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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칸에 있던 하나님의 보좌
계 4:2-3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2-3절은 에스겔 1:26-28의 인유이다. 이제 일곱 교회에 관한 땅의 장면이 끝나고 하늘의 장면이 열렸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부름을 받은 요한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주님께서 먼저 들어가시고 열어 놓으신 성소의 문을 통해 그 안에 들어갔다. 하늘 성소 첫째 칸의 내부가 그의 눈앞에 공개되자 요한은 그만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하늘 성소의 경이로움과 웅장함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요한의 눈앞에 제일 먼저 펼쳐진 것은 황홀한 보좌였다. 보좌를 베풀었고 라는 말은 보좌가 새로 설치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보좌가 놓여 있었다는 뜻이다. 다니엘 7장에 “왕좌가 놓이고” 라는 구절은 특별한 사건을 묘사하기 때문에 4:2과는 다른 경우이다. 요한은 가이사의 보좌로부터 박해를 받아 고통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보좌에 대단한 흥미를 갖고 생생하게 표현했다.
(1) 요한이 목격하고 보라! 라고 놀랍게 환호한 경이로운 이 보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앉을 “영원한 보좌”(시 45:6)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시 93:2)고 읊었다.
(2) 4장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보좌이다. 보좌는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중심이다. “보좌 위에”(2절), “보좌 앞에”(5절),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5절)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6절) 등의 표현들이 보좌가 4장의 중심 주제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3) 계시록에서 보좌는 때때로 하나님 자신을 말한다. 왜냐하면 보좌에서 나는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가리키기 때문이요(16:17), “보좌 앞에”는 하나님 앞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7:9; 14:3). 유대인의 문학에서 그랬듯이 요한도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요한이 보좌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하나님을 우회적으로 나타냈다.
(4) 보좌는 하나님의 권세 있는 왕권, 권위의 통치권, 그리고 엄위하신 심판권을 상징한다. 실지로 보좌는 최후 심판의 장소이다(20:11-15). 다윗은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시 9:7),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 103:19)고 읊었다.
(5) 네 생물, 이십사 장로들,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찬양 경배를 드리는 곳이 바로 그곳이고 구속받을 자들이 찬양 경배를 드릴 곳도 보좌 앞이다(7:9-12).
(6) 하늘 성소에 있는 보좌가 종종 하늘 자체를 보좌로 삼으신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사야는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사 66:1)라 했고, 예수님께서도 하늘로 맹세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마 5:34),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 23:22)고 했다.
(7) 에스겔은 매우 역동적인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그 생동감에 압도당했다(겔 1장). 다니엘도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으며(단 7:9) 이사야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고 깊이 회개했다(사 6:1-5).
요한계시록 4장에 마땅히 하늘 성소 둘째 칸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보좌가 어찌하여 첫째 칸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는가? 이 질문의 배경은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한다(삼상 4:4)는 걸 전제로 한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는 세 가지이다. 첫째,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던 휘장이 열려져 있어 전체가 하나로 된 속죄일과 같은 경우였기 때문이다(Stefanovic). 둘째, 성소의 진설병상이 보좌의 원형이다(Maxwell). 셋째, 요한의 눈앞에 전개된 존엄한 하나님의 보좌는 정적(靜的) 보좌가 아니라 동적(動的) 보좌여서 하나님의 의향에 따라 하늘 성소 첫째 칸에도 갈 수 있고 둘째 칸에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계시록 4장에서 볼 당시는 보좌가 하늘 성소 첫째 칸에 있을 때였다. 세 가지 견해 중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을 지닌다. 맥스웰은 두 번째를 주장하면서 동적 보좌에 대해서 동의한다. 그는 진설병상 외에도 언약궤가 역시 보좌를 대표하는 걸로 간주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이는 보좌라서 그분의 의향에 따라 어디든지 왕래할 수 있음을 밝힌다. 하나님께서 움직일 때 보좌도 함께 행하는데(겔 1:19-21), 하나님은 성소의 회막문(출 29:42; 33:9), 성전 문지방(겔 9:3), 회막과 성막(출 40:34-35), 장막(신 31:14-15)에 나타나셨다. 그분의 임재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여 아무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그분은 회막안 증거궤 앞(출 30:36 민 17:4)에서 직접 만나시고 속죄소(출 30:6),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 나타나 말씀하셨다(출 25:22). 솔로몬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가득하여 제사장이 능히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있는 것을 보고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 하도다 하니라”(대하 7:1-3). 하늘 성소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의 광휘(光輝)로 가득 차서 성전(지성소)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을 때가 있을 것이다(15:8). 하늘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지상 성소의 지성소에 있는 법궤가 상징하듯 대부분 하늘 지성소에 있다. 그러나 그분의 임재 곧 그분의 보좌는 하늘 성소 첫째 칸에도 있음을 종종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4, 5장의 경우이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보좌로 보았던 19세기의 유명한 성경 주석가인 스미스(Uriah Smith)의 견해는 옳았다. 그래서 그는 5절에서 요한이 본 것을 하늘 성소 첫째 칸을 본 것으로 적용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보좌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 땅에 내려올 것이며(6:16), 새 예루살렘에도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사람들 가운데 거할 것이다(22:1-5). 이것은 구약에 주신 언약의 성취이다.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7). 이 땅에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에스겔의 장엄한 묘사를 살펴보면 그 보좌가 틀림없이 생명력이 넘치는 동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 빨리 움직인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6절). 네 생물(그룹들) 머리 위에 궁창이 있고 그 궁창위에 보좌의 형상 곧 하나님이 좌정하셨다(겔 1:26-28; 10:1). 아버지의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겔 1:27)서 마치 무지개 모양을 이룬다. 그 궁창이 바로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6절)이며, 그분의 발아래에 있는 청옥을 편 듯한 청명한 하늘(출 24:10)이다. 궁창이 창세기 1:6-8에서 물을 지지하고 있듯이 보좌를 떠받드는 받침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룹들이 보좌에 직속되어 그 궁창(firmament)을 떠받들고 있는 셈이다(겔 1:22-26). “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렸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렸더라”(겔 1:23). 각 생물 곁에 모양이 황옥 같은 바퀴가 하나씩 있으며 바퀴 속에 또 다른 바퀴가 있어 그룹과 함께 빨리 움직인다(겔 10:9-11, 16). 바퀴가 직각으로 교차하는 모양으로 되어 있어 어느 방향으로도 전환을 할 수 있는 구조이다(겔 1:17). 생물은 날개 밑에 사람의 손 형상도 가지고 있는데(겔 10:21), 그것은 그분의 손이시다. 사자, 송아지, 사람의 얼굴, 그리고 독수리 같은 이 생물은(7절) 사실 그룹들 곧 네 천사이다(겔 10:15, 20). 그 “생물들의 모양은 타는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는 번개가 나며 그 생물들은 번개 모양 같이 왕래 하더라”(겔 1:13-14). 보좌를 이동시키는 보좌 수레(throne-chariot)에 대해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다니신다고 읊었다(시 18:10). 그런데 이 보좌가 번개같이 빠르게 움직일 때에 요란하고 그 섬광(閃光)으로 휘황찬란하다. 요한은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5절)라 하였다. 마치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 것 같다. 이는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겔 1:4)이고 그 불의 광채 속에서 번개가 나오기 때문이다(겔 1:13). 다니엘은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단 7: 9-10)라 했다. 이 동적인 보좌는 성령의 조종을 받아 움직인다(겔 1:20, 21). 성령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한다”(겔 1:12).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도 이르고(겔 9:3; 10:4),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문다(겔 10:18). 그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겔 10:19)인다. 이처럼 보좌가 그룹천사와 직결되어 그룹병거를 타고 옹위(擁衛)를 받으며 움직이므로 생동감이 넘친다. 이 보좌병거는 하나님이 가고자 하면 어디든지 자유자재로 간다. 하늘 성소 첫째 칸에도 갈 수 있고 둘째 칸에도 갈 수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지리적으로 한 곳에 제한되지 않는다. 하늘 존재들은 정체(停滯)되지 앉고 모두 고동(鼓動)한다. “보좌는 하나님의 임재를 고정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거기 보좌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왜 황홀한 보좌를 요한에게 제일 먼저 보이셨는가?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세상을 통제하는 자는 로마의 가이사가 아니라 하늘 옥좌(玉座)에 앉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보좌에 동석하여 보좌를 공유하시므로 공동통치하시는 장면을 보여줄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장차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좌에 동석하여 심판에 참여할 권세를 가질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제자들에게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고 약속하셨다. 누가복음 22:29-30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고 하셨다.
24장로들
계 4:4 “또 보좌에 둘러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요한은 경이롭고 영화로운 성소 내부의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신없이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요한이 그다음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다른 이십사 보좌들을 목격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십사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계셨다(사 24:23).
요한의 시선의 초점이 이십사 보좌들 위에 배석(陪席)해 있는 이십사 장로들에게 맞추어졌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자기들 보좌 위에 앉아 있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은 건 그들의 역할을 시사한다. 왕과 제사장의 이중 역할을 의미한다(5:8-10). 스가랴 6:13은 보좌가 두 개의 직분 즉 왕권과 제사장 직이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두캉은 심판의 역할을 하는 걸 나타낸다고 했다. 구약당시 제사장은 심판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은 제사장이자 심판관이었다. 성경은 그들이 하늘 성소에서 찬양대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돌린다(4:10, 11; 5:8-10, 14; 11:16-18; 19:4).
이십사 장로들은 누구일까? 요한계시록에는 이십사 장로들이 모두 열두 번이나 언급돼 있다(4:4, 10; 5:5, 6, 8, 11, 14; 7:11, 13; 11:16; 14:3; 19:4). 12는 하나님의 숫자이다. 열둘의 두 배인 이십사는 물론 상징적 수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을 가진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 열두 사도의 이름을 가진 열두 기초석, 열둘의 12,000배인 144,000 등과 관계있다. 이십사는 24개의 제사장 반열(대상 24:4-19)을 상기시킨다. 노래하는 자들도 24개의 반열에 속했다(대상 25:1-31). 각 반열은 다스리는 자가 통솔하였다(대상 24:5). 미쉬나에서는 그 다스리는 자를 장로라고 부른다. 이십사 장로들의 신원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전승기념물로 데려가 아버지께 드린 부활한 성도들이다. 둘째, 전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각 지파에서 두 장로들씩 곧 하나는 십자가 이전의 문자적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다른 한 장로는 십자가 이후의 영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셋째, 1절에 말한 요한이 하늘에 이끌려 올라갈 때에 함께 휴거당한 자들이다. 넷째, 그들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으며 성도들의 기도에 봉사하고 있는 것을 보아(5:8) 일단의 천사들이다. 다섯째,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거민들의 대표자들이다. 여섯째, 구약의 12족장과 신약의 12사도들이다. 비록 넷째 견해가 신학계에 가장 널리 받아들이는 입장이라 할지라도, 필자에게는 첫째 견해를 지지하는 재림교회의 입장이 옳아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이나 초기 유대주의 문헌 어디에서도 천사들을 장로로 불린 예가 결코 없으며 게다가 천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지 보좌에 앉은 것으로 묘사된 곳은 아무데도 없다. 둘째, 이십사 장로들은 승리의 황금 면류관을 쓰고 있다. 천사들은 화관이나 왕관을 쓰지 않는다. 면류관은 구속받은 자와 그리스도가 쓰시는 것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2:10; 3:11; 12:1; 14:14). 이십사 장로들이 쓴 금관의 헬라어 스테파노스(στεφάνος crown)는 화관(花冠)이나 화환을 뜻하며 승리자에게 수여되는 면류관이다(2:10; 3:11 딤후 4:8). 셋째, 특별히 흰 옷을 입고 승리의 면류관을 쓴 것은 그들의 정체가 천사들이나 다른 세계의 거류민과 무관하며 오히려 그들이 땅에서 승리하여 영화롭게 된 구속받은 자들임을 가리키는 주요한 증거들이다. 천사들도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 경우가 있지만(19:14), 흰옷은 계시록에서 대부분 성도들이 입는 옷이기 때문이다(3:4, 5, 18; 6:11; 7:9, 13, 14).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이십사 장로들은 영화롭게 된 인간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언제 부활하여 승천하였는가? 4장의 시점(時點)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을 떼는 일을 하기 바로 전이다. 그러므로 이십사 장로들은 요한의 시대에 이미 하늘에 있어야 한다. 그들이 이미 부활한 무리라면 그리스도의 부활 때에 무덤에서 일어난 자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된 부활이 예수님 재림 때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살전 4:1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마 27:52-53)났다. 그들이 무덤에 머물다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후 무덤에서 나와 성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여 부활의 진리가 불멸이 되게 하였다. 40여일 후에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하늘 도성에 데리고 갔다(엡 4:8). 바로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한 자들이 이십사 장로들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실 때에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히 1:9)고 했다. 이 동류들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승천한 이십사 장로들이다. 엘렌 G. 화잇은 “그들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 당시까지 각 시대에 선택된 거룩한 의인들이었다... 부활한 사람들은 키와 모습이 각각 달랐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그 용모가 더욱 고상하게 보였다. 천사는 나에게 이 지구상의 거민들이 점점 퇴화되어 그들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상실해 왔다고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창세 이래로 잠자고 있던 사람들 중에 부활의 첫 열매로 하늘 아버지에게 드려진 요제의 첫 단이 되었다(레 23:9-14). 죽음과 무덤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전승 기념물이요, 또한 그리스도를 믿고 승리한 자는 분명히 부활하여 보좌에 함께 앉게 될 것을 확증하는 약속의 표로 그들은 온 우주 앞에 제시된 증거물이었다(요 6:39-40 11:25). 그러므로 이십사 장로들은 지구 역사를 통해 구속받을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상징적 그룹인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 즉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의 역할을 하는 역사를 통해 존재했던 모든 신자를 대표한다.
하늘 성소에서 24장로들의 위치는 어디인가? 4장의 구성을 보면 2-3절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4절은 보좌에 둘러 있는 이십사 장로, 5절은 보좌 앞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 6-9절은 보좌 주위와 가운데 있는 네 생물, 그리고 10-11절은 이십사 장로들이 드리는 찬양경배이다. 4-11절은 교차대구적인 형식(A-B-B'-A')을 띠고 있다. 그리고 중앙에 보좌를 중심으로 원형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 하나님, 보좌와 직결되어 떠받들고 있는 네 생물, 보좌 앞에 성령 하나님, 아들 하나님, 이십사 장로, 천만천사들의 순서이다. 이로 보아 이십사 장로를 언급한 4절을 9절 이후에 두는 게 옳아 보이지만 요한은 아버지 하나님 다음에 이십사 장로들을 제일 먼저 묘사했다. 왜 이십사 보좌들을 제일 먼저 보여 주었는가? 독자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기는 자가 될 경우 이십사 장로들처럼 흰 옷을 입고 승리의 관을 쓰고 보좌에 앉게 될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함이다. 왕과 제사장의 직분으로 보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할 성도들의 미래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드디어 7:9, 15에 성취되는 걸 본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구속받은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찬양 경배를 돌리며 거기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특별히 삼림 때에 있을 아들 하나님의 대관식에는 순교자들이 제일 앞에 있을 것이다. 충성스러운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죄와 사망을 이기는 자들이 될 때에 틀림없이 그 보좌에 앉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십사 장로들이 둘러싼 가운데 있는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것은 이사야가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사 24:23)고 한 예언의 궁극적 성취임에 틀림없다.
이십사 장로의 정체성이 부활 승천한 자란 견해는 해석하기 곤란한 몇 가지 성경절에 부닥친다. 5:9-10과 7:13-14 및 14:3이다. 그러나 해결이 전혀 불가능한 게 아니다. 첫째, 5:9-10은 네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이 부른 노래인데 개역개정판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고 노래하였다. 이 성경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을 “사람들”, “그들로”, “그들이” 라고 삼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십사 장로들의 신원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이 아닌 천사나 다른 무리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와 같은 문제 제기는 하나의 논리적 비약에 지나지 않는다. 네 생물은 구속받은 자들을 얼마든지 삼인칭으로 언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십사 장로들도 수많은 구속받은 자들 속에 소수(少數)의 자신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이라고 호칭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문제가 있다할지라도 5:9-10의 영어 흠정역을 참조해 보면 이 문제가 해결된다. 거기에는 개역 개정판에 있는 삼인칭대신에 “우리들”로 번역되어 있다. 즉 “우리들을 당신의 피로 구속하시고 우리로 제사장을 삼으셨다”고 되어 있다. 만일 흠정역이 옳은 번역이라면 이십사 장로들의 정체는 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 받은 인간인 게 틀림없게 된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흠정역은 참고만 할 뿐이지 결정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5:8-9 문맥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오직 이십사 장로들만이 아니라 네 생물도 포함 되어 있어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들을 피로 사서” 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7:13-14에서 요한이 이십사 장로들 중의 하나에게 “내 주여” 라는 호칭을 쓴 것으로 보아 그들이 부활승천한 자들로 보기에 곤란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십사 장로들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내 주여” 라고 호칭한 것이다. 이십사 장로들이 입은 흰 옷과 머리에 쓴 금관은 그들이 이 땅에서 이긴 자임을 가리키는 게 틀림없다. 요한은 승리한 그들을 존중하여 “내 주여”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장로 중 하나에게 그렇게 불렀다(7:13-14). 셋째, 14:3에 구속받은 144,000인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부른 새 노래는 “땅에서 속량함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말함으로 이십사 장로를 구속받은 자들의 그룹에서 제외시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맥 자체에는 이십사 장로가 땅에서 속량함 받은 무리에서 제외된다는 확실한 언급이 없다. 이십사 장로들도 새 노래를 부른다(5:9-10). 이십사 장로는 십사만 사천 인의 대표자로서 미리 그곳에 와 있는 것이다. 왜 하필 이십사 장로인가? 그것은 지상성소 봉사에도 대제사장을 돕기 위해 제사장들을 24반열로 나누고 정해진 반차(班次)를 따라 섬기게 했듯이(대상 24:7-18) 하늘 성소사역에서도 대제사장을 조력하는 이십사 장로가 있어 금향로의 향을 드리는 제사장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들이 하늘 성소에서 제사장과 찬양대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5:8). 그리고 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을 돌린다(4:10, 11; 5:8-10, 14; 11:16-18; 19:4).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
계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는 이십사 장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킨다. 요한이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을 본 후 보좌로부터(evk tou/ qro,nou out of the throne) 들려오는 장엄한 하나님의 임재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는 다음의 네 가지를 나타낸다. 첫째, 요한이 이러한 세 가지 현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고(욥 37:2-5 시 18:13-15) 그분의 현존하심과 장중한 엄위하심을 묘사하기 위해 잘 쓰던 문구이다(8:5; 11:19; 16:18). 둘째,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보좌가 움직이는 소리이며(시 29:3-4; 77:18 겔 1:4, 13), 그분이 활동할 때 나는 소리이다. 하나님이 출동하시는 모습의 위용이다. 보좌를 떠받들고 있는 네 생물이 소리를 발할 때도 우렛소리 같다(6:1).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 같다(겔 10:5).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출 19:16). 셋째, 요한은 심판을 언급할 때도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8:1, 5; 11:15; 16:17, 18). 넷째, 성경에서 3이라는 숫자는 완전이나 영원을 의미하여 안정감을 주는 강조의 수이다. 하나님과 관련하여 세 가지의 언급(번개, 음성, 우렛소리)은 계시록 전체에서 7이라는 숫자와 마찬가지로 3이라는 숫자도 아주 중요함을 시사한다. 그 현상이 4장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요한은 하나님의 모양을 묘사하기 위해 3절에서 세 가지 보석 곧 벽옥과 홍보석 그리고 녹보석을 사용했고, 5절에서는 그분의 현현과 관련하여 세 가지 현상 곧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를 언급했다. 7절에 네 생물을 설명하면서 “같고” 라는 부사를 네 번 사용하고 있는데 원어 호모이오스(όμοιος like)는 세 번만 사용하고 세 번째 생물에는 호스(ώς as)를 사용했다. 8절에서 네 생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거룩하다”를 세 번이나 반복하며, 하나님의 칭호도 세 가지 곧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로 언급하고, 또한 세 가지의 표현 곧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하나님의 존재를 묘사했다. 9절에서 그는 생물들이 하나님께 세 가지 곧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10절에서 요한은 이십사 장로들의 세 가지 행동을 세 동사로 표현하기를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그리고 자기 관(冠)을 드린다고 하였다. 11절에서 그는 이십사 장로들도 세 가지 곧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다.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은 능력과 위엄을 지니신 하나님의 장엄한 임재의 소리와 함께 성령의 모습을 보았다. 켠 등불 일곱의 헬라어 헤프타 람파데스 프로스 카이오메나이(e`pta. lampa,dej puro.j kaio,menai seven lamps of fire burning)는 성소의 일곱 촛대를 가리킨다. 람파데스(lampa,dej)가 성소의 촛대, 등대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 위치는 보좌 앞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1:4).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이때에 하늘 성소 첫째 칸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주는 것이므로 4:1의 문을 하늘 성소 첫째 칸 문으로 해석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4, 5장이 지성소의 심판 장면을 묘사하는 게 아니고 첫째 칸에서 행하여진 그리스도의 등극식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는 근거도 된다. 그러므로 5절은 계시록 주석에 매우 중요한 하나의 이정표요 방향타(方向舵)가 된다. 엘렌 G. 화잇은 5절을 사도 요한이 하늘 성소 첫째 칸을 본 것으로 적용했다. 그녀는 “사도 요한이 계시 중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볼 허락을 얻었을 때에 그는 거기서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을 보았다. 그가 보니 한 천사가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4:5; 8:3). 여기서 예언자는 하늘에 있는 성소의 첫째 칸을 볼 허락을 받았고....”라 하였다. 그녀는 각 시대의 대쟁투에서 요한계시록 4, 8, 11장에 나타난 하늘 성소에 대해 아주 포괄적인 신학적 진술을 하면서 역시 5절이 하늘 성소 첫째 칸의 일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늘 성소는 지상 성소를 통하여 두 칸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사도 요한이 계시 중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보도록 허락 되었을 때, 그는 거기서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을 보았다. 그는 또한 한 천사가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고...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계 8:3) 놓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하늘에 있는 성소의 첫째 칸을 보도록 허락되었다.” 폴린(Jon Paulien)도 계시록 4장이 하늘 성소 첫째 칸임을 동의하여, “이 진술로 보아 엘렌 G. 화잇은 인과 나팔 사건들이 하늘 성소 첫째 칸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둘째 칸 봉사는 오직 11:19에서야 보인다”라고 하였다. 데이빗슨(Richard M. Davidson)도 4, 5장을 첫째 칸 사건으로 간주한다. 맥스웰(C. Mervyn Maxwell)도 첫째 칸의 일로 보며 요한이 하늘 성소의 첫째 칸에서 본 보좌를 떡상으로 여긴다. 떡상은 하나님의 임재의 떡(출 25:30)으로 5절에서 촛대 맞은편에 위치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갈리(Norman R. Gulley)도 계시록 4, 5장은 하늘 성소 첫째 칸 봉사에서 행해지는 그리스도의 왕과 대제사장으로서의 취임식임을 강력하게 논증하였다. 일곱 영(타 헤프타 프뉴마 ta. e`pta. pneu,mata the seven spirits)은 일곱이 완전을 의미함으로 일곱 영은 완전한 속성을 가진 성령을 뜻한다(1:4). 켠 등불 일곱의 정체를 문맥 자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하여 성령을 가리킨다. 등불이 켜 있는 것(카이오메나이 kaio,menai burning)은 성령의 임재와 지속적인 활동 그리고 충만한 역사를 뜻한다(슥 4:2-6). 성령은 어린양의 일곱 눈으로도 묘사 되었다(5:6).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는 표현은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은 하나이심을 의미한다.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 일컫는다(롬 8:9; 8:14 고전 2:11; 7:40; 12:3 고후 3:3 벧전 4:14). 또한 “여호와의 눈”(슥 4:10)이라 하였다. 따라서 5절은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말하는 게 틀림이 없다.
네 생물
계 4:6-8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요한은 그의 시선을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그 황홀한 보좌를 떠받들고 있는 네 생물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네 생물의 위치는 하나님의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evn me,sw| tou/ qro,nou kai. ku,klw| tou/ qro,nou in the midst of the throne and round the throne)이다. 네 생물이 “보좌 가운데” 있는 동시에 “보좌 주위”에 있다는 표현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삭제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비평학자들이 있다(Charles). 그러나 이 말은 그룹천사가 보좌와 직결되어 옹위(擁衛)하며 하나님을 시중들고 있는 걸 뜻한다. 그 위치는 보좌 밑에서 떠받들기도 하고(겔 1:23-26) 보좌와 직결되어 가운데 있기도 하고 보좌 주위에 시위하기도 한다. 네 생물은 그룹 수레(cherubim-chariot)이다. 그분은 그룹을 타고 날으시기도 한다(시 18:10). 그룹에 머물러 그룹 사이에 계시며(삼상 4:4), 그룹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물기도 하시다가 다시 그룹으로 돌아오신다(겔 9:3; 10:3-5; 18-19). 또한 여호와는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다(삼하 6:2 왕하 19:14, 15).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네 생물 사이에 좌정하신다(시 80:1; 99:1 사 37:16). 네 생물의 나타남은 하나님의 임재와 출동을 의미한다. 생물의 앞뒤에 눈(目)들이 가득하고 그 안과 주위에도 눈들이 가득하다(8절). 에스겔은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겔 10:12)고 했다.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ge,monta ovfqalmw/n filling of eyes)고 한 것은 눈은 지성과 통찰을 뜻하므로 네 생물이 완전한 통찰력을 가진 지성적 존재임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또한 하늘 존재들의 끊임없는 감찰과 보호를 상징하는 것이다. 생물은 헬라어 조오아(ζωά creatures)인데 생명, 살아 있는 것을 뜻한다.
네 생물의 신원은 무엇인가? 네 생물은 이사야에 언급된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는 스랍들이다(사 6:1-3). 에스겔은 그룹 곧 네 천사가 네 생물이라고 하였다(겔 9:3; 10:15, 20). 따라서 네 생물, 네 그룹, 그리고 스랍들은 일치하여 신원이 동일하다. 네 생물의 존재가 천사인 게 틀림없다. 에덴동산 동편에 원초적 성소로 나타났다(창 3:24). 그들은 지상 성소에서 그룹이 상징하던 원형이다. 광야 성막 안에는 두 그룹이 날개로 법궤 위를 덮고 있었지만 솔로몬 성전에는 이 두 그룹 외에 두 개의 그룹을 더 만들어 사람의 모양으로 똑바로 서 있게 하였다(왕상 6:23-30 대하 3:10-13). 따라서 솔로몬의 총 네 그룹은 네 생물을 상징한다. 네 생물들은 항상 하나님의 보좌에 직속(直屬)되어 보좌를 받들고 있다(4:6; 5:6; 14:3). 네 그룹은 성령의 통제아래 하나를 이룬다(겔 1:12).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사람의 형상이다(겔 1:5). 네 생물의 정체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다. 요한은 네 얼굴이 서로 다른 네 생물의 모양 즉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얼굴을 각각 따로 표현했다. 그러나 에스겔은 요한과는 다르게 각각 네 면을 가진 네 생물(겔 10:14) 즉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겔 1:10)을 가진 걸로 묘사했다. 에스겔 10:14에는 소의 얼굴 대신에 “그룹의 얼굴”이라 했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은 사면에 각각 얼굴이 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네 방향을 모두 보았다.
네 생물의 얼굴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분의 전능성, 전지성, 편재(遍在)성, 지성, 예지 등을 상징한다. 둘째, 그 얼굴들은 각 그룹의 특성 혹은 속성들을 상징한다. 사자는 위엄과 힘을(시 103:20), 소는 섬김과 견인의 정신을(히 1:14), 사람은 생물의 지성을(눅 15:10), 그리고 독수리는 민첩성과 멀리서도 볼 수 있는 식별력(단 9:21)을 상징한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그룹의 네 얼굴은 이스라엘 진영의 진기(陣旗)의 표에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광야 진영에서 중앙에 성소를 두고 진을 친 동서남북의 대표적 지파, 즉 동편의 유다의 진기에는 사자, 남편의 르우벤의 진기에는 사람, 서편 에브라임의 진기에는 황소, 그리고 북편의 단의 진기에는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다 한다(민 2장). 이레내우스(Irenaeus, AD 130-202)가 그룹의 네 얼굴에 대해 신빙성 없는 주장을 했는데 사자는 요한복음, 송아지는 누가복음, 사람은 마태복음, 그리고 독수리는 마가복음을 가리킨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해석과 의견을 같이 하거나 순서만 바꾸어 유사한 해석을 했지만 이러한 해석은 성경 본문에 근거되지 않아 전혀 타당성이 없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7절에서 네 생물과 연관하여 “같고” 라는 단어를 네 번 사용하고 있는데 원어 호모이오스(όμοιος, like)는 세 번만 사용하고 세 번째 생물에는 호스(ώς, as)를 사용했다. 7절에 정동사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 번째인 사람의 형상을 설명할 때 사용된 에콘(έχων, having)이라는 현재분사가 정동사로 기능한다. 그나마도 한글 개역성경은 번역하지 않았다. 세 번째 생물에는 다른 생물 묘사에 없는 “얼굴”이라는 단어도 부가되어 다른 동물은 동물 전체를 언급했지만 세 번째 생물은 얼굴을 특별히 명시했다. 이는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다름을 명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원어의 표현에 또 하나의 주목거리는 첫 번째 생물을 묘사할 때 “생물은 첫째 사자와 같고”라고 되어 있다. 나머지는 둘째 생물, 셋째 생물, 넷째 생물로 언급되었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네 생물이 가진 날개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신속한 속도를 상징한다. 요한이 본 네 생물과 이사야가 본 스랍은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사 6:2) 에스겔은 그룹의 날개가 넷이라고 했다(겔 1:6 10; 10:14). 이사야가 본 스랍천사들은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는 나는데 사용한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은 두 날개로는 몸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위를 향해 뻗고 있다(겔 1:11).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 같다(겔 10:5). 루시퍼는 한 때 네 생물 중의 하나였다(겔 28:14-17). 만일 그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룹의 위치를 계속 지켰을 것이다(겔 28:14-17). 대신에 가브리엘 천사가 네 생물 중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눅 1:19, 26 단 8:16; 9:21). 눈들이 가득한 것은 네 생물이 지성적인 존재임을 나타낸다. 그들이 통찰력을 가지고 끊임없이 감찰하며 사명 부여를 대기하고 있는 걸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에스겔은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겔 1:8)고 했다. 그 건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네 생물의 하는 일은 무엇일까? 첫째,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역할이다(겔 10:7).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개의 인을 떼실 때까지 네 생물은 말(馬)들을 불러내어 심판을 집행케 했다(6:1, 3, 5, 7). 네 생물은 하나님의 진노의 금 대접도 일곱 천사들에게 줄 것이다(15:7). 스테파노비치는 7:2-3에 나오는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통제의 임무를 받은 네 천사도 네 생물이라 하였다. 둘째, 출입을 지키는 수위의 역할이다. 그들은 과거 아담 하와가 쫓겨 난 에덴동산을 지키는 일을 담당했다(창 3:24). 셋째, 제사장 역할이다(5:8). 스랍 중의 하나가 이사야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제단으로부터 숯불 하나를 가져와서 입술에 대며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하였다(사 6:6-7). 이는 하늘 제사장의 중보사역을 암시하는 제사장 같은 역할이다. 넷째,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는 역할이다. 시중들며 명령을 대기한다. 에스겔은 네 생물이 그들 위에 보좌가 있는 수정과 같은 궁창을 떠받들고 있다고 했다(겔 1:22-23, 26; 10:1). 다섯째, 수레역할이다. “보좌 수레” 혹은 “그룹 수레”(cherubim-chariot)인 것이다. 여호와는 그룹을 타고 날으시기도 한다(시 18:10). 그분의 보좌와 직결되어 함께 움직인다. 여섯째, 네 생물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 성령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간다(겔 1:12). 하나님의 보좌는 매우 민첩하고 지성적인 네 생물의 역할 때문에 역동적이다. 일곱째, 찬양대의 역할이다. 요한은 네 생물의 하는 일을 항상 하나님을 찬양 경배하는 것으로 묘사했다(4:8; 5:8; 5:14; 7:11; 19:4).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중단이 없기 때문에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 간단없이 창화(唱和)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린다. 하늘존재들의 활동에는 밤과 낮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고 하였다.
네 생물은 세 가지를 찬양했다. 첫째는 삼중성호(三重聖號)의 찬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했다. 3중 운율의 찬양은 이사야가 본 스랍들의 찬양의 메아리이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혹자는 “거룩하다”가 세 번 반복되는 삼중송(trishagion)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나 문맥상 실지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다(참고; 민 6:24-25 시 136:1-3). 삼중 반복은 최상급을 표현하는 최고의 강조이다. 둘째는 “주 하나님 전능하신이여”라고 하여 그분이 주님이 되심과 만물의 통치자 되심과 그분의 전능성을 찬양했다. 세 번째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o` h=n kai. o` w'n kai. o` evrco,menoj)라 하여 그분의 영원성과 재림 때 동행할 분임을 찬양했다. 1:4, 8과 동일한 표현이지만 단지 그 어순이 바뀌어 있다. 이제도 계시고의 호온(o` w'n the being)은 현존하는 분이란 뜻으로 구약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 라는 용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장차 오실 자 라고 했을 때 사용된 원어 호 에르코메노스(o` evrco,menoj the coming)는 계시록에 세 번이 나오는데(1:4-5, 8; 4:8), 미래에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먼저 아시고 찾아오시는 분이요 또한 실제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아들과 함께 이 땅에 오시는 분이심을 가리키는 것이다(시 50:3-6 계 6:16).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
계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학자들 간에 견해는 여러 갈래로 갈린다. 첫째, 로마 시대에 일곱 증인들에 의해 인이 찍힌 유언장(遺言狀, last will and testament)이다. 둘째,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기재되고 있는 생명책이다. 셋째, 신약 성경에서 성취된 것으로 간주되는 구약성경이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통치권을 다시 찾은 매매증서(a deed of purchase)와 같은 것이다. 다섯째, 두루마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상급, 악한 자의 심판, 최후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이 담긴 것이다. 다섯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이에 대해 재림교회 안에 학자들이 제안한 견해를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두루마리는 인류 역사와 구속의 경륜에 대한 예언적 역사서이다. 열 왕들의 치적들, 성도들과 악인들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의 예언들과 성취된 일들 그 모두가 담겨진 우주적 대쟁투의 기록이다. 엘렌 G. 화잇은 두루마리에는 국가들과 교회의 역사가 기록돼 있으며, 빌라도의 행적도 기록돼 있다고 했다. 에드윈 R. 티엘(Edwin R. Thiele)은 그것을 “운명의 두루마리”(a scroll of destiny)라 칭했다. 비재림교인인 바클레이는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섭리의 책이요, 세계의 운명의 책이요,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 세계의 역사를 미리 기록해 놓은 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콜린즈(A. Y. Collins)도 미래사건이 기록된 운명의 책이라 하였다.
둘째, 앤더슨(Roy Allan Anderson)은 두루마리가 지구에 대한 통치권 회복의 권리증서(title deed)라고 했다. 두루마리는 왕권의 징표였으며 그걸 취하는 건 왕권을 이양 받는 걸 의미한다. 신계훈은 앤더슨의 주장에 동의하여 “이 두루마리는 바로 사탄에 의하여 죄 때문에 잃어버린 지구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과 인간의 본래의 통치권의 회복을 위한 권리증서 곧 구속의 문서인 것이다”고 했다. 같은 노선에 있는 학자들은 예레미야 32:6-16에 나오는 매매계약에 의한 권리증서와 그리고 레위기 25:23-28의 가까운 친족이 매각된 토지를 되찾아주던 제도를 이 두루마리의 신원 파악에 적용한다.
셋째, 두루마리는 다니엘서이다. 엘렌 G. 화잇은 다니엘서가 계시록에서 열려졌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봉함하라”(단 12:4, 9)고 명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봉인을 떼어서 말세에 대한 계시를 요한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나 폴린(Jon Paulien)이 지적한 대로 “5장의 두루마리 자체가 그녀의 생각에는 다니엘서인지는 좀 덜 명확하다.” 만일 두루마리의 내용이 다니엘서라는 가정이 맞는다면 주로 예언들이며 10장의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는 다니엘서 예언의 일부인 게 틀림없고 마지막 시대에 기간 예언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어야 할 경험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참조; 10:2 주석). 그러나 그 나머지 부분은 아무 곳에도 열려지지 않아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넷째, 두루마리의 내용은 요한계시록이다. 스테파노비치는 두루마리의 내용은 요한계시록인데 그 일부가 10장의 작은 두루마리 내용(12:1--22:5)이라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인봉하고 교회에 전달하지 말라는 부분이다(10:4). 래드는 일곱째 인이 특별한 사건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루마리의 내용은 7:1--22:21로 구성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을 제외한 세 가지 견해들이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 세 가지를 종합해 보면, 5장에 나오는 인봉된 두루마리에는 인류 역사와 예언 및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목적이 담겨진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역사를 포함하고 있는 각 시대의 대쟁투의 기록이다. 그 두루마리를 갖는 것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완전한 주권을 갖는 것이다. 그 두루마리의 일부가 열린 채로 다니엘서와 관련하여 10장에 드러났다.
일곱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의 나머지 부분은 언제 열릴 것인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알 수 없다. 맥스웰은 두루마리의 정체와 내용에 대해 한가지로 정의하기를 거부하는데 이는 요한이 그 두루마리의 정체와 내용에 대해 침묵하였기 때문이라 했다. 둘째, 10장에서 일부분이 열렸다 할지라도 나머지 부분은 역사의 마지막까지는 충분히 열려지지 않을 게 틀림없다. 봉인된 두루마리의 일곱 인은 떼어지지만 두루마리가 개봉된 것에 관한 언급은 성경문맥에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 스트랜드는 최후심판 때(20:11-15)에 일곱 인봉된 두루마리가 펴질 것이라는 견해를 가졌다. 스테파노비치도 동일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개정판에서는 열리는 시기에 관해 의견이 달리 표현했다. 엘렌 G. 화잇은 그리스도의 삼림 때 대관식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때 악인들에게 영멸을 집행하는 선고의 증거로 기록책들이 열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불로 기록된 문자와 같이 나타난다. 보좌 위에 십자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아담의 유혹과 타락, 그 후에 계속적으로 전개되는 위대한 구속의 경륜의 장면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이심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서 한 어린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5절은 들은 것이고 6절은 본 것이다. 내용은 같은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어린양(아르니온 avrni,on lamb)은 누구인가? 이사야 선지자는 어린양을 메시아에게 적용시켰다(사 53:7).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였다(요 1:29, 36). 요한 복음에서 원어가 아르니온(avrni,on lamb)과 다른 암노스(αμνός)가 사용된 것은 요한이 이사야로부터 인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계시록에서 아르니온을 사용한 건 전사(戰士)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특별히 6절에서는 일곱 뿔을 가진 숫양으로 그분을 묘사하여 십자가의 승리를 암시하고 있다. 양(羊)은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숫양은 뿔이 있고(창 22:13), 암양은 거의 다 뿔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양하면 단번에 마음에 떠오르는 건 성전에서 조석으로 드려지던 희생양(출 29:38-42)과 유월절 어린양이다(고전 5:7). 그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것은 성경에 아주 명징(明澄)하게 들어나 있다.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 일곱 눈이 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이다. 첫째,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전지성을 상징한다. 그분의 통찰력과 예지 그리고 완전한 지혜와 지능을 일곱 눈으로 표현했다. 아무도 불꽃같은 그의 목전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불가분의 관계를 묘사한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듯이(요 10:30) 성령과도 하나이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린양에게 일곱 눈이 있다는 말은 삼위일체(三位一體) 신학의 근거가 된다. 2:1, 7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성령이 하셨다고 했다. 3: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일곱 영 즉 성령을 가졌다고 했다. 로마서 8:9에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했고, 갈라디아 4:6에서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 했다. 요한복음 14:18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오심을 “내가 너희에게 오리라”고 표현하여 자신과 성령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언자 즉 보혜사이시고(요일 2:1), 성령은 다른 보혜사이다(요 14: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신다(요 14:26; 15:26). 성령의 주요임무는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분을 증거하는 것이다(요 16:14). 이 모든 성경 절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이 완벽하게 일체이심을 증거 하는 것이다.
두루마리를 취하심
계 5:7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이제 4, 5장 계시의 최고 절정에 다다랐다. 그 핵심은 틀림없이 7절이기 때문이다. 7절의 의미는 자못 크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권과 통치권과 주권의 이양을 상징하는 두루마리를 취하는 장면이다. 구약배경은 신명기 17:18-20과 왕하 11:12로서 새로 즉위한 왕에게 언약서인 신명기 두루마리를 전달한 것이다. 따라서 두루마리를 취하는 건 왕으로 등극하는 공식적 의식행위이다. 그 공적 행위에 의해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공동통치자로 우주를 다스리는 합법적인 왕이 되셨다.
요한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던 그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치를 옮겨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걸 보았다. 나아와서의 엘덴(h=lqen he came)은 오다, 다가가다란 뜻이다. 여기에서 아버지 보좌로 다가가는 건 승천 후에 있은 즉위식 장면이다. 나아와서라는 것을 모리스(Henry M. Morris)는 다니엘 7:13, 14에 인자가 아버지 앞에 나아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장면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잘못된 적용이다. 7절의 나아감은 승천 때의 일이고 다니엘 7장에서의 나아감은 2300주야 끝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7절의 나아감은 중재자로서의 일을 마치고 왕권과 영광과 나라를 받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도 아니다. 또한 조사심판을 위해 하늘 성소 둘째 칸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두루마리를 취하는 것의 시기를 AD 31년이 아니고 1844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어린양이 이 때 나아가는 것은 하늘 성소 첫째 칸에서 둘째 칸으로 옮기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어린양이 7절에서 두루마리를 취하려 나아가기 전에 이미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6절)을 간과하는 주장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4장과 5장의 두 장 모두의 배경은 하늘 성소 첫째 칸이다. 폴린(Jon Paulien)은 어린양이 나아가는 시점이 AD 31년이라는 옳은 견해를 지지했다. 그러므로 나아와서라는 문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바로 성소 첫째 칸에 들어가 임금과 구주로 등극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두루마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보좌 오른 편에 있었다(참조; 5:1 주석).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편에 있는 인봉된 두루마리를 취하셨다. 원전에는 두루마리(to. bibli,on the scroll)라는 용어가 없다(kai. ei;lhfen evk th/j dexia/j and has taken out of the right). 정확하게 번역하면 “오른 편에서 취하였다” 이다. 그러나 취한 것은 두루마리인 게 8절에 보면 분명하다. 문맥은 두루마리보다는 하나님의 오른 편과 그리스도의 취하시는 행동에 초점이 집약된다. 취하시니라의 헬라어 에일레펜(ei;lhfeν has taken)은 현재완료형으로 능동적으로 취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몇 가지를 상징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왕과 대제사장으로 등극하시는 장면을 생생하고 장엄하게 묘사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봉인된 두루마리를 취하신다는 것과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의미가 거의 같다. 물론 두루마리를 취하신 다음 거기 우편에 앉으신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일반적으로 왕의 오른 편이 가장 높은 명예의 자리로 간주된다. 셋째, 성경에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하나님과 공동 치리하는 걸로 묘사한다(시 80:17; 110:1).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를 취하시고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은 것은 왕으로서의 공동통치자가 되셨다는 걸 의미한다. 넷째, 또한 이것은 사탄에게 찬탈 당했던 나라가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되돌려져 이양되는 걸 뜻한다. 하나님께서 사탄과 이 세상 권세자들에게 허용했던 통치권을 거두시는 것이다.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하고 국권이 다른 데로 넘어가지 아니하는 왕국을 세우겠다던 다니엘 2:44의 성취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취하시는 이 놀라운 행동에는 참으로 엄청난 진리가 함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을 목격한 네 생물, 이십사 장로들, 천천만만 천사들, 그리고 우주의 온 피조물들이 참으로 감동적인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요한이 계시를 보던 당시는 벌써 그리스도가 승천하사 보좌에 오르셨고 통치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3:21에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보좌에 오르셨다고 했다. 그래서 5;7에서는 보좌에 앉으심에 대한 언급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스테파노비치는 이것을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 마지막에 즈음하여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눅 22:69)고 하셨고,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예언하셨다. 마가복음 14:62에서는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했다.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막 16:19)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고 하신 뜻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1)고 하였고,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고 했다. 이와 같이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 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초대교회 복음 선포의 핵심 내용이었다.
네 생물의 사역
계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는 7절을 보완한다. 7절에는 두루마리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를 취하시고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동석하셨다.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취임예식은 8절부터 감격적인 찬양 경배로 이어진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왕에게 알현(謁見)하는 예전을 갖추어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렸다. 그들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다. 그리스도께 찬양과 향을 드리는 게 네 생물과 장로들에게 모두 적용 되는지 장로들에게만 적용되는지에 관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진다. 제사장 기능을 장로들에게 적용하는 것 외에 네 생물에게 적용하는 부담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과 구문의 구조는 그들 모두가 포함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네 생물도 엎드려 경배하기 때문이다(19:4). 8절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상징적으로 레위인과 제사장의 일들을 겸직하고 있는 걸 가리킨다. 지상 성소 사역을 보면 성전에서 찬양하는 것은 레위인의 일이었고(대상 25:9-31), 향을 드리는 사역은 제사장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네 생물의 한 구성원인 가브리엘 천사를 보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눅 1:19) 천사로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깊이 관여 되어 있다(눅 1:26 단 8:15; 9:21). 네 생물들과 이십사 장로들은 아주 가까이 위치하여 하나님을 찬양 경배하고 섬기는 제사장 일에 밀접히 연합돼 있다. 8:3-4에서 천사가 금향로를 가지고 향을 섞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동참하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네 생물도 엎드려 경배했다(19:4). 장로들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엎드려 얼굴을 대고 경배한다(7:11). 이와 같이 성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네 생물, 이십사 장로들, 그리고 천사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거문고는 헬라어 키사라스(kiqa,raj harp)로 칠현금(七絃琴) 혹은 수금(竪琴)을 뜻하며 성경시대에 예배드리는 데 사용하던 전통적 악기였다(시 147:7). 거문고는 현금(玄琴)이라고도 하는 현악기이며 소리가 깊고 장중하다. 시편기자는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시 33:2)고 하였다. 4, 5장에 나오는 네 생물, 이십사 장로들, 천천만만의 천사들, 그리고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함께 부르는 찬양경배에 유독 거문고 외에는 아무런 다른 악기들이 동원되지 않았다. 관악기나 타악기가 보이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15:2-3) 부르는 것을 계시 중에 보았다(14:2). 거문고는 하늘 음악의 악기인 것이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 노래를 할 때는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하고 그분을 향해 소리를 지를 때는 나팔과 호각 소리로 하라고 하였다(시 98:4-6). 나팔과 호각은 그분을 등장시키는 역할이요 경배는 수금과 음성으로 하는 것이다. 금 대접은 헬라어 피알라스 크루사스(fia,laj crusa/j bowls golden)로 넓고 평평한 접시나 주발을 가리키며, 향을 담은 이 대접은 통상 성소 안 진설병 위에 놓아두었다.
지상 성소 봉사에서 향을 드리는 규례에 대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기를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 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 지며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출 30:7-9)라고 하였다. 직무 하는 제사장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금향로에 번제단의 불을 담고 금 대접에는 향을 가득히 담아 함께 가지고 성소 안에 들어갔다. 금 제단에 불을 옮겨 놓고 그 불에 향을 태웠다. 그때에 발생한 향연이 성소를 채우고 또한 휘장을 넘어 지성소를 채운다. 대속죄일에 향을 드리던 규례에 대해 모세는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 할 것이며”(레 16:12-13)라 하였다. 이리하여 날마다 새로운 향이 하나님께 드려졌다.
금 대접에 가득히 담겨진 향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본문은 향을 성도의 기도들이라 했다. 그러나 8:3에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하므로 향은 성도들의 기도와 합하여 드리는 기도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표현했다. 엘렌 G. 화잇은 천사가 받은 많은 향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상징한다고 했다. 향을 받은 것은 성도의 기도와 합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분향은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받아 거기에 그분의 속죄의 공로를 섞어서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을 상징한다. 다윗은 기도를 분향하는 것으로 비교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 성소 사역에서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분향하는 시간에 성소 밖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를 드렸다(눅 1:10). 이리하여 성도들의 기도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은덕으로 하나님께 올려졌던 것이다. 문맥에서 찬양과 기도(향)을 동시에 드린 것도 중요하다.
성도들의 기도가 금 대접에 담겨 하나님께 올려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귀중하게 보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도는 요한이 모든 신자들의 집단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가장 흔한 명칭이다(8:3-4; 11:18; 13:7, 10; 14:12; 16:6; 17:6; 18:20, 24; 19:8; 20:9). 성도는 지상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 곧 승리의 교회를 가리킨다.
제단아래 있는 영혼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첫째, 여섯째 인과의 관계; 다섯째 인은 특별히 여섯째 인과 관계가 있다. 거의 동시에 시작되고, 비슷한 용어들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흰 옷 입은 순교자들이 신원해 주기를 탄원하고 흰 옷 입은 큰 무리가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7장). 다섯째 인에서 순교자들의 간원(懇願)이 여섯째 인에서 응답된다. 다섯째 인에서 박해세력인 땅에 거하는 자들이 여섯째 인에서 심판을 받는다.
둘째, 네 개의 인과의 관계; 9-11절은 1-8절에 나오는 네 기사에 대한 정점(頂點)이며 네 말들이 끼칠 영향을 요약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박해를 가하여 고난을 가져다 준 자들이 바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다.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공의로운 심판을 간구한 게 땅에서 올라가 하늘 제단 앞에 이른다(8:3-4). 그 기도가 응답되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결국 화가 미칠 것이다(8:5-6, 13). 19:1-2에는 그 심판이 마쳤기 때문에 경축을 한다. 그러므로 9-11절은 요한계시록의 주요한 맥이 된다. 하나님의 복음은 순교자적인 각오로 전파될 때까지는 완성될 수 없다. 순교자의 피는 어떤 상황이든지 항상 열매를 맺는다. 요한은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바로 그 점을 보게 되었다. 다섯째 인에서 순교자들이 신원하여 주기를 탄원한 것이 계시록 전체의 흐름에서 큰 주제 중의 하나이다. 요한은 정곡을 찌르는 기독교 역사의 한 맥을 본 것이다.
셋째, 9절은 순교자들이 죽음을 당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θεός)이라는 단어가 6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둘째는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진 증거란 예수의 증거에서 예수가 생략된 것으로 보는 주석가들이 있지만, 그것이 아니고 개인 각자가 그리스도 때문에 가진 증거를 일컫는다(11:7; 12:11).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증거 때문에 핍박과 순교를 당할 걸 가리킨다. 제단은 성소 뜰에 위치한 번제단일까? 아니면 성소 내부에 있는 향단일까? 문맥적으로 볼 때에 번제단(tou/ qusiasthri,ou the altar)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지금 하늘 성소에서 그 뜰이 되는 땅을 보고 있기 때문에 9절의 제단은 번제단인 게 틀림없다. 번제단은 성소 바깥뜰에 있었기 때문에 이 장면은 하늘 성소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성소의 바깥뜰로 상징되는 이 땅에서의 일을 가리킨다(11:1-2). 4, 5장에서 제단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 두 장이 하늘 성소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섯째 인에서 묘사된 장면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성전의 바깥뜰로 상징된 땅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순교자들의 피는 마치 하나님의 제단에 쏟아 바쳐진 제물로 상징된다. 사도 바울이 말한 자기의 생명을 관제로 드린다는 표현에서 이 문구를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죽음을 예견(豫見)한 바울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라고 하였으며, 또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고 하였다. 이처럼 생명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 신실한 순교자들이 희생 제물로 상징되었다.
넷째, 죽은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다는 매우 생생한 묘사는 극히 보기 드문 비유적 표현이다. 죽은 영혼들의 탄원은 의인법(擬人法)의 묘사(창 4:9-10 약 5:4)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제단 아래 있는 영혼은 죽은 자의 상태를 언급하는 게 아니고, 성소를 배경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런데 왜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인가? 순교자는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제물과 같다. 구약 성소 제도에서 죽임을 당한 희생제물의 피는 번제단 밑에 쏟은 것이 분명하다(출 29:12 레 4:7; 8:15; 9:9). 그 쏟아진 피는 생명[70인역, 프쉬케(psuche) 즉 영혼]임으로(레 17:11) 제단 아래 있는 영혼으로 간주된 것이다. 16:6에서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쏟았으므로)에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순교를 당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제단 아래서 저들의 처지를 신원하여 주기를 탄원(歎願)하고 있다.
다섯째, 제단 아래서 부르짖는 순교자들은 누구인가? 요한이 어떤 특별한 시기의 순교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했는지 구체적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사단과의 대쟁투의 관점에서 폭넓게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일단 문맥의 전후 사정을 살펴볼 때에 제단 아래 순교자들은 악한 기사들의 시대에 특히 둘째 기사에 암시된 박해로 말미암아 순교당한 자들 즉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흉악한 죄목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고통과 죽음을 당한 자들인 게 틀림없다. 둘째, 넓게는 아벨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모든 시대에 순교당한 자들을 포함한다. 사단은 각 시대를 통하여 그의 매개체나 대행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며 박해하였다. 그 대행자들은 성도들을 고문하였으며 사형에 처하였다. 중세 암흑시대에 수천만의 순교자들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며 마지막 시대에 숙명적으로 따를 대 핍박에서 시련당할 자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두루마리의 신원에 대해 말하는 중 그 안에 지구 역사 시작에서 종말까지의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시기 전 인간의 질투와 증오로 희생당한 순교자들이 응보의 제단 아래서 부르짖는 음성을 함께 언급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출교시키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그릇되게 생각할 자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요 16:2). 이런 자들이 제단 아래서 부르짖는 순교자들의 무리에 포함된다.
여섯째, 순교자들의 질문은 그리스도의 두 가지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곧 심판(審判)과 신원(伸寃)하심이다. 신원(vengeance)이란 말은 억울하게 뒤집어 쓴 누명을 벗겨주거나 혹은 원한을 풀어주는 걸 의미한다. 순교자들은 큰 소리로 간원하기를 악인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언제 갚아 주시려 하나이까? 하였다. 정의(正義)의 하나님께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맺힌 절규는 매우 합법적인 것이다. 압제받고 죽임을 당한 자들이 복수를 청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신원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옹호뿐 아니라 하나님을 옹호하기 위한 탄원이다. 이 상징적인 표현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순교자들이 그의 생명을 제물로 바쳤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하나님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자들이다. 그들이 가진 증거란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행한 증거이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안전하게 쉬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 순교자들이 얼마나 고초와 고난을 겪었겠는가! 이 세상 분노가 지나가기까지 안전하게 쉬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고 참되신(호 하기오스 카이 알레디노스 o` a[gioj καὶ` avlhqino,j)은 3:7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문맥에서는 악인들이 행한 순교를 묵과하지 않는 의미에서 거룩하시고, 자신이 친히 언약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뜻에서 참(眞)되시다. 대 주재(大主宰)의 헬라어 호 데스포테스(o` despo,thj the master)는 본서에서 한 번 나오는 용어인데 신약에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여 아버지 하나님(눅 2:29 행 4:24)과 아들 하나님(벧후 2:1 유 1:4)을 모두 그렇게 불렀다. 5장부터 문맥의 흐름이 어린양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걸로 보아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문맥에서 순교자들의 피를 거둔 자들을 뜻하며, 복음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을 핍박한 악인들을 가리킨다(3:10; 11:10; 13:8, 12, 14; 14:6; 17:8). 하나님의 이름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도 땅에 거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하늘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을 의미한다(13:6). 순교자들은 그들의 대 주재자에게 자기의 피를 갚아 달라고 열렬하게 공의를 호소했다. 이단자로 낙인 찍혀 극심한 핍박 속에 억울하게 그들의 피가 흘려져 땅을 적셨다. 끔찍한 괴로움을 당한 순교자들은 악인들을 공의로 심판하여 지체 없이 우리 피를 갚아 달라고 호소했다. 갚다의 헬라어 엑디케이스(evkdikei/j avenge)는 정의를 주선하는 법적 조치를 의미하는데 다른 번역에는 신원(伸寃)이라 번역됐다. 얼핏 보면 복음의 정신과 위배되는 탄원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복수의 기도를 드린 게 아니라 용서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스데반도 순교를 당하면서 박해자들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 하였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핍박자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호소하는 게 아니라 법적 정의의 실현을 간구하여 달라고 신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무죄하지만 인간의 법정은 거짓된 고발을 받아 불공정한 판결로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하늘 법정이 그 판결을 뒤집어달라는 호소이다. 성도를 위해 복수하는 것은 설욕자(雪辱者)이신 하나님의 몫이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다(롬 12:19). 문맥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신원하여 주실 것에 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성경에 성도들의 피에 대해 신원을 회상시켜 주는 구절들이 있다. 이는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으로 상징된 아벨의 피를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한 과부의 신원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사용한 용어도 같은 것이다(눅 18:3, 5). 그분께서 법적 정의를 실현하실 것을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고 하셨다. 6:10에서 순교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이 19:2에 보면 드디어 응답되어 신원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심판하여주기를이라는 문구에서 심판(kri,neij judge)이라는 용어가 일곱 인과 관련해서 처음 등장한다. 다섯째 인이 떼어지기 전까지는 조사심판이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4, 5장이 심판문제를 다루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등극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어느 때까지”라는 말은 심판과 신원하심이 아직 미래의 일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문맥적으로 순교자들의 부르짖음은 조사심판과 최후의 위기 전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 틀림없다. 11절에서 순교자들에게 흰옷을 주는 것은 조사심판 시작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암시는 아직 재림 전 심판이 시작되지 않은 때를 묘사하는 10절과 그 심판의 완결을 뜻하는 19:2을 비교해 볼 때에 틀림없다. 순교자들이 심판을 요구하는 다섯째 인을 뗄 때로부터 심판이 완결되었다는 선언을 한 19:2 사이에 조사심판이 일어나는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주장한 폴린(Jon Paulien)의 견해는 옳은 것이다. 이리하여 폴린의 주장대로 다섯째 인은 연대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인다. 첫째, 순교자의 부르짖음은 조사심판 전이다(10절). 둘째, 흰 옷을 주는 것은 조사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표이다.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이 호소는 핍박받던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개입이 지체하는 듯한 오해에서 비롯된 부르짖음이다. 이 절규는 시편 기자가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 79:5)라고 했을 때 비슷한 환경을 배경하여 발한 것이다(시 79:1-10). 하박국이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합 1:1)라고 절규한 것을 회상시켜 준다. 다니엘 12:6-7에서 “어느 때까지냐” 라는 문구가 중세의 대 환난에 적용되듯이 6:10의 이 문구도 동시대에 순교당한 자들의 부르짖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0절에서 마치 가브리엘 천사가 “...성소와 백성이 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단 8:13)하고 질문한 것을 보는듯하다.
열덟째, 순교자들의 질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상징적 행동과 진술로 반응하셨다. 신원(伸寃)하여 주기를 호소하는 모든 순교자들에게 각각 흰 두루마기를 주어 입게 하셨다. 그리고 아직 잠시 동안 쉬라고 하셨다. 수동태로 된 것은(evdo,qh was given) 흰 옷을 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심을 뜻한다. 두루마기(스톨레 στολή robe)는 구별의 표로 입는 발에까지 끌리는 겉옷이다. 흰 두루마기는 3:5과 4:4에서 옷으로 번역된 말과는 약간 다른 승리와 신실함의 옷이다. 그걸 준 것은 순교자들을 조사심판에서 옹호하여 이기는 자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흰 옷은 품성의 순결 곧 죄인들에게 나누어 주신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며 아담 하와가 에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것으로서 이기는 자들이 옥좌에 앉을 채비로 입는 예복이다(22:1-14). 이기는 자들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가하여 흰 옷을 입고(19:7-8)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이다(7:9).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와서 저들의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었기 때문이다(7:13-14).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흰 두루마기를 받은 후에 아직 잠시 동안 쉬라고 한 것은 순교는 수고를 그치고 부활할 때까지 잠시 동안 쉬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수동태로 된 것은(evrre,qh auvtoi/j it was said to them) 순교자들의 탄원에 그리스도께서 직접 응답하여 친히 조처를 내린 것을 뜻한다. 쉰다는 것은 헬라어 아나파우마이(αναπαύμαι they should rest)로 편히 쉼, 탄원을 단념함 등의 뜻으로 축복 속에 편히 쉬는 잠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순교자들은 잠시 동안 쉬며, 기다리며, 늦춰야 한다. 만사가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의인의 죽음이 이 세상 수고를 그치고 잠시 쉬는 것으로 묘사 되었다(14:13). 복음을 거절하고 저항하여 의인들을 핍박한 자들은 밤낮 쉬지 못하는 자들이다(14:11). 충성스런 성도들을 죽인 형제들과 동무 종들의 피는 갚음을 받는다(19:2). 마지막 심판에서 세상의 판결이 뒤집어질 것이다. 로마 황제 통치시대에 이단과 사교(邪敎)로 정죄되어 누명을 쓰고 무덤에 들어간 순교자들은 권세를 휘두르던 막강한 세력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심판을 받는 것을 볼 것이다. 그들 악인들의 참혹한 꼴이 6:15-16에 묘사되어 있다. 순교자들은 부활의 그날까지 쉬다가 결국 영화롭게 되는 날 주님의 옹호하심을 받아 심판의 권세를 갖고 보좌에 앉아 왕권을 행사할 것이다(20:4).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oi` su,ndouloi auvtw/n kai. oi` avdelfoi. auvtw/n the fellow slaves of them and the brothers of them)에서 연결어 카이(kai. and)는 그리고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설명적 보족어로 “즉”(namely), “다시 말하면” 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동무 종들 즉 형제들도 라는 뜻으로 같은 하나의 그룹을 두 단체로 부른 것이다.
아홉째, 그 수가 차기까지(e[wj ou- plhrwsontai until should be fulfilled)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어떤 숫자만큼의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까지이다. 둘째, 품성이 완전하게 될 때까지를 말한다. 사실 헬라어 본문에는 수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종들의 수가 찬다는 뜻인지 종들의 품성이 완전하게 된다는 뜻인지 분명치 않다. 첫째 견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 번역자들이 “수”라는 단어를 보충한 것이다. 어떤 정해진 순교자의 수를 채우기까지 끝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9-11절과 비슷한 진술이 외경인 에녹 1서 47:1-4과 에스라 4서 4:35-37에 나온다. 그 중 에스라 4서에는 하나님께서 “너희와 같은 자들의 수가 채워질 때까지” 라 대답하였다. 래드(George Eldon Ladd)는 첫째 견해를 반대하여 어떤 숫자만큼의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 끝이 올 것이라는 식의 수학적 계산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스테바노비치는 둘째 견해를 지지한다. 9-11절에 나오는 순교자들이 바로 죄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은 자요 인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품성의 완성을 뜻하는 후자가 맞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동일한 수준의 순종과 신실함에 도달할 때까지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때란 19:7-8에 명시된 흰 옷을 입을 때까지라고 하였다.
열 번째, 그러나 필자는 질문(10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신원하여 옹호하실 때까지를 의미한다. 그분의 신원은 2,300주야가 끝나는 1844년부터 시작되었다(단 8:14). 죽은 성도로부터 시작하여 억울함을 신원하여 옹호해주는 재림 전 확인심판을 말한다. 우선 악인이 번성하고 형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또는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멸시와 핍박을 당해 왔을 지라도 결국 그리스도께서 조사심판에서 성도들을 위해 신원하시고 그것을 바로잡아 무죄를 인정하여 옹호하실 것이다.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준 것은 그들의 죽음이 결코 하나님에 의하여 보복당한 게 아님을 의미한 것이며 그들을 조사심판에서 신원하여 반드시 이기는 자로 옹호하시겠다는 뜻이다. 그 심판이 끝나면 악인들에게 자비가 없는 주의 진노 즉 칠 재앙이 내릴 것이다(15-16장). 그리하여 온 우주 앞에 하나님의 공의가 설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생각에는 심판할 때에 죄인들에게 형벌을 의인들에게는 옹호를 한다는 것이 전형적인 생각이었다(신 25:1 왕상 8:32 마 25:31-46). 재림 전 확인심판의 세 가지 목적은 첫째, 성도들을 신원하여 옹호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악의 징벌을 확정하시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이름을 옹호하여 공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 까지”(7:3)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보류되는 것이며 순교자들은 그때 까지 기다리며 쉬어야 한다. 따라서 그 수가 차기까지라는 말이 일정한 수가 순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신원하여 옹호하는 조사심판이 끝나 악인들을 주의 진노로 갚으실 때까지 즉 유예기간이 끝나기까지 일정한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결국 심판은 완성되어질 것이요 순교자들은 그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릴 것이다(19:2). 그 심판을 보고 천사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렀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16:5-6)고 할 것이다.
재림 때 성부 하나님의 동행
계 6: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이 성경절은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이사야 2:19-21 예언의 직접적인 인유이다. 예수님도 이사야의 언어를 사용하셨다(마 24:29).
요한이 12-14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여섯 가지 천연계의 대 격변을 언급한 후에 15-17절에는 그리스도의 반대편에 섰던 여섯 계층의 사람들을 언급했다. 그들은 모두 다 멸망 받을 악인들이다. 여섯 부류의 사람들이 일곱 개의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다섯 개의 단어는 복수이고(임금들, 왕족들, 장군들, 부자들, 강한 자들), 사회 하류층의 부류로 나열된 종과 자유인의 두 명사를 모든(pa/j every)이 수식하여 둘을 한 그룹으로 묶어 단수로 취급하므로 결국 여섯 계층의 사람들이 된다. 육이라는 숫자는 불완전을 의미하는 사탄의 숫자이다. 마지막 심판에서 제외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들이 비록 위대한 용사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날이 오면 애곡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를 것이다(습 1:14). 아담 하와가 죄를 짓고 숨었을 때처럼(창 3:8) 재림 때도 죄인들은 굴과 산들 바위틈에 숨을 것이다.
16절은 호세아 10:8의 인유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성부께서 동행하실 것을 가리킨다. 이사야 40:10에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라 하였다. 재림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동행에 대해 맥스웰(C. Mervyn Maxwell)은 다음과 같이 옳게 지적하고 있다.
“어린양에게서 숨으려는 사람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 숨기를 원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아들과 동행하신다. 모든 거룩한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동행한다(마 25:3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잠시 동안 하늘이 고요’(8:1)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늘에는 그때 찬송을 부를 존재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는다.”
제단 아래 있던 순교자들이 애절하게 호소한 신원에 대해 아버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저들의 박해자들을 대면하여 심판하실 것이며 그 결과 박해자들은 결국 새들의 잔치에 밥이 되고 말 것이다(19:17-18).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를 암시한다. 어린양(tou/ avrni,ou of the Lamb)에 정관사가 있는 것은 5:6-7의 어린양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진노(th/j ovrgh/j the wrath)라는 문구는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표현이다. 한 번도 진노한 적이 없는 어린양이 진노하시다니! 그 개념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사 25:9)다.
바람을 붙잡고 있는 네 천사
계 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바람이 불지 못하게 통제하라는 임무를 받은 네 천사는 악의 파괴세력들(사탄의 군대)을 저지하는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들(divine agencies)이다. 네 천사는 무엇을 하는가? 첫째, 네 천사는 땅 네 모퉁이에 서 있다. 선 것은 일하는 모습이다. 둘째,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불지 못하게 한다. 셋째, 하나님이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부여했다. 넷째, 인치는 사업이 마칠 때까지 해롭게 할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역할 때문에 네 천사를 악의 세력으로 보는 오해를 한다. 또한 9:4에 하나님께서 메뚜기 즉 사탄의 세력에게 인 받지 아니한 자를 해할 권세를 주었기 때문에 오는 오해이다. 그러나 여기서 네 천사는 사탄의 군대가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선한 천사들이다. 네 천사의 신원에 대해 스테파노비치는 6장에서 네 말들을 불러내었던 네 생물(4:6)이라고 하였다. 그게 맞는다면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치는 사업이 마치고 칠 재앙이 시작 될 때 15:7에서 말한 네 생물 중의 하나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는 게 이해가 간다. 그게 바로 붙잡고 있던 네 바람의 일부를 놓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대리자들로 사탄 세력의 파괴활동을 저지하는 선한 그룹천사들이다. 땅 네 모퉁이란 땅의 동서남북 전체를 의미하는 하나의 관용구이다(겔 7:2). 일부의 학자들은 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는 정사각형의 모형일 것이라 생각한 걸 의미한다고 하나 둥근 원으로 간주한 성경구절도 있다(시 19:6 사 40:22). 4는 땅의 숫자이다. 요한은 만국을 4중(fourfold) 즉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 언급했다(5:9; 7:9; 10:11; 11:9; 13:7; 14:6; 17:15). 이사야는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사 11:12)라 했고 에스겔도 “이 땅 사방”(겔 7:2)을 언급했다. 이런 언급들은 땅 사방이 온 땅 즉 세상 모든 지역을 의미하는 관용구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이다.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은 지구 전체가 악의 세력들에게 위협을 받고 있음과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네 천사들에 의해 보호받고 있음도 나타낸다.
땅의 사방은 “땅 네 모퉁”과 같은 뜻으로 나침반의 네 방향을 말하며 온 세상을 가리킨다(사 11:12). 바람(아네무스 avne,mouj winds)은 성경에 숨(욥 19:17), 마음(시 32:2), 공기(렘 2:24, 헐떡거림), 하나님의 영(시 51:12, 심령), 바람(출 10:13)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으며 그 뜻은 문맥에 따라 결정된다. 땅의 사방의 바람 즉 “네 바람”은 온 세상 도처에 부는 바람을 가리킨다. 네 바람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세계적 규모의 전쟁을 의미한다. 다니엘 7:2-8에서 네 바람은 제국들이 탄생하는 정치적 분쟁이나 전쟁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렘 4:11-13 25:31-33; 49:36-37 슥 7:14). 둘째, 네 바람은 세계 도처에서 황폐와 파괴를 일삼는 사탄의 멸망의 선풍(旋風)을 가리킨다. 셋째, 네 바람은 하나님의 백성을 흩어 버리는 심판을 행하는 그분의 대행자이다(렘 49:36). 넷째, 네 바람은 6장의 네 말들을 가리킨다. 네 견해가 모두 성경적으로 타당성을 지니지만 1절에서 말하는 네 바람은 둘째 견해와 일치한다. 땅의 사방의 바람 즉 “네 바람”은 분명히 해를 입히는 세력이기 때문에 사탄과 관련이 있다(3절). 파괴하는 네 바람은 사탄의 군대를 가리킨다. 즉 세계 도처에서 파괴와 파멸을 유발시켜 해를 입히는 사탄과 그 부하들의 활동이다. 따라서 지구의 네 모퉁이에 서 있는 네 천사들이 붙잡고 있는 것은 사단의 군대를 저지하고 있는 것이다. 네 천사들은 인치는 사업이 끝날 때까지 사탄이 이 땅의 권세 잡은 자들을 이용하여 세계도처에서 파괴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있다. 바람을 놓는 것은 사탄으로 하여금 악의를 발휘하여 파괴와 파멸의 일을 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네 바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라는 견해는 1절의 뜻은 아닐지라도 성경적으로 옳다. 바람은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함도 아니며” 화를 가져오는 심판을 행하는 것이다(렘 4:11-13). 예레미야 49:36에 바람은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엘람에 불어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버렸다.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그의 병거를 타고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임하신다(사 66:15, 16 렘 23:19; 30:23). “여호와의 바람”이라고도 일컫는다(호 13:15). 바람은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한다. 출애굽 당시에 바닷물을 물러가게 해서 홍해를 건너게 했다(출 14:21). 바람은 하나님의 “자기 사신”이다(시 104:4). 그분은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으신다(히 1:7). 하나님은 “바람 날개를 타고”높이 솟아오르신다(시 18:10).
스가랴서에서는 각 마차의 말이 “하늘의 네 바람”을 가리킨다고 했다(슥 6:5-7). 이점을 근거로 하여 여러 학자들은 1절의 “땅의 사방의 바람”이 6장의 네 말과 동일하다고 믿는다(Beale, Beasley-Murray, Caird, Morris, Paulien, Stefanovic). 스테파노비치는 6장에서 네 말을 불러내는 것은 네 생물이기 때문에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는 네 천사는 네 생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가능성이 있는 견해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대로 유예기간이 끝날 때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일곱 대접을 일곱 재앙천사들에게 주기 때문이다(15:7). 그 건 바람을 놓는 장면이다. 또한 사탄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네 그룹 천사이상의 능력을 가진 자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바람을 통제하라는 명령과 권세를 받은 힘 센 네 천사만이 사탄의 파괴적 활동을 통제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더욱 비약하여 1절의 네 천사가 9:14의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와 동일한 천사들이라고까지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이 타당성이 없는 것은 그렇게 생각할 때 네 천사가 결박당했다는 말은 6:1-8의 활동들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네 말의 활동은 이미 활발하게 일어나 달리고 있는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다. 또한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는 악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네 생물일 수 없다. 붙잡아의 원어 크라툰타스(kratou/ntaj holding)는 크라테오(κρατέω 붙들다, 꽉 잡다)의 능동태 현재 분사로 제어하다, 통제하다의 뜻이다. 심판이 그분의 명령에 의해 지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바람의 통제권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걸 의미한다(시 135:6-7 렘 10:13 렘 49:34-36 51:16). 불을 다스리는 천사(14:18)와 물을 다스리는 천사(16:5)가 있듯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바람을 통제하는 천사가 있는 것이다. 네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바람이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해(害)를 입힐 사탄의 세력을 제어하고 있는 걸 가리킨다. 요한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요 3:8)라 하였다. 사람은 바람을 제어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는다는 것은 이 지구상에서 바람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탄의 발광하는 파괴적 세력을 견제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를 감지할 수 있다. 땅, 바다, 각종 나무에 바람을 불지 못하게 하더라는 구절에서 땅(gh/n land)과 바다(qa,lassan sea)는 전 지구를 상징한다. 반하우스(D. G. Barnhouse)는 바다는 이방인 나라들을 상징하고 땅은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나 땅과 바다는 온 세상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이다. 네 천사는 전 지구를 통제할 권세를 받았다. 각종 나무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나무는 의인들을 상징한다(시 1:3 렘 17:8). 원문을 세밀히 살핀 뮐러(Ekkehardt Muller)는 각종 나무는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능히 서게 될 인 맞은 하나님의 종들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네 천사가 땅이나 바다를 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때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나무를 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을 행할 권세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문에 땅과 바다는 소유격으로 되어 있고 나무는 목적격으로 되어 있다. 두캉은 이 차이점을 지적하여 “땅과 바다”와 바람과의 관계와 “각종 나무”와 바람과의 관계가 서로 다르다고 했다.
1절의 문맥은 온 지구에 전쟁의 참화(慘禍)가 임하게 될 두려운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직도 네 천사가 그 바람은 붙잡고 있는 은혜의 기간이다. 유예 기간 끝에 만일 그들의 제지가 제거되면 사탄세력의 최후 발악으로 필설(筆舌)로 형언키 어려운 고난과 고통의 때가 이르러올 것이며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 개국 이래로 없었던 대 환난에 휘말릴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람은 아마겟돈 전쟁까지는 통제를 받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사업이 성소에서 마쳐져서 칠 재앙이 내릴 때까지 네 천사가 사방의 바람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실 때가 바로 네 천사가 바람을 놓는 시점이 될 것이다. 바람을 놓는 순간의 광경이 15:7에 묘사됐다.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그때까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종들은 보호함을 받을 것이다.
인치는 천사
계 7:2-3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소리로 외쳐 [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은 바람을 붙잡고 있는 네 천사 외에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는 다른 천사를 목격(目擊)했다. 단수인 다른 천사가 3절에서는 직접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한다. 이 인치는 다른 천사는 누구인가? 그 신원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지배적이다. 첫째, 마지막 교회 성도들이다. 스미스는 인치는 천사가 14:6-13의 천사와 동일한 천사로서 넷째 계명을 포함하여 마지막 개혁사업을 수행하여야할 하나님의 기별자(messengers) 혹은 교역자(ministers)들이라고 하였다. 맥스웰은 하나님의 기별을 위임받은 성도들이라 했다. 둘째, 예수님에게 명령받은 천사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Ladd, Walvoord). 세 견해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견해가 타당하다. 성경 문맥은 세 번째 견해를 더 지지한다. 다섯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성경에서 천사들은 보통 공중에서 오는데 여기서 다른 천사가 해 돋는 방향에서 올라온 건 그 천사가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둘째, 다른 천사는 처음 네 천사들(네 생물)에게 명령할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다른 천사의 임무는 하나님의 종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하였다. 넷째, 그가 홀로 하나님의 인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옥새로 인을 치는 것은 왕만이 행사하는 권한이다(창 41:42 왕상 21:8 단 6:17). 너는 내 것이라고 인을 치는 것 즉 이름을 쓰는 건 왕이신 그리스도의 일이지(3:12) 천사나 혹은 성도들이 할 일이 아니다. 구원을 확정하여 선포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관찰이 2절의 다른 천사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심을 적시(摘示)한다. 따라서 인을 직접 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인치는 기별을 선포하는 일은 셋째 천사들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가 인을 치고 있다는 말로 이해가 간다.
다른 천사가 해 돋는 데로부터 즉 동쪽(from the east, KJV)에서 올라온다. 에스겔 43:2-4을 인유한 것이다. 구약에서 동쪽은 항상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곳의 상징이다. 이사야는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냐”(사 41:2)고 하였다. 또한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 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 라고 하였다. 성경시대에 방위를 헤아릴 때에 사람들은 해 돋는 곳에서 시작하여 방향을 헤아렸기 때문에 항상 동쪽이 기본이었다. 에덴도 동쪽에 있었다(창 2:8).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와서 동문을 통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겔 43:2, 4). 신약에서 동쪽은 항상 예수님과 연관된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동쪽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마 2:2, 9).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 아버지와 함께 동방에서 오는 왕들로 상징되었다(16:12).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다”(슥 14:4). 예수님은 “돋는 해”(눅 1:78)이자 “새벽별”(22:16)이시다. 만일 랑코 스테파노비치가 주장한대로 네 천사가 네 그룹 곧 네 생물이 맞는다면 동쪽에서 올라온 다른 천사는 네 생물에게 능히 명령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2절의 다른 천사는 틀림없이 하늘 사령관이요 천사장인 미가엘일 것이다(12:7).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그 인을 치시는 천사로 나타나셨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로 상징한 경우는 여러 곳에 있다. 창조된 루시퍼(사 14:12)가 그리스도 다음가는 자리로서 한 때 천사장이었으나 그가 쫓겨난 후 모세의 부활과 관련하여 유다서에는 천사들을 통치한다는 의미에서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천사장이라 칭하였다(유 1:9). 그분은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언약의 사자”(말 3:1)요, 야곱이 언급한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창 48:16)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장의 소리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다(살전 4:16).
하나님의 인
7:2절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이라는 문구에서 인의 헬라어 스프라기다(sfragi/da seal)는 표시(token), 표징(sign), 표(mark), 또는 왕들이 공식문서에 찍는 반지 도장(stamp) 등을 일컫는다. 이런 뜻들은 성경에 동의어로 사용되었다(창 17:11 겔 9:4 롬 4:11 계 7:2). 인은 관사가 없이 속격으로 쓰였는데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한정되어 속해 있는 성질을 가리키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이라 불린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이라는 문구에는 세 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 첫째, 인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둘째, 이는 인을 맞은 자는 어린양과 하나님의 소유가 됨을 시사한다(14:1). 이마에 인을 친 것은(겔 9:3-4) 그 소유가 명백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이름, 어린양의 새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본인의 새 이름 등으로 이루어진다(2:17; 3:12; 14:1).
재림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에 안식일을 포함시킨다. 1845년 일곱째 날이 성경상 안식일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인 재림교회 설립자 중의 한 분인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1792-1872)가 1847년 처음으로 안식일을 인으로 제시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그 후 재림교인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가리키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인 혹은 하나님의 율법의 인이라고 생각하여왔다. 그들은 순종과 충성의 표로 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은 참 백성이라고 믿어왔다. 그것은 십계명 중에 인의 속성인 이름, 직함, 통치영역, 그리고 통치권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 넷째 계명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의 인이 그분의 율법에서 발견됨으로 안식일이 하나님의 계명의 인이 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그 계명의 일부분인 게 확실하다. 엘렌 G 화잇도 “하나님의 인, 즉 그의 권위의 표 혹은 표징은 넷째 계명에서 발견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이 명확하게 하나님의 인이라는 등식을 성경적으로 증명하기엔 좀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인은 분명히 안식일 준수를 포함한 그 이상의 것이다.
그러면 과연 2-3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인이란 무엇이며 또한 그것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나님의 인이 안식일준수를 포함하는 그 이상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참 백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신분증명인 셈이다. 이것은 마치 할례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 되는 것과(창 17:10-11) 또한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주신 그분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표징이 되는 것과 같다(겔 20:12 출 31:13). 요한복음 3:33에서도 인침은 신분 증명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요한복음 6:27에서도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가 자신의 아들임을 증명했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인은 진품(眞品)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인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표이다. 왕이 옥쇄를 찍는 것은 왕권의 확인 또는 어떤 문서가 정말 진짜요 왕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입증하며 확증하는 것이다. 위조와 변경을 하지 못하도록 문서에 인을 친다. 성경의 예를 보면, 바로가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창 41:42-43)고 했으며, 아하수에르 왕도 인장 반지를 하만에게 주었다가(에 3:10), 다시 거두어 모르드개에게 주었다(에 8:2). 이세벨은 이것을 이용하여 나봇을 죽이라고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인을 쳐 봉하므로 마치 아합 왕의 권위를 가진 진짜인 것처럼 가장하여 장로와 귀족들에게 주었다(왕상 21:8-10). 계시록에서 인침을 받은 자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14:1; 22:4).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진짜 백성임을 증명하는 신분증명의 표가 확실하다. 둘째, 하나님께서 인을 치시는 것은 그들을 아신다는 뜻이다(딤후 2:19). 특별히 침례를 받을 때 수반되는 성령을 받는 것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마 3:16-17 엡 4:30). 셋째, 하나님의 인은 그분의 것으로 인정하는 소유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받으셨다는 걸 나타낸다. 성경 당시에 짐승이나 물건에 인을 찍거나 표를 하는 것은 소유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종의 귀를 송곳으로 뚫어서 주인에게 속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출 21:6). 할례도 하나님께 속했다는 표였다(창 17:1-12).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소유권의 표시로 성령에 의해 인침을 받는 것을 말하고 있다(엡 1:14 고후 1:22 엡 4:30). 이사야는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사 44:5)고 하였다. 하나님의 인은 짐승에게 속했다는 표로 받는 짐승의 표와 대조를 이룬다. 넷째, 최후로 쳐질 인은 보호의 표이다. 출애굽 당시 열째 재앙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표로서 문설주 위에 발랐던 유월절 양의 피와 같은 기능이다(출 12:21-22).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은 마지막 일곱 재앙과 환난의 때에 보호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종말적 인침은 은혜시기가 끝나기 바로 직전 마지막 때에 있을 것이다. “환난의 때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우리는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을 것이다. 그 다음에 네 천사가 바람을 놓을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의 인이란 그분의 품성과 사상을 가리키며 그 인을 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거룩한 품성과 사상이 마음에 새겨져 사상화(思想化)되고 생활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영하면서 그분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걸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품을 그의 충성스런 백성들에게 재현시켜주시는 게 인치신다는 의미이다. 엘렌 G. 화잇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은 품성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자들에게만 쳐질 것이다”고 하였으며, 그것은 “품성이 그리스도와 같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인침의 개념은 종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은 영적인 것이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천사는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볼 수 있는 어떤 표나 도장이 아니라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진리에 굳게 서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요동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 위에 찍힐 인은 “진리의 순결한 표요 그분의 시인의 표다.” 따라서 인침은 물리적 현상이라기보다 영적 현상인 게 분명하다. 여섯째, 넷째 계명은 하나님의 인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인은 넷째 계명에서 발견된다. 십계명중 넷째 계명만이 율법을 주신 분의 이름과 직함을 나타내고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관계의 표징이다(겔 20:12 출 31:13). 그것을 지키는 건 충성하는 자와 불충성하는 자를 구별 짓는 구별의 표이다.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넷째 계명에 있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그들과 불충성한 사람들을 구별 짓는 것이다.” 일곱째, 이름과 인과 표는 동일시된다. 3절에서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친다고 했다. 14:1은 십사만 사천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고 한다. 22:4도 하나님의 이름이 그분의 종들의 이마에 있을 걸 말한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도 표를 손이나 이마에 받는데(13:16; 14:9; 20:4) 짐승의 이름이나(14:11) 그 이름의 수(13:17)이다. 이로보아 이름, 인, 표는 동일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구속받을 자에게 찍힐 이름은 이마뿐만 아니라 손에도 찍히고 그들이 받을 흰 돌에도 새 이름이 새겨진다(2:17). 그리스도께서 이기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약속하셨다. 이 모든 것은 구약에 나오는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 위의 두 개의 보석 호마노에 야곱의 아들의 이름들을 나이대로 각각 여섯씩 새긴 것(출 28:9-11)과 가슴에 붙인 열두 보석을 박아 만든 판결 흉패에도 그들의 열두 이름들을 새긴 것(출 28:17-21)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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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