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불교와 사리장엄
김 연 수 |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
Ⅰ. 사리장엄구란
Ⅱ. 인도와 중국의 사리장엄
Ⅲ. 백제의 불교와 사리신앙 수용
Ⅳ. 백제 사리장엄의 예
Ⅴ. 정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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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불교와 사리장엄
Ⅰ. 사리장엄구란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란 사리를 담는 사리기에서부터 그와 함께 납입되는 각종 유
물 즉 공양품에 이르기까지, 사리에서 탑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의 것을 말한다. 사리
장엄은 석가 입멸 이후 여러 가지 형태로 이루어 졌다. 인도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한국
과 일본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사리장엄의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석가모니에 대한
신실한 믿음과 끝없는 존경은, 석가 그 자체인 사리에 대한 지극한 봉공(奉恭)으로 나타
났다. 각국의 시대적,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공통점은 석가의 입멸(入滅) 후 그의
성스런 안식처로서의 장엄 그리고 공경과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장엄이다. 이러한 성스
런 사리장엄의 최후 단계가 바로 탑의 건립이다. 사리를 담은 작은 병에서부터 이 탑으
로 이어지는 과정의 모든 것을 장엄이라 하며, 이것이 바로 사리신앙의 요체이다.
Ⅱ. 인도와 중국의 사리장엄
석가가 입멸 한 뒤 그 유체(遺體)는 7일간 공양된 후 쿠시나가라 시가(市街)를 거쳐 성
밖 동교(東郊)의 천관사(天冠寺)에 안치되었으며, 제자 마하가섭의 도착을 기다려 다비
(茶毘)되었다. 다비 후 여덟 부족 사이에 사리 봉안을 위한 다툼이 있어 바라문 도로나의
중재로 팔분(八分)되었다. 여덟 부족이 나누어 받은 사리는 각각 여덟 기의 스투파에 안
치되고, 사리를 나누는 데 사용되었던 병은 도로나에 의해 병탑(甁塔)에, 그리고 사리를
다비한 후 남은 재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한 부족에 의해 회탑(灰塔)에 봉안
되어, 결국 모두 십탑(十塔)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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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 중엽 아쇼카 왕이 인도를 통일하여, 통일 영토에 근본팔탑(根本八塔) 중
7탑에서 얻은 사리를 다시 나누어 8만 4천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신앙은 크게 유행되었
다. 8만 4천 탑의 개념은 중국에 이르면 수나라 때의 인수사리탑의 건립으로, 그리고 우
리나라에서는 무구정경의 99소탑봉안으로, 일본에서는 백만 다라니탑의 건립으로 발전
되어 나갔던 것이라 하겠다.
사리용기와 관련하여 경전에 석가가 자신의 사리를 3중으로 된 관에 넣을 것을 제자들
에게 이르는 대목이 있다. 이 3중이라는 것은 그만큼 고귀하고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러한 유언처럼 인도의 여러 스투파에서도 석제·토제·금속제
등의 갖가지 재질로 된 사리용기들이 출토되었으며, 그중에는 6중에 이르도록 중첩된 용
기들도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합(盒)·호(壺)·병(甁) 등의 형태이며 탑형(塔形)
을 한 것도 있다.
이러한 사리용기 안팎에는 공양품이 부납(副納)되는데, 발견되는 공양품들은 경전에
서 이야기하는 칠보(七寶)에 해당하는 것들로서 금은제품·유리·진주·동전·반지 등
여러 가지이다.
중국에서의 사리장엄의 실례는 육조시대(六朝時代)로부터 시작된다. 육조시대의 사리
장엄을 계승한 수(隋)의 인수사리탑(仁壽舍利塔_에서는, 절두형(截頭形) 방형석함(方形
石函)에 모셔진 불사리가 탑기하(塔基下) 일장(一丈)의 깊이에 안치되었다. 사리용기는
이러한 상자형 뿐만 아니라 관(棺)·곽(槨)형태의 것도 찾아볼 수 있다. 관·곽형태의 사
리기는 특히 당대(唐代)에 유행되었으며, 상자형과 관곽형의 외용기에 금병 또는 유리병
등의 내용기를 중첩하는 방식이 이용되었다.
사리장치의 위치는 탑신부에 안치한 몇 예를 제외하고는, 목탑·전탑·석탑의 대다수
가 탑 기단 밑의 땅속에 사리를 석함 또는 석실(전실)에 안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궁(地
宮)은 1987년 섬서성(陝西省)의 법문사(法門寺) 지하에서 발견된 예가 대표적이다.
Ⅲ. 백제의 불교와 사리신앙 수용
백제는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불교를 수용하였다. 백제의 불교신앙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 신앙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특히 왕실 주도로 수용된 불교
는 웅진·사비시대에 이르러 귀족들에게도 확대되어 많은 사찰이 건립되고, 그 내부에
탑과 불상이 조성되었다. 백제 불교에 대해서는 그다지 기록이 많지 않아서 당대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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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일본 불교와 관계, 불상의 조성 등을 토대로 대략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백제는 중국의 남북조를 비롯하여 수·당의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이를 발전시켜 신
라와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대체로 백제 불교에 대해서는 계율을 중시하는 율
종의 영향이 강했으며, 아울러 남조 등을 통해 주술 불교의 일면도 전해졌을 것으로 보
고 있다. 삼국시대의 불교 전반에서 나타나는 호국적 성격이 역시 강하게 드러나며, 이
는 왕실의 번영과 안위를 위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아울러 당시 조성되었
던 여러 가지 불상을 통해서 법화신앙, 관음신앙, 미륵신앙 등의 유행을 추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글에서 살피고자 하는 사리신앙의 경우는, 탑을 건립하고 석가모니 부
처의 사리를 봉안하여 불심을 돈독히 함으로써 왕실을 보호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역할
을 수행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흥법조(興法條)에 따르면, 백제는 제 14대 침류왕이 즉위한
384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으로부터 오자, 왕이 그를 맞이하
여 궁중에 두고 예(禮)로 공경하였으며, 이듬해 도읍인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세우고 도
승(度僧) 열 사람을 두었다고 한다. 또한 침류왕의 아들인 아신왕은 즉위한 392년(大元
17년)에 불법을 숭상하고 믿어서 복을 구하라는 소칙을 내려 국민들에게 불교의 신봉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392년의 이 기록에서 성왕 4년(526)에 이르는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는, 수많은 전란과 두 차례에 걸친 천도(遷都) 때문인지 백제 불교에 대한 별
다른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성왕대에 이르러 도읍을 부여로 옮겨 새로운 체제를 갖추면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
용하였으며, 이에 따라 율종을 받아들이고 인도에 까지 가서 경전을 구하였다. 특히 이
시기는 중국에서 불교를 권장하여 이에 대한 중요한 불적을 많이 남긴 양나라가 위세를
떨치던 때로서, 이 영향이 백제에 그대로 전하여 졌다고 생각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549년 양나라 사신이 신라에 불사리(佛舍利)를 전하였다는 기록
이 전하며, 이것이 사리에 대한 가장 빠른 기록이다. 이것은 비록 신라에 관한 것이지만
당시 양무제는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었으며, 오래된 탑을 수리하고 또한 새로운 탑을
건립하였음을 문헌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1) 백제의 성왕은 541년(성왕19년) 양(梁)에
1) 남사(南史) 「부남전(扶南傳)」 에는 양무제(梁武帝)가 동진(東晉)시대의 혜달조립탑(慧達造立塔)을 발
굴한 기사와, 이를 새로이 제작한 탑에 다시 모신 내용이 실려 있다.
...因此出家名慧達. 遊行禮塔, 次至丹陽, 未知塔處, 及登越城四望, 見長干里有異氣, 因就禮拜, 果是先阿
育王塔所, 屢放光明, 由是定知必有舍利. 及集衆就掘入一丈, 得三石碑, 幷長六尺. 中一碑有鐵函, 函中有
銀函, 函中又有金函, 盛三舍利及髮爪各一枚, 髮長數尺. 卽遷舍利近北對簡文所造塔西造一層塔. 十六年,
又使沙門僧尙加爲三層. 卽是武帝所開者也. 初窄土四尺, 得龍窟及昔人所捨金銀環釧金又鑷等諸雜寶物. 可
深九尺許至石磉, 磉下有石函, 函內有鐵壺以盛銀坩, 坩內有金縷罌盛三舍利如栗粒大, 圓正光潔. 函內有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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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보내어 모시박사(毛詩博士), 열반경(涅槃經) 등의 경전, 공장(工匠)·화사(畵師)
등을 청하였다고 한다.2) 위의 신라 예에 비추어 아마도 이와 함께 사리도 전해졌을 가능
성이 있으며, 이것이 백제에서 사리신앙이 유행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성왕
의 아들인 위덕왕대에 백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능산리 사찰에 왕의 누이가 사리
를 공양한 것은 바로 그 실례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리봉안은 성왕대에서 시작되어, 위덕왕대에는 일본에 사리를 보내는 등 대
외적으로도 봉송을 행하여 이를 유행시켰으며, 이의 안치를 돕기 위해 승려와 공장(工
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3)
이후 무왕대에 이르면 무왕은 부여뿐만 아니라 별도(別都)인 익산지역에 대규모 사찰
을 건립하고 사리를 공양하였음을, 제석사·미륵사 등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다.
Ⅳ. 백제 사리장엄의 예
일제강점기 이후 옛 도읍지인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조사된 몇몇 백제시대 사지(寺
址)와 무왕대의 별도(別都)로 알려진 익산에 미륵사지·제석사지 등의 유적을 통하여,
백제의 사리장엄에 관한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을 유추할 수 있으나, 이들에서 백제
사리기의 형식을 알 수 있는 예는 지금까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여 능산리 사지
의 목탑지와 왕흥사 목탑지, 익산 미륵사 석탑에서 출토된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
造舍利龕)을 비롯한 백제의 금속제 사리기와 봉안기록 등은, 백제 사리봉안법식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 주고 있다.
1.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1936년에 발굴조사된 이 사지는 탑의 심초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지표 아래 1.2m 깊
璃椀, 椀內得四舍利及髮爪....
이 기록에서 볼 때 사리신앙은 동진 때에도 행해졌으며, 이에 의해 탑기(塔基) 하부에 사리가 봉안되었
던 것이라 하겠다.
2)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 4 성왕 19년 기사 참조.
3) 숭준천황(崇峻天皇) 6년(588년)에는 백제의 승려 혜총(慧聰)이 건너와 불사리를 바쳤으며 이 때 영조
(聆照)·영위(令威))·혜중(惠衆)·혜숙(惠宿)·도엄(道嚴)·영개(令開) 등 사문과 함께 사장(寺匠)의
태량미태(太良未太)·문가고자(文賈古子) 두 사람, 로반박사(鑪盤博士,), 와박사(瓦博士), 화사(畵師)인
백가(白加) 등도 함께 왔다고 한다. 겸전무웅(鎌田茂雄)(신현숙 역), 한국불교사, 민족사, 1988, p.
4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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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서 금동보살입상과 토기·철기 등이 발견되었고 0.3m 밑으로 더 내려간 곳에서
납석제불좌상(蠟石製佛坐像)·금환(金環)·소옥(小玉) 등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다시
0.3m 밑에서 탑 심초석(心礎石)이 발견되었으나 사리공(舍利孔)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
다고 한다.4)
이를 검토해 보면 군수리 탑은 지하 심초 위에 굴립주(掘立柱)를 세워 건립한 탑으로
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탑 심초석 아래에 사리구를
안치했을 가능성, 둘째는 능산리사지의 창왕명사리감처럼 심초석 윗면에 별도의 안치장
치를 마련했으나 능산리사지의 경우처럼 오래전에 도난되었을 경우, 셋째는 탑 심초에
서 발견된 불상이 사리의 의미로서 납치(納置)되었을 가능성이다.
첫째는, 발굴 당시 심초석 하부에 대한 조사여부가 분명치 않아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가 불가능하다. 다만, 당시 백제가 중국 남조(南朝)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특
히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사실을 보더라도 동진의 혜달조립탑(慧達造立塔) 등
의 전통을 이어 받아 심초석 하부에 사리를 매납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는, 능산리 사지의 예로 미루어 탑심초석 윗면에 사리석함을 마련했을 수도 있으
나, 실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하나의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세째는, 심초석 윗면에서 발견된 2구의 불상이 주목된다. 당시의 보고서를 살펴보면
이 불상들이 발견된 위치는 굴립된 방형심주(方形心柱)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방형심주
가 놓인 부분에서 불상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 불상이 심주 일부를 파고 마련된 공간
에 안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하게 한다. 일본 중궁사(中宮寺)의 경우 땅 속 심초
위에는 사리공이 마련되지 않고, 심주에 구멍을 뚫어 사리용기를 매납하였던 것이라 하
며 군수리의 경우도 그와 유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렀다면 이 불상은 사리의 대용품으
로 납입된 것일 수 있다. 사리 봉안에 있어서 진신사리(眞身舍利)의 봉납과 법사리(法舍
利)로서의 경전의 납입은 잘 알려진 사실로서, 예컨대 고구려의 요동성 육왕탑(育王塔)
에서 범서(梵書)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법사리의 봉안이라 할 수 있다.5) 백제의 군수리
사지에서 이러한 대용사리로서 불상이 쓰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만 불상이 탑의 지
하에서 발견되는 경우, 황룡사 목탑의 심초석 하부에서 발견된 불상과 같이 진단구(鎭壇
具)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4) 조선고적연구회, 「부여군수리폐사지발굴조사」, 1936년도 고적조사보고, 1937. 6, pp. 45~55.
5) 삼국유사 권 제3 탑상조(塔像條) ‘요동성 육왕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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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사지(金剛寺址)
1964년과 66년에 발굴조사된 부여 금강사지는, 탑 심초 부분이 거대한 자연암반을 뚫
어 만든 것이므로6) 탑 심초 하부 매납 가능성은 없고, 심초 윗면에도 사리공이 없어 심
주(心柱)를 뚫고 봉안하였거나, 부여 능산리 사지 목탑의 경우와 같이 사리함을 심초 위
에 안치하였거나, 또는 탑신 내부에 모시는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3. 舊衙里寺址(구아리사진) 심초석
이제까지 살펴본 예들과 같이 심초에 사리공이 마련되지 않은 것에서, 보다 발전된 형
태로서 심초석 상면(上面)에 사리공을 마련하여 심초와 사리공을 구조적으로 결합시킨
것이 등장하게 된다.
부여 구아리사지에서 발견된 심초가 그 예가 될 수 있다.7) 이 절이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익산 제석사지 탑 심초와 관련하여 7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구아리 사지 심초의 경우 조사 보고서가 없어 지하 또는 지상 심초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사리공의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18cm인 정방형으로서 폭 3cm
의 뚜껑턱이 마련되어 있어, 실제 사리기가 안치되는 공간의 한 변의 길이는 12cm에 해
당한다. 전체 높이는 12cm로 2.5cm의 뚜껑턱을 제외하면 사리기가 안치되는 공간의 높
이는 9.5cm이다. 따라서 소형의 사리기가 봉안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백제창왕명사리감
부여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는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위
치로 보아 백제 고분군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능사로 추정되고 있다. 가람은 중문(中門)
- 목탑(木塔) - 금당(金堂) - 강당(講堂)이 일직선으로 배열된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
의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배치를 보여준다. 1993년 제3건물터로 명명된 공방터에서 국보
제 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바 있으며, 1995년 발굴조사 시에는 목탑
6) 국립박물관, 금강사, 1969. 이 사지(寺址)는 금공리사지(琴公里寺址)로도 불리며, 발굴조사 결과 지하
심초는 지하 6척 깊이로 풍화암반을 깎아서 심초를 만들어 중심주를 세운 후 기단초를 판축하였음이
밝혀졌다. 심초구멍 바닥에서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상자 모양의 용기 하나가, 거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부식되어 발견되었으나 무엇을 담았었는지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며, 바닥에
납작하게 깔려 눌린 상태가 아니므로 후일 중심주를 제거한 후 납치(納置)한 것이 틀림없다고 발견자는
보고 있다.
7) 이 사지는 조사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곳에서 발견된 천왕명와편(天王
銘瓦片)에 의해 천왕사로 추정되고 있다. (충청남도 편, 문화유적총람 사찰편, 1990, pp. 338-339
; 이은창, 「부여구아리사지심초석」, 고고미술 5-6·7, 1964, pp. 538-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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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심초석 윗면에서 석조사리감이 발견되어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석조사리감은 지하
에 마련된 심초석 위에 놓여 있었는데, 이 절이 폐사된 백제 멸망 시에 이미 사리장엄구
가 절취된 것으로 추정되었다.8)
사리감은 심초석의 남쪽 가장자리에서 약 3cm 정도 남쪽으로 밀리면서 동쪽으로 약
45도 정도 뉘어져 있었는데, 바로 옆(북쪽)에 상부가 절단된 심주(心柱)가 같은 방향으
로 넘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 주위에서는 금속유물, 소조불, 유리제품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9)
화강석으로 만든 사리감은 정면에서 보았을 때 위는 둥근 아치형이며 아래는 네모난
형태로서, 높이 74cm, 너비 50cm, 두께 50cm이다. 전면 중앙에 사리를 안치하였던 감
실이 파여져 있는데 사리감의 전체적인 모양과 비슷한, 위가 둥근 직사각형태이다. 감실
은 높이 45cm, 너비 25.3cm, 깊이 25.5cm로, 감실의 문턱(4cm)을 제외하면 실제로 사
리구가 봉안되는 공간의 깊이는 21.5cm이다. 감실은 목제 문으로 마감하였던 것으로 생
각된다. 뒤쪽에도 파다가 중단한 감실이 있는데 깊이가 10cm에 불과하다. 이는 제작 과
정 중에 균열이 생겨 중단하고 반대면에 다시 감실을 마련한 것으로 여겨진다.
앞면 감실의 좌우 양쪽에 각각 10자씩의 사리봉안에 대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우측
에서 좌측의 순서로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명문 내용에 따라 이 탑의 건립과 함께 사리구가 창왕 즉 위덕왕(威德王) 13년
(567년)에, 창왕의 누이의 발원에 의해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리감의 형태
는 중국의 일반적인 사리석함과는 다른 점이 주목된다. 즉, 중국의 사리석함이 상자형이
거나 또는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관의 형태, 그리고 보장(寶帳)의 형태를 한, 위에서 사리
를 넣고 뚜껑을 덮는 형식을 취한 석함이 일반적인 데 반하여, 이 사리감은 옆에서 사리
를 안치하는 감실을 마련하여 사리를 봉안하고 뚜껑이 아닌 문으로 마감하였다. 다시 말
해 수납(竪納)이 아닌 횡납(橫納)의 개념이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위가 둥근
아치형의 사리감 형태는, 무령왕릉에서 보듯이 중국 전축분의 영향으로 웅진기 말부터
나타나는 터널천정의 고분과 유사한 것으로서, 중국에서 棺의 개념을 사리기에 도입한
것과 같이 백제에서도 고분의 형태를 사리기에 전용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8) 1995년 국립부여박물관의 발굴조사에 대한 보도자료에 의하면 심초석 주위에서는 백제의 유물 외에 전
혀 다른 시기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사리구를 꺼내기 위해 파괴된 토층에서도 시대가 내려오는 유
물이 출토되지 않아 사리구가 이미 백제 멸망시에 꺼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9) 심초석 주변에서 소조불두(2구), 소조불(1구), 심엽형고리(7점), 금동 및 은제 고리(33점), 금실, 금판(1
점), 은판(3점), 철탁(1점), 금동방울(1점), 철제못(5점), 유리구슬(500점), 옥제품(30점), 토제구슬(6점),
토제인동꽃무늬장식(1점), 토제장식(3점) 등 총 595점이 발견되었으며, 국립부여박물관은 이를 지진구
(地鎭具)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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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리석함 형태의 독특함 이외에 이 사리감의 중요성은 그 봉안 위치에 있다고 하
겠다. 능산리사지에서 이 창왕명사리감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황룡사 목탑지의 예처럼
심초석에 사리공을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던 삼국시대 말기의 사리봉안 방법이 알려
져 있었을 뿐이었으며, 그 이전의 굴립주(掘立柱)를 위한 지하 심초석에 사리공이 없는
예들에서는 사리봉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 사리감의 발견은 이를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사리감처럼 심초 위에 사리감을 놓는 방법 이외에, 중국 남북조시대의 사리봉
안과 수대(隋代) 인수사리탑의 봉안법에 대한 문헌기록에 보듯 사리함을 심초 아래에 놓
는 것, 즉 당대(唐代) 즈음부터 나타나는 지궁(地宮)에의 사리안치 이전 방식인 고식의
방식이나, 또는 일본의 숭복사탑(崇福寺塔)과 같이 심초 측면에 사리공을 뚫고 사리를
안치하는 것이10)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있으나, 지하심초석과 별도로 석함(石函)을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하는 방법이 6세기 중엽 경 백제 왕실의 사리안치 법식에서의 대표
적인 예가 될 것이다.
5. 부여 왕흥사지 사리구
현재 발굴조사 중인 왕흥사 유적은 부여 규암면 신리 일대에서 그동안 발견된 ‘왕흥
(王興)’ 명기와로 인해 일찍이 왕흥사터로 비정되었으며, 사적 제427호로 지정 보호되어
왔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000년부터 이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에 착수하여 2007
년까지 8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8차 조사에서는 사역 중심부와 그 남
쪽 약 3,300㎡에 대한 발굴로 사찰의 중심축에 위치한 탑지 구역이 확인되었으며, 탑지
하부에 대한 상세확인을 하면서 백제 창왕대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11)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목탑지는 동서석축의 18m 북편에 동서 회랑지와 19m 등간격
을 이루어 축조되었으며, 기단토는 성토대지를 조성한 후 기단부를 굴광하고 기단토를
성토하여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단은 중층구조로 이루어졌는데, 하층기단은
14×14m, 상층기단은 13.2×13.2m의 크기이고 3칸 건물로 추정된다. 현재 기단의 남쪽
부분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잔존하는 계단석 일부를 통해 동서남북 4곳에 계단이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탑지 내부에서는 크기 80×65cm의 장방형 적심시설이 6개소 확
인되었다. 목탑지 외부에서 다량의 기와편이 산재된 채 발견되었는데, 다량의 고려기와
10) 비조자료관(飛鳥資料館), 불사리매납(佛舍利埋納), 1989, pp. 26-29.
11)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007년 10월 24일 목탑지와 그 주변의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현장설명회
를 열고 사리장엄구의 발굴사실을 공개하였다. 10월 24일자 보도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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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로 보아 고려시대까지 목탑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목탑기단토 윗면으로부터 약 50cm 아래에서 크기 100×110cm의 장방
형 화강암제 사리안치시설이 남북 장축의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석제 사리안치시설은
기단토를 다시 굴광한 후 안치한 것으로, 윗면을 고르게 치석하고 석재의 남측 중앙에
16×12×16cm 크기의 사리공을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후 뚜껑을 덮었다. 장방형 석재
남쪽 주변에 금·은제 장식품, 유리구슬, 상평오수(常平五銖) 등의 공예품들을 놓은 후
그 윗면 전체를 흙으로 되메웠다. 흙으로 메운 부분 중에서 사리공이 자리한 부분을 제
외한, 지상에 심주가 세워질 부분에 해당하는 석재 북측 상부를 되파서, 크기 80×80cm
정방형으로 황색점토와 사질토로 판축하였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이미 기단토 상
부가 상당부분 유실된 상태이나 심주 안치를 위한 판축으로 보아 지상에 별도의 심초석
을 두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추정대로 심초석이 지상에 있었
다면, 지하에서 발견된 장방형 석재는 심초석과 별개로 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설치한 시
설로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는 사례이다. 사리공을 덮은 뚜껑의 모양은 고대 중
국에서 사용되었던 사리석함의 록정형(盝頂形)을 하고 있다.12)
그동안 국내 또는 일본에서 발굴된 목탑지 중에서 백제와 관련된 사리안치시설은 부
여 능사의 지하심초 위에 사리석감이 따로 놓인 형식, 또는 비조사지(飛鳥寺址)의 지하
심초 윗면에 사리공이 뚫린 형식, 황룡사지의 지상심초 윗면에 사리공이 마련된 형식이
대표적이며, 심초석과 별개로 심초 아래 지하에 사리안치시설을 별도로 마련한 것은 왕
흥사가 처음이다. 일본의 고대 사리 안치 사례로서, 백제 위덕왕대인 588년 불사리가 백
제로부터 일본에 전해져 안치된 아스카데라 목탑을 살펴보면, 심초는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심초 윗면에 사리공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일본에서 왕흥사와 같이
지하에 사리안치소를 두고 지상에 심초석을 놓은 예는 알려져 있지 않다.
불사리를 봉안하는 사리기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등의 불교경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재질을 이용하여 내부로 갈수록 귀한 재질의 용기로 중첩하는 것이 통
례이다.13) 왕흥사 목탑지에서 발견된 사리기 역시 사리 봉안의 전형을 보여준다. 기단부
의 지하에서 발견된,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장방형 석재에 뚫어놓은 사리공 내부에서,
12) 록정형이란 가장자리를 모죽임한 형태로, 중국에서 고대부터 인장함(印章函), 사리함, 경함(經函) 등
특별한 용도의 사각함 뚜껑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13) ‘…滿七日已. 時諸力士以新淨綿及以細氈纏如來身. 然後內以金棺之中. 其金棺內散以牛頭栴檀香屑及諸
妙華. 卽以金棺內銀棺中. 又以銀棺內銅棺中. 又以銅棺內鐵棺中. 又以鐵棺置寶輿上. 作諸伎樂歌唄讚歎.
諸天於空. 散曼陀羅花. 摩訶曼陀羅花. 曼殊沙花. 摩訶曼殊沙花. 幷作天樂. 種種供養.…’ 大般涅槃經
卷下(T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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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제사리합 - 은제사리호 - 금제사리병이 중첩된 채 납입되었으며 다른 사리공양품
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리공 윗면에는 장방형 석재와 같은 돌로 만든 뚜껑이 덮여 있었으며, 뚜껑의 모양은
중국 고대 사리석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방형 뚜껑 윗면 가장자리를 모죽임한 형태이
고, 외부 표면은 붉은 주사(朱砂)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윗면에는 동심원 주변에 내행화
문(內行花文)을 돌리고 네 모서리에 삼엽문(三葉文)을 그렸으며, 사면(斜面)에는 삼엽문
과 조합된 그림이 그려져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사리기에서 주칠을 한 예는 익산 왕궁
리 오층탑에서 발견된 사리외함, 남원 출토 사리기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록상으
로는 백제 제석사 목탑의 사리장치에서도 목칠함이 사용된 바 있어, 이 또한 목제함에
주칠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4) 고대부터 고분 내부나 관을 주사로 붉게 칠하는 사례가
종종 알려져 있으며, 이는 벽사(辟邪)의 의미로 해석되었다.
청동제 사리합은 원통모양으로, 굽은 바닥면 가장자리를 살짝 올려 몸체 자체에서 굽
이 형성되도록 하였다. 몸체와 뚜껑의 연결부는 몸체 내부에 올라온 턱에 뚜껑이 맞춰져
면이 같아지도록 되어 있다. 뚜껑 윗면은 둥글게 올리고 그 중앙에 꽃봉오리 모양의 꼭
지를 부착하였다. 발견 당시 꼭지가 파손되어 있었으나, 사리공 내부의 공간은 사리합의
전체 높이보다 훨씬 높아서 좁은 공간으로 인한 파손은 아닌 것으로 판단되며, 도리어
벽사 등의 이유로 의도적으로 파손하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원통형 사리합은 5~6세기 경 삼국의 일상용 토기나 금속기 등에서는 볼 수 없
는 기형(器形)으로서, 시간적 범위를 통일신라시대까지 넓혀 본다면 통일신라 하대로 추
정되는 경통(經筒) 또는 사리기에서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역을 넓혀 보면
서북 인도와 아프카니스탄의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원통형 사리용기들과 매우 유사하
다.15) 이러한 용기 형태는 중국에서도 하북성(河北省) 정정현(正定縣)에서 출토된 수나
라 때의 동제 원통형사리합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으나,16) 인도에 비해 중국에서는 그
다지 보편적인 형태는 아니다. 백제에서 6세기경 이러한 용기를 사용한 것은 당시의 일
상용기와는 별개로, 중국에 전래된 인도식 사리용기를 원형으로 삼아 사리를 모시기 위
해 특별히 제작한 때문이라 여겨진다.
14)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歲次己亥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 帝釋精舍’
佛堂 七級浮圖乃至廊房, 一階燒盡. 塔下礎石中有種種七寶, 亦有佛舍利睬水精甁, 又以銅作紙寫金剛波
若經, 貯以木漆函. 發礎石開視, 悉階燒盡. 唯佛舍利甁與波若經漆函如故. 水精甁內外徹見, 盖亦不動,
而舍利悉無, 不知所出.…’, 董志翹, 觀世音應驗記三種譯注, 江蘇古籍出版社, 2002, pp. 217~219.
15) 奈良國立博物館, シルクロード·仏敎美術伝來の道, 1988, 圖 34 참조.
16) 趙永平·王蘭慶·陳銀鳳, 「河北省正定縣出土隋代舍利石函」, 文物 1995年 第3期, 1995, pp. 9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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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사리합의 외면에는 29자의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昌王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이 명문에는 일반적으로 사리 봉안을 기록하는 탑지(塔誌)에서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언제, 누가, 왜, 무엇을 하였는지가 모두 나타나며, 여기에 덧붙여 이러한 일이 부처의
뜻이 함께하는 특별하고도 신이로운 일임을 강조하였다. 즉 사리봉안과 탑의 건립에 담
긴 의미가 백제 왕실의 대소사에 그치지 않고, 종교적으로도 기적이 함께 하는 사건임을
알려주고 있다.
은제 사리호는 둥근 동체 아래에 사리호의 목부분과 거의 같은 폭의 굽이 있어, 조형
적으로 안정적이면서 통일감 있는 느낌을 준다. 구연부는 목에서 각이 지게 올라와 살짝
바깥쪽으로 벌려진 모양을 하고 있으며, 뚜껑 내부에 구연과 맞춰 끼어지도록 턱이 마련
되었다. 뚜껑의 寶珠形 꼭지 주위에는 팔엽 꽃받침이 얕은 음각으로 시문되어 있다. 사
리호의 내부에는 금제 사리병을 안치하기 위한 자리가 있는데, 금제 사리병이 안정되고
맞춤하게 자리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금제 사리병과 은제 사리호의 크기와 모양이 처음
부터 세심하게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리호 동체 내부 중간에 접합된 흔적이 확인
되며 이는 사리병좌를 마련하기 위해 사리호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접합한 것임을
보여준다.
금제 사리병은 갸름한 모양을 하고 있으나 무게 중심이 아래로 내려가 안정적이다. 뚜
껑은 꼭지 주변의 꽃받침이 6잎으로 깊이 음각되어 볼륨감이 강하다. 국내에서 내사리기
로서 이제까지 금제사리병이 사용된 것은 처음으로, 중국에서도 거의 알려진 예가 없다.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은제사리병과 함께 유리를 사리 내용기로 사용하였으나,17)
우리나라의 경우는 삼국시대 말에 속하는 7세기에 백제의 제석사, 신라의 분황사와 황룡
사 등에서 수정 또는 유리로 만든 사리병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18) 이들은 모두 용
17) 중국 하북성 정현에서 발견된 북위시대 태화(太和)5년(481년) 정주 불사리탑 사리장엄구에서는 탑기
(塔基) 판축부에서 록정형 뚜껑을 가진 방형 석함이 출토되었으며 그 내부에 사리를 넣은 유리병과
유리발(琉璃鉢)이 안치되었다. 이것이 이제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유리제 사리용기이다. 이
사리구에서는 다량의 주옥과 주화 등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중에는 41매의 사산조 페르시아 은화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河北省文化局文物工作隊, 「河北定縣出土北魏石函」 考古 1966年第5期, 1966,
pp. 252~259.
18) 백제의 제석사는 주 6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 무왕과 관련된 사찰로, 정관(貞觀) 13년(6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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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내부의 사리를 볼 수 있도록 투시 가능한 재질들이다. 그러나 유리병의 사용은 로마
나 페르시아 등 서방으로부터 제조기술이 도입되어 병을 만들 수 있는 기술수준에 이르
런 후에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유리병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확보되기 이전에는 금속
용기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내사리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왕흥사 목탑지의 사리안치 시설 주변에서 금은세공품과 구슬, 옥제품, 동전 등이 발견
되었다. 이는 부여 능사와 일본 아스카데라의 심초석 주변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물품들
과 성격이 유사하다고 판단된다. 6세기 경 백제와 신라, 일본의 목탑 심초석 주변 또는
아래에서는 사리기 이외에 당시 봉안의식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 희사하였을 여러 종류
의 일상용품, 귀중품들이 함께 발견되었으며, 이들은 심초가 지하냐 또는 지상이냐에 따
라 다소 성격을 달리 한다고 본다.
우선 사리안치 시설이 지상화하기 이전에 사리공 주변에서 공예품이 발견된 사례들로
는 부여 능사 목탑지, 부여 왕흥사 목탑지, 일본 아스카데라 목탑지 등이 있다. 능사와
아스카데라는 이미 사리기가 없어진 상태였으나 기타 봉안품들은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
고 있다고 판단된다. 왕흥사의 예로 보아 6세기 이전 사리안치 시설이 지하에 마련된 경
우, 대체로 사리공 내부에는 사리기만이 납입되었던 것으로 조심스럽게 유추해 본다.
6. 제석사지(帝釋寺址)
익산은 백제 무왕(재위 600~640년)이 별도(別都)로 경영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이 곳에 있는 미륵사지와 함께 제석사도 무왕대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관세음응험
기(觀世音應驗記)의 내용으로 보아 칠층목탑이었으며, 현지에 남아 있는 제석사지 심초
는 현재 지상에 깨어진 채 방치되어 있으나,19) 기록에 보이는 ‘탑하초석(塔下礎石)’이라
는 문맥을 통해 볼 때 지하심초일 것으로 추측된다.20) 또한 제석사 칠층탑이 정관(貞觀)
화재시에 7층목탑 아래 초석에 있던 사리공에서 수정병을 최내용기로 한 사리장치가 확인되었고, 다
시 절을 지어 이를 안전하게 안치코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631년 건립된 분황사는 일제 때 발견 당시
의 사진자료를 통하여 유리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조선총독부, 조선고적도보 3책, 1916 참조) 황
룡사는 사리기가 도굴되어 645년 건립당시의 사리기 형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찰주본기(刹柱本記)의
내용으로 보아 유리병이 내용기였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에는 대부분 녹색유리병을 사용하였으며
감은사와 같이 수정이 쓰이기도 하였다.
19) 이 심초석은 현재 크게 두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 심초석 윗면 중앙에 마련된 사리공의 크기는
59×25.5cm의 장방형으로, 깊이는 17.5cm이다.
20) 觀世音應驗記 :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新營精舍以貞觀十三年歲次己亥冬十一月天大雷雨遂災帝釋
精舍佛堂七級浮圖乃至廊房一階燒盡塔下礎石中有種種七寶亦有佛舍利睬水精甁又以銅作紙寫金剛波若
經貯以木漆函發礎石開視悉階燒盡唯佛舍利甁與波若經漆函如故水精甁內外徹見盖亦不動而舍利悉無不
知所出六箇悉見於是大王及諸宮人倍加敬信發卽供養更造寺貯焉.’ : 黃壽永, 「百濟帝釋寺址의 硏究」, 韓
國의 佛敎美術, 同和出版公社, 1974, pp. 128-1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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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639년)에 대뇌우(大雷雨)로 불에 타자, 탑하초석 중에 있던 사리장엄구의 안전을
살피기 위해 보니, 갖가지 칠보와 함께 사리를 담은 수정병과 동작지사금강경(銅作紙寫
金剛經)이 든 목칠함이 놓여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사리용기 형식인 병·함
형식으로서 중국 남북조의 예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삼국시대 백제의 사리기는 아니지만, 이 제석사 사리용기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으로 익산 왕궁리 오층탑에서 발견된 사리기가 있다. 1965년 탑의 해체 수리 시, 일층
옥개석 윗면 중앙의 적심부에 있는 방형석(方形石)과 기단부의 찰주(刹柱) 하부 방형심
초석에서 각각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21) 일층 옥개석 윗면에는 방형의 사리공을 나란
히 두 개 마련하고, 동쪽에는 녹색유리사리병·금제방형합·금동제외함을, 서쪽에는 금
지금강경판(金紙金剛經板) 19매·금동제장방형합·금동제외함을 겹겹이 넣었다. 외함
의 겉에는 붉은 칠이 되어 있고 함의 내부는 도금되었는데, 회칠이 된 사리공 안에 유리
구슬을 엮은 받침이 놓이고 그 위에 이 외함이 놓여 있었다.22) 또한 찰주 하부 방형 심
초석에는 ‘품(品)’형의 사리공이 뚫려 있고, 그 중 2개의 사리공에서 불상 1점과 방울이
발견되었다.
탑에 대한 약보(略報)를 보면, 백제의 구석재(舊石材)가 섞여 사용되었으며 석탑임에
도 불구하고 목탑에서와 같이 탑심초가 사용되고, 이 심초에 사리공이 마련되었다고 하
였다. 이것은 목탑의 구조를 본 뜬 석탑의 조립을 뜻하는 것으로, 고식의 탑에서 나타나
는 특징인 것이다. 특히 사리공이 심초 윗면에 마련된 것은 목탑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최근의 왕궁리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보고에 의하면, 이 왕궁리
탑 하부에서 이 석탑 이전의 목탑 건립을 위한 판축부가 확인되어, 이 석탑이 백제의 목
탑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23) 그렇다면 목탑에 있던
사리기와 같은 형태의 사리기가 왕궁리탑에 납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왕궁리 오
층탑에서 출토된 사리기들은 위에서 살펴본 제석사지 목탑의 사리구와 내용상 거의 흡
사하여, 이 사리구가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라 할지라도 백제의 사리기 형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요컨대, 제석사지에서 이미 신사리(身舍利)와 법사리(法舍利)를 갖춘 사리봉안이 행
하여졌으며, 바로 왕궁리 오층탑 사리기에서 백제 사리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21) 황수영, 「익산 왕궁리 석탑 조사」, 고고미술 7-1, 1966.6, pp. 5-10.
22) 황수영, 「익산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유물」, 고고미술 7-1, 1966.1, pp. 1-3.
23)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왕궁리 (발굴조사 중간보고Ⅱ), 1997,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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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 사리구
석탑의 사리봉안 위치는 목탑에서와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석탑으로 알려진 부여 정림사 오층석탑
의 경우에는, 사리공이 제 4층 탑신 내부에 마련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24) 석탑의
경우에 있어서는 목탑에서와 같이 도난 및 화재 등 안전상의 이유로 심초에 봉안할 필요
가 없으므로 탑신에 안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정림사탑도 그러하다.
정림사 석탑과 함께 석탑의 시원을 보여주는 미륵사지 석탑은, 거대한 크기로 인해 해
체조사되지 못하여 석탑 내부의 사리봉안에 대한 궁금증을 안겨주었다. 미륵사지는 백
제의 무왕이 익산에 별도(別都)를 설치하였다는 기록과 관련하여, 왕명에 따라 건립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무왕조에 미륵사의 창건에 관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으며, 익산군 금마면 현지에 거대한 미륵사석탑과 당간지주 등 사찰
과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1980년부터 84년까지 발굴조사가 행해졌으며 이에 따라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경내에는 3기의 탑이 있었으나 중앙의 목탑은 심초석 부분을 포함한 많은 부분이 이미
없어졌고, 석탑의 경우 동탑은 터만 전하여지고 서탑은 6층까지만 남아있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규모가 장대하고 석재를 사용하여 목조탑을
표현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시원으로 평가되었다. 일부 남아 있는 서탑은
절반 이상 붕괴되어 있던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보강한 상태였다. 따라서
그 내부에 사리장엄구가 안치되었을 것이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탑의 해체 복원에 예상
되는 많은 어려움으로 인해 그동안 특별한 해체조사가 시행되지 않았다.
1998년에 이르러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안전진단 결과 구조적 안정성이 우려되어
1999년 해체 보수정비가 결정되었으며, 2002년부터 전라북도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
체조사 및 보수정비계획을 추진하였다. 해체과정에서 2009년 1월 14일 1층 내부의 심주
석 상면 중앙에서 사리공이 확인되고, 내부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 유물
이 발견되었다.
발굴조사결과에 따르면 1층 심주석 중앙에 24.8×24.8×27(깊이)cm의 방형사리공을
설치하고, 그 바닥에 바닥면을 덮을 수 있는 크기의 녹색 판유리(두께 1cm)를 깔고 그
위에 다양한 공양품을 차례로 안치하였다. 먼저 사리공 사면 모서리에 은제합 5점과 동
제합 1점을 두고, 이들 합들 사이에는 녹색유리구슬(지금 1~3cm)을 채운 뒤 남측에는
24) 홍사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실측에서 나타난 사실―」, 고고미술 5-6·7, 1964. 6, pp.
53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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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제관식과 금제 소형판들을, 북측에는 직물에 싼 刀子 5자루를 두고, 서측에는 2자루의
도자를 각각 올려놓았다. 그리고 남측 벽면에 비스듬히 금제사리봉안기를 올려놓고, 정
중앙에 금제사리호를 마지막으로 안치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북측과 서측벽면 쪽에는
부식이 심한 3~5종의 직물들이 있었고, 주변에는 금사(金絲) 등 각종 실들과 함께 크고
작은 금괴도 섞여 있었다.
금제사리봉안기(15.5×10.5cm)에는 선각으로 사리봉안 연유를 적고 있는데, 백제 왕
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탑을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
의 발원문이다.25) 금판 앞·뒷면에 한 줄에 9자씩 총 194자를 새겼으며, 특히 앞면에는
붉게 주칠하여 문자를 더욱 선명히 드러나게 하였다.
높이 13cm의 금제사리호는 넓적한 구연 위로 보주형 꼭지가 달린 뚜껑과 긴목, 둥근
어깨를 지닌 동체로 매우 힘차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뚜껑과 목, 저부에는 연꽃잎을,
동체에는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을 배열하고 바탕공간에는 어자문(魚子文)을 빼곡히
시문하였다. 특히 동체를 상하로 각각 나눠 제작하여, 내부에 소형 사리병을 안치한 후
조립하였다. 아직 금제사리호 내부에 대한 조사가 완료되지 않아서 내사리병의 재질과
형태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리공양품 중에서 손가락 길이 만한 얇은 금판이 모두 18개 확인되었는데 ‘중부 덕솔
이 금덩어리 1개를 바쳤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덕솔은 백제의
4품 관리로서 왕후가 발원한 왕실행사에 참여하였던 관리들도 물건을 공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Ⅴ. 정리하면서
백제의 사리장엄은 목탑의 경우, 봉안 장소에 따라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될 수 있었
다. 제 1기는 사리장엄의 가장 오랜 방식이 쓰이던 시기로, 능산리사지 목탑과 사리감의
예처럼 탑심초석을 지하 깊이에 놓고, 이 심초석과 별도로 석함을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
하였다. 제 2기에는 심초석과 사리석함을 결합한 형태, 즉 심초석에 직접 사리공을 뚫어
25) …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種善因於曠劫/受勝報於今生撫育萬/象棟梁三寶故能謹捨/淨財造立伽藍
以己亥(전면) 年正月++九日奉舍利…(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
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
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제2기 고고학 시민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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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를 봉안하였는데, 그 시작은 부여 왕흥사 목탑지에서 발굴된 사리장엄은 물론, 백제
의 영향하에서 건립된 일본 비조사(飛鳥寺) 사리장엄으로 보아 그 시작이 6세기 말에 해
당된다고 본다. 제 3기는 이러한 사리공이 있는 지하심초가 지상심초로 바뀌는 시기이
다. 이는 무왕대에 미륵사라는 대규모의 국찰(國刹)을 건립하면서, 새로운 건축술로서
목탑의 심초가 기단부의 윗면에 놓이는 지상심초가 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미륵
사 목탑은 남아 있지 않으나 심초석이 기단부 상면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석재
로 목탑 형식에 따라 건립한 미륵사지 석탑의 1층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를 납입한 사리
공이 발견된 것은 이를 방증한다고 본다.
백제의 사리기에 대한 자료는 그동안 백제 또는 백제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기 것으
로 평가되었던 익산 왕궁리석탑 금동제함 - 금제방합 - 녹색유리사리병과 함께, 제석사
목탑에 대한 기록에 나타난 수정사리병과 동제금강경판을 담았던 목칠함을 통해서 대략
적인 양식을 추정하여 왔다. 그러나 2008년 부여 규암면 왕흥사 목탑지에서 발견된 청
동합 - 은제호 - 금제병의 형식과, 익산 미륵사 석탑에 봉안된 금제외호 - 내호를 통해
새로운 결과를 얻게 되었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왕실에서 발원한 탑에 봉안한
사리기에서, 귀한 사리를 다양한 재질로 만든 사리기에 중첩하여 납입하였으며, 합, 호,
병 등의 사리기 형식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사리호에 사리병을 넣는 형식이 왕흥
사와 미륵사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어, 백제 사리기 형식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라 여
겨진다. 아직 미륵사 석탑 사리구에서 금제사리호 내부에 들어있는 사리병의 재질이 밝
혀지지 않아서, 백제에서 내사리기로 녹색유리병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의문
이 해결되지 않았으나, 조만간 밝혀질 내용에 따라 보다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
라 생각된다.
백제가 삼국시대의 불교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이나, 사리장엄 또한 백제
의 역할은 지대하였다고 본다. 백제는 당시 고구려와 함께 일찍부터 문화발전을 이루었
고 이를 신라와 일본에 전하였다. 신라에서 황룡사 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를
비롯한 200명의 장인이 참여하였다는 기록은 백제의 목탑 건립방식이 신라에 영향을 주
었음을 시사하며, 사리장엄 또한 보다 체계적인 형식과 아름다운 조형성을 유지하였던
것이 신라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백제의 사리신앙과 장엄은 신라
에 의한 삼국통일 이후에도 백제 고토를 중심으로 오랜 세월 그 전통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고려시대의 백제계 석탑과 그 내부에서 발견되는 사리기에서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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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제2기 고고학 시민강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