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세상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아름다움을 주고 슬픔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슬픔을 준다.
기쁨이나 지혜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반영이다."
- 카이오와 족 큰구름이 한 말, 본문 중에서
이번 독서 자료는 류시화 시인의 글입니다. 무더위에 모두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수 영
■ 류시화 지음
0 30만 명의 독자가 읽고 독일과 스페인 등 5개국에서 번역된 <새는 날아가면 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이은 신작 산문집
0 그의 글에는 가벼움과 깊이가 함께한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 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할 때 사람은 말과의 관계가 돈독해진 다. 전달된다고 믿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새는 해답을 갖고 있어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다. 삶이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0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면 불꽃놀이가 터지는 유리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마 음속으로 다양한 부호들이 쏟아진다.
■ 서문 :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J. D.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통해 이야기 합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읽는 사람을 이따금 웃게 만드는 책이다. 그리고 나를 감동시키는 책은, 다 읽고 난 후에 그 책을 쓴 작가가 나의 친한 친구가 되어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전화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이다.”
작가가 누리는 즐거움은 이렇듯 독자가 자신의 책을 읽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네’하고 공감대를 느낄 때입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당신의 목소리로 옆에서 직접 읽어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다.”라고 말하는 독자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닙니다.
글을 읽고 공감하는 독자는 연인보다 동지입니다. 그 이유는 동지가 더 뜨겁
- 1 -
기 때문입니다. 내 글 읽은 사람을 만날 때 나는 같은 길을 여행하는 동지애를 느낍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여행 중에 칠레의 탄광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갱도에서 일하는, 얼굴에 석탄 때 잔뜩 묻은 광부가 다가와 네루다를 와락 껴안으며 외쳤습니다.
“당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런 동지 말입니다.
“처음부터 말이 통하는 사람과는 같은 책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처음부터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책을 전혀 책을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노벨상을 받은 튀르기예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말한다.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것은 특히 불행한 시기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세계를 넣고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당신을 미소 짓게 하고, 많은 사람은 당신을 울게 하면서 웃게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사람’을 ‘책’으로 바꿔 읽어도 통하는 말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라고 했습니다. 글쓰기는 고독한 일이지만, 미지의 독자가 있음을 믿으면 그 고독함이 힘을 얻고 문장이 빛을 발합니다. 전달된다고 믿지 않으면 작가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이 책이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는, 그래서 저에게 언제든 전화를 걸고 싶게 만드는 그런 책이 되길 바랍니다.
◎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아침 산책길에서였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바닷가 오솔길을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고 서쪽에서 걸어오고 나는 바닷바람에 장발을 날리며 동쪽으로 걸어가다가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에, 나의 범상치 않은 행색을 알아본 그녀의 예리한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반갑게 인사하며 자신도 근처 동네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서귀포 그 바닷가 마을에서 지낸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제주도 억양이 아니라서 물었더니 회사를 휴직하고 한달살이 하러 내려왔다고 했다. 대화가 더 길어지기 전에 ‘제주도에서 의미 있는 시간 보내길 바란다.’며 덕담을 건네고 엇갈려 가려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 2 -
“그런데 내가 생각한 제주도가 아니에요. 그래서 무척 실망하고 있어요.”
붉은 해가 구름층을 뚫고 시시각각 떠오르는 그 바닷가에서 그녀는 10분 동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제주도의 여러 모습을 쏟아놓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류시화 시인이 아니시네요.”
내가 놀라서 시선 처리가 헷갈리자, 그녀는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다정하세요. 글 쓰는 사람은 좀 이지적으로 차가울 줄 알았거든요.”
예리한 지적인지 칭찬인지 모를 그 말에 “아, 예, 제가 좀 다정하게 이지적이긴 하죠.”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나의 예상 밖 모습을 더 발견하기 전에 내가 정색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곳 제주도가 당신이 생각한 제주도여야만 하죠? 자신의 관념 속 제주도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제주도를 경험하기 위해 한 달이라는 시간을 내어 이곳에 온 게 아닌가요?”
흠칫 놀라는 표정이 마스크 뒤에서도 역력했다.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풍경이 너무 평화로운가요. 아니면 견디기 힘들 만큼 변화무쌍한가요? 귤이 너무 시큼한가요, 달콤한가요? 사려니 숲 길에 사람이 너무 많은가요. 아니면 반복되는 고독이 싫은가요? 만약 당신이 상상한 것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제주도라면 며칠 못가서 지루하지 않을까요? 당신의 생각과 기준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더 역동적인 섬이 아닐까요?”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처음 인도에 갔을 때 경험한 갈등도 그것이었다. 모든 면에서 내가 상상한 인도가 아니었다. 영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났는가? 아니다. 걸인과 가짜 수행승이 더 많았다. 갠지스강은 순결하고 성스러웠는가? 아니다. 시체가 종종 떠다녔다. 거리에는 꽃들이 향기를 퍼뜨렸는가? 아니다, 각종 똥이 더 많았다. 조화롭고 지혜로운 이상세계였는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과 혼돈에 머리가 어지러운 세계였다. 눈이 커질 만큼 매혹적인 인도 여성들이 많았는가? 아니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히말라야에 갔을 때도 내가 상상한 성자들의 거처가 아니었다. 라다크의 오지
- 3 -
투르툭 마을로 ‘하늘 가득 쏟아지는 별’을 보러 갔을 때는 비구름에 가려 내가 꿈꾸었던 밤하늘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로 카르둥라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올 때는 5월인데도 폭설이 내려, 앞 좌석에 앉은 라다크 여인이 타라 여신에게 드리는 간절한 기도문이 통하지 않았다면 버스가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 기도문을 즉석에서 배워 내가 더 크게 외웠다. 동서양의 명상 센터와 아쉬람을 방문했지만 내 기대와 상상에 일치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히말라야 여행을 스무 번 넘게 떠났는가? 무엇을 위해 라다크에는 고산병을 앓으면서 여름마다 가고, 무슨 축복을 위해 혼돈의 바라나시에 살다시피 했는가? 내 상상을 뛰어넘는 세계여서 좋았다! 투르툭에 다시 갔을 때는 높은 돌산 위에서 별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무엇인 줄 아는가? 자신이 상상한 인도가, 자신이 기대한 명상 센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만나 보니 자신의 생각 속 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자유 영혼임을 느낀다. 타인의 예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면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절대 아니며, 내가 상상한 사람이 아니다 (아픔이 너무도 크다). 신도 내가 생각한 신이 아니다. (때로 인간에게 가혹하다). 지구별은 단순히 나의 기대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좌표 계산이 어긋나 엉뚱한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얼마나 대행한 일인가. 모든 일들이 나의 제한된 상상을 벗어나 훨씬 더 큰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니.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
◎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여행을 안내하고 있다
신의 낙원에는 꽃이 만발한 영혼의 나무가 있다는 우화가 있다. 그 나무에서
- 4 -
모든 영혼이 꽃을 피운다. 그리고 열매처럼 잘 익은 영혼은 부름을 받아 지상에 태어난다. 모든 영혼이 신의 정원에 있는 한 나무의 열매이지만, 저마다 익는 계절이 다르다. 같은 계절에 익은 영혼들은 언제나 가까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이해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우리가 이 물질계에 태어날 때 우리와 동일한 파장을 가진 영혼 집단이 거의 동시에, 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태어나 우리가 원하는 삶의 실현과 정신적 성장을 돕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의 소울 그룹soul group이다.
수도자의 삶을 살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나는 늘 그 세계가 그립고, 가톨릭 수사나 불교 승려나 원불교 출가자를 볼 때마다 마음에 잔물결이 일었다. 홀로 바랑을 메고 걸어가는 수도자를 보면 함께 걸어가고 싶었다. 마치 이번 생은 나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놓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한 승려 친구에게 그런 내 심중을 이야기하자 뜻밖에도 그가 말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수행하지만 서로를 위해서도 수행한다네, 우리는 우리와 연결된 모두를 대신해 수행의 길을 걷는 것이네.”
그 말이 큰 힘이 되었다. 세상에 매몰될 때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붙들어 주었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모색하게 하는 힘은 나 자신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존재들로부터도 온다. 그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안도하게 된다.
자신이 혼자이며 이 세계 속 고독한 존재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어떤 영역에서든 우리를 지원하는 소울 그룹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며 믿음이다. 그들 중에는 육체를 가진 존재도 있고 영적으로만 존재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전통에서는 그들을 ‘수호천사’라고 부르고 ‘백색 형제단’이라고도 부른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미트라’이다.
하나의 존재는 단순한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여러 존재가 연결된 것이며, 하나의 정신 역시 여러 정신이 하나로 모인 것을 의미한다.
소울 그룹은 비슷한 특성과 공통의 미해결 문제를 가지고 있다. 감정의 결도 닮아있고 삶에 대한 인식도 비슷하다. 한 명이 먼저 문제 해결에 도달해 나머지 사람들을 안내하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
- 5 -
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여행을 안내하고 있다.
내가 잠들었을 때 누군가는 깨어 있다.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누군가는 묵묵이 그 길을 걷는다. 내가 헛되이 시간을 보낼 때 누군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수행에 전념한다. 그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와 연결된다. 당신은 어느 소울 그룹과 연결되어 있는가?
◎ 자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자신을 정의하라
한 여성이 있다. 평화주의자이고,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채식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기 위해 텀블러를 가방에 넣고 다니는 환경운동가이다.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도중에 만나 이제는 작가와 독자가 아닌 친구가 되었다. 나이는 나보다 많이 어리지만 본받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천성적으로 총명하고 예민해 사물을 보는 감각이 뛰어나다. 모든 면에서 옳고 합리적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글의 제목도 그녀에게 조언을 구할까 생각 중이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기 전에 말해 두지만, 그녀는 직관이 남다르고 자신의 직관을 신뢰하기에 사람과 세상일에 대해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 한번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다.
당연히 전쟁을 싫어하고, 모피코트만이 아니라 산 채로 덜 잡아 뜯는 거위털 패딩을 배척하며, 골목길의 오랜 역사를 걷어내는 재개발에 반대한다. 길고양이 내쫓는 동네 아저씨를 혐오하고, 플라스틱이 무분별하게 남는 배달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10년 이상 쓸 것인지 생각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는 것을 싫어한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계속 나열하면 정말로 이야기가 다른데로 샐 정도이다.
무분별하게 파괴되어 가는 세상에서 이런 자세가 너무 순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소중한 것을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행위들에 저항해야 한다. 그것들을 바로잡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바로 그것을 위해 전쟁이 아니라 평화에, 증오와 선동이 아니라 연민과 지성에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나는 아름다운 어머니 지구가 좋아.”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지구의 상처를 회복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별을 흔들지 않고는 꽃을 꺾을 수
- 6 -
없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라는 글귀를 나는 좋아한다. 자랑하는 것 같지만 내가 엮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연설문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 나오는 문장이다.
“세상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아름다움을 주고, 슬픔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슬픔을 준다. 기쁨이나 지혜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반영이다.”(카이오와 족 큰구름이 한 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순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그것을 자신에게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예민한 사람일수록 싫어하는 것이 많다. 우리가 천성적으로 부여받은 예민함은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우리를 상처 입히고 고립시키는 것은 우리의 예민함이 나이라 그 예민함으로 발견하고 선택하는 것들이다.
당신이 싫어하는 것 백 가지를 적어 보라. 그러면 그 싫은 것들이 당신 주위를 에워쌀 것이다. 그 대신 좋아하는 것 백 가지를 적어보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하루하루를 채워 나갈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불의와 파괴를 외면하는 길이 결코 아님을 그 목록을 써내려 가면서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세상이 당신을 보는 방식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자.’가 이 글의 주제이다. 생의 마지막에 당신은 무엇을 좋아했는지 떠올릴 것이다. 그것이 당신 영혼의 색깔이다. 신은 당신에게 이 세상에서 무엇을 좋아했는가 묻지, 무엇을 싫어했는가 묻지 않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불행했는가보다 무엇 때문에 행복했는가를.
당신은 싫어하는 것이 많은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은가,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무엇으로 ‘나다움’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 가지에서 미소짓지 않는 꽃은 시든 꽃
지난해 본, 라다크 여행에 동행한 이가 누브라 밸리의 투르툭 마을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의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내가 가장 부러운 사람은 지금 이곳을 여행하고 있는 나 자신입니다. 훗날에도 나는 이곳을 여행한 나를 그리워하게 될 겁니다.”
- 7 -
그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함께 여행하기에 부족함 없는 사람이었다.
여행은 어느 곳을 가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가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말린 살구를 오물거리며 그 동행에게,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 선한 친구는 얼른 내 질문을 따라했다.
“작가님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은가. 모든 것과 모든 곳에, 그리고 모든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 온전히 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가지에서 미소 짓지 않는 꽃은 시든 꽃.’
우리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추구의 대상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면서 거울 그 자체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마다 자신의 아름다움도 동시에 발견한다. 오래된 사원 벽에 적혀 있는 문장처럼,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목격하는 순간 사람은 노예가 되기를 멈춘다. 삶이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세상은 단어들로 가득한 책과 같다. 그 단어들을 이어 행복한 문장, 불행한 문장을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일이다. 때로는 그 책을 펼쳐 들고 너무 많은 단어들 때문에 현기증을 느낄지라도.
◎ 혼이 뼈와 만나는 곳에서 일어나는 전투
버스에 타자마자 여성은 누군가와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맨 뒤쪽, 조금 올라간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 중년 여성은 내 왼쪽 끝에 앉았다. 우리 둘 사이는 비어 있었다.
햇빛 쏟아지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서 그녀는 쉴 새 없이 통화를 했다. 다른 승객을 의식해 나름 속삭이는 듯 했지만, 내 귀에는 충분히 컸다. 소리만이 아니라 세상 온갖 것에 예민한 나는 다른 자리로 옮길까도 했지만, 비어 있는 자
- 8 -
리는 앞쪽의 젊은 여성 옆자리뿐이어서 범상치 않은 내가 갑자기 옆에 와서 으면 놀랄 수도 있었다.
소음 가득한 세상에 시달리다 못해 배운 마인드 콘트롤을 이용해 여성의 시끄러운 수다를 봄날의 새소리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럴수록 신경이 더 깨어났다. 그녀의 통화 내용은 흔한 일상사에 관한 것이었다. 집안일과 반찬 걱정, 아직 학생인 아이들 뒤치다꺼리할 일, 먹고 사는 문제의 어려움과 사소한 푸념등이 전부였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상대방은 딴 생각을 하는 건지 자비심의 미덕을 실천하는 수행 중인지, 그녀 혼자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내 휴대폰에 저장한 명상 음악을 그리워하며 이어폰을 놓고 온 것을 후회하는 순간 그녀가 마침내 통화를 마쳤다. 이제 공항까지 남은 구간을 평화롭게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고, 곧이어 새로운 통화를 시작했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보험회사 직원에게 문의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1년 전 수술받은 암이 재발했으며 보험료 재지급이 안 되면 살아갈 길이 막막하며, 아이들도 아직 어리고, 그러니 ‘제발, 꼭 좀’ 확인해서 알려달라고 간청하고 또 간청했다. 오랜 시간 그녀의 수다를 피해 창밖을 향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차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채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내 쪽에서 보이는 그녀의 오른쪽 뺨에 가느다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의 단어들이 내 갈비뼈 사이에 와서 박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시속 10만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바위 행성에 올라탄 채로 여행 중이다. 자전하면서 공전까지 한다. 때로는 진도 7로 흔들리는 불안정한 삶에서 ‘살아 있는 느낌’이 깎여 나가는 아픔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 누구의 삶도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없다. 당신의 삶도, 나의 삶도, 80억 명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오늘을 경험하고 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첫 분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지금보다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여리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하나 해 주었는데, 그 충고를 나는 아직도 마음속으로 되새기곤 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어질 때는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거라.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있지는 않다는 것을.’ 하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 9 -
인도인 친구가 다음 일화를 보내주었다.
기차 안에서 두 아이가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서로 싸우기도 하고, 좌석 위로 뛰어오르기도 했다. 근처에 앉은 아이들의 아버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쳐다보면 다정한 미소를 짓고, 그러면 아이들은 다시 장난을 치느라 바쁘고, 남자는 계속 물끄러미 아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다른 승객들은 아이들의 장난기에 화가 나고, 아이들 아버지의 태도에 짜증이 났다. 밤이었기 때문에 다들 쉬고 싶었다. 보다 못한 한 사람이 남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대체 어떤 아버지이길래, 아이들이 저토록 버릇없이 행동하고 있는데 제지하기는커녕 미소로 부추기고 있군요. 아이들에게 잘 설명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 아닌가요?”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생각 중에 있습니다. 아내가 친정에 다니러 갔다가 어제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를 치르러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중인데, 이제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 절실히 원한 모든 순간이 날개
신이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나는 말했다.
“할 수 없어요. 두려워요.”
신이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할 수 없어요. 추락할 거예요.”
신이 다시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그래서 나는 갔고, 신은 나를 절벽 아래로 밀었다. 나는 날아 올랐다.
베네딕트회 소속의 빌리기스 예거 신부는 저서 <파도가 바다다>에서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이 많은 여인이 옷들을 다림질하고 있다. 그때 그녀를 데려갈 천사가 와서 말한다.
- 10 -
“시간이 되었다. 이제 가자.”
여인이 말한다.
“좋아요 하지만 먼저 다림질을 끝내야만 해요. 나 대신 누가 이 일을 하겠어요? 그리고 음식도 만들어 놔야 해요. 딸이 가게에서 일하기 때문에 일 끝나고 집에 오면 뭐라도 먹어야 해요. 상황을 아시겠어요?”
천사는 사라졌다가 얼마 후 다시 찾아온다. 집 나서는 여인을 발견하고 천사가 말한다.
“이제 가자! 떠날 시간이다.”
여인이 말한다.
“하지만 먼저 양로원을 방문해야만 해요. 열 명 넘는 노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에요. 나도 그런 식으로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 줘야만 할까요.”
천사는 잠시 후 다시 와서 말한다.
“시간이 되었다! 얼른 가자!”
여인이 말한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떠나면 누가 내 손자를 유치원에서 데려오죠?”
천사는 한숨을 쉰다.
“그럼 그대의 손자가 혼자 걸어서 집으로 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몇 년 후 여인은 피곤한 얼굴로 집 앞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지금쯤 나를 데려갈 천사가 올 수도 있겠지? 모든 일을 끝냈으니 영원한 행복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면 좋으련만.”
천사가 오자 여인이 묻는다.
“이제 나를 영원한 행복이 머무는 곳으로 데려갈 건가요?”
천사가 놀라며 묻는다.
“그럼 자신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지?”
◎ 나의 지음을 찾아서
오래 알고 지낸 사람으로부터 은목걸이를 선물 받았는데, 네모난 팬던트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가 마음에 들어 한동안 하고 다녔다. 플라톤의 저서 <알키비
- 11 -
아데스>에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영혼이 자신을 알고 싶으면 다른 영혼을 마주해야 한다.’
<열자>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진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백아라는 이가 있었다. 젊었을 때 성연에게서 거문고를 배웠으며, 얼마 후에는 연주 실력이 수준급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신에게 감명 주는 것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느꼈다.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던 성연이 말했다.
“동쪽 바다에 계시는 나의 스승님은 거문고에 능할 뿐 아니라 예술성까지 지도할 수 있으니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아 보자.”
백아는 성연의 권유를 받아들여 함께 배에 올라 여행을 떠났다. 동쪽 바다의 섬에 도착하자 성현은 백아에게, 스승을 부르러 가는 동안 거문고 연습을 하며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고는 배를 타고 사라졌다.
백아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나 성연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흐르는 물, 날아다니는 갈매기, 고요한 숲이 모두 슬픈 선율을 만들어 내는 것만 같았다. 무수한 감정이 마음속에 차오르자 그는 거문고를 펼쳐 즉흥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음악에 더 많은 표현력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아가 자연의 품에서 영감을 얻도록 성연은 일부러 그를 홀로 남겨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백아의 거문고 연주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당신 안에는 당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음악이 존재한다. 그 음악을 이해하는 이가 당신의 지음이다. 하지만 당신이 먼저 자신의 음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의 음에 스스로 귀를 닫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기 위해 먼 시간의 대양을 건너왔다. 자신의 음, 특히 영혼의 음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삶이 가져다주는 행운이고 축복이다. 나의 ‘음’이 불협화음이 아니며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님을 확인해 주는 이, 그래서 아직은 미숙하고 불안정한 나의 음에 힘과 마법이 깃들게 하는 이가 나의 지음이다.
◎ 그대 얼마나 멀어졌는가
‘바이올린의 시인’으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
- 12 -
이스트라흐는 자신의 이전 연주를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때보다 지금의 연주 실력이 더 못할까 봐 두렵다는 것이다.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변했다.”라는 찬사를 듣는 명연주자가 되었는데도, 과거의 연주가 서툴고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의 연주가 젊었을 때보다 나빠졌을까 봐 겁난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그럴 때가 있다.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두려울 때가, 비록 설익을지라도 그 시절의 순수와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현재의 나를 확인하게 될까 봐서.
◎ 모든 뱀이 밧줄은 아니다
당분간 집필실로 사용하게 된 서귀포의 돌집이 귤밭 안에 있는 까닭에 귤 농사를 자진해서 떠맡게 되었다. 농약을 전혀 쓰지 않기로 해서 일이 많았다. 돌아서면 우르르 자라나는 풀들을 베어야 하고, 줄기에 달라붙은 깍지벌레도 일일이 잡아야 했다.
달팽이가 증식하는 날에는 귤 수확이 전멸이다. 달팽이 한 마리의 이빨이 무려 2만 개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사람이 그렇다면 임플란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나? 전에 이 밭에서 귤 농사를 지은 남자는 임플란트를 세 개 해 넣었는데, 마치 그것이 달팽이 때문인 양 세상에서 가장 ‘이’가 갈리는 존재가 달팽이라고 했다. 달팽이가 2만 개의 이빨로 한 번 씹으면 귤은 금방 썩는다.
내가 첫 해에만 손으로 직접 잡은 달팽이가 5천 마리가 넘었다. 풀 베랴, 달팽이 잡으랴, 근처 수도원에서 몇 트럭 얻어온 퇴비 뿌리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어서 방문객(정확히 말하면 나의 독자들)의 호의적인 품앗이에 의존할 때도 있었다.
“뱀이다! 여기 뱀 있어요!”
한번은 나를 만나러 온 독자가 귤밭에서 달팽이 잡다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풀숲에 숨어있던 꿩이 후드득 날고,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그쪽으로 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앞뒤에 숨은 달팽이 하나를 떼내 생수병에 밀어 넣으며 내가 소리쳐 말했다.
“뱀이 아니고 밧줄이에요.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흔히 밧줄을 뱀으로 착각한다. 특히 풀이 많은 곳에서는 뱀이 나오지 않을까
- 13 -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지레 밧줄을 뱀으로 오인하기 쉽다. 여기서 잠시, 영적 교사로 활동하는 바이런 케이티의 경험담을 인용해야겠다. 그녀는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이혼을 계기로 마음의 병이 깊어져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고통이 사라진 절대 기쁨의 상태로 깨어났다. 그때 그녀가 발견한 진실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자신의 생각을 사실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날 모녀는 모하비 사막을 걷다가 커다란 녹색 방울뱀과 마주쳤다. 하마터면 뱀을 밟을 뻔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고, 두려움으로 몸이 마비되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밧줄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웃다가 울었다.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 밧줄을 바라보았고, 심지어 쿡쿡 찔러 보기도 했다. 그녀는 말한다. 온 세상이 이 뱀처럼 다가올 수 있다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무서워 죽을 것만 같지만, 사실 그 뱀은 밧줄일 뿐이라고.
◎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으로
가벼움을 경박함으로 여기는 시각이 나에게 있었다. 가벼움은 비문학적이고 속물근성의 드러남이며, 추구의 길과는 반대되는 것이라고 치부했다. 그래서 가벼움을 경계하고, 가벼운 철학이 정신에 스며들지 못하게 막았다.
나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떠다민 것 자체가 무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내 관점에서 가벼움은 곧 의미와 깊이의 부족이었다. 그래서 가벼운 상승기류를 타고 날아가지 않도록 밤마다 묵직한 번민의 돌로 내 혼을 눌러 놓았다.
나뿐 아니라 작가는 가벼움보다는 무거움에 대해 할 말이 더 많다. 모든 인간의 공통된 상황인 고독과 절망, 혼돈과 모순을 외면하고 어떻게 예술을 할 수 있는가. 수행과 추구 역시 자신의 발목에 드리워진 쇠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고흐가 그랬고 싯다르타가 그랬듯이, 빛을 발견하려면 먼저 어둠 속을 더듬어야 한다. 광부는 어두운 갱도 끝까지 파 내려가 중력의 무게에 단단해진 보석을 손에 쥔다.
나는 가벼움을 원 밖으로 밀어냈으며, 유행에 휩쓸려 다니는 어린 영혼들은 나의 원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들의 숨과 내 숨의 결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문제 어디에 가벼움이 있는가? 우주 공간을 운행하는 행성들과 블랙홀까지도 무거움을 시연하고 있다. 삶이란 진지하고 숙연한 과제인데,
- 14 -
세상은 경박한 소란으로 가득하고 꾸며낸 깊이 밖에 없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 자신과 주위의 무거움에 물린 나머지 나는 차츰 재미있고, 덜 심각하고, 마음이 더 열려있으며, 감정이 덜 분열증적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더 단순하고, 세상에 대해 더 분명한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을.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다음 문장을 발견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처럼 가벼울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내가 무의식적으로 추구한 것이었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 그래야 비상할 수 있고,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높은 곳에서 멀리 볼 수도 있다.
깃털처럼 중심도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새처럼 가볍게 날 수 있어야 한다. 새는 뼛속에 공기가 통하는 공간이 있어서 비행할 수 있듯이 존재 안에서 자유의 공간이 숨 쉬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박한 가벼움이 아니라 자유를 품은 가벼움이다.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소설 <섬>에서 썼다.
“마음이 어두운가? 그것은 너무 애쓰기 때문이라네. 가볍게 가게, 친구여. 가볍게. 모든 걸 가볍게 하는 법을 배우게. 설령 무엇인가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가볍게 느껴보게, 그저 일들이 일어나도록 가볍게 내버려 두고 그 일들에 가볍게 대처하는 것이지. 짊어진 집들은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게. 너의 주위에는 온통 너의 발을 잡아당기는 모래 늪이 널려있지. 두려움과 자기 연민과 절망감으로 너를 끌어내리는. 그러니 너는 매우 가볍게 걸어야만 하네. 가볍게 가게 친구여.”
◎ 함께하는 여행이 너무 짧다
저녁 무렵, 한 젊은 여성이 전철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노을을 감상하며 가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중년 여인이 올라탔다. 여인은 무슨 생각에선지 큰 소리로 투덜거리며 젊은 여성의 옆자리 좁은 공간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끼어 앉았다.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옆으로 밀어붙이며 들고 있던 가방을 그녀의 무릎 위에 걸쳐 놓았다.
- 15 -
그녀가 처한 곤경을 보다 못한 맞은편 남자가 그녀에게, 왜 옆 사람의 무례한 행동에 아무 항의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고 물었다.
젊은 여성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언쟁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까요. 나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거든요.”
함께 여행하는 짧은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다툼과 무의미한 논쟁으로 허비하는가? 너무나 짧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단점을 들추고, 잘못을 비난하며, 불쾌감 속에 시간을 흘려보내는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작자 미상의 이 이야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는가? 진정하라. 함께하는 여행이 짧다. 누군가가 당신을 비난하고, 속이고, 모욕주었는가?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라. 함께하는 여행이 곧 끝날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괴롭히는가? 기억하라. 우리의 여행이 짧다는 것을. 이 여행이 얼마나 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내릴 정거장이 언제 다가올지 그들 자신도 예측할 수 없다.”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는 ‘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라는 라틴어 문장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함이나 불멸이 아니라 불편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내가 자각하듯이 다음의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나는 이곳에 잠시 여행 온 것이다. 나는 곧 떠날 것이다.’
여기,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가 있다.
가까이 오라, 사랑하는 이여,
우리 서로를 어여삐 여기자.
당신과 나
갑자기 사라지기 전에
역설적이게도 삶의 기쁨은 이곳에서의 나의 머묾이 제한적이고 유한하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봄의 풀꽃들도 그것을 아는 듯하다, 지저귐을 막 배우기
- 16 -
시작한 어린 새도 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가슴 안에 그 새의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
◎ 지루하게 살지 말라고 속삭였는데 듣지 않았다
1960년대 말, 비틀즈 멤버들과 히피들이 다녀간 이후 북인도 히말라야 발치의 리시케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그들이 명상 체험을 하고 나서 ‘마약 대신 명상’을 외친 <비틀즈 아쉬람>을 비롯해 여러 요가 센터가 들어서고, 지금도 요가와 명상을 배우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몇 해 전 리시캐시의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여성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직장을 다니다 요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은 요가 지도자 과정을 밟기 위해 왔다고 했다. 얼마 후면 정식 자격증을 갖게 될 그녀는 내가 본 받고 싶을 만큼 무척 성실한 사람 같았다. 다양한 요가 중에서도 자신이 배운 요가 방식에 대한 자부심이 컸으며, 요가 수행자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구분이 분명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스스로에게도 엄격하고 수강생들에게도 엄격할 것처럼 보였다.
요가의 토대를 이루는 ‘해야 할 것’은 니야마(Niyama), 라고 한다. 니야마는 몸과 마음과 언행을 정결히 할 것,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만 취하고 만족할 것, 인내심과 고행을 실천할 것, 자기 탐구 등이다. 금지하는 계율인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야마(Yama )라고 하는데 폭력, 속임수, 도둑질, 과잉과 넘침 외에도 식사 후에 요가를 하지 말 것과 요가 후 30분 이내에 샤워를 하거나 음식을 막지 말것 등도 포함되다.
대화 끝에 그녀가 내 책을 여러 권 읽었다며 수행에 필요한 조언을 부탁했다.
네팔의 산속 동굴 속에서 몇 년 동안 침묵 수행을 하던 승려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음식을 가져다주었으며, 그 짧은 접촉 외에는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다. 그 무렵 달라이 라마가 그 지역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동굴을 내려왔다.
티베트 불교 최고 지도자에게 이제 그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영적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 17 -
그 승려에게 해 준 달라이 라마의 조언을 상쾌했다.
“따분하게 살지 않으면 됩니다! 즐겁게 사세요!”
그 조언은 승려가 갖고 있던 수행의 기준(야마든 니야마든)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그 은둔 수행자의 명상이 무가치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거기서 멈추지 말고 삶의 기쁨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세계에 갇혀 자신이 만든 밧줄로 스스로를 묶게 되니까.
◎ 부서진 가슴에서 야생화가 피어난다
물기를 완전히 쥐어짠 돌에는 존재의 다양한 기쁨이 스밀 수 없다. 그때는 언제까지나 삶의 바깥쪽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것을 <잘랄루딘 루마>는 이렇게 썼다.
단단한 바위에 봄이 어떻게
정원을 만드는가.
흙이 되라, 부서져라.
그러면 그대의 부서진 가슴에서
수많은 야생화가 피어날 것이니.
너무 오랜 세월 그대는 돌투성이였다.
다르게 해 보라.
항복하라.
때로는 온 존재가 부서지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누구라는 굳센 생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고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불행의 인간이 아니다. 단지 불행한 순간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우는 인간이 아니다. 단지 우는 순간, 웃는 순간이 교차할 뿐이다. ‘불행한 사람, 화난 사람, 과거의 어떤 사람이 나라는 고정된 생각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다.
◎ 바보가 되려면 큰 바보가 되라
내가 흔히 받는 오해 중 하나는 자기 주장이 좀 강하고 고집이 약간 세 보인
- 18 -
다는 것이다. 나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나는 자기 주장이 ’매우‘ 강하고 고집은 지구 행성 최강이다. 하지만 나의 주특기 중 하나는 상대방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는 것이다. 세상과 많은 충돌을 겪고 난 후 터득한 경지이다.
나를 볼 때마다 어머니는 내 긴 머리를 두고 성화를 내셨다.
“그 머리 좀 자르면 안 되겠니? 왜 멀쩡한 사람이 정신병원에서 나온 것마냥 허리까지 머리를 기르고 다니느냐?”(작가의 모친답게 과장법이 심하시다. 그리고 자식이니까 어쩔 수 없이 ’멀쩡한 사람‘이라고 하신 것임)
나는 크게 고갯짓을 하며 동의한다.
“맞아요. 그렇지 않아도 미용실에 예약을 해 놨어요. 저도 이제는 머리 짧게 자르고 정상인으로 살고 싶어요.”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웃으실 때 뽀얀 치아가 보여(틀니이지만) 나도 기분이 좋다. 다음 달에 찾아뵈었을 때 어머니는 더 길어진 내 머리부터 쳐다보고는 말문이 막히셨다.
얼마 후 어머니는 머리 긴 아들을 다시 못 보고 무한의 세계로 떠나셨다. “왜 자꾸만 머리를 자르라고 성화를 내시느냐?” 서른 해 동안 대들던 한 때의 어리석은 나를 너무도 후회하게 만들면서.
<장자> ‘제물론’에서 장자는 말한다.
“내가 그대와 논쟁을 한다고 하자. 그대가 이기고 내가 졌다면, 그대는 옳고 나는 정말 틀린 것인가? 내가 이기고 그대가 졌다면, 나는 정말 옳고 그대는 정말 틀린 것인가? 한 쪽이 옳으면 다른 쪽은 반드시 틀린 것인가? 둘 다 옳거나 둘 다 틀린 경우는 없을까?”
어리석은 자와 논쟁하면 더 어리석어진다(어머니는 제외). 누군가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 생명에 관련된 일이 아닌 한 열렬히 동의해 줄 일이다. 정말로 그가 옳을 수도 있지 않은가. 또 그가 틀리고 당신이 옳다면 굳이 논쟁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는 대신 크게 웃고 난 후 심호흡을 한다. 바닷가에 앉아 바다 소리인가 파도 소리인가를 놓고 논쟁하는 두 사람이 있다면, 끼어들지 말고 웃으며 지나갈 일이다.
한 남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와 물었다.
- 19 -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승이 말했다.
“바보들과 다투지 않아야 한다.”
남자가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그렇다 그대의 말이 옳다.”
상대가 마음을 열 준비가 되지 않은 메시지를 이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넓적다리뼈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며 남태평양 사모아 제도, 뉴기니 섬, 발리 등지의 오지 마을들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섬 주민들은 대추장이 죽었을 때처럼 닷새 동안 장례식을 거행하며 애도를 표했다.
특히 뉴기니 섬의 아라페시족과 문두구머족에 대한 미드의 연구는 인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두 부족은 동일한 섬에 살면서도 성향과 기질이 많아 달랐다. 아라페시족은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반면에, 문두구머족은 남자든 여자든 난폭하고 공격적이었다. 미드는 두 부족의 아이 키우는 방식에 근본적 차이가 있음을 밝혔다.
아라페시족 엄마들은 아기를 그물 모양의 작은 가방(자궁 속 경험을 상징하는)에 넣어 몸 앞으로 안고 다니면서 아기와 계속 접촉하고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아기가 원하면 언제든 젖을 물렸다. 이에 반해 문두구머족은 거칠게 짠 불편한 바구니에 아기를 넣어 이마에 지탱한 끈으로 등 뒤에 매달고 다녔다. 자연히 아기는 엄마의 몸과 분리되어 아무 접촉을 할 수 없었고 엄마의 표정도 볼 수 없었다. 좀 더 큰 아기는 엄마의 길게 딴 머리카락을 붙잡고 등 뒤에 매달려 다녔다.
아라페시족의 평화성과 문두구머족의 폭력성은 바로 접촉의 차이였던 것이다.
미드는 아라페시족의 특이한 현상 한 가지를 더 발견했다. 사냥하다가 다치면 치료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부족 사람들에게 상처 입은 것을 알려 위로를 받는
- 20 -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말하고 다니는 동안 고통을 잊을뿐더러, 이웃들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자신이 겪는 고통과 비교하며 사회적 치유 효과를 거두었다. 한 사람이 상처 입은 감정을 집단에 표현하고 집단은 그 감정에 호응함으로써 안정을 찾는 이런 행동 방식을 미드는 ‘아라페시 현상’이라고 불렀다.
마거릿 리드의 강의에 참석한 적 있는 어느 의사는 다음의 중요한 일화를 전한다. 미드는 한 학생으로부터 ‘문명의 첫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 학생은 답변으로 오래된 토기나 낚싯바늘, 간석기 등의 유물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미드는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발굴한 1만 5천 년 된 뼈가 문명의 증거라고 대답했다. 그 뼈는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인간의 넓적다리뼈’였다.
0 넓적다리뼈가 부러지면 다시 붙기까지 6주 이상 걸린다.
0 고대 야생 환경에서 넓적다리뼈가 부러지는 부상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0 위험으로부터 도망하거나, 물을 먹거나, 먹이를 사냥할 수도 없다.
0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곧 죽음을 의미 한다.
부러진 다리가 다시 붙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 낙오자의 상처가 낫는 동안 돌봐주었음의 의미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힘든 상황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당한 동료의 곁을 지켜주었으며, 상처를 동여매 주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사냥해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음을 말해준다. 이렇듯 자신만의 생존을 도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돕는 행동이 문명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인류학의 어머니라 불리는 마거릿 미드는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초고속 인터넷과 최고 성능의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해서 문명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돌도끼로 싸우는 것은 야만이고 핵탄두 미사일로 전쟁을 하는 것이 문명은 아니다.
우리가 오해하듯이 문명인의 증거는 그런 외부의 구도에 있지 않은 듯하다. 고난에 처한 동료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가 역경을 이겨내도록 돕는 것이 문명인의 첫 신호이다. 그리고 공감과 연민의 근육이 인류 문명을 지금까지 지켜 주었다.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 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