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OY YOUR ESSAYLIFE
언양에세이포럼
22기-14차시
일시: 2024년 6월 4일(화) 3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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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제 목 | 작 가 | 편수 | 합평 담당 |
1 | 미래 적응기 | 김연희 | 8 | 배정순 |
2 | 말동무 | 박동조 | 5 | 예수백 |
3 | 호랑이 등을 타다1 | 박희자 | 5 | 이경자 |
4 | ||||
5 |
합평순서/권춘애 김순향 김선애 김연희 김인옥 민창현
박동조 박희자 배정순 예수백 이경자 이혜경
1. 앞으로의 세상 / 김연희8
-미래 적응기
1. 딸의 권유로 로봇청소기를 구매했다. 사용법을 아무리 봐도 알 수 없어 사위를 불렀다. 사위는 앱을 설치해서 로봇청소기에 청소 구역과 청소 방법을 명령해야 한다고 상세하게 설명하였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답답하였는지 아예 사위는 자신의 스마트 폰에 앱을 설치하고 로봇이 청소할 구역을 정하고 출입 금지구역을 입력해 주었다.
2. 딸은 “삶의 질을 높이려면 4대 이모를 잘 활용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청소 이모들인 것을 축하한다고 하였다. 4대 이모란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빨래건조기, 스타일러’를 말한다. 로봇청소기는 매일 정한 시간에 먼지를 빨아들이고 물걸레 청소를 하고 걸레까지 스스로 세척을 하니 편리하다.
3. 식기세척기는 식기를 세척하고 소독까지 해 주고 빨래건조기는 빨래를 널고 걷는 수고를 줄여준다. 스타일러도 옷의 냄새와 먼지를 털어주고 구김을 해결해 주니 편리하다. 딸의 말대로 집안일을 이모들에게 맡기니 그 시간을 절약하여 휴식이나 다른 활동을 할 수 있으니,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4. 나는 가끔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변화되어 갈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미래학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미래에는 힘든 노동과 하기 싫어하는 일은 로봇이 대신해 줄 것이라고 한다. 일은 로봇에게 시키고 사람은 취미생활이나 재미난 일을 하면 된다고 한다. 인간의 수명은 줄기세포 등의 발달로 150살까지도 연장될 수 있다고 한다.
5. 어느 미래학자의 보고서에 의하면 2030년에는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다. 로봇이 비서가 되어주고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될 것이다. AI 비서가 최상의 수면 패턴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계획해 준다. 아침이면 건강 필수 항목을 모니터링하고 외출할 때는 자율 차를 대기 시켜 줄 것이라고 한다.
6. 어떤 사람은 수년 전부터 인공지능 로봇을 그레이스라고 이름을 짓고 자기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그레이스는 20개국 언어를 사용하고 사람의 질문에 답하고 자료요청을 하면 자료를 분석해서 제공해 준다. 놀라는 표정과 슬픈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는 그레이스를 반려 로봇으로 등록하기도 했다. 로봇과 동거하고 대화하고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는 세상이 오고 있다.
7. 이미 인간의 지능을 능가한 알파고가 나왔고 챗봇이 상담 해 주는 곳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사람이 타지 않은 화물차가 짐을 실어 나르고 있다. 사람이 운전하지 않는 굴착기가 위험한 공사 현장에서 사람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 로봇이 주문받고 주문한 음식을 날라다 주는 것은 새로운 풍경도 아니다. 십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으나 현실이 되었다.
8. 고3 때 진로를 앞두고 미래의 세상을 탐색하던 기억을 회상해 본다. 그 시절은 주산으로 계산하고 타자로 문서를 만들 때였다. 그때 간간이 미래학자들은 “앞으로는 주산이 없어지고 컴퓨터가 모든 일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상을 선도하려면 컴퓨터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9. 미지의 세상을 탐색하기 의해 나는 컴퓨터 공부를 하기로 했다. 세상을 선도할 부푼 꿈을 안고 고액의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에는 컴퓨터라는 실물은 없었다.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교수가 사진으로 된 컴퓨터를 소개했다. 실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컴퓨터의 구조를 책으로 공부하고 명령어들을 외웠다.
10. 우리는 실물을 보기 위해 부산의 군수사령부에 갔다. 명분은 시험이었다. 전산실은 중앙처리장치라는 이름의 본체가 있는 방이 있고 지금의 키보드에 속하는 입력 실이 따로 있었다. 컴퓨터가 있는 방은 기온과 습도를 사계절 알맞게 맞추어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11. 큰 교실 두 개만 한 방을 가득 채운 컴퓨터의 본체를 보고 우리는 그 크기에 놀랐다. 관계자는 수백 명이 할 일을 컴퓨터 한 대가 해 준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책상 위에 올릴 수 있는 컴퓨터가 생기고 20년 후면 들고 다닐 수 있는 컴퓨터도 나올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컴퓨터를 책상 위에 올린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12. 믿기지 않는 세상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우리의 상상보다 세상은 더 많이 진화해 왔다. 집채만 한 컴퓨터는 책상 위에 올릴 수 있는 크기로 변했고 어디라도 들고 다닐 수 있는 노트북이 나왔다. 지금은 컴퓨터의 많은 기능을 탑재한 스마트 폰이 상용화되었다. 누구나 손안에 컴퓨터를 들고 다닌다.
13. 눈을 감고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 본다. 엄청난 변화에 숨가쁘게 적응해왔다. 앞으로의 세상은 또 얼마나 변화할지 가늠할 수 없다. 미래의 나는, 변화된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있을까? 지능형 로봇을 잘 작동하고 드론 택시를 자연스럽게 호출할 수 있을까. 기계치라고 하면서 간단한 조작조차 못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4. 앞으로의 세상은 로봇을 인생의 동반자로 의지하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 로봇을 가족으로, 친구로, 비서로 활용하려면 로봇을 잘 작동할 있어야 한다. 이대로라면 사용법을 몰라서 미래 사회에 부적응자로 남을 것이 뻔하다.
15. 지금부터라도 미래 사회에 적응력을 높이려고 노력해 보기로 한다. 스마트 폰의 사용하지 않는 기능을 더 많이 사용해 보려고 노력하고, 챗봇과 자연스럽게 상담하는 습관을 들이고, 미래 사회에 관한 공부와 관심을 더 가져보기로 한다. 변화될 앞으로의 세상에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15.3)
2. 말동무/박동조5
1) 내가 심심해서
1. 봄 햇살이 나른히 내리쬐는 날이었다. 시골 마을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차창을 뒤덮은 누런 꽃가루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2. 지팡이를 든 여자 한 분이 어정어정 걸음으로 다가왔다. 허리도 굽지 않았고 얼굴에 주름살이 드문 걸로 보아 귀신이 친구 하잘 나이는 안 된 것 같았다. 뜻밖에도 그녀가 오랜 지기한테 말을 걸듯,
3. “아이고, 쬐깐한 차를 어지간히도 곱게 닦네” 했다.
곱게 닦는다는 말은 흘러버리고 쬐깐하다는 말만 귀에 남았다.
“사람이 작으니 차도 작아야죠.”
내 귀에도 내 말이 퉁명스레 들렸다.
“근데 아줌마, 낯선 거 보이 이 동리 사람이 아니네. 어디서 왔소?”
4. 싸라기 밥을 먹었는지 툭 자른 반말에다 끝말만 간신히 올렸다. 어쨌거나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여 공손하게 대답했다.
“울산에서 왔습니다”
“쬐깐한 차 닦을 거나 있나?”
이런! 또 반말에 쬐깐한 차라네, 슬슬 비위가 꼬였다. 그렇다고 쬐깐한 차를 쬐깐하다고 하는데 뭐라 토를 달 수는 없었다. 이럴 때는 말대답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삼사 분 곁에 서 있어도 이어지는 말이 없자 그녀는 다른 곳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5. “내가 심심해서!”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이 고무총에 끼워 쏜 껌딱지처럼 날아와 배배 꼬인 내 비위에 착 달라붙었다. 쬐깐하다는 표현은 말을 걸려는 열쇠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오죽 말이 고팠으면 작은 차를 꼬투리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을까?
6. ‘어쩌면 그녀는 남편 먼저 저승길 보내고 홀로 된 여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저 나이쯤 되면 자식들은 저희 둥지 건사하느라 엄마에게 말동무해 줄 짬이 나지 않을 것이다.’ 따위의 추측성 생각이 제멋대로 머릿속을 들락거렸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마을에는 말동무해 줄 사람이 없을 듯도 했다. 진즉 그 마음을 눈치챘더라면 잠시라도 말동무가 되어 주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7. ‘심심해서’라는 말에 담긴 마음을 읽고 있을 때, 그녀는 골목 모퉁이로 자취를 감추는 중이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배고프면 음식을 찾듯 외로우면 마음을 나눌 대상을 찾는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건 것도 사람이 고파서였을 거다.
8. 외로움을 노년의 삼중고 중 하나라고들 한다. 인생 늘그막에 말동무가 없어 심심한 나날이라니! 그런 날이 내게는 닥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이미 예비 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2) 어느 운전기사의 러브스토리
1. 택시를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모자를 눌러 쓴 기사는 차창 너머 정면을 응시한 채 내게 물었다. 목소리가 여자 운전자였다. 날씨가 궂다는 말과 함께 손님과 운전자 간의 의례적인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갔다. 그날 나는 영화 같은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들어주었다.
2. “손님, 저어 청이 있습니다. 제 얘기를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아서요”로 시작된 이야기의 요점은 이랬다.
3. 그녀는 대학에 다니면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부잣집 아들이었고, 그녀는 스스로 학비를 마련해야 할 만큼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나 열렬해서 교내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다. 자신의 힘으로 학비를 마련하는 일도 버거운 판에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상황까지 내몰린 것이다.
4. 그러던 차에 남자가 유학을 가게 되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같이 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밤새워가며 고민했으나 사랑하는 이와 유학 가는 일보다 더 큰 일이 가족들의 밥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같이 가서 돈 벌어 유학비를 해결하자는 남자의 간절한 청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유학길에 오르던 날을 끝으로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5. 그 뒤로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형편이 나아지면 복학하리라는 다짐은 동생들을 바라지하느라 먼지가 되었다. 가끔 그 사람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자신 있게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 술집에서도 일했다는 그녀는 주소지와 일터를 옮겨가며 자신을 숨겼다. 결국 도망치듯 아는 사람 없는 울산으로 내려와 택시의 핸들을 잡았다고 했다.
6.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잊었으려니 하고 살았습니다. 오늘,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네요. 그 사람이 아직도 나를 찾고 있다는군요. 결혼도 하지 않고.” 결국 그녀는 도로 가 쪽에 차를 세우더니 핸들에 얼굴을 박고 어깨를 들썩였다. 나도 감정이 이입되어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울음이 잦아들 때를 기다려 물어보았다.
7. “기사님, 그리 오랜 세월 애타게 찾는데 왜 안 만나요?”
“나는 그 사람 만날 면목도 자격도 상실했는걸요”
“결혼해서인가요?”
“아뇨, 저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
8. 그녀가 말하는 동안 검은 가림막을 친 것 같은 어두운 하늘에서 눈물 같은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빗줄기는 차들의 전조등 불빛에 빛의 파편처럼 부서졌다. 부서진 빗물이 차창으로 마구마구 쏟아지던 그 밤의 정경은 지워지지 않는 부조로 내 안에 새겨졌다.
9. 얘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택시비를 계산할 때조차 앞만 응시하고 있어서 예쁜지, 젊은지 알지 못했다. 다만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우는 모습으로 꾸며낸 얘기는 아니구나 싶었다. ‘이 시대에도 저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나?’ 긴가민가한 느낌으로 듣고 있던 내게 그녀의 울음은 이제껏 한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웅변 같았다. 그녀가 말을 들어줄 상대로 왜 나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10. 말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은 심정을 헤아려본다. 하소연할 대상이 오죽 없었으면 생면부지 승객에게 자기의 아픔을 털어놓았을까? 얼마나 마음이 아팠기에 말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을까?
11. 그날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다. 어쩌다 들어 준 남의 연애사가 이토록 오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줄 몰랐다. 그 남자는 아직도 여자를 찾고 있을까? 여자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을까? 아니면 두 사람이 해후해서 행복해졌을까? 말동무 잠깐 해 줬을 뿐인데 기억이 날 때마다 궁금하다.
3) 꽃나무에 말을 걸다
1. 시어머님께서는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다. 지금도 나무에 핀 꽃을 보면 그분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화단에 서 있는 꽃나무와 얘기를 한단다” 그리고는 순진무구하게 웃으시곤 했다. 당시가 치매 초기였다는 걸 자식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2. 청춘 시절에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던 어머님은 외할머니 소원에 따라 아버님과 결혼했으나 속엣말을 나눌 만큼 마음을 열지 못했다. 당신의 속으로 태어난 자식들이 말귀를 알아듣는 나이로 자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마음을 터놓지 않았다.
3. 세월이 흘러 머리가 굵어진 자식들이 차례대로 저희 둥지 지어 날아가고 두 내외분만 적막한 집을 지켰다. 어머님께 말동무 없는 나날이 다시 찾아왔다. 마음의 통로가 막힌 두 분 사이에는 말이 오가는 길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언어로 한정되어 있었다. 자식들은 명절이나 휴가철이 되어야 얼굴을 맞댈 수 있었다. 점점 덩치를 키운 고독은 두 분의 삶을 따로따로 에워쌌다. 고독마저 공유하기를 피하신 것이다.
4. 어머님은 우아한 삶을 지향했다. 꼿꼿한 자세로 걷는 거는 물론 앉음새 또한 단정했다. 당신께서는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나는 이 나이까지 사는 동안 남의 집 이불에 발을 넣어본 적 없고, 남의 집 변소를 출입해 본 적 없다”라고 하셨다.
5. 그 말을 왜 들려주었는지는 아직껏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웃을 경계하라는 말씀일 수도 있고, 사람을 섣불리 사귀지 않는 당신을 본보기로 삼으라는 훈계일 수도 있었다. 친인척으로 이루어진 마을에서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모르고 자란 내게는 그 말씀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6. 당신 삶의 자세를 지켜보면서 어렴풋이나마 말뜻을 헤아렸다. “여자는 가족 외의 사람에게 함부로 입을 섞어서는 안 된다. 그건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다.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단정해야 한다.”라는 말은 내가 본 어머님의 생활신조였다. 오랜 시간 쌓인 그 신념이 치매를 불러왔을지도 모른다고 지금 나는 생각한다.
7. 음식을 먹으면 필요 영양소만 섭취하고 남은 찌꺼기는 배설하는 게 우리 몸의 메커니즘이다. 살아가는 나날이 스트레스를 쌓아가는 과정인 우리의 뇌도 배설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다. 믿고 말할 수 있는 말동무가 있다는 건 뇌에 쌓인 찌꺼기를 내보내게 하는 정신과 의사를 둔 것과 같다. 말을 나눌 대상이 없던 어머님은 외로움을 끼니처럼 드시고 사셨다. 그래서 뇌 변비에 걸리셨던 게다. 몸의 변비도 치매를 유발한다는데 정신의 변비는 오죽할까.
8. 앵두꽃이 피면 앵두꽃하고
모과꽃이 피면 모과꽃하고
석류꽃이 피면 석류꽃하고
얘기를 한단다
저 꽃들이 못 하는 말이 없어
사람보다 나아
9. 아무렴, 꽃이 사람보다 나을까? 어머니는 특별한 감수성으로 자연과 교감하는 초능력을 가진 분이 아니었다. 꽃이 말을 한다고 하셨지만, 꽃이 사람 같이 말할 리는 만무했다. 오죽 말동무가 그리웠으면 꽃이 못 하는 말이 없다고 했을까. 자존심 강한 당신께서는 말을 나눌 사람이 그립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0. 시댁 마당에서 꽃을 피운 나무들을 보노라면 어머님 생각나 슬퍼진다.
“얘야, 꽃나무가 없었으면 어쩔뻔했노. 쟤들이 없었으면 내 입에 거미줄 쳤을 거라”
11. 치매에 걸리신 뒤에 하신 말씀이다. 꽃들이 없었으면 말을 하지 못해 입에 거미줄이 생겼을 거라는 뜻의 그 말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릿해 온다. 누가 그 말에서 자유롭겠는가. 인생 종착역은 누구에게나 온다. 세상과 이별하는 시기에 말동무해 주는 사람이 곁에 없다면?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말 없음의 괴괴한 침묵만이 에워싸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지레 두려워 몸이 떨린다.
3. 호랑이 등을 타다 1/박희자5
1. 네 자매가 모여 언니 칠순을 축하하고 오는 길이다. 태화강역 앞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아야 우리 집에 올 수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내 차가 신호에 걸려 주기를 바랐다. 신호등은 고맙게도 우리를 붙잡아 주었다.
“언니, 저기 봐요. 저 건물이 우리 집이어요.”
신호 대기 시간을 놓칠세라 내 손가락은 춤을 추며 앞 유리창을 뚫을 기세로 자랑질했다.
“어디!”
“ 저기 주유소 뒤에 보이는 건물요.”
“야! 근사하다.”
2. 나는 으쓱해서 2단계를 실행했다. 첫 번째 우회전에서 들어오면 곧 우리 건물 앞에 닿는다. 그런데 오는 차가 위험하다며 입술에 침 발라가며 거짓말을 했다. 사실 이사해서 한참 동안 써먹던 유치함이었다. 그러는 내가 가관이어서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던 다짐은 간데없어 웃음이 났다.
3. 이사한 우리 집에 처음 오는 언니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굳이 두 번째 우회전을 돌았다. 첫 번째로 들어와서 만나는 건물의 정면보다, 두 번째에 만나는 건물의 측면이 넓게 보여서고, 특히, 회색 콘크리트 건물에 갈색 대리석 위에 건물 이름이 햇빛을 받아 당당하게 연출 되어서다.
4. “와! 멋지다. 요즘 잘 나가는 사람이 구세주 위에, 건물주라는데 우리 막내 정말 대단하다!”
“그렇지도 않아요. 반은 은행 건데요. 뭘!”
하면서 내 마음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빛도 능력이라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호호, 하하 기뻐해 주는 언니들 찬사에 나는 정말 농부가 보았던 호랑이 등을 타고 달려가는 기분이었다.
5. 결혼해서 열 번을 넘게 이사한 후, 스물다섯 평 아파트를 갖게 되었다. 주변은 온통 재테크로 술렁이는데 변화를 두려워하는 남편은 이 십 년이 넘도록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6. 이웃에 사시는 아이 고모부께서 큰 병에 걸리셨다. 환자 요양을 위해 맑은 공기를 찾아 전원생활을 계획했다. 자연을 좋아하는 나는 시간을 쪼개어 부동산 하는 시숙을 따라다녔다.
7. 바닷가 길을 달려 도착한 어느 산골 마을이 아늑하고 평안해 내 품 안으로 안겨 왔다. 이런 곳이면 남편을 설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숙께 매매하는 집 있었으면 소개해 달라는 말을 하다 꼬리를 내렸다. 요지부동인 남편 얼굴이 겹쳐서였다.
8. 시간은 멈춘 듯 지나가고 아이들 고모부도 고인이 되었다. 전원을 운운하던 나도 하루하루 살기 바빠 잊고 지냈다. 우리 집 경제도 스물다섯 평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9. 김장철에 소금 가마니를 옮기다 다리를 다쳤다. 병원 입원 중에 피검사를 했더니 느닷없이 당뇨란다. 의욕이 상실되었다. 큰 병이라도 걸린 듯 남편도 당황스러워했다. 친정어머니가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10. 이십 년 넘도록 근무했던 학습지 지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음먹었던 재테크를 해 보고 싶었다. 이 기회에 움직이지 않으면 살고 있던 아파트에 안주하여 붙박을 남편이었다. 전원에서 맑은 공기 마시고, 신선한 먹거리로 당뇨 식단을 꾸려야 합병증이 오지 않다고 운운했더니, 남편이 마음에 빗장을 풀어주었다.
11. 삼월, 훈풍이 불던 날, 살아보고 싶었던 전원마을로 옮겨 앉았다. 내 인생에 변곡점이 된 첫걸음이었다. 자연이 주는 무수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양지바른 절 옆집이었다.
12. 뒷산 소나무와 울타리를 이룬 울창한 대나무 숲이 바람을 날아다 주었고, 넓은 마당 곳곳에 감나무가 운치를 더해주었다.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내가 느끼는 행복만큼 쏟아져 내렸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평온해서 어릴 적 산골에서 느끼던 정서적 안정감을 주었다.
13. 스물다섯 평도 좁다던 내가 열다섯 평에서도 별 불편함이 없었다. ‘황구’로 불렀던 진돗개를 가족으로 맞았다. 때때로 지네 퇴치법을 몰라 야단법석이 났고, 여름철에 곤충들 습격이 귀찮기도 했지만, 자연과 공생한다는 마음에 이것쯤이야 하며 웃어넘겼다.
14. 낡고 오래된 집을 돋보이게 정원을 꾸몄다. 남편을 졸라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키 낮은 울타리도 만들었다. 지인들을 동원해서 항아리를 공수받았다. 마당 요소요소에 몇 무더기의 항아리에 터전을 내주었고, 장작더미를 쌓아 자연미를 더해주었다. 깨진 기왓장도 출중한 소품이었다.
15. 뒷산에 계절 따라 피어나는 들꽃을 우리 마당으로 초대했다. 장독대를 둘러싼 봉숭아꽃이며, 채송화꽃이 청아하게 웃어줄 때면 내 마음에도 행복의 꽃이 피었다. 손재주 좋은 남편이 진흙과 기와 장을 쌓아 굴뚝을 올려 주었다. 가마솥을 걸어 두고, 봄바람, 꽃향기 따라오는 지인들을 위해 훈훈한 연기도 피워 올렸다.
16. 대문 없는 집 마당 입구에 생명을 다한 감나무 등걸이 있었다. 남편이 우체통을 만들어 빨간색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던져준 감탄사와 해맑은 이야기들이 우체통에 채워졌다.
17. 다시 일을 시작한 나는 주말을 댕겨 쓰며 정원 꾸미는 일에 푹 빠졌다. 소박하고 평안한 환경이 주는 여유로움은 행복 그 이상이었다.
18. 그러나 남편은 사뭇 달랐다. 같은 공간 같은 환경에서 늘 엇박자인 것이 안타까웠다. 곧 혼기 맞은 아들 결혼 전에 새집 지을 설계도를 완성하고, 건축업자와 최종 조율하던 날 남편은 판을 엎어버렸다.
19.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란다. 무성한 대나무와 감나무가 한해살이 하는 자연의 순리를 받아주기가 벅차고, 우리 땅 넓은 면적을 타인을 위한 도로로 이용되는 것이 억울하다 했다. 그러면서도 적응해 갔다.
20. 두 아들의 혼삿날이 잡혔다. 집 지을 들뜬 마음으로 구청에 재신청을 했다. 조례가 까다로워져 현재 상태로 건축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도로에서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길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다니는 논길이었다. 4 미터 소방도로로 변경해야 건축이 허락되는 상황에서 논 주인의 동의서를 받아야 했다.
21. 양쪽 논 주인을 찾아보았다. 집 살 때, 편리 봐주겠다던 시숙 지인이 아닌 타지 사람으로 소유권이 바뀌어 있었다. 여러 가지가 앞을 막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 심기 불편해진 남편 눈치로 내 마음은 하루하루가 노심초사였다.
22. 봄날이었다. 이웃 소식통인 아주머니가 우리 밭 아래 나대지 땅이 팔려, 집 두 채가 지어진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4 미터 길이 열리게 되었다. 감사함에 나는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었다.
23.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대지 땅을 소개한 부동산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우리 집 진입로 열 평이 집을 지을 사람의 소유라며 도면을 펼쳐 보이며 평당 삼백이니, 삼천만 원을 요구했다.
24. 세상이 노랬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뒤 목 잡고 누워버릴 것이, 생돈 삼천만 원보다 두려웠다. 인생이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이 현실이었다.
25. 오 년째 문제없이 드나들던 내 집 앞 도로값을 치르는 것이 옳은지,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자문해 보았으나, 답을 찾지 못했다. 해법은 없는지 구청 담당자에게 매달려 읍소해 보았지만, 지적도에 소유권이 정해진 상태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즈음, 전원주택으로 분쟁이 잦다며 여지를 보이지 않았다.
26. 풀이 죽어 중개인을 찾아가 간청했다. 다음날 통보가 왔다. 그동안 사용했던 도로였고, 이웃이니 천만 원으로 해결하자며, 정해진 시간 안에 약속 지키지 않으면 법대로 하겠다는 협박이 억울했지만, 천만 원으로 약속을 지켰다.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