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정선 이야기3
풀이 정선, 새색시의 한(恨)을 푼 난향로원
<난향산(蘭香山), 난향로원(蘭香路苑)!>
난향산, 난향로원. 이름 참 예쁘지요? 난초 난(蘭)자에 향기 향(香)자를 쓰는 산, 그리고 그 산 밑에 있는 길옆의 공원입니다. 노원(路苑)은 길 노(路)자에 나라 동산 원(苑)자를 쓰니 길옆에 있는 공원이잖아요. 난향과 노원이 또 잘 어울립니다. 바위틈과 나무 밑에 핀 난초꽃에서 난초 향이 은은하게 나는 산, 그리고 공원입니다. 누가 이름 지었는지 봉양리 앞 조양강에 비친 아침햇살처럼 감각 좋은 사람입니다. 정선의 아름다움은 자연에만 있는 게 아닌가 봅니다. 정선사람 모두의 감성이 이렇게 반짝입니다.
난향로원은 한자도 범상치 않은데요. 동산 원(園)자가 아닌 나라 동산 원(苑)자를 썼지요. 아마도 난향로원의 의미를 그만큼 크게 봤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작은 정원(庭園)의 한자와 궁궐에 딸린 후원(後苑)의 한자는 달리 씁니다. 그런데 난향로원의 한자는 나라 동산을 뜻하는 원(苑)자를 썼습니다. 마치 창덕궁의 후원을 비원(祕苑)이라 부르는 식이지요. 난향로원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그리 크게 생각했을까요.
난향산의 이름은 어느 집 새색시 이름에서 비롯했지요. 난향로원은 난향산 기슭 길가에 있는 공원이라 그렇게 이름했고요. 난향의 사연이 참 애처롭습니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박난향>
“그래, 난향아, 이제 너의 한을 풀고, 네 꿈을 펼치거라.”
마을 사람들은 난향의 시댁이 황폐화되어 가는 모습을 계속 볼 수 없었습니다. 이웃사촌이잖아요. 난향이 죽은 후 난향의 시댁에서 사람이 죽고, 대가 끊기는 화를 당했습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난향이 원귀가 되어 복수한다고 믿었지요. 마을사람들은 난향에게 예단으로 비단옷 한 벌을 바치고, 한을 푸는 제사를 정성으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난향이 죽은 후 마을 뒷산에 산신이 되었다고 믿고, 산 이름을 난향산이라 불렀지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고려 말이었습니다. 나전에는 한미한 귀족이 살았지요. 귀족 집 아들이 혼기가 찼습니다. 이에 귀족 어른은 옆 동네에 사는 박난향이라는 새색시와 아들을 혼인시켰습니다. 새색시가 시집와서 얼마 안 됐을 때였습니다. 마을 앞 조양강에 몸종을 데리고 빨래를 갔지요. 조양강은 바람에 물결을 만들며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참 좋다. 가슴이 탁 트이는구나,”
난향은 몸종과 같이 빨래를 막 시작했습니다. 속도를 내며 흐르는 조양강을 마주하고 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를 하는데, 물 위에 웬 바구니가 떠내려왔습니다. 새색시는 호기심에 바구니를 건졌고, 바구니 안에는 무당이 쓰는 무구(巫具)인 방울, 부채, 옷 등이 가득했지요. 새색시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서 어떤 기운이 솟고 방울과 부채를 흔들며 다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시아버지가 새색시를 죽은 듯이 있으라며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만 새색시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산에 있는 소나무에 끈을 걸고 목을 매 죽었습니다.
“으~ 흐흐흐, 억울합니다.”
밤만 되면 난향의 울음소리가 시댁에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며, 억울함을 말하였지요. 고집이 센 시아버지는 그저 귀를 막고 지낼 따름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난향의 시댁은 한여름 풀 마르듯 망해 가고 있었습니다.
<원한을 풀고 신이 되어 마을을 지킨 난향>
“여보게, 아무래도 난향의 원한을 우리가 풀어주세.”
“그래요. 아재.”
마을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지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요. 조양강에 떠내려오는 무당의 도구를 얻은 후 새색시가 한 행위와 시아버지의 심한 꾸짖음은 신세대와 구세대의 충돌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여성과 남성의 충돌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도와 체면에 관한 일일 수도 있고요. 물은 흐르니 변화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물로 깨끗이 씻어 정화할 수 있으니, 이상향인 새 세상을 상징합니다. 마치 <도화원기>, <허생전> 등에서 그린 이상향도 물을 거슬러 올라가 찾은 도원이었고, 물을 건너가 나타난 섬이 이상향이잖아요. 이야기에는 다양한 상징이 깃들어있습니다. 문제는 새색시가 자결할 정도로 심한 모욕 내지는 꿈이 좌절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상당히 억울한 죽음으로 한마디로 표현하면 한(恨)이 서렸지요. 죽음은 최후의 항거입니다. 새색시는 자신의 미래가 막혀 그야말로 참담했지요. 그래서 가장 강한 항거로 죽음을 택했습니다. 참고로 설화에서 무당의 도구는 진짜 무구(巫具)가 아니라, 젊은이의 새로운 의식을 드러내는 설화적 장치로 보면 됩니다.
이제 그런 억울함을 알아줄 이 세상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난향에게 줄 예단과 제물을 잘 차리세. 난향의 억울함을 우리가 알아주어야지.”
마을사람들은 비싼 비단옷을 예단으로 마련하고, 정성을 다해 제물을 차렸습니다. 정한 날이 되자 마을사람들은 모두 난향이 죽었던 장소로 모였습니다. 제사는 성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마을에서는 매년 단옷날을 동제 지내는 날로 정해 난향에게 제사했습니다. 난향에게 제사를 지내자 마을에는 환란이 없었고, 안녕과 풍요가 이어졌지요. 아이들도 잘 낳아 길렀고요. 사람들은 난향이 죽어 산신이 되어 마을을 보살펴 준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산 이름을 난향의 이름을 넣어 난향산이라 불렀습니다.
<세월이 흘러, 기개를 펴고 기자신앙의 터가 된 난향로원>
난향로원에 가면 아주 특이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커다란 두 개의 여근석과 우람한 남근석 한 개가 있고요. 게다가 물개석이 있고요. 성기를 드러낸 장승이 있고요. 여기서는 여근석을 음석(陰石)으로 남근석을 양석(陽石)이라 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공원을 난향의 이름을 따서 난향로원이라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난향로원이 만들어진 사연과 양석을 정선군 숙암리에서 북평리로 옮겨 온 사연도 기록했습니다.
음석은 1970년대 철도공사 때 땅을 파다가 발견되었고요. 음석만 있으니 여자들이 바람이 났습니다. 그러자 마을사람들은 흙으로 음석을 덮었지요. 그러자 공원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고 마을 사람들도 이유 없이 병으로 앓았습니다. 그 대안으로 흙을 파내고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커다란 양석을 사정해서 옮겨 놓았습니다. 그 후 사고도 나지 않고, 마을사람들도 건강하게 지냈습니다. 난향은 자신의 의식이 묻히기를 싫어했습니다.
음석 한 개는 좀 작고, 한 개는 좀 큽니다. 큰 음석은 할머니 음석이라 하는데요. 자식을 점지하는 삼신의 기능을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음석 사이로 빠져나오면서 자식을 기원하면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기자신앙(祈子信仰)이 되었습니다.
“여기를 공원으로 만들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북평사람들의 제안이었습니다. 이에 정선군의 도움으로 난향로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 한자는 난향의 뜻을 맘껏 펼 수 있도록 비원처럼 나라 동산 원(苑)자를 쓰세. 정선사람들이 큰 기운을 품어, 모두 자기 뜻을 펴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야.”
이처럼 난향로원의 사례는 정선사람들이 남녀 불문하고 옛 제도나 주변의 방해를 극복하고 자기의 뜻을 맘껏 펴기를 바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