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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이완용 - 이병도 - 이장무 - 이건무
마루(김태홍) 추천 0 조회 741 14.06.20 15:4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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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완용(중추원 부의장)

2. 이병도(이완용의 조카, 역사학자)

3. 이장무(이완용의 증손자, 이병도의 손자, 서울대총장)

4. 이건무(이완용의 증손자, 이병도의 손자, 이장무의 친동생, 문화재청장)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이완용

출생과 가계 배경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부친은 이석준(李奭俊, 다른 이름은 이호석(李鎬奭))이었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으로 가난하였다. 이로 인해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으나 12살이 되던무렵, 일가 아저씨뻘인 중추부판사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이호준(李鎬俊)은 이조참의, 승정원 동승부지,한성부판윤등 여러 고위직을 지닌 관료이자 흥선대원군과 친한 친구관계였으며, 그의 사위 조성하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호준의 서자 이윤용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결혼하여 인척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편집] 유년기

이호준에게는 서자(庶子) 이윤용과 딸만 있었을 뿐, 정실 부인 소생 적자(嫡子)는 없었고, 이완용이 그의 양자로 출계하게 된 것이다. 당시 후계자를 위해 가문에서 총명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은 출세에 필요에 의하여 부자관계를 맺는경우는 흔한일이었기에 이호준의 양자로 입적한 이완용 역시 명문가의 집안으로 입적되면서 이완용 자신에게 권력의 핵심부로 진출할수있는 출세의 길을 보장받은상태에 발판을 마련하여 학문을 익히면서 성장해나아갔다. 이완용은 유년기에 한성부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누구의 문하생인가는 알려지지 않았다.[3]

[편집] 청년기

활발한 성격을 갖고있었다

[편집] 관직에 진출

1882년, 25세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별시에 병과(丙科)로 급제 한 후, 주서가 되었다. 이어 대교가 되고 그후 홍문관수찬, 검상 등을 거쳐 외직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로 나갔다. 그뒤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 3년 만에 정3품직에 오르면서 왕세자 순종을 가르치기도했으며, 순종과 사제관계를 맺기도 한다.

규장각 대교 검교, 홍문관 수찬, 동학교수, 우영군사마,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등을 거쳐서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면서 해외에 대한 식견을 접하여 넓히게 되었고,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편집] 미국 외교관 생활과 귀국, 개화 활동

1887년에는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도미했다. 1887년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1888년초 병으로 소환되었다.

1888년 음력 5월에 귀국하여 동부승지·이조참의·외무참의 등을 지냈다. 1888년 음력 12월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건너갔다가 12월에 대리공사(代理公使)로 승진하여 2년간 근무하였다. 1890년 음력 10월에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형조참판·동지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동지춘추관사·전환국총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우부승지, 내무참의,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육영공원 판리, 외무협판 등을 관리직을 거쳐서 조선에 개혁적인 교육정책을 주도하였다. 그는 성균관을 개편하고, 지리, 산술, 과학등 선진 기술을 위한 과목을 신설하였으며, 정기적인 시험 제도, 기본적인 의무교육 제도까지 완비하는데 주도했는데, 이는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인 초등교육의 의무화와 그 체계의 제도화, 근대적인 교사 양성사업 같은,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획을 긋는 자취를 남긴 것이었다.[4] 1895년 음력 5월 학부대신,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5] 또한, 주미 공사로서 2년을 지내기도 하였다.

[편집] 1890년대 활동

[편집]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전향

그는 미국의 개화된 문물을 접하면서 친미주의 개화파 관료가 되었지만 다른 친미파들과 달리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유교와 불교를 신봉하였고 기존 왕실에 대해 개화를 주창하지 않았으며, 이후 정동파에 가담하여 친러파관료가 되었다.

그가 친러파 관료가 된 계기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였다. 그때 친일내각세력으로부터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이자 친분이 있던 알렌과 만나 알선하여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였는데, 미국보다 러시아가 조선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면서 러시아 제국 공사관 베베르하고 만나게 되어 이를 주선하여 1896년(건양 1년),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계획하게 된다.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하여 단행함으로써 친미파에서 친러파 관료로 갈아탄 그는 외부대신,농상공부대신서리등 요직을 겸직하여 대한제국시기에 고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되었다. 이때까지만해도 그는 일본 제국과 친일파 관료들에 맞서 대항하는 관료들 중 한 명이었다.

[편집]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참여

한때, 그는 독립협회주요직으로 제2대 독립협회장으로 활동했었는데, 연설에서 이런말을 남긴바 있었다.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란다.

그는 독립협회장으로 활동했을무렵, 만민공동회개최에 앞장섰었으며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설립에 주도하여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가 독립협회 위원장 맡았던 시절에는 서재필독립신문을 지원하면서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독립협회의 실질적인 간부들 중 한 명이었다.

이무렵 러시아 제국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고 독립협회가 이를 저지하고 반대하였는데, 이완용은 러시아 제국에는 배격하면서도 미국에 대해서는 호의를 가졌다. 그 사례를 들자면,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던 그는 서구열강세력들(주로 미국이다. 이완용은 주미공사 알렌과 친분이 두터웠다.)에게 많은 이권들을 넘겨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다. 반면, 러시아가 요구한 함경도 영흥·길주·삼수·단천의 금광 및 석탄채굴권을 거부했으며, 러시아 군사교관 초빙 문제가 제기됐을 때에도 강력반대를 하였다. 이완용이 친미 반러(反露) 태도를 보이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1897년 7월 20일 외부대신 이완용을 학부대신으로, 또 9월 1일자로 평양 관찰사로 좌천시켜 중앙 정계에서 축출했다. 다음날, 9월 2일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의 후임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에 취임한 스페에르는 고종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궁궐 경비병을 철수하겠다.”,“제2의 아관파천을 실행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미국인 헤링튼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페에르는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오. 나는 그의 이름에 표를 해두었소. 그는 내가 여기 있는 동안 결코 벼슬을 얻지 못할 것이외다. 그는 언제나 독립을 외치는 친미(親美)그룹의 우두머리지요. 나는 그 그룹을 조선에서 없애버릴 작정이니, 그들은 더 이상 세력을 쓰지 못할 것이외다.

고종이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것은 노골화되는 러시아 제국의 압력에서 벗어나려는 고육지책의 수단뿐이었다. 고종은 또 주한 미국공사관 알렌에게 밀사를 보내 '제2의 아관파천'에 해당하는 ‘미관파천’(美館播遷)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러시아 제국과의 충돌을 우려한 알렌의 거부로 무산됐다.

한편, 이완용은 1897년에 내각에서 차츰 밀려나게 되어 1898년에는 전북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방 관찰사직으로 좌천된이후 부임 5일만에 직무태만으로 감봉되었고, 공금횡령죄로 파직될뻔했으며 급기야 독립협회로부터 제명당하기까지 이른다. 이후 자신을 양자로 받아들인 부친 이호준이 죽자 고향으로 낙향하여 칩거하였다.

[편집] 대한제국에서의 정치 활동

[편집]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전향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있다가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이후, 기회가 되어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러일전쟁에서 대세가 일본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이때, 대한제국일본 제국으로부터 국권 침탈 위협을 받게 된다. 이완용은 철저한 배일(排日) 친미주의자이자 친러주의자였기 때문에 미국공사관 알렌하고 알선하여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파천할계획을 하였었다. 그러나, 미국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완용과 친분이 있던 주미공사 알렌마저 해임되어 한국을 떠나면서 이완용은 정치적 고립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이후부터 그는 권력의 재기를 노리기 위해 새로운 정치협력자가 필요했었고, 때마침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이완용은 천성적으로 권력과 돈과 이재에 민감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친미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 1905년 학부대신으로 되어 11월 17일 을사조약체결 직전때,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게 된다.

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 일본 제국의 무력을 업게 된 이완용은 고종을 협박, 조약을 적극 지지하고 체결케 함으로써 을사오적의 수괴,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을사조약체결 당시, 그는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완용을 처벌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올렸는데, 이때 이완용 자신은 '시국에 따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선의 외교권은 힘을 키워 다시 도로 찾으면 된다.'고 고종에 되려 항변했다.

[편집] 을사 조약 이후

1905년 학부대신이 되어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섰고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을 얻게 된 이완용은 그해 1905년 12월에는 의정대신 서리, 외부대신 서리를 겸직하고 1907년 6월에는 의정부 참정이 되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조선 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겸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일본제국의 지시대로 일진회(一進會) 회장 송병준(宋秉畯) 등과 함께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 양위할 것을 강요하고 협박하여 마침내 순종에게 양위케 했다. 이와 동시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등 주도함으로써,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거가 빈번하게 많이 일어나는데, 이때 이완용은 일제의 장군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매일 찾아가서 의병 토벌 및 진압방법에 대해 논의했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인헌병보조원제도를 제안하여 항일의병들을 탄압하는 이이제이 방식으로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1907년의정부참정대신이 되었으며,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겸임 농상공부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를 겸했고, 6월 내각총리대신으로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했다. 또한, 그는 어전회의에서 의병장 허위에 대해 처벌할 것을 순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의 집은 민중에 의거해 불태워졌으며 1909년, 이완용은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가하러 명동성당에 갔을 때, 이때 기다리던 이재명의 칼에 맞게 된다. 그는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칼로 찔려 크게 부상을 당하여 암살될뻔한 위기를 맞기도했었으나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회복되었다.

1909년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날 장충단에서 시종원경 윤덕영, 한성부민회 대표 윤효정 등과 함께 이토 추도회를 열었다.[6] 그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이토 공(公)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공언을 했었으며, 당시 이토를 총으로 쏘았던 안중근의사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었다. 그는 '이등박문의 극동평화론' 신봉자이기도했다.[7]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한일합방 요구'에 반대 공작을 펼쳤으나, 결국엔 이완용 자신이 일본에 먼저 한일합방을 제의하게 된다.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가 소집되자 의장 자격으로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회가 설치되자 1910년 8월 22일,에는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병합전권위원의 한사람이 되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관사로 찾아가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완용은 곧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한일합병의 주역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금 15만 원을 지급받았다.

[편집] 1910년대~1920년대 활동

[편집] 한일 합방 이후

한일병합이후, 백작이라는 귀족작위를 받은 그는 1912년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주장했다. 그는 일본천황에게 조선귀족 대표로 정기적으로 문안인사를 수차례 올렸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두고 심심치 않게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1919년 1월 15일, 고종 황제가 승하했었다. 그당시 고종의 독살설이 의문되어 제기되었는데, 독살설에 배후로 지목되는 인물들 중 한명으로 손꼽히기도한다.

3·1 운동때 민족지도자들에게 참여를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3·1 운동의 진압방법에 대한 주내용으로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비밀리에 3·1 운동 진압방안에 관한 편지를 수차례 보내기도 했다. 3·1 운동이 한창이었을때 이완용은 3·1 운동의 실패를 주장하는 경고문을 연달아 3회 발표하여 ‘3·1 운동은 불순세력에 의한 불순세력의 주도이며, 치열한 국제경쟁시대속에 조선의 독립은 허망하다.’는 주 내용으로 일제에 노골적인 충성을 드러내며 강조했다.

[편집] 친일관료 및 사회단체 활동

이후 일제는 3·1 운동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를 1920년에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급했다.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개편된 후에도 계속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그는 이후에도 내선일체와 일본어 보급 교육을 강조했으며,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원,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등 여러 친일협회에 고문으로 역임하며, 계속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적극 협조한다.

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8]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

? 이완용이 썼던 구절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 작위를 이어받아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부자귀족이 되기도 했다. 1921년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을 지냈다.[9]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10][11]

 

2. 이병도

출생과 성장

조선 말기인 1896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에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천리(泉里)에서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와 부인 나주 김씨 사이의 오남으로 출생하였다. 12세가 되던 1907년 7월에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주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부친이 작고하였다. 1907년 이종일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보광학교에 입학하여 이 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하는 1909년까지 수학하였다. 15세였던 1910년에 육군참장 조성근의 장녀 조남숙과 결혼하였다. 같은 해 3월에 사립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12년 3월 보성전문학교(현재 수송동 조계사 자리) 법과에 입학하여 1915년 3월에 졸업했다. 1916년 4월에 와세다 대학 사학급 사회학과(史學及 社會學科)에 입학하여 1919년 7월에 졸업하였다.

[편집] 일제강점기 활동

[편집] 일제 강점기 초반

1919년 10월부터 7년간 중앙고등학교 전신인 중앙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영어 담당 전임교원으로 근무했다. 야간에는 영어강습소에 출강하는 한편, 중앙학교의 전임교원이자 중동학교(야학) 교장인 최규동의 요청을 받고 1920년 4월 부터 1년간 이 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하였다. 1920년 7월에 김억, 남궁벽, 김혁로, 김영환, 나혜석, 민태원, 김찬영, 염상섭, 오상순, 황석우, 김원주 등 12인(후에 변영로 참가하여 13인)과 함께 동인지 폐허(廢墟)를 창간하였다. 폐허는 2호까지 출판되었다. 1921년 4월 부터 1년간 경신학교에서도 지리와 역사를 강의하였다. 1922년부터는 주로 한국사상사와 지리도참 등 사상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5년 8월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로 일하였으며,[3] 이후 조선사편수회에서 퇴사하고, 임시직인 촉탁으로 해방까지 일하였다. 그러나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활동, 특히 촉탁으로의 활동은 사실상 이름만 올라 있었을 뿐, 실질적인 업무는 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4] 1933년 4월부터 1943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서 "조선유학사" 강의를 담당하였다.

[편집] 일제 강점기 후반

1934년 5월 7일에는 한국과 근린의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이상백, 조윤제, 김상기, 이병기, 손진태 송석하 이희승 김태준 등과 함께 진단학회를 창립했다. 진단학회 발기식겸 창립총회는 경성부 長谷川町(현 소공동 50번지) "푸라디아느" 다방에서 개최하였다. 같은해 11월 28일에 진단학보 창간호를 간행하면서 "삼한문제의 신고찰(1):진한급삼한고"라는 논문을 투고하고 그자신은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진단학회의 주소를 "경성부 계동 98번지" 자신의 집 주소지로 하였다. 또한 위의 진단학보 창간호에 "하멜표류기"를 번역하여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4월 17일 진단학보 제2호를 발간했다. 1941년 4월부터 3년간 이화여자전문학교 사학강좌 담당 강사로 출강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3년 9월 진단학보 제14호의 발행을 끝으로 진단학회가 해산되었다.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지켰다. 그러나,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를 지켰다.[5]

[편집] 해방 후

[편집] 광복 직후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진단학회를 재건하고, 임시교원양성소를 구성하여 국어와 국사 중등교원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친일 어용 역사학회인 조선사 편수회를 계속 존속시켜 나갔다. "국사교본"을 편찬하여 중등교과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같은해 12월 동지들과 서지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서지를 발간하였다. 같은 해, 일본인 교원이 전부 빠져나가고, 조선인만으로 운영되던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6년 9월 국대안의 제정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교수로 임명되어 사학과의 창설에 기여하였다.

1947년 5월에 진단학보 제15호를 간행하였다. 그해 10월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그 일을 맡았다. 1952년 4월에는 서울대학교에서 "고려시대의 연구: 특히 도참사상의 발전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3년 9월 서울대학교 부속 박물관장에 임명되어 1954년까지 맡았다. 1953년 10월에 진단학회를 사단법인으로 재편성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편집] 교육자의 삶

1945년 경성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경성대학과 다른 관공사립전문학교들이 통합된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4년 5월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이 되었다. 이후 1962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50년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되어 4년간 복무하였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에는 종신회원이 되었다. 1955년부터 1982년까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또한 1956년김창룡의 묘비명을 썼다.[6]

1957년 5월 동아문화연구위원회(Research Council of Havard Yenching Institute)의 이사가 되었다. 고려대학교 교우회 회장이 되었다. 1959년 3월에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1960년 4월 허정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단체를 자율화시키는 한편, 대학 총학장의 교수직선제를 채택했다. 그해 8월에 사임하고 9월에 서울대학교대학원장 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1년 4월에 국민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3년 6월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에 재선되었다. 7월에 율곡기념사업회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10월에 3.1문화상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미국 학술원창립10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았다. 하바드 엔칭 연구소의 초청으로 특강하였다. 12월에 미국역사학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64년 4월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피선되었고 7월에 학술원 회장에 3선, 11월에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을 4선으로 맡았다. 1965년 4월에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9월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원장이 되었다.

1967년 6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학술원 회장을 5선으로 맡았다. 조선왕조실록과 유학자들의 문집 등과 같은 고전의 국역 사업을 위해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위원회를 이희승, 김두종 등과 함께 발족하면서, 1965년 11월 6일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회장에는 박종화가 추대되었고 최현배와 함께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70년 2월에 민족문화추진회를 재단법인으로 개편 발족하면서 이사가 되었다. 이후 1977년 5월 11일 고전국역의 종합심의기구인 교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82년 2월 22일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고전국역자 양성과 고전국역 사업을 전개하였다. 1976년에 학술원 회장 8선이 되었고 이후 1980년까지 회장을 맡았다. 1981년에 학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75년 10월 성균관대학교 이사에 취임하였다. 1984년에는 다산선생기념사업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편집] 말년

1980년에는 두계학술상이 제정되었다. 1981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85년 11월에 민족문화추진회 창립 20주년 및 "두계이병도 이사장구순기념 특집호"(민족문화 제11집) 간행되었다. 1986년 5월 9일 고려대학교 교우회 '교우의 날' 행사에서 '자랑스러운 고대인'으로 선정되었다. 1986년 10월 9일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 -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라는 제목으로 단군조선 실재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7]1987년 10월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을 봉정받았다.

1987년 11월 4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국무총리 김정렬의 초청을 받았다. 1989년 8월 14일 새벽,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한국병원에서 운명하였다.

[편집] 사후

1991년 10월 10일, 진단학회는 중진 역사학자 39인이 기고한 책 "역사가의 유향: 두계이병도선생추념문집(歷史家의 遺香: 斗溪李丙燾先生追念文集(일조각)" 을 발간하였다. 2008년 4월 29일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사편수회 경력 및 그의 연구활동을 근거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4776명에 포함하여 발표했다. 2005년 서울대 학생단체에서 발표한 ‘서울대 친일인물1차12인 명단’[8], 2005년고려대총학이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에 포함되어 있다 [9].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 학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10]

[편집] 연구 및 평가

이병도는 1950년대 이후의 고대사학계를 이끌어 나갔다. 1955년에는 서울대학교 논문집에 〈남당고〉를 발표해 합좌제의 원형이 된 남당(南堂)의 실체를 밝히고, 고구려 국호 기원 문제를 해명하는 한편, 위만조선의 전개과정을 통해 위만이 조선계 인물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1930년대부터 시작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국사 ─고대편─》을 출간하여 고대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11] 이후에도 고대사 연구뿐만 아니라 역사지리와 국가 기원 및 사회 제도까지 연구를 확대하여, 1976년에는 《한국고대사연구》를 출간하였다.

1977년에는 《삼국사기》에 역주를 달아 《국역 삼국사기》를 출간하고, 고대사·지리 도참과 함께 관심을 쏟고 있던 유학사를 연구한 성과는 1987년에 《한국유학사》를 간행하여 결실을 보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실증주의 역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며, 철저한 문헌 고증에 입각한 연구 태도와 엄격한 학풍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문헌을 기본으로 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이 뿌리내리는 데에 큰 업적을 남겼다. 죽을 때까지 연구를 그치지 않았고, 왕성한 연구로 많은 저서와 다양한 논문을 남기기도 했다. 해방 이후의 고대사 연구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끼치면서 대한민국의 사학계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병도의 제자들이 고대사학계에서 많은 활약을 하면서 일부 재야사학 계 인사 및 일반인들은 그의 후학이 한국사학계를 장악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12]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근무하여 일본 관학자를 도운 경력이 친일행위로 비판받았으며, 1980년대 이후 일부 재야사학계 인사들이 벌인 '국사찾기운동'에서는 이병도와 그의 사관을 두고 실증적인 학풍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왜곡하고, 반도중심의 식민사관으로써 단군 조선을 신화화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13]

[편집] 주요 저서

  • 《朝鮮史》, 조선총독부, 1922년 ~ 1938년, 총 35권, 총 24,409페이지
  • 《역주 삼국사기》, 박문서관,1943년[초판발행 박문문고 2책: 1책 342(?)쪽, 2책 479쪽]1945, 1956년(춘조사 재발행), 1965년(동국문화사,468쪽), 1977(을유문화사,국역본 736쪽, 원문교열본463쪽).
  • 《조선사대관》, 동지사, 1948, 1949(수정3판,501쪽).
  • 《고려시대의 연구: 특히 도참사상을 중심으로》, 을유문화사, 1948, 1986(개정판, 아세아문화사, 446쪽).
  • 《한국사(고대편)》(김재원 공저), 진단학회 편, 을유문화사, 1959, 1965년 수정판(730쪽). 1980년 16판(70쪽, 부록 색인 31쪽, 역대왕실계보외 도표).
  • 《하멜표류기(역서)》, 일조각, 1954.
  • 《국사대관》, 1954, 1955(보문각, 613쪽, 색인 6쪽), 1958, 1959.
  • 《국사와 지도이념》, 삼중당(90쪽), 보문각, 1954.
  • 《이병도수필집 두계잡필(斗溪雜筆)》, 일조각, 1956(519쪽).
  • 《중학교사회생활과 중등국사》, 을유문화사, 1956(204쪽).
  • 《역주 삼국유사》, 동국문화사, 1956, 1962(재판, 468쪽)1965(3판, 468쪽), 1976년(광조출판사 수정판), 2000년(명문당,468쪽), 2000년(조선일보,누리미디어 제작 CD)
  • 《자료한국유학사초고(資料韓國儒學史草稿)》, 서울대 문리대사학연구실 유인물, 1959.
  • 《중국어판 한국사대관(許宇成역)》, 中正書局, 1963.
  • 《한국사대관》, 보문각, 1964, 1969(589쪽).
  • 《내가 본 어제와 오늘》, 신광문화사, 1966(289쪽).
  • 《인문계고등학교 국사》, 일조각, 1969(274쪽).
  • 《나의 인생관: 풀뭇간의 쇠망치》, 휘문출판사, 1971, 1974(수정3판, 436쪽).
  • 《한국고대사회와 그 문화》, 서문당, 1972.
  • 《한국사회와 그 문화》, 서문당, 1973.
  • 《율곡의 생애와 사상》, 서문당, 1973.
  • 《두실여적(斗室餘滴)》,박영사, 1975.
  • 《수정판 역주화선 제주도난파기》, 일조각, 1975.
  •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2001(818쪽).
  • 《일어판 한국고대사연구(상,하)(金思燁역)》, 大興출판사, 1979.
  • 《한국의 유학사상(한국사상전집2,공역)》, 삼성출판사, 1981.
  • 《한국사대관》, 동방도서, 1983(538쪽).
  • 《성기집(成己集)》, 정화출판문화사, 1983(318쪽).
  • 《한국사의 이해》, 삼성출판사, 1984.
  • 《한국유학사략(韓國儒學史略):한문본》, 아세아문화사, 1986(322쪽).
  • 《한국유학사》(한국유학사략 국역본), 아세아문화사, 1987(506쪽).
  • 두계이병도박사화갑기념사업위원회,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 일조각, 1956(729쪽).
  • 진단학회 편,《역사가의 유향: 두계이병도선생추념문집》, 일조각, 1991(336쪽).
  • 《한국상고사입문》, 최태영 공저, 고려원, 1989.

[편집] 상훈

[편집] 가족 관계

일설에는 할아버지가 이완용이라는 주장이 항간에 떠돌고 있으나, 손자 이건무의 해명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15].[16] 이장무에 의하면 "이완용과는 500년 전에 갈라진 집안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며 "동생(이건무)이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하고 있는데 이미 다 검증받았던 사실이며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하겠냐"는 것이다.[16]

일부 재야 인사들은 이병도가 이완용의 관뚜껑을 태웠다는 사실을 들어 이완용의 후손임을 숨기기 위한 행위라고 주장한다.[17] [18] 그러나 이병도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도가 이완용의 관 뚜껑을 불사른 이유는 "매국노의 관 뚜껑을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에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19]

[편집] 윤치영, 윤보선 가문과의 관계

이병도는 4대 대통령 윤보선의 사돈이다. 윤보선의 가문과는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병도는 윤보선의 삼촌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윤보선의 여동생이자 윤치소의 넷째 딸 윤계경(尹桂卿, 1918년 2월 13일 ~ ?)은 이재녕(李宰寧, 1918년 5월 4일 ~ )과 결혼했다.[14] 이재녕은 이병도의 형 이병묵(李炳默)의 아들로[14],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손자이다.

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이병영(李丙暎, 1900년 ~ )과 결혼했는데, 이병영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딸, 이병도, 이병묵의 여동생이었다.

이병도, 이병묵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치영의 형인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동시에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은 윤치소, 윤치영의 매제, 매형이 된다. 윤치소의 여동생이자 윤치영의 둘째 누나인 윤정숙(尹貞淑)은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李丙琳)과 결혼 했다. 또한, 윤치오의 아들인 윤승선이병도의 6촌 여동생인 이을남과 결혼했다.

 

3. 이장무

이장무(李長茂, 1945년 5월 14일 ~ )는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이자 공학자이다.

서울 출신으로 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기계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미국 아이오와 주립 대학교에서 공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6년부터 서울대학교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는 공과대학 학장으로 재직, 현재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제13대 회장으로 있으며, 2006년 7월에는 전임 총장인 정운찬의 후임으로 24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다.

조부는 역사학자 이병도, 부친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학장을 지낸 이춘녕이며, 동생은 고고학자이자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건무이다.

 

4. 이건무

이건무 (1947년 9월 19일, 서울특별시 ~ ) 는 대한민국의 고고학자이자 정무직공무원으로, 2008년 3월 8일부터 현재까지 문화재청 청장을 맡고 있다. 이장무 서울대 총장의 친동생이며, 역사학자 이병도의 손자이다.

[편집] 인물

그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삼선고등학교,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한양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고려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1972년 ~ 1984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1984년~1986년),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 (1989년 ~ 1993년), 국립광주박물관 관장 (1993년 ~ 1998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1998년 ~ 2003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2003년 ~ 2006년) 을 지내는 등, 오랫동안 박물관에서 근무하였으며,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재직 중에는 아시아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세계박물관대회 2004를 유치한 바 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에 임명된 뒤,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1]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퇴임 후에는 용인대 예술대학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2008년 1월 한국고고학회장에 취임하였다. 2008년 3월, 숭례문 방화 사건의 여파로 사임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 청장의 뒤를 이어, 문화재청 청장에 임명되었다. [2]

논문 및 저서로 《한국식 동검문화의 성격》(1994년), 《한국식동검의 조립식 구조에 대하여》(1995년), 《韓國 靑銅器 文化の 成立と 展開》(1997년), 《청동기 문화》(2000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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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6.20 16:29

    첫댓글 우리사회의 지도층를 형성하고 있는 친일파 후손들은 뉴라이트라는 보수단체를 만들어서 나라를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치인만 옹호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종북세력으로 매도하고 있으며 급기야 최근에는 교학사 왜곡역사서를 출판하기 까지 하였다...일반 국민들은 이러한 사실를 인식 못하고 있으니 정말 안타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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