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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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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내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2005-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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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문태준 고샅을 돌아 부푼 달 아래 걷는데 거뭇거뭇한 논배미에서 한 뭉테기로 와글, 귀를 촘촘하게 열었더니 논개구리들이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와글와글와글와글와글 이 봄밤에 방랑악사들이 대고를 두드리는데 참 멋진 춘화 한장입니다 온 우주가 잔뜩 바람난 꽃입니다 |
2005-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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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다리 위에서 / 문태준 풀섶에는 둥근 둥지를 지어놓은 들쥐의 집이 있고 나무 다리 아래에는 수초와 물고기의 집인 여울이 있다 아아 집들은 뭉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높고 쓸쓸하고 흐른다 나무 다리 위에서 나는 세월을 번역할 수 없고 흘러간 세월을 얻을 수도 없다 입동 지나고 차가운 물고기들은 생강처럼 매운 그림자를 끌고 내 눈에서 눈으로 여울이 흐르듯이 한 근심에서 흘러오는 근심으로 힘겹게 재를 넘어서고 있다 |
2005-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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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나무의 농사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 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 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
2005-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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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려 할 때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철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
2005-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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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낮잠 /문태준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혼(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번 헹구고 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
2005-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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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자두꽃 / 문태준 손아귀에 힘이 차서 그 기운을 하얀꽃으로 풀어놓은 자두나무 아래 못을 벗어나 서늘한 못을 되돌아보는 이름모를 새의 가는 목처럼 몸을 벗어나 관으로 들어가는 몸을 들여다보는 식은 영혼처럼 자두나무의 하얀 자두꽃을 처량하게 바라보는 그 서글픈 나무 아래 곧 가고 없어 머무르는 것조차 없는 이 무정한 한낮에 나는 이 생애에서 딱 하번 굵은 손벼마디 같은 가족과 나의 손톱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
2005-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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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 문태준 비질하다 되돌아본 마당 저켠 하늘 벌떼가 뭉텅, 뭉텅 이사 간다 어릴 때 기름집에서 보았떤 깻묵 한덩어리, 혹은 누구의 큰 손에 들려 옮겨지는 둥근 항아리들 서리 내리기 전 시루와 솥을 떼어 하늘이불로 돌돌 말아 밭두렁길을 지나 휘몰아쳐가는 이사여, 아, 하늘을 지피며 옮겨가는 따사로운 모닥불! |
2005-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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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적인 /문태준 가령 사람들이 변을 보려 묻어둔 단지, 구더기들, 똥장군들. 그런 것들 옆에 퍼질러앉은 저 소 좀 봐, 배 쪽으로 느린 몸을 몰고 가면 되새김질로 살아나는 소리들. 쟁기질하는 소리, 흙들이 마른 몸을 뒤집는. 워, 워, 검은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주인이 길 끝에서 당기는 소리. 원통의 굴뚝에서 텅 빈 마당으로 밀물지는 쇠죽 연기. 그러나 不歸, 不歸! 시간은 사그라드는 잿더미에 묻어둔 감자 같은 것. 족제비가 낯선 자를 경계하는 빈, 빈집에 들어서면 녹슨 작두에 무언가 올리고 싶은, 도시 회고적인 저 소 좀 봐. |
2005-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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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 이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가슴에 부리를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루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시집 - 맨발 (2004년 창비사) |
2005-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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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복숭아나무 / 문태준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처음 맺히는 열매는 거친 풀밭에 묶인 소의 둥근 눈알을 닮아갔다 후일에는 기구하게 폭삭 익었다 윗집에 살던 어럼한 형도 이 나무를 참 좋아했다 숫기 없는 나도 이 나무를 좋아했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 마을로 내려오면 사람들 살아가는 게 별반 이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
2005-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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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 / 문태준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운 농투사니 아재의 복숭아뼈 같다 동구에 앉아 주름으로 칭칭 몸을 둘러세운 늙은 팽나무 같다 죽은 돌들끼리 쌓아올린 서러운 돌탑같다 가을 털갈이를 하는 우리집 새끼 밴 염소 같다 사랑을 잃은 이에게 녹두꽃 같은 눈물을 고이게 할 것 같다 그런 맷돌을, 더는 이 세상에서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내 외할머니가 돌리고 있다 |
2005-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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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 문태준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호두나무 잎에 어둠이 뭉쳐있을 때 그 끝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외로운 산까치처럼 나는 살아왔다 거친 꽃을 내뱉으며 늙은 영혼의 속을 꺼내 보이는 할미꽃처럼 나는 살아 왔다 그러나, 허물을 벗어놓고 여름을 우는 매미처럼 하나의 열망으로 노래하리니 꾹꾹 허공에다 지문을 눌러찍으며 물결쳐 가는 노래여 절절 끓는 아랫목으로 불 들어가듯 가는 노래여 더 슬픈 노래여 나는 이제 심장을 바치러 온다 |
2005-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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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 멎은 소읍 / 문태준 땅이 소란스러운 때를 보냈으니 누에가 갉아먹다 버린 뽕잎같다 장대비가 다녀가셨다 복사꽃처럼 소란한 논도 걔중에는 있었고 귓불이 도톰하고 거위 소리처럼 굵은 울대를 가진 놈도 다녀가셨다 비 내린 땅은 돌꽃미냥 꼿꼿이 파인 얼굴이다 팔랑팔랑 하얀 나비 새로이 나는 것으로 장대비 멋은 줄 아는 것이지만 집을 주섬주섬 나오는 촌로들은 늙고 초췌하다 |
2005-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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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 문태준 - 다현(茶顯)에게 봉숭아라는 이름 조그만 복숭아뼈 같지 오늘 낮에는 여섯 살 딸이 화단의 봉숭아꽃을 보고 있다 홍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쪼그려 앉은 두 발목이 붉다 발목에서부터 붉은 물이 번지고 있다 한 종이가 사각사각 젖고 있다 여섯 살은 아무래도 무른 몸 무릎이 젖고 작은 어깨가 젖는데 삐에에 울지도 않는다 |
2005-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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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락 위 한 켤레 신발 / 문태준 어두워지는 뜨락 위 한 켤레 신발을 바라본다 언젠가 누이가 해종일 뒤뜰 그늘에 말리던 고사리 같다 굵은 모가지의 뜰! 다 쓴 여인네의 분첩 긴 세월 몸을 담아오느라 닳아진 한 켤레 신발이 었다 아, 길이 끝난 곳에서도 적멸은 없다 |
2005-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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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 같은 그리움 / 문태준 그립다는 것은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래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 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들어 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 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
2005-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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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나무와 붉은 벌레들 / 문태준 앵두나무 가지 위로는 한쪽이 트인 달이 떴다 앵두나무 가지에 사는 붉은 벌레들은 오늘 밤에도 만났다 누구일까 늙은 앵두나무에 이렇게 다투는 허공을 담을 줄 안 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