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천추
금시조
♡ 서장(序章).
1. 천년흥륭기(千年興隆期)
동굴도 아니고 석실은 더 더욱 아니었다.
벽은 돌로 이루어졌고, 돌의 표면은 의미 모를 붉은 글씨들로 가득하다는 것만이 겨우 보였다.
위도 어둡고 아래도 어두웠다. 상하(上下)와 사방(四方), 육방(六方)이 모두 어두웠다.
돌로 이루어진 둥근 천장이 외부의 빛을 모두 차단해 어둠만이 존재하는 천외(天外)의 공간! 굵디굵은 다섯 개의 기둥이 중앙의 제단을 옹위(擁衛)하듯 서 있었다.
어둠은 둥근 천장의 선을 타고 기둥을 감돌아 제단을 향해 넘실대며 흘렀다.
제단(祭壇) 위!
은은한 금빛을 발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나마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것은 금경(金鏡)이 발하는 금광(金光) 덕이었다.
천상의 빛인 양, 보는 이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주는 기이한 광채! 금경(金鏡) 하나로 인해 실내의 괴괴한 어둠이 귀기로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상스러워 보였다.
거울이 놓인 제단의 앞!
미미한 밝음이지만 자세히 본다면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그리고, 지금 그의 머리가 서서히 들리고 있음도.
청아(淸雅)한 한 줄기 음성이 어둠을 갈랐다.
"삼가 신조문의 팔 대 제자 제갈수(諸葛修)가 선조들의 덕을 빌고자 합니다."
말과 동시에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
부적(符籍)!
그리고 부적이 타오르며 발하는 신화(神火)!
천지간에서 가장 순수(純粹)한 불인 삼매진화(三昧眞火)에 의해 열여덟 장의 부적이 동시에 빛을 발했다.
빛이 일어나자 곧 실내의 정경이 확연히 드러났다.
좌우에 각각 아홉 개씩의 부적을 들고 있는 사람!
불타는 부적의 빛이 그가 음양(陰陽)의 문(紋)이 새겨진 도포(道袍)를 걸친 사십 가량의 중년인임을 알게 했다.
그의 두 팔이 좌우로 엇갈리며 부적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불타는 열여덟 개의 부적!
열여덟 개의 광구(光球)는 살아 있는 생명인 양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떠가는 광구가 향하는 곳은 제단 주위에 늘어선 일곱 개의 신상들! 빛이 그 신상들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빙빙 돌기 시작했다.
"윤광회명(輪光回命)!"
중년인의 낭랑한 외침이 일더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빙글!
일곱 신상의 눈이 살아 있는 듯 열리며, 실내의 중앙에 앉아 있는 중년인을 향해 몸을 돌렸던 것이다.
동시에, 열네 개의 눈에서 눈을 멀게 할 듯한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번쩍!
중년인은 양손을 들어 열네 줄기의 빛을 맞이했다.
"신조문(神照門) 일천년의 도력(道力)을 모아 천조금경(天照金鏡)의 뜻을 묻고자 하니, 금경은 나의 물음에 부디 답을 내리시라!"
모든 빛을 모은 양, 그의 두 눈에서 열네 줄기의 무한광휘(無限光輝)가 금경을 향해 뻗었다.
웅-!
금경은 빛을 받자 스스로 울기 시작했다.
진동(振動)하는 것이다.
중년인은 격동한 듯 금경을 보며 말했다.
"이제 천년 만에 하늘의 옥추문(玉樞門)이 열리며 천상(天上)의 온갖 강한 기운들이 동시에 땅으로 내려온다."
금경에서 나오는 빛과 진동이 점점 증폭(增幅)되었다.
우웅!
"천년마다 찾아오는 천년 흥륭기(興隆期)! 천하 곳곳에 기재와 영웅들이 구름처럼 일어날 것이다."
이제 중년인의 눈에서 나가는 빛은 중지되었다.
하지만 금경은 더 이상 외부의 도움은 필요없다는 듯, 스스로 빛을 더욱 강하게 발하며 소리 질렀다.
웅-우우웅!
"어떤 기운이 먼저 내려올 것인가? 마기(魔氣)가 강하다면 천하는 도탄에 빠지고, 정기(正氣)가 강하다면 천하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맞으리라."
중년인은 초조한 빛으로 금경을 지켜보았다.
금경의 색이 점점 변해 갔다. 천지의 기운(氣運)에 감응해 색을 바꾸는 것이다. 금경은 이제 금빛이 아니었다.
은은한 혈광!
중년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혈왕혈기(血王血氣)! 겁난(劫亂)이 재현된다는 말인가?"
천조금경(天照金鏡)!
때로는 신마경(神魔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도가(道家)의 무가지보(無價之寶)! 하늘에서 인세로 전해지는 기운에 감응(感應)해 스스로 반향(反響)한다는 보물이었다.
그 보물이 지금 점점 강한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웅웅웅!
"핏빛은 마기(魔氣)를 뜻하고, 소리의 세기는 마기의 강력함을 의미한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점괘에서는 정기(正氣)가 마기를 이기고 승(勝)함을 보았었는데..."
신마경(神魔鏡)에서 나오는 혈광은 이제 마치 진짜처럼 선명하게 붉은빛을 띠었다.
소리는 커질 대로 커져 돌로 사방을 막은 실내의 공간을 가득 채우며 나갈 곳을 찾아 몸부림쳤다.
왕! 왕! 광-!
"혈기의 힘만 강해진다. 이럴 수가! 어찌 옥추문(玉樞門)을 통해 내려오는 기운이 마기(魔氣)뿐이란 말인가?"
이제 신마경은 곧 터질 것 같았다.
울림은 실내(室內)의 곳곳을 마구 흔들고 있어 그것이 작은 거울에서 나는 소리라곤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한데,
"혈광(血光)만이 아니다!"
중년인, 제갈수의 눈에 기쁨이 어렸다.
보라!
혈광의 중앙!
두 줄기의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푸르고 누런 두 줄기 빛!
"청광(靑光)과 금광(金光)은 모두 정기(正氣)의 두 갈래이니, 혈광은 성하지 못하겠구나!"
구앙! 구왕!
신마경의 진동이 더 커지며 삼 색의 광채들이 서로 엉켜 돌기 시작했다.
"삼태극(三太極)을 이루며 정립(鼎立)한다!"
제갈수의 말은 정확했다.
삼 색 광채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허공을 감도니 형상이 마치 세 개의 태극(太極)이라! 회전이 점점 빨라졌다.
종내는 세 가지의 색이 하나로 섞여 본디의 색을 알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우웃, 신마경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제갈수의 외침에 호응이라도 하는 듯!
꽈꽝!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신마경이 깨졌다.
세 개로 갈라져 세 방향으로 날아가는 신마경 조각들! 그 중 핏빛을 띤 하나가 제갈수를 스치며 그의 뺨에 핏줄기를 길게 그었다.
그러나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사문(師門)의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망가졌건만, 아쉬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다만 망연해져 중얼거릴 뿐!
"삼정지세(三鼎之勢)! 가장 큰 난세(亂世)가 다가오는가?"
벽에 박힌 세 개의 신마경 조각들은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하지만 아직 미미하게 남은 거울들의 울림은 장차 다가올 난세를 비추고 있었다.
세 개의 빛! 세 갈래의 기운!
지금으로부터 약 이십여 년 전!
천도봉(天道峰) 한구석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이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조문의 팔 대 문주 제갈수(諸葛修)가 겪었던 이 일을!
첫댓글 감사합나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