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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던 나의 LOG-BOOK(항해일지)]
한번뿐인 인생인데, 멋지게 살아보자고 다짐하며 큰 꿈을 꾸었던 나의 어린 시절. 장성 산골 새터에서 호롱불 켜며 공부하다가 깜박 졸 때 앞 머리카락이 타서 앗 뜨거! 하며 깨기도 하고, 호야불을 켜고 누나의 귀가길을 따라 나섰던 어릴적 추억이 있고, 중학교 시절, 반 실장이 되고 싶어 도전 했다가 득표차이로 반 회장을 해 보았고, 회의를 진행 하는 동안 많은 것을 깨달았던 추억이 있다. 또한 노래 부르기를 잘 했던 나는 의무곡인 제목도 잊었지만 선정 된 한 곡과 “올드블랙조”를 선택곡으로 전교생 앞에서 마이크 잡고 노래 불렀던 추억이 새롭기만 하다. 고교시절은 그래도 대도시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고자 열심히 공부해서 연합고사를 치루고 최초로 무작위 배정을 받아 당시 광주 광천동에 사립초등학교부터 남중과 여중, 남고와 여고, 야간고와 그리고 전문대학까지, 한 울타리 안에 있는 대규모 캠퍼스에 수십대의 스쿨 버스가 교문 입구 주차장에 가득했던 광주송원고등학교 시절엔 음악반에 들어가 유일하게 남고 합창단이 참가한 우리 팀이 전국1등을 하여 그날 기분좋게 외식을 하고 기쁨을 누렸던 기억도 새롭다.
인간답게 살며 범사에 최선을 다 하자....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남들 보다는 특별한 삶을 산다기 보다는, 누구나 인정 할 만한 멋진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남들이 쉽게 선택하지 않는 바다의 사나이가 되고자 제주대학교 해양과학대학이 입학하여 해군 ROTC 과정을 마치고 해군 장교가 되었고, 세계를 누비며 비행기로는 지구 몇바퀴를 돈 듯 하지만, 세계 각국을 다니며 본인이 승선했던 배를 몰고 울산항까지 입항하여 아버님을 초청하여 배 구경도 시켜 드렸으니, 배로도 오대양-태평양, 인도양, 대서양과 희망봉을 돌기도 하고, 파나마운하와 킬운하, 스에즈운하, 그리고 성지순례를 통해 먼 훗날 고린도운하까지 가 보았으니, 세께적인 운하도 다 다녀보았다. 이제 세계일주를 완벽하게 했다 싶어 88오림픽을 하던 해에 영구 귀국을 했고, 항해사가 되어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세계를 돌아다녔던 일을 추억으로 남겼으니, 정말 조금은 특별한 인생길을 택한 것이 분명하다. 이젠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선박보험과 해손보험을 담당하는 해상부에 근무하고자 국제화재에 입사했고, 지금은 그린화재와 MG손해보험으로 명칭이 바뀌고 주인도 바뀌었지만, 보험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보험사 시절, 보다 나은 삶을 설계 하여 희망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는 재정 설계사가 되어 20여년이 넘도록 그 일에 전념 했었고, 당시 다들 어렵다고 했던 영업소장을 자원하여 입사 5년만에 상장사의 정규 과장으로 특진을 했고, IMF를 맞아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어 희망퇴직을 했고, 그때 나이가 사오정을 한 해 앞둔 나이었다. 그 이후 손.생보 법인 대리점이 없던 시절에 제주도내 현대해상 최고의 오피스 빌딩 7층 센터에 사무실을 내고, 전 교인을 초청하고 목사님의 축하를 맏으며 대표이사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 이후 생명보험회사에 매력을 느껴 당시 세계 1위를 자랑하던 트리플A 회사인 AIG 생보에 입사하여 메니져가 되어 억대 연봉을 받는 MDRT 회원을 2년동안 유지하며, 아들과 함RP 뉴욕과 워싱턴,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여행했던 추억과, 이듬 해 아내와 함께 호주 시드니에 회사의 특혜로 해외여행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생을 설계하고 살아가던 나였기에 늘 명품 인생을 생각하곤 했다.
누구나 한번 쯤 겪는 일이지만, 나역시 부친의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인한 입원으로 다시금 나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야만 했다.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을 한 번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있던 나에게는 아버님의 갑작스럽게 쓰러지셔서 아들을 못 알아보는 15일간의 입원으로 인해 31년을 살아오던 제주도를 떠나 고향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이 장남인 아들이 인생의 31년을 넘게 살았던 이곳 제주를 수없이 오고 갔을 터인데,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셨다. 졸업식때 한번 다녀 가시려고 부단히 노력 했지만,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뱃길 마져 막혀, 결국 일생동안 제주도 한번 못 오시고 비행기도 한번 못타 보시고 천국 여행을 떠나신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다행히 아버님은 건강히 오래 사셔서 감사하고, 8남매 대 가족들이 함께 모여 팔순 때는 일본 벳부 여행을 하고 지난해엔 제주도 여행을 하기도 했으니 이 또한 아버님이 가족의 구심점이 되어 주신 덕분이었다.
정들었던 제주를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마음은 참으로 감격스런 날이었다. 아버님을 모시고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과 가슴 뿌듯함이 전해오던 이삿날 다행히도 비가 피해서 와 주었고 여름 큰 비가 왔음에도 빗방울 하나 맞지 않고 포장이사를 마쳤다.
2010년 8월 25일!
고교 시절 해남에서 광주로 올라가 고교시절을 보냈던 나는 30년을 훌쩍 넘긴 이후에야 다시금 고향을 찾았고, 광주에서의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
보다 더 좋은 길로 인도 해 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 역시 부모를 공경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린 결단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믿고 용기를 갖고 세상을 헤쳐 나가기로 했다.
전에 살던 바다와 한라산이 보이던 복층 멋진 집을 양도하고 광주로 이사를 하고 가족과 헤어져 나만 제주에 남다보니, 오히려 시간이 부쩍 많아진 기분이다. 이상한 일이다. 심지어 빨래와 밥 짓는 일까지 더 일할 거리가 많아졌음에도 시간의 여유가 생겨 이렇게 집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다니...
이제 조금씩 적응되어 나가는 제주도의 삶... 나의 대학 후배가 된 아들과 함께 대학 시절 자취하던 때로 돌아간 듯하다. 이제 또 하나의 나의 꿈을 실현 해 나가는 순간이다. 다름아닌 나의 삶을 글로 남겨 책으로 한권 남기고 싶었던 소박한 염원을 이루려 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게 자서전 한 권 발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잠시나마 함께 자취하던 추억을 누렸던 큰 애가 육군 포병으로 입대하고, 만기제대 후 복학하기 전 중국에서 1년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중어중문학과 3학년을 마치고 지금은 한달 여정으로 인도 배낭여행 중이니, 벌써 이 글을 쓰고자 각오를 다졌던 세월이 무려 5년이 지난 듯 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다위의 항해일지”를 쓰고자 한다.
[나의 어린 시절]
산골 장성에서 눈이 많이 올 때면 키를 넘기는 눈 속에 빠지기도 했고 시냇가에서 헤엄치길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특별히 엄마의 허락을 받고 수건 한 장 가지고 시냇가로 달려 갈 때엔 발이 보이지 않을 만큼 달렸다. 몸과 마음은 더 빨리 시냇가로 달리다가 넘어질 뻔 하며 시냇가로 향하곤 했었다. 그곳 장성에는 지금도 상무대가 옮겨져 군인들의 중요한 훈련 장소로 남아 있지만, 당시 다니던 초등학교 부근에는 군인들의 주둔지가 있었고, 6.25 참전 용사셨던 아버님의 전쟁 무용담을 들으며 나도 커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곤 했다. 그러던 여름, 아버님이 계시던 해남으로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땅끝 바닷가 해남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태고의 발자욱이 남아있던 우항리 공룡 박물관 앞 바닷가는 어린 시절 나만의 놀이터였고, 꿈 많은 바다 소년으로 자라기에 좋은 장소였다. 조그만 여객선을 타고 목포를 다녀 올 때면 얼마나 좋았던지.... 시간이 흘러 사면이 바다인 제주로 유학을 떠나, 해양과학대학에서 항해학, 기상학, 해양학, 천문학등을 배우며 선장이 되어 세계 일주를 해야겠다는 꿈을 키웠다. 게다가 어릴적 멋진 군인이 되겠다며 전쟁 놀이를 즐기던 나는 해군 ROTC를 지원하여 4년동안 군사학 훈련을 마치고 해군 소위로 임관했고, 대학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 전국 구석구석 수 많은 섬들을 돌아보는 연안 실습과, 대만과 일본을 다녀 오는 해외 원양 실습을 통해 못가 본 세계 여행 특히 유럽 여행을 꼭 하고 싶었다. 그런데 첫 출항지가 유럽으로 결정 되었다. 하나님! 저의 소망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해사로 첫 출국]
1984.2.25 드디어 Sand Marine Co.Ltd 소속 3등 항해사로 출국을 하게 되었다. 1983.2.19 제주대학교 해양과학대학을 졸업했으니, 꼬박 1년을 넘기고 나의 꿈인 세계일주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날이 온 것이다. 같은 해 2월23일 해군 ROTC 훈련을 마치고 해군소위로 임관한 이후, 부산 한국해양대학교에서 전수과 100일 교육을 마치고서야 드디어 세계 일주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M/V Bell Clipper” 라는 선명만을 알고 현재 Rotterdam에 정박하여 있다는 회사 관계자의 이야기만 듣고 어떻게 생긴 배 일까? 궁금해 하며 내가 그토록 가 보고 싶었던 유럽 가운데 첫 여행지인 Netherlands로 향했다. 내 자신이 1년 동안 살아가야 할 짐 꾸러미와 회사에서 챙겨 준 각종 짐을 가득 안고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승선하기 전 선박선교사로 훈련받고 최원종 목사님과 3박4일을 함께 기거하며 용두산 공원에서 거리전도를 하는 것으로 훈련을 마친 터라 세계 각국의 전도 자료를 또 한 꾸러미 챙겨야 했다. 고향을 떠날 때 부모님의 눈물을 뒤로한 채 떠나온 나는 김포 공항에서 또다시 대학시절 친구처럼 때로는 애인처럼 지내던 여친과 동생과 누나가 마중 나와 있어 또 한번 더 이별을 맛보아야 했고, 진주 방울 같은 눈물을 보아야 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을 위해서는 세 번 기도하라고 했던가? 기내에서 눈을 지긋이 눈을 감고 다짐 해 보았다. 이국 만리 떠나는 이 여행이 끝나면 울적한 마음대신 활짝 핀 웃음을 안고 돌아 오리라고...고국을 떠나 한참을 비행했고, 현지 시간이 중요할 뿐 고국의 시간은 이제 잘 모르겠고, 새벽시간 사우디아라비아 국제공항 Bahrein에 중간 기착하여 승무원이 교체되고 기내 청소를 해 주었고, 한참 비행을 하더니 또 Jeddah에서 항공유를 보급 받기위해 잠시 착륙했다가 다시 스위스 Zurich로 향했다. 정말 이렇게 긴 비행기 여행은 물론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고, 국제선 비행기라서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다가, 눈가리게를 준비하진 않았지만, 담요를 덮고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잤을까? 스위스 Zurich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왔고, 스위스에서 대한항공은 고국으로 돌아갔고, 우리 일행은 낯선 공항 면세점을 구경하며 시계의 나라답게 고급 롤렉스와 오메가 시계가 반짝이며 전시되어 있었고, 얼마나 값이 나가는 건지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도 해 보며, 비행기 연결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아름다운 엽서 몇 장을 사서 집으로 그리고 몇몇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함께 간 동료 선원들과 아이스크림과 쵸코렛을 사서 간단히 요기를 했다. 한참을 기다린 뒤 탑승 시간이 되어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스위스 비행기를 타고 Amsterdam으로 향했다. 정말 기대했던 첫 유럽 여행은 제주행 비행기를 한 시간도 못되어 잠시 타다 내리던 것과는 달리 실컷 탓 던 기억으로 각인될 듯싶다. 기내에서 내려다 보니 눈 덮인 빙산이 보였다. 혹시 몽브랑 산이 아닌가 싶었다. Netherlands Amsterdam에 도착하자 탑승했던 외국인들은 무사히 도착했음을 기뻐하며 박수를 쳤고, 우리나라 기내 같았으면 도착 전부터 일어서서 내릴 준비를 했을 텐데 한분도 일어 선 손님이 없었고, 완전히 멈출 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기내에서조차 이국적인 멋을 느끼며, 버스로 갈아타고 이젠 Rotterdam으로 가야했고, 가는 도중 네덜란드답게 군데 군데 풍차가 보이는 아름다운 거리를 달려 드디어 항구에 정기 검사를 위한 수리중인 배에 도착했다. 이틀이 넘게 걸린 비행시간에 기내식만 먹었던 터라, 벌써 김치와 된장국이 그리웠다. 생각했던 것 보다 매우 큰 배였고, 먼저 와 있는 나이 지긋한 선장과 앞으로 함께 살아갈 1등 항해사와 2등 항해사에게 및 기관장과 기관사, 그리고 타수들과 각 부서 선원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쿡을 도와 주는 직책을 가진 선원(그를 우리는 ‘살롱보이’라고 불렀다)이 나의 캐빈(방)으로 짐을 옮겼 주었다. 전에 대학 실습선에서 지내던 좁은 침실에 비하면 호텔방 처럼 여겨 졌다. 고정된 책상과 침대 그리고 옷장과 소파 온.냉수가 바로 나오는 조그만 욕실.... 오랜만에 선내에서 요리가 국내에서 먹었던 된장국과 밥이 나와 반가왔고, 맛있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세면을 하고 잠시 침대에 누웠는데 나도 모르게 긴 여정에 지친 나는 곧바로 꿈나라로 또 다른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3등 항해사]
선내에서는 사관과 보통 선원으로 구별 되는데,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선장, 기관장, 1등항해사, 1등기관사, 통신국장, 2등 항해사와 2등기관사, 3등항해사와 3등기관사, 갑판장, 전기수, 헤드쿼터마스타(일명 ‘햇도’라고 불리우는 갑판부의 나이많은 노련한 선원) 2쿼터마스타(‘2타수’라고 불리는 직책), 3쿼타마스타(3타수) 1기관원과 2기관원, 그리고 실습갑판원과 실습기관원, 선내 요리장(칩쿡)과 견습요리사(살롱보이) 이렇게 보통 선원이 구성되어 있고 좁은 선내 공간에서 각자마다 할 일이 다 주어진다. 나는 3등항해사로 당직 시간이 오전 8시부터 12시 정오까지, 그리고 저녁 8시에서 12시 자정까지 항해 당직을 서게 되고, 특별히 선내의 의약품을 담당하고, 입항시 비중과 흘수선을 체크함으로써 출.입항시 흘수를 보는 일(배가 얼마나 바다 깊숙이 잠겼는지를 확인하는 것인데, 화물선에서는 얼마나 많은 양이 화물이 실렸는지 그 양을 계산하는 기준이 된다.
보통 바다 속으로 7~8미터 이상 잠기게 되는데, 모든 화물선의 선체 중앙과 선수 선미 양측에 숫자가 적혀있다. 이 양측의 숫자를 보는 것도 늘 파도가 치는 상황에서 부두 반대 쪽 흘수를 읽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선수는 양 옆을 엎드려 보면 되지만, 중앙과 선미는 제이콥스래더(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만 볼 수 있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통상 이 일로 인하여 가장먼저 부두에 접안하면 3등항해사가 가장먼저 육지에 내려가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이 흘수를 보고 1항사에게 보고하면 선박에 실린 화물의 양을 계산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입출항 수속을 밟고, 모든 부서가 바삐 선내에서 항해시와는 다른 입.출항 준비와 함께 또 다른 각자 맡은 일을 하게 된다.
늘 동경하던 유럽을 가게되어 기쁜 마음으로 부산에서 열차로 김포로 이동하고, 1년동안 살 짐을 가지고 기기에 커다란 가방을 꾸려 가는데, 선박선교사 사명이 하나 더 주어져 각종 전도지와 설교 및 찬양 테이프를 EH 하나 마련 해 주는 선원선교센터 최종원 목사님과 선교 훈련을 받던 부산 선원선교센터가 아련히 떠오른다.
대한항공으로 첫 승선지인 네덜란드 로텔담을 가는데, 먼저 사우디 제다와 스위스 쮜리히에서 내린 후 공항 밖은 온통 눈으로 덮인 스위스 공항에서 쵸코렛과 값비싼 오메가와 롤렉스 스위스제 시계를 구경하며, 그 비싼 가격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스위스에서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경비행기로 바꿔타고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을 때 제법 많이 흔들려 모두가 긴장하며 착륙을 기다렸고, 무사히 랜딩을 하자, 모두가 박수를 쳤고, 완전히 멈출 때 RK지 한사람도 일어나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이 우리 나라의 기내 풍경과 너무 대조적이어서 인상 깊었다. 암스테르담에서 내려 버스로 로텔담은 가야 했는데, 가는 도중 이틀 동안 비행기만 타고 간 여정으로 몹시 피곤 했지만, 풍차의 나라 네델란드(Netherlands)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을 달려 첫 승선을 해야 할 배에 도착 했는데, 선박검사를 앞두고 수리중에 있던 BELL CLIPPER호에 짐을 풀었다. 곧바로 출항하리라 여겼던 나의 꿈은 한참 후에야 이루어졌고, 수리가 끝나기 까지 도크 호텔에서 배로 출. 퇴근을 해야 했다. 선박 수리가 마침내 끝나고, 도크에서 나와 드디어 힘찬 엔진 소리를 들으며, 입출항시 3항사의 중요 임무인 선내 방송을 통해 “All Station Stand by! (각 부서 출항 준비!)를 선내 방송하고, 바로이어 텔레그라프(기관실에 배의 속도를 알려 주는 계기) 시험을 통해 기관부서와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1984년 3월 9일 Log Book에 이와 같은 모든 사항을 영어로 항해 일지를 작성하는 것도 항해사의 주된 임무다. 1항사는 선수 갑판으로, 2항사는 선미갑판으로 갑판원과 기관원은 각자 위치에서 출항 준비를 완료했다. 과연 첫 출항하여 가게 될 미지의 항구는 어디일까? 전문을 기다리며 로텔담 앞 바다의 Anchorage에 닻을 내리고, 화물을 기다린 지 벌써 두 주가 지나고 있었다. 처음 몇 일은 항해를 하지 않고 닻을 내린 채 제자리에서 파도에 따라 출렁거리는 배의 요동에 속이 매스꺼움을 느끼고 염려 했는데, 이삼일이 지나자 서서히 나의 몸은 서서히 적응을 했다.
벌써 고국에 남기고 온 친구가 그립고, 가족이 그리웠다. 22명으로 구성 된 모든 선원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해군 ROTC 훈련기간에 늘 부르곤 했던 군가도 불러 보았다.
“검푸른 파도 삼킬 듯 사나워도 나는 언제나 바다의 사나이! 흙 냄새 그리울 땐 항구 찾아 달래이고, 사랑이 그리울 땐 파도 속에 뛰어 든다. 사나이 한평생 세월로선 못 재는 것, 꿋꿋하게 살다가 사나이답게 죽으리라. 아~아~ 바다는 나의 고향, 나의 집은 배란다.”
휘파람을 부르며 콧노래도 흥얼거리며 또 하루가 지난다. 속히 대서양 바다위를 시원하게 달리고 싶다. 모든 선내 생활이 신기하기만 하다. 선내에는 사관 식당과 선원 식당이 구별되어 있고, 방 시설도 조금 차별화 되어 있었다. 나이 많으신 선원들도 많았는데, 3항사님! 하고 불러주는 것도 마냥 좋았다. 드디어 외항선 항해사가 된 것이다.
[첫 번째 기항지 Gdynia port, Poland]
목적 항이 정해지기 전 선내에 있던 문고를 뒤져 재미있을 법한 책을 몇 권 골라 방으로 가지고 올라와 벌써 3권을 읽었다. 그래도 따분함을 면할 수 있게 선내에는 장기, 바둑, 각종 책들이 있었고, 항해 할 때면 지루함을 달래며 카드나 화투 놀이도 한다고 했다. <휘파람을 불 때> 지금 읽고 있는 책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일본 작가가 2차 세계대전 중에 겪은 일들을 회상하며 겪은 이야기와 현대를 사는 자식과의 갈등을 그린 책이었다. 이에 앞서 읽은 책은 <The Brother's Wife>, <황홀한 관계>라는 책이었다. 이제 외국에서 살아 가려면 영어 회화도 잘 해야겠기에 늘 헤드폰을 끼고 영어 공부도 하곤 한다. 영상 2~6도 정도인 삼월의 이곳 홀랜드 날씨도 제법 쌀쌀하다.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 무렵 드디어 전문이 왔고, 첫 입항지는 공산국가인 폴랜드로 정해졌고, 비료를 싣고 남미 Colombia로 가게 되었다. 야호~
1984. 3. 14(화이트 데이라고 고국에선 사탕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지? 나는 점심을 조금 일찍 먹고 브릿지에 올라가 출항 준비로 바쁜 일정을 모내야 했다. 아무래도 처음 겪는 선상 생활이기에 모든 게 낯설었다. 이틀 반을 항해하여 독일 Kiel 운하를 지나 발트해를 항해하여 Poland Gdynia라는 항구를 향해 열심히 항해를 하는 중이다. 첫 기항지에 도착하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북위 55도 부근이니 우리나라보다는 한참 북쪽으로 올라온 셈이다. 고국에선 진달래가 피고 있을지 모를 3월 하순임에도 이곳 Poland는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이었다. 잠시 흘수(Draft)를 보기위해 육상에 내려 가려는데, 여권(Pass Port)-선원수첩을 보여주어야 했고, 경비정과 삼엄한 군인의 경계태세가 몹시 불편했고, 공산국가라는 책에서만 배웠던 자유가 없는 나라임을 몸소 체험 한 기분이다. 선내 경비를 서던 군인 친구가 내가 사용하던 모나미 볼펜을 주라고 애원했다. “굿. 프레즌트 포 유.” 하며 주었더니 “Thank you!”를 연발하며 다른 동료에게 들키기라도 할까봐 염려한 듯 가슴 깊숙이 집어 넣었다. 앞으로는 나의 언어도 한국말 보다는 영어를 더 많이 하게 되지 않을까?
1984. 3. 18 (주일) 혼자서 기도하며 주일을 맞이하다.
난생처음 처음으로 영문 타자기에 종이를 넣고 타이핑을 했다.
약품 의료 담당인 3등항해사가 첫 항해 중에 2타수가 편도선염을 심하게 앓아 음식도 못 삼키고 말도 잘 못할 정도였기에 입항 하자마자 현지 병원에 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M/V BELL CLIPPER
Issued No. 1
Date : 16th Mar. 1984
Port : Gdynia, Poland
Voy. No : 64
Request for medical treatment. (중략) Tonsillitis(편도선염)...
난생 처음 타자를 쳐서 영문으로 작성한 공문이었다
항해하는 동안 심한 편도선염으로 말을 할 수 없어 글로 의사 소통을 할 정도였던 1타수였다. 3등항해사인 나와 저녁이면 8시부터 자정까지 당직을 서던 1타수가 병원에 가보니 담당 의사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고열과 호흡 곤란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고 했다. 선내에선 겨우 할 수 있는 치료라는것이 진통제와 항생제를 처방하는 것이었고, 그것도 담당자인 내가 나름대로 약 박스에 영문으로 씌여진 대로 처방하여 먹게 할 수 있었던게 전부였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젠 속히 완쾌되길 기도했다.
다음날 아침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많은 눈으로 인해 하역작업도 멈추어야 했다. 눈이 그치자 햇치 커버의 눈을 치우고, 또다시 비료를 퍼 담기 시작했고, 첫 편지를 폴랜드에선 보낼 수 없어 독일 킬 운하를 지나는 동안 보냈다. 그리워도 보고파도 참아야 하고, 마음대로 편지마져 보낼 수 없는 춥고 음산한 이곳 Poland를 속히 떠나고 싶었다.
고국을 떠나올 때 병석에 누워 계시던 할머니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위로 누나가 두분이 계시고, 아들 손자를 보신 우리 할머니는 나를 나를 금이야 옥이야 하며 늘 등에 엎거나 안고 다니셨다고 했다. EH한 초등학교때는 학교에 늘 동행해 주셨기에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면 할머니 이야기를 빠짐없이 하곤 했다. 지금쯤 건강을 회복 하셨겠지? 연세가 87세 노환이기도 했겠지만, 워낙 정정하셨던 할머니셨기에 건강을 회복하셨으리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이국만리 폴랜드 땅에서 할머니의 건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으니, 지금쯤은 완쾌 되셨으리라 믿으며 또 하루가 지났다. 어찌나 추운지 속히 하역 작업을 마치고 따뜻한 남쪽나라 콜롬비아로 떠났으면 싶다. 남미 적도 부근에 위치한 Colombia는 이곳과는 반대로 너무 더워서 힘들것이지만....
추운 날씨에 흘수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수 양쪽, 선미 양쪽, 그리고 센타 중앙 흘수선 양쪽을 보고 화물양이 얼마나 실렸는지 계산을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보아야 했다. 항상 배가 움직임 속에 있고, 그나마 한쪽으로 많이 기울었을 때는 평균값을 내야하는데 특히 선미흘수선 읽기란 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읽어야 하기에 추운 겨울날씨엔 정말 힘든 일이었다. 화물칸 마다 적절한 이동을 하며 배의 균형을 잡아가며 화물을 싣는 일도 중요하고 어느 정도 하역인부들이 알아서 싣기는 하지만, 항해사의 지시에 따라 균형을 유지하며 벌크로 비료를 싣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며 항해사의 힘든 하루가 또 지났다.
[다음 기항지 Turbo, Colombia]
1984. 3. 23 하역할 Turbo항 까지는 5,554마일을 항해해야 한다. 우리 배 13kt 속력으로 18일이 소요될 예정이다.
또다시 독일 Kiel 운하를 통과하는 동안 Pilot와 독일어로 인사만 나누고 줄곳 영어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차범근 축구선수 이야기를 했더니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독일 돈이 없어 달러를 주며 편지를 붙여달라고 부탁 했더니, 자기가 돈 받지 않고 편지를 보내 주겠다고 했다. 운하를 지나며 계속 텔레그라프(기관실에 선속을 알리는 계기) 옆에 서서 오래 서 있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몹시 지친 하루였다. 내가 그토록 와 보고 싶었던 유럽인데, 첫 기항지 Poland의 추억은 춥고 암울한 곳이었고, Kiel 운하를 지나며 보는 주변 경치는 정말 그림속의 풍경이었다. 독일이란 나라는 역시 잘 사는 나라였다. 이제 이 운하를 지나면 신나게 북대서양을 밤낮없이 항해하며 카리브해를 지나 남미 Colombia Turbo Port에 도착하기까지 큰 폭풍우 만나지 않고 무사히 목적항에 도착할 수 있기를 기대 해 본다.
부산을 떠나 올 때는 선내 크리스챤이 모여 선상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설교 테이프와 성경 그리고 각종 전도 자료를 가방 하나 가득 가지고 나왔는데, 첫 승선인지라 선내 내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서 주일이며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만족 해야 했다.
6일만에 비료 Loading이 끝나고 폴란드를 떠나 발틱해를 항해했다. 발틱해는 스웨덴과 필란드, 구 소련 그리고 폴란드가 공유하는 바다로 덴마크와 독일 사이에 운하를 만들어 덴마크를 빙 돌아가지 않아도 되도록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운하를 만들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운하는 스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가 있다. 이곳 역시 한 번쯤 가 볼 기회가 주어 지겠지?
경도 15도 서쪽 그리고 위도 44도 북쪽, 스페인 앞 해상을 항행 중이다. 영국 도버 해협을 지나 대서양에 접어들었고, 어느새 고국을 떠나온지 한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긴 항해를 앞두고 방카오일을 공급받고 기름양을 계산하기 위해 또 흘수선을 보고 왔다.
렌턴을 메고 선미 흘수를 보는 것은 여전히 3항사의 최고 힘든 일이었다.
[다양한 색깔의 바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를 항해하다보면 어느새 고요한 바다가 기다리고, 황혼녁 태양에 물든 황금빛 바다가 너무 아름답다. 때로는 거울같은 바다를 연출하기도 하지만, 왠지 부담스럽다. 아무래도 바다는 약간의 백파가 이는 너울거리는 바다가 어울리기 때문이리라. 오늘도 적당한 롤링과 피칭을 하며 목적지 콜럼비아를 행해 달리고 또 달렸다. 바나나 밭에 뿌려질 벌크 비료를 가득 싣고 첫 항해를 하는 기분은 날아갈 것 만 같다. 미지의 항구를 찾아가는 마도로스의 낭만,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뻐금거리며 품어대는 담배 연기속에 고국의 생각과 함께 날려 보내고 싶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은지 오래 전 일이다.
[담배의 추억]
대학시절 ROTC 훈련을 받으며 군 생활을 동시에 체험하는 기간에 선배들로부터 기합을 받고나면 담배 한 가치 피워 물며 하루해를 보내던 시절 잠시 담배를 피웠던 추억을 가졌지만, 어머님이 신장염으로 1년의 반은 병원에서 지내시곤 했는데, 어머니 간호 중에 밖에서 담배 한 대 피우며 지낼 때가 있었다. 어머니 병실 바로 옆에는 암 투병중인 한 아주머니의 딸이 있었고, 그 병실의 꼬마 숙녀가 내가 밖에서 담배 피우고 있다고 일러 바쳤고, 우리 어머니는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아들로 알고 있었기에 “담배를 피운다면 우리 아들이 아닐거다”라고 했고, 그 꼬마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 나를 다시금 확인하고 들어가 확실히 당신의 아들이라고 우겼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부로 나는 어머니의 말씀따라 단호히 담배를 끊었고, 당시 외제 담배를 선호하던 시절 거북선과 태양(선) 심지어 풍년초를 말아 피우는 이도 있었던 시절에 말보로와 켄트와 같은 외제 담배는 최고의 인기였었다. 때로는 다시금 피워보고 싶은 욕망도 있었지만, 선박선교사의 사명감이 내재되어 있었기에 참아낼 수 있었다. 다만 고향이 정말 그리워 질 때면 담배 한 대 피우는 것도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병실에서 어머니와 약속한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켜냈다. 일종의 믿음의 승리였다.
때로는 Captain의 피워 문 파이프 담배의 잎담배 냄새가 너무 향기롭게 느껴지곤 했다. 선박과 선장이 나오는 그림에선 꼭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나오는 그림이 있어 왠지 어울려 보이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백해무익한 담배를 왜 피울까? 자기도 모르게 습관 속에 인이 박히고 결국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이 담배가 아니던가? 선내에 허세갑 선장님이 계셨다. 브릿지에만 올라 오면 담배를 입에 물고 사는데, 늘 뻐금뻐금 하며 하루에 3갑을 피운 다 하여 허세갑 선장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매일 밤 담배를 한보루씩 들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저녁 식사 후엔 담배를 걸고 카드게임을 하는 것이 선원들의 최고의 낙이었다. 어느날은 담배 두 보루를 땃다며 좋아했다가, 어느날은 오늘은 정말 안되는 날이라며 투덜 거리다 보면 목적지에 도달하곤 하는 것이 선원들의 일상 생활이곤 했다. 콜럼비아에서는 담배 가루를 빼 내고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하얀 가루를 조금 집어넣고 또다시 담배 가루를 채워서 피우는 걸 보기도 하고, 조그만 통 속에 먹는 담배를 넣어가지고 다니며 종종 어금니 사이에 끼워두는 모습도 본다. 베트남에서는 물 담배를 입에 물고 한모금 씩 빨아 댈 때마다 호루룩 소리가 들리는 모습도 기이 해 보이곤 했다. 그러고 보면 기호품인 담배도 가기각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담배에 대한 추억중엔 선장의 마도로스 파이프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는 향기로왔고, 왠지 폼 나는 것을 지울 수 없다.
[항해도중 잦은 엔진 고장의 추억]
한참을 항해 하다가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아 산사같은 느낌이 들때면 기분이 좋지 않다. 오히려 덜덜거리며 엔진 소리가 이젠 자장가로 들린다. 바다 한가운데서 엔진 수리를 하다보면 보통 2~3시간 이상 작업을 하곤 했는데, 기관부서는 바삐 움직이지만, 항해부서는 할 일이 없어진다. 하루는 가방에 넣어간 소형 낚시대를 소고기 덩어리를 미끼삼아 드리웠더니 커다란 방어 종류의 고기가 물려 비록 낚시대는 부러지고 말았지만, 내가 잡은 두 마리의 큰 물고기로 전 선원들이 회를 먹는 행운을 얻었다. 한동안 시간이 흘러 시커먼 연기가 나오더니 이내 없어지고, 정상적인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기관실에서 브릿지로 역으로 엔진 텔레그라프를 울렸고, Full Speed로 항해를 시작했다. 엔진이 Stop 되면 문제인데. 특히 파도가 있는 날엔 매우 위험한 일이다. 배가 저절로 파도 옆 방향으로 돌게 되고, 결국 옆에서 심한 파도를 만나면 뒤집힐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순풍에 돛달듯 항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때로는 역풍에 거센 파도를 헤치고 목적지를 향해 달릴때 항해사로서는 일하는 맛이 난다.
[힘들때면 큰 힘이 되는 편지]
한달, 두달 시간이 흐르고 고향 생각이 날 때면 이국만리에서 받아 본 편지가 큰 힘이 되었다. 첫 출국을 하기 전 집안의 장손이라며 끔찍이 사랑을 아끼지 않으시던 할머니께서 넘어지셔서 발목이 부어 조금 불편해 하시는 것을 알고 출국을 했었다. 난 편지를 보낼 때면 할머님 발목은 좋아지셨는지를 물어보곤 했는데, 집에서 온 서신에는 할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귀국 후에야 안 사실이지만, 출국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할머님이 돌아가셨고, 외국 멀리 나가있는 나에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좋을 리 없다는 생각에 가족 누구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서는 나의 편지에 할머님 염려하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온 가족이 울음바다가 되었었다고 한다. 정말 귀국해서 이 사실을 알고 할머니 사진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 그리운 나의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초등학교 시절 먼 길을 다녀야 했기에 늘 업어 주시기도 하고, 등.하교 길을 함께 동행 해 다니셨던 할머니로 유명하신분이다. 그래서 40년이 지난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제주에 살다가 보니 30여년 만에 부친을 모시고 지내기 위해 광주로 이사하여 1년을 사는 동안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나가게 되었는데, 너무나 오랬만에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니 이름만 생각나는 친구도 있고, 어릴적 모습이 기억 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도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가, “아~ 할머니랑 늘 함께 다니던 친구...그래. 생각난다.”라고 했었다. 나 자신이 존재감보다는 할머니를 함께 이야기 하면 모른 친구가 없을 정도다. 큰 누나의 경우 6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10리 길을 왕복하며 당시 장성군 삼계면 사창초등학교를 함께 다니셔서 장성 군수님으로부터 큰 누나 졸업식 때 할머니도 큰 상을 받으셨던 당대 유명한 분이셨다.
[세계 각국 항구의 추억]
미지의 항구를 찾아 가노라면 늘 기대와 땅을 밟고 여행 할 수 있다는 설레임으로 가득하곤 했다. 늘 하역을 마칠 무렵이면 다음 항구가 지정 되곤 하는데, 없을 때는 엥커리지에서 닻을 놓고 2~3일 Waiting(대기) 하기도 한다.전혀 낯선 항구명이 경.위도가 표기되어 통신장(국장)으로부터 전신을 받게되고 2항사인 나는 현재 항구에서 다음 항구까지 거리는 얼마이며, 몇일 걸릴것인지 항해 일수를 가장 먼저 계산하여 선장에게 알리고, 그 항해 기간에 맞추어 물과 식량, 그리고 항해할 수 있는 량의 기름 벙커유를 유류탱크에 가득 싣고 다음 항차를 준비하곤 한다. 대부분 큰 항구들로 지정되곤 하지만, 때로는 큰 지도를 보아야만 나올 이름이 정도의 조그마한 항구를 지정 받기도 한다. 이렇게 다닌 항구 항구마다의 추억을 적다보면 한이 없을 듯 하다. 소속 국가만 해도 북아메리카만 해도 동에서 서까지 수많은 항구들이 있으니, 지금도 기억나는 벤쿠버,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멕시코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파나마를 통과 해 북 대서양으로 접어들어 뉴올리언즈, 탬파, 마이애미, 잭슨빌, 리치먼드, 윌밍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등 그리고 너무너무 맑은 바닷물로 수심 2~30미터가 훤히 비추이는 쿠바 밑에 있는 바하마 제도의 섬들, 아이티, 산토도밍고, 도미니카공화국,세인트크리스토퍼네비스, 도미나카, 그레나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자메이카, 남아메리카로 내려가면 에콰도르, 콜럼비아 페루와 칠레,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정말 많은 추억의 항구들이다.
또한 유럽은 얼마나 아름다운 항구가 많았던가?
당시엔 동독과 서독이 분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함부르크는 정말 큰 항구였고,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로텔담, 벨기에 안티워프, 그리고 서독 킬 운하를 통과하여 스웨덴 과 핀란드, 폴란드와 헝가리,노르웨이와 스웨덴, 늘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 앞이 안보이던 도버해협을 건너다니던 그시절...영국과 아일랜드의 흑맥주의 추억도 잊지 못할 듯 하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돌아 지즈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지중해로 들어오면, 이탈리아의 제네바, 나폴리, 프랑스, 그리스, 터키의 이스탄불이 주된 해상 운송이 이루어지는 항구였고,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남하하여 스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홍해를 거쳐 아라비아해에 접어들면 오만과 사우다아라비아,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가 당시 전쟁을 하고 참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생명수당을 받아가며 호르무즈 해협을내내 기다렸다가, 콤보이를 이루어 줄지어 다녀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갑자기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비행하며 선명을 읽고, 무슨 화물을 실었으며, 기항지가 어디냐고 묻던 무시무시한 포탄이 배에 구멍을 내고 마냥 유령선이 되어 정박한 비를 지나 다녀와야 했던 그곳. 때로는 아프리카를 빙 둘러서 희망봉을 돌기도 했는데, 그 과정 속에 들렸던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 알제리, 리비아, 이집트, 에테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모잠비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반항구는 두 번이나 입항을 했었고, 사파리 구경도 멋진 추억으로으로 남았지만, 과거에 홍수환 선수가 7전8기로 다운을 당하면서까지 일어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하며 어머니와 통화하여 유명해 진 더반 항구, 그리고 방콕에서 알량미를 싣고 긴 항해 끝에 콩고와 자이레에서 굼주리던 그곳 주민들에게 수만톤의 쌀을 실어 다 주었던 곳이 생각난다. 아~ 검은 대륙 아프리카여....
그리고 아시아 쪽으로 오면, 싱가포르, 홍콩, 방콕, 중국, 일본, 한국 울산까지 직접 항해하여 고국을 다녀갔으니, 5년동안 짧은 기간 부정기선을 승선했기에 가능했지만, 세계 일주를 두루 다 했으니 지금와서 생각하니 참으로 행운아였다. 뉴질랜드에서 우유를 싣고 가장 긴 37일을 항해했던 기억이 난다. 세계적인 미항 호주 시드니를 항해사 시절 당시에 가보지 못해 섭섭했는데, 훗날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보험회사의 특혜를 받아 컨벤션으로 멋진 여행을 했었다. 그리고 큰 운하가운데 가보지 못했던 고린토 운하는 성지순례하며 직접 가볼 수 있었다. 이리하여 3대 미항인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이태리 나폴리, 호주 시드니와 모래 사막을 바라보며 해도에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이상한 문자로 표기하여 선위 구하는데 구별이 어려웠던 스에즈운하, 2단, 3단을 산정의 거대한 호수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가로막아 배를 부상시키는 방식으로 산을 넘어가는 파나마 운하의 멋진 경관, 서구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독일 킬 운하 주변의 그림 같은 집들은 직접 파일럿을 태우고 통과하거나, 단독 항해를 하기도 하며 통과했던 고생스러운 운하를 지나는 추억도 있었지만, 세계적인 운하 중 가보지 못했던 고린토 운하는 하선 후 한참 뒤에 멋진 성지순례를 통해 관광버스로 다리를 건너며 설명을 들었고, 때마침 그 운하가 시작되는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 시간이 있어 일행 중 나혼자서 100여미터를 달려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다리위에서 운하를 내려다보며 통과하는 배를 카메라에 담았으니, 항해사였던 나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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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어지는 나의 인생 항해일지를 적어 가 보자~
언젠가는 책으로 발간할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