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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의식의 반영이다. 인간이 어떤 의식을 소유하며 어떠한 의식의 수준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에 대응하는 현실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우리들의 구체적인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인 현실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
철학을 놓고 볼 때 의외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1철학은 현실과는 상관없는 공리공담만을 일삼거나 #2 세상을 초월한 고매한 진리를 담은 것이어서 감히 접하기 어려운 학문이거나, 아니면 #3 일상인의 지식이 바로 철학이므로 따로 철학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거나 또는 #4어려운 개념을 나열함으로써 지식을 자랑하려는 공허한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우선 뿌리가 튼튼하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술과 종교와 예술이라는 꽃과 열매가 실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뿌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각각의 학문들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며, 한 걸음 나아가서 삶의 근거와 방향을 제시해주는 기초학으로서의 철학이라는 부리가 견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원한 의식의 전통은 문화의 맥락을 단절시키지 않는다. 기초학으로서의 철학을 표현하는 개념들이 지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어서 일반인들이 접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에게 의식의 전통이 현실적인 맥락으로 제대 되어오지 못했음을 증명하여 준다. 철학에 대한 몇 가지 다른 편견과 그릇된 생각들 역시 같은 점을 말하여 준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책을 통하여 철학적인 개념 및 문제들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려고 시도하였다. 물론 이 책은 전문적인 특수한 문제를 선택하여 밀도 있게 다루는 것을 피하였으므로 다소 질서와 체계를 무시하고 산만한 주제들을 취급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일상적인 사고방식을 철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전환시키며 지양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읽는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의 주제를 자기 나름대로 사색하며 구성할 수도 있고, 편의에 따라서 관심 있는 장을 따로 선택하여 읽을 수도 있다. 철학이란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일정한 물음과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상의 관계 안에서 스스로의 삶과 세계를 체계적, 근원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필자는 읽는 이들이 이 책을 통하여 일상적인 단어들의 차원으로부터 철학적인 개념의 세계로 한발자국씩 접근하고, 나아가서는 고유한 삶과 세계의 근원을 구성하여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은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해주기보다는 읽는 이들이 구성할 수 있는 하나의 재료이다.
철학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
우리들 인간이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모습은 가지각색어서 꼭 집어서 한마디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간다고 이야기하기란 매우 힘들다. 그러나 일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사람들은 적어도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 생각을 각자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1불확실한 것을 물리치고 확실한 것을 찾으려 하며, #2 악한 행동을 피하여 선한 행위를 하고자 하며, #3 변화무상한 것으로부터 불변하는 것을 추구하고 나아가서는, #4추한 것을 떠나서 아름다운 것을 찾으려 한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대체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돌이켜보았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음미해보면 우리들은 “인간의 삶“이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차원은 자연적인 차원이고 두 번째 차원은 인간적인 차원이다. 자연적 차원에서의 인간은 동물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인간도 자연적 차원에서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식욕과 성욕의 본능에 따라서 움직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적 차원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인간적인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은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며 싫어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행복에 도달하려고 하기도 한다.
자연적인 차원은 본능의 세계라고 할 것 같으면 인간적인 차원은 의식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가리켜서 “줄타기 광대“라고 하거나 또는 “짐승과 신 사이의 다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자연적인 차원과 인간적인 차원의 두 면을 모두 소유하는 것을 잘 나타내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동시에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하나는 본능이라는 얼굴이요, 또 하나는 이성이라는 얼굴이다. 예컨대 어떤 청년이 매우 심한 폐결핵에 걸려 있을 경우, 이 청년은 본능적으로 성욕을 만족시키려는 충동에 사로잡히면서도 이성적으로는 억제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므로 본능과 의식의 두 얼굴 사이에서 고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긴 역사 과정은 한마디로 본능과 이성의 투쟁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본능과 이성의 갈등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문제를 해결하여 해결책을 얻으려고 노력하여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성을 부인하고 본능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애썼으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참다운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본능과 이성의 갈등을 피하여 본능의 세계에서 쾌락을 추구하려고 하였으며, 또 일부는 하늘의 달과 별, 들의 새와 꽃처럼 자연 그대로 살아가기를 염원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제아무리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다고 하여도 인간이란 언제나 본능과 이성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숙명적인 존재이므로, 짐승이나 새나 꽃처럼 산다는 것은 인간의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시인과 화가와 음악가가 꽃을 읊고, 산수를 그리고, 새를 노래한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본능과 이성의 복합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증명하여 준다. 시인은 꽃이 아니며 꽃이 될 수 없기에 꽃을 읊은 것이요, 화가는 산수가 아니기에 자신의 심혈을 기울여 산수를 그린 것이며 음악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육체를 떠나서 순수한 정신만을 추구하였으며 또한 순수한 정신을 소유하고자 하였다. 앞에서 내가 본능과 이성의 복합체를 인간이라고 불렀는데 이 표현을 바꾸어 말한다면 육체와 정신의 복합체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적인 자연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정반대로 순수한 정신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들은 종교에 몰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정신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육체가 “정신의 감옥“이거나 아니면 인간을 악에 물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 살아가는 동안 먹고 마시며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등 모두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육체로 인해 이러한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육체를 벗어나서 순수한 정신만을 수유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육체란 바람직하지 못한 본능을 소유한 것이며 정신은 순수한 이성으로서의 영혼을 소유한 것이다. 그들의 극단적인 예로서 우리들은 희랍 시대에 화산의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져 영원한 영혼을 찾고자 한 철인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식욕이라든가 성욕과 같은 육체적인 욕망을 감소시키거나 또는 없애버리기 위하여 단식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심한 경우에는 육체에 온갖 학대를 가함으로써 정신의 순수함을 찾으려는 예도 볼 수 있다. 이 책이 전개됨에 따라서 점차로 문제의 성격이 드러나겠지만, 정신을 무시하고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입장이든 또는 육체를 무시하고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입장이든 간에 이들 두 입장은 인간이 육체와 아울러 정신(육체와는 질적으로 다른)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육체와 정신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한 면만을 취하고자 한 것이다. 정신만을 추구하는 입장도 결국 육체를 떠날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근본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순수한 정신세계를 추구한 것인지 모른다.
세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들은 육체와 정신을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들은 인간의 본능과 이성 두 가지를 다 인정하고 이들 양자의 갈등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우리들은 일상적인 삶에서도 “건전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라든가 아니면 “정신이 맑아야 몸이 튼튼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인간은 짐승과 신 사이의 다리“라는 말도 실은 인간이 본능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인간은 확실히 중간존재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즐겁게 웃기만 하는 사람이란 없다. 언제나 슬프기만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항상 진리만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도 없으며 일생 동안 행복만을 소유한 인간도 없다.
중간존재란 무엇을 말하는가?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인간은 다름 아닌 중간존재이다. 짐승처럼 먹고 마시고 잠자며, 자신이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을 의식하는 인간이 바로 중간존재이다. 그렇게 의식하면서 “반복하여“ 다시 먹고 마시고 잠자며 지루함을 느끼는 인간이 바로 중간존재이다. 짐승과 신의 중간에 있으면서 자신이 짐승에 가까울 수도 있고 신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자신은 짐승도 신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인간은 중간존재이다. 짐승도 아니고 신도 아니면서 한번은 짐승이 되려고 또 한 번은 신이 되려고 뒤뚱거리는 인간은 중간존재이다. 인간은 짐승과 신 사이에 그리고 본능과 의식 사이에, 말하자면 육체와 정신 사이에 흔들거리는, 흔들거리면서도 멈추려고 하는 시계추와도 같다.
어느 곳에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는 숙명을 타고 난 것, 그것은 중간존재인 인간이다.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기에 육체와 정신을 조화시키려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인간을 자연적인 차원과 인간적인 차원의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3가지 일반적인 입장을 살펴보았다. 그처럼 살펴본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이 의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고찰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이곳의 나를 의식하며 그곳의 너를 의식하고 나아가서 우리들을 의식한다.
내가 나와 너와 우리들을 의식하는 것은 인간의 “사람됨“을 의식하는 것이다. 나의 의식은 나 속에서 사회와 세계를 의식한다. 나의 의식은 내 속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한 세계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나의 의식은 내가 철학의 이름 밑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사정이 허락하는 한 “철학함“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가려고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앞에서 되풀이하여 말했거니와 인간은 본능과 이성의 복합체이다. 우리는 이러한 복합체를 인간이라고 부르지만 또 다른 말로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본능과 이성의 복합체는 의식이다. 인간은 의식인 한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 의식으로서의 인간은 현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식으로서의 우리들 인간은 본능과 이성의 갈등을 통찰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현실을 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의식은 자신이 서 있는 바탕인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문제의 범위를 축소시켜서 우리들의 철학적 현실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우리들의 구체적인 과거를 돌이켜볼 때, 지나간 오랜 날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심원하고 웅대한 사색의 발자취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1우리는 사색보다는 하루하루의 삶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고, #2 개인 개인이 시민 의식을 가지기보다는 특수한 사회 지배층이 국가와 사회를 좌우하여 왔으며 #3 유교나 불교와 같은 정신적 뿌리인 종교를 보더라도 내면적인 종교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차원에서 움직이는 종교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을 지닌 오늘의 입장에서 어찌하여 우리들은 철학을 “철학답게“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철학함“이 제대로 스스로를 전개시키지 못할 때 인간의 의식 역시 자신의 현실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철학이 기초학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경우 우리들은 아직 현실 속에서 자기반성의 과정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보더라도 소년기는 방황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소년기에는 아직 성숙한 “사람됨“을 지닌 수 없다. 소년이 밖으로든 아니면 안으로든 자기 자신의 전체를 바라보며 구성하는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소년은 가정 문제, 학업 문제, 이성 문제 등으로 매일을 번민과 함께 보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철학도 성숙할 수 있는 반성의 계기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방황과 방랑을 되풀이할 것이다.
1. 미신
현대의 전자 산업 시대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 사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합리적 사고는 다분히 수학적이면서도 은연중에 경제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이 요구하는 소위 합리적 사고는 비합리적 사고와 흔히 결합되어 있으며 또한 결합하려는 강한 경향을 가진다. 그와 같은 경향이 반영해주는 것은 현대인은 여전히 미신을 최선의 무기로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가 뒤범벅이 되어 있으며,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가 혼합되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자본주의와 기계 문명이 숨 가쁘게 질주하는 지금 이곳에는 미신 내지는 미신적인 요소들이 강한 세력을 소유하고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일정한 과정이 역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역사뿐만 아니라 자연사에도 특정한 과정이 있다. 그렇다면 돌연변이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실은 돌연변이란 말도 인정한 과정을 인정하며 그 과정이 빠르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 추측하건대 아득한 태곳적의 인간들은 오늘날의 인간들처럼 발달되고 복잡한 지성 능력을 소유하지 않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해와 달과 바람 그리고 돌과 꽃 등 모든 자연 대상이 살아서 숨 쉰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본능을 충족시키려는 동기에서, 곧 배불리 먹고 편히 자려는 목적에서 특정한 대상들을 의존하였다. 신화에 등장하는 곰이나 호랑이 또는 알과 같은 개념들은 그와 같은 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하여 준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졌을 때 씨앗 자체가 빈약하거나 토질 등의 조건이 알맞지 않을 때 돋아나는 싹은 가냘프기 짝이 없다.
인간의 초기 상태는 마치 이러한 씨앗에서 돋아나오는 싹과 다를 것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싹이 적절한 영양분과 햇빛에 의하여 자발적인 유기체의 활동으로 스스로 성장해나갈 때 가지와 잎이 생기를 얻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튼튼한 식물로 성장하여 드디어는 탐스러운 꽃을 피우며 씨앗을 맺는다.
이러한 과정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이자 문화이다. 한 사물 또는 사태가 자신의 전체 과정을 거칠 때 인간의 의식은 전체성을 파악한다. 전체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분에만 머물 때 인간의 의식은 부분 밖에 파악하지 못하며, 동시에 부분만을 파악하는 의식은 아직 자신과 대상의 구분 및 자기 자신에 관한 올바른 앎을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코끼리와 장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다리만 만지고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든가, 몸통만 쓰다듬고 코끼리가 벽과 같다든가 하는 것은 결국 사물을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상태에 불과하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며 자신과 대상을 구분할 줄 모르는 의식은 미신에 물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미신은 인류의 역사 초기에 삶을 좌우한 것으로 보기 쉬우며 또한 오늘날에도 미개한 인종 사이에서 번창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보다 더 날카롭게 살펴볼 경우 상당한 문화 수준을 소유한 현대인도 다분히 미신을 신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신의 형태는 나라마다 지방마다 다르지만 그 본질은 동일한 것이다. 미신의 뿌리는 샤머니즘에 있다. 해룡을 섬기는 예를 보자. 어부들은 많은 물고기를 잡아서 생존 본능을 충족시키려고 하나 뜻하지 않는 순간 바다의 재앙을 당하여 배와 인명의 손실을 당하는 체험을 가지고 있다.
#1 바다에 대한 두려움 #2 생존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자기 방어 #3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에 대한 불확실성 등은 어부들로 하여금 의존 대상을 상징적으로 구성하게 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섬기게 되는 대상이 바로 용왕신으로 나타난다.
우리들이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미신은 #1 구체적인 양상에서 #2 내면적인 윤리관에서 #3 종교적인 초월에서 살필 수 있다. 미신을 구체적인 양상에서 보면 그 형태가 지나치게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점, 굿, 성명 철학 등 우리 주변에 일반화된 현상만을 음미해보기로 하자.
미신이란 인간의 비합리적인 행동 방식의 한 가지로 불행을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미신은 비단 인간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일부 심리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특정한 동물도 일종의 미신을 지닌다. 예컨대 비둘기가 우연히 날개를 퍼덕였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모이가 앞에 떨어졌다고 하자. 다음부터 비둘기는 배고플 경우 날개를 퍼덕이는 미신을 지닌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 개가 귀를 긁적거리고 있을 때 돌이 날아와 개를 때렸다고 하자. 이 경우 개는 얼마간 좀처럼 귀를 긁적거리지 않는 미신을 가진다고 한다.
굿, 점, 성명 철학 등은 사회적인 미신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와는 달리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각양각색의 미신도 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신 중에는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소식이 있다“,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 “꿈에 돼지를 보면 횡재수가 있다“, “임산부가 뱀 꿈을 꾸면 사내아이를 낳는다“ 등등 무수한 많은 미신들이 있다.
물론 이러한 미신들 중에는 상징적인 근거를 배후에 깔고 있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허황된 것들이다. 예컨대 눈이 충혈 되었을 경우에 실에 꿴 바늘을 바라보면 치료된다든가 발이 저릴 때 콧잔등에 침을 바르면 낫는다고 하는 미신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예로 든 미신들은 어느 정도로 일반화된 미신이고 이 밖에 아무도 모르게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미신이 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착수할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전을 던져서 앞이나 뒤가 뒤집어지는 것에 따라서 행동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부터 다섯까지 헤아린 다음에 시작한다. 또 어떤 사람은 길을 걸어갈 때 언제나 가능한 한 길의 가장자리를 걸어가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려고 한다. 각 개인은 남의 눈에 띄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저마다의 미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미신은 습관 및 심리적인 갈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개인적인 미신은 거의 한 개인에게 습관화되어 있어서 그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미신을 저버리기 어려우며 #2 그러한 미신은 행운을 가져다주리라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비록 현실이 그렇지 않을지라도 각 개인은 욕구와 현실의 갈등 속에서 우연적으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신념으로 자신의 미신을 은연중에 고집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개인적인 미신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미신이 성립한다.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지금 이곳의 사회적인 미신의 형태로는 굿과 점 등이 있는데 굿이나 점 등은 그 종류를 헤아리자면 수없이 많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히 일반적인 특징만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우주와 아울러 인간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절대자(또는 절대자들)를 믿으며 그것을 일컬어 신령님이라고 부른다. 보이지 않는 신령님의 힘을 빌려 인간의 앞날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을 사람들은 무당이니 점쟁이니 심한 경우에는 도인이니 하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무당이나 점쟁이나 도인의 행동방식을 철학이라고 일컫는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연을 손바닥에 놓고 보듯이 환하게 알아서 길흉화복을 좌우할 수 있는 이들을 사람들은 원하며 또한 그러한 이들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볼 때 미신이란 결국 앎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미신 자체를 확실한 앎, 선과 악에 대한 가치,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기준을 결정해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신과 철학을 혼동할 뿐만 아니라 미신을 유일한 철학으로 믿는다. 그들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며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대상이나 힘에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미신의 일반적인 특징을 밝히기 위하여 나와 남들의 몇 가지 구체적인 예들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첫 번째 예로 김군은 중학교 3학년이고 그의 형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김군과 그의 형은 모두 자기 반에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 입시가 두 달 가량 남아 있었다. 김군의 모친은 두 아들에게 온갖 희망을 걸고 있었으며, 아들들이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에 입학하기를 고대하면서 두 아들을 뒷바라지하여 왔다. 어느 날 동네에 족집게처럼 점을 잘 친다는 관상쟁이 할머니가 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김군의 모친은 두 아들을 데리고 마침 관상쟁이 할머니가 점치고 있는 집으로 갔다. 관상쟁이 할머니는 김군에게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문제없겠다“라고 말했고 김군의 형에게는 “누워서 대학에 들어갈 테니 아무런 근심도 말아라“라고 말하였다. 두 달이 지나서 김군은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그의 형은 대학 입시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번째 예로 최교수는 풍수지리에 밝았으며 또 실제로 묏자리를 보아주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시골에 가서 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그곳에서 역학에 정통한 은사를 만나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는 신선의 도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인상을 받았다. 사십 중반에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된 그는 강의 시간에도 자신의 믿음을 간간이 털어놓곤 하였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통일하면 앉은 채로 허공에 둥둥 뜬다.“ “마음을 집중하면 십리 길도 한걸음에 치달릴 수 있다.“ “벽을 바라보며 마음을 깨끗이 하면 온 누리의 진리가 다 보인다.“ 이와 유사한 예로는 임모씨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지위에 있으며 학문도 깊은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몇 대 할아버지 때부터인지 집안이 계속 기울어가고만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 그는 문중에서 한사코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10개의 무덤이 모두 벌레와 습기 투성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양지바른 곳으로 묘를 옮겼더니 그 다음부터는 집안이 점차로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예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박군이 정신병 증세를 나타낸 지 네 달째나 접어들고 그 동안 박군집에서는 교회 목사를 불러 안수 기도를 받게 하기도 했으며 정신 병원에 두 달 입원도 시켜보았으나 차도가 없자 이름난 무당이라고 하는 쌍둥이 무당을 불러 굿을 벌리기로 했다. 쌍둥이 무당은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3일 동안 굿을 하면서 박군은 분명히 정상인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장담을 하였다. 박군은 보름 후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세 가지 예를 들어보았다. 첫 번째 예는 관상의 경우이다. 사실 잘 먹고 잘 살아온 과거를 지닌 사람의 얼굴은 윤기가 흐르며 앞으로도 얼마간은 그 상태가 계속될 확률이 많다. 인간은 자기의 마음을 얼굴로 표현한다.
근심 걱정이 많은 사람은 자연히 어두운 얼굴일 테고 노력하며 꾸준히 자기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칠 것이다. 점쟁이에 따라서 그러한 감각이 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보다 둔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장님 점쟁이가 점쟁이 업을 청산한 다음 자신은 손님의 목소리와 옷 스치는 소리에 따라서 점을 쳐주었노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점을 치거나 굿을 하거나 또는 지관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현실의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들은 물질의 욕망을 만족시키면 정신적인 욕망도 따라서 충족되리라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 점, 굿, 작명 등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나와 우리 집의 부유함과 편안함만을 목적으로 하고 우리들 모두의 행복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삶이 스스로의 결단과 노력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믿는다.
철학은 필연적으로 전체성에 관한 통찰을 전제로 삼는다. 철학이 인간 사회를 문제로 삼을 때 개인과 가정과 사회 및 국가 모두가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나만이 존귀한 것은 아직 미신의 차원이다. 왜냐하면 미신은 오직 부분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앎을 문제로 삼을 때, 인간이 앎을 구성하는 과정과 능력에 의하여 분명히 참다운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려고 한다. 그러나 미신은 무조건 어떤 대상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으며 그 이외의 것은 모두 헛된 것이라고 고집한다. 선과 악을 다루는 가치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미신은 확실히 인간에게 어느 정도 감정적인 만족을 채워주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의지하여야 할 곳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을 때 미래의 행복을 분명히 보장해준다고 하는 상징은 욕구불만을 얼마간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인간이 무한히 외적인 것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려고만 한다면, 그의 욕구충족은 끝까지 완성되지 못한 채로 언제까지나 외부적인 힘에만 자기 자신을 맡기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미신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이며 그것도 발전되지 못한 하나의 방식이지 결코 삶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미신이 널리 퍼져 있어서 세력이 강한 사회에서는 자연적으로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발전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회에서는 정치, 경제적으로는 영웅주의가, 예술에서는 천재론이, 종교에서는 절대적인 인간만이 엄청난 힘을 소유하여 여타의 인간들은 자신의 삶을 결정하기를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기를 포기하게끔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점, 굿, 풍수지리, 작명 등을 통하여 자신과 가정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욕구가 달성될 수 있기는 해도 언제나 달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의식이 자기반성을 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미신을 철학과 동일시한다. 미신은 철학이 출발할 수 있는 시초가 되기는 해도 전적으로 철학과 동일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미신은 여전히 부분적이며 외부적인 데 비하여 철학은 전체적이며 내면적인 성격을 본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미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간 의식과 문화가 현실적으로 전개될 수 없다.
2. 일상적인 지식과 철학
일상적인 지식을 곧 상식을 말한다. 상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일상 사회에서 습관적으로 통용되는 지식이고 또 하나는 건전한 합리적인 지식이다. 우리들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습관적인 지식이 심오한 지혜보다는 훨씬 더 유용하며 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제공해준다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온종일 일정한 장소에 틀어박혀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보다 여러 동료들이나 선후배와 담소하기도 하고 지껄이기도 하는 것이 훨씬 더 나 자신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월급만 꼬박꼬박 타먹으며 연구를 하든가 아니면 일 년에 한 권의 책을 온갖 고된 노력 끝에 번역하거나 집필하여 쥐꼬리만 한 인지세를 받고 기뻐하기보다는, 적절히 증권 투자를 하거나 아파트 투기를 하여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훨씬 현명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을 공경하며 아내는 남편을 받드는 것이 자명한 윤리적 진리라고 믿는다.
사실 우리들은 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나날을 살아간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지식이 생활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적 지식을 순간순간을 메꾸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인즉 일상적 지식은 내면적 의미를 전혀 문제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금 내가 입석 버스를 타고 어린이 대공원 앞에서부터 영등포 시장까지 출근을 한다고 하자. 나는 버스 값은 얼마이고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어디쯤 가면 앉아서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지식은 나의 삶의 의미를 전혀 묻지 않는다. 그러한 지식은 한없이 반복하여 순간순간 “지나쳐“버리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은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니며 또한 어려울 수도 없고 오직 일상적인 지식만이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람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은 소위 에세이를 쓴다는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해방 이후 몇몇 철학 교수들이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쓴 에세이의 제목들은 젊은이들의 메마른 감정을 적셔주고 불태워주었으며 손이 닿지 않아 긁지 못하는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 같았다. 또한 그러한 에세이들의 내용은 사랑과 죽음, 영원과 순간, 아름다움과 미움, 종교와 학문…….등등에 걸친 삶의 모든 것을 굶주린 젊은이들에게 풍만하게 선사하는 것 같았다.
에세이는 곧 철학이었다. 왜냐하면 에세이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진리와 지혜를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70년대,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어떻게 보면 너도나도 에세이를 쓴다. 교수도, 목사도, 정치가도, 군인도…….모두 붓 가는 대로 에세이를 쓴다. 그러나 과연 에세이가 철학인가?
어느 대학 철학 교수이며 저명한 수필가로 손꼽히는 어떤 교수는 그의 회갑잔치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다. “해방 전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나는 해방과 함께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일본치하에서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나 또한 대학 교수가 되어 철학을 계속해서 연구하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학 교수가 된 후 그럭저럭 강의 준비도 했으며 한두 편의 논문도 써 보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철학적인 소질이 안 된다는 것을 판단한 후 세상 사람들에게 평범한 삶의 진리를 나 나름대로 전하기 위해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처럼 말한 교수의 뜻을 다음처럼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1철학은 어렵고 심오한 것으로 에세이와는 다르다. #2 어렵고 심오한 철학은 무의미하고 평범한 진리를 담은 에세이가 참다운 의미의 철학이다. 회갑 잔치에서 이 교수가 물론 자신은 철학이 너무 어려워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노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한 것 같지만 그의 내면에서 하고 있던 말은 결국 에세이가 철학이라는 것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매일같이 신문 광고를 메우며 서점에 질펀하게 요란한 장정들로 진열되어 있는 대부분의 에세이는 가벼운 글로 되어 있다. 순간적인 일상 사건에 대한 느낌이라든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생각이라든가 지나간 날에 대한 짧은 회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에세이의 특징이다.
물론 에세이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도 있으며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에세이는 대체로 체계적이며 논리적인 글은 아니다. 문학적인 정취를 담고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에세이라고 생각된다.
철학은 앎과 가치 그리고 있음의 문제 및 아름다움의 문제 등을 논리적, 체계적으로 취급하는 학문이다. 에세이와 철학의 출발점이 일상적인 삶이요, 양자의 목표가 지혜인 점에서는 에세이와 철학이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양자의 형태가 현실적으로 분명히 각각 구분되는 한에 있어서 에세이와 철학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에세이는 일상적인 삶을 대변하는 것이요, 철학은 일상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이다. 만일 앎이나 가치 등의 문제를 체계적, 논리적으로 다룬 에세이가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에세이는 “지나쳐“ 버리는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느낌 또는 기분을 묘사한다. 그리고 보다 나은 경우에는 삶의 진리나 지혜에 대한 어떤 암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에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령 에세이가 삶의 지혜나 진리에 대한 암시를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체계적인 전개를 결여하고 있으므로 학문들의 근거를 확립시켜 주거나 아니면 문화의 진로 내지는 문명의 방향을 변경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에세이는 특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단순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요사이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에세이와 철학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심지어는 어느 고등학교의 철학 담당 교사가 학생들에게 철학 참고서로 에세이를 여러 권 추천하는 현실을 목격할 수 있다. 만일 청소년들에게 에세이를 철학 입문서로 읽힌다면 그들이 대학에 가서 철학을 배울 때 매우 낭패하고 당황하며 철학에 대하여 실망하고 말 것이다.
에세이는 꿈과 낭만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불만과 고뇌를 해결해 주는 것 같았는데 대학에서의 첫 번째 철학 시간에서 “학문이란 무엇인가?“, “논리적 사고“ 등에 관한 강의를 듣고 대학에서 배우는 철학은 어찌하여 낭만적이지 않고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지를 의심하게 되어 결국에는 흥미를 잃고 마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에세이가 일상적인 삶을 바탕으로 삼고 지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철학과 동일한 점이 있긴 해도 에세이 자체가 바로 철학인 것은 아니다. 에세이가 일상인들에게 가져다주는 장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에세이를 통하여 우리들은 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으며 내가 직접 체험하지 못한 지방이나 대상 또는 인간에 대하여 간접 체험을 할 수 있고 에세이를 쓴 이의 느낌과 나의 느낌을 비교할 수 있다.
하기야 들에 구르는 돌 한 덩어리, 산에 핀 꽃 한 송이를 보고도 우리들은 자신과 대상을 연결시키기도 하고 자연의 신비를 체험할진대, 어떤 특정한 사회분야에서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 정성들여서 붓 가는 대로 쓴 에세이를 보고 느끼는 바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에세이와 철학 양자가 모두 지혜를 추구하는 점에서는 같으나 에세이는 어디까지나 창조적인 예술적 행동에서 나오며 철학은 학문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들 두 가지는 엄연히 구분된다.
에세이가 비록 지혜를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단편적, 부분적인 대상을 느낌으로 파악함에 비하여, 철학은 대상을 전체적, 논리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점에서 이들 두 가지는 역시 서로 다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일상적인 지식역시 에세이와 마찬가지여서 반복하는 순간적인 방편이 되기 때문에 보편성 및 필연성을 지니는 학문적인 철학과 구분된다. 이곳에서 나는 일상적인 지식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을 에세이로 보아 에세이와 철학은 명백히 구분되는 것이고 따라서 일상적인 지식과 철학도 분명히 구분된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하였다.
3. 철학은 과연 어려운 학문인가
앞에서 우리들은 일상적 지식 또는 우리들의 주변에서 일상적 지식을 대변하는 에세이와 철학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에세이를 쓰는 사람 중 일부는 일상적인 지식 안에 온 누리의 진리가 다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도 없지만 일반적으로 에세이는 순간적이며 부분적인 느낌을 쓴 짤막한 글이다. 에세이가 신선하고 짧아서 산뜻한 맛이 있을지는 몰라도 논리적,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이를 쓰는 사람 중의 일부 그리고 에세이를 읽는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은연중에 철학과 에세이를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결같이 철학이란 일상적인 것이며, 어렵고 난해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철학 책이란 헛된 “짓“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보기에 철학이란 일상적인 지식에 들어 있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소위 철학 책이라고 일컬어지는 책을 펼칠 때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는가? 일상적인 지식이 진리라는 견해를 대변하는 수필가 및 그것을 읽는 청소년들은, 한편으로는 철학이란 일상적인 지식 안에 모두 들어 있는 것으로서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와 정반대로 철학이란 애매모호한 개념들을 복잡하게 얽어놓아서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난해한 내용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에세이를 써온 사람들이 인정하든 또는 인정하지 않던 간에 그들이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청소년들에게 전혀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청소년들은 #1철학은 일상적인 것이다. 그리고 #2 철학은 일상적인 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심오하고도 숭고한 세계의 진리를 난해한 개념들로 다루는 학문이라고 하는 갈등 속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청소년들은 철학이 달콤한 에세이이기를 갈망하지만 일단 철학 책을 손에 들면 첫마디부터가 이해할 수 없는 글들로 가득 찬 것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다름 아닌 에세이에 있다. 현재는 너도나도 에세이를 쓰지만 해방 이후 70년대까지는 주로 대학의 철학 교수 몇 사람이 에세이를 썼으며 그것을 읽는 청소년들은 철학 교수의 글이니까 달콤한 에세이가 바로 철학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시론에 버금가는 에세이를 쓴 철학 교수도 있지만 청소년들의 정신세계를 혼란시키는 에세이가 대부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철학은 과연 어려운 학문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그렇다는 답과 아니라는 답을 다 같이 할 수 있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철학 나름대로의 특수한 개념들을 사용한다. 임어당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한 페이지도 읽기 전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덮어버리고 말게 된다고 한 말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개념을 철학이 사용하는 것을 조롱한 것이다.
읽는 이들이 이 책을 펼쳐나감에 따라서 점차로 접하게 되겠지만 사실 철학은 다른 학문에서 사용하지 않는 특수한 개념들을 사용한다. 철학이 탐구 대상으로 삼는 문제에 따라서, 철학의 방법론에 따라서, 그리고 철학의 분야에 따라서, 철학은 무수하게 많은 특수한 개념들을 사용한다. 상식인이 읽기에 이들 개념은 지나치게 낯선 개념임에 틀림이 없다.
일상인이 보기에 철학적인 개념들이 난해하다고 하는 것은 철학이 나름대로의 특수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들의 구체적인 지나간 삶의 역사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지난 날 우리들은 거의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여 왔다. 반만년의 무궁한 역사와 삼천리금수강산, 세계에서 가장 두뇌가 우수한 우리들…….등 우리는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누구인가? 세계가 좁아졌고 이곳과 저곳을 비교할 수 있게 된 지금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역사가 상당히 고달픈 역사였다는 것 그리고 삼천리금수강산이기는 하되 별로 자원이 신통치 않은 땅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여유가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사고하는 힘을 강화시킬 수 있다. 유교나 불교 등은 주로 지도층의 소유물로 정치적인 색채가 강했으며 민중에게는 사상이나 종교로서의 유교나 불교가 아니라 여전히 샤머니즘적인 요소만을 지닌 유교와 불교가 퍼졌다.
소수의 지도층을 제외하고는 먹고살기에 바빴으며 잘 먹을 시기에는 놀기에 바빴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우리말은 사유 언어라기보다는 생활 언어이다. 생각이 아니라 느낌이 풍부한 언어가 우리말이다. 따라서 논리적, 체계적인 사유 언어로 구성된 철학적 개념들이 우리들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난해하게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학문으로서의 유교나 불교를 대할 때 우리들은 매우 친한 것 같으면서도 유교와 불교의 용어들이 난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학문과 더불어 철학이 소개되었을 때 그것은 특수한 사람들만이 소유하는 학문이었다. 구체적인 일상생활이 삶의 전부였던 우리들이 극단적으로 추상적이고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대할 때 그것은 우리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멋과 흥에 젖은 우리들에게 분석적인 논리로 가득 찬 철학이 맞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세계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으로 점차 가속도로 좁아져갔다. 우리도 우리끼리만 모여 살 수 없고 다른 나라 및 민족과 겨누며 어울려 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전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인간의 역사를 “신화로부터 이성으로의“ 전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화란 유한한 능력을 가진 인간과 무한한 능력을 지닌 신들이 어울려 만드는 종합적, 환상적, 윤리적, 이론적, 신비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의 상태와도 같다. 어린 아이에게는 이 세계가 신비의 세계이며 그 안에서 어린 아이는 희망과 절망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맛보며 아직 자기 자신과 대상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어린 아이에게는 아직까지 본능적인 것이 우월하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소년, 청년, 장년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자신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하여 보다 정신적으로 빨리 성숙할 수 있다. 결국 우리들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는 바로 의식의 역사이다. 우리들의 자발적인 의식이 스스로의 내면을 날카롭게 응시하며 자신을 발전적으로 구성해나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들과 멀었던 것 그리고 낯설었던 것은 능히 극복하고 소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물음을 제기해보자 철학은 과연 어려운 학문인가? 만일 우리들이 철학을 다른 개별 학문과 마찬가지의 학문이라고 하는 전제를 미리 가지고 있다면 이 물음은 그다지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철학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무엇보다도 가장 큰 편견은 철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어떤 지혜“라고 보는 것이다. 만일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가장 현명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삶의 온갖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어떤 지혜“일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삶의 문제에 대한 그러한 절대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삶에는 그와 같은 절대적인 해결책도 있을 수 없다.
철학도 수학이나 물리학 또는 정치학과 마찬가지로 학문이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철학을 미신과 똑같이 보는 자세이다. 우리의 교육 현실을 살펴볼 때, 적어도 고등학교 과정까지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인문, 사외, 자연 과학을 접한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철학을 고등학교의 선택과목으로 넣자는 견해가 나와서 일부 고등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고등학교 시절에 접하지 못한 사람이 대학에 와서 한 학기 몇 시간 동한 철학을 접하고 더 이상 철학과 친할 수 없을 때, 그 사람은 #1철학은 비현실적이며 #2 철학은 실천과는 상관없는 공허한 이론적 개념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3 다른 학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만일 물리학은 쉬운 학문인가? 경제학은 쉬운 학문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물리학이나 경제학은 어려운 학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가끔 몇몇 정치가나 경제인이 연설 자리에서 말하는 그러한 철학이 아니다. 어떤 정치인이 “우리 민족에게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 또는 어떤 경제인이 “기업 경영에는 각 기업인의 투철한 경영 철학이 있어야 한다“ 라고 주장할 때 그들이 말하는 철학은 학문으로서의 엄밀한 철학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보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들은 철학이라는 개념 대신에 “세계관“ 또는 “인생관“이라는 말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견해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수학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초보적인 산수와 기하를 습득하고 차례로 난해한 문제로 옮아가게 되면 수학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과 안목을 가지게 되며, 수학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철학도 수학의 경우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왜냐하면 수학이나 철학이나 모두 우리들이 매일 반복해서 숨 쉬고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산수나 기하가 일상생활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앎이나 가치도 일상생활을 전혀 무시한다면 의미가 전혀 없다.
물론 앞으로 상세히 이야기되겠지만 인식론을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인식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안다는 것이다. 인식론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한 분야이다.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고 하자 “이 꽃은 장미꽃이다. 당신은 이 장미꽃을 어떻게 아는가?“ 인식론이라고 하면 개념이 어려운 것 같으나 위의 물음이 바로 인식론의 핵심을 지적해내는 물음이다. 위의 물음에 대하여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이 장미꽃이라는 것은 안다“고 감각적, 경험적으로 답변했을 때 그렇게 답하면서 우리들은 별다른 의심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만지거나 냄새 맡거나 보거나 듣거나 맛을 봄으로써, 곧 오감에 의지하여 사물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서 다음처럼 묻는다고 가정해보기로 하자.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으로 장미꽃을 알 수 있는가? 개미나 개도 눈이 있으니 이들도 눈으로 보아 장미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 물음에 접하여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개미나 개에게 장미꽃은 우리들 인간이 생각하는 장미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대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대체로 #1밖에 어떤 대상이 있고 또한 나라는 주관이 있으며 #2 나라는 주관은 밖의 대상을 보고 만지면서 동시에 그 대상을 생각하고 #3 그리하여 결국 그 대상에 명칭을 붙임으로써 앎이 성립한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밖에 있는 객관 “어떤 것“을 주관인 나는 감각과 사고에 의하여 “장미꽃“이라고 이름 붙인다.
지금까지 장미꽃을 놓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지 일반적인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만일 우리들이 이처럼 앎의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한 가지를 차근하게 살펴간다면 점차로 주관, 객관을 위시하여 직관, 경험, 이성 등의 개념 및 나아가서는 경험론, 합리론 등 인식론에서 흔히 사용하는 낯선 개념들을 소화할 수 있게 되어 드디어는 인식론이 어떤 것이라는 윤곽을 작을 수 있을 것이다. 있음의 원리를 다루는 형이상학, 가치문제를 다루는 윤리학, 사고와 언어의 질서 및 규칙을 취급하는 논리학, 아름다움의 문제를 다루는 미학 등도 인식론의 경우처럼 한걸음씩 밟아 올라간다면 문제의 범위와 성격을 파악하게 될 것이고 전체적인 안목에서 철학의 본성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파악하게 될 것이다.
철학은 과연 어려운 학문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처럼 답할 수 있다. 철학은 학문이다. 그러므로 철학도 수학이나 물리학, 정치학 등과 같이 어려울 수도 있고 쉬울 수도 있다. 철학이 다른 학문들과 다른 차이는 다루는 대상에 대한 입장과 방법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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