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9/2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1 - 미국의 바이올린 연주자 아이작 스턴(Stern, Isaac) 사망
스턴 [Stern, Isaac, 1920.7.21~2001.9.22]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타계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81)이 심장병으로 2001년 9월 22일 뉴욕 코넬 의료센터에서 별세했다. 1년전 여름 심장판막 수술을 받은 스턴은 그해 12월 코네티컷주 가이로드빌의 자택에서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 때 "여전히 시거와 와인을 즐긴다"며 건강을 과시했으나, 최근 심장병이 재발, 뉴욕 병원에서 치료받아 왔다.
스턴은 1m65cm의 작은 키에 `음악의 지존`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에 앞서 음악교육자, 음악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연주장인 카네기홀 구출운동은 스턴의 `수퍼 파워`를 일군 대표적 사건으로, 1891년 뉴욕 맨해튼에 개관한 카네기홀이 부동산 개발업자한테 팔려 1955년 헐릴 위기를 맞자 스턴은 시민위원회를 만들어 카네기홀 지키기에 나섰다. 그는 "카네기홀은 음악가들의 영감이 숨쉬는 문화유산"이라며 불도저가 버티고 선 홀 앞에서 항의집회를 주도, 홀을 되사는데 필요한 모금운동을 폈다. 결국 뉴욕시가 카네기홀을 매입했고, 홀이 새 출범하던 1960년부터 스턴은 카네기홀 회장을 맡아왔다. 스턴의 의지와 열정을 기려 카네기홀은 1997년 대연주장을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움`으로 명명했다.
스턴은 1920년 우크라이나에서 유태인 부모밑에서 태어났다. 생후 10개월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13살 때 데뷔했다. 음반만 100장 넘게 남겼으며, 특히 20세기 현대음악에 애착을 보여 번스타인·뒤티외 등의 작품을 다수 초연했다. 스턴은 카네기홀을 지켜낸 공로로 `알버트 슈바이처 음악상`을 받았고 `그래미 종신 공헌상`(1987)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1992) 등을 수상했다. /조선
2000 -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 개막 (9.22~10.22)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
직지의 본고장 청주에서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가 열린다. 22일부터 10월22일까지 청주 예술의 전당을 비롯한 청주시 일원.
‘문자 문화의 지난 천년, 새 천년’을 주제로 한 이번 행사에서는 인류의 인쇄문화 발달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다. 전시장은 ‘고인쇄마을’ ‘인쇄체험마을’ ‘문자마당’ ‘출판문화도시’ ‘출판체험도시’ ‘인터넷세계’ ‘디지털세계’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직지의 제작 과정과 관련 유물, 수메르 점토판 글자, 중국 갑골문자, 필기 재료인 파피루스 등 고인쇄문화부터 현대의 첨단 디지털 인쇄출판까지 동서고금의 인쇄문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과거의 인쇄과정을 체험해보는 자리도 마련되고 각종 공연 공모전과 학술회의(9월 28, 29일, 10월 12, 13일)등 부대행사도 풍성하다.
www.cippexpo.com 043―220―6859<이광표기자>kplee@donga.com /동아닷컴 2000-09-19 18:51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378/3/70070000000378/20000919/7584020/1
1994 - 미국의 만화가 버드 자겐도르프(Sagendorf, Bud) 사망
자겐도르프 [Sagendorf, Bud, 1915.3.22-1994.9.22]
뽀빠이 만화가 자겐도르프 사망
30여년동안 뽀빠이 연재만화를 그린 버드 자겐도르프(79)가 1994년 9월 22일 플로리다주 사라소타 근처 한 작은 마을의 요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워싱턴주 웨나치에서 출생, 소년 때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로 이주한 자겐도르프는 고교시절 산타모니카 부두에서 낚시를 하다가 만화주인공 뽀빠이를 만들어 낸 만화가 엘지 시거(Segar, Elzie, 1894~1938)를 만나 그의 조수가 됐다. 자겐도르프는 시거와 함께 '스위피' '신병 유진' '깡패 앨리스'와 같은 멋진 만화주인공을 만들어내 전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1938년 시거가 사망한 후 킹사의 만화 편집차장이 되었고 1959년부터 일간지와 일요판의 뽀빠이 만화를 맡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만화예술' (1955년) '뽀빠이 첫 50년' (1979년) 등 2권의 책도 저술했으며 시력악화로 일간지에 연재하던 만화작업을 1986년에 그만두었으나 일요판 신문의 연재만화를 계속 그려왔다. /조선
1990 -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9.22~10.7)제11회 북경아시안게임 개막
제11회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1990년 9월 22일 오후 5시 베이징[北京] 공인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개막식과 함께 시작됐다. 단결, 우의, 진보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번 대회에는 아시아 35개국 6천여명의 선수단이 출전, 이날부터 10월 7일까지 16일간 경기를 벌였다.
베이징 대회에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38개 회원국 중 이틀전 9월 20일 열린 OCA총회에서 회원국 자격을 상실한 이라크와 재정문제를 이유로 불출전을 통보해 온 요르단 예멘 등 3개국을 제외한 35개국이 출전, 1951년 뉴델리 제1회 대회 이후 가장 많은 출전국을 기록했다.
이번 대회에선 육상, 축구 등 27개 정식종목과 야구, 연식정구 등 2개 시범종목에서 총 3백13개(시범종목 5개 포함)의 금메달을 놓고 각국 대표선수가 열전을 벌였다. 27개 종목 3백8개의 금메달을 걸고 싸운 이번 대회의 종합패권은 금 1백83개의 홈팀 중국에 돌아갔으며 한국이 54개로 2위, 일본과 북한은 38개, 12개로 각각 3-4위에 올랐다. /조선
1989 - 한국의 가수 소녀시대의 멤버 효연(Hyoyeon) 출생
효연 [Hyoyeon, 본명: 김효연, 1989.9.22~ ]
효연(Hyoyeon, 본명: 김효연, 1989년 9월 22일 ~ )은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9인조 여성 음악 그룹 소녀시대의 팀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孝渊(중국어 병음 Xiàoyuān), 대만과 홍콩에서는 孝淵으로 쓰고 있다. 소녀시대 멤바들 중 가장 춤으로 유명하며 전문인 락킹, 팝핀 등 힙합 외 여러 장르의 댄스를 소화해낸다.
생애
1989 - 미국의 작곡가 어빙 벌린(Berlin, Irving) 사망
벌린 [Berlin, Irving, 1888.5.11~1989.9.22]
러시아 계 미국의 작사 ·작곡가.
시베리아의 테문 출생. 4세 때 미국에 이민하였으며 그 후 아버지를 잃고 갖가지 일을 하면서 음악을 공부, 작사 ·작곡을 시작하였다.
1911년에 작곡한 《알레산더스 랙타임밴드》가 출세작이며, 그 후 《올웨이스 Always》 《이스터퍼레이드 Easter parade》 《화이트크리스마스 White Christma》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뮤지컬작품으로는 《Annie, Get Your Gun》(1946) 《Call Me Madam》(1950) 등이 있다. /naver
1981 - 초고속열차 TGV 시험운행1981년 오늘 프랑스의 초고속열차 테제베(TGV)가 시험운행에 나섰다.파리에서 리용까지 최고 운행속도 시속 300km, 평균 속도 260km로 달렸다.컵에 담긴 물이 거의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열차의 흔들림도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차창 밖의 차들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달린 TGV는 예정대로 리용에 2시간 40분 만에 도착한다.일반 열차의 소요시간보다 1시간 10분이 단축됐다.이날 시험운행에 성공한 TGV는 닷새 뒤인 9월 27일부터 파리와 리용 구간에서 상업운행을 시작한다. /YTN
1980 -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이란ㆍ이라크전 발발 1980년 9월 22일, 간헐적으로 전개되던 이란ㆍ이라크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전쟁은 이라크 공군기가 테헤란 등 이란 공항을 폭격하면서 시작됐지만 그동안 내연해온 국경분쟁과 종교갈등이 원인이었다.
분쟁은 1937년에 그어진 샤트 알-아랍 수로 동쪽(이란쪽) 국경선을 팔레비 이란 전 국왕이 1975년에 중앙으로 변경하면서 시작됐다. 1979년 집권한 후세인이 국경을 원래대로 되돌릴 것을 요구하면서 대립이 심화되던 터에 종교갈등까지 더해져 충돌을 부채질했다.
1979년 회교혁명에 성공한 이란의 호메이니가 후세인의 반대파 시아파를 지원한 것이 후세인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이란의 군사력이 전과같지 않음을 간파한 후세인은 국경선 회복에 힘을 쏟았다. 자신의 독재권력을 반대하는 이라크 내부의 불만도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혁명 불만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이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전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당초의 예상과 달리 장기 소모전으로 전개돼 양 국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만 남긴채 1988년 유엔의 중재로 막을 내렸다. /조선
[어제의 오늘]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ㆍ미국·서유럽, 일제히 이라크 지원
중동의 맹주를 다투던 이란과 이라크는 1979년 각각 정치적 대격변을 겪는다. 2월에는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친미 팔레비 왕조가 몰락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했다. 7월에는 이라크에서 향후 중동 정세의 폭풍의 눈이 되는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양국은 국경 근방에서 소규모 군사충돌을 빈번하게 벌였다. 그러던 중 1980년 9월22일 이라크 전투기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폭격하면서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전이 시작됐다.전쟁의 표면적인 이유는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양국 접경지역의 경제·군사적 요충지인 샤트 알 아랍 수로를 둘러싼 국경분쟁이다. 이라크는 이 수로 전체의 지배권을 주장했고, 이란은 수로 중간에 국경선을 그어야 한다며 수십년 동안 대립해 왔다. 양국은 1975년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상회의 때 수로 중앙을 국경선으로 한다는 국경협정을 맺었다. 당시 중동의 최고 강자였던 이란 팔레비 국왕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집권 후 당시 협정이 불평등 조약이라며 폐기를 선언하고, 이란에 대한 전면전을 시작했다.중동지역의 복잡한 종교·정치적 요인도 전쟁의 핵심 요인이다. 이란은 전체 인구의 93%가 이슬람 시아파이고, 이라크는 인구의 50%가 시아파,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이 10%, 이슬람 수니파는 40%다. 이라크는 소수파인 수니파가 계속 집권하며 다수파인 시아파를 지배했다. 이슬람 혁명의 확산을 노린 이란의 호메이니는 이라크 내 시아파에게 수니파가 정권을 잡고 있는 권력체제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후세인으로서는 호메이니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서도 전쟁이 필요했던 셈이다.전쟁이 터지자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일제히 이라크를 지원했다. 이란에 세워진 반미·반서방 이슬람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초기부터 이라크에 막대한 무기를 판매했고, 미국은 이라크의 무차별적인 화학무기 사용과 민간인 학살을 묵인했다. 특히 도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83년 12월 도널드 럼즈펠드 특별교섭인을 이라크에 특사로 파견해 지원을 공식화했다.전쟁 초기에는 이라크가 우위를 보였다. 이슬람 혁명으로 이란 정규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데다 서방의 경제봉쇄로 군수지원도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 정신으로 무장한 이란의 혁명수비대와 민병대가 끈질기게 저항하며 전쟁은 장기화로 치닫았다.전쟁은 결국 8년을 끌다 유엔의 중재로 1988년 8월22일 끝났다. 양국에서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와 5000억달러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다. 1990년 양국은 1975년 협정대로 국경선을 정하기로 하면서 국교를 회복했지만 샤트 알 아랍 수로를 둘러싼 충돌은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김준기 기자 jkkim@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9-21 21:25:3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212125315&code=100100
- Ronaldo, Pele, Carlos
1976 - 브라질의 축구 선수 호나우두(Ronaldo) 출생
호나우두 [Ronaldo Luiz Nazario De Lima, 1976.9.22]
브라질의 축구선수.
호나우두 루이스 나자리오 다 리마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는 1990년 10대 때부터 브라질 리그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는데 126경기에 출전해 102골을 기록했다. 호나우두는 1994년 유럽으로 건너가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 팀에 합류했다. 1994~96년에 총 56경기 출전에 55골을 기록했고, 이적료 2,000만 달러에 다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팀으로 이적했다. 호나우두는 바르셀로나 팀을 스페인 리그에서 수위로 올려놓고 1996~97 유럽챔피언클럽컵과 유럽위너스컵을 승리로 이끌면서 37경기에 출전해, 34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96년 호나우두는 만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뽑은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7년 호나우두는 이적료 2,700만 달러에 이탈리아의 명문구단 인터나초날레로 이적했으며, 그해 FIFA에서 선정한 세계 최고의 선수로 또다시 선정되었다. 하지만 1999년에 그는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약 2년 동안 축구장을 떠나야 했으며, 2001년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에서 그는 8골을 넣어 득점왕에 오르며 브라질이 5번째 월드컵 우승을 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는 인터나초날레를 떠나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팀으로 이적했다. 2002년 호나우두는 FIFA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와 유럽에서 선정한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2007년 이탈리아의 A.C. 밀란으로 팀을 옮겼고 2008년 다시 무릎부상을 당했다. /브리태니커
1975 - 민방위대 발대식 전국에서 시작
민방위대 발대식
전국 직장, 지역별 민방위대 발대식 거행 청와대 비서실, 서울특별시 직장 민방위대 발대식 -향토의 역군, 나라의 번영, 통일의 초석이 될것을 다짐 경상북도청 직장 민방위대 발대식출처:대한뉴스 제 1050호
* 제작연도 1975-09-30
* 상영시간 01분 11초
* 출처 대한뉴스 제 1050
/e-영상역사관
http://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
10075&mediadtl=20285&gbn=DH&quality=W
[민방위 연혁]
1975년 07월 19일 - 민방위본부 설치
1975년 07월 25일 - 민방위기본법 제정
1975년 08월 26일 - 민방위본부 설치
1975년 09월 22일 - 민방위대 발대
1991년 04월 23일 - 재해대책업무 인수(건설부)
1994년 12월 23일 - 방재계획관실을 방재국을 개편
1995년 10월 19일 - 민방위재난통제본부로 학대 개편(재난관리국 신설)
2000년 06월 07일 - 민방위방재국을 민방위재난관리국과 방재관실로 분리
2004년 06월 01일 - 민방위업무 일부 소방방재청으로 이관
http://www.ganghwa.incheon.kr/open_content/main/pleasure
_ganghwa/civil_defense/defense_hall/history.jsp
1969 - 멕시코 대통령 로페스 마테오스(Lopez Mateos, Adolfo) 사망
마테오스 [Lopez Mateos, Adolfo, 1910.5.26~1969.9.22]
아티사판 출생.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고 멕시코주 주지사 비서를 거쳐 국민혁명당(PNR) 당수의 비서가 되었다. 1946년 상원의원, 유네스코의 멕시코 대표가 되었고, 1957년 입헌혁명당(PRI)의 대통령후보에 선출되어 1958년 대통령이 되었다. 쿠바혁명의 영향에 의한 국내의 좌우대립 속에서 인플레이션 문제, 토지개혁을 다루어 대통령 카르데나스 이후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63년 미국과의 엘 차미사르 영토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였다. /naver
- Egypt 1 Pound (Banknote)
1968 - 이집트 '아부심벨 신전' 이전공사 완료
아부 심벨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301∼BC 1235)가 건축한 신전 유적지. 아스완댐의 상류 약 280㎞ 지점인 나일강 기슭에 있다. 신전은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바위 속에 구축한 암굴신전인데 기자(Giza)의 피라미드와 맞먹는 큰 건조물이다. 대신전의 정면은 높이 33m, 너비 38m, 안길이 63m에 달한다. 정면에는 4체(四體)의 왕의 의좌상(椅坐像)이 있는데, 그 높이는 모두 20m이다. 중앙에 태양신 라 호라크티의 상이 안치되어 있고, 상부에는 태양을 예배하는 동물 개코원숭이 무리를 새겼다.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너비 16.7m, 안길이 18m의 제1실이 있는데, 이곳에는 높이 10m인 오시리스 신을 본뜬 람세스상이 8체 있고, 벽면을 모두 덮는 그림과 문자들은 왕의 카데슈싸움의 경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카데슈는 시리아 땅이며, 람세스 2세 군대와 히타이트군의 결전장이었는데, 기록에는 이집트군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이집트학자 J. 브레스테드가 <아르신전은 역사의 보고(寶庫)이다>라고 한 것은 이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제1실에 연결하여 좌우로 8실의 창고를 만들었다. 제2실은 너비 7.7m, 안길이 11.2m이며, 천장은 신상을 본뜬 4개의 기둥으로 떠받쳐 있다. 벽면 그림은 종교의식을 묘사하였다. 제3실은 너비 7.7m, 안길이 3.2m이며, 화면 내용은 제2실과 같다. 제4실은 지성소(至聖所)이며, 너비 4m, 안길이 7m이며, 제단에 4체 신상이 있는데, 신이 된 람세스 2세 자신과 라호라크티, 아모레, 프타하이다. 1년에 2회, 즉 2월 20일 무렵과 10월 20일 무렵 해돋이빛이 이 지성소를 넓게 비추어서 오른쪽 끝의 1체를 제외하고 3체의 신상을 떠오르게 한다. 소신전은 대신전 북쪽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정면에 높이 10m인 6체의 거상(巨像)이 있는데, 왕비 외에 왕과 여신을 나타낸다. 안길이는 약 20m이며, 방이 3개 있고 벽면에 그려진 것은 종교적인 그림과 글뿐이다. 1958년 구체화된 이집트의 아스완하이댐 건설계획으로 이 신전들 외에 여러 유적이 있는 누비아지방이 수몰될 위기에 놓이자,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이집트정부와 수단정부의 요청을 받고 1960년 누비아유적 구제를 위한 세계적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구제의 최대목표물은 아부심벨 신전이었다. 세계 여러 국가와 민간으로부터 기금이 갹출되고 여러 가지 구제안 가운데 스웨덴기술사단의 해체·이축안(移築案)이 채택되어, 스웨덴·이집트·독일·이탈리아·프랑스의 회사가 공동회사를 조직하여 1963년에 착공하였다. 1968년 두 신전은 원위치에서 63m 높은 120m 서쪽 지점에 옮겨 세웠다. /야후 백과
1964 - 한국의 월남군사원조단(의료대) 140명 사이공 도착
1962 - 네루 인도 총리, 프랑스 방문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초대 총리겸 외무장관이 된 네루! 1962년 오늘 프랑스를 방문한다. 네루는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엘리제궁에서 두 나라 사이의 현안을 논의하고 우호관계를 재확인한다. 아시아 여러 국가의 연대 강화, 미·소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주의와 균형외교는 네루가 인도 독립 이래 변함 없이 편 외교정책이었다. /YTN
1961 - 미국의 배우 매리언 데이비스(Davies, Marion) 사망
데이비스 [Davies, Marion, 1897.1.3~1961.9.22]
Marion Davies-Mini Biography
Marion Davies, born Marion Cecilea Douras on January 3, 1897, was one of the great comedic actresses of the silent era and into the 30's. She began as a chorus girl in New York, first in the pony follies and later in the Ziegfield Follies. Her stage name came when she and her family passed the Davies Insurance Building. one of her sisters called out "Davies!!! That shall be my stage name," and the whole family took on that name. When Marion moved to California, she was already involved with William Randolph Hearst. They lived together at Hearst's San Simeon castle, a very elaborate mansion, which stands as a California landmark to this day. At San Simeon, they threw very elaborate parties, many of them costume parties. Frequent guests included Carole Lombard, Mary Pickford, Sonja Henie, Dolores del Rio - basically all of top names in Hollywood and other celebrities including the mayor of New York City, President Calvin Coolidge and Charles Lindbergh. When Hearst died, Marion did not really know what was going on. The night before, there had been a lot of people in the house. Marion was very upset by the large crowd of family and friends. She said it was too noisy and were disturbing Hearst by talking so loud. She was upset and had to be sedated. When she woke, her niece, Patricia Van Cleve Lake, and her husband, Arthur Lake, told her that Hearst was dead. Upon Patricia's death, it was revealed she had been the love child of Davies and Hearst. Marion was banned from Hearst's funeral.Marion started lots of charities including a children's clinic that is still operating today. She was very generous and was loved by everyone who knew her. She went through a lot, even getting polio in the 1940's. She developed cancer of the jaw and died in 1961.
http://www.imdb.com/name/nm0203836/bio
- First Anniv. of Independence
1960 - 말리 독립
4-13세기에는 가나왕국이 지배하였으며 13-15세기에는 회교권의 말리 왕국이 15-16세기에는 송하이 왕국이 각각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송하이 왕국이 니제를 강 연안의 교역도시 팀북투를 중심으로 번성하였으나, 1591년 모로코에 의해 멸망하면서 17세기 중엽까지 모로코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세구와 카르타에서 밤바라족 왕국이 건설 되었으나 19세기중엽, 프랑스의 침략으로 식민화가 시작되었다. 1850~1864년에 투쿨로르 족의 회교도 알마르 우마르가, 1872∼1895년에는 말링케족의 사모리 투레가 프랑스군에 저항했으나 프랑스는 1880-1895년 두 세력을 정복하여 1920년 서아프리카 프랑스 수단으로 합병 식민화하였다. 니제르강 유역과 현재의 부루키나파소는 각각 1911년과 1919년에 프랑스 수단에서 탈퇴,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이 들은 프랑스의 기본법에 의해 자치가 인정되어 1958년 11월 프랑스 식민지에서 공동체 공화국이 되었다. 1960년 8월5일 어퍼볼타로 독립하였으며, 1959년 세네갈과 연방을 구성한 말리는 1960년 9월 22일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을 한다. 초대 대통령에선출된 모디보 케이타는 사회주의 일당제의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였으나, 1968년 11월 군사 쿠데타로 추방되어, 트라오레를 위원장으로 하는 군사해방 위원회가 10여 년에 걸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6월 민정이양 후에도 트라오레가 계속 대통령에 유임하였으나 1991년 3월 군부가 트라오레 정부를 몰아내고, 1992년 4월 알파 우나르 코나레가 대통령이 되었다.2000년 5월 초에 말리의 대통령이 양국의 우호 증진 및 경제협력 등의 일환으로 방한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말리 국내 사정상 방문을 하지 못하였다.
/EXODUS (말리의 역사)
http://www.koreabound.com/han/nation/africa/mali_info.html
1955 - 충주비료공장 기공
1955년 충주비료공장 起工(기공)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자본 2억7500만원에다 차관 3333만8000달러가 투입된 국내 최초의 현대식 화학비료 공장이었다. 이것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사업의 핵심인 석유화학공업 건설의 추진체가 된다. (발췌)[화보로 보는 한국의 1인당 GDP 변천사-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이다]
김태완 /월간조선 2010년 1월호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nNewsNumb=201001100082&ctcd=N
1941 - 드골, 자유프랑스 국민위원회 조직
1940년 6월 16일 프랑스 정부는 합헌적인 절차에 의해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인계되었는데, 페탱은 이미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2일 후인 6월 18일 프랑스군의 한 장교인 샤를 드골 장군은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프랑스가 계속 싸울 것을 호소했다. 영국측의 조심스러운 지원하에 드골은 영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전쟁 발발 전부터 영국에 거류하던 프壕?교민 지원자들과 프랑스 해군 부대들을 모아 자유 프랑스군을 단계적으로 증강했다. 1940년 8월 아프리카의 3개 프랑스 영토인 차드·카메룬·무아앵콩고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편으로 모였으며, 9월에는 인도와 태평양의 프랑스 식민지들이 그뒤를 따랐다. 1940년 9월 자유 프랑스의 다카르 원정군이 자유 프랑스에 대한 세네갈의 즉각적인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지만, 드골은 그해 10월 제국 국방회의를 신설했다.
조르주 카트루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군이 1941년 6~7월에 영국이 주도하는 시리아 작전에 참가했다. 그 작전은 페탱이 비시에서 수립한 정부에 충성하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었다. 9월에 드골은 망명정부인 프랑스 국민위원회를 창설했다.
자유 프랑스군은 비시 정부에 의해 반군으로 매도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많은 좌익주의자들은 드골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싫어했으며, 영국은 드골이 프랑스의 위신이나 프랑스 주권의 화신이라는 자신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해 골치를 앓았다. 비시 정부와 외교 관계를 지속하고 있던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12월 자유 프랑스의 해군이 명목상 비시 정부가 통치권을 물려받은 뉴펀들랜드 근해의 생피에르 섬과 미클롱 섬을 점령한 데 기분이 상했다. 그때는 마침 미국이 아직 비시 정부의 프랑스는 적국으로 삼지 않고 추축국들을 상대로 전쟁에 돌입한 달이었다. 영국과 자유 프랑스 사이의 긴장상태는 자유 프랑스가 런던과 프랑스 국내에 있는 애국적인 레지스탕스의 수많은 항독(抗獨) 단체들 사이의 모든 비밀관계를 독점할 권리가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해 고조되었다. 레지스탕스와의 유대를 과시하기 위해서 드골의 운동조직의 명칭이 1942년 7월 14일자로 전투 프랑스군(Forces Françaises Combattantes/FFC)으로 바뀌었다. /naver
1937 - 중국 제2차 국공합작 성사
[어제의 오늘]1937년 제2차 국공합작 성사
ㆍ일제 침공 맞선 불안한 좌우연합
시안사변(西安事變)은 1936년 12월12일 동북군 사령관인 장쉐량(張學良)이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산시성 시안을 찾은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를 화칭츠(華淸池)에 가둬둔 채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에 나설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동북 5개성을 통치하던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이 1인자 장제스를 무력 감금한 이 사건은 세계를 경악시켰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사되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국민당은 27년 제1차 국공합작 결렬 이후 공산당의 소비에트 지역을 공격했고, 궤멸위기에 빠진 공산당의 홍군은 근거지를 서남부에서 중국 북서부 옌안(延安)으로 옮기는 대장정에 나서야 했다. 한편 일본군이 동북 3성을 침략하자 중국에는 항일여론이 들끓었고, 공산당은 국민당에 내전 중지와 항일을 위한 제휴를 제안했다.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지만 장쉐량이 이에 동의해 시안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어 일본군이 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을 일으키며 중국 내륙 침략을 본격화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37년 9월22일을 기해 제2차 국공합작에 들어갔다. 국민당은 공산당을 합법화시켰고, 38년에는 국민참정회에 공산당을 비롯한 제 당파와 각계인사들을 참여시켰다.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八路軍)과 국민혁명군 신편제4군(新四軍)으로 재편성됐다. 국공합작 기간 중에도 양측간 반목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 이후 합작이 결렬되며 제2차 국공내전으로 이어졌다.중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시안사변과 장쉐량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8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지만, 문서는 한 장도 없고 모든 합의는 구두로만 이뤄졌다.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은 무력으로 사건 해결에 나서려던 국민당 정부 대신 시안으로 날아가 장쉐량, 공산당 특사로 급파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담판을 벌였다. 장쉐량은 2주일 만인 36년 12월25일 장제스를 풀어준 뒤 함께 난징(南京)으로 날아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장쉐량은 49년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옮겨진 뒤 90년 6월1일 생일 때까지 53년간 연금생활을 해야 했다. 수십년의 연금기간 중 그에게 힘이 돼 준 것은 젊은 시절부터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쑹메이링이었다. 장쉐량은 연금이 풀린 다음해인 91년 대만을 떠났고, 2001년 하와이에서 101세로 일생을 마쳤다. 구국의 일념으로 권력과 부귀를 포기하고 고난의 반세기를 견뎌야 했던 장쉐량의 생애는 대만과 본토 중국인들 모두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서의동기자 phil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9-21 17:43:3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9211743325&code=100100&s_code=ap005
1918 - 반나치 저항조직 '백장미'의 한스 숄(Scholl, Hans) 출생
숄 [Scholl, Hans, 1918.9.22~1943.2.22]
심야통신/백장미의 기도
(발췌) 나치 독일 시대 뮌헨대학 학생이었던 조피 숄(Scholl, Sophie, 1921~1943)은 오빠 한스 숄(Scholl, Hans, 1918~1943) 및 동료들과 함께 ‘백장미(Die weisse Rose)’라는 반나치 저항조직에서 활동했는데, 1943년 2월18일 오빠와 함께 체포돼 4일 뒤 처형당했다. 조피는 21살, 한스는 24살이었다.
백장미 저항운동이란 제2차 세계대전중이던 1942년 6월 익명의 유인물이 뮌헨지역의 불특정 시민들에게 우송됐다. “무책임한 어두운 충동에 몸을 맡긴 지배자 무리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고 통치를 허용할만큼 문화민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시작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파시즘이나 그와 유사한 모든 절대국가 조직”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저항을 해야 한다.- <백장미 통신>이라 이름붙인 유인물은 나치의 전쟁수행정책에 대한 ‘소극적 저항’(비폭력불복종)을 촉구했다.
<백장미 통신> 제1호는 뮌헨대학 의학부 학생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이 썼다. 제4호까지 냈을 때 그들은 동부전선에 동원돼 전장의 무참한 현실과 유대인 학살 등을 직접 체험한 뒤 더욱 저항 신념을 굳혔다. 1942년 11월에 전선에서 돌아온 그들은 동지들을 늘리는 한편 베를린이나 다른 지역 저항그룹들과 서로 연락을 취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사실을 안 그들은 <백장미 통신> 제6호를 만들었다. 제6호는 “남녀학생 여러분, 우리 민족은 스탈린그라드 괴멸에 떨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우리 민족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유럽 노예화에 저항하고 자유와 명예의 새로운 신념으로 가득찬 진군을 시작하려 한다”고 끝맺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한 쿠르트 후버 교수가 썼다. 최후의 통신이 된 제6호를 조피와 한스는 대학 구내에 배포하다가 대학 직원의 고발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2월22일 열린 민족재판소는 조피와 한스, 크리스툴 프로프스트 등 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뒤 관련자 체포가 잇따라 43년 4월의 제2차 재판에서는 후버 교수,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3명에게도 사형이 선고됐다. 백장미 그룹에 대한 재판은 1944년 10월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모두 1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에서 게슈타포의 심문을 받은 시민은 100만명을 넘는다. 민족재판소는 ‘국가반역죄’를 처리할 목적으로 1934년에 설립됐는데, 패전까지 5200건의 사형판결을 내렸다. 백장미는 비좌익계 저항운동을 대표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서 경 식 / 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 2006-02-16 오후 04:15:00 http://www.hani.co.kr/arti/BOOK/102802.html
- Scene from 'Le Grand
Meaulnes'
1914 -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알랭 푸르니에(Alain-Fournier, Henri) 사망
알랭 푸르니에 [Alain-Fournier, Henri, 1886.10.3~1914.9.22]
셰르주(州) 출생. 시골의 소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행복한 소년시절을 보내고 파리의 리세(고등중학교)에 진학하여, 거기서 급우 J.리비에르(후에 평론가)와 사귀어 평생의 친교를 맺었다. 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군에 소집되었고, 제대 후 곧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한때 런던 근처에서 일하였고, 1910년에는 《Paris Journal》지(紙)의 문예란을 담당하고, 또 여러 잡지에 평론을 기고하며, 시인·평론가인 C.P.페기와도 친교를 맺었다. 1913년 《NRF》지(誌)에 소설 《몬대장 Le Grand Meaulnes》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이것은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청년의 사랑과 모험으로의 동경을 추억 속에 그린 청춘문학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정하여, 베르댕 근처의 생 레미 숲의 전투에서 부상하여 행방불명되었다. 시·평론 등의 유고집 《기적 Miracles》(1924), 친구 리비에르와의 1905∼1914년에 걸친 《서신 왕래 Correspondance》(4권, 1926)와 《가족에의 편지》 등을 남겼다. /naver
1914 - 영국 순양함 3척 독일 잠수함에 피격, 400명 사망
1914년부터 시작된 세계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독일이 강화를 조건으로 항복할 때까지 해상에서는 잠수함의 전략, 전술적 운용이 처음으로 적용되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 전력으로서 미래 잠수함 전략 전개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잠수함은 그때까지 개발된 디젤/전기추진방식의 확립과 미국-영국의 주 보급로인 대서양을 주 전장으로 하였다. 독일 해군의 우수한 유보트 잠수함의 건조와 전술적 운용 등을 기반으로 독일은 영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대서양에서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전개하였다. 결과로 영국의 전함 4척(Formidable, Dreadnought, Triumph, Majestic)과 순양함 5척(Pathfinder, Abouker, Cressy, Hogue, Hawke)을 포함하여 민간, 군함정 5,000여척이 침몰되고 15,000여명의 인명 손실이 발생하므로서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되었다. 독일측에서도 유 보트는 개전 초기에는 20여척의 소규모였으나 전쟁 중 345척이 건조되어 작전에 참여하였으며, 유보트도 178척이 침몰, 파괴되어 13,000여명의 잠수함 관련 요원 등 5,000여명의 인명 손실을 가져왔다.
(송광섭/잠수함전의 역사) /월간조선
송광섭 yysong@hanmail.net /월간조선 2007-07-06 오후 2:48:00
http://monthly.chosun.com/coreporter/cowriterboardread.asp?idx=3794&cPage=1&cowid=yysong
U보트 [U-boat]
제1 ·2차 세계대전 때 대서양 ·태평양에서 활동한 독일의 중형 잠수함. 대량 생산이 가능하였고, 무음(無音) ·급속 잠항능력이 뛰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 장갑순양함 3척을 격침하여 알려졌고, 또한 군함 ·상선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 공격하여, 한때 영국을 궁지에 몰아넣었다.독일은 1919년 ‘베르사유조약’으로 잠수함의 건조가 금지되었으나 나치스의 재군비에 따라서 건조를 재개하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서 1,158척을 건조하여, 연합군의 군함 ·상선 5,150척(총톤수 2157만 726t)을 격침시켰다. 이중에는 전함 ·항공모함 ·구축함도 포함된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200∼300t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1,000t 이상의 것도 출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주력이었던 U7형은 수상배수량 790t, 속력 17kn, 항속거리 1만 2000km이며, 어뢰발사관 5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naver
1911 - 44세의 사이 영,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완봉
1911년 9월 22일.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44세 우완 투수 사이 영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1대0으로 완봉했다. 그해 파이어리츠에 거둔 두 번째 완봉승이었다. 브레이스는 그해 파이어리츠에 3승22패의 절대 열세였으나, 그는 3승 중 2승을 완봉승으로 장식했다.
이날의 승리는 통산 511번째로, 그는 1890년 23세 때 메이저리그에 입문해 22년 동안 연평균 23.2승씩을 기록했고, 이러한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생애 통산 815게임 선발출장, 753게임 완투, 313패, 7356이닝 투구 등도 고스란히 미국 프로야구 최고기록으로 남아있다.
그의 본명은 `덴톤 트루 영`이었지만, 팬들은 사이클론(미 대륙을 덮치는 폭풍우)처럼 빠르면서 무시무시한 공을 던지는 그를 `사이 영`이라고 불렀다. 투수의 대명사가 된 사이 영은 1937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1955년 사망했다. 미국프로야구는 이듬해인 1956년, 그의 이름을 따서 최고 투수에게 주는 `사이 영` 상을 제정, 매년 수여하고 있다. /조선
1885 -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 조지프 치플리(Chifley, Joseph) 출생
치플리 [Chifley, Joseph Benedict, 1885.9.22~1951.6.13]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총리(1945~49)·노동당수(1945~51).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은행개혁·사회보장·이민확대정책을 실시했고 전후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성장을 촉진시켰다.
젊은 시절 철도기사로 일했던 치플리는 뉴사우스웨일스에 있는 철도노동조합에서 활동했다. 1928~31년 의회에 진출했으나 재선에 실패한 이후 여러 공공활동에 열중했다. 1935~37년 왕립은행위원회에 참여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그의 재정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1941년 존 커틴의 주도 아래 노동당이 다시 정권을 장악했을 때 치플리는 연방 재무부장관으로 임명되어 연방의 징세권을 확대시키는 등 경제에 대한 엄격한 전시통제를 실시했다. 1945년 커틴의 뒤를 이어 총리로 취임한 그는 주립은행과 민간은행의 상호관계 및 연방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입법안을 지지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의 국제항공사인 콴타스사를 국유화하고 정부 소유의 국내항공인 트랜스오스트레일리아항공을 설립했다. 그밖에도 그는 공공보건법과 노동중재법을 제정했고, 농업 및 산업 개발을 촉진했으며, 대학원 연구의 중핵기관으로 캔버라에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교를 설립했다. 1948~49년 치플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에 대항해 싸우는 인도네시아인들을 지지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가 견지해왔던 아시아 국가에 대한 적대정책을 변경시켰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에 대해서는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민간은행을 국유화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했는데, 이러한 그의 정책들은 1949년 선거에서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치플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죽을 때까지 야당인 노동당의 당수로 활동했다.
링컨(Abraham Lincoln) 미국 대통령이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이튿날인 1862년 9월 22일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여러 주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다. 자치주가 이에 응하지 않자, 링컨은 1863년 1월 1일 흑인노예의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선언은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이외에도 흑인들의 연방 군대 입대를 허용하고 있었다.
이 노예해방선언은 내전에서의 전략적 의의도 지녔는데, 그것이 노린 것은 남부의 사기저하와 남부 여러주의 연방 조기복귀였다. 더욱이 흑인을 북군 병력에 흡수할 수 있게 됨으로 북군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링컨이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노예해방선언 때문일 것"이라고 했듯이, 후세의 역사도 그의 바램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인도적인 명분에서 출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단지 미 연방의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을 결심했고, 선언을 발표했?뿐이다. 노예해방은 단지 부수적인 산물이었을 뿐이었다.
노예해방의 실현은 북부의 산업 자본가와 남부의 대지주 사이의 경제적 이해대립이 전쟁으로 폭발한 뒤에야 형식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조선
1792 - 프랑스 국민공회, 왕정 폐지하고 공화정 선포
1792년 8월 9일 밤 프랑스 민중의 대표를 자임한 지구위원(地區委員)은 돌연 파리시청을 점령하고 혁명의 코뮌(commune:自治市會)을 수립하였으며, 국민군 사령관 망다를 사살하고 전지구에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8월 10일 이들의 호소에 호응한 수만의 시민이 집결하여 튈르리 궁전을 향해 진격을 감행하였다. 왕궁의 스위스 용병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국왕 일가는 난을 피하여 입법의회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의회도 시민대중으로 포위당하여 국왕 일가는 코뮌에 인도되고, 왕권도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이후 약 1개월간 파리에는 정부 ·의회 ·코뮌의 3권이 분립하여 시민생활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9월 2일에는 오스트리아군이 전진한다는 소식과 함께 사제(司祭)를 주로 하는 반혁명 용의자가 애국자의 손에 의해 대량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입법의회는 해산하고, 다음날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성립되었다. 국민공회는 프랑스 왕정의 폐지, 공화정의 채택을 선언하였다. 이전의 좌익 지롱드파는 국민공회에서 우익으로 돌았고 좌익에는 새로이 산악파(山岳派)가 등장하였다. 지롱드파와 산악파는 처음부터 적대감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어 항쟁하였다. 지롱드파가 의회주의를 내걸고 자유주의경제 ·지방자치의 우선을 주장하는 부르주아 공화파라면, 산악파는 ‘유일 불가분의 공화국’을 원칙으로 하고 중소시민·농민의 옹호와 해방을 주창하며 인민의 이름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수행하려는 과격파였다. 전자가 롤랑 부인의 살롱을 중심으로 계몽된 신사의 단체라면, 후자는 파리의 코뮌 자코뱅 클럽을 보루로 하여 실력으로 계급투쟁을 관철하려고 하는 애국자의 당파였다. /naver
1791 - 영국의 물리학자, 화학자 마이클 패러데이(Faraday, Michael) 출생
패러데이 [Faraday, Michael, 1791.9.22~1867.8.25]
런던 근교의 뉴잉턴 버츠 출생. 12세 때부터 서점 겸 제본업자 밑에서 일하며 틈틈이 읽은 책에서 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일반 강연을 들으면서 화학실험을 시도하였다. 19세 때 H.데이비의 강연을 듣고, 그의 도움으로 1813년 왕립연구소의 실험조수가 되었다.
여기서 데이비의 실험을 보조하면서 화학 연구를 시작, 염화질소 연구로부터 여러 가지 특수강(特殊鋼) 연구(1819∼1824), 염소의 액화 연구(1823), 벤젠 발견(1825) 등 실험화학상 뛰어난 연구를 하였고, 1824년 왕립학회 회원, 다음 해 왕립연구소 소원(所員), 연구소 주임이 되었다.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電磁氣學)에 흥미를 가져 H.C.외르스테드가 발견한 전류의 자기작용(磁氣作用)을 조사, 연쇄적 회전(전자기회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1821). 그 역현상인 자기의 작용에 의해 전류를 만들어내는 연구에 착수하여, 회로(回路)의 개폐에 의하여 제2의 회로에 발생하는 전류, 전자석, 이어 자석에 의한 똑같은 전류를 검토하여 전자기유도를 발견하였다(1831). 이것으로 맴돌이전류와 지구자기(地球磁氣)에 대한 응용에서도 성공하였으며, 자체유도(自體誘導)를 발견 ·해석하였다.
패러데이의 전자기학 연구는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통일적이었다. 전기화학의 기초를 만든 전기분해법칙 발견(1833)과 방전현상 연구가 있는데, 이런 성과들에서 여러 가지 전기의 동일성을 간파, 보편성을 가진 통일 개념으로서의 전기를 제창하였다. 또한 그 때까지의 원격작용론(遠隔作用論)을 버리고 전자기적인 힘의 근원을 공간적인 상태로 되돌리려는 근접작용론을 제창하여(1827),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의 길을 열고, 빛의 전자기파론의 선구적 고찰도 하였다.
이 밖에 진공방전에 관한 ‘패러데이암흑부’(1838), 자기장(磁氣場)에 의한 편광면(偏光面)의 회전(패러데이효과), 반자성(反磁性) 발견 등 중요한 공헌이 많았다. 일반 강연도 훌륭하여 크리스마스 강연집인 <양초의 과학>은 오늘날에도 읽혀진다. /naver
- Groom Leading Horse
- Kranj - Weimar, 1630
- View of Klagenfurt - Period Cityscape
1593 - 독일의 동판화가 마테우스 메리안(Merian, Matthaeus) 출생
메리안 [Merian, Matthaeus, 1593.9.22~1650.6.19]
17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삽화가·판화가·서적상.
1609년 그는 취리히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디트리히 마이어에게서 그림과 판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1613년 프랑스 낭시로 이주했다. 그는 파리와 슈투트가르트(1616) 및 네덜란드에서 공부한 뒤,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1618년 출판업자이자 판화가인 J. T. 드 브리의 맏딸과 결혼했다. 그는 오펜하임에서 장인과 함께 일하다가 바젤로 돌아갔지만, 드 브리가 죽자(1623) 장인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갔다.
메리안은 1624년에, 발견된 여행의 방대한 기록인 〈인도 기행문집 Collectiones Peregrinationum in Indiam〉을 출판하여 1590년부터 드브리출판사가 시작했던 작업을 마무리했다. 드브리출판사는 1726년까지 메리안 가문에서 계속 운영했지만, 172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627~29년 벤첼 흘라르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메리안의 공방에서 일했다. 1625~30년 메리안은 그림 성서를 출판했고, 1635년 〈유럽의 연극 Theatrum Europaeum〉 총서를 발간하기 시작했으며, 1642~88년 마르틴 자일러의 〈독일 지리서 Topographia Germaniae〉를 출판했다. 이 책에는 그와 그의 아들인 마테우스 및 카스파어가 인그레이빙과 에칭으로 직접 제작한 2,000여 장의 도판이 실려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는 〈죽음의 무도 Dance of Death〉(1649)가 있다. 그의 딸 안나 메리안 시빌라(1647~1717)는 자연사 분야의 책에 정확하고 섬세하게 주제를 그린 삽화로 유명했다.
- 500th Birthday of Guru Nanak
1539 - 인도의 종교가, 시크교의 창시자 구루 나나크(Nānak, Guru) 사망
나나크 [Nānak, Guru, 1469.4.15~1539.9.22]
[역사 속의 인물] 시크교 창시 구루 나나크
1469년 4월 15일 지금의 파키스탄 라호레 지역의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난 나나크는 어릴 때부터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학교에 들어간 7살때 유일신을 설명하는, 상징으로 가득찬 페르시아 문자들을 정확하게 묘사해 교사들을 놀라게 했다거나 잠잘 때 코브라들이 그의 머리 주위로 몰려와 거친 햇살을 막아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성장하면서 여행길에 나서 동서남북으로 수천km를 다녔고 4차례의 중요한 여행에서 만난 수행자들과 대화를 나눈 뒤 종교적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30살에 "내가 가야 할 길은 힌두도, 이슬람도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시크교를 창시했다. 시크교는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비판적으로 통합한 종교로 신의 메시지와 이름으로 개인적 수양을 통한 해탈을 목적으로 한다. '시크'는 고대 인도어로 '제자' '사도'라는 뜻이며 스승이자 법주(法主)인 '구루'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돼 있다.
구루 나나크는 1539년 오늘, 71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가 죽은 뒤 시크교는 10대 구루를 거치며 고난 속에서 성장, 현재 전세계적으로 2천300여만 명의 신도가 있는 5대 종교로 자리 잡았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09월 2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4626&yy=2011
- 'Anne of Cleves' by Hans Holbein the Younger1515 -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4번째 아내 앤(Anne of Cleves) 출생
앤 [Anne of Cleves, 1515.9.22~1557.7.16]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4번째 아내.
헨리 8세(Henry VIII)가 앤과 결혼하게 된 것은, 그녀의 오빠이자 독일 서부지역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클레베스 공작 빌헬름과 정치적 동맹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539년 로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이 결탁해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잉글랜드를 공격하려는 조짐이 보였기 때문에 제임스는 이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위협은 헨리 8세의 측근 각료인 토머스 크롬웰로 하여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원수지간인 루터파와 잉글랜드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결혼을 서둘러 주선하게 했다. 1540년 1월 1일 앤은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잉글랜드 땅을 밟았고 5일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헨리 8세는 기대했던 것만큼 앤이 세련되지 못하고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며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몹시 실망했다. 그는 곧 앤이 세련되지 못하고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데 울화가 치밀게 되었다. 가톨릭 국가들간의 동맹이 실현되지 못하자 이들의 결혼은 정치적인 골칫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성공회 주교회의는 이 결혼에 대해 무효 선언을 했다. 앤은 잉글랜드에 남아 있는다는 조건으로 이혼에 동의하고 막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다. 그녀는 가끔 궁정을 방문하기도 하면서 죽을 때까지 리치먼드와 블레칭글리에서 지냈다. /브리태니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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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출처: 꿈꾸는 다락방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모닝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