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납골당
책들은 햇살을 어떻게 쐬는가.
고요히 숨어 있다가도 누군가 다가와 반짝이는 눈빛을 보낸다든가 차분하거나 격정적인 콧숨이 닿으면 책들은 그것으로 햇살을 쐰다. 그리고 손가락의 체온을 따라 책들은 길을 연다. 활자는 영혼을 입어 그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오래도록 햇살을 쐬기도 한다.
무덤은 산과 들에서 가장 좋은 햇살을 쐬려고 명당자리를 차지했지만 그것도 몇 십 년. 납골당의 항아리는 햇살도 포기하고 눈비를 피하고 바람을 피해서 안전하게 숨어들었지만 특별한 눈빛과 마주치기만을 기다리고는 몇십 년일까. 숨결이 뜸한 세상을 기다리는 모습이 차갑다. 그렇게 사람이 남긴 것은 존재하다 사라지기 쉽다.
도서관은 화려한 전시장이고 필자의 납골당이고 책의 납골당일 수 있다.
세상이 산 사람의 공간을 비집어 죽은 자의 공간도 나누어준 것처럼 도서관에도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살아남은 책들과 금방 나온 책들에게도 자리를 줬다.
80~90세를 살아도 다 살아내지 못할 무수한 삶이 그 속에 있고 초속으로 넘나드는 유령의 접전 지역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가 살아 있다. 질주와 방황이 있고 수도와 명상이 있고 지식과 지혜가 있다. 그곳에서 나와 보면 여전히 피부에 와닿는 대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책과 세상과의 연결 다리에서 출렁거리는 나 자신을 본다. 그런데도 책을 펼치는 일은 중심을 잡게 해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우세해서이다.
점토와 파피루스와 목판과 천들에 입혀온 책들의 영혼은 다 사라졌을까. 필사되고 활자로 인쇄된 수많은 책들이 수레에 실려 지하창고로도 가고 헌책방에도 가고 쓰레기장에 버려지고, 소각되고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그래도 살아서 남아 있는 곳, 없어질 것에 대비해 일단 모아놓은 전시장이자 결국 남게 된 대형 납골당, 이곳이 도서관이다.
수없이 살아나는 과거와 팔딱거리는 현재와 미래를 예견한 책들의 저장소, 작가와 철학자와 수학자와 연구자들의 뼈와 영혼이 숨 쉬는 납골당이다.
내 삶이 격정적인 문체를 지녔던 화려한 페이지를 넘어 진부하기 짝이 없이 넋두리만 늘어놓았던 만연체의 페이지를 지나고 행동은 없고 생각만 있어 무기력해진 건조체가 되었을 때, 나보다 나은 사람들의 시간과 머릿속을 엿보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다. ‘아, 이렇게 많은 유령이 사는 납골당에 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경건한 납골당.
수많은 책들이 등을 보이고 꽂혀 있다. 시간과 노력과 성찰 끝에 이끌어낸 책은 뼛가루 같은 육신의 실체들이다.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묵념이나 존경의 뜻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조용하게 제목만 있는 인기 없는 책들과의 만남마저도 햇살이다.
나는 도서관의 문을 밀고 들어서면 거대한 침묵에 압도당하고 이내 그 침묵을 껴안는다. 내 영혼은 내 육신의 두 배쯤 가라앉는다. 숙연해져서 발자국을 뗄 때마다. 조심스러워지는 것에 환희를 느낀다. 백화점이나 커피숍의 문을 열 때와 다른 숨을 쉰다. 수십 년이나 수년간 집필한 영혼의 세포들 앞에서 값도 없이 얻을 수 있는 선택권에 흐뭇하다. 무덤을 만나본들 그들의 삶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오직 책으로 만날 수 있는 이 장소가 위대하다.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고개를 숙여 책이 말하는 세상을 알아내고 1미터 너비가 채 안 되는 – 책꽂이가 만든 골목에서 서성이는 사람은 침묵과 외침과 기다림 사이에 있다. 깊은 물속을 걷듯 묵직한 것이 허벅지를 가르는 것 같다. 느껴지는 압력이 좋다. 책들의 이름을 본다. 드디어 하나를 꺼내어 책장을 넘기면 책은 숨을 쉬고 내 안에 들어와 햇살이 되기도 하고 햇살을 보기도 한다.
기원전 7세기 점토로 만든 책의 니베네 도서관이나 터키의 화려한 도서관 에베수스, 학구열에 불탄 무굴제국의 악바르 황제나 멕시코의 후아나 수녀 같은 맹렬한 독서가, 재상 압둘 카셈이 11만 7천 권을 싣고 다녔다는 사막의 도서관, 보르헤스가 만든 상상의 <바벨의 도서관>까지, 추구한 것은 결국 그 옛날 이집트 도서관 현판에 쓰인 ‘영혼의 시약소, 약방’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반가운 말인지.
도서관의 책들은 납골당처럼 과거로 꽂혀 있지만 현재에 살아 숨 쉬고 햇살을 쐬고 미래를 말하고 있다.
덴마크 의사 바르톨리니는 ‘책이 없으면 신도 침묵하고 정의도 잠자고 과학은 정체되고 철학은 불구가 되고 문학은 벙어리가 된다.’고 했다. 책의 위대함에 고개를 숙인다.
도서관 문을 밀고 들어설 때의 뿌듯함,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