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2월 19일 낮... 겨울비가 보슬보슬 날렸습니다... 점식식사를 마치고 달성공원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청동기,,철기시대 때부터 그 존재를 드러내어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고 이렇듯 대구시민들 곁에 남아 있는 달성공원... 이 달성공원에 얽혀 있는 비밀스런 이야기 몇 가지를 정리해봅니다..
달성공원하면 떠오르는 키다리 아저씨와 동물원 어린시절 저에게 있어 달성공원은 그야말로 별천지의 세상이였죠.. 뭐니뭐니해도 TV에서나 볼 수 있었던 원숭이,호랑이,사자,코키리 등의 동물들을 볼 수 있어 좋았고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달성공원 입구에는 우리들이 좋아했던 달고나, 쫀드기 같은 불량식품과 장난감들을 파는 노점상이 즐비했었거든요.. 그러고보니 ‘사진’이라는 완장을 두른 사진사 아저씨들도 생각나네요.. 이젠 가물거리는 어린시절 기억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라면 단연 매표소에 근무하셨던 키다리 아저씨(류기성씨)였던 것 같습니다.. 달성공원 동물원 개장이후 30여년을 근무하시다가 99년 2월 20일 향년 74세로 대구시민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사진 속 이 아저씨 생각나십니까??
역사 속에 묻혀버린 달성토성(達城土城) 아마 제 또래(올해 40세)의 대구시민이라면 달성공원하면 가장 먼저 ‘동물원’이 떠오를 겁니다.. 서울 창경궁이 일제에 의해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바뀐 것처럼 달성공원 역시 일제에 의해 동물원이 되었습니다.. 아득히 먼 선사시대... 달구벌의 가장 핵심지역이였던 이곳 달성토성이 한낱 동물원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가 찰 따름이죠.. 청동기,철기 그리고 삼국시대 때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통합했던 ‘달구벌’세력들의 천연 요새가 바로 이곳 달성 土城이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수성구 사월동 뒤편 성동(城洞)에 있는 고산(孤山)(예전에는 산정상부에 토성이 있어 城山이라 불렸다)처럼 달성토성 역시 평지에 자연적으로 산성의 형태를 갖춘 채 불쑥 솟아 있는 지리적 특성에 의해 전략적 요충지로 중요하게 인식이 되어 왔던 것이죠.. 이후 달성토성은 고려 말에 이르러서 이천서씨에서 분파된 ‘달성서씨’ 一門의 집성촌이 됩니다.. 이렇게 ‘달성서씨들의 세거지’였던 달성토성은 고려 말을 지나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평지돌출이라는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형 특성 탓에 달성서씨라는 일문의 소유에서 나라의 관아와 군부대 주둔지로서 나라의 소유로 바뀌게 됩니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감영이 이곳 달성토성에 잠시 설치(1596) 되었다가 이후 현재의 포정동 경상감영자리로 이전(1601)을 하기도 했습니다.. ‘달성서씨문중’과 ‘경상감영’이 떠난 이후 달성토성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하여 잡풀과 숲이 우거진 야산으로 방치됩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동학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군과 헌병대가 달성토성 북편자락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달성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신사와 공원 등이 조성됩니다. 1906년에는 일본천황에 절을 하는 공간인 요배전(遙拜殿)이, 1914년에는 대구신사(神社)가 조성됩니다.. 해방 후 요배전은 바로 해체가 되었으나 신사건물은 해체되지 않고 단군숭봉회에서 단군을 모시는 천진전(天眞殿)으로 사용되었으나 1966년에 철거가 됩니다. 이후 달성토성에는 이상화, 최제우, 허위, 이상룡, 서병오, 서동균 선생 등을 기리는 비석들이 세워지고 1969년 8월 1일 달성공원이 개원되고,, 이듬해 5월2일 달성공원 내 동물원이 개원을 하게 됩니다.. 달성공원 내 동물원을 설계한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의 마지막 왕위 계승권자였던 영친왕 이은의 아들 ‘이구(李玖)’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달성공원 정문입니다... 키다리 아저씨 류기성씨가 큰 키를 뽐내며 서 계셨던 곳인데... 사진 속 중앙 멀리 향나무 두 그루가 보입니까?? 공원 가장 중심되는 자리에 서 있는 참 보기 좋은 향나무 노거수이나 많은 분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나무입니다..
‘대구물어, 손필헌역’에 의하면 1909년 1월 12일 ‘순종’ 임금이 대구 달성에 시찰을 나왔다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향나무를 각각 기념식수했다고 되어 있는데 최근 조사에 의해 사진 속 향나무가 바로 그 기념식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달성공원 정문이 서 있는 바로 저 위치에 일제 때 대구 신사(神社)의 도리(입구의 기둥문, 사찰의 일주문과 비슷)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대구신사 배치도입니다..
1번 그림이 신사건물.. 6번 그림이 신사의 입구문에 해당하는 도리입니다..
10번 그림 관풍루와 망경루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도록 하죠..
달성토성에 뿌리를 둔 명문 달성서씨(達城徐氏) 고려말 달구벌의 주요 지배세력은 달성서씨였습니다.. 지금의 지역으로 보면 달성, 동산,남산,계산동 일대가 달성서씨 세거지였던 것이죠. 세종 때 달성지역이 대구관아 부지로 결정되자 달성서씨의 대표였던 구계 서침선생은 나라의 결정이니 조건없이 자신들의 세거지였던 이 터를 나라에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이에 세종대왕이 서씨들에게 포상과 함께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으나 구계선생은 모두 사양하고 포상 대신 대구부민의 환곡(봄 춘궁기에 관아에서 빌려준 양식)의 이자를 5되씩 감하여 줄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구계 서침선생은 국불천(國不遷)位를 인정을 받아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제사에 모셔지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구계 서침선생을 모신 구암서원(龜巖書院)은 현재 경북도청이 자리한 연암산 서당골 정상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천대로를 남쪽에서 북쪽 경대교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우측으로 멀리 연암산 정상부에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는 구암서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최초 구암서원은 현재 대구향교 옆 제일중학교 정상부에 세워졌으나(1665,현종6) 1718년에 동산(신명여고와 섬유회관 사이)으로 옮겼다가 1995년에 현 산격동 연암산 정상부로 옮기게 됩니다.. ‘대구십경’ 또는 ‘대구십영’으로 알려진 7언 절구 10수의 ‘서거정 선생’이 바로 달성서씨입죠..
달성공원에 있는 이 ‘달성서씨유허비’는 정읍에서 가져온 돌로 만들어졌으며 달성서씨 자신들의 세거지였던 달성을 조정에 조건없이 양도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에 세워진 비입니다.. 글은 시조시인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죽농 서동균 선생이 썼습니다..
‘죽농 서동균(1902-1978,서화가)’ 선생은 사군자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3.1운동 때에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6개월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죠.. 팔능거사로 알려진 ‘석재 서병오 선생’의 영향으로 서화에 입문 평생 대나무만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죽농’이란 아호를 썼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비서를 보내 그림을 요구하자 직접 오라며 단호히 거절한 일화로 유명하죠.. 특히 말년에는 초, 중년에 남발한 자신의 작품들을 대부분 찾아내어 모두 불살라 없앤 후 타계했는데,,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에서 퇴계의 학맥을 이은 유학자 석담의 제자역인 고죽의 모델이였다고 합니다..(석담의 모델은 석재 서병오) 달성공원 안에는 죽농선생의 글씨가 몇 점 남아 있습니다..
구계 서침선생 나무... 앞에서 말씀드린 구계 서침선생을 기리는 뜻에서 달성토성안에서 뿌리내려 자라고 있는 회화나무들 중 한그루를 선정해 ‘구계 서침 나무’라고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八能居士 석재 서병오(1862-1935)선생 예술비... 조선후기에서 일제시대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배출한 인물로 詩,書,畵,文,琴,碁,博,醫 이렇게 8가지 기예에 능하다 하여 ‘팔능거사’란 별칭을 얻었다고... 그 외에도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달성공원 인근에 있었다는 ‘잉어샘’과 ‘미꾸라지샘’의 전설에 달성서씨가 등장하는 등.. 달성공원에는 천 여 년 전 달성토성의 지배세력이였던 달성서씨 일문의 역사가 얽히고설키며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2006년 8월 산림전문가인 이정웅 선생과 정시식 선생에 의해 1909년 1월에 기념식수되었다는 기록에 의거...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 임금’의 기념식수로 이미 확인된 나무들인데... 무슨 연유인지 아직까지 이에 대한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사는 사실대로 전해질 때 생명력을 얻는 것인데...
이 나무의 유래를 아는 사람들은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사색에 잠길 때면... 또는 그 앞을 지나노라면...
두 나무 뒤쪽으로 비슷한 수령의 또 다른 향나무가 한그루 더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가 없다는데... 여러 정황 상 이 나무 역시 비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나무인 것은 틀림없으련만... 알 수가 없다하니...
청도 운문사 절 마당에 있는 처진 소나무의 축소판을 연상케 하는 달성공원의 처진 소나무..
현재 달성공원에는 수령 200년이 넘는 고목들을 포함해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어울려 군데군데 소규모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공원화 작업이 진행될 때 심어진 일본수종의 나무들은 대략 수령 100여년 정도지만,, 200여년이 넘은 달성공원 노거수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때 심어진 국내수종들입니다.. 달성공원의 대표적 일본수종의 나무로는 가이즈카 향나무(일명 왜향나무)와 회양목을 들 수 있으며,, 국내수종은 느티나무,느릅나무,회화나무 등입니다..
사진 좌측은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선생 구국기념비이며,, 우측 멀리 보이는 조형물 역시 구한말 의병대장 왕산 허위 선생의 순국기념비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나무들을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수형(樹形)이 나선형으로 하늘을 향해 틀고 올라가는 모습이죠... 바로 일제 때 이곳에 심어진 일본 수종의 가이즈카 향나무 숲입니다.. 물론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광경이지만,, 좀 그렇지 않나요?? 아마도 석주 선생의 항일구국의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 광경을 보면 용서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네요... 가만히 살펴보면 달성공원 내에서 여름철의 뜨거운 태양볕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사진 속처럼 몇 군데 조성되어 있는 가이즈카 향나무 숲 아래 벤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를 부정하기는 싫습니다만,, 뭔가 획기적인 대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구읍성(1736,영조12)축조 이전에 대구에는 달성土城과 함께 土城형태의 또 다른 대구읍성이 있었다. 실제 달성토성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토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대구읍성에 관한 기록인 ‘대구부읍지’에는 1736년에 축조된 대구읍성 이전에 대구에는 대구읍성 역할을 했던 또 다른 토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토성은 현재 대구 시민운동장 지역을 중심부로 하여 세워졌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 토성은 1590년 경 대구부사 윤현이 축조한 성으로 현재 시민운동장 부근의 동명이 고성동(古城洞)이란 점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최초의 대구읍성은 임진왜란으로 2년 만에 무너진다> ‘대구부읍지에 의하면 최초의 대구읍성은 부사 윤현이 선조 23년(1590)에 선산,군위,인동 등 3개 읍민을 징발하여 대구부민과 함께 축성, 이듬해에 완성했다고 한다. 비단 대구뿐만이 아니고 영천,청도,삼가,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좌우병영 등 경상도 일원에 걸친 대역사였다...왜구의 침략을 우려해서 준비한 평지의 토성이었으며, 이곳이 고성동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중략) 임진왜란 당시 대구읍성은 평지인데다가 견고하지 못하였으므로 항거 불능이었다. 부사 윤현은 한번 맞부딪쳐 싸워보지도 못하고 2천 명 군민을 거두어 공산성으로 퇴진하였다... (대구신택리지)’
옛 경상감영에서 옮겨온 관풍루(觀風樓)와 망경루(望京樓) 달성공원 북동쪽 높은 지대에 세워져 있는 관풍루입니다.. 새롭게 복원이 된 건물이며 원래부터 이곳 달성토성에 있던 건축물은 아닙니다.. 관풍루는 현재 포정동에 복원되어 있는 옛 경상감영(1601,선조34)의 정문에 해당하는 문루인데 1909년 이후 대구읍성을 허물면서 망경루와 함께 이 곳 달성공원으로 이건해온 것이죠.. 관풍루라는 이름은 ‘감사가 樓上에서 세속을 살핀다(觀風世俗)’는 말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옛 사진과 비교해보니... 다른 점이 몇 있습니다... 누로 오르는 계단의 위치도 그렇고,, ‘관풍루’와 ‘영남포정사’ 현판의 위치가 古今이 다른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관풍루 편액과 영남포정사 현판은 죽농 서동균 선생의 글씨...
아... 고개만 들면 보이는구나... 가이즈카 향나무.... 왜향나무...
망경루 역시 관풍루와 마찬가지로 경상감영의 부속 건물이였으나 읍성을 허물 때 관풍루와 함께 이곳 달성으로 옮긴 누각입니다.. 망경루라는 이름은 ‘서울 조정의 임금을 바라 본다’는 뜻입니다.. 원래 경상감영에는 1870년 관찰사 김세호(金世鎬)가 세운 4대 누각이 있었는데 동쪽은 정해루(定海樓), 서쪽은 주승루(籌勝樓), 남쪽은 선은루(宣恩樓), 북쪽은 망경루였습니다.. 망경루가 이곳 달성으로 옮겨질 때의 위치는 달성공원 입구에 들어서서 좌측언덕 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망경루가 너무 낡고 기와도 헌 탓에 70년대에 관풍루와 함께 복원하는 과정에서 관풍루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지만 망경루는 끝내 복원되지 못하고 몇 장의 사진만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재 ‘석주 이상룡 선생 구국기념비’와 ‘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가 서 있는 달성의 남쪽 언덕배기에 망경루가 서 있었다고 합니다.. 옛 사진 속 모습의 망경루가 지금도 이 자리에 서 있다면 참 좋았을 것을...
구한말 의병대장 왕산 허위 선생...
한국 최초의 문학비 이상화 詩碑 코끼리 우리와 호랑이 우리 사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이상화 선생의 시비입니다.. 이곳의 ‘상화시비’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문학비로 알려져 있죠.. 1948년 음력 정월 김소운, 백기만, 이윤수 등의 제안으로 세워졌다고.. 시비 전면에는 상화의 처녀작인 ‘마리아여 나의 침실로’가 음각되어 있는데 ‘상화의 셋째 아들 태희’의 글씨이며, 시비 후면의 글은 수필가 ‘김소운’이 짓고 민족 대표33인 중 한 분이신 ‘위창 오세창’선생이 썼으며, 상화시비(尙火詩碑)라는 전서체 글씨는 ‘죽농 서동균선생’의 글씨입니다.
테니스장 롤러로 전락한 일제 대구神社의 도리기둥 일부 달성공원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테니스장이 보입니다.. 이곳 테니스장에도 눈여겨 볼만한 역사적 유물이 하나 있답니다.. 바로 테니스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롤러 말입니다.. 이 롤러에 사용되고 있는 원통형 화강암 석재는 앞에서 말씀드린 일제 때 이 곳 달성토성에 세워져 있었던 대구신사의 정문격인 도리의 기둥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達城土城 그리고 산책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달성에 대해 ‘대구부의 서쪽 4里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백44척, 높이가 4척이고 안에 우물 셋과 연못 둘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길이 1.3km , 높이4m 안팎이죠.. 원형의 달성토성은 내부는 공원으로 성벽 역할을 했던 토성은 그 둘레를 따라 지금은 산책로가 조성이 되어 있죠..
달성토성 산책로에서 발견한 연리지(連理枝) 자료에 의하면 산책로를 중심으로 딱 한곳에서 ‘회화나무와 고욤나무의 연리지(連理枝)’가 발견되었다고 표시가 되어 있는데... 글쎄요?? 저는 잠시 20여분 산책하는 동안에도 3군데서나 연리지를 발견했는데... 그런데 솔직 달성공원 연리지는 좀 약하죠...
(2006년도 촬영) 이 정도는 되어야죠... 사진은 북대구 ic 뒤편 함지산 자락에 있는 연리지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소나무 연리지죠...
(2006년 당시 함지산 연리지에 대해 답사기를 써둔게 있어서 그 중 한부분만 옮겨봅니다) 연리목 울타리앞에 누군가가 글을 붙여 두었습니다.. 백낙천의 그 유명한 長恨歌 입니다..
◈連理枝(연리지)◈ 이을 연, 이치 리, 가지 지. [출전]白樂天의 <長恨歌> 나란히 붙은 나뭇가지. 다정한 연인. 부부의 애정이 지극히 깊음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동쪽의 바다에 비목어(比目漁)가 살고 남쪽의 땅에 비익조(比翼鳥)가 산다고 한다. 비목어는 눈이 한쪽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두 마리가 좌우로 달라붙어야 비로소 헤엄을 칠 수가 있고, 비익조는 눈도 날개도 한쪽에만 있어 암수가 좌우 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날 수 있다고 한다. 연리지(連理枝)라면「나란히 붙어 있는 나뭇가지」를 뜻한다.곧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사이좋게 합쳐진 가지가 連理枝다.간혹 거대한 고목에서나 그런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다정한 느낌이 들어 보기에도 좋다.이처럼 '比翼'이나 '連理' 모두 그 말이 가져다 주는 이미지와 같이 남녀간의 떨어지기 힘든 결합을 뜻한다. ◈◈본디 連理枝의 故事는 후한말(後漢末)의 대학자 채옹(蔡邕)에서 유래했다. 워낙 효심이 극진해 어머니가 죽고 뜰에 나무가 자랐는데 連理枝가 되었다고 했다.그래서 본디는「효심(孝心)」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그것이 다정한 연인(戀人)의 상징으로 사용되게 된 것은 당(唐)의 詩人 백락천(白樂天)에 의해서다.그가 태어났을 때는 대당제국(大唐帝國)의 영화(榮華)가 차츰 기울기 시작했을 때였다.그것은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로맨스 때문이었다.楊貴妃에 빠진 玄宗이 정치에 뜻을 잃었던 것이다.둘의 로맨스가 워낙 유명했으므로 그는 詩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것이 유명한『장한가(長恨歌)』다.생전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언약했다고 한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 있는데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한 끝없이 계속되네. 玄宗은 안녹산의 난으로 꽃다운 나이에,그것도 非命(비명)에 간 楊貴妃를 잊지 못해 늘 이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천도교의 창도자인 수운 최제우 대신사 동상입니다.. ‘이 세상 만물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侍天主시천주’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자는 事人如天사인여천’ ‘모든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人乃天인내천’ 등의 진리로 개벽을 준비하고 있죠... 경주 현곡면에는 ‘용담정’이란 유적지가 있습니다.. 천도교 성지로 ‘대신사 수운 최제우’가 득도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죠.. 저는 2006년 가을 경 용담정이 있는 현곡면 가정리가 고향인 대학 동창 덕에 용담정에서 하룻밤 기도를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지령(地靈)이 참으로 맑고... 샘물 맛이 기가 막힌 곳이였죠...
(2006.11 용담정에 1박2일 기도하러 갔다가 폰카로 찍은 사진들입니다)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保國安民)
모과나무인데.... 껍질의 색이 하도 눈에 띄어 한 장 찍어보았습니다...
달성공원 산책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에서 주운 생각들
1. 달성토성의 원래 주인은 달성서씨 문중이였다..
2. 달성토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상태로 잘 보존된 토성이다..
3. 달성공원 정문자리에 일제시대 때는 대구신사의 도리가 서 있었다..
4.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두 그루의 가이즈카 향나무...좌측은 이토 히로부미,, 우측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기념식수이다..
5. 키다리 아저씨 류기성씨...
6. 경상감영에서 옮겨온 관풍루와 망경루가 이 곳 달성에 세워졌다가 이후 70년대에 관풍루는 해체복원이 되었지만 망경루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7. 대구 신사 배치도..
8. 저항시인 상화시비가 있고..
9.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가 있고..
10.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순국기념비도 있고..
11. 천도교의 제 1 대 교주인 대신사 수운 최제우의 동상도 있으며
12. 잘려나간 대구신사 도리 기둥이 테니스장 롤러로 사용되고 있으며..
13. 달성공원에 동물원을 설계한 이가 바로 영친왕의 아들이였던 이구이며..
14. 달성공원 동북방 이 쯤에 전설 속의 샘 ‘잉어샘’과 ‘미꾸라지샘’이 있었다는 사실...
몇 일전...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이 있었습니다... 상화 시인의 ‘나의 침실로’ 와 관련해... 어디선가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시인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의 배경은 카톨릭 사제관이였다는..’ ‘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 는 김 추기경님의 말씀에서 정말 시원한 빛을 만났었는데... 오늘 밤 다시 한번 이 말씀의 뜻을 곱씹어 봅니다.. 송은석 두손모음... 참고문헌: 대구신택리지(북랜드) 나의 침실로 / 이상화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려는도다 아,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挑)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덴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촉(燭)불을 봐라. 양털같은 바람결에도 질식(窒息)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 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에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움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피란 피---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마돈나 언젤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묵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
첫댓글 달성공원 가본것이 3아이 모두 초등학교 입교식전 이었나?...까마득하군요...33-9=24 아마도 20년은 훨씬 넘었군...봄이오면 송선생님 글을 다시읽고 한번 가봐야 겠다. 아이들은 모두 서울로 갔으니...이제는 둘이서
네.. 선생님 꽃 피는 봄이 빨리 오길... 예절원 사진들을 보면 선생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거의 없죠?? 모란선생님께서 저렇게 자청을 하시는데... 못이기시는 척... 하하하~~
이젠 황량하기까지 한 달성공원...봄의 기운을 맞아 활기를 되찾기를 ...^^
네... 어서 빨리 달성공원 잔디광장에.... 파아란 잔디가 돋아나길... 단체로 달성공원 산책 한번 나서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