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주 매일경제신문사 논설위원
부부싸움을 심하게 했다든지, 아이가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았다든지, 아파트 분양 추첨에서 서른 번째 떨어졌다든지 등등 일상생활에서 주부를 화나게 할 만한 일은 참으로 많다. 거의 폭발할 지경으로 화가 난 주부가 늘 곁에 두고 지내는 밥솥을 집어던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연히 박살이 날 것이다. 격한 감정에 힘껏 집어던지는데 밥솥이 부서지지 않는다면 그게 비정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쿠쿠홈시스라는 전기밥솥 제조업체는 시중에 신제품을 내놓을 때 그런 상황까지 가상을 해서 테스트를 한다. 웃기려고 하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회사에서는 별로 웃기는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정을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생각하며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한다는 것이 이 회사의 원칙이다. 그럴싸하게 꾸며대는 말이 아니다.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한 고객이 밥솥을 챙겨갔다가 전원장치가 망가져 사흘을 라면으로 때웠다. 아쉬운 마음에 혹시나 하고 쿠쿠홈시스 홈페이지에 난감한 사연을 올렸더니 5시간만에 회신 메일이 왔다. 다음날 현지 딜러를 통해 연락하겠다는 내용이었고 뜻밖의 서비스에 이 고객은 감동을 했다. 쿠쿠홈시스는 현재 밥솥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 LG 같은 대기업들조차 경쟁이 어렵다며 손 털고 나간 자리에 몇몇 중견기업들이 새로 시장에 참여한 상황이다.
기업의 DNA는 공짜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다 까사미아라는 가구업체가 있다. 매년 두 자릿수의 영업이익률을 올리는 회사다. 가구 업종에서는 ‘어닝 서프라이즈(earning surprise)’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구 같은 전통 업종은 시장 전체 규모로 보면 성장이 한계에 부닥친 지 오래다. 외형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익을 내기가 어려운 구조 때문이다. 경쟁 업체도 많거니와 품질 면에서도 더 이상 차별화하기가 힘들다는 게 관련 업체의 설명이다. 국내 경쟁이 너무 치열할 뿐 아니라 외부 환경도 암담하다. 디자인에서는 아직 유럽의 명성을 따라잡기 힘겹고 가격으로는 중국의 공세를 견디기 어렵다. 넛크래커(호두 까는 기계)에 끼여 있는 호두알 신세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업종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도 두 자릿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는 까사미아는 대체 무슨 재주를 가진 것일까? 연령별로 고객을 세분화해 제품 디자인을 입맛에 맞게 만들어내는 차별화 전략이 주효했다고 대답한다면 80점 이상을 주기 어렵다. 진짜 해답은 바로 물류시스템에 있었다. 10년 전부터 POS(판매시점관리시스템)나 ERP(전사적 자원관리프로그램) 같은 첨단시스템을 갖추고 과학적인 생산,제고관리를 해왔다. 까사미아는 ‘가구는 제조가 아니라 유통’이라는 신 개념을 창조해낸 것이다.
쿠쿠홈시스나 까사미아 같은 회사를 보면 ‘중소기업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비단 중소기업에만 국한되는 것는 아니지만 ‘남들과 다른 DNA, 그리고 과거와 다른 DNA’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기업의 DNA는 인간의 유전자와 달리 공짜로 물려받는 게 아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창조해내야 하는 후천적인 유전자인 셈이다. DNA가 다른 중소기업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눈, 미래의 냄새를 기막히게 잘 맡는 코, 끊임없이 생각하는 뇌세포, 팔다리가 열 개쯤 달린 듯한 열정적인 근육, 그리고 끈덕진 승부사 기질을 가진 혈액형 등이다. 이들은 ‘내가 무엇을 잘 하는가’와 ‘남들은 무엇을 못 하는가’를 항상 고민하고 보편화된 현상들도 뒤집어 보는 것을 즐긴다.
고정관념을 깨고 거꾸로 생각하기의 달인이 되라 헤어드라이어 하나로 세계시장을 누비는 유닉스전자는 남들이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했다. 1978년 회사 설립 때부터 헤어드라이어는 국내에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던 틈새시장이었다. 대기업과 경쟁하는 품목으로는 승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요즘 유행어로 소위 ‘블루오션(Blue Ocean)’을 개척한 것이다. 헤어드라이어가 일상화되면서 경쟁 업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자 이 회사는 또 다시 음이온 헤어드라이어를 개발해냈다. 드라이어는 그저 바람을 만들어 머리를 말려 주는 기계라는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드라이어에서 나오는 바람과 전자파가 머리카락에 이로울 리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차이점이라면 남들이 ‘원래 그러려니’라고 생각할 때 유닉스전자는 ‘왜 그래야 하나’를 반문했다. 이 회사는 음이온 드라이어 외에도 고데기, 헤어롤 등 미용 가전제품 히트작을 만드는 데 석,박사급 인력을 대거 투입하고 있다. 장난감 만드는 회사로 코스닥 상장에 성공한 손오공도 ‘거꾸로 생각하기’의 달인이다. 완구 업체들은 어린이에게 인기 있는 만화영화(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이나 로봇, 무기 등을 장난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보통이다. 만화가 인기를 끌면 완구도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손오공이라는 회사는 완구를 먼저 만들고 이것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탑블레이드’ 팽이가 1,500만 개 판매라는 신기록을 세운 것도 바로 이러한 전략 덕택이다. 탑블레이드는 줄을 감아 던지는 구식 팽이놀이를 좀더 쉽고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고안해낸 제품이다. 팽이를 총 모양의 발사장치에 걸어 돌리는 제품 개발에만 6개월여가 소요되었고 시판에 맞춰서는 팽이를 소재로 한 TV용 애니메이션도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팔면서 팽이제품도 히트를 치는 꿩 먹고 알 먹기 식 전략이었다.
엄살 DNA를 가진 중소기업의 설 자리는 없다 성공한 중소기업들의 DNA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어떤 기업이든 예외 없이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환경을 탓하거나 공짜 지원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지속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잘못된 원인을 자꾸 외부로 돌리는 습관을 빼놓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의 중소기업들 중에는 엄살꾼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다. 중소기업을 경영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부가 지원을 안 해줘서, 은행이 돈을 안 빌려 줘서, 쓸만한 인력이 들어오지 않아서, 대기업이 횡포를 부려서 등등 수많은 이유 때문에 중소기업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르고 시작한 중소기업인은 없다. 성공한 중소기업인들은 남을 바꾸려 하기보다 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남의 탓을 하기는 쉬워도 남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성공하려면 대기업의 축소판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재벌기업들이 성장해 온 방식을 답습하겠다는 생각으로는 생존을 기대하기 어렵다. 자원의 선택적 집중을 기반으로 성장한 과거 재벌기업들의 전례를 보고 지금의 중소기업들도 그런 혜택을 기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정부가 아무리 많은 지원 정책을 내놓더라도 그런 엄살 DNA를 가진 중소기업에게 돌아갈 몫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