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혁명과 민주주의
I. 민주주의 - 그 의미의 변화 II. 1848년 혁명 이전의 사상 1. 보나파르티즘 2. 초기 사회주의 3. 의회 사회주의 4. 마르크스와 엥겔스 III. 혁명의 좌절 1.혁명의 진행 2.혁명이 실패한 이유 3.혁명의 실패 이후 IV. 민주주의의 가치 하락 <참고문헌> <각주>I. 민주주의 - 그 의미의 변화
I. 민주주의 - 그 의미의 변화
프랑스 대혁명의 초기 공산주의 정치가인 바뵈프(Babeuf)는 1796년,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로베스피에르의(Rohespierre)의 계승자라 말했다. 그러면서 '로베스피에르주의는 민주주의이며, 이 두말 완전히 일치한다':라고 썼다. 로베스피에르도 다음과 같이 민주주의에 대해 기술했다.
민주주의란 주권을 가진 민중이 자신들이 만든 법률에 의해 인도되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없는 모든 것은 대표들에 의해서 시행하는 통치제도이다.
그러나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로베스피에르는 민주주의자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편지는 로베스피에르 뿐만 아니라 바뵈프조차 당시에 자신을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바뵈프를 초기 공산주의자라 부른다. 반세기 후 1848넌, 마르크스와 엥겔도 「공산당 선언」을 통해 민주주의를 말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1)
당시만 헤도 민주주의는 골 민중의 지배를 뜻했고 형식적 원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를 지배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민주주의의 쟁취와 동일한 것이었다. 민주주의란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이라는 정의에 바뵈프 역시 동의했을 것이다. 물론 1848년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엥겔스는 그 관계를 다음과 같이 파악했다.
민주주의는 모든 문명국가에서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정치적 지배로 귀결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는 모든 공산주의적 조치의 첫 번째 전제이다. 민주주의가 아직 쟁취되지 않는 동안 공산주의자와 민주주의자는 말하자면 공동투쟁 할 것이며, 그 동안 민주주의자의 이해는 곧 공산주의자의 이해가 된다. 2)
그러나 지금의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1848년 혁명의 실패 이후 20세기초에 이르러서 사람들은 보통선거권이란 방식으로 통치되는 부르주아 국가를 민주주의 국가로 이해하게 되었다. 혁명적 폭력 활동의 시도가 아닌, 설득에 의한 평화적 개혁이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여겨졌다.
1923년, 독일에서 당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공화국에 대항한 공산주의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다. 그 지도자 우어반스(Urbahns)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주의의 똥 더미 위에서 弊死하는 것보다는오히려 혁명의 불길 속에서 산화하겠노라.'고.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민주주의가 구체적인 역사적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레닌(Lenin)은 민주주의 일반이 아니라 어떤 계급을 위한 민주주의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1848년의 혁명의 실패는 이를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보통선거를 바탕으로 한 모든 국민의 민주주의로 이해되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II. 1848년 혁명 이전의 사상
1 . 보나파르티즘
프랑스에서 태르미도르의 반동과 바뵈프의 실패로 진정한 민주주치는 붕괴되었다. 프랑스 대중들은 사라져버린 민주주의의 대용물로서 제국을 원했다. 제국은 그런 대로 참을 만 했으며, 농민과 노동자들이 당시 자본주의 국가에서 기대한 수 있었던 것을 제공해 주었다. 거기에다 제국군대는 대중들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였다.
비록 가난한 프랑스였지만 군대는 계속되는 승리로서 구성원인 프랑스 인민대중들도 함께 고양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전쟁을 치르지 않더라도 군대 그 자체와 많은 선전을 통해 대중의 민족감정을 자극했고 그것은 제국의 안정과 대중의 지지를 보장했다.
그러나 보나파르트 국가도 부르주아 계급독재의 한 형식에 불과했다. 영국의 자유주의 정치가 산업부르주아에 의해 주도되어 약간의 진보적 측면도 가졌다면,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정치는 금융귀족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산업부르주아가 아직 주도권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독특한 정치체제를 이룬 것이다.
산언자본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조건에서 긍융자본이 지배하는 보나파르트 국가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가 걷게 되는 파시즘적 경로의 한 예이다. 1815년 프랑스는 패배했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되었으나 새로운 봉건주의는 아무런 기반을 갖지 못했다. 부르봉 왕조는 프랑스 농민을 혁명 이전의 종속상태로 돌려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대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왕조의 몰락을 짐작케 했다.
결국 부르주아 시민계급이 노동계급을 이용했던 7월 혁명이 일어났고 이후의 7월 왕정에서 공화주의자들의 봉기가 있었으나 노동자들의 호응이 적었던 것에는 보나파르티즘에 대한 집착도 그 원인의 하나가 된다. 나폴레옹 3세의 등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초기 사회주의
프랑스에서는 생-시몽(Saint-Simon), 푸리에(Fourier)의 영향으로 초기 사회주의적 사상이 여전히 세력을 갖고 있었다. 만인의 재산과 향유의 평등이라는 소박한 공산주의가 깔린 이들의 철학적 사회주의는 다분히 공상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특히 이 사상은 정치와의 연결고리를 찾지 않고 사회주의를 새로운 종교나 새로운 생활양식처럼 선전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그들은 유럽과 해외의 여러 나라에 그들의 理想村과 협동조합을 세웠다.
이들의 사회주의는 메테르니히 반동 체제에서도 큰 탄압을 받지 않았다. 사실 당시에는 어떻게든 비판적으로 사회 문제를 논한다면 사회주의자라고 불리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회주의적 변혁을 말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초기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의 갈등이 충분하지 못했던 시기에 생긴 사상이므로 사상가들의 창의적인 노력에 의해 형성된 만큼 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사상이 계급 대립을 넣어 존재한다고 여겼으며 그 결과 주로 지배계급에 호소하는 방법을 쓰게 된 것이다.
공산당 신언』에서는, 초기 사회주의의 의의로서 그것이 현존 사회의 모든 기초를 공격하므로 노동자들을 계몽하는 데 가치 있는 자료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반면 계급 투쟁을 뛰어 넘으려는 환상적 태도로 말미암아 산업의 밭전을 따라가지 못한 것을 비판했다.
따라서 이 체계의 창시자들은 많은 점에서 혁명적이었으나 그 제자들은 늘 반동적 종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적으로 거듭 발전하는데도 자기 스승들의 낡은 견해를 고집한다.(‥) 그들이 노동자의 모든 정치 운동을 극력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정치 운동은 오직 자기들의 새 복음에 대한 맹목적 불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영국의 오웬주의자들은 차티스트들을 반대하고,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3)을 반대한다. 4)
3. 의회 사회주의
여기서 의회 사회주의라 하는 것은 대개 쁘띠 부르주아에 의해 주도되었던 보통선거귄 획득에 의한 사회주의를 널리 일컫기 위한 말이다. 프랑스에서는 1830년대의 공화주의적 봉기가 실패한 후 주어진 상황에서 신중을 기하는 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무장봉기를 피하고 의회로 진출하기를 원했다.
가능한 한 법의 테두리를 지키며 언론과 집회를 중요시한 이들의 지도자는 레드뤼-롤랭(Ledru-Rollin)이었다. 그리고 그의 동지이자 이론가로 루이 블랑(Louis Blanc)이 있었는데 그들은 '개혁'이라는 기관지를 통해 활동했다.
블랑은 협동조합 이론을 자신의 이론적 중심으로 삼았다. 그는 노동자들의 자유로 협동조합 건설에 의해 자본가를 능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협동조합 설립과 운영자본 조달을 위해 국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 우선 노동자들이 국가를 지배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고 여겼다. 사회주의의 전제로서 민주주의 노동자 공화국을 상정한 것이다.
협동조합이론은 당시에 많은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또 현재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서도 협동조합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할 만한 자본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론은 농민적이고 수공업적이었던 세계로부터의 유럽 노동자들에게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봉건제 말기의 장인(Meister)들이 근대적 기업가와 경쟁할 수 없게 되자 국가의 도움을 받는 협동조합으로서 대항하겠다는 반동적인 사상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사상은 그밖에도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주장되는데 프루동(Proudhon)이나 독일의 그륀 (Greun) 등에 의해서도 유럽 노동자들에게 퍼지게 된다. 엥겔스는 그륀의 선전에 대해 프롤레타리아의 저축으로 어떻게 부르주아의 자본을 흡수할 수 있겠는가 하고 비판했다.
영국에서도 차티스느 운동으로서 의회 사회주의의 모습이 나타난다. 산업혁명이 빨랐던 영국에서 급격한 혁명적 변혁이 없었다는 사실을 로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변혁은 단순히 더 발전했을 때가 아니라 정치질서와 사회적 추진력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있을 때에만 일어나고,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 부르주아지에 의한 지배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까지 영국의 진보는 부르주아지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진보 속에서도 노동자들이 선거권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부르주아지의 개혁에 계급이익이 우선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대한 반발로 차티스트들이 성장했고 그들은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대변했다.
그러나 차티스트들은 스스로도 그들의 승리 이후를 분명히 알지 못했고 그럴수록 자본가와 중산층이 상상하는 노동자 정권의 혼란을 증폭시켰다. 차티스트들은 이런 이유로 다수의 반발을 샀고 영국 시민사회는 이를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사랑은 가졌지만 그것만의 모험적이고 비과학적인 성격이 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차아티즘도 협동조합적 구상을 가졌다. 일단 차아티즘의 실천이 협동조합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서 이를 바탕으로 자본가의 기반인 미취업 노동자 예비군을 흡수하려했지만 이미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영국에서는 그 시도가 성공한 가능성이 없었다.
4.마르크스와 엥겔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전의 사회주의나 민주주의 운동이 가졌던 환상을 인식했다. 그것은 실험욕구였는데, 혁명이 성공하자마자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실행하고자 하지만 엄연히 부르주아 계급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는 일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계급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산업혁명의 중요성을 주목하게 되었다. 농업생산성의 향상에서 자본가의 출현까지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거기서 공산주의자가 해야 할 일을 찾은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봉건제의 잔재를 청소하는 일에 그들은 부르주아의 편에 섰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뒤를 잇는 역사 발전의 단계로서 파악한 것이다.
사유재산에 대해서도 그때까지 계속된 沒 역사적, 도덕적 비판과는 달리 역사적 형태의 사유재산 - 산업적 생산 수단이 소수에 집중되는 것 - 을 악으로 본다. 그리하여 이러한 여러 각도의 역사적 고찰로써 협동조합적인 실험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노동자당들과 대립하는 특별한 당은 아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이해 관계와 동떨어진 이해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 공산주의자들이 다른 노동자당과 다르다면, 그것은 그들이 한편으로는 ‥‥‥ 프롤레타리아 전체의 공통된 이해 관계를 내세우고 고수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여러 발전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늘 운동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그렇다. 5)
1848년 혁명전야에 그들은 어떤 민주주의 세력의 분열도 반대하였다. 차티스트 신문인 '북극성:The Northern Star'과 프랑스의 「개혁」에서의 활동도 그 일환이었다. 또 그들은 지속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중요시했는데 이는 제1인터내셔널로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들은 자주 민족주의적 경향을 경계하였는데 민족적 분규가 혁명에 중대한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1848년 혁명의 전개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III. 혁명의 좌절
1. 혁명의 진행
1847년부터 프랑스에는 선거 개혁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7월 왕정의 루이 필립(Louis Philippe)과 기조(Guizot)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위의 진압은 소요를 불러 일으켰고 1848년 2월의 인민 봉기로 발전하였다. 봉기의 주도자는 노동자와 학생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국민방위대였다. 이들은 시민적 중산층의 군대로 루이 필립에 의해 조직되었으나 시위의 진압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오히려 혁명에 동조했다. 이는 2월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힘만으로 미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시민 계급이 시민왕 루이 필립을 버린 것이었다.
혁명은 일단 성공했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프랑스의 중앙집권적 국가기초도 거의 흔들리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국민방위대는 파리와 지방에 계속 존재했다. 그런 가운데 세워진 임시정부는 부르주아적 공화주의자들과 레드뤼-롤랭의 「개혁」세력 - 사회적 민주주의 - 과의 연합이었다.
임시정부는 가능한 한 빨리 보통선거에 의해 국민의회를 구성하자 공화주의적 헌법을 만드는 일을 추진했다. 그들은 모든 공화주의적 세력들이 합법적인 민주주의 정치가들과 함께 새 정부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므로 사회주의 노동자가 가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권력 수단은 부희주아지에게 있었다. 부르주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자유와 보통선거의 공화국이 부르주아의 재산에 위협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부르주아에게 가장 안정된 체제임을 보이려고 했다.
반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공화국과 보통선거로부터 프롤레타리아가 실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야 했다. 두 세력은 그 목표를 위해 권력 정치와 사회정책을 각각 나누어 맡았다. 하지만 도시 행정을 장악한 부르주아지가 더 성공적이었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는 파리시를 장악했고 '기동대'라는 반혁명군을 편성하여 이후의 급진적 노동자 봉기를 막으려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를 위한 정책들을 수행하여 단결권과 파업권을 보장하고 실업자 구제책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노동자들의 폭력은 지지는 얻지 못했다.
자본가들은 각종 사회주의적 계획이 나타나는 상황에 위기를 느꼈고 이는 공화국이 적자를 농민과 소도시에 부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주의자들의 인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국민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농촌과 소도시에 기반한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세력을 가지면서 까베냑(Cavaignac) 장군의 군사독재를 계획했다. 결국 1848년 5월의 시위를 이용하여 묘하게 국민의회를 해산시키고 민주주의를 완전히 해체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공화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신뢰를 잃고 새로운 보나파르트 체제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이후로 혁명에 의한 사회정책들이 붕괴하고 노동자들을 위했던 민주주의 정부가 사라지게 되자 노동자들은 6월에 봉기를 일으켰으나 군사독재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확정된 보통선거는 까베냑의 군사독재에 큰 타격을 주었다.
까베냑과 자유 민주주의를 말하는 라마르띤과 레드뤼-롤랭과 단호한 사회주의자 라스빠이(Raspail)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노동자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표를 줌으로서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그래도 견딜 만한 보나파르티즘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적이고 군국적인 반동이었다.프랑스 2월 혁명의 이러한 진행을 다른 유럽 국가들에 있어도 비슷한 보인다. 혁명은 - 그것이 일시적인 반동이었든지 간에 - 좌절했다.
2.혁명이 실패한 이유
사회적 민주주의는 그때까지 여러 계급을 포괄하여 군주적 권력을 제거하는 일에 주력했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한 다음부터 중심 세력이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공화국 정부의 세금정책에 기인한다. 그 연합이 다른 노력 없이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둘 사이의 통일을 위한 노력에 소홀했던 것이 농민층의 반동을 일으킨 원인이 될 수 있다.
또한 레드뤼-롤랭의 사회주의 세력은 연립정부가 사회주의와 노동자에 대해 적대적인 순간에도 국민의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것은 노동자 농민 모두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고 그 기반을 찾지 못하여 스스로 몰락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사회주의운동가의 개인적 특성도 여기에 작용하여 명예롭게 싸우다 패배하지 못하고 이끌려가다가 고립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자의 개인적 부족함보다는 당시의 생활과 운동의 내부적 모순이 실패의 더 큰 이유임은 다른 나라 역시 프랑스와 마찬가지의 길을 걸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내부적 모순의 하나는 그때가 1789년의 상황과 밭은 것이 달라져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농민이 농업 프롤레타리아로 존재하는 상황이었고 이제는 단순한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이 아닌,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총괄하기 위해 새로운 전술이 필요한 때였다.
다른 하나는 보통선거권에 대한 지나친 기대였다. 자본가는 여러 방법으로 대중의 올바른 판단을 막을 수 있다. 보통선거는 이에 대한 일종의 정당화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까베냑의 독재정권도 보통선거를 존속시켰고 보나파르트는 처음부터 보통선거를 이용했다. 보통선거가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이기는 하나 동시에 대중을 억압하는 수단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당시의 운동은 간과하고 있었다.
3.혁명의 실패 이후
혁명 이전에 유럽의 사회적 민주주의가 그 세력을 갖고 있을 때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혁명으로 인해 그 사상들이 한계를 보이면서 오히려 아직 산업발달이 성숙하지 못한 헝가리와 이탈리아의 정당들이 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것은 독일과 프랑스 정당들이 몰락했음을 의미하지만 또한 민주주의적 운동이 후진적인 나라의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종래의 사회적 민주주의에 대해 지원하는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게 된다.
그들은 민주주의 운동이 대중을 움직일 가능성이 있을 때에는 공동 투쟁으로 봉건제의 잔재를 타파하는 일에 힘을 모으기 바랬으나 1848년 이후 유럽에서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유럽의 공식적인 민주주의와는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기본사상의 변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부르주아와의 공동의 승리 이후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1848년의 성과를 마무리할 새로운 세력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당시 노동자들의 인기를 얻지 못했는데 노동자들은 혁명이 끝나버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당시 패배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노동자들의 생각이 더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처음에는 인정받지 못했고 또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에서 소외되기도 했으나 다른 집단들이 와해되는 중에도 작업을 계속한 그들의 노력은 결국 영국에서부터 인정받았다. 그러면서 민주주의 운동이란 말이 퇴색해지고 여러 가지 모습의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노동운동만이 남게 되었다.
IV. 민주주의의 가치 하락
1848년 이후의 혁명과 그 실패에 대한 고찰을 통해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모든 민중에 의한 통치를 의미했던 민주주의가 지금의 보통선거에 의한 형식적 자유와 평등의 의미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1848널의 혁명은 급격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 준다.
혁명적 민주주의는 1871년 파리 코뮌을 통해 완전히 중단되게 된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의 쇠퇴, 독일에서의 비스마르크의 등장이 있었다. 보통선거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일 수 있는지는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것이 유럽 민주주의의 가치 하락과 함께 나타나면서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물론 독일에서도 보통선거로 독일 제국의회가 성립하였다. 프랑스의 파리 코뮌도 의회의 승인으로 패배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군주와 자본가에게 보통선거가 더 이상 위협이 아님을 알게 했으며 이로써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도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이렇게 변화된 민주주의 제도와 맞물려 있다. 민주주의는 이제 사회적 해방을 위한 수단이 아니며, 자본주의적인 국가 형태로서만 이해된다. 민주주의를 일반적인 가치로 이해하는데서 탈피하여 그 원래의 의미와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 대한 이해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1848년의 혁명의 좌절이 이 현실의 바탕 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피상적이나마 생각해 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글을 맺는다.
<참고 문헌>
로제베르크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유럽정치사』, 박호성 옮김, 역사비평사, 1993
마르크스, 엥겔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집 1, 2, 3』, 김재기 편역, 박종철 출판사, 1997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삶, 사회 그리고 과학』, 동녘, 1992
한국정치연구회, 『현대자본주의 정치이론』, 백산서당, 1989
<각주>
1)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전』, 김재기 편역, 거름, 1991, p.74.
2) 로젠베르그,『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유럽정치사』, 박호성 옳김, 역사비평사, 1953,p.20에서 재인용.
3) 1843년부터 1850년까지 파리에서 발행된 신문 「개혁」의 추종자들. 공화국 수립과 민주 사회적 개혁 수행을 옹호했다.
4)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선』, p.86.
5) 위의 책, p.6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