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파국 (21)
" 화났어?"
불안감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 덕임은 일부러 방긋 웃었다. 하긴 넌 언제나 화나 있지 하고 약을 바싹 올려주려는 찰나 경희가 먼저 대꾸했다.
" 아니. 기뻤어."
" 너 머리 맞은 거 아니냐?"
복연이 입을 혜 벌렸다.
" 시끄러워."
경희가 눈을 세모꼴로 떴다. 영희는 까르르 웃었다.
" 뭐, 너 없이 살아봤자 얼마나 가늘고 길겠어."
덕임이 말했다. 더 이상은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밤이 되었다. 왕은 창가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용포도 벗지 않은 채였다. 들어와 문 닫는 기척을, 알면서도 그는 고집스럽게 등만 보였다.
" 해명을 할 테냐?"
한참 만에 들려온 옥음은 무겁게 잠겨 있었다.
" 아니옵니다."
" 잘못했다고 빌어볼 테냐?"
" 감히 그리할 수 없나이다."
그녀는 왕에게 화가 나 있었다. 어쩌면 왕이 그녀에게 화가 난 것 이상으로.
아끼는 총신을 위해 대쪽 같은 원칙을 깨고 임기웅변을 부리는 그 나, 벗을 위해 모략을 꾸민 자신이나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똑같이 잔머리를 굴리면서 남 탓만 하다니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 나는 덕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왕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 선왕께서 한창 외척 등용에 푹 빠져 계실 적에 나를 보위할 외척도 하나 골라 붙여주셨던 게 바로 그이니까."
효강혜빈과 같은 문중인 덕로는 따지자면 왕과 십이촌 사이라고 들었다.
" 처음엔 반신반의하였으나 선왕의 안목은 정확했다. 그이의 기지로 위기를 여러번 넘겼고,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었으며, 한결같은 충심을 얻었지."
왕은 가만히 먼 산을 보았다.
" 내가 왜 유독 덕로의 응석만은 하염없이 받아주었는지 아느냐?"
자기 입으로 아낀다고 했으면서 물어볼 건더기라도 있나.
" 그이를 아끼면 아낄수록 미안한 마음도 커졌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손으로 그이를 직접 쳐 낼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어차피 혼잣말을 하는 중이다.
" 선왕께선 강력한 임금이셨다. 그 힘은 온전히 승격하기에는 내 형편이 썩 좋지 않았지. 선왕께서 노쇠하신 치세 말년에 조정은 꽉 잡은 척신들은 만만치 않은데,
나는 입지가 좁았다. 정통성에 다소 약점도 있었고."
약점이라는 건 참 곡절 모를 말씀이다.
그는 종통宗統의 정당하고도 유일한 계승자요, 기량에도 흡잡을 데가 없었다. 어쩌면 모두가 쉬쉬하는 왕실의 과거에 그 연유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궂은 일은 대신 해줄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궐 안팎에 심을 눈이 필요했다. 누구도 덕로보다 그 역할을 잘 해내진 못했을 게야. 그이는 큰 그림을 보았지. 조정의 판도를 아예 바꾸지 않으면 입신양명은 꿈도 못 꿀 처지라는 점에선 나와 바라보는 목표가 같았고. 그래서 철저한 내 사람으로 부릴 수 있었다."
왕이 오른쪽 어깨를 조금 기울였다. 꽤 오랜 세월 홍덕로라는 이름의 오른 날개를 달고 지낸 그 어깨다.
" 덕분에 수월했다. 궐 안 병력을 그이에게 집중시켜 장악했고, 보고 체계를 하나로 묶어 사소한 사안도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지. 우물쭈물 눈치나 보는 신료들을 데리고 척신 척결을 강행할 수 있었어. 그뿐이랴, 즉위 당시의 숙청이 혼잡했음에도 사대부들의 신망을 잃지 않았다. 어디 붙을까 고민하던 기회주의자들을 쉽게 포섭했고, 외척 놀음에 가려 있던 봉당과 정학의 근간을 바로잡을 새 군주라는 기대도 얻었지. 온갖 원망은 전면에 나선 덕로가 대신 뒤집어썼으니까."
서로 신뢰하여 즉위 초 과감한 행보가 가능했다는 뜻이다.
" 이제는 정국이 안정되었다. 기반을 다졌어. 지리멸렬한 다툼이야 임금으로서 응당감내할 과업이지."
문득 공기가 서늘해졌다.
" 덕로는 더 이상쓸모가 없다. 사라져야 해."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냉정했다.
"슬슬 내숭스러운 속내를 품을 때도 되었지. 내가 쥐여 준 것들을 저가 잘나서 얻은 것인 양 착각을 할 때가 되었단 말이다. 한때의 충신을 만세의 적으로 물들이는 것이 권좌의 더러운 속성이니..... ."
한없는 사랑 뒤에 감춰진 이면은 실로 냉혹했다. 총신을 아낀다는허울 뒤로는토사구팽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를 재보고 있었다니 너무나 음험하다.
" 하여 도승지를 급히 찾으셨사옵니까?"
" 그래. 행실을 꾸짖고 자처하여 물러나게끔 재촉했다."
" 망극하옵니다만.... ."
덕임은 말을 고르느라 잠시 주저하였다.
" 의중이 진즉부터 그러하였다 한들, 권좌에 앉은이를 어떻게 하룻밤 새.... ."
" 야심에 찌든 덕로가 어찌 허망하게 굴종하였는지 의아한 게냐?"
왕의 언행에는 거침이 없었다.
" 덕로는 세력을 만들었다. 벽패 유력자들과 교류하고, 명문 무반으로서 이 나라군권의 거두인 훈련대장 구사초와 우애를 다졌지. 하지만 덕로에겐 적이 너무 많아. 홀로 권세를 틀어쥐면 자연히 미움받은 법이거니와 오만한 처신으로 우호적이던 사대부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어. 그 와중에 임금인 나까지 적으로 돌리면 어찌되겠냐. 눈 깜짝할 사이에 역모로 몰려 개죽음이지."
휼륭한 재상이 군왕을 이끈다지만 , 실상은 지존의 노여움 한 자락에도 넙죽 엎드려 벌벌 떠는 것이 신하다. 적어도 지난 백 년간은 그래왔다.
" 제 발로 나가면 가진 세력이나마 지키고후열을 도모할수 있지. 나중에 다시 불러주리라는 희망도 품음직하고."
" 정녕 후일을 기약할 요량이시옵니까?"
"이미 필요 이상으로 기회를 주었다. 때가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차일피일 처분을 미루며 아쉬워할 만큼그이를 아끼게 된 탓이지. 경솔한 성질머리와 도를 넘은 야심만 잘 고쳐 주면 쭉 데리고 갈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고."
" 왜 하필 어제 결심을 하셨나이까?"
" 네 방자한 짓거리가 내 안일함을 일깨웠느라."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회초리처럼 변했다.
"네가 자전께 올리기 위해 쓴 서찰을 읽었다. 가관이군. 부디 끼어들어 도와주십사 간청을 했지. 아니더냐?"
" 그러하옵니다."
그녀의 차분한 수긍에 그는 도리어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 난 무력함이 싫다. 덕로 정도야 기고만장해 봤자 내 뜻대로 주무를 수 있어.
하지만 왕대비마마는 다르다. 경솔하지 않으시고, 임금으로서도 강경하게 다스릴수 없는 왕실의 어른이시며 또한 속내를 짚을수가 없어. 예측불허다."
비로소 왕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 오랜 인고 끝에 토대를 잡은 내 조정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위협받는 꼴을 도저히 참을수가 없단 말이다."
눈이 마주쳤다.
" 너는그런 자전을 끌어들이려 했다. 네서찰을 보자마자 사사로운 인정에 휘둘린 내 실책을 깨달았지. 척신들이 떠나는뒤꽁무니에 덕로를 딸려 보냄으로써 구시대의 잔재는 마무리 지었어야 했어. 애초에 써먹고 버릴 패였으니까. 그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기어오르기 시작한 이상 빨리, 단호하게 대처했어야만 했어."
왕이 잠시 숨을~~~~
첫댓글 왕이 자전께 올리려는 서찰을 보고 덕로를 해치네요
추석 잘 보내셨지요
어제 친구들과 윷놀이하다 ㅎㅎ
너무 빡세게 놀아서 몸살이 났어요
마지막 한번만 올리면 됩니다
오늘 푹 쉬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윷놀이를 아주 재미있게 하셨군요.
얼마나 흥에 겨웠으면 몸살이다 났을까요.
몸조리 잘 하시고 어서 완쾌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