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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의 수필세계
- 생수 같은 청량한 삶, 샛별 같은 사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열며
수필은 글로 그리는 그림이다. 기억 저편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일들을 서정어린 그림으로 펼쳐 보이는 것이 수필이다. 한마디로 흔적 남기기다. 문학의 존재 가치는 삶의 흔적이고, 작가의 체온이 흔적으로 서려 있을 때 가치를 발한다. 그런데 김정자는 ‘눈밭에 찍힌 발자국같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질’ 억지의 흔적은 싫어한다. 그래서 영원히 인간사의 모든 흔적을, 추억까지도 말없이 전해줄 수필집을 엮어내려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수필집은 한 개인의 역사서요, 수필은 추억의 보고다. 잊고 있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표백이다. 모든 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그러하듯 문학은 끊임없는 깨달음을 이루어 가고, 감춰진 사실들을 밝혀내는 일이며, 그를 수용하는 과정이다. 바람이 스치면 물결이 일렁이듯 인간도 어떤 사물을 접할 때, 물결이 일 듯 감정이 인다. 여기에 자기를 묻는다는 것, 어떤 사물에 취하는 것, 그것으로부터의 결과가 바로 수필집이다.
수필집을 묶어내는 것은 또 하나의 자기를 만나는 작업이다. 김정자는 누구보다도 감성이 풍부한 수필가다. 가슴에 수필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작품이 갖는 서정성은 그 자체로서 흥건한 정을 자아내게 한다. 이는 그녀의 글이 자기 감정을 최대한 억제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여과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우리의 주변은 많이 변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흔적이나 물증을 남겨 두지 않으면 과거의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없다. 그 과거의 일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마저 사라지고 나면, 문자가 있는 한 그 시절의 이야기는 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삶의 모퉁이를 돌아서면 그때마다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김정자는 ‘이름이나 행적보다는 오랫동안 향기 그윽한 예술’이란 이름으로 그 흔적을 남기려 수필집을 낸다. 긍정의 세계관으로 희망이란 나무를 키우고 있는 삶의 터전 속으로 들어가 보자.
II. 자기 성찰과 ‘ 길 떠남’의 미학
김정자의 수필집 <길 위의 길>에는 저자가 삶의 모퉁이를 돌면서 얻은 샛별 같은 사유가 은하수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그녀는 끝없이 이어진 ‘길’을 아스라이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수한 여인이다. 사십 줄에 문학의 ‘길’을 나선 사람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주축이 되는 그림자 형상은 ‘길’이다. 김정자의 수필 속에서 무시로 발견되는 ‘길’은 김정자 수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단초가 되는 핵심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길’은 서로 다른 장소를 연결해 주는 통로를 말한다. 어떤 상태로 가는 과정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김정자에게 있어서 ‘길’은 작가가 직접 <길 위의 길>이란 수필에서 표현했듯이, 미지의 세계로 열려진 ‘창’이다. 그녀는 늘 푸른 창공을 보기 위해 활짝 창을 열고, 높이 날아오르는 새의 꿈을 꾼다. 작가가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그 ‘길’은 어릴 적엔 ‘고향길’이었고, 차츰 나이가 들면서 ‘숲길’, ‘여행길’로 구체화된다. 작가는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 길 위의 길을 언제든지 걸을 준비를 하고 있다. 전자의 ‘길’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터전이라면, 후자의 ‘길’은 사색의 시공으로 연결된 문학의 길이요, 예술의 길이다. 어느 때든 길로 통하는 길이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여인이다. 왜냐하면 김정자는 ‘어디로든 희망으로 내달릴 길은 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에서 시간으로, 꿈에서 꿈으로, 걸어가고 있다. 한 하늘 아래 한 시대를 함께 호흡하며 살았던 흔적들을 더듬으며 혼자 어디론가 떠나길 좋아한다. 길에서 길을 묻는다. 혼자 걷는 샛길에서 ‘선’을 만나고 삶의 규칙을 발견하길 좋아하는 작가다.
딸은 나를 훤히 비추어 주는 외면할 수 없는 거울이었다. 전화선을 타고 나가는 목소리가 꼭 닮았다 하듯 모전여전이라는 단어에 무게가 느껴진다. 나의 결점이 은연중 아이에게서 보여질 때는 더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기에 신이 타인이라는 거울을 우리에게 주시고 서로 비춰보며 좋게 살라 하신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나이 먹도록 외양을 가꾸는 거울 수만 늘렸지 진정으로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 있는지 모르고 살았다.
- <거울 앞에서> 중에서 -
김정자의 수필 쓰기는 한마디로 자기성찰에서 출발한다. 모범적인 수필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슴 속에 ‘거울’을 가져야 한다. 수필의 출발점은 ‘자기반성’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수필에서 거울을 소중하게 여기기도, 두려워하기도 한다. 모전여전이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고 싶어서다. 서두에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하는 안데르센 동화 백설공주 중의 계모와 거울의 대화를 도입하고, 결미에, ‘거울아, 거울아! 나를 한 번 보여다오’하고 당당하게 물을 수 있도록 오늘도 거울의 존재를 확인한다.‘로 마무리하는 수미상관 기법은 작가의 문학적 기량을 가늠하게 해준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거울 만큼 거울같이 거짓 없는 품성도 찾기 힘들다. 꾸미거나 가감하는 법이라곤 없이 어떤 말도 귀담지 않는 절대 소신파이다.‘라는 거울의 특성을 기반으로 해서 주제를 구체화하며, 언어 미학성을 살려내는 솜씨로 볼 때, 범상치 않은 문학적 재능을 가졌다고 하겠다.
김정자의 <거울 앞에서>는 아주 오래 전 물난리 틈새를 이용해 버린 쓰레기를 보고, 우리들의 비양심적인 모습을 되비쳐주고 있다고 진술함으로써, 환경오염에 대한 작가의식을 드러내고, 밀려든 쓰레기를 ’거울‘의 특성에 견줌으로써 자연 환경의 중요성을 문학적으로 투시하고, 동시에 작가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겨냥하는 성숙된 모습을 보인다. 한 수필 안에서 그녀는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을 넘나들며 형이상학화하는 기법을 쓰고 있다. 이 수필이 갖는 문학적 가치는 의식을 폭넓게 해서, 제재를 통해 주제를 문학적으로 구축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수필은 재생적 상상을 통해 체험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경험을 미학적 정서로 표현하는 데에서 그 맛이 우러나는 글이다. '거울'의 특성은 되비추는 데 있다. 비양심적인 행위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허물까지도 비추도록 하겠다는 야무진 자세로 거울 앞에서 당당해지겠다는 것이다. 사회 현실에 눈감지 않으려는 자세에서 사회적 인간의 향기가 묻어난다.
위대한 철학은 호기심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다. 수필 <돌절구>에서는 변신을 꿈꾼다. 물론 길을 가다 발을 멈췄다. 절구통이 용도 변경되어 쓰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김정자는 “나도 돌절구처럼 지금과 다른, 지루하지 않은 나로 변용할 방법은 어디 없을까”하고 자문하는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성찰한 결과를 수필로 쓴 사람이기에 인생의 깊이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깊이 있는 자기 반성을 통해 사물에 내재한 본질이나 본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데 있어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풀잎 같은 감성으로, 때로는 대리석 같은 차가운 지성으로 생활을 수필 속에 용해하고자 한다. 내면을 숨기지 않는 데서 그의 솔직함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의 나이테에 연연하지 않고 말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말하고야 마는 사람이다. 이런 적극적인 삶의 자세는 수필은 발견의 글이어야 하는 대명제에 부합한다. <노송나무 숲길>은 사십 줄을 넘기며 살아오면서 얻은 인생의 지혜가 서려있는 글이다. 길 위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해야 한다. ‘넘쳐나게 좋은 것도 땅이 꺼지게 싫은 것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작가의 진술은 무욕의 삶으로 살아왔기에 오늘에서야 지나온 과거를 후회 없이 관조하며 ‘중용’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녀의 수필은 전체적으로 차분하다. 잔잔하나 뜨겁다. 작품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는 것은 '깃발'이기도 하고. ‘꽃무릇’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뜨거운 것을 뜨겁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길’을 떠나며 식힌다. ‘버스’의 ‘막차’를 기다리며, 가끔 ‘일탈’도 꿈꾼다. 김정자에게 있어서 일탈이란 바람이나 태풍이 아니라 가라앉은 불씨를 피우고, 뜨거운 모닥불을 식히는 역할을 한다. 사십대의 아줌마들로 구성된 사람들 속에 한 사람이 김정자다. 달랑 남도 안내도 한 장 들고 여행을 떠나면서,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일탈이라고 엄살을 부린다. 이국풍의 메타세퀘이어 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터널 길 위에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광주사태의 비극을 떠올리고, 애먼 나무들을 ‘영원히 씨지 못할 죄’의 상징으로 설정한다. 현실문제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작가는 양자의 대비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공간 구도를 만들고, 열정과 평정의 심리 공간을 설정한다. 개인의식에서 출발하여, 수필의 중간 어딘가에 꼭 사회의식을 노출시키는 그녀의 수필적 특성은 그래서 잔잔하기도 하면서 뜨겁다는 것이다. 수필의 묘미는 이런 균형 잡힌 시각에서 나온다.
엉겁결에 뭉친 것으로 오늘 우리의 일탈은 절반 이상의 성공을 점친다. 미리 날 잡고 준비하지 않아 더 흥미로운 여행일 수밖에 없는데 말은 안 해도 은근히 기대를 하는 눈치들이다. ‘시간과 장소는 그때그때 달라요’로 표현하면 딱 좋을 1박2일의 자유로운 일정에 첫 목적지가 담양 소쇄원이라는 것 말고는 정해진 게 아무 것도 없다. 무모할진 모르지만 나 빼고는 저들 딴엔 아직 젊다는 사십 대의 당당한 대한민국의 아줌마들. 언제 누구에게든 기죽을 일 없는지라 몸으로 부딪혀 안 될 일이 있을까. 외지 차 번호판을 달고 합장하여 길 물어 오는데 모른다 할 남도 땅 간 큰 남정네도 드물 것이 아닌가. 대책없는 용기라 해도 지금은 우리가 자랑스럽다.
- <일탈> 중에서 -
사람은 평생 동안 끊임없이 방황을 거듭하고 뒤척이며 산다. 그것은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찾아 헤매는 일종의 순례일 수도 있다. ‘이들은 같은 취미로 만나 십 년도 넘은, 내 것 주어도 안 아깝고 분위기 맞으면 못하는 한 잔의 술로도 속내 뒤집어 털어놓고 같이 눈물 찍어내는 푼수들‘이다. ’한참을 못 만나도 엊그제 본 것 같이 반가운 나이도 세대도 초월한 아름다운 관계다.‘ 사람은 누구나 순례자의 꿈을 안고 산다. 작가에게 '버스'는 앙금처럼 가라앉은 영혼을 일깨우는 질료다. 처음에는 멀미 때문에 버스타기는 그녀에게 녹록치 않은 세상살이와 견줄만한 어려운 일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좌충우돌 흔들리고 부딪히면서 단련되었던 것처럼 버스는 이제야 탈만해졌다‘며 ’기회를 보아 더 나은 차편을 갈아 탈 허욕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고 고백한다. 버스는 ’촌스런 체질의 내게 제격‘이라 너스레를 떨며, “버스타기는 발 넓지 못한 내게 세상을 엿보는 작은 창구가 되어 준다.”고 의미화한다. 일상의 권태를 전지하는 낯선 순례길을 꿈꾸는 것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예고하는 등의 문학적 장치를 수필 창작에 잘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우리 수필의 기대주임에 분명하다고 하겠다. 무욕의 삶을 지향하는 자세만으로도 즐거움을 준다.
평소 살아있는 자연과 생명이라면 작은 것에도 감탄하고 손끝 떨리는 팔순의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꽃무릇 군락지는 흥분된 볼거리가 될 것이었다. 지난 여름 무안 백연지 이야기에도 별다른 대답을 못했던 미안함도 있었던 터다. 주춤하는 어머니에게 ‘지금이 만개한 꽃무리를 볼 수 있는 적기다. 뒷날은 기약할 수 없으니 마음 낸 참에 가자’고 부추겼다. 무엇보다 나하고 나들이 추억이 몇 번 있어 딸과 같이 가는 것을 편안해 하신다. 가까운 길이 아니라서 여차하면 일박도 할 각오로 어머니를 동행하고 나선다. 어머니의 보호자 노릇이 마음 놓을 일은 아니지만 어째 뿌듯하다.
- <꽃무릇> 중에서 -
이 작품에서 작가는 팔순 어머니와 동행을 하지만, 작가가 낯선 곳으로 길 떠나기 시작한 것은 대여섯 살 아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부터였다고 한다. 그때 잡아주었던 아버지의 큰 손 기운은 낯선 여행길에 격려와 나침반이 된다. 수필 <세상을 만나다>와 <꽃무릇>을 병치시켜 놓고 보면, 작가는 ‘떠남’ 그 자체를 즐긴다. ‘여차하면 일박도 할 각오’다. 스님을 연모한 한 여인이 몰래 숨어서 스님을 훔쳐보다 병이 나서 죽었는데 그후 절 주변에 붉은 꽃이 피어났다는 상사화에 얽힌 전설도 떠남의 결과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은 한마디의 문학이다. 작품 속의 중심 사상을 의미화하는 한마디 문장이 생명적이다. '시간은 멀리 던져버리고 꽃과 하나된 어머니를 언제까지나 재촉하고 싶지 않다‘는 진술은 이 수필의 전모를 한 줄로 일반화시킨 대목이다. ’마당에 있는 집에 살 때, 상사화를 기른 적이 있다‘는 진술이 위의 주제의식을 더욱 구체화해 주기에, 이런 부분과 전체의 절묘한 조화가 문학 수필의 멋을 전해준다고 하겠다. <막차>, <버스타기>, <일탈>, <꽃무릇> 등의 ’떠남‘을 다루고 있는 모든 수필의 목적은 ’세상‘을 만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낯선 곳에 유혹당하고 싶은 일탈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만나다>의 마지막 결미는, 왜 떠나는지에 대한 해명이다. “여행이란 결국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웃집 가듯 그 시대를 살았거나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과 정 나누러 가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자기 속에 채색되어 있는 가치와 다른 세계와 비교하고 견주는 행복한 발걸음이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는 한, 나는 언제까지나 내 손에 닿아있는 아버지의 온기로 낯선 곳의 손짓에 또 유혹당하고 싶어질 것이다.”
III. 생태적 세계관과 참신한 관조
김정자 수필의 핵을 이루고 있는 또 하나의 그림자 형상은 ‘생태적 세계관’이다. 생태 문제에 대한 접근 없이 지식인이란 소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생태에 대한 관심은 지식인의 주요 관심사가 된 지 오래다. 김정자 수필이 맛을 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포기하기 어려운 욕심과 욕망을 대담하게 비워내어 수필을 통해 무욕의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담담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물안개 피어나는 영혼의 해맑은 풍경은 절경이 되어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그녀는 계절과 계절이 교접하고 변하는 순간에 이전의 기억을 잊고 새로운 변화에 순순히 몸을 맡기는 가벼운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무욕의 삶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는 글에서 우리는 무위자연의 노장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생물과 무생물, 죽은 것과 살아 있는 것을 구분하는 일반적인 시각은 편협하고 잘못된 것은 아닐까. 생물로 인정하면서도 진정으로 나와 동등한 생명체로 대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는 작가의 생태관에 대한 반성과 ‘생명이 있는 것은 그 생이 다할 때까지 존중받아야하고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명사랑에 대한 신념이 드러난 수필이 바로 <물질 고아원>이다. <감나무가 전하는 말>에서도 역시 ‘내가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상대를 돌아볼 기회조차 만들지 않고 살아왔다. 작은 사랑도 전하지 않은 몸 사린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러 온 나에게 감나무가 보란 듯이 온 몸으로 던지는 말이 어떤 것일까.’라며, 나무 아래 작은 의자 하나를 마련하는 작가가 바로 김정자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발신음을 듣겠다는 자세야말로 작가가 가져야 할 생태적 세계관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츰 깨닫게 되는 생명의 가치, 그것이 공감대를 획득하기에 그녀의 수필은 호소력을 갖는다.
최근에 이르러 생태계와 경제활동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지역적인 환경파괴에서부터 전 지구적 차원의 생태파괴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경제활동이 지구생태계가 지탱할 수 있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와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자연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재개발은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고 있다. 김정자는 이런 현상을,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뽑아내듯 멀지 않은 미래에 공동주택인 아파트가 동네를 흔적 없이 지워버리고 주인 형세하며 버티어 설 것’이라 하였다. 본래의 목적이 변질되고 퇴색된 재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노출되고 있는 수필이 바로 <고향은 없다>이다. 이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생태계와 생태학적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근시안적 시장원리에 의존한 결과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이 뒤늦게나마 용산 사태를 계기로 생태학과 경제학 간의 대화 분위기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인류 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알트의 주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평화와 화해의 미래인 단독주택단지를 제재로 생태적 세계관을 피력한 <고향은 없다>라는 수필은 제목에서 보더라도 그 힘이 느껴진다.
어떤 이는 도시의 무분별한 재개발이 인간의 삶을 지워버리는 일이라고 했다. 빨리빨리를 외치고 산이고 땅이고 확확 밀어버리는 데야 집이라고 별 수 없다. 이러다가 집에 사는 사람도 쓸리어 어딘론가 내동댕이쳐질지 모른다. 우리도 한 걸음 늦추고 일본의 주택밀집지역의 ‘도시 재생’ 운동을 배우면 안 될까. 차 맛보다 수수한 마당이라서 편안했던 삼청동 노천 북카페에 앉아서, 훗날 내 집이 줄장미 넝쿨진 이런 공간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면 근처의 시민공원과 국립국악원의 배후 문화 휴식 공간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 <고향은 없다> 중에서 -
문민정부를 거쳐 참여정부 태동 이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환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생태의식이 일반대중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됨에 따라 수필에서도 자연히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김정자의 자연 생태 수필은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 하나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고 자연 속으로 침잠하여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전통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가 하면, 자연을 노래하되 파괴된 자연을 노래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된 연유는 물론 자연의 변화에 기인한다. 어디에고 순수한 자연은 남아 있지 않고 눈 돌리는 곳마다 모두가 파괴된 자연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수필은 자연히 현실을 비판하는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솔바람 이야기>는 자연 그대로의 눈으로 자연을 관조하면서 현실을 비판하는 모습이 드러나 보이는 수필이다. 이 수필의 특이한 점은 철저하게 ‘동화의 원리’에 의해 한 편의 수필이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 나무 ‘홍송’이 되어 세상을 향해 인간의 자연 파괴를 고발하는 형식이다. 김정자의 수필은 다양한 무늬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데서 또 하나의 매력을 찾을 수 있다.
강원도 백두대간의 척추중심에서 나는 대대손손 복락을 누리며 살 줄 알았던 장년의 홍송입니다. 구름과 바람 그리고 햇살은 오래도록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이루만져 휘어짐이 멋들어진 수형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숲에서의 내 위치는 수령으로나 외형으로나 우뚝한 존재였습니다. 그만한 책임감도 나는 가졌습니다. 어딘들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있을 까요. 그 험하고 깊은 산중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과학을 등에 업은 사람들의 지혜는 날로 빛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석회석 매장량이 경제성이 있었던지 어느 날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 커지더니 체취의 전초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숲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유언비어도 난무했습니다. 산의 동쪽 부분만 짤려 나간다는 둥 산 전체가 깡그리 없어져 버린다는 둥 산새들이 물어 나르는 소문만큼 미래는 예측 불허였습니다.
- <솔바람 이야기> 중에서 -
김정자의 수필이 ‘지금, 현재, 여기’를 지향하면서 ‘있어야 할 것’들에 관심을 놓고, 수필의 테마를 ‘생태와 평화’로 설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란츠 알트가 생태학과 경제학간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단순한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접목시키고 있는 차원에서 김정자가 생태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처사다. 위에 다뤄진 작품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환경의 관점이 아닌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동일한 가치선 상에 있다는 생태 자연의 관점으로 ‘홍송’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수필가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은 생태문학의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수필의 위상은 물론 수필가의 위상도 높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인식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빠져나간 신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태적 세계관 속에서 수필가의 관심이 생명을 향하는 것은 작가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와 평화에 대한 의식이 절실한 이때, 김정자가 여성수필의 한계를 뛰어넘는 좋은 생태수필로 자연보전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는 것은 우리 수필가들이 본질적 문제에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IV. 순수한 서정과 비움의 미학
크게 보면, 김정자 수필은 사람 사이의 ‘인연’이 중심이 된 인생을 그리는 글이다. 수필의 존재 가치는 인간의 삶과 함께 빛을 발한다. 문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문학은 사회 현실 속 생활인들의 공유체험을 형상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 구원'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협의로 보면, 문학은 미를 추구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필을 쓰는 데 있어 '미의 추구'는 첫 번째 본질로 중요시되고 있다. 서정성 또한 문학의 밑바탕이 되는 요소로서 문학의 성패를 좌우한다. 대상에 대해 인정을 흘리는 일, 그리움을 갖는 일, 추억의 세계 속으로 빠져 인생을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일 등이 서정의 발로다. 문학적 미학은 화려한 문장에 있지도 않고, 거창한 주제나 경이로운 소재에 있지도 않다. 대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조의 눈 속에 베어있는 따스한 정이 독자의 누선을 자극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가는 정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 글에 서정이 묻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수필이 <빈 그릇>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면서 무욕의 삶을 추구하는 김정자의 ‘비움’의 자세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가슴을 매만지게 된다.
구석진 자리에 밀려나 있는 우리 집 화로나 부잣집 문갑 위에 정물로 앉아 있는 도자기가 항변의 말을 한다. 자기네처럼 비워내야 존재에 눈을 뜨고 가치를 더한다고. 빈틈없이 채우려고만 해 온 지난 날이 돌아보아진다. 그득하게 채워버리고 나면 다른 건 담아낼 여지가 없다. 비워 둔 그릇에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지금 담고 있는 거리곤 먼지뿐인 놋쇠화로의 가슴이 유난히 넓어 보인다.
사람 또한 그릇과 다를까. 가슴 속에 여백의 공간을 둠으로 상대를 위한 사랑도 배려도 넉넉히 품을 수 있다. 애초 내 가슴은 손가락 길이만큼 폭과 깊이의 한 종지였다. 그 종지에 하늘과 바다를 담는 큰 항아리 같은 마음자리를 이제쯤 마련하고 싶다. 소유의 욕심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면 그 터는 넓어질 수 있겠다. 받침대 위의 전시용으로 세워 둔 꽃그림 접시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빈 그릇> 중에서 -
우리는 자신의 허점을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점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경계한다. 허점이 자신의 것인가 남의 것인가에 따라 그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수필은 움푹 패인 공간을 가진 ‘화로’나 ‘도자기’를 통해 비워내야 채울 수 있다는 교훈을 말해주는 수필이다. 그 공간은 무욕을 나타내고 있으나, 허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욕을 통해서 공존할 수 있음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비움으로써 수용의 미학이 싹튼다는 진리는 누구나 안다. 이 수필의 매력은 허점이나 무욕의 가치를 빈 공간과 연결시킨 날카로운 인식이다. 발견을 통한 상관화 그리고 의미화로 이어지는 창작 과정이 문학성을 확보하기에 좋은 수필이라는 것이다. 삶의 질적 변화가 인간에게 반드시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부의 획득만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잊고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작가가 <빈 그릇>을 통해 말하려는 궁극적 가치는 과욕으로부터 바로 비극적 삶의 시초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려는 이유다. 접시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담지 않아도 누군가를 위해서 서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기억의 뿌리를 움켜지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은 행복한 일이다. 수필은 잊을 수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추억을 글로 그리는 그림이다. 잊고 있던, 기억의 저편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일들을 서정어린 그림으로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은 수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밤바다 단상>은 그 누구를 위해서 쓰는 글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다. 전설처럼 아련해진 어린 날의 기억을 반추하는 글이다. 그때는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우리에게 물질의 풍요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혈육의 ‘정’이었다. 작가는 어둠에 묻힌 강가 숲속에서 아버지의 유골이 뿌려졌던 방파제 끝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 병 중에 있던 아버지의 소주 심부름을 거절한 자책으로 가슴아파한다. ‘아버지’ 생각에 작가와 여동생은 말없이 술잔을 들이킨다. 시집을 간 여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존재다. 이미 고인이 되어 아무리 불러도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부곡은 언제나 자식을 낳아 본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드는 것이다.
병석에서 일 년 정도 앓으셨던 아버지, 하루는 연한 생선회 한 점을 입에 넣어드린 적이 있었는데, 소주를 찾으시는 게 아닌가. 평소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싫었고 특히나 병중이라 냉정히 거절했다. 이래저래 약자이던 아버지는 눈꼬리로 말없이 눈물 한 줄기 주르르 흘리셨다. 입만 조금 축여보고 싶었을, 아버지의 소원조차 들어드리지 못한 불효를 오늘따라 더 잊을 수가 없다.
바닷가 노천 테이블에 술잔과 홍합탕을 앞에 놓고 앉는다. 이심전심 아버지 생각에 동생과 나는 말이 없다. 거부할 수 없이 아버지를 닮은 우리는 맥주 한 병은 거뜬하다. 술을 통해 세상사 느끼는 프리즘 하나를 더 갖게 해준 아버지가 이제는 고마울 따름이다. 동생과 나는 바다를 향해 술 한 잔을 뿌리고 철석이는 파도소리를 섞어 술잔을 채운다.
- <밤바다 단상> 중에서 -
밤바다의 단상을 통해서 동기와 함께 ‘아버지’의 모습을 반추하는 일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큰 기쁨이며, 아픔이기도 하다. 그 누군가의 절대적 사랑을 주었거나 받은 것은 기쁨일 수 있지만, 그분에 대한 기대에 미치지 못했거나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아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정자의 글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 안에 두 분의 존재가 너무나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고, 헌신과 희생으로 자식으로 위해 살았기 때문에 지금와서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 따라 나간, 그때가 최초로 세상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 더욱 눈에 밟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생각하며 술잔을 채우는 것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고, 자신도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준비이자 연습인 것이다. 이 글을 읽고 평을 쓰고 있는 평자의 눈에도 물기가 비친다. 이 한 편의 수필은 당장 부모님께 전화를 걸게 만들었다. ‘술과 아버지’ 그리고 사부곡은 이처럼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종전의 광경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을 그리워하고 있음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김정자 수필들의 특징 중에서 가장 강한 칼라를 가지는 것은 식물성적인 그리움의 서정성이다. <아버지의 산>은 작가가 집 가까이 있는 숲속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글이다. 작가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자연물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내 안에도 푸르고 넉넉한 산이 있었다.’라거나 ‘있는 정을 밖으로 표현하기를 잘 하셨던 아버지 곁에 앉으면 숲 그늘처럼 마음이 편해진다’는 표현이 그렇다. 그녀의 글에는 한결같이 다정다감한 인정이 녹아 있고, 그 인정으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는 작가의 인간적 체취가 드러난다. 한 마디로 그녀의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흐르는 서정의 강물이다. 멋진 수필가는 제재를 가지고 주제를 겨냥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정자는 제재를 가지고 주제를 겨냥하는 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제목을 보면, 금방이라도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지만 실상 글을 전체로 소화하고 나면, 제재란 하나의 비유나 상징으로써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서의 수단이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선 포공영>이 좋은 예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독자들은 전혀 ‘꽃’을 상상할 수 없다. 조선 시대의 무기 제작과 관계되는 글이거니 정도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읽어나가다 보면, 조선시대하고는 좀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며칠 전 전화 통화 중 밀양에서도 성당 나가냐고 내가 물었다. “잘 나가지 못하고 있어요. 주변의 자연이 바로 종교이지요.” 하던 말이 수긍이 간다. 지게 진 농군의 모습으로 들어서던 선생님에게서 결혼은 먼 이야기 같아 보였다. 문득 뉴 잉글랜드 골짝에서 단순하나 충적적인 삶을 일구던 ‘조화로운 삶’의 헬렌과 스코트 부부의 삶을 보는 듯했다. 과외 소득인 단풍시럽은 여기서 백여 그루의 감나무였다.
낯선 땅에 뿌리내린 민들레가 같은 이방인인 선생님의 눈에 띄었던 것은 동병상련의 동지애가 아닐까. 외래종이 많은 민들레의 세계에서 토종으로 살아남는 것이나 자연에서, 제도권 밖에서 참교육을 실천하며 살려는 선생님의 신념은 쉽게 흉내낼 수 없이 강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이미 하얀 민들레는 찬 기운 속에서 꽃을 피웠다. 밀양시 상동면 여수리의 알알이 붉은 감처럼 선생님의 내일도 그렇게 열릴 것이다.
- <조선 포공연> 중에서 -
자연으로부터 느낀 정서의 문학적 형상화가 빛나는 수필이다. 그녀는 자연을 끌어들여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의 세계를 아련히 그리워하는 낭만적 분위기도 연출하면서, 자연 자체에 눈길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연을 관조하고 거기서 깊은 명상의 세계를 얻는다. 사물을 포착하여 관조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것은 곧 현실의 삶에 투사된다. 이 수필의 제재인 ‘조선 포공영’은 아이 학교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보여준 토종 민들레의 학명이다. 작가는 이 어린 민들레를 보는 순간 바로 밀양의 시골학교로 자원해 와서 농사지으며 사는 큰 아이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참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진정한 스승에 대한 찬사가 우리 교육을 살찌우게 할 것 같다. 이를테면 자연의 대상 앞에 선 작가는 자연의 완상을 즐기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진지한 모습의 철학자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수필은 전혀 교시적인 분위기를 주지 않으면서도 결과적으로 교시라는 문학적 기능을 손색없이 수행한다고 하겠다. ‘알알이 붉은 감처럼’ 선생님의 내일도 그렇게 열릴 것이라는 표현에서도 수필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민들레는 작품 속 인물과 삶의 특징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문학적 장치다. 정서의 물화를 통해 문학의 맛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V. 견고한 자화상과 형상미학
누구에게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다. 문학 작품에 나타난 삶의 주변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그 유형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감각적 즐거움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속세적인 일에 연루된 삶 즉 정치적 활동의 삶이다. 마지막으로 관조적 삶 즉 이론적 성찰의 삶이 있다. 수필은 응축된 정서와 사상의 지도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 환경 그리고 정신이라는 삼각의 동그란 지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개인적인 삶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그 지도에는 작가가 거처하고 있는 위치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바로 자화상이다. 김정자의 자화상은 <모과 한 알>에서 ‘모과나무’와 <가슴에 안은 단지>에서 ‘장항아리’에 비유된다. ‘단박에 승패를 보고 싶어하는 성급한 남자들보다 결과를 쫓아가는 과정의 재미를 즐기는, 아무래도 야구는 여자들과 잘 맞아 보인다’는 날카로운 작가의 인식이 돋보이는, 수필 <모과 한 알>에서 작가는 남성적인 ‘타자’보다 여성적인 ‘투수’의 입장에 선다. 그 근거가 공감을 자아낸다. 여성으로서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이 투구 하나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투수의 긴장감과 무엇이 다를까’다. ‘장항아리’를 자신과 견주는 이유는 ‘아무리 닦아도 윤기가 더해지지 않지만 질박함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라니, 겸손의 미덕이 더욱 미덥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의 두 가지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로 그만치 고생이 많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기심을 가지고 그대로 생활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권을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겨 놓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지식이 많고 능력이 불어나면 욕심이 불어나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는 욕망이 확대된다. 이러한 욕망의 확대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어두움의 그림자다.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통해 민주 시민 나아가 세계시민으로서의 교양을 획득해가는 그녀에게 갈등이나 어두움은 없다. 공교롭게도 김정자의 수필은 이런 어둠의 그림자를 물리치려는 수필적 일상을 그리고 있어서 주목된다. <인연의 숲>, <군자란> 등의 수필은 이런 작가의 애타사상이 녹아 있다.
숲은 소나무, 편백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왕벚나무, 변함없는 침엽수와 변화무쌍하게 정을 내는 활엽수가 태양 아래 사이좋게 어울려 있다. 성념의 나무와 유년기를 벗지 못한 각양각색의 교목과 관목이 얽혀있다.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반목과 시기를 하지 않는다.
계획적으로 조성한 인공림이 아닌 자연스럽게 저절로 생겨난 잡목 숲, 이 작은 동산은 쉽지 않게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인 듯해 흐뭇한 자긍심에 젖는다. 큰 나무는 바닥의 어린 나무와 풀에게 한 줌의 볕살이라도 나누려는 너그러움을 안고 있다. 숲이 어떠한 재난에도 끄떡없도록 살펴볼 나의 의무가 때로는 즐겁다. 미명의 신 새벽 어둠과 안개에 포근히 안겨 있는 그 숲을 멀리서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이심전심 그 숲도 나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낸다.
- <인연의 숲> 중에서 -
작가는 자신의 삶을 규정함에 있어 ‘인연의 숲’이란 용어를 쓴다. 자연은 이렇게 다툼 없이 질서와 조화를 바탕으로 잘 살아가는데, 반대급부로 인간 세계는 삭막한 경계의 눈초리뿐이라는 걸 역설하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재산은 인간적인 정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속에서 저 숲속의 나무들처럼 서로 마음을 나누고, 정을 나누며 살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부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면서 야기된 조작된 행복관, 전도되고 도치된 가치관으로 인간의 역사는 갈등의 연속이 아닌가. 그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조화'요, '공존'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이 있다면, 거짓이 존재할 수 없는 '초록'의 세상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판단에 의해 규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향한 주체적 열정에 의해서 좌우된다. 아름다운 것은 처음부터 만들어져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고 더욱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 수필이 우리에게 기여하는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만 찾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만들어가는 삶이 소중하다는 걸 작가는 숲의 속성을 추출해서 독자에게 말하고자 한다.
주중이라 객차 안은 승객이 꽉 차진 않았다. 일어나 내 좌석을 찾아 갔더니 순방향이 아닌가. 그동안 내가 앉아 왔던 자리가 억울했다. 역방향은 요금이 조금 싼 걸로 알고 있었다. 오늘 내가 겪은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목적지의 삼분의 이 지점에 다다라서 잘못 앉아 가던 방향을 바꾸고 내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원치 않는 자리에 낮아서 또 그 자리 나름의 편견을 지우고 정을 붙였다. 앞면만 좋은 것도 아니고 뒷면만 나쁜 것도 아니었다. 하행선을 타면 뒤가 다시 앞이 된다. 그렇다면 억울할 것도 없고, 오히려 이면을 볼 좋은 기회가 아니었는가. 진실함은 뒷모습에 있다고도 한다.
- <터닝포인트> 중에서 -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란 걸 보여주는 수필이다. 이런 작가의 사상은 <천국과 지옥>이란 수필에도 나타난다. ‘천국도 지옥도 따로 있지 않았다.’는 깨달음은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걸 말해준다. 인간이 아름답게 보일 때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보다 더 아픈 다른 누구를 더 걱정할 때다. 김정자는 일상의 모든 사실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관심을 표명하는 작가다. 그녀는 어떠한 경우이든 출가외인으로서의 방관자로 남기를 거부한다. 무관심하고, 외면함으로써 홀가분하기를 소망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는 그녀가 남달리 정이 많은 사람임을 증명한다. 이 작품이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긍정적 세계관이며, 자신보다 더 큰 절망을 짐 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작가는 생각을 바꾸는 인식의 전환으로 애써 지난 과거를 합리화한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현실의 처지나 입장을 자기의 것과 함께 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기운도 움트지 않는다. 오직 을씨년스럽고 황량할 뿐이다.
분만의 그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절대적인 힘이 도왔음이 분명하다. 조상의 보살핌이었거나 종일 불경을 외며 기도하신 연로한 시어머니의 정성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세상을 알 만큼 알아버린 지금 똑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장담하지 못한다. 꽃잎처럼 여린 생명에게 첫 대면의 세상을 모질게 한 것이 미안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매사에 감사하지 않을 일이 없고 또한 겸손해야 하는데 더러 잊고 산 것 같다. 태어나게 해주어서 고맙고 탈 없이 태어나 주어서 너무 고마운, 우리 모녀는 서로에게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군자란> 중에서 -
행간에 넘치는 모녀의 따뜻한 애정은 차가운 겨울바람도 녹일 정도다. 현실을 직시하는 건강한 사유가 아름답다. 수필은 이렇듯 대상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이 돋보일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운명지워진 모든 것을 갈등 없이 수용하는 삶의 태도가 더없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이 수필은 모자지간의 운명적인 관계를 필연의 고리로 묶으면서, 동시에 모성원리를 예찬하는 글이다. “모성, 그 힘이라면 거친 세상의 돌부리인들 아픈 상처쯤은 거뜬히 치유해 줄 기적 같은 능력이 있다.”라거나, “세상은 어머니와 그 자식들로 생겨나고 그래서 희망이 있다.”는 주제의미화 진술에서 그녀의 운명론적 사상은 더욱 빛을 발한다.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수필이라면, 이런 유형의 글은 나름의 역할을 다한다. 우리의 삶은 많은 시련을 통해 완성된다. 생의 완성을 기대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의 깨달음에 이르는 일도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범함 자체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작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가치를 아는 자다. 이런 가치관의 정립에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순탄한 삶만큼 이상적인 인생은 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진행되어야 하는 우리의 삶에 둔덕이나 고랑이 전혀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엄청난 일을 만들어내며 사는 것 같지만 실제는 고만고만한 아픔과 애환을 갖고 산다. 이 사실은 때로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나 힘이 될 수 있다. 아픔을 혼자만이 지니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혼자만이 섬에 남았다는 고립감과 불안감을 해소해 줄 수 있다. <피지 않는 꽃>은 출생의 비밀을 앓고 가출해버린 아이의 이야기를 다룬 글이다. 영취산에서 가져온 들꽃 한 포기가 꽃을 피우지 못한 것에 착안하여,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외가에 머무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집을 나간 입양아를 수필로 승화시키는 그녀의 탁월한 상상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수필의 존재 가치는 이러한 데서 찾아야 한다. 김정자는 오늘 재봉틀 앞에 앉아서 남편의 바지와 자신의 치맛단을 개운하게 고쳤다. 어머니의 손을 닮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손등의 모양에다 장인의 솜씨까지 조금이라도 물려받은 것을 은혜로 알아야 한다.’는 진술에서 핏줄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모녀지간의 관계 설정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세계관 때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식이 빛을 발하는 수필 <동행> 속으로 들어가 보자.
위독한 시숙의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인 지하 전동차 안이었다. 앞에 마주 앉은 승객들의 시선을 피해 그들의 발치에 눈을 주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신들이 향하는 행선지나 눌러 딛고 있는 여러 사연들을 상상해 보았다. 내 앞에 있는 자동차 안의 신들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능글맞게 천태만상의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다소곳한 여학생의 운동화가 얌전하고, 건들대는 어깨의 청년은 신의 뒤축을 사정없이 구겨 싣고 있었다. 어디 좋은 약속이라도 있는지 자존심을 뾰족이 세운 숙녀 하이힐이 눈부시고 점잖은 척 까만 신사구두는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해도 한눈에 그들의 심중이 짐작이 갔다.
- <동행> 중에서 -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성찰은 김정자 수필의 깊이를 알게 한다. 그녀는 마음이 넓은 만큼 자상하고 세심하게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한눈에 그들의 심중으로 들어간다. 하버드대 쿠퍼랜드 교수는 훌륭한 수필가란 방랑자요, 구경군이요, 게으름뱅이라고 한 바 있다. 지하철 안에서 ‘신’을 바라보는 눈길과 그 의미화가 결코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김정자는 훌륭한 수필가의 자질을 이미 가졌다. “신은 한 사람의 생에 깊이 관여한다. 삶을 치열하게 분투해가는 가볍지 않은 현장에 묵묵히 동참한다. 섣부른 간섭도 걸림도 없이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는 같은 보폭으로, 걷거나 뛰면서 마른 길이든 진창길이든 같이 간다.” 이 부분은 ‘동행’의 진정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신’에 빗대어 동행의 의미를 멋지게 형상화하는 작가의 기량이 이 수필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참신한 비유와 암시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이 작품은 미학적 형상화가 잘 되었다. ‘아무리 좋고 심오한 정신이라 해도 땅을 딛고 선 발이 따라주지 않으면 공허할 뿐’이라는 인용도 매우 적절했다.
여성적 섬세함과 남성적인 강인함이 함께 공존하는 그의 글마당에 서면, 문체에서도 강한 힘이 느껴진다. 공존의 역학 관계를 ‘신’으로부터 걷어올리는 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따로'가 아닌 '함께'를 외치는 작가의 견고한 인성은 전통적인 가치관의 수용임과 동시에 동양적인 사상에 기반을 둔 듯하다. 우리 사회의 갈등은 거의 자리다툼이요, 위계질서의 파괴로부터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서양의 가치체계는 '나'의 개체를 최소한 '너'와 같은 동격으로 내세우거나, '너'보다 높게 설정하는 것이다. 내 주변보다는 내가 우선되는 게 상식이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한국적 정황과 현실 속에서 인간의 도리와 규범을 설정하려 한다는 점이다. 공존의 전제는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양보 정신이요, 비움의 철학이다. 그녀는 어지러운 현관의 신발을 통해, 복잡한 우리 삶의 모습을 본다. 나름의 소임을 다해 세상에 대해 부끄럽지 않으면 그것으로 자랑스러울 수 있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김정자의 글이 갖는 매력은 ‘동행’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길도 못갈 길을 없다‘고 부르짖는 믿음이 전제된 과감한 용기에 있다. 부드러운 외면에 강한 내면이 있어 더욱 믿음직스럽다.
VI. 닫으며
김정자의 수필세계는 확실히 열려 있다. 거창한 주제나 독특한 제재의 발견이 아니라 관조의 참신함과 발상의 신선함이 수필의 바탕이 되고 있다. ‘거울’을 보고, 동행이 될 ‘신’이 있다면, 어떤 ‘길’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김정자의 인생길의 전도는 밝을 것이다. ‘떠남’, ‘비움’, ‘성찰’, ‘관조’로 버물어진 그녀의 수필은 견고한 자화상을 구축하면서, 미적 형상화는 물론 사유의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안도감을 갖게 하는 것은 생태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그녀의 긍정적 세계관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미적으로 잘 승화시켜내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자 수필의 강점은 읽는 맛에 있다. 지금이 수필의 시대라 하지만, 수필에 대한 세인의 평판은 썩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우리 수필이 독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김정자 수필과 같이 인간적인 향기와 잘 발효된 맛이 있어야 하고, 새롭고 참신한 인식의 세계를 독자에게 제시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녀의 수필세계는 활기에 찬 싱싱한 언어들의 놀이터다. 싱그러운 감성과 순수 서정이 조화를 이룬 생수 같은 인정의 샘터다. 그윽한 종소리 들리는 새벽이 여는 아침 햇살 같은 따스함의 세계를 표방한다고 하겠다. 그녀의 문학적 바탕이 견고한 만큼 그녀가 보여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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