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72. 【이서공원·이공제비】(덕수이씨)
이공제비에 새겨져 있는 놀라운 비밀 몇 가지(1)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전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
놀라워라!!!
12세 꼬마 이학철이 쓴 이공제 대자
프롤로그
지난 2016년 2월 22일 월요일은 병신년 정월 대보름이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설 명절에 버금갈 만큼 큰 명절이었던 정월 대보름. 하지만 최첨단 정보통신사회인 2016년 현재에도 정월 대보름의 명절 풍속은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늘 정월 대보름날이면 만사를 제쳐두고 우리 대구지역에서 행해지는 보름 민속행사를 찾아다닌다. 즐겨 찾는 행사는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을제사, 이름하야 ‘당산제’이다. 하지만 올해는 성격이 조금 다른 곳을 다녀왔다. 대구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 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대구판관 ‘이서’공(公)의 향사에 다녀온 것이다.
정조 초 대구판관을 지낸 이서(李溆·李漵·같은 글자임)는 우리 대구의 명당수인 신천(新川)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인물이다. 지금의 신천 상동교 인근에 조성되어 있는 이서공원이 바로 그의 공덕을 기리는 공원이다. 참고로 ‘이서’공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정조 초 대구판관을 지낸 인물로 대구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신천에 제방을 쌓아 수재를 막은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그런데,
이번 이서공 향사에서 신기하고 또 이상한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향사와 관련된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서공원에 세워져 있는 100년-200년 된 옛 송덕비 3기의 비문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도대체 어떤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지 지금부터 필자와 함께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자.
12살짜리 꼬마가 비석의 ‘이공제’ 큰 글자 석자를 썼다!
간혹 옛 전통건축물들에 걸려 있는 현판들 중에는 그 현판의 글씨를 꼬마 녀석(?)들이 쓴 경우를 종종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에 걸려 있는 ‘영남제일루’와 ‘영남루’ 현판이다. 이 현판은 1843년, 1844년 2년에 걸쳐 영남루를 대대적으로 중수할 당시, 밀양부사였던 이인재의 장남 이증석과 차남 이현석이 각각 11살과 7살 때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근거로는 각각의 현판에 작은 글씨로 ‘계묘초하하한이증석십일세서(癸卯初夏下澣李增石十一歲書)’와 ‘계묘초하하한이현석칠세서(癸卯初夏下澣李玄石七歲書)’라고 적혀 있다.
참고로 우리대구의 경우에도 꼬마가 쓴 현판글씨가 몇 군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단양우씨 예안공파 세거지인 동구 평광동의 첨백당에 걸린 ‘첨백헌(瞻栢軒)’ 현판으로 우제구(禹濟九)라는 꼬마가 9세 때에 쓴 것이다. 영남루 현판과 마찬가지로 이 첨백헌 현판에도 작은 글씨로 ‘경자구월일 제구구세서(庚子九月日濟九九歲書)’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번 2016년 이서 공 향사 때 필자는 정말 놀랄만한 역사적 사실 하나를 발견 할 뻔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대는 이틀 만에 허무하게 깨져 버렸다. 그 이틀간의 속 사정은 대충 이러했다.
필자는 그날 이서 공 향사를 마치고 저녁 무렵 향사 후기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거에 찍어둔 사진자료를 참고하며 비문을 해석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참고로 이서 공의 공덕을 기리며 세운 ‘이공제(李公隄)’ 비는 모두 2기인데, 각각 정사년(1797·정조21)과 무진년(1808·純祖8)에 세운 것이다. 이중 두 번째 비인 ‘무진년 이공제비’ 후면 음기(陰記·비석 뒷면에 새긴 글) 끝자락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前面大字李鶴?十二歲書(전면대자이학?십이세서)’
글자 그대로라면 “전면의 큰 글씨는 이름이 ‘이학?’라는 12세 꼬마가 썼다.”는 뜻이 된다. 그렇지만 사진자료가 깨끗하지 않은 탓에 한 두 글자의 해독이 불가능했다. 날 밝기를 기다려 다시 현장을 찾아 글자를 확인해본 결과 그 12세 꼬마의 이름은 ‘李鶴喆’로 판명되었다. 순간 필자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곧장 지역 일간지 해당 부서 기자에게 이 사실을 제보했다.
그는 평소 대구 신천에 대한 기획 기사를 종종 썼던 기자였다. 하지만 그 역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흥미로운 기사거리가 될 수 있겠다며 좀 더 정확한 확인 작업을 요구했다.
나름 대구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도 지금껏 몰랐던 사실이었고, 신천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썼던 일간지 기자조차도 몰랐던 사실이니 더 이상 확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통해 이런 저런 정보검색을 해보았다.
예상처럼 12세 꼬마가 ‘이공제비’의 큰 글자를 썼다는 내용은 어떠한 검색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뿔사! ‘이학철’ 그것도 한글이 아닌 한자 ‘李鶴喆’로 검색했을 때 뭔가 하나가 덜컥 걸려드는 것이었다.
‘이 비의 전면에는 李鶴喆이라는 12세 소년이 쓴 '이공제'가 음각되어 있고...’
2006년 게재된 한 학술자료집의 본문 내용 중에 해당 내용이 위와 같이 단 1줄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었다. 아! 이렇게 허무할 수가. ‘12세 소년 이학철이 쓴 이공제비 대자’라는 역사적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 양모 선생께서 먼저 발표를 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상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 어떻게 여태껏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서 공의 이야기는 대구역사에 있어 ‘신천=이서’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무게감이 있는 소재이다. 특히 스토리텔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대구·신천·이서·이공제비’는 매우 흥미로운 소재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다 이서공원에 있는 ‘무진년 이공제비’의 전면 대자 글씨를 ‘이학철’이라는 12세 꼬마가 썼다는 역사적 사실을 더한다면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며칠 지난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문제는 최초 발견자가 누구인가에 방점을 둘 일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대구판관 이서의 송덕비를 세울 당시, 전면의 ‘李公隄’ 큰 글자를 이학철이라는 12세 소년이 썼다는 내용이 지금까지 비석 뒷면에 금석문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대구시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에 방점을 둘 일이다.
끝으로 필자는 서화(書畵)에는 문외한이다. 그런 필자가 보기에는 12세 꼬마의 글씨치고는 너무 잘 쓴 글씨 같다. 나만의 바램(?)일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고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 혹 12세 소년 이학철(李鶴喆)에 대해 아시는 분들이 계시면 제보 꼭 좀 부탁드립니다!!!
2016.03.03
砧山下 풍경산방에서
송은석
☎018-525-8280
2016년 이서 공 향사 모습
대구 수성문화원 주관, 덕수이씨 문중에서 봉행하고 있다.
대구 수성구 상동 신천변에 자리한 이서공원
이공제비각
제일 좌측 줄을 자세히 보면 '자이학철십이세서'라는 비문이 보인다.
12세 꼬마 이학철이 쓴 이공제 대자이다...
암만 봐도 정말 필력이 대단한 잘 쓴 글씨인 것 같다.
'면대자이학철십이세서'
'이학철십이세'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지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 무려 3시간 동안 비각 옆에 있으면서
햇빛의 각도에 따라 음영이 잡히는 정도를 살펴 글자를 읽었다.
강변이라 얼마나 춥던지....
11세 이증석이 쓴 영남제일루
7세 이현석이 쓴 영남루
첨백헌
좌측에 작은 글씨로 '庚子九月日 濟九九歲書'라 적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