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셀동역목사님들!
힘든 사역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강해 읽어 보시고 은혜와 지도와 편달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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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명자로
욘3:1-4:3
1.요나순종(두번째 기회에)
[욘] 3: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욘] 3: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1장에서의 요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2장에서의 요나는 철저하게 순종하는 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불순종하면서 도망을 가는 요나를 물고기 뱃속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폭풍 앞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던 요나, 바다에 던져지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던 요나를 하나님은 물고기라는 극단적인 징계를 통하여 회개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 다시 사명자로 거듭 태어납니다.
#1#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로 임하였다 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역한 자를 다시 쓰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실망을 안겨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요나를 대신해서 불러 쓸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유대 나라에 가면 요나가 아니라도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차하게 그를 다시 찾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찾아서 기어코 일을 시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나처럼 너무나도 자주 불순종합니다. 그저 단순히 불순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놓고 대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쓰시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그분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풍성하신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이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많은 믿음의 선배들도 한 번 이상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렸던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는 우상 상인이었던 가정에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은 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하란에 머물러 있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민족 구원의 사명을 받은 모세도 자신의 주먹과 혈기로 실수를 범하고 미디안 광야로 물러가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부르심을 받아 민족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역시 그의 각오와 서원은 비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주님으로부터 다시 부르심을 받아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75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였지만 닭 울 때에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눈물로 회개하는 것이 두 번째 기회가 되어 이를 놓치지 않고 오직 주님으로 충만하여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인 된 우리들이 그 자유로 방종과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기회를 잃으면 안됩니다. 봉사할 기회, 헌금할 기회,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 구제할 수 있는 기회, 선교할 수 있는 기회, 용서할 수 있는 기회, 회개할 기회를 잃지 않고 선용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기회는 흐르는 강입니다.
현명한 자는 기회를 찾기보다는 기회를 창조합니다.
비관론자는 기회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이고 낙관론자는 그 문제를 기회(機會)로 삼는 자입니다.
위기(危機)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위험(危險)과 기회(機會)입니다.
기회주의자는 선한 사람을 악하게도 만들지만 기회를 선용하는 사람은 실수를 위대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십니다.
누구나 한번은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하고 잘못을 저지르지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지난 날의 허물과 잘못을 돌이켜 더 좋은 삶을 위하여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주시는 기회입니다.
두 번째 기회를 선용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주신 말씀은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우리가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1장 2절에서 요나에게 주셨던 첫 번째 말씀과 그 내용이 똑같은 말씀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처럼 이랬다, 저랬다 수시로 그 말이 바뀌는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나에게 처음에 하신 말씀 그대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외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2#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마음에 내키는 대로 선포하려고 하지를 말라는 겁니다. 백성들이 듣기에 좋은 말로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직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대로 외치라고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언자나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 자신의 뜻이나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하면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이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셨을 때 요나의 행동은 본문 3절--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거역하고 도망쳤다가 죽을 뻔했던 요나, 그에게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그는 말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면 물고기 뱃속에서의 고난보다 더 무서운 고난이 임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시겠지만 그러나 영원히 기회를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에 보면, 주님께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거역하고 불순종하게 되면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우신 축복의 촛대를 옮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홀트 아동복지회가 있습니다. 초기에는 ‘홀트 양자회’였습니다. ‘홀트 양자회’를 설립한 헤리 홀트 씨는 미국 오래곤 주의 한 평범한 농부였으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1954년 가을 어느 날 그곳에서 열렸던 선명회 총재인 피얼스 박사의 강연회를 통하여 한국 전쟁의 참상과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홀트 씨는 마음에 강한 충격을 박았고 즉시 온 가족이 합의하여 8명의 아기를 입양하여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입양법에는 2명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미국의 상원과 하원을 움직여 합법적으로 한국에 가서 8명의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협력하여 홀트 양자회가 설립된 것이었습니다.
2.니느웨회개
[욘] 3: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욘] 3: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욘] 3: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욘] 3: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그런데 첫날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요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이 진지해 지더니 집으로 돌아가서 땅바닥에 앉아 회개하고 금식을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문이 왕에게까지 들리자 왕이 왕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어 던지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입는 베옷을 입고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짐승들에게까지 금식을 선포하고 온 나라가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돌아오는 큰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40일만에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는 애초의 마음을 바꿔서 그 성을 용서해주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느웨가 어느 정도의 성인가에 대해서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여러 가지 자료와 연구한 글들을 보면 대단한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성벽 높이가 30미터 정도였습니다. 즉, 10층 아파트보다 높은 성벽이 둘러있는 성입니다. 그 성벽의 두께가 전차 세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나라의 남한 산성에 있는 성곽 같은 것은 화장실 뒤에 둘러놓은 돌담과 비슷할 정도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성입니다. 경비병들이 파수를 보도록 성곽에 둘러가면서 세워 놓은 탑이 1500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하루종일 걸으면 한 20마일을 걷는다고 하는데 성경에도 삼일 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삼일 동안 돌아다녀 봐야 겨우 그 성을 한 바퀴 돌든지 했을 만큼 대단한 성입니다. (3-4세 이하)어린아이들만 12만명이니까 학자들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인구가 거의 줄잡아 60만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2800년 전에 이런 규모였다면 얼마나 대단한 성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아주 초라한 요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1#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요나가 전한 말을 듣고 니느웨 백성들이 첫 번째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요나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요나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이라는 분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 말씀이 너무나 두려운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무론 남녀대소 하고 모든 사람들이 굵은 베를 입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이러자 그 소문이 왕에게 들어갔습니다. 왕이 당장 그 왕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땅바닥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선포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어린아이까지 금식해라. 짐승까지도 금식시켜라."
그리고 8절에 보니까 무엇을 하라고 명령했습니까?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이 말은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잘못한 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회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나쁜 짓을 전부 다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말만으로 회개할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지금 니느웨 성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6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으니 이것만큼 큰 사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게다가 그 회심이 철저한 회개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얼마나 놀라운 능력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은 요나가 전한 다섯 마디의 말에 비하면 너무나 은혜스럽습니다. 요나의 메시지는 "회개 안 하면 너는 죽는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냥 들으면 섬뜩하고 좋은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들에게 전해주신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를 믿기만 하라. 믿기만 하면 너도 살고 너희 가족도 산다."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스럽습니까? 듣기만 해도 마음에 불안이 사라집니다. 평안이 찾아옵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그 마음에 소망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 갇힌 자와 억눌린 자에게 전해지는 자유의 선포, 병든 자에게 전파되는 치유의 역사, 죄짐을 지고 씨름하는 자에게 사죄의 은총이 선포되는 이 복음을 맡기시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2#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합니다. 전하기만 하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는 반드시 생명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아골 골짜기와 같은 곳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세례를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 백홍준이라는 사람이고, 그 다음에 이응찬이라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두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젊은이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서 함경도로 들어와서 가난하게 사는 시골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이 그 당시에 복음을 전할 때 100년 후에는 이 나라 국민의 1/4이 하나님을 섬기고 주일이 되면 성경 찬송을 끼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이런 기적이 한국에 일어났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전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입을 열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완악한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복음에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능력이 안 일어납니까?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1초의 기회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을 살리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270장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되어도 -
1.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쟎아 가리니
이세상 있을때 주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후렴]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2.주예수 말씀이 온세상 만민들 흉악한 죄에서 떠나라 하시니
이말씀 듣고서 새생명 얻어라 이기쁜 소식 전하세
3. 영생의 복락과 천국에 갈길을 만백성 알도록 나가서 전하세
주예수 말씀이 이 복음 전하라 우리게 부탁하셨네
3.니느웨재앙의 모면과 요나분노
[욘] 3:9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욘] 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욘]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나, 이 사람을 보게 되면 사람이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요나를 정리해 보면 1장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외치라는 사명을 받았던 요나가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폭풍을 만나 수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손실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각에 그는 배 밑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폭풍 속으로 던짐을 당하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요나 3장을 읽다가 본문의 4장을 읽으면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3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확 뚫리는 것 같던 것이 4장을 읽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해집니다. 3장을 읽으면서 니느웨성에 일어났던 그 놀라운 부흥 앞에 감동했던 그 흥분이 4장을 읽으면서 갑자기 내 마음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사명을 감당하던 그 요나가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불평하는 요나'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던 그 요나가 이제는 불평하는 자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는 주저앉아서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를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특별히 4장에 나타난 요나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불평하는 요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불평하는 요나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어제 은혜를 받고 사명을 감당하겠노라고 다짐을 하다가 오늘 불평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헌신을 하다가도 아주 작은 일들에 넘어져서 요나처럼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평하고 있는 요나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요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자 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십시오. 이 짧은 본문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내가', '내가', '내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3장 4절에서처럼 요나는 니느웨 성을 다니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정말로 그의 말처럼 니느웨성이 무너지기를 바랬습니다. 니느웨성의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처럼 다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성의 사람들이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사실이 그로 하여금 불평의 자리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요나가 불평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많은 선지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의 역할은 범죄한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망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범죄를 해서 하나님의 징계 앞에 직면해 있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타락했던 시절에,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라의 멸망이라는 징계 앞에 서 있었던 이사야 시절에 이사야가 외친 말씀의 핵심도 너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
이것이 이 땅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참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요나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요나가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망한다고 외친 그 외침은 정말로 니느웨 성이 망한다는 그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의 범죄로 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니느웨 성을 향한 하나님의 참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참 뜻은 외면하고, 요나는 니느웨 성의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2)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33:8).
그는 니느웨를 저주하시는 하나님은 알았지만 니느웨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참 뜻은 몰랐습니다. 그는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은 알았지만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몰랐습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말하고 외친 그 말 그대로만 되기를 바랬을 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옹졸한 사람의 모습입니까?
두 번째로, 요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요나에게는 수용성이 없었습니다. 수용성이란 어떤 상황이든지 자기의 뜻을 접고 가슴을 열고 전적으로 받아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수용적인 자세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수용성이 부족한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뜻과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원만한 공동체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이 수용성이 약한 사람은 그래서 언제나 불평 불만이 가득합니다. 지금 요나에게 있어서 문제는 바로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수용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원수의 나라 니느웨 사람들이 그대로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보면 사명을 믿음으로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자기 뜻과 다른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어떤 일에 대하여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고 싶어도 그 일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나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폐쇄적이고 편협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2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기에 보면,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너무나도 훌륭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그 속성을 자기중심적인 편협된 신앙 안에서만 한정시켜서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인애를 더하시는 분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의 나라를 위해서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에게는 결코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도망가던 요나가 회개할 때 용서해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성의 사람들이 회개할 때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니느웨 사람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따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나는 자기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편협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이러한 요나의 모습은 얼마든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무한하신 하나님을 지극히 유한한 자신의 감정과 자기 중심적인 신앙 속에만 가두어놓으려고 합니다. 나 자신의 편협된 눈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야 합니다. 나를 향해서는 한없이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별히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렇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나는 용서를 받아야 하고, 그는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이해를 받아야 하지만 그는 철저히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편리한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자기 감정에 충실한 범위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받아들이기 싫은 것은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내가 듣기에 좋은 것은 귀를 쫑긋 세워서 듣습니다. 그러나 내 귀에 거슬리는 내용은 철저하게 외면해버립니다. 내 입맛에 맞는 설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내 심령을 아프게 하는 설교는 불평과 원망과 미움으로 충만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 때문에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 생활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비록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아멘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 질 때에 사명을 감당하는 열심은 그만큼 더 뜨거워질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끊임없이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더 옳다고 주장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돈이 많고, 권세가 높고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확실하게 알고 그 사명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가정에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요나처럼 불평자로 살지는 마십시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요나처럼 앉아서 구경하는 그런 삶을 살지는 마십시다. 비록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사십시다. 구경꾼이 아니라 사명자로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면서 충성되게 사십시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요,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대현교회 서재생목사--너는 내 것이라
옷 바뀜--승려 방황의 길 해결--죽움 앞에서 -----
스님으로 가는 길을 목회자 길로
초등생 도둑으로 몰림, 할아버지 사랑, 초5 돌아가심--죽음이란
작은아버지 정부비판 구속
나는 누구인가 고민
자살 4번
형님책꽂이 불교 해탈
장 종양 , 간호사, 스님, 예수 믿으면 좋겠어요
스님,이교도등 전도
초파일 전도집회- 보살
형님친구아들, 뇌막염, 현신애권사기도 나음, 전도
깊은잠, 승려로서, 짜고하는 것 같다, 최경택씨 장 나음
현신애권사 기도로 장 나음, 목사 서원
군대도피 6미터 언덕 차 전복, 장 파열, 복 막염,
진통제 통증, 염불, 주여주여,
소장대장 상함, 옆구리 인공장,
주일 염불, 복숭아캔, 응급, 장 떡,
심장 멈춤, 한미합작 수술,
장 수술 터짐--통합병원 으로 가니 내장썩음 2개월 삶
살려주면 목사나,장로나,사찰이나 되겠습니다.
부모포기, 목사님 운명기도, 요나의 물고기배속기도
평생유동식
밤에 누울때마다 고통, 천국가는 날까지 복음을 위해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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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1.하나님의 진정시키심(질서)
[욘]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 [욘] 4: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주전 9세기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잔인한 침략과 포악한 심성, 거기에다 우상숭배와 배금주의, 육체적인 향락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의 선지자 요나를 불러서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회개를 요청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불순종하여 니느웨와는 반대쪽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께서 큰 폭풍을 일으켜서 요나는 마침내 물고기 뱃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삼일동안 처절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사십일 후에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외친 그 짧은 다섯 마디 말에 니느웨 성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부흥의 역사 앞에서 요나는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왜냐 하면 이와 같은 상황은 결코 요나가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그의 말대로 니느웨 성이 완전히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성과 백성들을 용서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요나는 화를 내면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잣대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요나, 그는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고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평합니다. 본문 3절을 -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한 마디로 말해서 저 이방인들이 구원받아 잘 사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니느웨에 임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니느웨가 회개하면 제일 먼저 감격하고 감사해야 할 사람은 요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편견과 고집으로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죽여 달라고 합니다. 2장 2절에서는 그는 살려 달라고 했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서원을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서는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니느웨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엄청난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자기 감정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옛 성품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감정을 앞세우고 자신이 중심이 되면 그의 입술에는 항상 불평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자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소한 일에도 쉽게 감정이 상합니다. 그래서 쉽게 불평하게 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화를 내고 불평하면서 죽기를 원하는 요나에게 다가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께서는 지금 요나가 화를 내고 불평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니느웨 성읍이 구원을 받았다면 당연히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원망하고 못마땅해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선지자인 네가, 사명자인 네가 가져야 할 태도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
[민] 21: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민]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 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민] 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민]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요 3:14-17).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1).
[민] 14: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민] 14: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민]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민] 14: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민] 14: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민] 14: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민] 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민]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민] 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민] 14: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 14: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민] 14: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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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청년이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갔다가 예수를 믿고 돌아왔습니다.
아들이 과거를 보라고 보냈더니 예수를 믿고 돌아왔으니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닙니까?
소문은 동네에 흉흉해졌고 청년은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청년이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집안이 다시 뒤집혔습니다.
온갖 방법을 다했으나 효험이 없고 청년은 3년 동안이나 벙어리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은 아들에게 말합니다.
"입만 떼면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 주마, 입만 열거라"
그 소리에 청년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예수 믿어야 합니다."
그는 벙어리가 된 것이 아니라 벙어리 흉내를 냈던 것입니다.
가족의 반가움과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그토록 네 마음을 사로잡았단 말이냐?
어디 네가 믿는 예수 우리도 믿어보자"
마침내 온 가족이 선교사를 찾아가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바람 박사로 알려진
황수관(黃樹寬) 박사의 간증에 나오는 황 교수 할아버지 이야기입니다.
황 교수는 천상 과거시험에 합격한 할아버지 덕에
3대째 집안이 예수를 믿고 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간증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를 귀하게 여겼더니 대대로 만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버리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합시다---
2.요나에게 긍휼(박넝쿨)
[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욘] 4: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욘]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욘]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그는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성 동편 언덕에 올라가서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는 언덕에 앉아서 망하지 않는 니느웨 성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전혀 씨가 먹혀들지 않는 요나,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불평하고 있는 요나, 그 많은 기회를 주었음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요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십니다. 그 못난 요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생떼를 부리고 있는 요나의 비뚤어진 인간됨을 깨닫게 하시고자 그를 삶의 교육현장으로 불러내십니다.
때마침 하늘에서는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태양이 언덕 위에 앉아 있는 요나의 머리에 내려 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하여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박넝쿨 하나를 무럭무럭 자라게 하더니 태양을 차단하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불평하며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고자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동풍을 그런데 이 열풍이 불면 기온이 급상승하고 때로는 밤에도 기온이 올라가 대낮의 기온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이 동풍은 불쾌지수가 높아져서 신경을 날카롭게 합니다. 그리고 동풍이 불면 초목은 메말라 버립니다. 이런 기후적인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요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박넝쿨은 우리 나라의 호박 넝쿨이나 박넝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심기만 하면 며칠 내에 3m 정도로 물씬 자랍니다. 잎사귀가 크기 때문에 그늘을 쉽게 만들어 줍니다. 한 번 잎이 나오면 2-3일 정도 피어 있다가 시들어 버리는 그런 나무입니다.
요나는 이 박넝쿨로 인하여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벌레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줄기를 갉아먹었습니다. 그리고 동풍이 불어오더니 그렇게 잎이 무성하던 박넝쿨이 그만 먼지처럼 바짝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요나는 또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불평하는 요나를 향하여 하나님이 묻습니다.
"요나야, 그 박넝쿨을 네가 심었냐? 네가 자라게 했느냐? 네가 그 박넝쿨 하나를 그렇게 아끼면서 내가 만든 니느웨 성의 수많은 사람들, 12만여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그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도 요나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구원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만 12만명이었다고 하니까 학자들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인구가 거의 줄잡아 60만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 도시의 구원입니다. 성경에서는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와도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잔치가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지금 커다란 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당대 최대의 도시가 주님 앞에 온전히 돌아오는 이 엄청난 역사 앞에서도 요나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화를 내면서 불평했습니다. 그랬던 요나가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박넝쿨 하나를 보고 그토록 기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요나입니다. 그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우선 순위의 정체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영적인 침체가 오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마땅히 기뻐해야 될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둘째는, 싫어해야 할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셋째는, Yes하고 순종해야 할 때 순종하지 못하고, No하고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않는다. 넷째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헛된 것을 붙들고 거기다 생명을 걸고 살아간다. 따라서 영적인 침체에 빠지면 사랑이 식어진다. 마음에 작은 상처도 치료가 되지 않는다. 사역에 시험이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내 생각과 하나님의 명령이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 경험과 이해가 교회의 공동체의 방향과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우리는 내 자존심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먼저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 개인적인 경험과 이해보다 교회 공동체의 선을 먼저 생각하셔야 합니다.
요나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간단한 메시지를 던진 예언자라는 점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것이 요나의 메시지 전부입니다.
아까 하나님은 권능이 크신 분이라고 했지요.
권능이 크신 하나님은 그 메시지를 사용해서 니느웨 성이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요나처럼 좀 간단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외치고 심판이 있음을, 제1의 요나들이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찾아왔을 때만큼이나 어둡고 어렵고 어지러운 이 세상을 향해 외쳐야합니다.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하나님의 권능을 입히시어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심판이 있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소돔 성이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 당했는데 오늘 성도들은 한국의 의인 열 명으로 살아야합니다. 의인의 삶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때 제2의 요나들이 되어서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감리교 -- 문자메세지 -- 포기 -- 무반응 -- 사람들 기억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까지도 우리를 교육시키십니다.---
3.니느웨에도 사랑을(용서)
[욘] 4: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1장부터 4장까지의 마지막 결론은 오늘 본문 4장 10절과 11절입니다. 10절은 요나의 가치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야, 네가 심었냐?" "요나야, 네가 재배했냐?" "네가 아꼈거든." 너 너 너, 요나의 가치관은 철저하게 박넝쿨 중심의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11절에서는 하나님의 가치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의 가치관은 생명의 가치관이다. 내 가치관은 영혼의 가치관이다. 보십시오. 10절과 11절은 요나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이 아주 철저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가치관이 박넝쿨에 머무는 한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내 재산을 증식시키고, 내 건강을 관리하고, 내 지위를 보전하고, 내 명예를 조금 더 높여 가는 것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눈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 내 온갖 관심이 박넝쿨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눈이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보고 살아갈 때 잃어버리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환경을 통해서 분복을 누리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환경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약속하신 복들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빠져서 매몰되어 살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간지대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 가치관 50, 하나님 나라 가치관 50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먼저 구하느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진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먼저 구할 것인가?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길 것인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내 눈이 박넝쿨에 가려서 섬기고 구원해야 할 이웃을 볼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7절처럼 벌레를 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박넝쿨의 가치관에 가려서 하나님의 소중한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면 동풍이 불어서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마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소중히 여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한 번에 훅∼ 불어 버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나도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사람들을 나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이 땅에 환경과 조건 때문에 울고 웃는 인생이 되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보람 때문에 울기를 원합니다. 그 행복 때문에 웃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내가 가장 아끼는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아끼는 것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4장 11절로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요나는 끝입니다. 그 다음에 요나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결론이 없습니다. 결론은 두 가지가 가능할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아끼고, 자신의 자존심이 손해 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교사가 되어서 잘 살았다. 그렇게 결론이 내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요나는 원래 싸가지가 없는 인간이라 5장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충성하면서 살다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갔다.
5장이 없습니다. 4장의 결론 없는 미완성교향곡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나 5장은 저와 여러분이 기록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요나 5장은 우리 각자가 기록한 내용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는 우리가 잘 아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리자 목자는 그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서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기쁨의 잔치를 벌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해 타산에 밝은 현대인이 이 이야기를 읽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고 그 한 마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성지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거친 황야가 끝없이 펼쳐진 곳에서 양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는다는 것은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땅에서 양을 치는 것은 뉴질랜드처럼 초원이 펼쳐진 곳에서 울타리를 쳐놓고 방목하는 것이 아니라 비탈진 언덕길로 이끌고 다니면서 마른풀을 뜯어먹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그 언덕길에 보면 양의 길이 나 있습니다. 양들이 지나다닌 길입니다. 풀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동을 해야하므로 그 과정에서 양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한 번 잃어버리면 찾기가 대단히 어렵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잃은 양을 찾는 일은 목자에게 큰 부담이며 괴로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즈음처럼 인건비로 계산을 한다면 차라리 양 한 마리를 포기하는 것이 낫지 그것을 찾으러 하루 종일 뜨거운 황야의 산길을 헤매는 것은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목자는 그런 고통과 수고를 마다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고, 얼마가 걸렸는지 모르지만 결국은 찾아내어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이웃과 친구들을 불러 함께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간단한 잔치라도 베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사람 같았으면 잃어버린 양을 혹시 찾아 나섰다가 찾으면 무겁게 어깨에 메고 돌아오지 않고 그냥 몰아서 끌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와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하는 대신에 재수 없다고 투덜거리며 양떼들을 몰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까이 한다고 불평하고 비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그들과 완전히 생각이 다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 같은 것은 찾을 가치가 없다고 본데 반해, 예수님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고야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회개하였을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눅 19:10)고 하셨습니다.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내친 자들을 오히려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비유입니다.
잃은 생명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 잃은 자를 찾은 기쁨 역시 없게 마련입니다. 율법을 칼 같이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칼 같은 비정함은 있을지언정 부드럽게 감싸안는 사랑과 기쁨은 모두 증발되어 찾아보려야 볼 수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그것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잃은 것들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찾은 큰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를 앞세운 유대교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크게 대조되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율법과 은혜로 대조시켰습니다. 율법이냐? 은혜냐? 유대교는 끝까지 은혜를 거부하고 율법을 고집하였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을 넘어선 은혜를 중심으로 세계 속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잃은 생명을 찾은 기쁨 - 잃은 양의 비유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에 대해서입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돈으로 계산하지 않고 같은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목자는 단순히 그가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가 아니라 백 마리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생명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라고 봅니다. 백 마리라는 완전수와 거기서 한 마리가 빠져버린 99의 불완전수는 단순한 하나의 차이가 아닙니다. 한 마리가 빠지므로 전체 공동체가 불완전하게 된다면 그 한 마리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자녀가 많은 가정이 있는데, 그 많은 자녀 중 하나쯤 잃어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많은 자녀 중 하나가 빠지면 그 가정 전체가 불완전한 가정, 근심의 구름이 항상 깃들인 가정이 되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비로소 완전한 생명공동체가 회복되므로 이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썽꾸러기인 인간이지만 그 인간이 없으면 생명공동체가 완전해질 수 없기에 결국 자기의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하여 그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길 잃어버린 말썽꾸러기 양과 같은 존재인 인간을 하느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까닭은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하느님이 완전해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직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직 세계와 자연의 모든 구원이 완성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완전한 생명 공동체가 회복될 것이고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큰 기쁨을 갖고 그 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섭리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함께 잃은 양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며, 서로 원수가 되었던 적들에게도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어 막혔던 담을 헐고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으로 높이 쌓아올렸던 모든 담들을 헐어내고 한 형제자매, 한 민족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라크를 침략하려고 전쟁을 서두르는 미국이야말로 이 시대의 잃은 양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의를 저버리고 전쟁에 광분하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잃은 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도 함께 미국이 돌이켜 그 오만한 자리에서 내려와 겸손히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잃은 양이었던 여러분을 친히 찾아오셔서 구원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그 뜨거운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뜨거운 사랑을 이어 받아 아직도 길을 잃고 헤매는 많은 생명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도 없고 긍휼도 없는 냉랭한 율법주의자가 되어 자연을 망가뜨리고 형제자매를 정죄하면서 혼자 의로운 체 하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긍휼을 입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받들며 그 사랑을 배워 이 세계를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로 변화시켜 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회복된 세계를 보시면서 활짝 웃으실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선한 목자처럼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중국의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본국에 들어가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듣던 수많은 신학생들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면접을 하면서 이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저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테일러가 말합니다. "다 소중한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선교사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때 신학생들이 묻습니다. "선교사님, 당신은 왜 중국 선교사가 되셨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중국 사람을 사랑하거든요. 오직 사랑 때문에."
우리 나라 어떤 선교사님은 옷을 입지 않고 사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옷을 벗고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들을 사랑하니 같이 벗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내 자존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벗을 수도 있습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버릴 수도 있습니다.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의 주변에서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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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오신 선교사님들
스미스 박충근 , 처녀 루비켄드릭 조선 ,작은 시골교회 내가 다시 일어나질 못한다면 청년들 이곳에 보내달라 , 친구들30명
1950년 아내 3살 딸 가족무덤 , 처녀의사 조선땅 쇼도 올 남편 열병 죽음, 딸 죽음, 아들 고통스런 날 기록 끝까지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포 앞바다 조선소년 살림 시신 없음
한알 씨 예수님 선교사의 선교씨 선교사 파송 17000명 세계 곳곳
러시아 선교 , 사위 딸, 장인 부부
묘비 당신 올때 어둠 당신 없을때 이 땅 밝아 왔습니다.
캄보디아 피 토함, 아들 적응못함 항암치료 다시 전도
아빠 캄보디아 선교 실패 아니야 딸이 지킬거야
나가든지, 보내든지 선교적 사명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심장으로 주님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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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사회교육원 실용음악 문태종 교수 중3방황과 자퇴
친구들 집에 가서 자다가 친구따라 주일예배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
송구영신 예배, 새해예배와 기도원에서 성령을 받아 모든 나쁜 것 끊고 새사람으로 살며, 검정고시와 예배를 위한 반주자로 피아노를 통한 자아 발견 교수로 임용의 길 열리다. 외면 모습보다 이면의 모습을 사랑으로 기다리며 기도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315장 - 돌아와 돌아와 -
1.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2.돌아와 돌아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3.돌아와 돌아와 환난 있는 곳과 죄를 범한 데와 미혹 받는 데서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4.돌아와 돌아와 집에 돌아오라 모든 것 풍성한 아버지 집으로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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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