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카피톨리니 뮤지엄 특별전 ‘증오와 사랑’에 전시된 도미티아누스 황제 조각. ‘스스로를 신으로 여긴 폭군’이라는 기존의 평가가 불화 관계였던 원로원이 만들어낸 거짓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3년에 걸친 동면(冬眠)이라고 할까? 팬데믹 덕분에 박물관이나 미술관 방문 자체가 소원해진 지 오래다. 상설전시관도 멀게 느껴지지만, 특히 특별전은 더 낯설다. 2020년 2월 이후 파리, 뉴욕, 런던, 로마 어디에 가도 그럴듯한 특별전이 없다. 특별전은 글로벌 시대의 꽃이자 최대 수혜자 중 하나다. 전 세계에 흩어진 그림이나 조각을 과거에 비해 수월하게 한곳에 모아 전시할 수 있게 됐다. 작품 하나에 수백만,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도 글로벌 시대에는 감당해낼 수 있다. 한 군데가 아니라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돌면서 글로벌 이벤트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서로 손발이 맞았다고나 할까? 특별전 공급에 맞춰 관람객들도 터져나갔다. 다빈치를 시작으로 카라바조, 고흐, 페르메이르 작품은 주기적으로 접할 수 있는 특별전이었다. 물론 전시장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상황은 돌변한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비싼 예술품을 모으기도 힘들고 관람객들도 한순간 사라졌다. 무너지기는 쉬워도 세우기는 어렵다. 글로벌 시대 일상 풍경 중 하나이던 전시회 열기와 열풍도 당분간은 되살리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콜로세움을 세운 인물로, 네로 사후 로마의 혼란을 극복했다.
팬데믹과 함께 사라진 특별전
새해 들어 필자가 머무는 로마의 박물관, 미술관들을 샅샅이 뒤졌다. 팬데믹이 끝났다고 하지만, 아직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로마의 경우 공공장소에서의 자발적 마스크 착용자가 30%에 달한다. 어느 곳이나 관람객들이 몰려드는 관광 도시 로마의 이미지 때문인지 박물관, 미술관은 대체로 한산하다. 좋게 말하면 1990년대 초 글로벌 시대 이전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글로벌 시대가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다. 21세기 들어 중국 여행객이 출현하면서 관람객도 폭증한다. 2023년 1월 로마에서 만난 동양인 관광객 중 50% 정도는 한국의 2030세대다.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 관광객조차 거의 없다. 박물관만이 아니라 음악회, 레스토랑, 쇼핑센터 어디에 가도 한산하다. 이탈리아의 겨울 밤은 오후 4시부터 시작된다. 어둠이 깔리는 시간에 간다면 문을 닫는 밤 7시까지 갤러리 방 하나하나를 독점한 채 천천히 관람할 수 있다.
자주 접한 상설전시관 작품보다 어떤 주제나 예술가를 테마로 한 특별전이 한층 더 감동적이다. 하지만 로마에서조차도 관심을 끌 만한 특별전이 그동안 전무했다. 간혹 있지만 자체 소장 작품들을 모아 다른 형식으로 전시한, ‘무늬만 특별전’에 그친다. ‘영화감독 파솔리니(Pasolini) 추모 특별전’ ‘나치 정권하의 이탈리아 예술품 약탈사’ 같은 식이다. 이탈리아인 관람객에 맞춘 국내용 특별전이다.
로마를 대표하는 카피톨리니 뮤지엄에 들르자마자 ‘팔라티노(Palatino)’ 전망대로 향했다. 고대 로마의 화이트하우스, 즉 역대 황제 거주지가 팔라티노다. 바로 앞에는 ‘포로 로마노(Foro Romano)’가 들어서 있다. 팔라티노 전망대는 모르고 스쳐지나가기 쉬운 곳이다. 카피톨리니 뮤지엄 지하 비석 전시관을 따라 동쪽 문에 오를 경우 만날 수 있다. 새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로마 최고 전망대 중 하나가 카피톨리니 내부에 있다. 비가 내린 탓인지 오후 3시인데도 이미 불빛이 하나둘 들어선 밤 풍경으로 변해가고 있다. 10분 정도 머물자, 육안을 통한 팔라티노 관찰도 어려워졌다. 수많은 황제들이 거주했던 공간이지만 생각보다 크지 않다. 부속시설을 포함한 공간 규모로 본다면 청와대가 더 클 듯하다.
도미티아누스가 건립한 로마 도로 주변에 세워진 공덕비.
원로원과 불화 끝에 암살당한 14대 황제
팔라티노에 주목한 이유는 황제의 죽음에 관한 기억 때문이다. 팔라티노는 수많은 황제들의 최후가 새겨진 공간이다. 자연사는 극히 드물고, 암살·자살 같은 피의 역사가 팔라티노 주변에 만연해 있다. 제정로마 14대 황제, 도미티아누스도 그중 한 명이다. 서기 96년 9월 18일, 끔찍한 그러나 로마 역사에서는 너무도 일상적인 대사건이 벌어진다.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이다. 당시 황제의 나이는 44살. 막장 역사 로마를 포함해 인류 역사가 그러하듯, 암살의 범인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다. 황제를 떠받들던 노예들과 근위병들이 공범자들이다. 암살을 직접 실행한 인물은 황제가 총애하던 집사 ‘스테파누스’였다. 자유노예로 도미티아누스를 가까이서 도운 인물이다. 도미티아누스는 평소에도 암살 공포에 떨던 황제다. 원로원과의 불화로 인해 언젠가 공공의 적으로 죽을지 모른다는 망상 속에서 살아갔다. 도미티아누스에 앞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칼리굴라, 네로가 암살·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망상은 환각으로 변해간다. 원로원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유력 의원들을 반역죄로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일도 자행한다.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면서 원로원에서 이뤄지는 자유토론을 중단시키고 의원들의 입 자체를 봉쇄한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최악의 정신병자 독재자라 볼 수 있다.
도미티아누스는 아테네를 신으로 모시면서 점술사의 말을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고 한다. 점술사는 일찍부터 황제의 암살 가능성을 예언했다. 서기 96년 9월 18일 정오에 암살될 것이란 예언조차 나왔다. 도미티아누스는 밤잠을 설치며, 당일 정오까지 철통 경비를 지시했다. 그러나 정오를 무사히 넘기자 예언이 잘못됐다면서 경비를 해제한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충복 스테파누스를 불렀다. 자신의 서명을 필요로 하는 서류를 갖고 오라고 말했다. 스테파누스는 서류와 도장을 전하다가, 몰래 숨겨온 칼로 황제를 난자했다. 스테파누스 주변 다른 노예들도 합심해 황제 암살에 가담했다. 전부 8군데 칼에 찔린 채 즉사한다. 언제나 그러하듯, 최고권력자에 대한 암살은 수많은 수수께끼들로 포장돼 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음을 두려워했듯이, 노예들도 황제의 손에 곧바로 처형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암살 배경 중 하나라고 한다.
카피톨리니 뮤지엄에서 바라본 팔라티노 전경. 오른쪽 소나무로 덮인 언덕 한복판이 도미티아누스 암살 현장이다.
암살과 함께 시작된 5현제 시대
앙숙 관계이던 원로원은 곧바로 암살을 지지한다. 행정관료로 잔뼈가 굵은 61살의 네르바가 ‘얼떨결에’ 황제에 추대된다. 원로원과의 관계도 좋고, 자식도 없으며, 나이가 많다는 것이 황제 추대 이유다. 최근 한국 정치무대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른바 ‘바지사장’ 격이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바로 당일 결정된 로마의 권력 대이동이다. 황제 네르바는 트로이야누스, 하드리아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어지는, 이른바 로마 5현제의 출발점이다. 역사의 비극일지 희극일지 모르겠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날이 바로 100여년간 지속된 로마 5현제 개막일이다.
팔리티노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미신으로 비칠 수 있지만 팔라티노 주변에 죽은 황제들의 원혼들이 떠도는 느낌이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기뻐해야 할 일 하나가 카피톨리니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미 1900여년 전에 암살된 도미티아누스를 다룬 ‘증오와 사랑(Odio e amore)’이란 특별전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글로벌 이벤트와 무관한 이탈리아인들의 입맛에 맞춘 ‘별로 특별하지 않은 특별전’이다. 카피톨리니 뮤지엄이 소장한 유물 유적을 중심으로 한, 이름뿐인 시시한 특별전으로 느껴진다. 지난해 7월 개막해 올해 1월 29일 종료됐지만, 로마에 이어 이탈리아 지방을 돌면서 순회 특별전에 나설 예정이라고 한다.
‘황제에 대한 재평가’는 도미티아누스 특별전이 갖는 가장 큰 의미다. 초대형 글로벌 이벤트와 무관하지만, 저세상의 도미티아누스가 기뻐할 이유이기도 하다. 도미티아누스는 29살에 최고 권좌에 오른 뒤 무려 15년간 황제로 군림했다. 그러나 암살과 함께 곧바로 ‘기억말살형(Damnatio memoriae)’에 처해진다. 로마사에 관심이 있다면 ‘도미티아누스=기억말살형’이란 이미지에 익숙할 것이다. 원로원이 로마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황제 이름이나 얼굴이 새겨진 비석·조각·동전을 전부 없애는 형벌의 대표적 모델이 됐다. 암살된 칼리굴라와 자살한 네로도 기억말살형에 처해진 황제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처럼 철저한 기억말살형은 아니었다. 재산 박탈은 기억말살형의 핵심이다. 조각도 없애고, 동전 속 초상화도 지우지만, 핵심은 바로 황제의 재산이다. 칼리굴라와 네로의 경우 재산박탈형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암살 직후 재산도 박탈된다. 더불어 도미티아누스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 이래 3대에 걸친 황제 집안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용감한 로마군을 묘사한 부조상.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정규군 봉급을 30% 이상 인상해주며 강한 군대를 만들었다.
기억말살형과 재산박탈형에 처해지다
카피톨리니 특별전 ‘증오와 사랑’에서 주목할 것은 ‘사랑’에 관한 부분이다. 망상과 환각에 빠진 도미티아누스의 만행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구체적인 폭정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물으면 답을 찾기가 어렵다. 원로원 기록이 남긴 ‘폭군 도미티아누스’에 관한 이미지만이 표류한다. 원로원 조언을 무시하고 중진의원을 살해했고, 국가예산을 낭비했다는 것이 신이라 불린 폭군을 비난하는 주된 근거다. 칼리굴라나 네로에서 볼 수 있는 존속살해와 근친상간, 나아가 비정상적인 대학살이나 예산남용과는 무관하다. 카피톨리니 특별전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폭정이 아닌, 도미티아누스의 ‘긍정적 유산’에 주목한 행사다. 70명의 로마 황제들과 객관적·상대적으로 비교하면서 행한 ‘황제 리더십 재평가’다.
특별전은 카피톨리니 뮤지엄이 새로 단장한 공간에서 펼쳐졌다. 카피톨리니 뮤지엄 서쪽 1층으로, 전부 15개 갤러리로 이뤄진 ‘빌라 카파렐리’가 특별전 무대다. 빌라 카파렐리는 원래 제우스 신전이 들어선 땅이다. 서기 80년 로마에서 대화재가 발생한 뒤 건립된 신전의 터가 바로 특별전 공간인 셈이다. 제우스 신전을 세운 인물은 바로 당대의 황제 도미티아누스다. 15개 갤러리에는 황제의 조각상과 당대에 건립된 건축물·신전·도로·교량과 관련된 자료와 유물이 전시돼 있다. 황제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과 함께 기억말살형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자세히 관찰하면서 살펴보는 과정에서 3시간이 소요됐다.
특별전에서 만난 도미티아누스는 폭군이 아니라, 교양·학식·능력을 갖춘 지도자로 느껴진다. 일단 역대 로마황제 그 누구보다도 ‘구체적인 업적’이 많다. 원로원 기록과 달리, 로마 속주나 변방에서 보여준 눈부신 업적은 이후 서로마를 400여년간 지속시킨 원동력이 됐다고 재평가하고 있다. 그 같은 분석은 현대 역사가들의 독단이 아닌, 속주와 변방에 기록된 비문이나 구체적인 흔적을 통해 증명됐다. 주장, 이념, 슬로건이 아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전시회다. 기억말살형에 처해진 황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로마 역사, 아니 세계 문명사에 남겼을까? 특별전을 보면 크게 4가지 관점에서의 재평가가 가능하다.
우선 군사력 강화다. 로마 정규 군인의 월급을 30% 이상 올린 황제가 도미티아누스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래 동결됐던 군인 월급이 인상되면서 로마의 군사력도 하늘을 찌르게 된다. 원로원은 군인 월급 인상에 동의하지 않았다. 예산이 부족하고, 기존의 월급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원로원의 생각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직접 전선에 가서 지휘를 한 야전 사령관이기도 하다. 멀리 떨어져 작전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가한 황제다. 당연하지만, 황제에 대한 군인들의 충성심은 남달랐다.
가려져온 황제의 업적들
황제는 로마의 평화와 질서도 구축했다. 군사력 강화와 야전 경험 덕분이겠지만, 로마의 평화를 되살려냈다. 영국과 다뉴브강 주변의 침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안전하고 자유로운 로마무역이 활성화된다.
황제는 통화가치도 재확립했다. 무역 활성화를 통해 로마 동전도 강력한 통화로 변해간다. 도미티아누스가 동전을 고순도 은화로 바꾸면서, 화폐 안정과 로마 재정 건전화도 동시에 이뤄낸다.
황제는 로마에 역사적 건축을 남겼고 사회자본도 구축했다. 도미티아누스는 로마 대화재를 기점으로 대규모 도시계획에 나선다. 황제 거주지 팔라티노를 확장하고, 시민을 위한 초대형 목욕탕도 건설한다. ‘로마 목욕탕=음란 부패’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로마 기독교 세계관에 세뇌된 편견에 불과하다. ‘로마 목욕탕=시민의 휴식처이자 평등·자유의 출발점’으로 봐야 한다. 거의 공짜로 운영되면서 로마 시민들의 문명 선진화에도 공헌했다.
특별전을 보면서 한국 지도자에 대한 재평가가 떠올랐다. 1945년 광복 이후 한국 대통령의 수는 현직을 포함해 전부 13명이다. 진영 논리의 결과지만, ‘증오와 사랑’이 공존할 처지가 아니다. 증오 아니면 사랑만이 13명 대통령에 대한 평가의 전부다. 중국 공산당조차도 마오쩌둥의 공과를 7 대 3, 6 대 4로 나눠 평가하는 시대다. 한국은 ‘0 아니면 10’과 같은 흑백 평가에만 매달린다. ‘객관적, 과학적, 종합적’ 평가와 무관한 편가르기 논리만 떠돈다.
이탈리아 어린이 관람객은 필자가 도미티아누스 특별전에 오래 머문 이유 중 하나다. 갤러리 15개 가운데 10개가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관람행렬로 터져나갔다. 10여명 교사들의 인솔하에 300여명의 어린이들이 로마 황제 재평가 특별전을 관람했다. 증오 아니면 사랑과 같은 바둑판 흑백 세계는 없다. 선정(善政)과 악정(惡政)의 비율은 보통은 5 대 5, 아무리 좋아도 7 대 3, 최악일 경우 3 대 7 정도로 가는 것이 인간 리더십의 본질이다. 자유·평등·박애의 혁명아 나폴레옹조차도 선정 5, 악정 5로 평가된다. 팬데믹 종언과 함께 한국 내 예술 이벤트도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가수들의 실내공연과 관객들의 집단 합창도 허용된다고 한다. 세종 10, 고종 0으로 통하는 외눈박이 세계관이 아닌, 입체적 시각에 근거한 역사의 재평가 특별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