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때 시전 설립된 이후 조선 후기에는 종로4가 예지동 梨峴(배오개)시장, 남대문 밖 봉래동에 칠패시장
등 조선후기 3대 시장을 형성하였다.
개항 이후 칠패시장은 남대문 도시계획사업으로 선혜청 내로 옮겨져 남대문시장으로, 이현시장은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하며 동대문시장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1914년 조선총독부령 ‘시장규칙’을 반포하여, 1호 조선전통시장과 일제 설립의 2.3.4호
신식시장으로 편제되었는데 2호시장은 공설시장, 3호시장은 경매시장, 4호 시장은 곡물현물, 유가증권
현물거래시장으로 구분된다. 서촌코스의 통인시장은 1941년6월에 설립된 제2호 공설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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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로, 한 일간신문 기사에 나온 시장의 변천 과정을 참고해 보면,
市廛 또는 六矣廛은 정부 승인을 받은 궁궐을 비롯한 관아에 물건을 공급하던 상인들이다.
이들은 정부 허가를 받지 않은 가게인 亂廛을 단속할 권한인 禁亂廛權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정부에서 군사력 동원이 필요했고, 그 군인들의 군복 제조에 필요한 옷감을 거래하는
장터로 종로거리에 광장시장이 생겼다고도 한다.
그후,
1896년 10월부터 '皇都건설사업'으로 종로 일대의 가건물을 철거하고, 11월 하순에는 도로를 정비했다.
1898년 초에는 한성전기회사가 종로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전차궤도 부설을 착수했다.
이에 따라 종로에서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거리에 새로운 상점, 회사들이 들어섰다.
1897년 광교 옆 대한천일은행 사옥을 비롯해 각종 회사, 상회가 종로 길가에 등장했다.
1899년에는 명함 인쇄를전문으로 하는 鐘路開文社, 약재를 취급하는 藥材會社 및 종로의약회사 등이 점포를 냈다.
1900년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약재상인 濟生社가 들어섰다.
그러나 1905년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단행한 화폐개혁과 재정개혁으로 종로 상권은
큰 피해를 보며 전통적인 시전 형태였던 점포는 주단포목상, 양화점, 잡화상, 양복점, 권연(卷煙)제조소
등으로 변신했다.
규모가 큰 시전들은 ‘회사’라는 형식으로 갈아탔다. 서구의 회사제도와 자본주의 경제사상이 유입되면서 민간인
다수가 자본을 모으는 衆人合資식 상업회사를 설립하는 방안이 전통의 종로 시전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시전은 먼저 가족·동족끼리 자본금을 모아 가족기업·동족기업 형태의 상점을 설립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1905년 일본인들이 남대문시장 경영권을 장악한 뒤 상권을 종로 쪽으로 넓혀오자 조선 상인들이 시장을 세웠다.
박승직·김종한·박기양 등 '광장주식회사'(명칭은 '동대문시장')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박승직의 彰信社를, 1907년에는 30~40명의 포목상과 함께公益社를 설립했다.
1910년대 중반부터 종로 거리 곳곳에 신식 건물이 조선인들에 의해 지어졌고, 간판도 내걸리기 시작했다.
1920년대 조선인 상업회사는 종로 2정목(현 종로2가), 남대문통 1정목, 다옥정(현 다동)에 2곳씩 들어섰다.
1930년대 조선인 상업회사는 남창동, 낙원동, 태평로 등에 세워졌다.
1938년 당시 상업자본의 규모가 컸던 조선 상인으로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유한양행(柳韓洋行)의 유일한,
대창사의 백락원 등이었다.
종로뿐만 아니라 조선 제일의 상업회사 화신연쇄점은 박흥식이 대표였다.
박흥식은 평남 용강 출신으로 1926년 7월 상경하여 종로 2정목에 선일지물을 창설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히라다(平田), 쵸지야(丁子屋 후일 미도파), 미나카이(三中井), 미츠코시(三越 후일 신세계)
같은 일본인 백화점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종로의 상권은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일본 상권에 대응하여 종로에서는 최남의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와 신태화의 和信商會가 백화점
수준에 근접한 조선인 대형 상점으로 부상했다.
미모의 '데파트-껄' 보려는 남성들…'자만추' 핫플 된 백화점 | 중앙일보 (joongang.co.kr)
이후 경영난에 빠진 화신상회를 1931년 9월 15일 박흥식이 인수하여, 1932년 5월 10일 콘크리트 3층 건물
(약 500평, 남녀종업원 153명)의 화신백화점으로 출범시켰다.
박흥식은 자신이 만든 학교를 전투기 생산 인력 양성소로 바꾸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해 광복 후
반민특위의 1호 체포 인물이 되기도 했다.
박흥식은 1934년 6월 15일 전국 각지에 연쇄점을 설치할 계획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350개의
화신연쇄점이 개설되었다. 연쇄점이란 소매방식의 체인으로 최초로 근대 프랜차이즈가 시작되어 조선 최대의
상업회사로 성장한 것이다. 근대 조선의 경제는 종로에서 싹을 틔운 뒤 자라나기 시작했다.
일제 상권 침략에 맞서, 조선 상인들 광장시장 세웠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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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廣藏市場 의 공식 명칭은 ‘동대문시장’이었다.
1960년 전반까지만 해도 예지동의 전통적 시장은 동대문시장으로 호칭되었으나, 월남인, 피난민,
이농인들이 모여 들며 종로 5.6가의 시장이 성장. 발달하면서 상권이 동대문 쪽으로 확대 된다.
1970년 말에는 동대문 종합시장이 건립되면서 동대문 일대의 시장의 명칭은 자연스럽게 예지동의 광장시장,
종로5가의 동대문시장, 종로6가의 동대문종합시장으로 구분된다.
그후 동대문 일대에 새로운 쇼핑건물이 들어서면서 동대문시장은, 좁은 의미로는 종로5가의 동대문시장, 종로6가의
동대문종합시장,동대문쇼핑타운 등 종로 5가에서 동대문에 이른는 지역을, 넓은 의미로는 광장시장부터
종로5.6가 일대, 청계천.을지로.신당동 일대의 각종 평화시장 등 까지 포함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 : '서울의 市場'.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첫댓글 전부터 '시장'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로' '서촌' 해설시 방문객들이 '남대문시장'과 '통인시장'에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