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해병대
육군의 추태와 데이비스 대대의 용전
한편 장진호에서 동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육군 제7사단 제31연대의 패잔병들은 페이스 중령의 지휘하에 필사적으로 하갈우리 쪽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해병 항공대 출신의 관제장교인 에드워드 스템포드(Edward Stamford) 대위가 이 부대와 함께하고 있었다. 스템포드 대위의 관제에 따라 코르세어기의 절묘한 지상 지원이 이루어진 덕분에 이 부대는 거의 대학살을 당하는 지경의 패퇴 와중이었음에도 전멸만은 면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오폭으로 아군의 희생자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얼마 후 페이스 중령이 전사하자 어처구니없게도 해병대 출신이자 조종사인 그가 남은 부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한편 리처드 라이디(Richard Reidy) 중령의 제31연대 2대대는 고토리 남쪽의 황초령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마침 알몬드가 연락기를 타고 그곳을 내려다보니 여러 대의 차량이 부셔져 있고 장비들이 버려져 있었다. 그는 조셉 거페인(Joshep Gurfein) 소령을 라이디 중령에게 보내 상황을 알아보고 진격을 서두르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라이디 중령은 황초령 고개를 확보하고 있는 부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소령은 “대대장의 건의는 군단장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하더니 사실상 부대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결국 전진이 재개되었지만 도로 장애물을 치우는 병사들의 실수로 부비트랩이 폭발하면서 병사들은 중국군이 공격하지 않았는데도 공황 상태에 빠졌다. 겨우 12월 1일 오전 2시 30분에야 무질서하게 고토리에 들어와 방어선의 한 귀퉁이를 맡게 되었다. 스미스 장군은 특유의 온화하고 실제보다 남의 과오를 줄이는 스타일대로 “제31연대 2대대의 전술행동은 인상적이지 않았다”라는 감상을 비망록에 남겼다.
한편 유담리의 두 해병연대는 이렇다 할 전투가 없자 오히려 중국군이 병력을 집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그래서 리첸버그 대령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즉 유담리에서 덕동 고개까지의 길은 활모양으로 휘어 있는데, 일개 대대로 하여금 이를 직선으로 산악행군으로 돌파하여, 덕동 고개를 포위하고 있는 중국군의 후방을 습격하여 중대를 구출하고 탈출로를 완전히 확보하기로 한 것이다.
제7해병연대 1대대장이자 과달카날, 글로스터 곶, 펠렐리우에서 싸운 레이몬드 데이비스(Raymoand Davis) 중령이 이 중책을 맡았다. 그사이 다른 대대들은 각 방면에서 적의 접근을 차단하다가 테플럿의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선봉으로 탈출하고 이어서 각 부대가 차례로 빠져나간다는 계획을 짰다. 데이비스의 대대가 덕동 고개의 F중대에 합류하는 순간, 테플럿 대대가 덕동 고개에서 합류할 수 있다면 이상적인 작전이 될 터였다. 이 전투에서 장거리 155mm 곡사포대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포탄을 모두 쏜 다음에는 포병도 ‘모든 해병은 소총수’란 모토대로 보병으로 싸우게 하는 등 최대한 병력을 확보했다. 12월 1일 저녁 9시, 데이비스의 대대는 사단의 운명, 어쩌면 한국의 운명이 걸린 산악 돌파를 시작했다.
매 3분마다 유담리의 곡사포 대대에서 조명탄을 쏴주고 병사들은 침낭과 무기를 제외한 모든 장비는 두고 갔다. 그리고 여분의 공용화기 탄약은 들것으로 날랐는데 이것은 나중에 부상자를 나르는 데 사용되었다. 음식을 평소처럼 먹을 수 없기에 과일 깡통이나 크래커, 캔디 등을 휴대했다.
다행히 중간 지점까지 중국군의 저항은 없었지만 아예 길이 없는 깊은 산속, 그것도 혹한 속의 행군은 그 자체로 전투 이상의 고난이었다. 빙판길에 미끄러진 해병은 수십 미터 밑으로 떨어졌고, 그때마다 손에 손을 잡고 인간 띠를 만들어 전우들을 끌어올렸다. 1520고지 기슭에서 새벽 4시에 중국군과 조우하자 대대는 기습적으로 박격포탄과 기관총을 퍼부어 1개 소대 규모의 적병을 전멸시켰다.
부대가 재편성을 위해 행군을 정지하자 탈진한 병사들은 그대로 눈 위에 쓰러져 혹한도 적탄도 아랑곳 않고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놔뒀다가는 ‘편안한 죽음’ 즉 동사하기 십상이었다. 장교와 부사관들은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깨웠다. 물론 낙오자도 있었지만 그것을 일일이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데이비스 중령은 자신이 정상적인 명령을 내리고 있는지 스스로도 확신이 안 서 때때로 중대장에게 확인을 구할 정도였다. 이런 겨울을 견디며 그 또한 펠렐리우에서 44도의 폭염을 이곳에서는 영하 40도의 추위를 모두 겪는 보기 드문 군인이 되었다.
밤새 그야말로 초인적인 강행군을 한 데이비스의 대대는 12월 2일 아침 6시, 덕동 고개 아래의 능선에 도달했다. 81mm 박격포와 항공 지원을 받으며 중국군의 저항을 두 번 물리치고 11시에 덕동 고개의 F중대와 합류하였다. 데이비스와 바버는 당연하게도 전투 후 살아서 명예훈장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5일간 F중대는 26명이 전사하고 3명이 실종되었다. 부상자는 89명이었는데 장교 7명 중 6명이 부상자였다. 특히 데이비스 대대는 군의관 피터 아리올리(Perter Arioli)가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희생되는 뼈아픈 손실을 입었다. 사실 데이비스도 저격을 받았지만 몇 센티미터 차이로 전사를 면한 바 있었다.
그리고 12월 1일 오전 8시, 두 해병연대는 전차와 불도저를 앞세우고 ‘남쪽으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이미 포탄을 다 쏘고 포병들이 총을 잡아 쓸모가 없어진 155mm 곡사포의 포신에는 전우의 시신을 붙들어 매었다. 박격포 사격을 앞장세운 중국군의 공격을 저지하며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12월 3일 오후 2시 30분경, 마침내 덕동 고개에 이르렀다. 덕동 고개의 부상자들은 모두 차량에 태웠는데, 심지어 자리가 모자라서 연대장용 지프에도 부상자가 가득 탔다.
물론 해병 항공대의 정찰기와 ‘검은 수호천사’ 코르세어기가 중국군의 동정을 살피고 조금만 움직임이 보이면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소사를 가했다. 저녁 무렵, 마침내 선두 부대는 하갈우리 진지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대원들은 ‘해병대답게’ 전열을 가다듬고 질서정연하게 행군하면서 사단 본부로 들어갔지만 아직도 철수는 멀기만 했고, 그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