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4
-세도정치의 시작
세도정치는 특정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순조 이후의 정치형태로서,
특정 가문의 위세가 당파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당파정치와는 구별됩니다.
또한 세도정치의 주체는 왕가와 혼인관계로 이어진 척신 가문으로서,
이런 점에서 세도정치의 조짐은 영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영,정조 때 홍봉한, 김귀주, 홍국영 등의 척신이 권력을 잡기는 했으나,
이 때의 척신들은 영조나 정조의 카리스마에 눌렸다는 점과 순조 이후의 세도정치에는 벽파니 시파니 하는 당파적 색채가 소멸되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집권한 노론 시파는 벽파를 사실상 궤멸시켜버렸는데,
이러한 시파의 중심에는 안동김씨, 그 중에서도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있었습니다.
안동김씨뿐만 아니라 온 조정이 그를 주시했고, 권력을 눈앞에 둔 김조순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 임금으로부터 그토록 총애를 받았던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이나 김귀주(정순왕후의 동생) 가문이 왜 몰락하고 말았는가
- 모든 것을 독식하려 했기 때문이다.
왕의 국구 김조순은 실제로 순조 재위 기간 내내 대제학, 병판, 이판 등 순조가 내리는 벼슬을 모두 사양했고,
원자의 유선과 요속을 추천해 올리라는 어명에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달아 바로 차자를 올렸습니다.
-신은 조정의 혹과 같은 존재로 은택이 과분하여 위아래에 미치지 못하옵고 좌우에 떳떳함이 없나이다. 추천에 참여하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김조순은 이후에도 어떤 관직도 맡은 바 없었으나 이가 30년동안 최강의 막후 실력자였음은 이론이 없습니다.
순조 32년에 그가 죽자 순조는 다음과 같이 그 죽음을 애통해 했습니다.
-그는 부지런하고 충성스러우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실을 위해 안으로는 지극히 정성을 다해 나를 올바르게 돕고 밖으로는 두루 다스려 진정시켜 시국의 어려움을 구했으니 나라의 오늘이 있도록 보호한 것이 누구의 힘이었는가.
죽은 그날로 순조는 그에게 영의정을 증직했고 문신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충문공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렇게 대접받은 신하는 조선에 없었으니, 이는 앞서 본대로 그의 남다른 처신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김조순이 안동김씨의 일원으로 세도정치를 편 원조이기는 하나, 세도정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김조순 사후부터입니다.
김조순이 죽자 그 아들, 조카들이 전면에 나서며 세도정치는 막장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어서-~~~~
순조 5
- 외세의 쓰나미
벽파의 득세와 시파의 축출, 다시 그 반대의 상황 등 모든 과정을 지켜 본 순조는 청년기를 지나면서 어린 시절 총기와 큰 뜻을 잃고 맙니다.
순조는 더는 그 혼탁한 정치의 세계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데,
영조나 정조처럼 당파의 힘을 키웠다 죽였다 하면서 정국을 조절할 탕평의 길을 갈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순조는 중요한 정치적 판단, 결정을 비변사에 모두 맡기고 정치 중심에서 한 발 뺀 채
민생이나 과거제도 개혁 등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조정을 틀어쥐지 못한 채 벌이는 일들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순조는 체격이 크고 건장했지만 즉위 10년 즈음부터 자주 병에 시달렸고,
순조 20년 즈음부터는 경연도, 신하들을 불러 일을 보는 것조차 뜸해지니,
급기야 영의정 김재찬이 아래와 같이 아뢰기에 이르렀습니다.
- 한가로이 계실 때가 많지만 신하를 접견하는 일이 드물고,
- 경연을 여는 날이 적어서 책을 한 권 끝맺을 기약이 없고,
- 백관이 나태해져서 한 가지 일도 진작시키지 못하고 각지에 일이 산적해있으나 자문하는 것을 볼 수 없고,
- 벼슬을 위해 세도가를 찾아가는 습속이 굳어졌는데도 단속하는 바가 없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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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순조에게도 즐거움이 있었으니 이는 그 아들 효명세자입니다.
순조는 효명세자의 배필로 풍양조씨 집안의 여식을 선택했는데,
그 이후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한편 병약한 순조는 순조 27년에 열아홉 살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 뒤로 물러나 나름대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효명세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구현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순조는 이것이 기쁘고 고맙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권력이 세자에게 쏠리는 것을 전혀 부담스러워하거나 질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4년 만인 스물둘에 죽으니 순조의 슬픔은 매우 컸고 용안에 웃음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으며
안 그래도 쇠약한 육신이 큰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지병이 악화되어 병석에 누었다가 1834년(순조 34년) 45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참으로 존재감 없는 임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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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 연해에 이즈음부터 낯선 모양의 배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조선인들은 이 배들을 모양이 다른 배, 곧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양선은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켜 부국강병을 이룬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서구 열강의 군함이거나 무장한 상선이었는데,
이양선의 조선 연해 출현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세력이 동양으로 점점 밀려 옴)을 나타내는 현상이었습니다.
마침내 조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무런 대책이 없는 가운데 거대한 외세의 쓰나미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담에 이어서~
첫댓글 오늘도 가르침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속편을
기다리면서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예나 지금이나 그늠의 권력이라면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