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11차시 합평자료(2023년 5월 13일 토)
1. 엄마의 반지/권강숙
1. 스마트폰에 안전문자가 울린다. 하늘이 온통 엷은 노란안개처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숨쉬기도 조심해야 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느낌이다.
오염된 먼지를 씻어내기 위해 노치원에서 돌아오신 엄마께 샤워를 하자고하니 귀찮으신지 나중에 하자 신다.
요즘은 움직이는 것을 몹시 싫어해서 집에서 목욕을 시켜드리려면 실갱이(언성높여야)를 해야 한다.
‘엄마 따뜻한 물로 씻고 나면 기분 좋아지니 빨리 씻어 드릴 게요’ 엄마를 겨우 설득시켜 샤워를 해드리니 ‘아이고! 시원해라 몸이 개운해서 좋다. 고맙다’라고 연신 좋아하신다.
이러한 일상 속에 내 삶이 갇혀 버린 느낌이지만 그래도 엄마가 곁에 있으니 그냥 좋다.
2. 저녁을 먹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 갑자기 반지 이야기를 꺼내신다. ‘어떤 할망구가 내 반지를 한번 끼어보자고 하고는 안돌려준다’고 속상해하신다. 순간 ‘엄마! 또 반지 이야기야! 이제 그만 좀 하세요 한번만 더하면 100번이 되겠다.’ 조용한 방안에 편안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내 목소리에 깨진다. 누가 반지를 가져갔다는 생각이 엄마의 뇌리 속에 꽂히면 그것에 대해 말씀을 계속 반복하시고, 한번 했던 질문을 돌아서면 또 하신다.
평소와 다른 엄마의 엉뚱한 행동과 예기치 않은 말씀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그게 아니라며 고쳐보려고 했다. 그를 때 마다 엄마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입을 꾹 다무시고 어디론가 숨어드시는 느낌에 마음을 아프게 한다.
3. 언제부터인가 가끔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고, 잘 이해하지 못하시면 안 들린다고도 하신다. 보청기를 해드려야 하나? 고민도해보지만 편안한 상태에서 조용히 엄마라고 부르면 대답하신다. 어! 이것도 아닌데 그럼 뭘까? 기분에 따라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 것일까?
4. 반지를 잃어 버렸다고 한 사건은 벌써 세 달이 넘었다.
1월 어느 추운 날 아침에 따뜻한 캐시미어장갑을 끼시고 노치원에 가셨다. 주간보호센터 차로 노치원에 가서 그곳에서 다른 어르신과 어울려 지내시다가 저녁에는 센터 차로 집 앞까지 와서 엄마혼자 집에 들어오신다. 아직은 엄마가 걸어 집에 돌아오시는데 걸을 수 있고 집을 찾을 수 있으니 안심이 되는 면은 있다.
5. 노치원에서 돌아오신 엄마의 옷과 가방을 챙기다보니 아침에 끼고 가신 장갑이 보이지 않는다. 다음날 장갑을 찾아서 가져오시라 했는데 저녁에 보니 그냥 오셨다.
‘찾아봐도 없어, 그런데 말이다 어떤 할망구가 내 것과 똑같은 장갑을 끼고 자랑을 했어 보니 분명 내 장갑 이라, 그것 내 장갑 이야 내놔 했는데 그 할망구는 자기 거라 우기며 안 주더라’며 속상해 하셨다.
6. 장갑을 잃어버린 지 얼마 지나서 노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께서 아침에 반지를 끼고 오신 것 같지가 않는데 반지를 찾고 계세요 어떻게 하지요?’ 라며 걱정하는 목소리에 엄마와 대화를 해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1월에 장갑을 잃어버린 사건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직감했다.
노치원에서 옆에 앉은 할머니가 엄마의 장갑을 껴보자고 하고는 옆 친구 옆 친구로 장갑이 돌다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 사건이 엄마의 머릿속에서 반지로 바뀐 것 같다.
7. 노치원에서 전화 온 날 옆자리 할머니가 반지 자랑을 하셨는데, 그 순간 엄마는 그 할머니에게 반지를 돌려달라며 소리를 치셨다고 한다.
반지사건이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그다음날도 그 할머니에게 반지를 돌려달라고 닦달을 치셨고, 계속 반지 때문에 그 할머니를 괴롭히신다고 전화가 온다.
8. 노치원에서 귀가하여 맥없이 앞만 응시하며 앉아 계시다가도 순간 반지를 찾으신다. ‘그 할망구가 한번 껴 보자하고는 안돌려준다’며 속상해 하시며 손가락을 만지신다. 욕심일까? 아니면 물질이 아닌 잃어버린데 대한 억울함일까? 엄마를 바라보는 심경이 복잡해진다.
오랜 세월 고목이 되도록 삶을 지탱하다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상황을 보는 것 같아 느낌이 착잡하다. 살다가 어느 순간 늙음을 인지할 때 자신의 모습에 대한 충격, 주변으로 부터 한 인간으로 존중과 배려를 받지 못할 때 받는 마음의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품위 있게 삶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 줄 을 놓지 말아야 하는데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길이 늙음의 길이 아닐까?
9. 사랑방 주간보호센터에서 또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반지문제로 그 할머니를 울렸단다. 그래서 보호자의 항의전화가 왔으니 조처를 해달란다. 평소에 말이 없고 남의 말을 하지 않아 복을 받는다는 주변사람들의 칭찬을 듣던 엄마가 변했다. 세월은 숙명처럼 사람을 망가지게 하는 것을 본다. 나이 들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옛 어르신들의 말이 이제 사 공감된다.
10. “당신의 몸도 움직임도 무겁고 힘겨운데, 마음도 정신도 바뀐 세월을 따라 잡을 수도 없고, 뭐 던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런 자신이 너무 힘들고 자존감이 떨어져 서글퍼 질 것도 같고, 가슴 깊숙이 쌓인 슬픔과 분노가 바뀌어 자꾸 말썽을 피우고 고집을 피우시는 것 같다.
엄마를 한사람의 인격체로 보지 못하고 그냥 엄마니까 편안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지시하고 내 뜻에 맞춰 보호자라는 권력자가 되어 눈치 보게 한 것은 아닌지, 무심하게 했던 말들로 엄마를 힘들게 하지나 않았는지, 내심 미안한 마음이 올라온다.
11. 이제는 모든 것이 노화되어 고쳐지지 않고 더 악화만 안 되면 좋겠는데...
엄마를 한사람의 인격체로 이해하고 예의와 존중으로 따뜻한 보살핌을 느끼도록 한다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오만생각이 오고간다. 내가 생각을 바꾸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인내하며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11.황사를 쓸어 갈 단비가 내리고 온통 주변이 조용하다. 이른 아침 학교에 간다고 가방을 챙기시고 사랑방주간보호센터(노치원)에 가기위해 아침을 먹다가 엄마가 손가락을 보신다. 그리고는 “그 할망구가 한번 껴보자고 내 반지 가져가서는 안 주네” 황당하다. 시간이 흘러 괜찮아 지신 줄 알았는데 혼자 말씀을 하시다 내가 무반응으로 침묵하니 눈치를 보신다.
그래도 아직은 정신 줄잡고 계시니 고맙다.
언제 정신 줄을 놓을지 알 수 없지만. 기억력과 정신이 조금이나 맑을 때, 살아 계실 동안 가족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존재감을 느끼며 존중받는 삶을 사시다 가시도록 소망 해본다.
2. 신발 / 최정란
1. 나는 한국 여성치고 키가 크다. 학창 시절 키대로 줄을 서면 내 자리는 늘 제일 뒤편이었다. 요즘이야 키가 큰 젊은 여성들이 많다지만 그 시절에 나만큼 키 큰 여자애는 드물었다. 나는 자라는 동안 "얘는 뭘 먹고 이리 크냐?"는 소리를 참 지겹게도 들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키 때문에 굽이 높은 신발을 사 신을 일이 없었다. 아니 키를 높일 가능성이 있는 신발은 아예 선택지 밖으로 제쳐두었다.
2. 사실 내가 제쳐두고 말고 할 선택지도 없었다. 백화점이나 신발 가게 매장에 진열된 신발 중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고를 수 있는 자유란 애초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똑같은 디자인이라도 어른 옷보다 아이 옷이 예쁘듯, 같은 제품이라도 큼직한 구두는 예뻐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디자인이 예쁜 신발들은 늘 내 발에 들어가지 않는 크기로만 만들어지기 마련이었다. 남들보다 큰 발 때문에 선택의 범위는 늘 남들의 10% 도 채 되지 않았다.
3. 내가 학생일 때 여성용 운동화는 보통 245까지 판매되었다. 발의 크기가 그 한계선을 넘긴 어느 시점부터 나는 여성용 운동화가 아닌 남녀공용 운동화를 신어야 했다. 세월이 흐르고 우리나라 여성들의 평균 신장이 높아지면서 여성용 신발을 250까지 제작하는 회사들이 차차 늘어났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이가 들면서 발에 살이 붙고 볼이 늘어났는지 내 발 치수도 255로 한 단계 커져 버렸다. 이래저래 발에 맞는 신 한 켤레 사는 일은 늘 만만치 않다.
4. 운동화야 동네 스포츠 점에서 남녀 공용제품을 구매하면 그만이지만 가끔 정장 구두가 필요할 때면 정말이지 난감해진다. 돈을 들고 사러 나가도 그날 안에 해결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내 발에 맞는 크기의 제품이 여성용 매장에 잘 없는 까닭이다. 마음에 쏙 드는 신발은커녕 그 정도면 무난하다 싶은 신발도 찾기가 어렵다.
5. 간단한 방법도 있기는 하다. 한 켤레에 삼십 만원을 호가하는 백화점의 브랜드에 들러 발 치수를 재고 주문 제작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먹기가 또 쉽지 않다. 진열된 신발이 맘에 들어도 신발을 뒤집어 가격표를 보고 나면 망설여진다. 가정 경제 사정을 생각하지 않기가 어렵다. 게다가 적어두고 온 주소로 제작된 신발이 배달되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된다. 이런저런 사정을 꼽아보다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오기가 일쑤다.
6. 다 기억하지 못하고 적어두지 않아서 그렇지, 그동안 신발 때문에 손해 본 돈도 적지 않다. 쿠* 이나 인터넷 쇼핑, 홈쇼핑을 통하면 십만 원 미만으로도 제법 멀쩡해 보이는 구두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몇 번 구매해보니 광고나 방송과 달리 품질 면에서 실망스러웠다. 부드러운 소재라 늘어지겠지 생각하고 샀다가 결국 발이 아파 더 이상 신지 못하고 벗어버린 신발이 있는가 하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발에 맞고 착용감이 좋은 신발인 듯해서 냉큼 샀다가 발에 땀이 차는 등 품질에 문제가 있었던 경우도 있다.
7. 그럴 땐 당연히 잘 좀 만들지 싶은 원망이 생긴다. 신발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경솔했던 구매가 후회된다. 한편으로는 발이 크지 않고 폭넓은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면 좀 더 진중하게 생각해 보았을 듯 생각되어 짜증도 난다. 한 가지 고민이 해결될 기미도 없이 너무 오래 반복되니 속상하고 지치는 게 사실이다.
8. 지인들이 가끔 "너는 키가 커서 좋겠다.' 하고 말할 때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키 큰 것에는 별다른 불편 사항이 없으나 키가 크기에 발이 크고, 일반적인 범위를 넘어설 만큼 발이 크다는 것은 참으로 불편한 일이라고 말이다.
9. 내가 신발 구매의 불편함에 대해 투덜댈 때 보통의 사람들은 “아, 발이 크면 그런 어려움이 있군요. 생각도 못 했네요” 하고 놀라는 편이다. 어느 날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인이 자신도 나처럼 발이 커서 똑같은 곤란을 겪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얌전하고 차분한 여성이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신발 가게에 가서 ‘고객님의 발에 맞는 신발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판매원에게 고객의 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평균 신장이 계속 커지고 있고 키 큰 여성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데 어째서 제작과 판매에 반영하지 않느냐고 묻는다고 했다. 그리고 반드시 사장님과 본사에 건의하라고 부탁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덧붙였다. 요즘 키 큰 여자아이들 많잖아요, 당연히 발도 크죠. 그 애들도 구두를 신어야 할 테고. 우리가 요구하지 않으면 똑같은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계속 생길 거잖아요.
10. 나는 정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 긴 시간 불편을 겪으며 투덜대면서도 왜 한 번도 적극적으로 시정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키가 커서 발도 큰 나 같은 여성을 위한 신발을 만들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지 않았을까? 아니 솔직히 나는 말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오래 겪은 일이라 포기상태였던 것 같다. ‘이제까지도 무시당하고 살았는데 뭐’, ‘기업이 뭐 하러 소수자를 위해 귀찮은 공정을 하겠어?’ 생각하며 혼자서 지레 패배자의 자세로 물러나 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11. 키가 커서 발도 컸던 나는 몇십 년 동안 신발을 살 때마다 고충을 겪었다. 신발이 필요할 때마다 마음부터 무거워지곤 했다. 신발 가게를 몇 군데나 돌면서도 발에 맞는 신발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나오는 일은 그만하고 싶다. 이제 나는 좀 용감해지기로 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고 길을 찾는 자가 문을 두드려야 하는 법이니까. 그녀처럼 예의 바르게 건의해 볼 생각이다. 나도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사는 사소하고도 만족스러운 기쁨을 누리고 싶다.
3. 막차를 놓치고 / 우진숙
1 초등학교 1학년쯤이었다. 양산 외가에서 삼랑진 친가로 가던 길이었다. 시골 간이역은 타고내리는 승객이 많지 않아서 잠시 정차한 기차는 서둘러서 떠난다. 어느 겨울날 서울행 마지막 완행열차를 타려고 부리나케 물금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표 파는 곳과 개찰구 문은 이미 닫혀있고 역무원도 자취를 감추었다. 대기하던 사람들 따라서 온기가 빠져나간 대합실 안은 찬 기운이 나지막이 깔려 살갗을 파고들었다.
2 내 옆에는 아기를 포대기로 업은 아주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우리는 멀어지는 기적소리에 넋이 나가 망연자실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주머니는 친정에서 시댁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당시 전화도 없던 시절인지라 시어른께 여차여차한 사정을 알릴 방도가 없어 답답한 지경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서울행 막차를 놓친 나와 아주머니는 자연스레 운명공동체로 묶이었다.
“너도 기차를 놓쳤구나”
“버스도 끊겨서 집에 갈 수가 없어요”
“우리 내일 첫차 타자”
3 양산 읍내에서 물금역을 왕래하던 미니버스는 하루 몇 차례 열차 시간에 맞춰서 운행했고 기차를 놓치는 경우는 그리 허다하지 않았다. 그날은 무슨 연유인지 버스가 조금 늦게 역에 도착했다. 불과 몇 분 차이로 서울행 막차가 출발하려는 찰나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슴 헐떡이며 줄달음쳤으나 역부족이었다. 떠나간 기차를 향해 원망스러운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며 앞이 아득해지고 마음도 진정되지 않았다,
4 밖은 땅거미가 공포처럼 밀려들면서 바닥으로 납작 엎드리는 그 시각, 내가 가진 건 기차 삯이 전부였다. 게다가 외가로 돌아갈 버스도 이미 끊긴 상태였다. 내가 타고 왔던 버스가 물금역에서 양산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였다.
5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울상이 된 아이를 혼자 버려두고 떠나기엔 맘이 편치 않았나 보다. 아주머니는 내 손을 잡아끌며 집으로 데려갔다. 친정에 나들이 온 아주머니는 하루 더 친가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속으론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겁에 질려있는 낯선 계집애를 집으로 데려와 하룻밤 재워 아침밥 먹여 다음날 첫 기차를 태워준 그 친절한 아주머니가 언뜻언뜻 떠오른다. 그때의 고마움이 지금도 솟구쳐 올라 내 가슴을 후끈하게 데워준다.
6 요즘 같아선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드문 일이지 싶다. 서로 사람을 믿지 못해 의심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베푸는 선행도 부담을 느끼는 세태이니 어쩌겠나. 그 시절 때 묻지 않은 진심과 온정이 그립다만 요즘은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광경이다.
7 어떤 행동에는 이유가 있으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고 손해를 끼치면 비용을 부담하는 건 당연한 처사이다. 서로가 도리를 다해야지 온전한 인간관계가 맺어지듯이 오늘날의 합리적인 생활방식을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이유 없이 공짜로 얻는 건 무언가 꺼림칙하고 뒤가 켕기니 말이다. 믿음이 실종된 사회,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
8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기찻길이 있는 작은 읍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한 주요 교통수단은 기차였다. 피아노 건반처럼 연속된 ‘ㅍ’자 모양의 평행선 철로는 아이들의 신나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리고 삶의 행로를 이탈하지 않고 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방향을 암시해주는 문화적인 상징물이기도 했다.
9 어린 시절 막차를 놓친 그때의 일과 그간 살아오면서 놓쳐버린 소중한 기회와 결합 되어 내게는 트라우마로 남겨졌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한 번씩 꿈에서 역으로 뜀박질하며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쓰며 아등바등하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깨곤 한다. 간간이 간이역을 서성이던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짠해 울컥거린다.
10 그렇다고 언제까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댈 수는 없다. 그날 막차를 놓쳐 순간적으론 절망을 맛보았으나 다음날 첫차를 탔으니 다시 희망의 불씨를 찾은 것 아닌가 싶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듯,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은 희비의 연속이다. 그러니 일비일희할 일이 아니다. 하나를 일단락 짓고 새로 시작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고 새로운 기회를 얻는 것이다. 세상은 마음먹기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품 넓게 살아가면 되는 거다.
11 집집이 시계가 없던 시절, 꼬박꼬박 약속 지키며 오가는 기차의 경적은 알람시계만큼 고맙고 정겨웠다. ‘우리는 오늘 무언가를 잊고 있지 않은가, 꼭 찾아야 할 것을 엉겁결에 열차는 떠나버리고, 내일의 푸른 들녘 가득히 피어날 꽃을 앞두고, 우리는 오늘 뭔가를 몽땅 놓쳐버리고 있지 않은가, 한층 더 밝아진 촛불 앞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라고 절규한 시인의 말이 그날 놓친 기차의 경적처럼 내게로 다가온다.
4. 걷다/정덕모(1)
손주가 첫돌을 두어 달 남겨두고 한 발자국을 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억수로 빠르네’라 감격하며 함박웃음에 손뼉을 쳤다. 그때부터 집안의 가구들을 다시 손보기 시작했다. 거실이 허전하다며 장만했던 원목 탁자를 치우고 식탁이든 책상이든 모서리 부분을 없애야 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손주가 눈웃음을 치며 양손을 휘졌고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혹여나 넘어질세라 손을 뻗어서 안았다. 살짝 안기는 보드라운 살결이 닿자 가슴이 뭉클했다. 한 발을 떼고 걷는다는 게 자립의 근본이 아니던가. 걷는 일이라면 일가견이 있다.
나의 고향은 심심산골이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는 20리 길을 걸어서 등하교했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날은 아무런 불편도 몰랐다. 눈이 오는 겨울에도 어려움을 몰랐다. 눈은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비 오고 바람이 부는 날은 힘들었다. 어린 마음에 교과서와 공책이 비에 젖을까 책보따리를 몸으로 감싸 안고 걸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뒤로 걸었다가 옆으로도 걷곤 했다. 빗물로 목욕을 하는 날이다. 중2가 되면서 외삼촌이 타시던 중고 자전거를 갖게 되었다. 날개를 단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친구들에게 우쭐대며 다녔다. 귀갓길에 반 정도는 자전거를 끌어야 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영남알프스 9봉 산행은 즐겨하는 여가 활동 중의 하나다. 영남알프스는 울산 근교의 1천 미터 이상의 산군을 일컫는 말로 산악동호인 세계는 이름난 등산코스이다. 영남알프스 9봉은 산마다 특색을 고루 갖추고 있어 가는 곳마다 동호인들이 붐빈다. 특히 가지산의 4계와 신불산 억새평원은 울산 12경으로, 가지산과 신불산, 재약산은 산림청 선정 대한민국 100대 명산이어서 사시사철 등산객이 많은 곳이다.
울주군에서는 이런 이점에 착안했는지, 매년 영남알프스 9봉을 완등하면 은메달을 주고, 10년간 완등하면 금메달을 준다고 발표했다. 3만 명까지 한정했다. 아니어도 등산객이 많은 영남알프스 9봉이 정초부터 들끓기 시작했다.
정월은 어딜 가나 춥기는 매한가지다. 1천 미터 이상의 정상에서는 그 추위가 얼마나 매섭겠는가. 정상의 추위는 누구도 쉽게 참을 수 없는 힘든 혹한이다. 땀을 흘린 몸에 한기가 들기 시작하면 잠시 잠깐도 참기가 어렵다. 정상석을 모델로 인증사진을 찍기 위하여 장갑을 벗으면 손가락이 애인 듯이 시려온다. 이 인증사진을 ‘영남알프스완등인증센터’로 송부하면 정상 도착이 인증되는 제도여서 누구나 정상석과 사진을 찍어야 한다. 정상은 많은 동호인이 사방의 등산코스에 모여든다. 비좁고 미끄럽고, 바람 부는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수 미터의 줄을 서야 하는 게 보통이다.
차례로 줄을 서서 기다리다 보면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인가. 사연도 각양각색이다. 일행이 앞에 있다. 단체 사진을 찍어야 한다. 방금 찍은 인증사진이 없어졌다. 또한 인증사진을 이렇게도 한 컷, 저렇게도 한 컷을 찍으려는 욕심쟁이까지. 양심이 부족한 사람과 배려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 간에 언쟁과 고함이 끊이질 않는다. ‘인자요산이요, 지자요수라’는 공자님의 말씀이 거짓말처럼 들린다.
자연에서 인상 궂은 광경을 몇 번 접하면서 아내와 마음이 통했다. 이심전심일까. 우린 이른 아침에 등산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한겨울의 등산은 방한복과 월동 장비를 갖춘 배낭으로 무거움이 느낄 정도이다. 거기에다 헤드랜턴을 하고 나니 안경에 성에가 끼고 첫 발걸음부터 무거움을 느끼게 된다. 돌부리에 걸리지 아니해야 하고, 낙엽 속의 얼음에 조심하다 보면 초입에 이르기 전에 땀을 흘러내린다.
1천 미터 고지 중턱에 이를 때면 여명이 밝아온다. 이때 헤드랜턴만 벗어도 홀가분한 마음에 커피를 한잔하노라면 세상에 어느 산해진미가 이보다 맛있을까. 동해의 붉은 햇무리 속으로 오늘의 해가 솟구치는 광경은 이른 새벽에 등산한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운수가 좋은 날은 상고대와 얼음꽃이 햇살이 반짝일 때 아름다움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질 않는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등산이 있는데.
열아홉 살에 첫 직장을 들어와서 그 직장에서 정년을 맞이했다. 시간이 자유로운 일로 제2의 인생길을 걷고 있을 때, 선배가 일자리가 공고되어 있다고 알려줘서 원서를 제출했다. 운이 좋았는지 작년 1월부터 옥동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승용차를 집에 두고 대중버스를 이용하기로 했지만, 환승하는 불편은 감수해야 했다.
공업탑 로터리에서 환승은 울산이 1백만 도시라는 그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공업탑 로터리는 같은 방향으로 시내버스 정류장이 두 곳이 설치되어 있다. 석유화학 공단 방면과 울산대학교 방면으로 분리되어 있다. 여기는 시내버스가 집결되는 곳이라 한꺼번에 몇 대가 동시에 도착하고 출퇴근의 승용차 등으로 번잡한 곳이다. 시내버스 안은 손님으로 만차가 되어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하다. 시내버스 내에서 혹여 기침 소리라도 들리면 저절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뉴스 시간에 서울의 지하철을 보는 듯했다. 제2의 직장을 구한 게 어딘데, 그르려니 여기고 한 번의 환승으로 출근했다. 불과 세 정거장이다. 튼튼한 두 다리가 있는데 걸어도 잠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3월이라 아직은 찬 바람이 불었다. 이보다 더한 추위도 야외에서 근무했고, 등산도 했다. 걷는 게 마음이 편했다.
두 정거장이 지나면 초등학교가 있다. 횡단보도. 교통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초등학생들이 인도를 빼곡히 메우는 시각이다, 어머니 또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다리는 학생들의 가방과 옷들은 대부분 유명브랜드가 눈에 띄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과는 대조가 되었다. 비가 오는 날의 등굣길은 빨간 우산, 파란 우산, 노랑 우산,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길로 변했다. 마치 꽃잎이 휘날리는 듯하다. 어느새 휴대폰으로 풍경을 담는 노년의 작가가 되어 있다.
사무실이 이사를 하게 되었다. 옥동에서 삼산동으로 이사했다. 삼산동까지는 곧바로 운행하는 시내버스 노선이 있어서 다행이다. 사무실 방면으로는 학성교를 지나는 노선과 번영교를 지나는 두 노선이 있으나, 배차간격이 출근 시간과는 맞지 않았다. 서슴없이 걷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운동으로 여기고 걸어야겠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이사 후 처음으로 출근하는 날, 착실하게 신호등을 지키며 걸었다.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거리였다. 학성공원을 지난다. 정유재란 때는 이곳을 도산성이라고 했다. 권율 장군은 적장 가토 기요마사를 상대로 세 차례 전투를 한 곳이다. 태화강의 잔잔한 물결은 겨울을 감춘 듯하고, 손에 잡힐 듯한 신불산과 간월산은 그날을 추위를 잊은 듯하다. 태화강을 지날 때는 강바람에 귀가 떨어지는 듯 시렸다. 그렇다고 출근길에 모자를 쓰고 다닐 수는 없었다. 아니어도 없는 머리에 모자를 눌려 쓰면 머리 맵시가 엉망진창 될 것 같았다.
유유자적하게 걸으며 태화교를 걷고 있을 때, 저 멀리 자그마한 여성 한 분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무슨 바쁜 일이 있어서 저렇게 빨리 가지’라며 혼잣말했다. 티타임에서 뱃살 이야기가 나왔다. 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빨리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팔랑귀에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었다. 빨리 걷는 게 운동이라고‧‧‧‧. 천천히 걷는 것은 운동 효과가 없다고‧‧‧‧.
팔랑귀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퇴근길부터 적용에 들어갔다. 1월의 한겨울이지만 집에 도착하니 등이 흠뻑 젖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아내가 무슨 일이 있냐고 되물었다. 웃고 말았다. 어느 날 이었다. 학성교를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한 여성이 나를 추월하려는 순간. 아니 나보다 빠른 여성의 발걸음이 있어. 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나도 보통 걸음이 아닌데 나보다 빠른 여성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재킷을 입은 신사 체면에 뛸 수는 없다. 경주하듯이 빠른 걸음으로 그분 앞서서 걸었다. 출근길에 등이 흠뻑 젖게 걸었다. 내일도 걸을 것이다.
5. 스승과의 재회 / 김효섭1
교수님이 늦으시다.회의가 길어진 듯 약속시간이 30분이나 지났다.
시청 민원실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두명,세명,그룹들로 무슨 대화를 할까? 그런 저런 얘기가 아닐까? 돈,주식,자식,정치얘기등 아직은 이른 시간이여서 여자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약속시간에 늦으신 교수님은 더 애타는 마음 일 것이다. 1시간 30분이면 끝날 회의가 한 시간이나 더 길어진 이유는 새로 부임한 시장의 명으로 민원인들의 소명시간을 허락했기에 그런 것이다.어차피 위원회는 시장의 시정을 보좌하는 기관이기에.이번 시장은 초지일관이 될지.
도무지 정치하는 양반들이란 하류로 그것도 4류도 못 되는 작자들이다.
교수님을 기다리는 설레임이 애인을 기다리는 마음과는 사뭇 다르지만 어찌하든 이 설렘이 더 말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부모와스승은 일체라고 하든가 실은 부모보다 더 편하고 사랑이 느껴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스승이라 생각한다.부모는 태어나면서부터 줄곧보와 왔기에 너무도 나에 대해 잘 알기에 나 또한 부모의 존재를 그냥 육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스승의 자애로운 사랑과는 비교가 안되기에 떨리는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을까? 세월이 어떻게 변화 시켰으며 노년을 무엇에 가치를 두고 계실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마치 말 배우는 어린아이가 끝없이 던지는 질문공세처럼.
스승을 기디리면서 이렇게 메모지에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펜을 들고 적어본다.그 동안 수필수업에서 배우기만 했지 제대로 글을 쓰보지 않은 게으른 학생이다.아직 카페에도 가입을 아니 하였으니,수필 강좌 교수님께서는 착실한 학생으로 인정 하실까?
한편,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주신 스승께 감사를 드린다.따로 시간을 할애하여 쓸 수 있는 입장이 안되는데.
늦어지니 오히려 좋다.핸드폰 충전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긍정의 마음으로 생각하니 여유로운 마음이 생긴다.
음악이 흐르는 시청 민원실이 마치 호텔로비같아서 마음을 느긋하게 한다.
카페직원의 하이톤 목소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기분좋게 들린다.옆자리에 있는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 투박하여 고향을 물어 보지 않아도 보리 문둥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핸드폰 충전이 다되었는가하여 확인하니 다섯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정확히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회의가 끝나서 급한 마음에 여러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니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이셨고,답답한 마음에 문자까지 보냈으나 이 역시 답장을 기다릴 수 없었다.
다시 통화하여 만 날 장소를 확인하고 전화를 기다리는 시간은 좀 전의 시간보다 더 힘들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신 교수님께 그 곳에 가만히 계시라고 말을 하고 뛰어갔다.
몇 년전과 별로 변하지 않으신 모습에 안심과반가운 마음으로 안도의 한 숨이 나왔다.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다양한 주제로 얘기꽃을 피우며 아쉬움의 여운을 남겨두고 헤어지기 싫은 연인처럼 손을 흔들며 다음을 기약했다.미련은 또 다른 희망이다.
6. 신정 2동 어린이집 가는 길 / 이명조
나는 매주 월, 목요일 오전 10시에 신정 2동 어린이집에 간다. 그 곳에 다니는 어린이들에게 동화구연을 하거나 그림책을 읽어 준다. 다행히 가까워서 천천히 걸어도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노동의 대가를 받고 한다. 노령연금을 받을 만큼 적당히 가난하기 때문에 순전히 봉사가 아닌 노인 일자리의 일환으로 다닌다. 정기적으로 일정한 전문교육을 받아서 일주일에 2번내지 3번씩 다닌다.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다. 간혹 검은 콩 같이 소박한 아이들과의 눈 맞춤이 유난히 잘 안 되는 날은 귀갓길이 허전할 때도 있다. 이 곳 어린이집에 드나든 지도 벌써 3년이 훌쩍 넘었다. 늘 다니는 동네길이긴 하지만 이렇게 똑같은 길을, 같은 시간에, 거의 같은 가방을 들고 걸어 다니며 주위를 찬찬히 살피니 감회가 새롭다. 신정 1동에 산지 어느 새 훌쩍 35년이 지났다. 두 아들 유치원 다니기 전 태화동에 몇 년 살았고, 둘째 아들 다녔던 고등학교 근처 몇 년과 퇴직 후 큰 맘 먹고 밀양얼음골에 귀촌해서 겨우 2년을 버틴 것을 제하고, 줄곧 이 신정 1동 주위를 맴돌았다. 이 곳도 어린이집 가는 길 왼쪽에 우뚝 서 있는, 울산에서 제일 비싸다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설 때 까지는 그렇게 많은 변화는 없었다. 그냥 드문드문 높고 낮은 아파트와 소소한 빌라와 오래된 주택, 그리고 풍광 좋은 남산아래 예전에는 썩 잘 지었다고 소문 난 단독 주택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1차, 한참 있다 2차, 재건축 붐이 일었다. 울산 전체 아파트시세를 주도하는 그런 대단지 고층 아파트 아이 파크가 들어서며 동네지도가 바뀐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소문만 무성한 재건축 후보 아파트와 주택들이 아직은 제법 남아 있다. 그래서 아직 재건축이 시작되지 않은, 내가 늘 다니는 신정 2동 어린이집 가는 오른쪽 길은, 만만하고 푸근하다. 길 왼쪽을 보면 획일적이고 현대적인 건물의 멋진 신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오른쪽에 눈길을 주면 비록 낡았지만, 오밀조밀 작은 아파트와 빌라 앞 작은 화단에서 오래 된 농익은 나무와 꽃과 잡초가 얼마나 초록초록 빛나는지 모른다. 귀엽고 화려한 한련화와 늘 반가운 접시꽃, 사철나무, 향나무, 회양목, 심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태산목 같은 품격높은 나무도 있다. 넝쿨아파트 옆 넓은 공터는,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상치, 깻잎, 오이, 방울토마토, 호박, 당근. 감자들, 무화과와 대추나무까지 온통 고향 시골 텃밭이다. 나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다른 이들도 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듯 구경을 하며 즐긴다.
가난한 외아들과 떨어져 딸집 근처에서 5년 동안 홀로 친정어머니가 세들어 사셨던 곳도, 이 근처 낡은 주택이었다. 어린이집 가는 길 왼쪽에 위치해서 재건축에 포함되었다. 이제는 흔적도 없다. 오매불망하던 서울 외아들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몇 년 못 버티셨다. 파킨슨병으로 고통받으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공사 시작 전 오랫동안 비워 놓았던, 그 캄캄한 빈 집 철대문 앞에 한참씩이나 서 있곤 했다. 또한 유난히 어머니가 보고 싶은 밤이면 남몰래 혼자서 대문 고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리움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오르막길 입구에 이름만 젊은 푸른 경로당도 있었다. 늘 외로움이 목까지 차오르시던 ‘내 엄마 강복순’은 그 곳에서 잃기만 하는 100원짜리 동전내기 민화투를 매일 치셨다. 푸른 경로당 안방에 나란히 웅크리고 앉아 계시거나 함께 누워 계시던 그 노인네들도, 등굽으신 내 어머니도, 이제는 연기처럼 다 사라져버렸다.
넝쿨아파트를 조금 지나서 어린이집에 도착할 즈음 요즘 들먹이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다닥다닥 붙은 주택들이 상가로 변해서 손님을 끌고 있다. 오하요 hair shop, 뮤직 coin box, brown coffee, 채영 네일, 김밥 떡볶이 순대, 삼촌 돈까스& bear, 그리고 성수 수학 학원, 외솔 논술학원들도 있다. 참 편리하고 좋은 동네다. 더구나 학부모들이 제일 선호하는 울산 8학군이 바로 이 동네이다. 그래서 땅값도 점점 더 비싸져간다.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30년 된 낡고 작은 빌라에 혼자 사는 나는 그 곳과는 별 상관이 없다. 다만 이렇게 신정시장과 남부 도서관, 대공원과 십리 대밭을 걸어 다닐 정도면 족하다. 더 욕심을 내 본다면 지금처럼 어린이 집에서 동화책이나 계속 읽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굵게 주름진 목 힘들게 뒤로 젖히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볼 정도의 낮은 집 주변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조용히 보고, 냄새 맡고 싶다. 그래서 김신용 시인의 詩 『부레옥잠』처럼 ‘제 꽃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그 꽃’이 되고 싶다.
첫댓글 한 사람의 작품을 이번 주 다음주 연달아 첨삭 합평하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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