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장 천리향토파, 죽음의 땅! -1
죽음의 검무(劍舞)는 근 한 시진 가량을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행진이 이어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천리황토파 위로 무서운 정적이 내려 앉았다. 광란하던 소
떼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살아 남은 기마대의 말들도
모두 흩어지고 없는데....
아! 보라!
천리황토파 위로 비에 젖은 채 서 있는 단 한 명의 인영, 바로 백
리천이 아닌가! 그리고 처참하리만큼 쌓여있는 일천 인 흑립검수
들의 주검.
아아, 이것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지옥도(地獄圖)였다. 끊어진
팔 다리와, 여기저기 널려있는 몸통 없는 목들, 그리고 피
(血).... 이곳이 바로 지옥이련가?
백리천은 우뚝 서 있었다. 허탈한 표정,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
무엇을 생각하고 있음인가? 일천 인의 시체를 밟고 서 있는 그의
기태는 정녕 쓸쓸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백리천의 전신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
다.
쏴아아...!
장대같은 비는 그 피(血)를 백리천의 뼈속 깊이 스며들게 하려는
듯 그의 전신을 적시고 있었다.
"도, 도련님...!"
천해산이 한 마리 거대한 황소를 타고 달려왔다.
"다치신 데는...?"
"...."
천해산은 왠지 가슴이 아파옴을 느껴야 했다. 일천 인의 목숨을
앗은 어린 주인 백리천의 눈에 허탈과 짙은 고뇌의 빛만이 떠돌
고 있었던 것이다.
백리천은 한 자루 소검(小劍)과 대검을 나눠 쥔 채 언제까지 말이
없이 서 있었다.
"도, 도련님!"
천해산이 안타까워 자신도 모르게 재차 소리쳤다. 순간, 백리천의
눈빛이 담담해지며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두 자루 검을 내려다
보았다.
이때 백리천의 눈에 더욱 암울한 빛이 스쳐가지 않는가!
백리천의 눈에 이채가 떠오르는 것을 깨달은 천해산이 머리를 흔
들며 눈을 돌렸다.
"크흐흐, 또, 또 있었군!"
그들의 전면, 천리황토파의 한 쪽에 마치 땅에서 솟아난 듯 십삼
인(十三人)의 붉은색 장포를 걸친 혈립(血笠)인들이 나타나고 있
었다.
"기도로 보아... 제법하는 자들이로군."
백리천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그렇다!
십삼 인의 혈립인들, 그들의 전신에는 살기가 충만해 있었는데 단
지 살기만으로도 범인들로선 견디기 힘든 정도였다. 여기에다 그
들의 신법은 마치 유령과 같아서 십삼 인이 동시에 나타나는 데에
도 일체의 기척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지극히 조용했다. 허나 백리천과 천해산이 그들
의 모습을 발견한순간 그들의 신형은 이미 백리천의 삼 장까지 다
가와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 힘차게 수놓아져 있는 <군(軍).> 이라는 글귀를 발
견한 백리천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으음... 천군단에 이토록 가공할 고수들이 있었던가...?"
백리천은 붉은색 장포의 혈립인들이 이미 보통의 무공을 지닌 인
물들이 아님을 직감하고 천군단대실요를 뇌리에 떠올렸다.
혈립 뒤로 휘날리는 흑발, 그들의 체구는 모두 위맹했다. 게다가
그들은 손에 각기 검집이 없는 홍광(紅光)이 번뜩이는 장검을 쥐
고 있었는데 그 형색이 어찌보면 기이하기까지 했다. 그 기이한
느낌은 느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정녕 오금
이 저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무거운 공포를 안겨주는 것이었
다.
스스슥!
일렬 횡대로 다가오고 있는 그들의 포진(布陣)형태를 눈여겨 보던
백리천의 눈에 문득 기광이 스치고 있었다.
'단순히 벌어진 것 같은 저 검진(劍陣)... 허나 한 치의 틈도 없
다!'
느껴지는 것은 가공할 살기 뿐이었다.
헐렁한 붉은색 장포 속에 발끝까지 가리고 있는 혈립인들, 이들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비는 서서히 걷혀가고, 암운(暗雲)에 가려 있던 반월(半月)이 다
시 월광(月光)을 뿌려내기 시작했다.
"훗! 그대들의 눈에는 홍광(紅光)이 깔려 있군!"
문득, 백리천은 자신을 포위해드는 혈립인들을 담담히 쓸어보며
사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후, 이는 곧 마공과 사공을 최극강으로 연성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지."
"...!"
천해산은 백리천의 명에 따라 십여 장 밖에 서서 관전하고 있었
고, 혈립인들은 묵묵히 백리천을 가운데에 두고 원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천군단에는... 마공을 익힌 자들은 없다!"
툭... 투툭!
백리천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하는 한편 소검과 장검의 검집을
빼 다시 지면에 떨어뜨렸다.
"음...!"
혈립인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훗! 그대들이 지금 펼치고 있는 검진은.... 마교의 사사초혼진
(四死哨魂陣)이로군."
"으음! 그대는 아는 것이 너무 많군!"
이어지는 백리천의 말에 한 명 혈립인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차
가운 음성이었으나 놀람이 가득해 있었다.
'마교, 마교가 중원에...!'
한편, 백리천은 그 나름대로 내심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중앙의 한 혈립인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뻗어 나왔다.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하겠군."
"훗! 나에게 마교의 비전절기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물으려 하
느냐?"
백리천이 비릿한 조소를 날렸다.
"크흐흐흐, 마교에 관한 것은 너희들 교주보다 우리 도련님이 오
히려 더 잘 알 것이다."
이때 한곁에 서 있던 천해산 역시 조소를 터뜨렸다.
천해산의 말은 사실이었다. 백리천은 이미 금천대해궁의 구십 번
째의 황금기둥에서 마교의 밀전무공이나 그들의 특징을 자세히 알
아두지 않았던가! 금천대해궁의 구십번째 황금 기둥, 그곳에는 마
교의 제일대교주 파극찰의 모든 것이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헌데 십삼 인의 혈립인들은 바로 마교에서 파견한 죽음의 사자들
이었던가?
"후후후, 그대들이 천군단의 복장으로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겠다.
그대들이 꿈꾸는 이이공이(以夷功以)의 계략은 내가 익힌 일만 계
략 중 삼류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든 걸 단숨에 파악한 백리천이 차갑게 외치며 검을 세웠다.
"으음...!"
"으...!"
십삼 인의 혈립인, 마교 십삼수라존의 경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
다. 백리천이 자신들에 대해 너무도 자세히 알고 있음을 느낀 것
이다.
그들의 눈에 무서운 살기가 맺히고, 그들은 일제히 검을 겨누었
다. 헌데 그들이 검을 겨눈 방향은 각기 틀렸다. 백리천을 향해
겨누지 않고 모두 십삼 개의 방위를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들 중 칠 인의 검이 서
서히 혈홍색(血紅色)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나
머지 칠 인 중 오인은 짙은 청색으로, 그리고 이 인은 백광을 뿜
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훗!"
백리천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은 제법 한 가닥 하는 자들이었군. 사검십이채(死劍十二
彩)를 익혔다니 마교에서의 위치가 평범하지는 않겠군."
"헉!"
'아, 아니! 저자가 정녕 본교의 최고 무학까지 한눈에 알아보다
니...!'
마교 십삼수라존은 경악으로 몸을 떨었다.
- 사검십이채.
이것은 마공을 극성으로 익힌 자만이 연성할 수 있는 필살의 검공
(劍功)이었다.
마교의 구백마공(九百魔功) 중 최강의 마공, 이것은 그 마공의 성
취에 따라 검의 색이 변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검에 진기를 주입
함에 따라 자신의 성취가 검의 색깔로 나타나며 그 현란한 광휘는
상대의 심기를 흐트려 놓는 것이었다.
"후후후, 사검십이채의 최고경지는 검의 색이 죽음의 색인 흑빛으
로 빛나는 것이었던가?"
백리천이 조소와 함께 두 자루 검에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자루 소검과 대검이 서서히 묵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니...! 저럴 수가!"
"저, 저것은 대교주만이 완성한 최고의 경지!"
마교십삼수라존의 입에서 일제히 놀람에 찬 외침이 터졌다.
<사검십이채.>
이것은 모두 열두 가지의 색으로 그 성취가 나타난다.
청(靑), 홍(紅), 백(白) 등등.... 그 최고의 경지는 짙은 묵광이
뿜어지는 것인데 마교에서도 아직까지 이 단계에 이른 인물은 많
지 않았다.
"후후, 오너라!"
백리천의 전신에서 지독한 살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순간, 당황
에 차 몸을 떨던 마교 십삼수라존이 얼굴을 굳히며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휘리리릭!
동시에, 무서운 검강이 휘황한 광휘와 함께 백리천의 전신으로 쇄
도해 들었다. 사검십이채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러한 신비하고 괴
이한 광휘때문이었다.
그 빛을 대한 사람은 눈을 뜰 수가 없음은 물론 싸우는 도중에 기
이한 환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었다.
꽈아아...!
사사초혼진, 그리고 사검십이채의 발동에 따라 순식간에 무수한
아수라마황(阿蓚羅魔皇)의 형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흑영사(黑影死)!"
백리천의 입에서 장소성이 터졌다. 동시에, 그의 전신이 묵광에
휩싸이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헌데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교십삼수라존의 검이 일
제히 백리천의 주위를 회전하며 가공할 살기를 토해 놓지 않은가!
카앙!
카카카카캉!
무서운 불꽃이 작렬했다. 한 가닥 돌풍이 일어 시야를 가렸다.
"지옥암천혈(地獄暗天血)!"
번쩍!
찰나, 흙먼지 속에서 백리천의 우렁찬 음성이 터지며 한 가닥 묵
광이 천공을 갈랐다. 보이는 것은 묵광으로 찬란한 검영(劍影)뿐
이었다. 백리천의 검은 그 순간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으악...!"
"큭!"
연이어 비명성이 터졌다.
털썩!
쨍그랑!
격돌음이 아닌 기음이 그 뒤를 이어 꼬리를 물었다.
아아! 실로 놀라운 광경, 마교 십삼수라존의 오른손이 검과 함께
지면을 구르고 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헌데 더욱 놀라운 일은 단 한 방울의 피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었다.
백리천은 어느새 지면에 우뚝 내려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은은히
감탄의 빛이 스러지고 있었다.
"놀랍군. 그 짧은 순간에 지혈(止血)을 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다니!"
"...!"
마군 십삼수라존은 순식간에 검과 오른손을 잃고도 검진을 풀지
않고 있었다. 실로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찰나, 마교 십삼수라존의 흑발이 일제히 흘러 내렸다. 그들의 손
에는 혈립이 쥐어져 있었다. 혈립을 벗자 흑발이 제멋대로 휘날리
며 흘러내린 것이었다.
"후후, 혈립(血笠)을 무기로 사용하려 하는군. 마화비혈륜(魔花飛
血輪)까지 익혔는가?"
왼손에 각자의 혈립을 쥔 채 서 있는 마교 십삼수라존을 바라보며
백리천이 냉소했다.
"헉! 모르는 것이 없구나...!"
"그, 그대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다지 모르는 것이 없단
말이냐!"
마교 십삼수라존의 경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도련님, 금룡마륜(金龍魔輪)이 갑니다."
이때, 천해산이 상대가 륜(輪)을 사용하려는 것을 보고 백리천을
향해 하나의 륜을 던졌다. 검에는 검(劍), 륜(輪)에는 륜. 천해산
은 이미 백리천의 성격을 낱낱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금, 금룡마륜!"
마교 십삼수라존 중 누군가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 금룡마륜.
이것은 일천오백 년 전의 금룡마륜제(金龍魔輪帝)의 독문병기가
아닌가!
금룡마륜제는 륜(輪)을 생명처럼 아꼈던 륜공(輪功)의 대가로써
금천대해궁의 일백이십일번째의 황금기둥에 한을 남긴 사람이었
다.
파파파파파아!
쏴아아!
십삼 개의 혈륜이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난비(亂飛)했다. 마교 십
삼수라존은 이미 자신들에게 승산이 없음을 알았으나 죽음을 각오
하고 혈륜을 뿌려낸 것이었다.
"흐흐흐...!"
백리천의 입에서 잔혹한 미소가 떠돌고, 또 다시 그의 전신에서
죽음의 음향, 해파대설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백리천이 사이한
미소를 띠우며 우수(右手)와 좌수(左手)를 쭉 뻗었다.
휘리릭!
휘이익---!
순간 무섭게 난무하던 열세 개의 혈륜이 백리천의 수중으로 빨리
듯 회수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열세 장의 접시를 들고 있는 듯
너무도 태연한 자세였다.
마교 십삼수라존은 자신들이 전력을 다해 뻗어낸 혈륜이 너무도
간단히 백리천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가자 입을 딱 벌렸다.
"가라, 금룡탈혼륜(金龍奪魂輪)!"
그 순간 죽음의 음성이 그들의 귀로 파고 들고 있었다.
파악!
삭... 사삭!
피가 튀었다. 무서운 피의 분수가 월광을 가렸다.
"허억!"
단 한 마디의 비명이 있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살아 있는 자의 비
명성이었다. 단 한 명, 단 한 명만을 남기고 십이 인이 순식간에
목이 베어져 죽어가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마교 십삼수라존 중에 살아 남은 단 한 명의 수라존은 너무도 놀
라 아예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라! 그리고 가서 전하라! 마교의 삼차 중원 침공은 이제 끝났
다. 나 천마대해존 백리천이 그대들을 정벌하기 위해 곧 마교로
가리라!"
그의 귀에 환상처럼 백리천의 음성이 파고 들었다.
어느새 월광이 빛바래 있었고..., 비는 이미 그친 지 오래였다.
백리천은 마교십삼수라존 중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아 힘없이 멀어
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리의 쾌감이 느껴지기 전에 심신의 피로함을 먼저 느끼고 있음
인가? 또 다시 그의 얼굴 위로 암영(暗影)이 떠오르고 있었다.
헌데 이때였다.
돌연 천리황토파의 저 끝에서 황토 먼지와 함께 일진의 굉음이 진
동하지 않은가!
"또, 또 있었는가...!"
백리천과 천해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천리황토파, 이 죽음의 땅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은 진정 언제
나 끝이 난단 말인가?
두두두두...!
히히힝!
순식간에 엄청난 수효의 기마대가 천리황토파를 메우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엄청난 대군(大軍)이었다. 천리황토파의 한쪽 끝
을 완전히 뒤덮은 기마대의 모습은 어찌보면 일대장관이랄 수 있
을 정도였다.
"히야...!"
대략 한눈으로 쓸어 보아도 족히 일만은 넘을 듯한 엄청난 기마대
를 보고 천해산이 놀라기에 앞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무섭게 밀려
들고 있는 엄청난 수효의 기마대의 기세가 오히려 공포조차 느껴
지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제기랄, 이제 아주 천리황토파를 사람으로 메우려 하는구나!"
두두두...!
엄청난 기마대는 순식간에 백리천의 이십여 장 전면까지 짓쳐들었
다.
"저들의 복장은 중원인의 것이 아니다."
헌데 다가오는 그들을 유심히 살피던 백리천의 눈에 의혹이 스치
지 않는가!
그렇다!
새로 나타난 기마대의 마상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복장은 분명 중
원인의 것이 아니었다. 현란한 원색에 반쯤 드러난 상체, 그들이
비스듬히 어깨 한쪽에 걸치고 있는 것은 짐승의 가죽으로 엉성하
게 만든 이민족의 의복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그들이 타고 있는 말 또한
대초원의 특산품인 대완구(大腕驅)였다.
일견해 무지막지해 보이는 행색이 아닌가!
"...?"
백리천의 눈이 선두의 눈처럼 흰 백마를 타고 질주해 오고 있는
이국소녀를 직시했다. 놀랍게도 그들의 선두에는 채 이십도 되지
않았을 묘령의 미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역시 짐승의 가죽을 걸치고 있었고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
는데 기실 벗은 몸이나 진배 없었다.
약간 그을린 듯 윤기 흐르는 까만 피부, 거친 태도로 백마를 향해
채찍을 휘두르는 소녀의 용모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지극히 열
정적이라고 할까? 불타오르는 젊음과 야성미,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의 아름다움이 묘하게 어울려 진정 보는 이의 심혼을 뒤흔들
정도였다.
"저 여인은... 영매와 많이 닮은 듯 하지 않느냐?"
백리천은 그들의 태도에서 적이 아님을 느끼며 긴장을 풀었다.
"크흐흐흐, 그렇군요. 조금 더 거칠고... 조금 더 익었을 뿐이지,
사라빈영 낭자하고 꼭 닮았는데요."
천해산 역시 긴장을 풀었다.
파아아...!
쐐애애액!
헌데 돌연, 이십여 장으로 다가든 미소녀의 손에서 돌연 청광이
쭉 뻗어와 천해산의 가슴을 휘감지 않는가! 놀랍게도 그것은 이국
미소녀가 들고 있던 채찍이었다.
두두두두두...!
히히힝!
순식간에 삼 장 앞에서 미소녀의 말이 발굽을 허공으로 치키며 멈
춰졌다. 그러자 그 뒤를 따르던 일만여 기도 일제히 멈춰섰다. 일
순간에 칼로 자른 듯, 일만여기가 질주하던 것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기마술이 이미 최고의 경지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천마대해존! 그대는 말버릇이 고약한 수하를 두었군요."
휘익!
눈처럼 흰 짐승 가죽으로 만든 짧은 반바지를 입은 미소녀가 백리
천 앞에 멈춰섰다. 그녀의 한 손에는 채찍이 들려 있었는데 그 한
끝은 천해산의 가슴을 때려낸 후 이미 그녀의 손목에 감겨가고 있
었다.
'음...!'
돌연 출현한 이국 미소녀의 모습을 본 백리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쪽 어깨에서 비스듬히 가로 질러 걸쳐 있는 옷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의에 하의마저 짧은 반바지로써 그녀의 흑대리석같은 지체
(肢體)가 그대로 드러나 있지 않은가!
한쪽 어깨와 겨드랑이에서 이어지는 젖가슴의 곡선, 그리고 허벅
지까지 드러나는 그녀의 옷은 입었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으음! 아름답군!'
백리천은 가슴이 진탕되어옴을 느끼며 눈을 돌렸다. 발랄함과 거
친 야성미를 동시에 풍기는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실로 눈이 아찔
할 정도인 것이다.
이때, 졸지에 한 대 얻어맞은 천해산은 노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변하고 있었다.
"호호호, 아직도 제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없다니!"
이국 미소녀의 눈이 앙칼지게 치켜 떠졌다.
촤악!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채찍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헉!"
천해산의 거구가 황급히 움직였다.
이국 미소녀는 마상에 앉아 오연히 천해산을 바라보며 무서운 공
세를 쳐냈다. 허나 천해산은 비록 거구라 해도 행동조차 느리지는
않았다.
'제기! 이 계집애가 분명히 사라낭자의 언니일텐데 자매간에 성격
이 이렇게 틀리다니...!'
천해산은 내심 이렇게 투덜거리며 뻗어오는 채찍을 한 손으로 휘
감았다. 그의 이 한 동작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절묘한 것이었다.
채찍이 팽팽해졌다.
"호호호, 미련한 곰같은 놈! 어디 한 번 당겨보아라!"
이국 미소녀는 천해산이 자신의 채찍을 잡자 놀람을 금치 못했다.
허나 그녀는 오기가 치솟는 듯 채찍을 잡아당겼다.
"크흐흐흐...!"
힘이라면 누가 천해산을 당할 수 있으랴! 천해산은 괴소를 터뜨리
며 힘을 썼다.
순간, 이국 미소녀의 몸이 말과 함께 딸려오지 않는가!
'과, 과연 천력(天力)을 지닌 자로다!'
이국 미소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산아야! 막천관주께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
백리천이 나직이 외치며 천해산의 행동을 제지했다. 천해산은 불
평이 가득한 얼굴로 채찍을 놓았다. 그러자 말과 사람이 다시 밀려
갔다.
"...!"
"...!"
이국 미소녀, 막관관주 사라청이 내심 혀를 내두르며 백리천을 응
시했다. 그녀는 바로 막관의 야생화라는 막관관주 사라청이었던
것이다.
두 개의 눈이 얽혔다.
헌데 이 순간 백리천을 훑어보는 사라청의 눈빛이 보이지 않게 흔
들리고 있지 않은가!
'이, 사내가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은 천마대해존...? 헌데 너무
잘생겼다!'
"관주! 어떻게 이곳을...?"
백리천은 그녀의 눈빛이 기이해짐을 느끼며 짐짓 입을 열었다.
"호호호, 천마대해존, 그대는 아직 살아 있었군요. 영아가 하도
안달을 하기에 그대를 살리고자 장성을 넘어 왔는데...!"
<사라청.>
막관의 패주이자 흑진주.
남성다운 기질을 지닌 소녀로써 남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소녀였
다. 기실 그녀는 동생 사라빈영의 간절한 청으로 백리천이 천군단
과의 대혈투를 벌이는 것을 도와 주려고 달려온 것이었다.
"음! 영매가!"
백리천이 새삼 사라빈영의 영상을 떠올렸다.
"듣기에 이곳으로 천군단의 일천 정예가 파견되었다고 하던데...?"
이때, 사라청은 의혹과 함께 천리황토파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내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그녀는 이제야 천리황토파
의 위에 묻힌 듯 널려 있는 일천 인의 시신, 그리고 말과 소들의
처참한 잔해를 발견한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보이는 것은 모두 끊어진 팔다리와 수급, 그리고 흘러나온 창자
등이다. 황토의 색이 더욱 진해진 것은 바로 그들의 피때문이 아
니겠는가!
'으음...!'
사라청은 이 처참한 광경에 몸을 휘청였다. 그녀가 제아무리 활달
하다 해도 소녀는 소녀인 것이다.
"...!"
그녀의 경악어린 표정을 보고 백리천이 쓸쓸하게 웃었다.
문득, 백리천의 눈에 기광이 스쳤다.
"관주! 수하들을 잠시 물러나 있으라고 해주시겠소?"
"...!"
"내 손에 죽은 사람들을... 내가 처리하고 싶소."
백리천의 전신에서 더할 나위 없는 고독이 묻어났다. 백리천의 이
런 기세는 보는 이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억압하는 것인지라 사라
청은 수하들을 지휘해 천리황토파의 한쪽으로 물러났다.
백리천이 일천 인의 시신이 널려 있는 처참한 황토를 전면으로 하
고 우뚝 섰다.
'내 손에 고혼이 된 그대들이여! 부디 나만을 원망해다오! 천하를
위하여... 천하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그대들은 제물이 될 수 밖
에 없었음이다!'
백리천은 먼 허공을 응시했다.
무엇을 하려함인가?
'이제 그대들의 시신을 거두노라! 부디 극락왕생 할지어다!'
백리천의 입에서 우렁찬 대갈이 터져 나왔다.
"마등굉폭염!"
화르르...!
순간, 그의 품 속에서 엄청난 마화가 치솟았다. 구주벽화유황등이
다시 엄청난 마화를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엄청난 지옥의 불길, 천리황토파는 이내 가공할 불길로 이글거리
고, 그 엄청난 불길은 수많은 시신들을 한꺼번에 태우기 시작했
다.
마염은 방원 수백 장을 덮으며 이글거렸다. 백리천은 자신의 손에
죽은 일천 인을 화장(火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마등굉폭염, 천리황토파의 지형을 바꿀 정도로 거세게 타오르며
일천 인의 고혼을 영생(永生)으로 인도할지니....
백리천의 뒤로 한 인영이 다가들었다. 바로 사라빈영이었다.
"가가...!"
그녀는 너무도 쓸쓸해 보이는 백리천의 등에 자신의 얼굴을 가만
히 대고 있었다.
"영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사라빈영은 백리천의 마음을 어루만지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
웠다.
하늘을 태울 듯 솟아오르고 있는 구주벽화유황등의 마화 앞에서
두 인영은 언제까지고 서 있었다.
월광(月光)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헌데, 그 아래 천리황토파에 언제 세워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수천여 개의 빠오(=천막)가 기경을 이루며 펼쳐져 있지 않은가!
천막의 대해(大海), 그것은 바로 막천관의 수하들이 임시로 기거
하기 위하여 펼쳐 놓은 것으로써 일대장관이었다.
밤은 깊어 이미 삼 경을 지나고 있었는데 수천여 개의 천막 중 중
앙에 위치해 있는 가장 호화로운 천막 속에 백리천과 사라빈영이
앉아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사라빈영은 안타까움의 탄식을 흘려냈다.
"가가...! 몸을 씻으셔야...!"
"됐소."
백리천이 고개를 저었다. 백리천의 전신은 기실 피로 물들어 있었
고 머리칼에조차 말라붙은 선혈이 엉켜 있었다.
"아니예요. 몸을 씻으시고... 휴식을 취하신 후 천군단으로 가셔
야 되잖아요."
"...!"
"가가!"
"...!"
"제가... 씻어 드릴까요...?"
사라빈영이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음...!"
백리천이 나직이 침음성을 흘려냈다.
"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사라빈영은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조용히 걸어 나갔다. 다시 들어
온 그녀의 손에는 깨끗한 장삼 한 벌과 수건, 그리고 물이 가득
담겨 있는 은반(銀盤)이 들려 있었다.
"가가...! 옷을...!"
사라빈영이 문득 얼굴을 붉혔다. 백리천 앞에 조용히 서서 홍조를
띠운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었
다.
'으음...!'
백리천은 가슴이 진탕되어옴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거침없이 스스로의 옷을 벗어 내렸다. 기실 그 역시 피에 절어 있
는 의복과 몸을 닦아내고 싶었다.
건장한 상체, 백옥같은 피부가 드러났다. 무심코 눈을 들던 사라
빈영의 내심으로 탄성이 흘렀다.
이어, 백리천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하의마저 벗어내리기 시
작했다. 사라빈영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백리천과 사라빈영은
마주 서 있었고, 백리천의 하의가 숙여진 그녀의 눈아래서 스르르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백리천은 목덜미까지 붉어진 채 눈을 들지 못하고 있는 사라빈영
을 직시했다. 그는 이미 완전한 나신(裸身)이었다.
아아! 남성의 육체를 두고 아름답다는 표현을 할 수도 있는 것일
까...? 백리천의 나신은 정녕 너무 완벽했다. 흠집 하나 없는 깨
끗한 피부, 알맞게 자리하고 있는 군살 하나 없는 팽팽한 근육.
그리고 대리석 기둥인 양 힘차게 뻗어내린 두 다리의 각선....
사라빈영의 눈이 좁혀졌다. 그녀는 눈을 들어 백리천의 전신을 살
피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허나 소녀의 몸으로 어찌 그
같이 대담할 수 있으랴!
"영매!"
백리천이 우뚝 선 자세 그대로 사라빈영을 향해 부드러운 음성을
흘려냈다.
"예...!"
사라빈영의 음성이 기어들어 갔다.
"몸을 씻어 준다고 하지 않았소?"
백리천이 미소했다. 대담한가 했더니 의외로 부끄러워하는 사라빈
영의 태도가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진 것이었다.
"예!"
사라빈영은 겨우 대답한 후 백리천에게 한 걸음 다가들었다. 그녀
가 고개들 들었다. 허나 이내 그녀는 내심 경악성을 터뜨리며 한
걸음 오히려 물러섰다.
그녀의 눈에 비쳐든 것은 바로 탄력있는 백리천의 나신이다. 그리
고... 소녀로 하여금 은은한 공포와 야릇한 느낌을 동시에 갖게
하는 남성(男性)의 실체(實體)가 그녀의 눈을 찌른 것이었다.
"아아...!"
그녀는 전신이 물에 젖은 듯 힘이 빠짐을 느꼈다.
"후후...!"
백리천은 담담히 웃으며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잠시 후 사라빈영은 최대의 용기를 다한 듯 수건에 물을 축여 백
리천의 나신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끝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손으로만 백리천의 나신을 닦아내고 있
었다. 눈은 그저 허공만을 보는 태도였다.
"영매!"
"...!"
"후후...! 해서 어디 제대로 닦이겠소?"
"아이...!"
사라빈영은 더욱 얼굴을 붉힌 후 마지못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
의 눈에는 기이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사라빈영의 손이 백리천의 하체로 내려갔다. 어느 한순간, 그녀의
손이 우뚝 멈춰졌다.
'아아...!'
그녀는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음인지 전신을 가볍게 떨고 있을 뿐
이었다. 허나 사라빈영은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이국의 소녀, 그
녀는 이내 고개를 흔든 후 백리천의 하체를 정성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으음...!'
사라빈영의 손이 자신의 한 곳에 닿자 백리천의 몸이 흔들렸다.
기이한 느낌, 부드럽다고 해야 할까? 뇌전같은 한 줄기 전류가 그
의 등줄기를 스쳤다.
그는 전신의 모든 힘이 한곳으로 몰림을 느꼈다.
"...!"
사라빈영은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청백지신의 여인의
몸으로는 만지기는커녕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사내의 하체를 닦
아내면서도 어느새 익숙해진 듯 태연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백리천의 나신을 닦아내는 그녀의 정
성이 깃든 모습이 어찌 보면 성스럽기까지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
사라빈영은 백리천의 전신을 구석구석까지 세밀히 닦아낸 후 눈을
들었다.
"영매...!"
백리천이 손을 뻗었다.
"흡!"
순간, 사라빈영은 무너지듯 백리천의 가슴에 안겨왔다.
"영매! 이번에는 내가 영매의 몸을 닦아 주게 하지 않겠소?"
"예...? 아이!"
사라빈영이 펄쩍 뛰어 올랐다. 허나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후후...!"
백리천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아아...!"
사라빈영은 소녀 특유의 체향, 비릿한 체향을 풍기며 더욱 안겨들
었다.
"영매!"
"...!"
"옷을 벗으시오."
'헉!'
사라빈영의 몸이 진동했다. 백리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녀
가 어찌 모르랴!
'아아...!'
그녀의 귀에 문득 한 줄기 바람소리가 스쳐가고 있었다.
한 인영이 쓸쓸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짧은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윤기 흐르는 미끈한 다리의 소녀는
바로 사라빈영의 언니 사라청이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바로 백리천과 사라빈영이 들어 있는 천막의
앞이었는데, 이 순간 그녀의 기태는 실로 쓸쓸하기 이를데 없었
다.
석상처럼 서 있는 그녀의 쓸쓸한 모습 위로 월광이 부서진다. 그
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눈빛은 파도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천막 안쪽에서 들려오는 거친 호흡소리와 야릇한 음향들.... 사라
청은 짐짓 무심한 척 멀리 야공(夜空)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그 눈
빛은 너무도 쓸쓸했다.
문득, 그녀의 쓸쓸한 눈에 멀리 천리황토파의 저쪽으로 한 채의
웅장한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신기루처럼 비쳐져 왔다.
웅대하기 이를 데 없는 거각(巨閣)은 바로 천군단의 총단 천군대루
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