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로(魯), 자는 여유(汝唯)이며, 호는 송암(松巖)이다. 관향은 철성(鐵城)으로, 시조는 황(璜)이다. 5세 엄충(嚴冲)과 인충(麟冲)에 이르러 모두 시중(侍中)이 되니 처음으로 크게 현달하였다. 공은 엄충의 후손이다. 그 후 높은 벼슬이 계속 이어져 7세조 휘 백(伯)은 고려 말에 벼슬하여 우군총제(右軍摠制)에 이르렀다.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의령 세간촌(世干村)에 자리 잡고 살았다. 6대조 휘 을현(乙賢)은 태조 2년에 소감(少監)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의령 부곡리(孚谷里)로 옮겨 살았다. 증조 휘 문창(文昌)은 부호군(副護軍)이었고, 조부 휘 한(翰)은 제용감 첨정(劑用監僉正)을 지냈다. 부친 휘 효범(孝範)은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였다. 남평 문씨(南平文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의 후손인 판관(判官) 문은(文垠)의 딸이다.
가정(嘉靖) 갑진년(1544, 중종39) 3월 2일에 공은 부곡리(孚谷里)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영특하고 뛰어났으며, 조금 자라서는 강개하여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두 아우 축암공(畜庵公) 보(普), 백암공(栢庵公) 지(旨)와 함께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의 문하에서 배워 학문하는 큰 방법을 들었다. 집에 들어가면 두 아우와 함께 학문을 강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집에서 나오면 동문인 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 같은 여러 어진 이들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경의(敬義)에 종사하고 박약(博約)을 공부하였다.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여러 성리서에 있어서는 심오하고 깊은 이치를 연구하여 그 영화(英華)를 음미하지 않음이 없었고, 역리(易理)와 병술(兵術)에 있어서는 더욱 장점이 있었다. 항상 굉박한 견해와 정밀한 실천으로 사문(師門)의 추중을 받았다. 문장은 공에게 있어 단지 여사(餘事)였지만 기간(奇簡)하고 오묘하여 《춘추좌씨전》의 기풍이 있었다.
갑자년(1564, 명종19)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기사년(1569, 선조2)에 을사사화 때의 충현은 신원하고 간사한 무리들은 벌주기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갑신년(1584, 선조17)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에 제수되었고, 경인년(1590, 선조23)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수우당 최영경의 억울함을 추송(追訟)하는 소를 올려 소문의 출처를 추궁하여 심문하기를 청하였다.
신묘년(1591, 선조24)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은 왜국에서 온 편지에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고자 한다.’라는 말이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 말이 흉패(兇悖)하니 진실로 범범하게 답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말이 엄하고 급하면 큰 돼지의 사나움을 건드리게 되고, 논설이 정확하지 못하면 윤기(倫紀)의 바름을 해치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어떤 말로 답을 하시겠습니까.
난파(鑾坡)의 선비와 봉각(鳳閣)의 영재들은 말재주가 용을 조각하고 말은 능운(凌雲)의 솜씨에서 나오며, 급암(汲黯)의 곧은 말은 천리 떨어진 곳에서 회남(淮南)을 꺾기에 충분하지 않음이 없고, 호전(胡銓)의 짧은 편지는 오랑캐의 기병 백만을 물리칠 수 있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왜국에 답장하는 것이 어렵지 않음을 아실 것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문장이 기발하고 빼어나면 모욕한다고 여겨 기뻐하지 아니하고, 정밀하고 심오하면 은미하다고 여겨 깨닫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사신(詞臣)이 문체에 얽매이고 격례(格例)에 구애되어 그대로 응제(應製)하는 것이 염려되니, 반복하여 서술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반드시 예사롭게 여겨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왕손(王孫)의 바른 말에 초나라 사신의 기운이 움츠러들었으며, 한나라 황제의 겸손한 말에 남월(南越)이 마음을 낮추었습니다. 이번의 이 조치는 기밀의 관건이 매우 긴요하니, 오랑캐의 마음을 바로잡고 백성의 화합을 얻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특별히 명령하여 다음과 같이 답서를 짓게 하십시오.
‘사대교린은 국토를 소유하고 있는 자의 상도(常道)이니, 대국은 진실로 섬기지 아니할 수 없고 이웃 나라는 진실로 사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도를 따르는 자는 복이 흥하고 이 도를 어기는 자는 재앙이 생깁니다. 이는 예로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귀국의 사신은 돛을 올려 바다를 누비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바다 건너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그러므로 간혹 제때에 서로 알리는 것을 감히 자주 못하는 것입니다. 근자에 여러 섬의 작은 우두머리가 소란을 일으켜서, 우리 변방을 침략하여 핍박하고 혹은 우리 변방의 백성에게 노략질을 합니다. 이는 비록 귀국이 알지 못하는 바이겠지만, 우리나라는 마음속에 티끌만큼의 의심이 없을 수 없고, 또한 해적의 노략질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통신사의 왕래가 끊긴 지 백 년이 지났지만, 교린의 정의(情誼)는 일찍이 조금이라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지금 대왕이 용맹하고 당당한 재주로써 영웅호걸의 지략을 이루어 참람하고 교활한 자들을 모두 죽여 여러 섬을 빼앗아 평정하였고, 나쁜 기운을 빠르게 쓸어내어 구역을 맑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별도로 중사(重使)를 파견하여 폐백과 보배를 보내고, 사로잡힌 우리의 백성을 모두 돌려보냈으며, 과인에게 지금 이후로는 서로 해치는 일이 없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는 통신사를 계속해서 보냈는데 귀국에서는 오랫동안 보답하는 예가 없었으니, 교린에 있어서 어떠하며 우호에 있어서 어떠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과인은 대왕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하늘의 신령함과 대왕의 선물에 힘입어 대대로 서로 두터워져 혹시라도 서로 속이지 말며, 우리 남쪽 바다에 영원토록 파도가 일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두 나라가 그 복을 아울러 받는 것이니 어찌 감히 조정 대신들에게 곧바로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하고자 하지 않았고 오직 한두 신하가 과인과 함께하고자 하였습니다. 유신(儒臣)들을 격려하여 큰 파도를 무릅쓰고 건너 먼 곳에 특별한 하사물로 사례하고자 하였습니다. 귀국이 바다를 건널 때에 호위를 매우 부지런히 해주었고, 그 수도에 도착한 뒤에는 관사에서 매우 성대하게 대접하고 노자도 많이 주었으며, 노복들에게까지도 연회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통신사 배를 좋게 돌려보낸 뒤에는 또 질풍처럼 빠르게 위로하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예가 어찌 이처럼 융숭하며, 은혜가 어찌 이처럼 크단 말입니까. 이런 이후에 대왕의 정중함을 더욱 알았습니다.
다만 편지 중에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임금의 측근이 꾸민 말과 과장된 말로써 다른 나라를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말이 이다지도 교만합니까. 과인이 청컨대 대왕을 위하여 그 불가함을 말할 것이니,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밝게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명나라는 천왕의 나라이니 범할 수 없습니다. 천지가 처음 갈라질 때 가운데에 자리해 중국(中國)이 되었고, 바깥에 자리해 외이(外夷)가 되었으며 다스리는 지역도 각각 나누어져 종류 또한 다릅니다. 이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절로 중국이 되고 외이는 절로 외이가 되어 순(舜)ㆍ우(禹)ㆍ탕(湯)ㆍ무(武) 같은 성인도 그 풍속을 바꿀 수 없었고, 선우(單于)ㆍ돌궐(突厥)의 강함도 그 땅을 더럽히지 못하였습니다. 각자 그 나라 그 무리로써 흥망성쇠 하였을 뿐입니다. 하늘을 거스를 수 있습니까. 하늘은 거스를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귀국은 멀리 큰 바다 밖 해가 뜨는 곳에 있고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에 싸여 이를 사방의 경계로 삼으며, 땅이 몇천 리인지 알지 못합니다. 땅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빙설에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피부가 찢어지는 고통이 없고, 곡식과 과일은 풍족하여 쉽게 자라고 빨리 익으며 기이한 보물과 특산물이 많으니, 모두 중국과 다른 나라에는 없는 것입니다. 백성은 많고 기르는 소는 들판에 가득하여 하나의 별천지이고 대국입니다. 그리고 왕이라 일컫든 황제라 일컫든, 오직 생각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즐기지 않고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옛날 진시황은 이주(二周)를 삼키고 육국(六國)을 멸망시켰으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못에 임하고 억만 길 높이의 성에 웅거하여 흉노를 수천 리 밖으로 몰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위엄을 육합(六合)에 떨쳤으니 얼마나 씩씩하였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사구(沙丘)에서 어느 날 저녁에 죽어 포어(鮑魚)로 냄새를 교란시켰습니다. 2세 호해(胡亥)에게 전해졌으나 끝내 남은 백성이 없어졌으니, 위엄은 믿을 만합니까. 위엄은 믿을 수 없습니다.
후진(後秦)의 부견(符堅)이 30년 동안 병사를 양성하여 부융(符融)과 모용수(慕容垂)에게 보병과 기병 25만 명을 통솔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깃발이 서로 이어진 것이 전후로 천리였는데, 이를 동원하여 남하해서 오회(吳會)를 아울러 삼키고 뒤돌아보며 말하기를 「큰 강의 흐름도 채찍을 던져서 끊을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성대하였습니까. 그러나 유뢰(劉牢)의 5천 병사에게 먼저 꺾이고 사현(謝玄)과 사석(謝石)의 8만 병사에게 끝내 패하여, 넘어지고 뒤집혀 달아나다가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을 듣고 저희들끼리 서로 짓밟아 비수(淝水)가 핏물로 변했으니 어찌 병사가 많음에 달려 있겠습니까. 더구나 중국은 흠잡을 데가 없어 천자는 신명스럽고, 조정에는 충량(忠良)한 신하가 있으며, 상하가 화목하여 명령을 내려 시행하게 하면 행동이 규정과 법도에 합당합니다. 구역 밖의 여러 나라는 모두 신첩(臣妾)이니, 비록 옛날의 성세(聖世)라도 어찌 이보다 낫겠습니까. 하늘을 계단으로 오를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이는 실로 쉽게 도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왕이 만약 하늘을 거스르고 가벼이 거동하여 온 나라의 군사를 배에 싣고 풍랑을 거슬러 만 리의 바다를 항해하여 소주(蘇州)와 항주(杭州)의 한 모퉁이에 도착한다면, 처음에는 비록 세력을 믿고 침범해 유린하는 통쾌함이 있을지라도 끝내는 반드시 재앙을 입고 말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가 없는 것이 당당한 원기에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천자가 진노하고 훌륭한 신하가 계책을 도우며, 천하의 병사를 징발하여 대역의 죄를 성토한다면 고립되고 피곤한 군대는 결코 중원(中原)에서 뜻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한갓 방자한 마음을 멋대로 하려고 군사를 함부로 내어 무력을 남용할 줄만 알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흔들리고 있음은 생각하지 않은 것이며, 한갓 기이한 공을 세우려고 명분을 무시하고 의리를 그르게 여길 줄만 알고, 대왕의 덕이 방자해지고 패역(悖逆)해짐은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중국에서만 남의 자식을 고아로 만들고 남의 아내를 과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니, 귀국의 백성은 유독 천민(天民)이 아닙니까. 어찌 그 간뇌(肝腦)가 중원의 풀에 발리지 않는다고 보장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얻는 것이 잃는 것을 보충할 수 없고, 획득하는 것이 없어진 것을 보충할 수 없습니다. 비록 대왕의 나라인들 어찌 홀로 이롭겠습니까.
또 인심은 예측할 수 없으니 어찌 피차의 구분이 있겠습니까.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대왕이 만약 군대를 멀리 몰아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두 나라가 서로 견지하여 승부가 쉽게 결정되지 않고 소식이 오래도록 서로 전해지지 않으면, 전쟁에 나온 군사들의 부형과 자제가 귀국에서 밤낮으로 서쪽을 바라보며 고통스럽게 그리워하고 그로 인해 전쟁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잠복해 있는 간사한 영웅 중에 이 일로 인해 참지 못하고 또한 대왕의 자리를 도모하려는 자가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 남은 군졸로 하여금 경계를 에워싸고 지키면서 대왕을 기다리면 대왕은 끝내 어디로 돌아갈 것입니까. 잡은 토끼를 버리고 달아나는 노루를 쫓는 것은 옛사람도 비웃은 바이니, 대왕은 깊이 생각하십시오. 원한의 창고를 만들지 말고, 재앙의 사다리를 만들지 마십시오. 대군이 한 번 움직이는 데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군대를 일으키는 것이 어찌 좋은 일이겠습니까. 정말로 부득이해서 일으키는 것입니다.
대왕이 중원으로 향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중국의 조정이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응당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 섬의 작은 우두머리가 변방을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여 상국을 분노케 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만약 여러 나라의 조회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혐의로 삼는다면 성의를 바쳐 천자가 감동하여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 옳습니다. 천자는 두루 포용하는 도량이 있어 호월(胡越)로써 한 집을 삼으니, 어찌 끝내 끊으려 하겠습니까. 접대가 옛 관례에 어긋남은 예전의 일이고 오늘날에는 있지 아니하니, 또한 대왕의 수치가 아닙니다. 귀국은 우리나라와 형제 사이고, 명나라는 우리나라와 부자 사이 같습니다. 어찌 형제가 집과 아버지를 해치고자 하는데, 도와서 화해시키지 않고 도리어 역란(逆亂)을 도와 이루어 주는 자가 있겠습니까. 대왕이 사람의 도리로 과인에게 요구하지 않으니, 과인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지만 아무런 생각이 없겠습니까.
옛날 남월왕(南越王) 위타(尉佗)는 황옥(黃屋)과 좌독(左纛)으로 스스로 황제라 일컬었지만, 늙어서 손자를 안고서는 오히려 한(漢)나라를 섬기고자 생각하였습니다. 원컨대 대왕은 성한 기운에 부림을 당하지 말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만년에 한 번 깨닫는 것은 응당 하나의 웃음거리도 아닙니다. 만약 대왕이 우리나라에 화를 전가시키고 아무 말 없이 꾀어서 상국을 침략하여 불화를 야기시킨다면 이는 더욱 서로 믿는 도리가 아니고, 또한 인자의 마음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연달아 사신을 보내면서 몰래 서로 해치기를 도모한다면 황천(皇天)이 싫어하고 신명이 미워할 것입니다. 비록 대왕의 백성이라도 기꺼이 심복하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덕을 따르는 자는 창성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라고 하였으니, 대왕은 이를 들어보지 못하였습니까. 대왕이 만약 이전의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나라의 백성만 편안해지겠습니까. 귀국의 백성도 또한 편안해질 것입니다. 만약 과인의 말을 듣지 않고 해상에서 전쟁 일으키기를 도모한다면, 우리나라가 비록 작지만 우리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한번 결전하기를 기약할 것이니, 두 호랑이가 싸운다면 모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대왕은 그 점을 잘 생각하여 후회를 남기지 마십시오.
고려 말에 위성(僞姓)이 자리만 지키고 있어 나라 안이 크게 혼란하여 서로 토벌하며 싸웠는데, 기근이 잇따라 이르러 백성들은 보리밥을 먹는 것이 옥으로 밥을 지어 먹는 것보다 힘들었습니다. 또 변방의 해안에는 진보(鎭堡)와 영루(營壘)의 방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굳세고 사나운 것을 믿고서 모두 내침하니, 빈 고을을 들어가듯 거침없어 그 날램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황산(荒山)에서 크게 패하여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해 뼈는 가루가 되고 혼은 여귀(旅鬼)가 되었습니다. 이는 좋은 본보기이니 어찌 경계하지 않으십니까.
과인은 사신에게서 대왕은 위엄이 먼 바다 바깥까지 더하고 구역에 바람을 일으키며, 용처럼 날뛰고 범 같은 눈초리로 쏘아보면 당할 수 없고 거스를 수 없으니, 왜국이 개국한 이래로 있지 않았던 뛰어난 군주라고 들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귀하기로는 국왕이 되어 지위가 이미 높아졌으며, 부유하기로는 여러 주(州)를 소유하여 재물은 이미 높게 쌓였습니다. 참위(僭僞)한 자를 제거하여 공 또한 높아졌으며, 동쪽 바다를 하나로 하여 교화 또한 널리 미쳤습니다. 명예와 지위가 이미 부합하고 사업 또한 드러나 뜻과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다시 무엇을 구하려 합니까. 달은 차면 이지러지고, 그릇은 차면 기울어집니다. 이는 바로 대왕이 꽉 찬 상태에서 자만을 경계할 때입니다. 사람의 수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고 번화한 것은 한 때이며, 부귀한 것은 잠깐 동안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끝이 있고 욕심은 끝이 없으니, 끝이 있는 것으로 끝없는 것을 구하면 위태롭고 위태로울 뿐입니다. 구하는 것은 안락함인데 어찌하여 스스로 고통스럽게 합니까. 천험(天險)을 범하지 말고, 백성의 화합을 없애지 마십시오. 신중히 봉토를 지켜 영원한 편안함을 도모하십시오. 밖으로는 적의 침입이 없고, 안으로는 밤에 문을 닫지 않아도 되게 하며, 뽕과 삼을 심은 천리에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고, 어린이와 늙은이가 노닐면서 손잡고 노래를 부르며, 백성이 지극한 덕을 기리고 나라 사람들이 현명한 군주라 칭찬하게 하십시오. 그것이 국경을 넘어 명분을 범하는 짓을 하여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키며 상국과 원수를 맺고 이웃 나라와 우호를 떨어뜨리는 일과 어찌 멀지 않겠습니까. 과인은 이웃 나라와의 의리를 차마 저버릴 수 없어 감히 속마음을 펼쳐 규(圭)에 써서 고하니, 대왕은 깊이 살피기 바랍니다.’
신이 이와 같이 아뢴 것은 다만 이해(利害)를 분명히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순역(順逆)을 알게 하기를 바랄 뿐이고, 속마음을 드러내어 성은에 우러러 보답하고자 할 뿐, 감히 신의 말을 쓸 만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임진년(1592, 선조25) 공이 한양에 있었는데, 하루가 급하다는 변방의 소식을 듣고는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샛길로 남쪽으로 돌아와서 창의하여 생사를 함께하자고 약속하였다. 함양에 이르니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초유사로서 먼저 함양군에 도착해 있었다. 김성일은 곧 공을 알아주는 벗이었는데, 공이 조종도와 함께 들어가 뵈니 김성일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에 일대가 모두 무너져서 열읍(列邑)이 이미 텅 비었으며, 사민(士民)들은 달아나 숨어 산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이에 공이 즉시 통문을 작성하여 창의의 뜻으로 효유하였다. 김성일이 공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차임(差任)하니, 공은 그날 즉시 출발하여 여러 고을을 바쁘게 다니며 사류(士類)를 찾아 가서 눈물을 흘리며 깨닫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는 의병을 거느리고 정암진(鼎巖津)을 지키고 있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통문을 보고 또 공의 말을 듣고서는 감격하여 분발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김면(金沔)이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박사겸(朴思兼)ㆍ박사제(朴思齊)ㆍ권세춘(權世春)ㆍ전치원(全致遠)ㆍ이대기(李大期) 등도 향병을 끌어 모아 서로 연달아 일어났다. 학봉 김성일이 공적을 세운 상황을 듣고 포장하였다.
박이문(朴而文) 등이 또 상소하여 “김면ㆍ이로ㆍ박성(朴惺)ㆍ정인홍 네 사람은 하늘에 맹세코 나라의 수치 씻기를 기약하고서 향리에서 분기하여 동지를 모아 거느리고, 혹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적을 차단하고 혹은 성에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무찔렀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군대의 위세가 날로 진작되고, 우리의 병력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이에 낙동강 서쪽의 6, 7개 고을이 병화를 면하여 오늘날의 즉묵성(卽墨城)이 되었으니, 나라를 수복할 터전이 이로 인하여 마련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교서를 내려 “김면ㆍ정인홍ㆍ이로ㆍ박성ㆍ조종도ㆍ곽재우 등은 의병을 일으켜서 군사를 모집한 것이 이미 많았다. 본도의 충의가 아직도 쇠하지 않았도다. 모(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표창하고 장려하니, 더욱 힘을 모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하늘이 이성(李晟)을 낳아 궁궐이 수복되기를 기대하고, 장소(張所)가 원릉(園陵)에 탈이 없다고 보고하기를 날마다 바라노라.”라고 하였다. 공이 전적(典籍)에 제수되자 은전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왜적과 함께 살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나가서는 의병을 모집하고 들어와서는 계획 세우는 것을 도왔는데, 김성일이 공의 계책을 많이 사용하였다.
김성일이 처음 진양에 이르렀을 때 공이 조종도와 함께 따라왔다. 텅 빈 성은 쓸쓸하고 인적은 끊겨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오직 강물만 출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바라보니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처참한 모습뿐이었다. 공이 조종도와 함께 손을 부여잡고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진주는 거진(巨鎭)이고 목사의 지위는 이름난 자리인데, 왜적들이 지경에 이르기도 전에 사태가 이미 이와 같으니, 앞으로 어디에 손을 쓸 곳이 있겠습니까. 빨리 죽어서 뒷일은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왜적들의 칼날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강물에 함께 빠져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김성일을 이끌고 강가로 가려 하였다. 그러자 김성일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한 번 죽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나, 헛되이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행히도 여러분이 의병을 일으키는 데에 힘입어서 많은 선비들이 모집에 응하고 있어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거의 바랄 수 있게 되었소. 만약 불행히도 그러지 못할 때에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 통곡하며 헤어졌다.
곽재우는 참수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겨 왜적의 머리를 베는 것을 금지하니, 매번 왜적을 만날 때마다 군사들이 곧장 앞으로 나아가 싸우는 자가 없었다. 왜적이 이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함부로 행동하며 멀리까지 달려왔다. 공이 곽재우에게 일러 말하기를 “사람들 중 누가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만약 참수를 금하여 상이 없다면 군사들은 반드시 태만해질 것이니, 무엇으로 싸우게 할 것인가.”라고 하니, 곽재우가 그 말을 따라 참수를 허락하였다. 그 후에 군사들이 모두 다투어 왜적을 죽여 머리를 베니 왜적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김면의 군대가 군량이 부족하여 장차 와해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공은 사저관(私儲官)으로 여러 고을을 돌며 사민들을 효유하여 의령에서 쌀 680석을, 함안에서 156석을, 산음에서 100여 석을 모아 산음 현감 김락(金洛)에게 맡겨서 김면의 군대에 보내게 하였다.
이때 정인홍의 막하에 참모가 없었는데, 박성이 홀로 이를 걱정하여 김성일에게 공을 보내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김성일이 말하기를 “내가 여유(汝唯 이로의 자(字))를 얻은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이 사람을 빼앗아 저기로 보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저들이 어찌 능히 여유의 말을 듣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나와 김 영공은 의병을 일으켜 일을 같이 하며 시종 함께하기를 맹세하였는데, 지금 어찌 저버리고 다른 쪽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박성이 사과하였다. 공이 김성일에게 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이와 같았고, 믿음을 지키며 변하지 않는 것이 또 이와 같았다.
진주의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모두 곡식을 지리산에 숨겨두고서 꾸어간 쌀을 갚지 않아 군량을 공급할 수 없었다. 이에 김성일이 크게 노하여 10여 명을 잡아 무거운 형률로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에 박성이 말하기를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 이러한 습속을 징계하여야 합니다.”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이 일을 급하게 처벌한다면 더욱더 소란스럽게 될 것이니, 의리로써 그들을 깨닫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곡식을 실어다가 바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김성일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라고 하고서는 이에 형틀에 묶인 것을 풀어주고 의리로써 설득하였다. 또 효유하는 방문을 붙이니, 한 달도 되지 않아 수만여 석의 곡식이 모였다. 관병과 의병의 군량이 이에 힘입어 부족하지 않았다.
계사년(1593, 선조26) 정월 초하루날 공이 병 때문에 산 속으로 들어가 김성일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왜적의 형세를 보건대, 7, 8년 안에는 소탕될 기약이 없는데, 여러 진영의 장수들은 먼 앞날을 헤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쌀을 흙 쓰듯이 합니다. 군에 양식이 없으면 비록 훌륭한 장수가 있더라도 장차 무엇으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공의 군중에 또한 불필요한 직책이 많으니 군관 수십 명을 줄일 수 있고, 영리(營吏) 10여 명 역시 도태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김성일이 회답하기를 “편지 가득 구구절절한 것은 깨우쳐 주는 말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붕우의 도리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인데, 오늘 다시 옛사람의 일을 볼 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단지 띠에 적어둘 뿐만 아니라, 즉시 시행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함양 군수의 보고서에 이르기를 “명나라 군사가 평양성의 왜적을 토벌하여 거의 남김없이 섬멸하였으며, 그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황해도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들도 일시에 도망갔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해 조석으로 왜적을 멀리 몰아내고 남쪽으로 내려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 이웃 고을 수령들이 와서 모여 있었는데, 손뼉을 치고 서로 위로하며 말하기를 “급히 도사(都事)를 여러 고을에 보내어 군량과 공급할 물건들을 준비하게 하여 명나라 군사가 이를 것을 대비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급급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양성을 비록 탈환했으나 한양에는 아직도 강한 왜적이 있어 반드시 뒷일을 도모할 것이니, 명나라 군사는 빨리 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간신히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 물자를 요구하여 소란스럽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잠시 상황이 변하는 것을 살펴보고 잘 조처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온 좌중이 크게 놀라며 미친 자의 괴상한 말이라고 배척하였다.
김성일만은 마음으로 그렇다고 여겨 말하기를 “그대가 가서 서쪽 길을 살피게나. 군사들이 피로하고 식량도 다하였으며, 명나라 군사가 또한 이른다고 하니, 지금의 형세가 바로 위급한 상황이네. 그리고 농사철도 이미 가까워졌으니 종자 곡식도 또한 급하네. 우리나라의 존망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네.”라고 하고, 편지와 문서를 갖추어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에게 보냈다.
공이 여산(礪山)에 도착했으나 명나라 군사의 동정에 대한 소식이 없어 급히 병사 한 명을 보내어 김성일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이 각 고을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세를 부려 크게 괴롭혔는데, 김성일이 편지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명령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공이 도체찰사 서애 유성룡이 임진(臨津)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차 임진으로 향하고자 하였다. 수원(水原)의 경계에 이르러 체찰부사(體察副使)인 군관을 만났는데, 도체찰사에게서 오는 길이었다. 명나라 군사에 관한 소식은 없고, 용인ㆍ죽산ㆍ사평(沙平)에 주둔한 왜적이 출몰하여 약탈을 하고 있으며, 수원과 금천(衿川)의 사이는 길이 막혀 갈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또 공이 데리고 온 하인은 이때 모두 역질에 전염되어 고통스럽게 누워 있었고, 병들지 않은 자는 단지 세 사람 뿐이었다. 이에 공이 부득이하게 인편을 통해 편지와 공문을 부쳤다. 그리고 돌고 돌아서 공주에 이르러 체찰부사 김찬(金瓚)을 뵙고 힘써 종자 곡식을 청하였다. 김찬은 전라 도사에게 관장하는 곡식 중 5백 석만을 주라고 하여 드디어 전주로 내려가 운반하여 왔다. 유성룡은 김성일의 편지와 공문을 보고서 즉시 장계하여 호남에 있는 곡식 2만 석을 내어 줄 것을 청하였다. 공이 종사관 박이장(朴而章)과 함께 호남에 가서 곡식을 가져와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고 때에 맞춰 씨를 뿌려 농사짓게 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26) 왜장에게 격서(檄書)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곤이 제 자리를 정하고, 별자리가 나뉘고 바다가 막혀 있으니 구역이 나눠진 것이다. 건곤이 정해짐에 귀하고 천한 것이 자리 잡고, 구역이 나눠짐에 화이(華夷)가 판별되었다. 귀천의 지위와 화이의 판별은 모두 하늘이 정하는 바이다. 하늘을 거스를 수 있는가. 하늘은 거스를 수 없다. 이 때문에 천자보다 귀한 것은 없으니, 하늘 아래 모두가 그 신하이다. 중화(中華)보다 높은 것은 없으니, 휘하의 토지와 물은 모두 그의 땅이다. 군신의 의리와 빈복(賓服)의 예는 모두 이치의 떳떳한 바이다. 이 이치가 없어질 수 있겠는가. 이 이치는 없어질 수 없다. 인간이 하늘을 이기는 이치가 없고 이치는 완전히 없어지는 때가 없다. 예부터 흉악한 역적은 만에 하나라도 온전한 적이 없었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의 관백(關伯) 풍신수길이라는 작자는 귀족 출신인 적의 추장으로, 미친개처럼 거세며 사납고 흉포하여 악을 쌓았다. 원씨(源氏)의 나라를 빼앗아 차지한 뒤, 예의와 의리가 없는 나라에서 스스로 우두머리가 되어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좋은 음식을 매우 즐겼다. 사람의 살을 저미고 뼈를 발라내고 배를 가르고 가슴을 찌르니 한결같이 잔학하였다. 너희 나라 사람을 협박하고 제압하여 너희 나라는 학정의 불꽃이 대단하였다. 징발에 피로하고 전투에 지쳐서 원망하여 떠드니 그 소리가 위로 하늘을 찔렀다. 빙 두른 바다를 경계로 삼고 배를 타고 이에 건너 와서 솥 안에 있는 물고기와 같은 처지가 되어 도망가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으니,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어찌 본심이겠는가. 그 형세는 반드시 오래 갈 수 없다. 더구나 지금 하늘을 쏘려고 활시위를 먼저 당겨 망녕되게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이웃 나라와의 화친과 우호를 깨뜨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 천인(天人)의 큰 분노를 범하고 만고의 대륙(大戮)에 빠졌다. 비록 섬에서 잠시 쉬면서 구차하게 세월을 연장하고자 하지만, 반드시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건히 생각건대, 성스러운 천자는 높이 팔짱을 끼고 면류관을 엄숙히 쓰고서 본래 너희 나라를 마음에 두지 않아 조공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모두 너희 나라가 스스로 취한 것이다. 지성으로 청하여 천자께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군사를 일으키고 역모를 꾸며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만족함이 없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조선의 입장에서 말하면 수호한 지 백여 년 동안 우리는 어김이 없었다. 너희 나라가 돛을 올려 바다를 누비며 건너오면 봉산(蓬山)에서 맞이하고 보내며 동평관(東平館)에서 손님을 대접하였고,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니 연회가 준비되지 않음이 없었고 예의(禮儀)가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었는데, 오히려 너희 나라에 무엇을 잘못하였는가. 그런데 우리의 큰 덕을 잊어버리고 도리어 방자하게 독침을 찌르니, 이같이 혹독할 수 있단 말인가. 무릇 우리나라의 생기를 품고 이 땅의 곡식을 먹는 백성이 차마 같은 하늘을 함께 이고 구차하게 살겠는가.
처음에 상처를 입었던 것은 단지 오래도록 안일에 빠져 지내다가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그런 것일 뿐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부모와 처자의 사랑과 전원과 산업의 재물이 없겠는가. 사람마다 아픔이 절절하고 집집마다 원한이 맺혀 모두 의기를 떨쳐 죽고자 생각하니, 누가 기꺼이 치욕을 당하며 살고자 하겠는가. 필부의 노여움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데, 온 나라의 원망을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 전일의 요행을 믿지 말라.
당당한 우리 성스러운 천자께서 처음 평양에 일부 병력만을 출동시켜 한 번에 모두 죽이니, 마른 나무를 꺾고 썩은 나무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쉬웠다. 만약 그때에 파죽의 기세를 타고 멀리 내쫓아 곧바로 공격하였다면, 진압하여 물리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웠을 것이다. 병사를 거두어 싸우러 나아가지 않은 것은 잠시 놀라게 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위엄에 놀라 스스로 달아나게 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 하물며 감히 함께 싸우겠는가. 왕의 군대는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 어진 마음이 모든 것을 포용하니, 칼날로 모두 죽이지 않은 것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너희가 여전히 뉘우치지 않고 거만하게 화의를 요구하며 불손한 말을 하니, 이는 어찌 갓 나온 싹이 서리와 우박을 업신여기고, 어린 새와 사슴이 교악(喬嶽)에 대항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함을 많이 볼 수 있겠구나. 성스러운 천자께서 기꺼이 허여하겠는가. 해안에 웅거하여 끝까지 무엇을 하려 하는가. 옛말에 ‘군대의 명분이 바르면 사기가 왕성해지고, 군대의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쉽게 피로해진다’라고 하였는데, 천조(天朝)를 침범할 것을 도모하니 명분이 바르지 못한 것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응하여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는다면, 무엇이 이처럼 바르겠는가.
천도는 따르는 자를 돕고 인도는 믿는 자를 도우며,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 돌아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는 법이다. 하늘이 너희를 망하게 할 것은 점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비록 너희 나라 입장에서 말하더라도 나는 너희가 얻는 것으로 그 잃은 바를 채울 수 없음을 알겠다. 어찌하여 신분과 나이를 막론한 우리나라 사람에서부터 10만의 명나라 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은 자의 칼을 빼앗아 차게 하는가. 이것으로써 너희 나라의 환과고독(鰥寡孤獨)이 장차 하늘에 부르짖으며 호소함을 이기지 못할 것임을 더욱 알겠다. 아내는 굳센 남편을 잃고 어미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자식은 아비를 보지 못한다면 원망은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많은 사람들의 입은 쇠를 녹일 수 있고 모기떼가 우렛소리를 낼 수 있듯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늘이 반드시 따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겠는가. 너희는 이미 심장ㆍ간장ㆍ비장ㆍ폐장이 있고, 또한 식욕ㆍ색욕,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있을 것이니,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잘 살펴보아라. 노여움이 하늘을 범하고, 귀신을 범하고, 천자를 범하고, 이웃 나라를 범하고, 사해 사람을 범하여 온 천하가 원수로 여기니, 이같이 하고서도 목을 능히 보전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또 너희는 풍신수길을 너희의 임금으로 여기는가. 풍신수길은 찬적(簒賊)의 괴수 아니던가. 너희가 만약 풍신수길을 임금으로 삼아 섬긴다면, 이는 또한 찬적의 무리로서 필경 하늘의 주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니, 어찌 애처롭지 않겠는가.
만약 너희가 위협하는 사신에게 핍박받아 비록 명을 들어 주더라도 진실로 풍신수길의 죄악이 장차 우주의 사이에도 용납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면 역리(逆理)를 버리고 순리를 취하라. 길흉이 있는 곳에 기미를 보고 일어나야 날로 그 길흉을 기다릴 수 있다. 거취 하는 때와 화복의 사이에서 사람마다 각자 마음이 있으니 생각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공경히 생각건대, 우리 국왕이 사대(事大)하는 정성은 천자에게 믿음을 주어서 천자의 총애를 입어 상국의 구원을 받았다. 이웃 나라의 구원을 받기도 오히려 쉽지 않은데, 더구나 상국의 구원에 있어서겠는가. 어진 이를 구하는 정성이 상제에게 이르러 상제가 이에 묵묵히 이끌어 꿈같이 날랜 장수를 주셨다. 용기는 바람을 쫓을 만하고 힘은 산을 뽑을 만하며, 손에는 스무 자의 긴 칼을 휘두르고 팔꿈치에는 백 근의 철퇴를 걸쳤다. 천 길의 절벽을 말 타고 뛰어 넘고 높은 장대 위에 서서 양 팔은 호랑이를 잡고 두 눈동자에는 번갯불이 번쩍이는 듯하였다.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도 이같이 신묘한 계책은 있지 아니 하였다. 주상이 이를 얻어 특별히 충용익호장군(忠勇翼虎將軍)의 호칭을 내려 선봉으로 삼았으니, 이는 거의 하늘이 우리 임금에게 내린 것이지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너희는 듣지 못하였는가. 천 마리의 양은 한 마리의 표범을 대항할 수 없고, 백 마리의 메추라기는 한 마리의 매를 감당할 수 없으니, 가기만 하면 쓰러질 따름이다.
아, 하늘이 인재를 내는 것은 지역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너희 나라도 어찌 천인을 살피고 시세를 파악하여 향배를 아는 호걸이 없겠는가. 진실로 천심을 받들고 상제의 명에 순응하며 백성의 청원에 따라 창을 되돌려 바다를 건너가서 수길의 죄를 성토하여라. 그리고 머리를 잘라 창에 매달고 와서 천자에게 바친다면, 천자가 너희의 공적을 기뻐하여 너희의 죄를 용서하고, 이종(彝鐘)에 이름을 새기고 기린각(麒麟閣)에 모습을 그리며, 책훈(策勳)하여 상주국(上柱國)으로 삼고 작위를 내려 개국백(開國伯)으로 삼아 왜국 국왕으로 책봉할 것이다. 그리고 조공의 길을 허락하고, 기외(畿外)의 제후에 나열되어 대대로 왕으로 일컬어질 것이고, 영원히 동번(東藩)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어 천하 사람들이 칭송할 것이며, 태사가 기록하여 백세토록 일컬어질 것이다. 적을 도와 잔학한 짓을 하고 천형을 달게 범하여 스스로 죽음에 나아가는 자와 그 거리가 어찌 멀지 않겠는가. 이는 지혜로운 자와 함께 말할 수 있고 혼미한 자와는 말하기 어려우니, 깊이 생각하고 잘 도모하여 후회할 짓을 하지 말라.”
4월에 김성일이 역질에 걸렸는데, 증상이 매우 위급하였다. 공이 박성과 함께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였다. 세상을 뜨자 함께 곡하고 염하는 것을 주관하였다. 지리산 기슭에 임시로 매장하고 서로 목 놓아 통곡한 뒤 흩어져 덕산(德山)으로 들어갔다.
이때 천장이 왜적과 강화(講和)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가고자 하였다. 공이 이에 천장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화에 대해 듣지 말고 계속 머물러 왜적들을 물리칠 것을 청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통분하게도 섬 오랑캐 풍신수길은 귀족 출신인 왜적의 우두머리로서, 숙맥을 구분하지 못하여 탐욕스럽고 방종하며 난(亂)을 좋아하고 화(禍)를 즐거워합니다. 하늘을 쏘려는 마음이 생겨 먼저 활시위를 당기고는 우리를 속이고 꾀어 길잡이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우리 임금은 하늘을 이고서 두 마음을 갖지 않고 더욱더 정성으로 대국을 섬겼습니다. 일찍이 조회 때 맹세하기를 ‘차라리 담종(湛宗)을 하고 나라를 엎을지언정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환하게 임하여 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있는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변방의 방비를 담당한 문무 장리(文武將吏)에게 신칙해서 그들로 하여금 염탐하고 경계를 엄하게 하며, 요해지를 지키고 차단하여 무찌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초여름에 감히 그 불령함을 이루어 거국적으로 침략해 오니, 배는 바다에 가득하고 깃발은 해를 가렸습니다. 그리고 부산포로 몰려와 벌 떼처럼 소요하고 개미떼처럼 흩어져 크게 노략질하니 그 예봉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변방의 방어가 한 번 무너지자 갑자기 그 빈틈을 타고서 마침내 영남의 길을 가르고 충청도를 짓밟았으며, 한양에 웅거하면서 송도를 도륙하고 쫓아가 평양마저 점령하니, 독기(毒機)가 서쪽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우리 궁궐을 불태우고 우리의 종묘사직을 짓밟았으며, 우리 백성을 베어 죽이고 우리 부녀자를 더럽히며, 우리 왕자를 볼모로 잡고 우리 중신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또 여러 도를 나누어 노략질하고 겁탈과 살육을 자행하여,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되어 온 나라가 쓰러지고 시들었으니, 이 천지가 생긴 뒤로 이렇게 극심한 변고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 임금의 탓이겠습니까. 이는 실로 지방의 방어를 맡은 관리가 충성하지 못하고 용맹이 없어서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임금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왕위에 계신 25년 동안 사냥과 성색(聲色)의 오락은 없었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있어,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을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덕에는 심한 흠이 없고 정사에도 심한 실정(失政)이 없었지만, 지금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허물을 돌릴 곳이 없습니다.
비록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다.’라고 말하지만 하늘의 뜻 또한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 흉한 불길이 가까이서 언덕을 태우자 우리 임금은 그 백성을 모두 싸움터에 차마 세우지 못하여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난 뜻으로 친히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용만(龍灣)으로 몽진하셨습니다. 성스러운 천자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마음속으로 애통해하여 사신을 보내어 위로했으며, 이어서 정중히 위문하고 거듭 풍성한 선물을 보내주시니 하늘에서 떨어진 듯 은혜가 어찌 이다지도 융숭합니까.
경건히 생각건대, 성스러운 천자께서는 우리나라가 선대로부터 한결같은 마음으로 황실을 대하지 않은 적이 없었음을 크게 생각하여 이를 사랑하고 어여삐 여겼습니다. 이에 크게 진노하여 곧 도독부 제독(都督府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내어 정벌하게 하고, 또 병부 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에게 명령해서 무리를 거느리고 독려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공사(公私)의 재물이 탕진되어 군사를 먹이고 전쟁 물자를 지공(支供)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호부(戶部)에 명령해서 곡식과 은을 내어 주고, 공부(工部)에 명령하여 병기와 기계를 내어 주었습니다. 운반되는 군수품의 앞뒤 행렬이 천리나 되었습니다. 이에 제독대인은 황제의 어명을 받들어 황제의 토벌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제독은 병부(兵符)를 가지고 이 모든 군대의 중임을 총괄하고 병사를 모아 크게 사열하니, 용맹한 군대는 숲과 같고 긴 창은 구름까지 뻗치고 붉은 깃발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아침에 궁궐에서 하직하고 저녁에 요동(遼東)과 계주(薊州)에 이르니, 산이 옮겨가고 바다가 출렁거리며 우레가 울리고 천둥소리는 빨라지는 듯하였습니다. 위엄 있는 소리가 더해지는 곳마다 초목도 색깔이 변하니, 압록강을 건너기도 전에 흉적의 간담은 이미 부서졌습니다.
군대가 관서(關西) 지방에 머물며 날카로운 칼날을 평양으로 돌려 싸우니 황제의 위엄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어린 새와 사슴을 화나게 하여 감히 교악(喬岳)에 대항하겠습니까. 피를 쏟아내 강을 파도치게 하며, 목 벤 것을 쌓아 대관(臺觀)을 높이니, 황해도 지역과 송도의 왜적은 바람결에 소스라쳐서 도망가기에도 겨를이 없었습니다. 평양과 송도를 이미 수복하여 서쪽 길이 깨끗하게 되니, 곧바로 경기도 교외를 공격하였습니다. 장차 한양에 이르러 파죽의 기세를 타고 그 괴수를 죽이고 성을 탈환하는 것은, 마치 바람이 먼지를 쓸고 서리가 마른 잎을 꺾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천장(天將)께서 어찌 병가(兵家)의 전략을 모르겠습니까. 기습과 정공(正攻)의 구별이 있지만 싸움하는 것은 용기인데, 용기는 세 번째의 북소리에 이르면 다해 버립니다. 잠시 병졸과 말을 쉬게 했다가 장차 기회를 보아서 일어서려고 하는 것일 겁니다.
또 우리 왕자가 왜적에게 잡혀 있음을 근심하여 차마 그를 해치게 할 수 없어 시험 삼아 항복을 허락하고 화의를 요청하는 것이니, 아마 장차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적을 한양에서 떠나게 하여 우리 왕자를 보전하게 하고 천천히 저들이 하는 바를 보고 도모하자는 것일 겁니다. 우리 소인들은 대군자의 헤아림이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남을 알지 못하지만, 오히려 빨리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지금 오랑캐들은 과연 지모가 궁하고 힘이 위축되어, 이미 입을 다물고 기운을 내지 못한 채 그 무리가 모두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당당한 우리 천장께서는 우리 성스러운 천자의 위엄과 신통력을 의지하고, 우리 어진 송 시랑(宋侍郞)의 계책을 도와 멀리 몰아내어 평정하니, 부평초를 헤치고 흩날리는 쑥을 걷어 내는 듯하였습니다. 한 명의 병사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도 달천(獺川) 이북과 조령(鳥嶺) 이남의 요망한 기운이 갑자기 걷히고, 우주는 열려 밝아졌으며 나라는 생기가 돌고 백성은 죽어가는 맥박을 회복하였습니다. 진실로 성스러운 천자는 우리 임금을 보살펴 도와주었으며, 우리 동국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었습니다. 정말로 우리 천장께서는 성스러운 천자의 밝은 명령을 능히 사용하여 추곡(推轂)의 부탁을 저버림이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이 사미(斯彌)와 우리나라의 천한 백성 등은 반드시 창끝과 화살에 죽을 것을 알아, 장차 고액(膏液)이 풀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달게 받아들이려 했는데, 어찌 친히 대장군의 씩씩하고 굳센 성덕(盛德)과 위무(威武)한 풍채를 볼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어찌 친히 성스러운 천자의 심원하고 광대하신 생성재조(生成再造)의 큰 은혜를 입을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교활하고 사나운 풍신수길이 하늘과 원수 맺은 것은 천하고금에 비상한 큰 변고가 아니겠습니까. 그가 천하의 백성에게 가혹함을 끼친 것이 어찌 다만 홍수가 넘쳐흐르는 것과 같겠습니까.
제순(帝舜)이 이미 하후(夏后)에게 명령해서 백성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될 것을 면하게 하였는데, 이제 우리 성스러운 천자께서도 또한 능히 우리 대장군에게 명령하여 두 나라의 얽힌 것을 풀고 천하의 병사를 쉬게 하였습니다. 왜적을 바다 밖으로 몰아내어 한 지역을 깨끗하게 한 공이 어찌 저 용문산(龍門山)을 파고 제탑(濟漯)의 물을 트게 한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여기에서 더욱 성스러운 천자께서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과 대장군이 직책을 받드는 충성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우리 임금은 나라를 잃었다가 나라를 얻게 되었고 백성을 잃었다가 백성을 얻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임금을 잃었다가 임금을 얻게 되고 집을 잃었다가 집을 얻게 되었습니다. 엄숙하고 높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공적이겠습니까. 건곤의 우로(雨露) 같은 은혜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해와 달의 빛남을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이 무엇을 생각한들 황제의 법칙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아, 천도(天道)는 따르는 자를 돕고 인도(人道)는 믿는 자를 돕습니다. 순리를 어기고 기강을 범하는 자는 하늘이 바야흐로 그 더러움을 싫어하고, 음흉하고 극악한 자는 귀신이 반드시 몰래 벌을 줍니다. 군자가 말하기를 ‘진실로 신의가 계속되지 못하면 맹세도 이로움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랑캐의 성질은 매우 간사하며 거짓되고 영악하여 믿기 어려우니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니, 천장대인(天將大人)께서는 왜적들이 거짓으로 말하는 것을 믿지 말고, 한 번 물러난 것을 통쾌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욱 황제의 위엄을 베풀고, 더욱 신묘한 계책을 연마하여 하늘의 벌을 지체하지 말고, 큰 원흉을 달아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변방을 영구히 튼튼하게 하고 우리 종묘사직을 길이 보존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동쪽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고 먼지가 일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살아남은 우리 동국 사람들의 지극한 바람입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명나라 군사가 한 번 돌아간 뒤에 왜적이 침략해 올 때마다 다시는 이끌어 도와 줄 이가 없는 것 입니다. 울타리가 철거되면 마루가 드러나고 입술이 없어지면 치아가 시리니, 우리나라의 멸망이 또한 어찌 대국의 복이 되겠습니까. 거듭 원하니 천장께서는 잘 살펴 도모하십시오.”
이해에 형조 좌랑(形曹佐郞)에 제수되었고, 갑오년(1594, 선조27)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으며, 정유년(1597, 선조30)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598, 선조31) 2월 29일 김산(金山)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향년 55세였다. 의령현 소산(所山) 곤좌(坤坐)의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은 초계 정씨로, 장양공(莊襄公) 정준(鄭俊)의 증손인 호군(護軍) 정위(鄭渭)의 딸이다. 자녀는 없으며, 측실에게서 딸을 한 명 두었는데, 망우당 곽재우의 부실(副室)이 되었다. 아들은 교관(敎官)을 지낸 만승(曼勝)으로, - 곧 백암공의 아들로 두 부모의 뒤를 이었다. - 석생(錫生), 석귀(錫龜)를 낳았는데, 석생이 백암공의 제사를 받들었다.
아, 공은 일찍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사사하였는데, 선생에게 장려와 허여를 받았고, 또 김성일ㆍ유성룡 등 제현의 추중을 받았다.
27, 8세 때 유성룡이 종숙인 참판공(參判公) 유경심(柳景深)을 위하여 공에게 신도비문을 청하였으니, 그 덕행과 문망이 반드시 남보다 크게 뛰어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전장에서 싸우고 나랏일로 힘들지라도 항상 틈이 있는 대로 공부를 하였다. 《심경》ㆍ《근사록》 같은 여러 서적들을 항상 낮에 읽고 밤에 암송하며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공과 같은 사람은 죽어서야 그만 두는 이라고 할 만하다.
아, 공이 지은 문자 중에 〈신묘봉사(辛卯封事)〉ㆍ〈격왜장문(檄倭將文)〉ㆍ〈상천장서(上天將書)〉같은 것은 식견이 고명하고 의론이 정대하여 모두 도를 아는 자의 말과 같았으나, 만년에 일어난 일인 데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 다 쓰이지 못하였다. 또 후사가 그 논저를 수습하지 못해 공의 평생 언행과 이력이 후대에 크게 전해지지 못하였다.
아, 지금 기록한 것은 진실로 공에 대해 만분의 일도 기술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봉황의 날개 하나로도 전체의 오색(五色)을 알 수 있고, 군자의 한 가지 일만으로도 평생의 많은 행적을 개략할 수 있다. 섬 오랑캐의 변란 때 삼도(三都)가 함락되고 임금의 수레가 파천했으나,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산하가 다시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은, 실로 공이 초유사의 막하에서 도와 강우 지역을 보전하여 근기(根基)를 회복하는 공이 많았기 때문이다. 〈격왜장문(檄倭將文)〉ㆍ〈상천장서(上天將書)〉는 모두 충성스런 마음과 의로운 담력에서 나온 것으로, 바로 호담암(胡澹庵)의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소와 같아서 상하 천고에 대단한 것이니, 이것은 봉황의 한 날개일 뿐이겠는가. 세상의 입언군자(立言君子)가 어찌 남은 글이 적다고 한스러워 하겠는가.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 공암(孔巖) 허목(許穆)이 행장을 짓다.
公諱魯。字汝唯。號松巖。系出鐵城。其鼻祖璜。五世至嚴冲,麟冲。俱官侍中。始大顯。公卽嚴冲之後也。其後簪組相繼。七世祖諱伯。仕麗末。至右軍摠制。知國事日非。棄官南來。卜居于宜寧世干村。六代祖諱乙賢。太祖二年。除少監。托病不就。移卜于同縣孚谷里。曾祖諱文昌。副護軍。祖諱翰。劑用監僉正。考諱孝範。通禮院引儀。娶南平文氏忠肅公克謙之後判官垠之女。以嘉靖甲辰三月二日。生公于孚谷里第。幼穎異秀拔。稍長。慷慨有志節。與兩弟畜庵普,栢庵旨。遊南冥曺先生之門。得聞爲學大方。人則與二弟講究不怠。出則與同門若鄭寒岡,金東岡諸賢。道義相磨。從事敬義。積工博約。濂洛關閩諸性理書。靡不探賾藴奧。咀嚼英華。而尢長於易理,兵術。常以見解宏博踐履精到。見推師門。文章則在公特餘事。奇簡奧妙。有左氏風。甲子。中進士。己巳。上疏請伸討乙巳忠奸。甲申。除奉先殿參奉。庚寅。登文科第三人。上疏追訟崔守愚堂永慶之冤。請竆問言根。辛卯。上封事略曰。臣傳聞日本書。有云要入大明國者。厥言兇悖。誠不可以泛然答之也。峻急則觸太豕之怒。儱侗則傷倫紀之正。殿下其以何說反之乎。鑾坡之彦。鳳閣之英。辯入雕龍。詞出凌雲。非無汲黯之直言。足以挫淮南於千里。胡銓之尺紙。可以卻胡騎之百萬。固知答是之無難也。雖然。爲文奇崛則以爲侮也而不喜。精深則以爲微也而難曉。且慮詞臣局於文體。拘於格例。因循應製。不爲反覆鋪敍。則彼必視之尋常。無所動念矣。王孫正語。楚使沮氣。漢帝卑辭。南越降心。今此擧措。機關甚緊。爲令之計。不過曰格虜心得民和而已。殿下特命製復書曰。事大交隣。有土者之常道。大固不可不事也。鄰固不可不交也。順此道者祥興。違此道者灾生。自古而已然。焉可誣乎。焉可誣乎。貴國之使。帆檣織海。而弊邦之人。不耐水行。故或時相報。而不敢頻也。頃緣諸島小酋作梗。或侵逼我邊陲。或搶擄我裔氓。是雖貴國之所不知。弊邦不能無纖芥于中。亦慮其水賊標掠也。停廢信使。垂百年矣。然交鄰之誼。未嘗小替也。今者大王以豪武之才。濟雄傑之略。殪殄僭猾。削平諸島。迅埽氛翳。廓淸區域。別遣中使。申之以幣。荐之以珍。盡還我俘僄之民。致語於寡人。自今以後。無相害也。又曰。我國信使不絶。而貴國久廢報禮。其於交鄰何。其於講好何。寡人聞言以喜曰。賴天之靈與大王之賜。世世相腆。無或相猶。俾我南洋。永不揚波。斯實以國並受其福。曷敢不卽詢于在庭。在庭之臣。咸不欲也。唯一二臣與寡人同。肆蕫儒臣。冒涉鯨濤。逖謝殊貺。貴國於入海也。護衛甚勤。其屆都也。館待甚盛。贐賚稠豊。宴及徒隷。敦回信船。追慰颿風。禮何隆也。惠何恩也。而後益知大王之鄭重也。第於書中有不可曉者。是王之左右。欲以侈言夸語。詫謾異國乎。不然。何其辭之汰耶。寡人請爲大王。陳其不可。幸平心照察焉。大明。天王之國也。不可犯也。天地之肇判也。中焉而爲中國。外焉而爲外夷。疆域各分。種類亦異。是天之所定也。非人之所爲也。是以。中國自中國。外夷自外夷。舜禹湯武之聖而不能易其俗。單于,突厥之强而不能溷其地。各以其國其醜。自盛自衰。迭興迭亡而已。天可逆乎。天不可逆也。况貴國邈在瀛海之外日出之方。環滄溟萬頃而爲之四界。壞地不知其幾千里。土氣溫腝。無冰雪墮指裂膚之苦。穀果完實。易生而早熟。多奇寶異産。皆中國他邦之所未有。人民繁夥。牛畜蔽野。別一乾坤。而爲大國焉。稱王稱帝。惟意之欲。玆之不樂而將欲何爲。昔秦始皇。呑二周而鏖六國。臨不測之淵。據億丈之城。卻匈奴數千里之外。餘威振乎六合。何其壯也。雖然。沙丘一夕。鮑魚亂臭。傳之二世。竟無噍類。威可恃乎。威不可恃也。後秦符堅。養兵幾三十年。而以符融,慕容垂。督步騎二十五萬。旌旗相望。前後千里。驅之南下。並呑吳會。顧謂大江之流。投鞭可斷。何其盛也。然而先折於劉牢之五千之兵。終敗於謝玄石八萬之卒。顚頓奔北。聞風聲鶴唳而自相蹈藉。淝水爲之成血。惡在其兵多乎。矧中國無釁。天子神明。忠良在朝。上下輯睦。發號施令。動合規度。區外諸國。悉臣悉妾。雖古之聖世。何以過此。猶天之不可階而升也。實未易圖也。大王若拂天輕擧。盡一國之衆而載之木板之上。遡風浪於萬里。撞蘇抗之一隅。始雖有憑陵蹂躙之快。終必有灾。何則。手足一指之存與不存。無加損於元氣之堂堂。而天子震怒。良臣協謨。徵天下之兵。聲大逆之罪而討之。則懸軍老師。決不能得志於中原矣。是徒知侈心可逞而竆兵黷武。不思邦本已搖。徒知奇功可辦而無名非義。不思主德爲狂。不惟於中國。孤人子寡人妻。貴國之民。獨非天民乎。安保其肝腦不塗中原之草乎。然則所得不能補其所矢。所獲不能補其所亡矣。雖大王之國。庸獨利乎。且人心不測。寧有彼此。好生惡死。人之常情。大王若長驅入燕。兩國相持。勝負未易決。聲息久未相傳。則赴鬬之軍。其父兄子弟之在貴國者。其不日夜西望苦思之而爲之怨痛乎。安知伏莽之奸雄。因此不忍。亦有圖大王之位者乎。使其餘卒。牢守境上。以待大王。則大王終何歸乎。棄縛冤而逐走獐。昔人所笑。惟大王熟念之。毋爲怨府。毋爲禍梯。大軍一動。萬命懸焉。師旅之興。豈好事也。誠出於不得已也。大王之欲向中原。不識何意乎。中朝不與朝貢。應有其由。安知諸島小酋攘竊塞徼。以致上國之怒歟。若以不得與諸國之會朝爲嫌。則當輸誠納款。以冀天子之感悟。可也。天子有包荒之量。以胡越爲一家。寧肯終絶之乎。接待違舊例。在於前時而不在今日。則亦非大王之恥也。貴國之與弊邦。猶兄弟也。大明之於弊邦。猶父子也。寧有兄弟謀害家父。而不爲救解。反助成逆亂者乎。是大王不以人道責寡人。寡人雖駑怯。其無心乎。昔南越王尉佗。黃屋左纛自稱皇帝。白首抱孫。猶思事漢。願大王。毋爲盛氣所使。靜而思之。桑楡一覺。應未一噱。若大王欲嫁禍於弊邦而無言也。誘侵上國。惹成釁隙。則是尢非相信之道也。亦非仁者之心也。方連信价而陰謀相賊。則皇天之所厭也。神明之所惡也。雖大王之百姓。其肯心服之乎。古人有言。順德者昌。逆德者亡。大王其未之聞乎。大王若不棄前好。毋生事於弊邦。則豈惟弊邦之民安。貴國之民亦安。倘不聽寡人。謀動干戈於海上。則弊邦雖區區。令悉弊賦。期於一決。兩虎之鬬。無俱生之理也。大王其圖之。毋貽後悔。高麗之末。僞姓尸居。國內大亂。戰我相尋。饑饉荐臻。民之食麥。甚於食玉。且邊海無鎭堡營壘之備。故阿只拔都。恃其鷙悍。捲都來侵。若升虛邑。厥銳莫遏。然而大敗荒山。隻船不返。骨作殲粉。魂爲旅鬼。此其明鑑。謁不戒哉。寡人因使臣。備聞大王威加海表。風生區域。龍驤虎視。無當無逆。自日本開國以來所未有之英君也。雖然。貴爲國王。位已尊矣。富有諸州。財已阜矣。翦除僭僞。功亦崇矣。混一東溟。化亦覃矣。名位旣符。事業亦著。志願已畢。更欲何求。月盈則虧。器滿則傾。此正大王持盈戒滿之秋也。人壽幾何。光陰若流。繁華一時。富貴須臾。吾生也有涯而欲也無涯。以有涯求無涯。殆而殆而。所求安樂。柰何自苦。母干天險。母盪民和。愼守封疆。圖惟永寧。外無寇敵之相侵。內有夜戶之不閉。桑麻千里。雞犬相聞。穉耊傲遊。連手謳吟。民頌至德。國稱賢君。其與犯分越境。勞民傷財。結怨於上國。墜好於鄰邦。豈不迥哉。寡人不忍負與國之義。敢敷心腹腎腸。用圭以告。惟大王熟察之。臣之如此云云。只望明陳利害。俾知順逆。只欲吐露肝膈。仰酬聖恩而已。非敢以臣言爲可用也。壬辰。公在京。聞邊報日急。與大笑軒趙公宗道。間道南還。約倡義同死生。行到咸陽。金鶴峯以招諭使。先已到郡。鶴峯卽公知己友也。公與趙公同入謁。鶴峯大喜曰。此天贊我也。時一路皆潰。列邑已空。士民奔竄。塡滿山谷。公立草通文。喻以倡義之意。鶴峯差公召募官。公卽日發行。奔走列邑。尋見士類。涕泣曉譬。先時。忘憂郭公再祐。率義旅守鼎津。而人無應之者。及見通文。又聞公之言。莫不感激奮發。於是。金沔起兵於居昌。鄭仁弘起兵於陜川。朴思謙,朴思齊,權世春,全致遠,李大期等。團結鄕兵。相繼而起。鶴峯褒聞功狀。朴而文等。又上疏以爲金沔,李魯,朴惺,鄭仁弘四人。誓心白日。期灑國恥。奮起鄕曲。倡率同志。或截遡江之賊。或勦據城之賊。軍聲日振。兵力稍强。自江以西六七邑。爲今日卽墨。收復根基。因此可立。上下敎書。略曰。金沔,鄭仁弘,李魯,朴惺,趙宗道,郭再祐等。倡合義旅。得衆已多。本道忠義猶未艾也。除某等職。以表奬之。更加戮力。又曰。天生李晟。復宮闕之有待。日望張素。報園陵之無缺云云。除公典籍。公感恩涕泣。誓不與賊共生。出募義旅。入贊籌畫。鶴峯多用公策。鶴峯之初到晉陽也。公與趙公從之。空城寥寥。絶無人影。惟見江水沄沄。徘徊瞻眺。滿目悽慘。公與趙公握手。謂鶴峯曰。晉陽。巨鎭。牧使。名宦。賊未入境。事已若此。前頭寧有下手處。不如遄死而無知。與其死於賊鋒。無寧同沈於此江之爲愈乎。將引與之赴水。鶴峯笑日。一死非難。徒死何爲。幸賴諸君之倡義。多士之相應。恢復之功。庶幾可望。如其不幸。死非晩也。遂相與痛哭而罷。郭公再祐。以斬馘爲危。禁不得斬賊。每遇賊。軍士無直前厮殺者。賊以此無怖心。肆氣長驅。公謂郭公曰。人孰無功名之心。若禁斬無賞。則軍士必懈意。何以戰爲乎。郭公用其言許斬。其後軍皆爭殺賊斬首。賊不敢逼。金公沔之軍乏糧。將有潰散之患。公以私儲官。巡到列邑。曉諭士民。宜寧得米六百八十碩。咸安一百五十六碩。山陰百餘碩。付懸官金洛。送于金公軍。時鄭仁弘幕下。無參謀人。朴公惺獨憂之。請鶴峯送公。鶴峯曰。吾得汝唯。天所助也。君欲奪此與彼。何也。且彼豈能聽汝唯乎。公曰。吾與令公。起義同事。誓共終始。今豈可舍而之他乎。朴公謝之。其見重於鶴峯如此。而守信不渝又如此。晉州世家大族。皆藏穀於智異山中。而不納糴。無以調給軍糧。鶴峯大怒。搜得十餘人。將用重律。朴公惺曰。宜猛治以懲此習。公曰。不然。凡事急之益亂。莫如以義曉之。使自輸納。鶴峯曰。君言良是。乃解其係械。開說義理。又揭榜曉諭。不閱月。得穀數萬餘碩。官,義兵糧餉。賴而不乏。癸巳元朝。公以病入山中。上鶴峯書。略曰。觀此賊勢。七八年之間。未有埽淸之期。而諸鎭將不思遠慮。用米如土。軍無糧食。雖有良將。將何爲哉。公之軍中。亦多虛文。軍官數十。可减也。營吏十餘。亦可汰也。鶴峯答曰。滿紙縷縷。無非警策之言。朋友道喪久矣。不料今日復見古人事。非但書紳。卽當施行。咸陽郡守文報至。有曰。天兵討平壤賊。殲殄殆盡。餘黨散走。連營海西者。亦一時逃遁。天兵乘勝追擊。朝夕長驅南下。適㫄邑守令多來會。拍手相賀。且曰。宜急遣都事於列邑。督辦軍糧及供給之物。以待天兵之至。公曰。不須如是急。急平壤雖拔。漢陽尙有强寇。必爲後圖。天兵無綠速來。孑遺創殘之民。不宜侵擾騷動。姑觀變善處可也。滿座大駭。斥以狂生怪說。獨鶴峯心然之。謂曰君其往候西路。師老糧盡。天兵又至。今日之勢。正在危急。農時已迫。種子亦切。一國存亡。繫于此行。具書及牒。送于都體察使。公行至礪山。天兵寂無動靜。急送一卒。還報鶴峯。時都事金穎男。方廵行各邑。大肆威虐。鶴峯見書大喜。卽令止之。公聞都體察使西厓柳相公駐節臨津。將向臨津。至水原界。逢體察副使軍官自都體察使所來者。言天兵姑無消息。而龍仁,竹山,沙平屯賊。出沒剽掠。水原,衿川之間。路塞不可往。且公下率。皆染時癘臥痛。不病者只三人。不得已因便順付書牒。轉轉還至公州。見體察副使金瓚。力請種子。金只題全羅都事所掌五百碩。遂下全州。搬運而來。西厓見鶴峯書牒。卽啓請給二萬碩於湖南。公偕從事朴而章。往湖南領來。散糶列邑。使之及時耕種。癸巳。移檄書于倭將。其文曰。天尊地卑。乾坤定矣。星分海隔。區域別矣。乾坤以定。貴賤位矣。區域斯別。華夷判矣。貴賤之位。華夷之判。皆天之所爲也。天可逆乎。天不可逆也。是故。莫貴於天子。而普天下皆其臣。莫尊於中華。而率土濱皆其地。君臣之義。賓服之禮。皆理之常然也。理可泯乎。理不可泯也。人無勝天之理。理無終剝之時。自古凶逆。萬不一全。可不懼哉。可不懼哉。玆者關伯秀吉這厮。以華種賊酋。猖猘桀驁。饕凶稔惡。旣奪源氏之國而有之。自爲長雄於無禮義之邦。殺人無辜。嗜甚芻豢。臠人之膚。剔人之骨。剖人之腹。貫人之胷。一以殘㬥。䝱制你國之人。你國熏灼其虐焰。疲於調發。困於戰鬬。嗷嗷怨讟。上干穹蒼。而環溟爲界。乘木乃行。有若鼎中喁魚。逃無歸處。從其號令。豈其本心哉。其勢必不能久長。况今先張射天之弧。妄興無名之兵。敗與國之和好。芟仁覆之赤子。犯天人之殷怒。陷萬古之大戮。雖欲假息海島。苟延歲月。必不能待矣。欽惟聖天子。高拱凝旒。本置你國於度外。貢之不許。皆你國自取。至誠請款。期於格天。可也。不宜稱兵構逆。至此無厭也。以我國言之。修好百餘年。我無爽矣。你國檣帆。織于海洋。迎送於蓬山。賓接於東平。宴慰於春官。享無不備。儀無不成。尙何負於你國乎。而忘我大德。反肆毒螫。若是之酷歟。凡我國含生食毛之類。其忍共戴一天而苟活耶。初之見刳。只緣恬嬉之久。事出倉卒而然爾。今則不然。人孰無父母妻子之愛。田園産業之資乎。痛切於人人。怨結於家家。皆思奮義而死。孰肯蒙恥而生。匹夫之怒。猶不敢當。擧國之怨。其可弭乎。母以前日之幸爲恃也。堂堂我聖天子。初出偏師於平壤。一擧鏖之。如摧枯拉朽之易。若於其時。乘破竹之勢。長驅直擣。則壓綽而擠之。如反手也。斂兵不進者。是不過姑震之。使你輩怛威自遁。矧敢與之爭鋒角勝乎。王者之師。止戈爲貴。仁涵罔外。刃莫畢屠。非力不足也。你猶不悛。夸謾求和。出不遜語。是何翅句萌傲霜雹。鷧麛抗喬嶽乎。多見其不自量也。聖天子其肯許之乎。屯據海岸終欲何爲。古語有之。師直爲壯。師曲爲老。謀犯天朝。曲莫大焉。不得已而應之。復君父之讎。何直若是。天道助順。人道助信。出爾反爾。往無不復。天之亡你。不占而知。雖以你國言之。吾知其所得不能補其所失。是何我國之人。無貴無賤無長無少。以至十萬天師。皆佩你之刀劍乎。以此益知你國之鰥寡孤獨。將不勝其叫啼呼籲於蒼蒼也。婦失壯夫。母喪愛子。子不見父。則怨將何歸。衆口鑠金。群蚊成䨓。民之所欲。天必從之。寧非惕歟。你等旣有心肝脾肺之臟。亦有食色好惡之念。余言非誣。其熟察之。怒干上天。怒干鬼神。怒干天子。怒干隣國。怒干四海之人。舉天下而讎之。若是而能保首領者。吾不信也。且你等其以秀吉。爲你之君歟。秀吉其非簒賊之魁歟。你等若以秀吉爲君而事之。則是亦簒賊之徒。畢竟難逭於天誅。豈不哀哉。倘爲威使所迫。雖聽命。苟能知秀吉之惡。將不容於宇宙之間。則捨逆取順。吉凶所在。見幾而作。日其可俟。去就之際。禍福之間也。人各有心。思之則得矣。恭惟我國王事大之忱。孚于天子。荷天子之寵。而蒙上國之援。鄰國之援。尙難易得。况上國之援乎。求賢之誠。格于上帝。帝乃默誘。夢賚飛將。勇可追風。力能拔山。手揮二十尺長劍。肘掛一百斤鐵椎。躍馬於千仞絶壁。立脚於千丈竿頭。兩腋㧖虎。雙瞳閃電。雖古之名將。未有若此之神筭者。主上得之。特賜之忠勇翼虎將軍之號。以爲先鋒。此殆天之所以授我王也。非人之所能爲也。你等其未之聞歟。千羊不能抗一彪。百鶉不能當一鶚。至則靡耳。噫。天之生材。不以地而限。你等之國。亦豈無察天人審時勢識向背之豪傑乎。苟能承天心順帝命因民願。回戈渡海。聲秀吉之罪而討之。斷頭懸槊。而來獻于天子。則天子嘉你之績。貰你之罪。勤名於彝鐘。圖形於麟閣。策勳爲上柱國。進爵爲開國伯。封之爲日本國王。許朝貢之路。得齒於畿外諸侯。世世稱孤。永爲東藩。騰于萬口。天下誦之。書于太史。百世稱之。其與贊賊爲虐。甘犯天刑。自就勦絶者。相去豈不遼哉。斯可與智者道。難與昏迷者說。勉思良圖。毋貽後悔。四月。鶴峯遘癘證。甚危劇。公與朴公惺。晝夜在傍。竭誠救療。及歿。同主哭殮。權厝于智異山麓。相與失聲長慟。而散入德山。時天將與倭虜講和。班師而歸。公乃上書于天將。請勿聽和。仍畱勦滅。其略曰。痛惟島夷秀吉這厮。以華種賊酋。不辨菽麥而饕餮放橫。好亂樂禍。生心射天。先張之弧。哄我誘我。倩我嚮道。我寡君戴天無貳。罙忱事大。嘗失諸朝曰。寧湛宗僨國而已。其敢貳乎。有赫其臨。天威咫尺。日勑邊防文武將吏。使之哨揬戒嚴。控㧖截勦。而乃於上年初夏。乃敢遂其不逞。擧國來寇。瀰洋蔽日。湊泊釜浦。蜂駭蟻散。大肆搶掠。厥銳莫遏。關防一壞。突如其升虛。遂刳嶺路。蹂湖右。蟠王京。鏖松都。赶據箕城。毒機西括。焚燒我宮闕。夷轢我廟社。芟刈我生靈。汚衂我婦女。係縲我王子。奴隷我宰樞又分剽諸道。恣行刦殺。所過殘滅。擧國靡凋。自有此天地。未有此劇變。斯豈我寡君之故哉。斯實地方守禦官。不忠無勇。有以致之。我寡君何罪焉。居王位二十五年。無遊畂聲色之娛。有宵旰憂勤之惕。而畏天之誠。亘如一日。德無甚失而政無甚闕。今忽至此。咎無歸處。雖曰人謀不臧。抑亦天意難諶。當其兇燄之密邇燎原也。我寡君不忍鬬其民。以太王去豳之義。親奉廟社之主。左次龍灣。聖天子聞之。有䀌于衷。卽遣使慰之。繼之以鄭重之問。洊之以錫賚之豐。隕自天也。渥何隆矣。欽惟我聖天子。殷念我小邦粤自先代。一心靡不嚮帝室。是寵憐之。爰赫斯怒。乃命都督府提督。出師征之。申命兵部右侍郞。領衆督之。且念我小邦公私空匱。無以犒軍供戰備也。命地官出粟與銀。命夏卿出兵仗器械。惟其所用。前後搬輸。首尾千里。於是。提督大人。銜奉天明。恭行天討。提將之符。摠玆戎重。裒兵大蒐。貔貅如林。長戟彗雲。朱旗絳天。而朝辭魏闕。夕至遼薊。山移海轉。䨓轟霆迅威聲所加。草木變色。未濟鴨江而兇膽已破。師次關西嘬鋒箕城。天威何可當也。怒其麛敢抗嶠岳乎。澌血波江。積馘掝崇觀。海西松都之賊。聞風錯愕。逃遁不暇。兩京旣收。西路爲之肅淸。直擣畿郊。將迫王京。乘破竹之勢。殪其魁而掇其城。猶風埽坌而霜摧枯也。天將豈不知。兵家之算。自別有奇正而戰勇氣也。勇氣至於三則竭矣。姑休卒息馬。將相機而擧也。且愍我王子在賊中。不忍傷之也。試許降聽和。葢將不血刃而離王京。用保我王子。徐觀其所爲而圖之。吾儕小人。不識大君子所卜度。迥出尋常。其猶有欲速之望。今者孼虜果智竆力蹙。旣噤不得出氣。盡其衆南下。堂堂我天將。仗我聖天子威靈。協我賢侍郞籌畫。長驅而壓綽之。若排浮萍卷飄蓬。不煩一兵。而獺川以北。鳥嶺以南。妖氛忽霽。宇宙開朗。國有生氣。民回死脈。信乎聖天子。其眷祐我寡君乎。其惠我東土之人乎。信乎我天將其能用聖天子明命。以無負推轂之寄乎。蠢玆斯彌。我小邦糞土賤氓等。自分必死於鋒鏑。將甘膏液之潤草。豈意親望大將軍赳赳桓桓盛德威武之儀容乎。豈意親沐聖天子穆穆渢渢生成再造之汪恩乎。玆者秀吉之驕猾鷙悍。與天爲仇者。非天下古今非常之大變乎。其貽虐於天下生民。豈特洚水之湯湯乎。帝舜氏旣命夏后。免赤子於魚頭。今我聖天子。亦克命我大將軍。解兩國之棼而息天下之兵。其驅寇出海外。廓淸區宇之功。豈在鑿龍門瀹濟漯之下哉。於是乎益仰聖天子知人之明。大將軍供職之忠也。我寡君。無國而有國。無民而有民。我小邦之人。無君而有君。無家而有家。顒乎印乎。伊誰之績。乾坤之雨露。其可謝乎。日月之光華。其可繪乎。百姓夫何思何慮。順帝之則而已。嗚呼。天道助順。人道助信。犯順干紀。天方厭穢。竆凶極惡。鬼必陰誅。君子曰。苟信不繼。盟無益也。夷性孔姦。詐點難憑。而何信之有。伏願天將大人。勿以謾語爲信。勿以一去爲快。益張皇嚴。益硏神筭。毋畱天誅。毋逋大憝。永鞏我藩翰。永存我宗祀。俾我東溟。波不揚而塵不聳。寔我孑遺東人之至望也。竊恐天師一班之後。每至侵㬥。而㪅無所扳援也。籬撤而堂衝。脣缺而齒冷。我小邦淪喪。亦豈大國之福哉。重願天將其審圖之。是年。除形曹佐郞。甲午。除比安縣監。丁酉。除司諫院正言。戊戍二月二十九日。卒于金山。享年五十五。葬于本縣所山坤坐之原。配草溪鄭氏。莊襄公俊之曾孫護軍渭之女也。無子女。側室有一女。忘憂堂之副室。子敎官曼勝。卽柏巖公一子。承二父後。 生錫生,錫龜。錫生奉栢庵公祀。嗚呼。公早事南冥先生。得其奬許。又爲鶴峯,西厓諸賢之所推重。而二十七八歲時。西厓爲其從叔參判公。求神道碑文於公。則其德行文望。必有大過人者。而雖在干戈搶攘之中。王事艱難之際。輒隨暇看討。有若心經,近思錄諸書。恒晝讀夜誦。猶恐不及。若公可謂死而後已者也。噫。公著文字中如辛卯封事,檄倭將文,上天將書。見識高明。議論正大。類皆知道者之言。而公旣晩事早世。未究其用。又無嗣續收拾其論著。凡公平生言行履歷。不大傳於後。嗟今所記。誠不足以述公之萬一也。然鳳凰一羽。足以知全體之五色。君子一事。足以槩平昔之衆行。島夷之變。三都陷沒。大駕播遷。宗祀之不亡如一髮。而山河再造。至有今日者。實公贊幕招諭。保全江右。爲恢復根基之功居多。而所謂檄倭將文上天將書。皆出於忠肝義膽。直如胡澹庵斥胡之䟽。可以上下千古。則此不啻鳳之一羽也。世之立言君子。何恨於少哉。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孔巖許穆。狀。
[주-D001] 염락관민(濂洛關閩) : 중국 송(宋)나라 때의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장재(張載), 주희(朱熹) 등이 주장한 성리학을 말하는 것으로, 그 출신지의 지명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주-D002] 난파(鑾坡) :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들이 금란전(金鑾殿)에 있었으므로 한림원(翰林院)을 난파라 하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예문관(藝文館)을 말한다.
[주-D003] 용을 조각하고 : 마치 용(龍)을 새기는 것처럼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써서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이른 말이다. 전국 시대 추석(騶奭)이 글을 잘 수식하며 지었으므로 ‘용무늬를 새기는 듯한 추석〔雕龍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D004] 능운(凌雲)의 솜씨 : 보통 능운필(凌雲筆)로 많이 쓰는데, 시문에 뛰어난 재질을 갖춘 것을 말한다.
[주-D005] 급암(汲黯)의 곧은 말 : 자기 몸의 안전을 생각지 않고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는 곧음을 뜻한다. 급암은 한 무제(漢武帝) 때 구경(九卿)으로 있으면서 감히 임금 면전에서 거침없이 바른말을 하였는데, 무제가 겉으로는 경외(敬畏)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뒤에 외직으로 쫓겨나 회양 태수(淮陽太守)로 있다가 죽었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
[주-D006] 호전(胡銓) : 1102~1180. 송(宋)나라 충신으로, 자는 방형(邦衡), 호는 담암(澹菴),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고종(高宗) 때 금(金)나라의 침입을 당하여 진회(秦檜)가 화친을 주장하자, 상소하여 진회를 벨 것을 청하는 등 시종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금나라 군사를 물리치려 하였다. 《宋史 卷374 胡銓列傳》
[주-D007] 왕손(王孫)의 …… 움츠러들었으며 :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3년 조에 주(周)나라 정왕(定王)이 대부 왕손만(王孫滿)을 보내어 초나라 임금을 위로하게 하였는데, 초나라 왕이 주나라의 보배인 솥의 크기와 무게 등을 물어보았다. 이에 왕손만이 “솥의 크기와 무게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덕에 달려 있지 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주-D008] 지금 대왕 : 풍신수길(豊臣秀吉)을 가리킨다.
[주-D009] 중사(重使) : 중요한 사명을 띤 사신이다.
[주-D010] 사구(沙丘)에서 …… 교란시켰습니다 : 진시황이 동순(東巡) 하다가 중도에 사구(沙丘)의 평대(平臺)에서 죽었는데, 따라갔던 그의 작은 아들 호해(胡亥)가 음모를 꾸미느라 수도에 갈 때까지 진시황의 죽음을 비밀에 붙였다.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므로 수레에 냄새가 많이 나는 포어(鮑魚)를 실어서 시체 냄새를 감추었다.
[주-D011] 바람 소리와 …… 짓밟아 : 《진서(晉書)》 〈사현전(謝玄傳)〉에 “부견(苻堅)이 군사 백만을 거느리고 진을 벌여 비수(淝水)에 육박하자, 사현(謝玄)은 군사 8천 명으로 하여금 물을 건너 들이치니 부견의 군대가 패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으면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남은 군졸들은 갑옷을 벗어 버리고 밤중에 도망치다가, 바람 소리나 학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모두 왕사(王師)가 몰려온다고 여겼다.”라고 하였다.
[주-D012] 호월(胡越)로써 …… 삼으니 : 호는 북쪽 나라, 월은 남쪽 나라로, 북쪽에서 남쪽까지 한 집이 되었다는 뜻으로, 천하를 통일했음을 이르는 말이다.
[주-D013] 위타(尉佗) : 한나라 때에 황제(皇帝)로 자칭한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를 말한다. 그가 진나라 남해군 위(南海郡尉)로 있었기 때문에 위타라고 칭한 것이다.
[주-D014] 황옥(黃屋) : 천자가 타는 수레이다.
[주-D015] 좌독(左纛) : 천자의 수레 곁에 세우는 큰 기(旗)이다.
[주-D016] 위성(僞姓) : 1389년 이성계 등이 우왕(禑王)은 공민왕(恭愍王)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우왕과 창왕(昌王)은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하여 두 왕 모두 폐위를 시킨 일이 있다.
[주-D017] 즉묵성(卽墨城) :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성이다. 연(燕)나라가 제나라로 쳐들어가 제나라의 모든 성이 함락되고 즉묵성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때 전단(田單)이 즉묵성에 있으면서 화우(火牛)를 이용해 한밤중에 연나라 군사를 쳐 승리를 거둔 뒤, 그 승세를 타고 삽시간에 제나라의 72개 성을 수복하여 거의 망해 가던 제나라를 재건하였다. 그리고 당시 거(莒) 땅에 피해 있던 양왕(襄王)을 맞이하여 임치(臨淄)로 들어갔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18] 하늘이 …… 기대하고 : 이성(李晟)은 당(唐)나라 사람으로, 자는 양기(良器)이다. 당 덕종(唐德宗) 때 주자국(朱泚國)을 평정하고 경사(京師)를 수복하였다. 덕종은 “하늘이 이성을 낸 것은 사직을 위해서이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天生李晟 以爲社稷 非爲朕也〕”라고 하였다.
[주-D019] 장소(張所)가 …… 바라노라 : 송(宋)나라가 중원(中原)을 금(金)나라에 빼앗기고 남방에 쫓겨 와 있을 때, 장소가 중원에 들어가 선대의 능들을 살펴보고 보고를 올렸다.[주-D020] 띠에 …… 아니라 : 중요한 말을 잊지 않기 위해 허리에 맨 띠에 적어 두는 것으로, 공자가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에 관해 말하자 자장(子張)이 이를 띠에 적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衛靈公》
[주-D021] 빈복(賓服) : 외국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는 것이다.
[주-D022] 대륙(大戮) : 사람을 죽여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시체를 전시하는 것이다.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12년 조에 “옛날에 밝은 임금이 불경스러운 자를 징벌한 뒤에, 그 고래〔鯨鯢〕와 같은 시체를 모아 높이 쌓아 놓고는 이것을 대륙(大戮)이라고 하였으며, 이 광경을 모두 보게 함으로써 흉악한 행동을 징계토록 하였다.〔古者明王伐不敬 取其鯨鯢而封之 以爲大戮 於是乎有京觀 以徵淫慝〕”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3] 봉산(蓬山) : 동래(東萊)의 옛 이름이다.
[주-D024] 동평관(東平館) : 왜국 사신이 와서 머무르던 객관으로, 현 서울시 중구 예관동(藝館洞)에 있었다.
[주-D025] 군대의 …… 피로해진다 :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12년 조에 “師直爲壯 曲爲老”라는 말이 있다.
[주-D026] 환과고독(鰥寡孤獨) :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말한다. 환은 늙고 아내가 없는 홀아비, 과는 늙고 남편이 없는 과부, 고는 어리며 부모가 없는 고아, 독은 늙어서 자식이 없는 늙은이이다. 《孟子 梁惠王下》[주-D027] 많은 …… 있고 :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 1〉에 “깃털도 많이 실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쌓으면 수레바퀴의 굴대를 부러뜨리고, 사람들이 말이 많으면 쇠도 녹이는 법이다.〔積羽沈舟 群輕折軸 衆口鑠金〕”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8] 이종(彛鐘)에 …… 그리며 : 공신(功臣)의 봉호를 받고 길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彛)와 종(鐘)은 상고시대의 제례에 사용되던 보기(寶器)로, 그 표면에 대개 공적을 기린 글을 새겼다. 기린각(麒麟閣)은 한 선제(漢宣帝)가 공신 11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걸어 놓게 한 공신각의 이름이다.
[주-D029] 상주국(上柱國) :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벼슬 이름이다. 뛰어난 전공(戰功)을 세운 공신에게 수여한 것으로, 명대(明代)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훈위(勳位)였다.
[주-D030] 하늘을 쏘려는 : 원문의 ‘석천(射天)’은 천명을 거역하고 왕위(王位)를 탐낸다는 말로, 《사기》 〈은기(殷紀)〉에 은(殷)나라 임금 무을(武乙)이 가죽 주머니에다 피를 담아 놓고서 활로 쏘면서, “내가 하늘을 쏘아서 이겼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 들에 나갔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여기서는 왜군이 명(明)나라를 침범하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31] 담종(湛宗) : 삼족(三族)을 몰살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D032] 태왕(太王)이 …… 뜻 : 주(周)나라의 조상 태왕은 빈(邠)에 살았는데 융적(戎狄)의 침입을 받았다. 나라 사람들은 융적과 싸우려고 했으나 태왕은 전쟁에 군사들이 죽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기산(岐山) 밑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빈에 살던 사람들이 다 그를 따라와 살았다. 태왕은 그때에 가서 비로소 ‘주’라는 국호를 정하고 융적의 습속을 물리치고 성곽과 궁실을 세워 나라를 경영했다. 아들 문왕(文王) 대에 주나라는 크게 팽창하고 손자 무왕(武王)의 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태왕은 무왕이 추존한 칭호이고, 그 이전에는 고공단보(古公亶父)로 불렸다.
[주-D033] 용기는 …… 버립니다 : 《춘추좌씨전》 장공(莊公) 10년 조에 조귀(曹劌)가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무릇 싸움은 용기입니다. 첫 번째 북소리에 용기는 나지만 이에 응전하지 않고, 두 번째 북소리에도 응전하지 않으면 적병의 용기는 쇠해지며, 세 번째 북소리에 적병의 용기는 다해 버립니다.〔夫戰 勇氣也 一鼓作氣 再而衰 三而竭〕”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4] 추곡(推轂) : 옛날에 제왕이 장수를 파견할 때에 바퀴통을 밀어 주면서 “곤내(閫內)는 과인이 제어할 테니 곤외(閫外)의 일은 그대가 제어하라.”라고 하며 전권(全權)을 위임했던 것을 말한다. 《史記 卷102 馮唐列傳》
[주-D035] 사미(斯彌) : 벌레 이름이다. 여기서는 이로 자신을 가리킨다. 《장자》 〈지락(至樂)〉에 “구철(鴝掇)이 천 일이 되면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이 건여골(乾餘骨)이다. 이 건여골의 침이 변해서 사미가 된다.〔鴝掇千日爲鳥 其名爲乾餘骨 乾餘骨之沫爲斯彌〕”라고 하였다.[주-D036] 용문산(龍門山)을 …… 것 : 용문산은 중국 산서성(山西省) 하진시(河津市) 서북쪽과 섬서성(陝西省) 한성시(韓城市) 동북쪽에서 황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산이다. 우(禹)가 중국의 대홍수를 다스릴 때, 용문산을 뚫어 황하로 물이 흘러 빠지게 하였고, 제수(濟水)ㆍ탑수(漯水)를 터서 바다로 흐르게 하였다.
[주-D037] 군자가 …… 없다 : 《춘추좌씨전》 환공(桓公) 12년 조에 “君子曰 苟信不繼 盟無益也”라는 말이 나온다.[주-D038] 유경심(柳景深) : 1516~157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태호(太浩)이며, 호는 구촌(龜村)이다. 정랑 유공권(柳公權)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3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44년(중종3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 좌랑, 광주 목사(光州牧使), 대사헌,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저술로 《구촌집》이 있다.
[주-D039] 호담암(胡澹庵)의 …… 소 : 호전(胡銓, 1102~1180)으로, 자는 방형(邦衡), 호는 담암,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고종(高宗) 때 금(金)나라의 침입을 당하여 진회(秦檜)가 화친을 주장하자, 상소하여 진회를 벨 것을 청하는 등 시종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금나라 군사를 물리치려 하였다. 《宋史 卷374 胡銓列傳》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정현섭 (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