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심리
아래 글은 오사카무역관에서 일본기업가에게 의뢰해 받은 글로, 일본의 선물문화에 대해 잘 알 수 있으며, 일본인이 브랜드품을 좋아하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설명한 글이다. 일본인의 문화, 심리를 이해하면, 일본시장 진출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편집자주)
일본의 선물문화와 습관
일본에는 오랜 옛날부터 타인에게 무상으로 금전과 물건을 주는 습관이 있어서, 여행을 다녀오거나 타인을 방문할 때 토산물을 지참하는 것이 예의에 맞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밖에도 축하할 일이나, 감사의 표시로 상황에 따라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습관이 있었다. 바로 이런 선물습관이 서민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일본인의 브랜드 지향성을 사회전체에 정착시킨 것은 아닌가 싶다. 특히, 추석 전이나 연말 즈음해 선물을 주고받는 오츄겐(お中元)과 오세이보(お歲暮) 등의 습관은 전후(戰後) 도시생활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활발해져, 츄겐상전(中元商戰)이나 세이보상전(歲暮商戰) 등 백화점, 슈퍼의 가장 중요한 영업 전략의 하나가 됐다.
또한, 이런 상전(商戰)의 현장은 브랜드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여러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김, 차, 양말, 타올, 손수건, 햄, 일본 과자, 침구, 주류 등 보내는 상대방과의 관련성, 가계의 형편 등 여러 가지를 감안해 일본인들은 선물을 고르는 데에도 지혜를 짜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60년 이전까지해도, 일본사회에는 감사, 애정 등의 표시로 일시적으로 주는 선물이외에도 연말, 춘분, 추분, 절구(節句/ 3월 3일, 5월 5일의 명절을 가르킴), 기타 명절 등 통과의례로써 매년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증답(贈答), 가정내의 길조와 흉사, 즉, 출산, 결혼, 신축, 이사, 여행, 병, 화재 등이 있을 때의 증답(贈答) 및 그 보답과 오스소와케(얻은 물건을 타인에게 나누어줌) 등 습관화된 증답(贈答)의 기회가 극히 많았다.
<히간(彼岸)의 보타모찌> |
<히나마츠리 남녀 인형> |
정기적인 증답에는 세이보(歲暮)의 新??(아라마키자케/연어를 종이로 싼 것), 히간(彼岸/ 춘분, 추분)의 보타모찌(牡丹餠/ 떡종류), 추석의 소면(素麵), 히나마츠리(3월 3일, 소녀의 명절로 남녀인형을 갖고 노는 명절)의 히시모찌(麥餠), 단고(端午)의 치마키(?) 등이 있으며, 각각의 명절에 맞춰서 증답하는 물품이 정해져 있다. 가정내의 각종 길조, 흉사에 대한 증답은 금전으로 행해질 때가 많았지만, 출산시의 산부복, 결혼 축하용 띠와 게타(나막신), 입학 축하용 구두와 학용품, 환갑 축하용 붉은 모자와 소매 없는 옷 등 그때그때 축복을 표시하는 물건이 따로 있다.
<단고(端午)의 치마키> |
선물은 사회관계의 강화와 일체감을 창출하는 기능이 있으며, “언외(言外)의 말”을 잘하는 일본인에게 고유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연출하는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사회가 성숙해 상품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증답품에 언외(言外)의 가치를 넣어, 상대방에게 선물의 가치를 전달하는 도구로서 사회적으로 가치가 인정된 브랜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증답 이외에 개인적으로 구입하는 고급브랜드품 등도 타인에게 그 가치를 알려, 우월감과 일체감을 맛본다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 일본인 사회에서 성행하게 됐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본상품 고품격화의 역사
귀족과 영주사이에서의 증답품으로는, 일반적인 물품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고, 고도의 기술을 구사하거나, 고가의 재료를 사용한 제품, 진기해 좀처럼 입수하기 어려운 제품 등이 인기였다.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5세기)에는 유직고실(有職故實/ 조정과 귀족의 예식, 연중행사, 법령 등의 先例, 典故)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 종가(宗家)집이 의류, 염색물, 요리, 과자 등의 고귀한 제품을 만들어 궁중과 귀족들에게 애용됐다. 이런 상품은 현재까지도 고가 증답품으로써 계속 애용되고 있다. 이런 브랜드 노포(老鋪/대대로 물려오는 점포)의 예는 세계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아즈치 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 16세기)에 들어서자, 무가와 상인이 그 풍습을 이어받아, 특히 차도(茶道)의 유의(流儀/ 예술, 기술 등에서 그 사람 또는 유파에 전해지는 방식, 양식)가 확립되자, 차기(茶器)와 주변 도구, 차를 마시기 전후의 요리와 과자류 등 세세한 배려와 호화스러움은 일본인을 브랜드지향 민족으로 서서히 육성해왔다. 또한, 직공들도 경쟁적으로 실력을 쌓아 품질을 높이고, 보다 고가로 구입해주는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에도시대(江戶時代, 17세기)에 들어서서, 전국의 제번(諸藩, 모든 영주들)은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을 표시하기 위해, 번주(藩主, 영주)의 처자식을 에도(도쿄)에서 살게 하고, 번주는 1년 또는 반년 주기로 에도(도쿄)와 지방을 왕래했다. 이것을 참근교대(參勤交代)라고 부르는데, 대도시인 에도의 문화, 문물이 지방에 전래되고, 교통이 발달하게 되며, 각지의 명물, 특산품이 에도로 들어오는 계기가 됐다. 도쿠가와 가문에의 헌상품과 타번(他藩)에의 진물(進物)로써, 각지에서 생산된 브랜드품은 서로 경쟁하게 됐다.
쇄국의 에도시대였지만,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돼, 공을 세우기 어려운 무사들보다도, 상인과 서민들의 소비생활이 활발해져, 에도에는 현재의 백화점의 원형인 에치고야(越後屋, 현재의 미츠코시), 교토에는 타카시마야(高島屋), 나고야에 이토야(伊東屋, 현재의 마츠자카야) 등이 쿠레하토리(吳服, 견직물)와 잡화, 화장품 등을 취급하는 브랜드점으로 출현했다. 게다가 난바(難波)에는 콘부(昆布/다시마), 교토에는 직물과 와가시(和菓子, 일본전통과자), 카나자와에는 라쿠간(落雁, 찹쌀가루와 설탕으로 만든 과자), 토야마(富山)에는 일본 한약, 후쿠이(福井)에는 견직물, 사가(佐賀)에는 도자기, 코우치(高知)에는 가츠오부시(가다랭이포, 우동국물 만드는 주요 재료), 쵸시(?子)에는 간장, 센다이에는 어묵 등 각지에 차, 과일, 완구와 인형, 목공세공품 등의 명산품이 출현하게 됐다. 섬세한 맛의 조제(調製), 절묘한 수작업 기술 등을 연마해 고객의 신뢰를 얻는 브랜드품을 확립해 나간 것이다.
또한, 에도시대에는 상인과 서민들이 선망하는 여행이 각종 코우(講, 신사나 불각에 참배나 기부를 하는 신자들의 단체)를 통해 실현가능한 시대가 됐다. 거래처나 마을의 동료들이 코우(講)를 조직하고, 매월 얼마간의 금전을 모아, 교대로 당첨된 몇 명이 참배를 위한 여행에 나서는 구조이다. 전국각지의 이세(伊勢), 젠코지(善光寺), 닛코(日光), 이즈모(出雲), 나리타(成田), 미야지마(宮島) 등 유명한 신사와 불각(佛閣)을 수십 일에 걸쳐 왕래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후에는 숙박지와 시장에서 코우(講) 동료들을 위한 토산품을 구입한다. 각지의 브랜드품과 사찰 이름이 들어간 토산품은 다음에 여행을 가는 사람들의 꿈을 부풀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에도시대의 평화와 번영이 일본문화의 정밀한 완벽함을 낳게한 배경이었다. 직물, 염색, 공예, 식품, 완구 등 어떤 분야에서도 뛰어난 직공의 기술이 전해져, 더욱 세련돼지고, 현대 일본인의 상품에 대한 선별(選別)의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 일본인의 선별의식을 한눈에 엿보려면,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을 방문해보면 좋을 것이다. 상품진열대에는 각종 야채가 길이, 두께, 형태, 빛깔 등 완벽한 상품으로 정연히 진열돼 있고, 용기에 잘 포장된 보석과 같은 앵두와 딸기 등이 넋을 잃을 정도의 미관(美觀)을 자랑한다.
해외브랜드품의 역사
해외에서의 명품, 진품은 오래전 나라시대(奈良時代, 7세기)에 실크로드, 또는 당나라 고대조선 등에서의 전래품이 나라(奈良)의 쇼소우인(正倉院)에 국보로 보존된 것이 최초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황실의 보관품으로 브랜드품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후 이들 국보가 매년 일반에 공개 전시될 기회가 늘어나, 고전 명품과 접하면서 미술공예품에 눈을 뜨는 일반서민의 수도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또한, 아즈치시대(安土時代, 16세기)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기독교의 포교를 용인한 것으로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 신부와 수도사들은 포도주와 다이아몬드, 과자와 향료, 의복 등을 선물로 헌상했다. 이들 헌상품은 영주들과 상류계급층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 무렵에 제법(製法)을 전수받은 카스테라는 나가사키(長崎)의 고급 브랜드품으로 현재도 증답품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경로로 전래된 콘페토우(金平糖) 등은 일본 각지의 숨은 명품이 돼, 일본 고유의 상품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亦臣秀吉)와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에 의해, 기독교는 금지됐고, 외국인은 국외로 추방 또는 처형됐지만, 네덜란드만은 통상(通商)의 목적에 한해, 나가사키 데지마(出島) 출입이 허용됐다. 데지마(出島)를 통한 무역으로 서양의 무기, 동남아시아로부터의 원사, 약 등이 많이 수입됐고, 일본에서는 은과 동, 도자기 등이 수출됐다. 기술서와 그림 등의 문화자산도 수입됐지만, 브랜드를 구축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동란을 거쳐, 명치유신(1868년)을 맞이하면서, 개국의 기운이 퍼져, 유신정부의 고위고관들이 의식주를 서양식으로 전환하고, 해외의 스타일을 도입했다. 또한, 전부터 문호가 개방됐던 나가사키에서 외국인 주문을 받아 양복과 구두를 만들던 직공들은 일본 국내 각지에 점포를 냈다. 에도시대에 은화(銀貨) 주조소(鑄造所)로써 번영했던 긴자(銀座)는 메이지(明治) 5년의 대화재 이후, 일본 최초의 서양식 벽돌거리로 다시 태어났으며, 철도와 마차가 달리고, 버들나무 가로수로 정비된 문명개화의 번화가가 됐다. 관동대지진으로 이마저도 소실됐지만, 다시 부흥해 유명브랜드 점포들이 들어서고, 많은 백화점이 진출해 일본을 대표하는 “브랜드 거리, 긴자”가 탄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부유층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 샐러리맨과 OL, 학생들이 산책하면서 윈도 쇼핑을 하고, 음식을 즐기는 장소가 됐다. 이리해 전국 도시지역에는 “000긴자”라는 명칭의 상점가가 많이 생겨났다.
긴자에는 시계, 보석, 구두, 양복, 레스토랑, 과자, 빵, 과일 등 서양제품의 고급상점이 일본식 의상, 향료, 잡화, 스시, 덴푸라 등의 일본풍 노포(老鋪)와 함께 출현해, 타지방에 비해 고품질이면서 가격이 비싼 상품이 브랜드품으로써 인기를 누렸다.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객들도 음식과 쇼핑을 긴자에서 이용하면서 매우 우쭐해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전쟁의 폐허속에서 긴자는 가장 빨리 부흥해 희망이 넘치는 거리로서, 당시 빈곤했던 일본인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 또한, 고도 경제성장에 동반해 긴자와 그 주변에는 고급 클럽과 바 등이 속출해, 갑부와 회사원이 떨구고 간 거액의 교제비 덕분에 호스티스와 클럽 마마가 화려한 브랜드품을 몸에 치장한 것이 현재 해외 고급브랜드 유행의 전조가 됐다.
1970년대 후반, 일본 경제성장이 본격화되면서, 브랜드 거리가 긴자에서 히비야(日比谷), 하라주쿠(原宿), 신주쿠(新宿) 등으로 이동하기 시작해 1980년 후반이 되면서 긴자는 지금까지의 영화가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긴자 부활의 징조가 보이고 있으며, 새로운 브랜드 노포(老鋪)가 출점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최근 브랜드상품의 동향
브랜드 거리가 긴자에서 주위로 이동할 무렵부터, 일본 선물시장에는 구미의 라이센스 생산품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엔저로 인해 서민들에게 미치지 못하던 수입상품이 라이센스로 국산화됨에 따라, 서민들이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 됐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자택을 방문했던 어떤 외국인은 “어느 집을 가도, 현관에 피에르 가르뎅, 화장실에 웅가로 슬리퍼, 피에르 발만 타올, 침구는 지방씨여서 질려버렸다”고 말했다고 한다(출처 : 코구레 오사무, “일본통”- 모리文庫).
엔고가 진행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성행해 의식주 모든 장소에 얼마전까지는 바라보기만 했던 브랜드상품을 쉽게 구입해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전후 한동안 조니워커의 블랙 라벨과 올드 파 등은 서민에게 있어 매우 고가의 상품으로 교제비가 많은 임원이나 고도성장기의 갑부 등 부유한 계층이 마시는 귀중한 양주였다. 1990년 이후에는 관세의 철폐요인도 겹쳐, 일본산 위스키와 비슷한 가격대까지 떨어졌고, 지금까지 우러러봤던 양주가 맛까지 없어진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이다.
현재, 나가노현 지사로서 독특한 정치를 해, 호평을 얻고 있는 타나카 야스오씨의 저서로 1990년에 아쿠다가와상 후보까지 올랐던 소설 “난또나쿠 크리스털(어쩐지, 크리스털)” 등에 나오는 젊은이의 시대감각에서부터 브랜드에 대한 의식이 변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은 유복한 학생생활을 보내던 젊은이의 당시 풍속이 주제가 돼, 식품, 지명, 패션, 점포명, 학교, 음악 등 여러가지 고유명사가 등장한다. 각각의 명사에 “이케테루(잘나가는, 멋진)”, “이케테나이(유행에서 떨어진)”라는 브랜드 가치가 붙여지고, “이케테루” 브랜드로 치장한 사람이 “이케테루” 인간으로 표현돼, 젊은이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무렵부터 일본인은 소자화 사회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어린이들은 유복한 학생생활을 보냈고, 취직을 해도 부모와 동거하거나, 부모에 얹혀 사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또한, 결혼과 동거를 해도 아이를 갖지 않고, 맞벌이를 하면서 해외 리조트에서 유아하게 자신들만의 생활을 즐기는 커플도 증가했다. 결혼을 하지 않는 남녀도 매년 증가추세로, 결혼 연령도 고령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해 고령자를 모시는 것이 가족의 책임이었고, 서로 돕던 종래의 사회는 퇴색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의 자기중심적 생활이 “타인과 동일하거나, 보다 뛰어난 브랜드 제품을 소유하고 싶다”는 심리에 박차를 가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브랜드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심리
브랜드는 일본과자 등의 “전통 브랜드”, 식품과 세재 등의 “양산 브랜드”, 전기제품과 재벌계의 “기업 브랜드”, 고가 가방 등의 “지가(知價) 브랜드” 4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출처 : 사카이야 타이치, “브랜드 대번성”- NTT출판). 이중에서 지가(知價) 브랜드를 좋아하는 일본 여성의 특이한 심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루이비통은 세계 매출의 3분의 1을 일본에서 내고 있으며, 2,500만개의 루이비통 가방이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은 일본 여성의 어떤 심리상태에서 기인한 것일까? “브랜드 대번성”이란 책자를 발간한 사카이야씨의 조사에 의하면, 루이비통의 이미지에 대해, 여대생, 중년주부는 물론 남녀 고령자들까지도 루이비통은 “고급”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불변의 디자인을 구입하는 동기로는 “눈에 띈다”, “모두가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 주된 답변이었다. 여대생들은 “루이비통”의 이미지는 “프라다”보다도 고급이지만, 가격대가 손이 미치는 범위에 있고, “에르메스”는 너무 비싸 구입하기 곤란하다고 평가했다. 일본 성인여성 2명중 1명은 “루이 비통”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은 일본인 대부분이 중류생활을 하고 있고, 동일한 레벨이라는 것을 타인에게 무언으로 전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이런 유복한 중류층보다 높은 상류층으로 탈피하려는 듯이, 자녀 교육의 브랜드화 현상도 보이고 있다. 많은 경비를 필요로 하는 유명한 보육소, 유치원, 소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고, 브랜드로 치장한 부인들이 학교로 자녀를 데리러 오는 풍경이 화제가 되고 있다. 브랜드 학교에 진학시키려는 것은 자녀교육을 소중히 여기는 것 이외에도 지신이 가진 브랜드품을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최근 도심지 고층 아파트가 호조세로, 주거에 있어서도 브랜드 기호 경향이 현저하다.
현대의 양산품은 품질면에서는 고급 브랜드품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그러나, 무리해 고액을 지불하고, 브랜드품을 추구하는 심리에는 “중류층으로 인정받고 싶다. 상류층으로서 우월감을 맛보고 싶다”는 전후에 태어난 세대에게 허용돼 온 자기중심적인 생활패턴이 근저에 있다. 좀 무리를 해서라도 고급 브랜드를 추구하고,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의 선물(보상)”로 브랜드품을 구입해 우월감을 즐기는 사회가 출현한 것이다.
일본의 버블경제는 소멸했지만, 머니게임과 벤처 비즈니스 성공자, 거액의 유산상속자, 이혼 위자료, 각종 서비스산업의 성공자, 스포츠계 스타 등 부유층은 수도 없이 존재한다. 이들이 새로운 직위 심볼로써 초고급 브랜드상품을 추구하고, 브랜드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현상을 많은 일본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다.
작성자 : 아사히카세이(주) OB 野村順一(노무라 준이치)
보고자 : 오사카 무역관 김현호(kennykhh@kotr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