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있나 했더니...
옛 농촌에서 소 잡는 것은 엄격히 금했지만 돼지는 비료적 자유로웠다.
추수 끝나고 찬바람 돌면 마을사람 예닐곱이 뜻 모아 돼지 추렴을 한다.
한 마리 잡아 나눠 먹는 것이다. 추렴(出斂)이란 여러 사람이 비용을 분담해 모임이나 놀이를 하는 것을
말한다.
돼지를 잡기 시작하면 먼저 선지를 받아 소금 뿌려 따라 둔다.
간과 돼지머리, 발은 예약돼 있다. 추렴한나든 말이 나오기 무섭게 소문이 온 동네에 퍼지고,
여기 저기서 청이 들어 온다.
간은 어느 집 딸 빈혈이 있어서, 머리는 누구네 집 고사 상에 올리려고, 한 뼘 길이로 자른 발은
아기 낳은 누구 엄마 젖이 달려서... 필요하다고 팔려간다.
몸통은 뱃살과 네 다리, 다섯 조각으로 자른다.
네 다리는 추렴한 사람들이 돈 낸 지분에 따라 나눈다. 뱃살과 깨끗이 손질한 내장은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을 지핀다.
받아둔 선지에 쌀과 야채ㆍ양념을 적당히 섞은 뒤 대창ㆍ소창에 넣고 함께 삶는다.
삶은 고기ㆍ순대ㆍ내장은 모든 부위를 몫몫이 노느매기한다.
반쯤은 현장에 모인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
따끈한 고기국물과 여러 가지 내장, 선지가 알맞게 섞인 순대, 기름기 적당한 뱃살, 거기에 소주
몇 잔. 조용하던 시골 마을이 들썩거린다.
1960년대 말 어느 가을날의 풍경, 이것이 내게는 순대의 원형이다.
그 맛에 가까운 순댓집이 서울에도 있다.
그 집 즐겨찾기를 15년 넘게 했는데 얼마 전 주방 아주머니 두 분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안양 '평촌아바이순대' 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간판을 보니 '25년 전통...' 이라고 씌어 있다.
평촌 사람들은 뜨악했겠다. 신도시에 갑자기 25년 전통을 주장하는 순댓집이 생겼으니까.
하지만 '25년'이 잘못된 말은 아니다. 서울에서 제법 알아주는 아바이순댓집에서 25년간 함께
주방을 이끌어 온 두 분이 자리만 옮겨 같은 음식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순대는 대창을 쓰는 아바이순대다. 속 재료 15가지가 들어간다.
대파ㆍ양파ㆍ마늘ㆍ생강ㆍ찹쌀ㆍ멥쌀ㆍ취나물ㆍ숙주나물ㆍ두부ㆍ후추ㆍ겨자ㆍ
선지 조금(3가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매일 오전 순대를 만든다. 돼지 사골을 고면서 그물에 돼지머리도 삶고 순대도 넣어 삶는다.
40~50분쯤 삶는데 중간 중간 순대에 대침을 놓는다. 터지지 말라고 구멍을 뚫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머리 삶은 사골 국물과 순대의 15가지 재료에서 우러난 맛이 섞이면서 서로의 맛을
더 깊게 해 준다. 이 국물이 순댓국밥과 술국의 바탕이 된다.
순대 맛은 부드러우면서 진하다.
큰 접시를 시키면 눈이 동그래질 만큼 내용이 실하다.
볼ㆍ콧잔등 살에 귀ㆍ혀ㆍ간ㆍ염통ㆍ허파ㆍ새끼보 등을 고루 갖췄다.
오소리 감투(돼지밥통인데 이 집에서는 '고사리 감투' 라고 한다)도 빠지지 않는다.
두툼하게 썰어 내오는 고기들은 씹히는 감촉이나 맛이 입 안 가득 푸짐하다.
순댓국은 묵직한 향취에 맛은 깊다.
따라나오는 양파무침도 별미다.
툭툭 토막 친 양파에 자잘한 마늘 드문드문 섞어 고추장에 버무린 다음 하루쯤 익혔는데 겉보기엔
아무렇게나 생겼지만 맛은 제대로다.
생고추 갈아 넣고 국물 자작하게 담가 잘 익힌 무김치도 시원하다.
순대 큰 접시와 술국 하나면 둘이서 소주 두 병씩 쓰러뜨리기에 아쉬움이 없다.
순대와 순댓국은 포장판매도 한다.
# 평촌아바이순대
■ 위치 :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무지개상가 109호. 지하철 평촌역 2번 출구 왼쪽 계단으로 나가
80m쯤 앞 가요주점 맞은편
■ 전화 : 031-388-5077
■ 메뉴 : 순대 접시와 모듬고기(각 7000원 / 1만원 / 1만3000원)
■ 영업시간 : 오전 10신~오후 10시 30분
■ 쉬는 날 : 매월 첫째, 셋째 일요일
■ 좌석 : 40석
■ 주차 : 안됨
■ 카드 :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