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는 어질지 않다
천지는 어질지 않다./만물은 지푸라기 강아지처럼 다룬다.
성인 聖人은 어질지 않다./백성을 지푸라기 강아지처럼 다룬다.
하늘과 땅 사이는/마치 풀무와도 같다/텅 비어서 작용이 끝날 줄을 모른다.
움직일수록 더욱 내뿜는다./말이 많으면 끝내 궁지에 빠진다.
―노자, 《도덕경》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가 바로 이와 같다. 우리가 자연은 ‘세계’라고 부를 때 이미 우리는 우리 삶의 터를 기대하면서 이름을 지었다. 본디 자연自然은 ‘스스로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 이와 달리 세계世界는 ‘세’자가 시간을 가리키고 ‘계’가 공간을 가리키니 살아가는 터에 나름대로 경계를 지어 이웃도 있고 원수도 있는 ‘삶의 때와 곳’을 뜻한다. 그저 무색무취한 자연이 아니라 우리 삶을 위한 시공간의 울타리로서의 세계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우리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말하자면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연의 인격화’ 또는 ‘의인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대목에서 종교적 ‘유용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우리가 종교적인 인간으로서 기도하는 것은 자연세계에서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초자연적인 힘에게 비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기도를 통해 초자연을 불러들이면서 결과는 자연적인 차원에서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앰브로즈 비어즈Ambrose Bierce가 쓴 《악마의 사전》에서도 기도에 대해 정의하기를, “스스로 가치 없다고 자백하는 단 한 사람의 탄원자를 위하여 우주의 법을 무효로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탄원이 효력을 발휘하여 우주의 운행을 정지시킨다는 것이다. 그것도 극적으로 대비하고자 기도하는 사람은 ‘스스로 보잘 것 없고 티끌만도 못한 것’이라고 고백하는데 막상 그가 원하고 비는 것은 뜨고 지는 태양을 멈추게 해달라는 수준이라고 비판하다. 인간은 한 방울의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런 인간을 온 우주가 삼킬 수 없다고 한 파스칼의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야말로 온 우주가 인간의 기도에 따라 춤을 추고 널뛰기를 해야 할 듯도 하다.
그러자 노자는 천지가 그렇게 어질지 않다고 했다. 어질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수많은 자연재해나 인재가 일어날 때 우리는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마냥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지구 중력을 멈출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재난들을 되돌려 건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상상을 해보지만 이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지구의 중력을 언제나 무심코 작동한다. 착한 사람이라고 살려주고 약한 사람이라고 내팽개치지 않는다. 이것은 ’맹목적 필연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연은 눈을 갖고 있지 않아서 차별하지 않을뿐더러 언제나 반드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맹목적 필연성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 터전이 된다. 필연이 자유의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 없이 언제나 반드시 그러하니 자유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자연이 인격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우리에게 언제나 좋게 움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만일 자연이 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고 우리의 자유는 오히려 억압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맹목적 필연성’이기에 많은 비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대로 살아간다. 세상은 철저한 무인격성이다. 그러나 무인격적이어서 오히려 다행이다. 여러 말하면 더 복잡하게 꼬인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재현, 『인생의 마지막 질문』, 「무엇이 먼저인가」, 청림출판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