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은 유행이라고 한다.
그 당시 여자들의 치마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으며
그로인한 성범죄 증가를 염려한 군부 정치가들은 경범죄
라는 죄목으로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의 치마끝과 무릎
사이를 자로 측정하곤 했다.
치마가 너무짧은 여자들은 파출소로 끌려가 조서를 받고
과태료를 납부하거나 즉결심판에 회부되기도 했으니
참으로 한심한 나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바지는 일제시재의 나팔바지가 유행하고 있었으며
중학교 상급생 정도라면 멋도 부릴 줄 알기 때문에
바지 가랑이를 조금씩 늘려가고 있었고
그로인해 단속에 걸려 교문에서 벌을 서는 학생들이
대단히 많았다. 그런 단속을 대부분 "longlish" 와
"팔색조"가 담당 하고 있었으니 그 두사람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나는 학칙을 위반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그들의 표적이 되지를 못했지만...
우리학교 3학년 학생수는 320명 정도 되었고
5개반 으로 편성되었다.
1반과 2반은 남학생 반, 3반은 여학생 반
5반과 6반은 남녀 공학이었다.
4반은 죽을 4자라고 해서 아예 빼버렸다.
그 중 6반은 특수반으로 전체 성적순으로 잘라서
남학생 40명, 여학생 30명으로 구성되었다.
월말고사나 기말고사 시 성적이 떨어지면
5반으로 밀려나고 , 5반 학생중에서 성적이 향상된
학생이 6반으로 올라오곤 하는 제도로서 일종의
경쟁심을 유발시켜 좋은 고등학교에 많이
진학시키려는 학교의 고단위 처방이었다.
그래서 특수반인 6반 학생들은 그런대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으나 다른 반 학생들은
의기 소침함은 물론 6반 학생들과 잘 어울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6반 담임이 "longlish" 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6반에 편성되었고 항상 10등
안에서 맴돌았으나 수석은 한번도 하지를 못했다.
여러 과목중에서 국어는 거의 수석을 놓치는 일이
없었고 수학. 영어. 국사 .윤리는 그런대로 점수를
유지했으나, 음악. 체육. 과학등은 점수를 까먹고 있었다.
우리 반원들은 키 순서대로 세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나를 포함한 키가 작은 친구들 즉 1번에서 15번 이내인
학생들의 관심사는 대부분 학과 점수라든가 고등학교
진학 문제 등이었다.
우리보다 다소 큰 중간층들은 진로문제와 학과얘기도
했지만 여학생에게도 관심이 많아서 "매모리"라고 하는
쪽지를 전달 한다느니 미팅을 한다느니 그런 정도였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친구들은 술이나 담배를 몰래 하는
눈치였고 주로 여학생들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심심찮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한도일"이는
"민진순"이를 좋아한다는지, "김인식" 이는
"신금수"와 가끔 만나는 걸 봤다고도 했고 3:3으로
여고 1학년들과 미팅을 하기도 했다는 등의 얘기이었는데
확인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키도 적었지만 몸이 약해서 아침야외조회 시
현기증 으로 주저 앉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것은 왕복 8 km 나 되는 거리를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신작로와 산길을 통해 고물 자전거로 통학해야 했고
고입준비로 밤 늦게까지 보충수업을 받아야 했으나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영양보충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공부에 열중했으며
그런대로 상위권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팔색조"는
국어책과 출석부 그리고 40 cm 대나무 자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그녀의 체벌은 언제나 손바닥 때리기였는데 어찌나 힘이
세던지 3대만 맞아도 손바닥에 불이 난 것 같고 눈에서
불통이 튀었다.
그래도 나는 국어시간이 1학년 때부터 매우 즐거웠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글짓기 대회에는 단골로 나갔고
누나기 코치 해준 동시 "감"이 "전남일보" 신문에 발표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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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우리집 "논수밭" 가에는
할아버지 때부터 있었다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 있어요 !
늦가을 찬 서리 내린 아침
빨갛다못해 검붉은 아침해 뜰 때
그 아침해 닮아 빨개진"장두감"이
배고픈 참새 떼를 유혹하네요.^^*
십리 등굣길 재촉하시는 어머님 !
사립문 나서다 바라본 감나무엔
여름 태풍 이겨낸 탐스런 감들이
예쁜 모습 뽐내며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요. ^^*
"홍시감"을 좋아하던 시집 간 누나
보고픈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져
그러지 않아도 늦은 늦둥이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합니다. ^^*
(이 글은 1966년 막내누나의 코치로 쓰여진
동시로서 그 이듬해인 1967년 전남일보에 발표
되었으나 원본은 찾을 길이 없어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쓴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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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색조"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시나 소설, 수필을 학생들에게
읽도록 했는데 나는 언제나 낭랑한 목소리로 잘 낭송했으므로
그녀의 수업시간에는 세 시간에 한번 꼴로 내 목소리를 자랑
할 수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이 흐믓해 졌고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윽하게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 날 밤이면 나는 그녀의 밝은 미소와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 빛이 아련히 떠올라 괜스레 몸이 뜨거워지고 "페니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바람에 아무도 보지 않는
집 앞 냇가로 나가 "마스터베이션" 을 하곤 했다.
(솔찬히 조숙 했는가 보구만 잉 ...)
우리 마을인 수남(水南)마을에는 그 때만 해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있는 마을 청년들이
10 여명 이나 되었다.
겨울철이면 마을 사랑방에 모여서 새끼를 꼬거나
"민화투" 를 쳐서 과자 (1원에 두개 하는 딸기과자등)
내기를 하곤 하면서 보냈다.
밤에도 대부분 집에를 가지 않고 함께 잠을 자곤 했는데
그럴 때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마스터베이션" 하는법을
가르쳐주곤 했었다.
간혹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한 선배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들의 "아누스"에 자신의 "페니스"를 밀어넣는
즉 "호모섹스"를 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기도 했다.
(미성년자는 안 보아야 하는디.ㅎㅎㅎ)
나도 중 1 때 선배가 가르쳐준다고 표피도 제대로 벗겨지지
않는 내 "페니스"를 잡고 흔들었을 때 처음에는 별반 감흥이
없었다.
어느순간 전율같은것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지만 크게 감동
되지는 않았고 그 이후 집에 혼자 있을 때 스스로 "마스터베이션"을
연습하면서 터득해 나갔다.
그런데 "팔색조"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이후로 그 횟수가 점점
늘어갔으며, 그것이 어떤 죄책감 이라든지 하는 마음이 드는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면 마음이 두근거리고 괜스레 몸이
뜨거워지기 때문에 식구들한테 들키지 않을까 전전 긍긍 하곤
했다.^^*
(무지하게 그녀를 좋아하기는 했나 보구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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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몸도 나른해집니다.
비라도 나린다면 자꾸 누눈가가 그리워지는
이 내마음을 어이할꼬? ......
다음회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