寶物 箱子의 운명
조 흥 제
서울 도서관에서 김동인의 수필 ‘수정비둘기’를 읽었다.
돈 많은 젊은이가 폐병 4기에 걸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알고는 여행을 떠났다. 어느 촌가에서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은 소녀가 예뻐서 다가갔다. 나이는 열두 살, 이름은 ‘영애’라고 했다. 그 애의 눈이 수정같이 맑아서 마음이 끌려 가지고 있던 수정비둘기를 주었다. 젊은이는 몇 년 후 어느 해안 가 여관에서 죽으면서 유서에 ◯◯ 마을에 당시 열 두 살 먹었던 영애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를 찾아 내 전 재산과 수정비둘기를 바꾸어 무덤에 넣어 달라고 하였다. 저자가 평양 모란봉에서 잠깐 졸면서 꾼 꿈이라고 했다. 소설가는 꿈도 소설 같이 꾸는가 보다.
우리 집에도 수정(水晶) 도장이 있다. 그대로 있는지 궁금하여 집에 와서 넣어 두었던 나무 상자를 열어보니 속에 있어서 반가웠다. 아버님께선 젊어서 목공 일을 하시고 도장도 새기셨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 하시고 밤에는 집에서 목도장을 새기셨다. 이 수정 도장도 그때 구하신 것 같다. 수정도장은 도장집에 들어 있는데 겉은 나무로 둥글게 깎고 가는 쇠로 둘렀으며 도톨한 손잡이가 있어서 비틀면 양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 도장집 안은 위에 천을 입히고, 밑에는 딱딱한 종이로 되어 도장과 인주 곽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수정도장은 투명한 정사각형 4㎝ 정도의 크기로 글자는 ‘◯祖善山’이라고 새겨져 있다. 보통의 정성을 들인 것이 아니다. 무슨 사연이 들어 있는 것 같다.
6 ․ 25 사변 전 지금은 남방한계선이 된 장단 역에서 살았던 우리는 그 날 10시 경 피란 나왔다. 아버지는 경황 중에도 중요한 것들은 가지고 나오셨다. 피란지에서 나무상자를 만들어 그것들을 넣으셨다. 집문서도 가지고 나오셨다. 지금으로 말하면 등기권리증이다. 얇은 종이(미롱괘지) 두 장 가운데 묵지(墨紙)를 넣고 써서 집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한 부씩 가졌던 부피가 작은 문서였다. 아버님 돌아 가신 후 편지, 쓸모 없는 문서들을 많이 버렸는데 집 문서도 그때 딸려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어떻게 하나.. 지금 생각하니 갖가지 사연이 들어 있는 백 여 통이나 되는 편지들을 버린 것도 아깝다.
그 상자에는 우리 4대(代)가 사용했던 물품들이 들어 있다. 증조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아버지, 내가 쓰던 것들이다. 증조부의 유품은 신분증이다. 손가락만한 사각 진 나무에 이름과 낳은 해, 관아(官衙)에서 불에 달군 인두로 찍어 준 화인(火印)이 있다. 구멍이 뚫려 있어서 끈을 매 허리에 차고 다니게 만들었다. 그걸 호패(號牌)라고 불렀는데 16세가 되면 발급 해 주었다. 호패 제도는 조선왕조 태종(太宗) 때 시작하여 고종(高宗) 때까지 통용되었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재료가 달랐다. 상아(象牙)는 3품 이상, 각패(角牌)는 3품 이하, 그 외에는 나무였는데 황양목패, 대방목패 두 종류가 있었다.
밑이 뚫어진 화투 짝 만 한 벼루, 각종 붓, 할아버지 안경, 골패, 부시, 도장 새기던 칼 등이 있다. 할아버님 안경은 뿔로 된 테이고 안경 알은 석영으로 독일제라고 하셨다. 어렸을 때 눈에 대고 보면 돗수가 높아 땅이 움푹움푹 들어갔었는데 지금은 평평한 것을 보니 내 눈도 그때 할아버지만큼 나빠졌다. 안경은 두꺼운 종이로 만든 안경집에 넣고 위쪽 구멍에 끈이 있어 허리에 매달고 다녔으니 얼마나 불편했을까.
부시도 있다. 부시는 불을 일굴 때 사용하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성냥과 같은 것이다. 솜 같이 곱게 다져진 쑥을 차돌 위에 놓고 쇠로 차돌을 때리면 불꽃이 일면서 쑥에 옮겨 붙었다. 할아버지들이 긴 담뱃대에 부시로 불을 일구어 담배에 붙여 태우던 것을 나도 보았다.
벼루는 할아버님이 사용하셨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한문학자이셔서 눈만 뜨면 사랑에 책상다리하고 앉아서 책을 죽 펴 놓고 붓글씨를 쓰셨다. 그때는 연필이나 볼펜이 없어 글씨를 쓰는 도구는 붓 밖에 없었다. 붓글씨가 볼펜 글씨보다 훨씬 더 가늘었다. 붓의 재료는 노루 털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고,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은 황모(黃毛)라고 하여 고급이었다. 제일 좋은 것은 쥐 수염으로 만든 것이라는 아버님 말씀이었다. 좋은 붓은 글씨를 쓰고 종이에서 떼면 저절로 일어서는 것이라고 했다. 벼루는 먹물이 스며들지 않아야 상품이다. 조그만 벼루는 외출할 때 가지고 다니셨던 것 같다. 그 벼루 밑이 뚫렸으니 얼마나 오래 쓰셨으면 그렇게 되었을까. 서양에는 붓이 없다. 그들은 닭털 깃에 잉크를 묻혀서 글씨를 썼기 때문이다.
펜촉도 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쓰던 것이다. 얇은 철판을 구부려 뾰족하게 하여 긴 막대에 꽂아 병에 담긴 잉크를 찍어서 글씨를 썼던 필기도구다. 학교에 가려면 조그만 병에 잉크를 담아 가방에 넣고 가면 스며 나와 책에 묻기도 했다. 라이터도 있다. 아버님은 담배를 안 태우셨으니 내가 사용하던 것이었던가 보다. 직사각형의 양은으로 만든 것이다. 뚜껑을 열고 엄지손가락으로 회전 축을 밑으로 내려 보았다. 그렇게 해서 불을 붙였었다. 속에 휘발유를 머금은 솜과 라이타 돌을 연결해 주어야 불이 일어났다. 성냥은 젖으면 안 켜지지만 라이터는 어디서든 켜져서 담배를 피는 사람에겐 필수품이었다. 납으로 만든 활자도 있다. 신문제작이 활자에서 컴퓨터로 넘어 갈 때 구하여 기념으로 보관했던가 보다.
골패(骨牌)는 왜정 때 할아버님이 만드셨다. 소뼈에 기름을 빼고 손가락 한 마디 쯤 되게 직사각형으로 잘라 음각 구멍을 큰 것, 작은 것 여러 개 파고, 반대 쪽엔 검은 유성기 판을 잘라 붙인 32쪽이 한 벌이었다. 골패는 마작과 같이 놀음용으로도 쓰고 점도 보았다고 한다. 나는 어렸을 때 골패 짝 간격을 떼어 세워 놓고 하나를 쓰러뜨리면 서른 두 개가 차례로 쓰러지는 것이 재미있어서 많이 가지고 놀았다. 골패는 헝겊으로 만든 주름진 주머니에 담겨 있다. 주역(周易)에 나오는 그림을 새긴 손바닥 만 한 나무도 많이 있다. 할아버지의 전공이 주역에 나오는 그림(河圖)이어서 그렇게 만드셨나 보다. 그 외 실패에 감긴 실과 바늘, 여러 가지 붓, 도장 새기던 칼, 조그만 칼 등이 있다. 할아버지는 오밀조밀한 것 만들기를 좋아하셨다. 그것들을 담은 상자는 길이 30㎝, 폭 20㎝, 높이 10㎝ 정도의 조그만 크기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많이 버렸지만 할아버지 책과 그 상자는 보관했다. 아들들에게 보여 주려고 해도 귀찮다는 듯이 ‘나중에, 나중에’만 웨치고 손을 저어서 아직까지 보여 주지 못했다.
이제 내 나이도 80이 넘었으니 언제 이승을 떠날는지 모른다. 아들들이 손사래 치고 싫다면 손자들에게라도 보여 주고 싶었다. 오늘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그 상자를 들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큰 아들네 집으로 갔다. 손자-손녀를 앞에 앉히고 하나하나 설명 해 주었더니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수정도장 곽은 특이하여 KBS 진품명품(골동품 감정) 프로에 나가면 몇 천 만 원 받을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눈이 동그래진다.
그 상자에는 우리 가정 4대가 170년 가까이 사용해 온 손때 묻은 애용품이 들어 있다. 볼 품 없는 물건들이지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상자(寶物箱子)’로 보고 싶다. 여기에 담긴 것을 버리지 말라고 일렀다. 큰 아들이 아직 40대여서 조상들 유품의 중요성을 모른다. 내가 젊었을 때 집문서를 소홀하게 다루다 잃어버렸듯이 아이들도 ‘그까짓 것’ 하면서 아무렇게 굴리다 망가뜨리고는 먼 훗날 후회하지나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