 않는 특징 있는 삶을 사셨다. 성철스님을 친견하려면 3천배를 해야 했다. 정계나 재계의 거물급 인사도 예외는 없었다. 이렇게 스님은 승속간에 신화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스님은 이따금 "산은 산,물은 물" 등의 법어를 내림으로써 국민정서를 깨우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스님은 저서 "선문정로"에서 돈오돈수를 강조함으로써 후학들에게 자신의 수행관을 제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수행법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불교계에 공부하는 분위기를 일신시키기도 했다. 스님이 조계종 제6대 종정으로 추대된 것은 1981년1월 바로 전해 불교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10/27법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절이었다. 5공을 출범시킨 신군부가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 불교를 탄압한 10/27법란은 불교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남겼다. 스님은 이런 와중에 종정으로 추대되어 실추된 불교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사회 일각에서는 스님이 깨달음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너무 소극적이지 않았으냐는 지적이 있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스님은 종정에 취임하던 해에 종단의 간부들에게 "출가자에게는 출가자의 본분이 있다. 치열한 구도정신을 가지고 견성성불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실현하라. 그리고 올해부터는 싸움을 하지 마라. 싸움으로 인하여 타율적인 정화를 당하게 된 것 자체가 잘못이다. 출가자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일대사 인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라고 밝힌 견해는 그러한 세간의 오해를 씻어 주고 있다고 본다. 영결식에서 당시 원로회의 의장 서암 스님은 추도사를 통하여 "스님은 병든 세상에 조각으로 기운 누더기 한벌로 몸을 가리고 장좌불와와 묵언정진으로 뼈를 저미는 수행자의 생활로 일관했다. "고 추모했다. 또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은 정부를 대표해 "스님은 한국불교계의 큰 별이었으며, 이땅과 겨레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이었다. 스님은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선승으로서 국민의 정신적 귀의처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추도했다. 이날 영결식장에서는 전국 3천여명의 스님과 10만 여명의 신도들이 운집했고, 정계,재계,주한외교사절,종교계 등의 대표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법구는 영결식장에서 3Km 떨어진 다비장으로 운구되었고 곧 바로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스님은 110과의 오색 투명한 사리를 남겼다. 성철스님의 열반은 각종 매스컴의 유래없는 취재경쟁을 촉발하였고,이런 여파는 비디오계와 서점가를 강타하기도 했다. 비디오계에는 스님의 생애,입적,다비 등의 장면을 영상다큐로 제작하여 다투어 출시했고,서점가의 대형 매장들은 성철스님 코너를 신설,발빠른 상업성을 보이기도 했다. 스님은 가셨으나 스님의 치열했던 구도난행과 일의일발의 승가상은 오늘을 사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귀감이 된 것이다.



<종단의 분규>

큰 스님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93년3월 종권을 둘러싼 종단의 분규가 일기 시작했다. 총무원장 3선을 둘러싼 서의현 총무원장과 이를 결사반대하는 실천승가회,선우도량,중앙승가대,전승련 등 8개 단체가 결성한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이 사건의 발단은 표면적으로는 종헌에 명시된 "총무원장이 임기는 4년이며 중임할 수 있다."는 자구의 해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서원장측은 중임을 단2번이 아니라 거듭할 수 있다는 뜻으로 결론짓고 3월30일 경찰 병력의 보호속에서 임시중앙종회를 개최,서원장의 3선을 의결했다. 이에 앞서 범종추등 재야불교에서는 조계사에서 단식과 비폭력 구종농성에 들어갔고,집행부측은 이를 해산하기 위하여 폭력배를 동원 농성중인 스님들을 무차별 공격했다.이를 빌미로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범종추 소속 승려,신도 등 476명이 연행되었고 연행과정에서 도각 스님등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폭력배 동원과 경찰병력 투입등의 초강수를 쓴 서원장측의 악수로 말미암아 모든 불교도는 범종추의 대열에 합류케 되었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서원장의 사퇴로 일단락되었고 4월15일 제113회 임시중앙종회는 10대 종회를 해산하고 전권을 종단개혁회의에 일임한다. 존단개혁회의(월하스님)는 서원장이 사퇴성명을 발표하기 사흘전인 4월10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성되었는데 이 대회는 서원장 공직박탈과 동대회의 개최를 반대한 서암 종정 스님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했다. 서원장측과 범종추측의 대결은 결국 종단개혁회의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나 이 사건은 2가지의 문제를 남기게 된다. 하나는 부당한 공권력이 또 한번 불교계를 탄압한 사례를 더했고 또 하나는 전국승려대회가 현직 종정 스님을 불신임한 선례를 만든 점이라 하겠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종단개혁회의는 정법종단의 구현,불교자주화의 실현,종단운영의 민주화,청정교단의 구현,불교의 사회역할 확대라는 5대 지표를 설정하고 8개월 동안 차기 종단구성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한다. 1994년 11월21일 조계종은 316명의 선거인단에 의하여 제28대 총무원장으로 송월주 스님을 선출하고 이보다 앞선 11월16일에는 제11대 중앙종회가 개원되어 설정 스님이 의장에 선임된다. 종단개혁회의가 8개월간의 작업끝에 마련한 새로운 종단 출범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종단의 권력구조라 할 수 있다. 서 전원장 체제으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총무원장의 종권 독점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총무원, 포교원, 교육원의 3원이 각각 독자적 기능을 수행하는 집행부서로서 업무를 분장하게 된다. 또한 총무원장과 종회의원 등 주요 직책은 겸직이 금지되었다. 어쨌든 1994년11월 조계종단은 과거의 권위주의와 독선적 운영형태를 지양하고 제도개혁등의 새로운 과제를 안고 출범하게 된다.개혁종단은 출범과 동시에 중앙신도회의 구성과 중앙승가대학 정규대 승격 및 학사이전,그리고 선학원,대각회 등 문제해결과 태고종과의 분규사찰문제 해결을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현재 뚜렸한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앙신도회 결성에 대한 문제는 2~3차례나 그 결성시기를 늦추어 왔다.재가 신행단체에서는 신종헌 종법에서 규정한 중앙신도회법이 신도들의 자율성을 배제하였을 뿐 아니라 승단과 재가의 관계를 종속적으로 만든 악법임을 문제점으로 제기하였다. 또한 지난 40년간 종단의 실질적 외호세력으로 관계를 종단이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 것도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면에서 부정적으로 비쳐지고 있다.

중앙승가대학은 종단과 대학의 여러 가지 노력 끝에 정규대학으로 승격하였으나 학사 이전문제는 몇차례의 번의와 진통 끝에 김포 금정사 부지로 이전할 것을 결론 지은 외에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승가대학의 이전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예산확보가 급선무인데 종단은 '94년에 20억원, 96년에 50억원을 예산 책정하였으나 실제 확보된 금액은 미달이라는게 주위의 시각이다.

또한 선학원 등의 문제도 별 진전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조계종단이 형님된 입장에서 크게 포용하는 입장을 취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학원 이사에 대한 징계를 결의하는 등 초 강경책을 고수한 데 따른 반작용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태고종과의 분규사찰 해결에 대한 노력도 원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잇다. 개혁종단은 과거의 개인적 독선적인 경영방법을 탈피, 대화와 인내로 제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본래의 의지와는 달리 앞서 지적한 문제들에 대해 너무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또한 청정한 계율을 생명으로 삼는 종단의 승풍이 벼랑 끝에 와있음을 인식한 안목있는 스님들이 중앙종회를 통하여 승풍쇄신을 주창하기도 했으나 이마저 한계에 부딪혀 있다고 보여진다.



<한국의 종단 협의회>

28개 종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이제까지 전 불교계를 대표하는 연합기구였는데 1996년7월 드디어 분열이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즉 조계종단과 이에 동조하는 소수의 종단에 대항하여 다수의 종단이 종단진흥회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 단 것이다. 종단진흥회가 창립을 선언하고 기자회견에서 조계종단의 독선을 비판하고 나선 것으로 보아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분열은 조계종의 포용력이 너무 적지 않았느냐는 풀이가 가능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조계종 개혁종단은 출범 이후 개혁의 의지를 달성하는데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여진다.



<문민정부의 탄압>

한편 문민정부를 자칭하고 나선 김영삼 정부(1993~1996)는 출범 이후 역사 바로 세우기 등 세인이 납득할 수 없는 억지논리를 전개,일신교적 흑백사상으로 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누를 범했다. 단군성조이래 5천년 역사를 싸잡아서 비난 매도하는가 하면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곳곳에서 죄없는 연꽃이 뽑혀 나가는 수난을 당하고,이 시대에 편승하여 일부 몰지각한 종교단체들이, 각급 학교교정에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으로 세워진 우리민족의 뿌리이자 근원인 단군상을 파괴하고,훼손하는 등의 민족성이 의문되는 어이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1993년1월4일 육군 제17사단 전차부대장이 불교가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부대 내 법당을 폐쇄하고 불상을 유기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경남지사가 부임 직후 관사에 모셔져 있던 미륵반가상을 창고에 폐기처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달에 공보처장관은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5개소의 불교방송 지방국 설립 약속을 깨고 2개소의 지방국 신설만을 허가했다.

1995년 12월에는 김영삼 씨가 국방부 중앙교회에서 예배를 보며 인접해 있는 중앙법당의 불자들에 대하여는 경호상 문제라 하여 출입통제를 하는 등 상식 밖의 일들이 벌어졌다.

1996년 4월에는 수유동 소재 삼성암과 본원정사가 이교도의 소행으로 보이는 방화로 인하여 대웅전,나한전,범종각이 전소된 데 이어 이웃에 위치한 화계사 대웅전이 전소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계속하여 불교를 말살하려는 의도적인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정부의 불교편향정책과 이에 따른 훼불사건들은 위정자의 일신교적인 뱉타사상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며 여기에 반사작욕이 가세함으로써 기독교 광신자들의 사찰방화사건 같은 끔찍한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고 보여진다. 이 시기에는 "내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른 일반 상식을 뛰어넘어 정권의 수장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타종교를 박해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어 냈으며 또 한번 불교계는 관권으로부터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불교의 대중화>

1970년대 초반에 일반 불자들의 교육기관으로 대원불교교양대학이 첫 출범을 한 이후 '80년대에는 40여개의 불교교양대학으로 늘어났고, 96년말 현재로 보면 1백수십여개에 달하는 교양대학이 생겨 학인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들 불교교양대학은 교리와 의식은 물론 설법실수 범패 등 전문분야까지 교육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일반불자들의 불교이해수준은 전례없이 높아졌다고 하겠다.

1992년2월에는 불교진흥원이 불교문화센타를 개원하여 다도,꽃꽂이,건강강좌 등 40여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불교교리만 아니라, 생활강좌 등으로 그 폭을 넓히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교양대학 개설른 신행단체 등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90년대 들어서는 도심포교원인 강남포교원,은평포교원,능인선원,구룡사 등이 합세하여 불자교육의 상당부분을 떠맡게 된다. 이 시기에 "불교 장의는 불자의 손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광주의 능인상조회, 서울의 연화상조회 등이 뿌리를 내리고 불교문화센타에서는 염습을 포함한 장의 교육을 무료로 시작하게 된다. 불교계의 수련장은 주로 일반 사찰에서 이루어졌으나 80년대 초기 직지사 수련원이 개원을 한 이후 화성군 소재 신흥사 청소년수련원,불교진흥원이 설립한 괴산의 다보수련원 등이 명실상부한 불교수련도량으로 일익을 담당하기 시작한다.또 이 시기에는 송광사,해인사,통도사 등이 일반 불자들이 수련을 직접 유치하여 사찰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수행방법을 활용,적극적인 자세로 겨울과 여름 수련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한 사찰이 한 철에 5~6차례 수련대회를 개최하기도 하는 등 일반 불자들의 호응이 높았다.



<불교단체>

994년7월에는 한국불교재가연합회가 창립되어 개혁종단과는 수레의 양바퀴 같은 역할이 기대되기도 하였다. 한상범교수,안동일변호사,이문옥 전 감사관 등의 주도로 이루어진 재가연합은 종단이 중앙신도회를 조계종 예속단체로 별도 설립하겠다는 뜻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제시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초창기 창립의도와는 달리 독자성을 잃게 된다.

다음해인 1995년 1월에는 교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새로운 재가 신행단체인 한국불교재가회의가 공식출범한다. 서돈각 불교진흥원 이사장,이기영 한국불교연구원장,이윤근 금정학원 이사,김종서 한국교육개발원 이사,고은 시인 등 교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공동대표로 선임된 이 모임은 순수 재가 신행단체임을 표방하고 이 시대의 안일한 불교계를 대승적 현실참여의 불교로 이끌어 올리자는 취지하에 창립되었다. 재가회의 사업 중 특기할 만한 일은 경주고속전철 도심통과 반대운동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 운동은 전국민의 절대적인지지 속에서 고속전철 경주진입을 막아내는데 성공을 이루었다. 이보다 앞선 1993년 7월에는 실천불교승가회,경제정의 실천불교운동연합회,조국평화통일불교연합회 등 17개 단체가 연대하여 전국불교운동연합이 탄생된다. 전불련은 승가와 재가 및 시민운동단체를 포괄하고 불교 사회운동의 적극적인 활성화를 도모하면서 이 시대의 아픔인 인권 노동 통일 등 다방면의 시민운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 단체는 개혁종단의 출범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된다.이 시기에 소설 우담바라의 작가 남지심 씨와 서강대학 박광서 교수가 공동대표로 창립한 신행단체 우리는 선우가 신선한 신행운동을 표방,불교계에 뛰어 들었고 불자가수회,기사불자회,보이스카우트불자회 등 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사)한국불교법사회,교사불자회 등이 전국조직으로 발돋움을 시작한 것도 이 때를 전후한다.

이 시기에 사회를 향하여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불사가 있으니 이는 무소유의 상징 법정 스님이 제창하고 전 불교계가 호응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이라하겠다. 이 운동은 우리의 마음과 세상,자연을 본래 모습대로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자는 순수시민운동으로 연꽃스티커의 대량보급,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등의 확산을 통하여 97년말 현재3천여명의 회원이 이 일에 봉사하고 있다.

1996년 1월 불교진흥원과 청년회,우리는 선우,재가회의 등 7개 단체가 연대하여 시작한 깨끗한 마음 깨끗한 세상운동 또한 순수 사회정화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참신한 불사라 할 수 있다. 96,97 두해 동안,부산,광주 등 전국10여개 도시 순회강연회를 비롯한 기타의 행사는 많은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으며 이 운동의 실질적 대표인 청정운동연합회 서돈각총재은 이 불사를 계속 사업으로 할 것임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한편 1995년 개혁종단은 거국종단적으로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을 제창하고 각종 이벤트 등의 대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깨사운동본부는 2년 동안 8억여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구호사업에 1억원,단체운영지원 등에 3억5천만원,연구비,인건비 등 7천만원이 쓰여졌다.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조성된 기금과 쓰여진 사업비의 규모가 엄청난 것은 개혁종단의 새로운 의지를지지하는 불자들이 많았음을 반증했다고 볼 수 있다.또한 승풍진작을 기치로 내걸고 1990년 출범한 소장 및 중진 승려들의 승가결사단체인 실상사의 선우도량은 서둘지 않는 가운데 종단 내외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과 처방법을 연구,대안제시 등에 주력하고 있다. 선우도량은 그 동안 개혁종단에 대한 평가와 종단의 방향모색,현대문명의 흐름과 불가의 대응방안,승단질서의 축을 이루는 계율문제 등에 대하여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계율문제에 대하여는 현실에 맞는 새로운 청규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청규의 범위는 계율을 근간으로 하되 환경문제에 대한 실천규범,향락,소비문화에 대한 불교적 처방과 대책,소유에 대한 불교의 입장,남녀평등 관계 등 광범위한 부분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중론이다.

1992년 2월 조국평화통일추진불교인연합회(평불협)가 내외의 관심 속에 창립되어 초대 회장에 송월주 스님이 선임되었다. 평불협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대북 불교활동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취지와 불교적 통일이념의 발굴 및 보급,성지순례와 문화재교류 등 사업목표를 설정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보다 1년 앞서 북한을 수차례 방문한 바 있는 신법타스님의 중재로 남북의 불교계 대표들이 분단 47년만에 미국의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대좌를 하게 된다.1991년10월29일 남쪽의 대표로는 송월주,전운덕,서의현,도안 스님등이 동참하고 북측 대표로서는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장인 박태호선사와 조불련고문,황화두선사,심상연 조불련서기장,리동철 조불련 평양시지부장 등이 참석했다.

1996년5월에는 중국베이징에서 두 번째 남북한 불교계 대표들의 모임이 성사되었다.3년 반만에 송월주 스님과 박태호위원장이 다시 만난 것이다. 평불협은 설립 이후 북한과 관련한 각종 세미나와 공청회를 개최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이념 정립에 상당한 진전을 보였고 협회 회원간의 유대 강화를 위하여 정기간행물을 발간 보급하는가 하면 북한불교의 자료수집 등을 위하여 산하에 북한불교연구소를 설립,단행본 "북한의 사찰"을 발간하기도 했다.

1992년 신법타 스님이 검찰에 구속 기소되는 사건이 있었으나 재판결과 무죄가 확정되는 넌센스가 있기도 했다.

김영삼정부 출범을 전후한 이 시기에 남북문제는 정책의 일관성 상실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범하게 되었으나 불교계는 평불협이라는 하나의 기구를 통하여 의연한 대응을 해왔다고 보여진다.

1996년말 북한 기근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범종교계의 합의가 있은 후 불교계는 북한 쌀 보내기운동본부를 설립,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이 운동은 법륜스님의 원력이 큰 힘으로 작용했음이 사실이다.



<해외포교>

한국불교의 해외포교는 1996년 재일본 홍법원의 설립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적지 않은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나 조직적인 면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스님이나,법사,개인이 현지와 인연이 되어 자신의 안목과 역량에 따라 포교당을 세우고 포교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 할 수 있다. 물론 독자적인 개척이므로 어려움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러한 노력들이 쌓여 이제는 세계각국 곳곳에 한국사찰이 세워졌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부처님 성지인 인도에 까지 그 힘이 미치고 있다. 네팔 품비니 국제사원지역에 대성석가사(도문스님),사르나트의 녹야원(도웅스님),부다가야의 고려사(월우스님),쿠시나가라의 대한사(성관스님) 등이 이미 세워졌거나 한창 공정 중에 있다.또한 영국,독일, 등 서유렵 일대는 불교계가 꾸준히 늘어 1천여개의 불교단체와 3백만명을 육박하는 불교신도가 있다는 것이 현지소식이다. 기존의 미주지역 불교계 또한 양적인 성장을거듭하고 있으며 최근의 특기할 사항은 미주한국불교방송(담오스님)과 한미불교방송이 전파를 통한 포교활동에 들어갔고,캐나다 토론토에서도 불교방송이 전파를 발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밖에 중국,러시아 등 폐쇄 사회주의국가에도 적지 않은 한국사찰이 건립되어 교류가 진행되고 있다. 천태종,진각종,한마음선원의 중국 등 해외포교 진출 또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독도영유권 문제,정신대할머니들에 대한 보상문제 등으로 계속 갈등을 빚고 있는 한,일관계에 대하여 불교계는 재일본 고려사와 연계하여 한일과거청산범국민운동본부(태연스님)를 발족, 각종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정부와 일본에 공식입장을 표명하는 등 현실문제에 직접 나서고 있다. 기존의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홍파스님) 또한 1981년 이후 한,일 공동관심사에 대한 학술발표회 등을 통하여 양국의 이해도를 높여 가고 있다.



<세계학술교류>

1995년 5월 창립된 삼국불교우호교류회의도 한,중,일 동양 삼국의 상호 이해와 우호 증진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국제기구로 가장 잘 알려진 세계불교우의회(W,F,B) 한국본부는 1989년5월 서울에서 제17차 대회를 마친 후 이렇다 할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해외포교 역사는 숭산스님이 1996년 도쿄에 재일본 홍법원을 설립하면서 부터이다. 숭산스님은 지금까지 세계32개국 112곳에 선원을 개설하고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국불교를 전파했다. 스님으로 부처 인가를 받은 외국인 납자,법사가 1천명에 이르고 세계 도처에 5만여 불자가 한국식 참선 수행을 하고 있다. 1996년6월 숭산스님의 해외포교30년을 결산하는 기념대법회가 성황을 이룬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지금도 화계사 내에 위치한 국제선원에는 벽안의 납자들이 '이 뭣꼬'의 화두를 틀고 면벽에 열중하고 있다. 이 시기에 한국불교학계는 큰별 불연 이기영박사를 잃게 된다.1996년11월9일 오전 이기영 박사는 불교진흥원이 주최하고 자신이 주관하는 국제학술세미나장에서 기조연설을 마친 후 선사의 좌탈입망같이 홀연히 떠났다. 그는 불교에 미치고 원효에 미친 분이었다. 누가 뭐라해도 이 시대 이 땅의 불교학연구에 새 지평을 개척한 분이다. 문헌학 위주의 불교학에 역사적 방법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해박한 산스크리트어,프랑스어,일어,영어,한문 실력은 사상 정립에 밑거름이 되었고 비교종교라는 관점에서 동서양을 넘나든 학문적 혜안의 경지는 이 땅에 우뚝했다. 그는 원효의 귀일심원,요익중생그리고 화쟁의 화두를 들고 한평생을 미친 듯이 살았다. 학자로서 학문에 우뚝했고,불교대중화운동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 신행단체 구도회와 원효학당에 신명을 바쳤으며 말년에는 재가불자회의 공동대표로서 누구를 이끌고 경주고속전철 도심통과반대를 외치며 이의 관철을 주도하기도 한다. 불연 이기영박사의 타계는 불교계의 크나큰 손실이었으나 후학들에게는 그들의 안일함을 꾸짖는 더없는 경종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3년10월에는 해인사에서 주최한 국제학술회의장에서 한국의 서여 민영규박사와 전 일본 교토대학교수 야나기타 세이잔 박사가 만났다. 한,일 두 원로 라이벌은 각자의 스승들에 의해 반세기 전에 촉발했던 논쟁 '초기 선종사의 계보'문제로 다시 부딪쳤다. 중국의 호적과 일본의 스즈끼 다이세쓰 사이에 벌어진 국제적학술논쟁이 재연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에서도 서로의 입장이 차이를 좁힐 수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시기에는 학술분야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보존과 전산화를 위한 장경연구소의 설립, 지관스님의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의 설립은 특기할 사항이다.

1993년3월 제1회 입학식을 가진 진각종의 위덕대학개교는 불교계의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위덕대학은 불교학과를 신설함으로써 능력있는 불교계 소장학자를 활용한다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지난 64년부터 팔만대장경 역경사업을 추진해 온 동국역경원은 한동안의 부진을 씻고 1994년 정부의 지원재개를 계기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국고지원12억원과 자체조달14억원 합계26억의 예산으로 4년간에 걸쳐 매년26권씩 114권을 간행 총250권의 국역 팔만대장경을 마무리 짓게 된 것이다.93년말 역경원 제4대 원장으로 월운스님은 재임 중에 이 모든 불사를 회향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바있어 기대되는 바가 크다할 것이다.



<출판/문화사업>

1990년대의 불교출판계는 역경원의 역경사업 활성화와 함께 다방면에서 발전을 이룬 시기라 할 수 있다. 불교방송 인기프로인 고승열전시리즈10권 완간,불교진흥원 발행의 통일불교성전,청소년불교성전,설법자료집 그리고 해방후 처음으로 펴내진 한국불교총람,학술정보지 계단 다보 등은 특기할 사실이다. 불교학술 전문출판사로 이미지를 구축해 온 민족사는 깨달음 돈오점수인가,돈오돈수인가를 펴냄으로 불서 단행본 1백권 출간을 기록하기도 했다. 송광사 학인스님들과 보조사상연구원을 중심으로 펴낸 아함경,법구경,해인사 무비스님과 김무두씨가 펴낸 화엄경 그리고 성보문화재연구원이 펴내기 시작한 화보집 한국의 불화,미술사학회 최완수씨가 펴낸 명찰순례,김호성끼의 천수경이야기,일타스님의 백일법문집 등은 큰 수확이라 여겨진다. 이 시기에 현대불교가 주간지로 창간되었고 국내유일의 어린이 월간지인 동쪽나가가 폐간을 맞는다. 어린이 포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사비를 바쳐 가며 애써 온 발행인 김형균 불지사 실장은 수억원을 빚진채 두손을 들고 말았다. 96년 폐간을 전후하여 이를 살리고자 하는 그의 몸부림은 주위불자들의 눈시울을 달구기도 했으나 끝내 불교계는 어린이 유일의 포교지인 동쪽나라의 폐간을 외면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소설에세이로는 석용산스님의 '여보게 저승갈 때 월 가지고 가지. 법정스님의 ' 버리고 떠나기,최인호씨의 '길없는 길. 고은씨의 '화엄경,남지심씨의 '우담바라'등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번역서인 환생,전생요법 등 윤회사상과 밀접한 책들이 일반인의 호응을 얻어냈다. 1994년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번역하고 사회과학출판사가 간행한 팔만대장경해제(전15권)가 중국을 거쳐 국내에 시판된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1995년 불교방송국이 주최하고 삼성문화재단이 후원한 세계불교문화대전이 9개월 동안 용인자연농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받기도 했다.이 전시회에는 동남아 각국의 국보급 불교유물이 전시되었을 뿐 아니라 72년 인도정부에 의해 공식 발견되고 공표된 바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국내 첫 공개되는 계기가 되었다.96년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신라승 김교각 스님의 유품전시회도 주목을 끈 행사였다.

1991년 경주군 소재 기림사 문화재전시관의 개관을 전후하여 양산통도사,밀양표충사,보은법주사,김천직지사,영주부석사 등의 성보전시관이 문을 열었으며 개인 박찬수씨가 여주에 목아박물관을 건립 일반에 공개한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96년 충북진천에 건립된 보탑사(지광스님)는 1천년만에 재현한 목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화재전문위원인 신영훈씨가 5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우리의 것을 되살린 것이다.

1995년말 세계적인 작곡자 윤이상씨가 독일의 베를린자택에서 별세했다. 생전에는 알지 못하던 그이 불교적 삶이 재조명되나 불교계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49재등 추모의식을 주도했다.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 쾌거로는 세계문화유산위원회가 종표를 포함하여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팔만대장경판 및 판고를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공식 등록한 것이라 하겠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날로 훼손되고 사라져가는 문화 자연유산 등을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설립한 국제기구로서 등록유산에는 많은 혜택이 주어지게 된다. 영구보존을 위한 전문가의 기술지원과 상당하는 재정지원이 뒤따른다. 이웃의 중국,일본 등에 비하면 늦은 감이 있으나 불교계는 이를 계기로 용의 주도한 문화외교와 유적보존차원의 자체정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같은 시기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조 16국사 영정(국보56호)도난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불교계 문화유산이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음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나,어찌하여 이런 불상사가 있을 수 있는가 아연해 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환경적인 문제>

한편 골프장,대형아파트군,위락시설 등이 천년고찰 경내까지 진출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불교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라 하겠다. 물론 불교계가 이들 이권단체들과 맞서 힘든 투쟁을 벌이고는 있으나 정작 이를 보호해야 할 관권은 뒷짐을 지고 방관하느 태로를 일관함으로써 불교계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해인사 경내지의 골프장 건설,범어사 입구의 고층아파트 건설, 봉은사 옆 터의 초고층빌딩건설 등의 위협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예술/사회복지 문제>

불교연극,불교음악계는 꾸준한 발전을 보여왔다. 민예극단,극단둥지,온누리극단,어울림극단,치악무대 등이 공연을 이어가는가 하면 음악은 불교방송합창단을 필두로 박범훈,정옥녀,연정숙,김성국 씨 등의 리더가 각급단체의 합창단을 맡아 수시 발표회를 개최하고 있다.또한 봉원사에서는 옛소리를 살리자는 취지아래 영산재 등을 재현,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90년대 들어서 불교계의 복지 부분이 특별히 눈에 띄게 신장세를 이룬다. 양양에 건립된 사회복지업인 보리수마을은 360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유로양로원으로 입주가 시작되었다. 가평의 성라실버타운(법성스님)또한 100가구의 입주가 시작된다. 능인종합사회복지관(지광스님) 또한 청소년,노인 장애자들을 위한 메머드회관이 준공되고 봉사활동에 들어갔다. 도선사가 20년간 운영해 오던 시흥의 혜명양로원과 보육원도 면모를 일신하고 청담종합사회복지관으로 규모도 커졌다. 서울 길음동의 길음복지관,예천 연꽃마을이 건립한 희망의 집, 통도사 자비원,목동 청소년회관,양천구민체육회관,삼전종합복지관,합동마을복지관 등 가히 종합복지관 러시를 이룬다. 불교계는 이들 종합복지관 외에도 소규모의 단위 고아원,양로원,수화,점자교실,요양원이 늘어나게 되었고, 자비의 전화 등 상담기관,봉사단체가 급격한 증가추세를 이루었다. 종단의 원로 석주스님이 평생의 원력을 모아 온양에 양로원 불사를 시작한 것도 기억할 일이다.청주,성남 등 7개처의 무료불교병원을 개설하고 용인의 연꽃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각현 스님의 봉사활동 또한 주목할 대상이다.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강제징집되어 고통받던 정신대할머니들의 안식처이인 나눔의 집 개관 또한 역사의 아픔을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받아들인 불교계의 큰 보람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이 시기에 원주 소쩍새마을 원장의 원생 성추행사건이 돌발하여 교계의 뜻있는 이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소쩍새마을을 중앙승가대학이 인수 운영함으로써 실추된 위상을 회복한다.



<납골당/생명문제>

한편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묘지난 해소문제를 둘러싸고 교계는 화장장려,납골제도 활성화방안 등에 대한 대안제시를 위하여, 십수차례의 공청회와 세미나 등을 개최하였고, 음성,군포 등지에 납골시설이 자리잡는다. 불교교리상 주검이 헌옷을 벗는 것이라 한다면 매장고수와 호화장례 호화분묘를 구태여 고집할 이유가 없으며 기왕 놓고 갈 육신 깨끗이 화장하여 작은 공간에 안치하자는 일련의 운동은 많은 불자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납골시설의 확대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 육신을 살아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뜻에서 각막 및 장기기증본부가 설립된다.이어서 생명공양실천본부가 활동에 들어간다. 감로심장재단의 출범도 이런 맥락에서 이어졌다고 보여진다. 이 시기 보육사교육,간병인교육 등 각종 단위교육과 실제적인 봉사활동이 크게 일어났으며,재소자를 위한 연합기구가 발족되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보호와 복지 등을 위한 외국인 노동자마을의 활동도 돋보였던 시기가. 복지분야에 좀처럼 눈을 돌리지 않던 불교계가 이처럼 능동적으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사회참여를 시작하게 괸 것은 90년대 일반 시민단체와 타 종교단체 등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바도 적지 않겠으나 그보다도 불교인들 스스로 불교의 이상인 차방정토사상 즉 예토인 이 땅을 바로 불국정토화 해야겠다는 의지들이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풀이된다.

<추록>

이상 개괄적으로 1989년부터 1997년 말까지의 불교계 흐름을 약술해 보았거니와 불교계 전반이 이 시기에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도약을 이루지는 못했다 할 지라도 뜻있는 이들의 원력과 신심에 의하여 불교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큰 흐름을 보였다고 하겠다.

개혁종단의 출범이 그러하고 순수신행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난 것 또한 긍정적이라 하겠다.

조선조의 지독한 배불의 시대와 일제치하에서의 민족정기말살이라는 암울한시대를 지나 갑자기 맞이하게 된 광복,그리고 이와 함께 몰아닥친 외래사조에 불교계는 그 대응력을 잃고 표류한 것은 사실이다. 그라나 광복50년을 전후하여 이 땅의 불가는 한가지 한가지씩 제몫을 챙기는 일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정화의 회오리도 지났고,법란의 상처도 그런대로 잊을 만한 시간이 지났다. 승단은 선우도량이 지적하는 바 그대로 새로운 청규를 이 시대에 맞도록 정비 개선해 나가고, 재가는 자발적인 신행과 봉사활동을 통하여 승단을 외호함으로써 승단과 재가가 새의 양날개처럼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해 나갈 때 이 땅의 불가는 찬란했던 옛 모습을 다시 회복하리라 본다.(자료:한국불교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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