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고 오고 묵호역
이학주
2020년의 묵호역! 그 옛날 화려했던 영화는 찾을 수 없었다. 한적한 대합실에는 한두 명 앉아 있고, 대합실 뒤로 보이는 풍경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연륜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조금 있으려니 모녀인 듯한 여인 두 명이 대합실 표사는 곳으로 들어왔다. 개찰구에는 다음 열차 출발 시간이 표시돼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문밖으로 동해바다가 보이고 가까이는 철로가 보였다. 이제는 시골 간이역 같은 분위기였다. 수많은 사람이 묵호역을 통해 오고 갔을 텐데 어디서든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합실을 뒤로 하고 역 광장으로 나왔다. 붉은 언덕이 보였다. 붉은 언덕도 화려했던 옛 모습은 저 멀리 사라지고 한적했다. 버스가 다니던 옛 추억도 토박이 주민이 거의 다 떠나 자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간혹 이 묵호역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묵호역을 대각선으로 마주 하고 있는 김남현 씨는 연세가 많지는 않지만 묵호의 발전상을 영사기 돌아가듯 훤히 꿰뚫고 있었다. 묵호역은 많은 역사와 추억을 간직한 곳이었다. 1965년 옆의 구역(舊驛)에서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 그리고 지금 해안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역 광장이 무척 컸다.
“거 여기 저 저희들이 어렸을 때 보면 이 묵호역 광장이 굉장히 컸어요. 그래 가주고 그 박정희 대통령하고 저 김대중 대통령이 뭔 시 이런 분들이 유세하던 광장 이였어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등이 있으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세를 하던 장소였다. 김영삼, 노태우 등 모든 대통령 후보들이 자신들을 뽑아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곳이다. 그러니 묵호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그들의 유세를 들었던 곳이다.
“그 때 70년도 만해도 논산훈련소를 여기서 출발 했어요. 이 광장에서 2천 명씩이 출발할 땐데, 기차에 타고. 기차타고 논산까지 가다보니까 그래서 하숙들이 많은 거야.”
명주군의 병력들이 훈련소로 갈 때 묵호역에서 출발을 했다. 한 번에 2천 명이나 갔다고 했다. 그 후 역 광장이 줄어들면서 동해프라자 자리 광장에서 모였다가 논산으로 갔다. 그러다가 광장이 없어지면서 강릉에서 입영소집을 했다고 한다.
입영장병들은 미리 묵호에 와서 놀다가 가는 사람도 많았고, 전 날 묵호에 와서 자고 가기도했다. 그 때문에 이곳에 하숙이 많았단다. 그들은 며칠 전 또는 한 달 전쯤 와서 오징어 배며 하역장 등에서 일을 해 돈을 벌어 유흥가 술집에 가서 놀다가 가기도 했다. 그러면 또 입영장병들의 돈을 갈취하는 깡패들도 있었다.
“전국에서 이게 깡패가 제일 많았을 거예요. 돈을 이 뜯고 삥 뜯는다고 그러죠? 삥 뜯고 하는 사람들이 여기가 많았어요.”
묵호역의 또 다른 어두운 역사였다. 하기야 그 당시는 어디를 가나 길가는 사람들 돈 뺏는 거는 부지기수였으니 묵호역 주변도 다를 리는 없었을 게다. 그러고 보니 묵호역은 묵호행사의 중심지였다. 그렇게 많던 궐기대회, 국민운동촉진대회, 시가행진 등 모두 묵호역에서 시작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다시 묵호역을 찾았다. 묵호역 광장 울타리에는 한창 시화전을 하고 있었다. 묵호의 시인들은 저마다 묵호역에 서린 추억을 쏟아냈다. 세상에 같은 사람 없다고 하더니, 시인들 마다 묵호역을 생각하는 이미지가 다 달랐다. 그 중 <묵호역>이라 쓴 김경희 시인은 그리움으로 묵호역을 표현했다.
“기적소리가 그리움의/ 통증이 될 줄 몰랐습니다.// 긴 꼬리 흔들며 묵호역 떠나던/ 기차에 손 흔들 때도 몰랐습니다.// 당신을 싣고 오지 않는 기적소리/ 그리움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림자조차 찾을 길 없는 어머니/ 텅 빈 대합실에서 기다립니다.”
묵호역에 대한 살가운 그리움이 절절히 배어나온다. 그리고 요즘 가보면 누구나 느낄 대합실의 애잔함이 시 속에서 글로 굴러다님을 알 수 있다. 정말 사람들마다 기억의 한 조각으로 있을 그리움이다. 묵호역은 그런 그리움의 이미지로 아직도 묵호를 지키고 있다.
(이 내용은 동해시 묵호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작성하였다. 강원아카이브협동조합의 사업으로 필자가 작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