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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양 지혜 스크랩 고향(경주)떠나 춘천에 안주한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성기숙 추천 0 조회 75 19.03.02 05:39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고향(경주)떠나 춘천에 안주한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1911년 3월의 어느 날, 동해안 강릉의 바닷가 한송사(寒松寺)라는 절터에 와다(和田)라는 이름의 일본인이 나타났다. 주변에 초가집이 드문드문 몇 채 남아있던 이곳에서 그가 찾아낸 것은 머리와 팔이 모두 없어진 불상 하나. 하지만 마을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불상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그는 후한 상금을 걸고 나머지 불상의 수색을 부탁하고 거기를 떠났다.

 

▲ 2003년도 카렌다 표지에 들어있는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제124호)과 국립춘천박물관의 전경.

 

그로부터 반년 뒤. 그 근처 칠성암(七星庵)이라는 작은 사찰로 옮겨진 불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그에게 다시 전해졌다. 가서 본즉 그 형식은 앞서 발견한 것과 흡사하되 모습이 완전하고 오직 두부(頭部)만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것도 대리석(大理石)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백옥불(白玉佛)'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 불상에 잔뜩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

▲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한송사지석불상'(보물 제81호)의 모습. 발견 당시부터 머리와 한쪽 팔이 없었던 이 보살상은 강릉측후소와 강릉군청을 거쳐 지금은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암자 주지의 말에 따르면, "이 불상은 예전에 경주에서 발굴된 것으로 나중에 한송사로 옮겨왔으며 다시 30년쯤 전부터 이곳에 안치하여 왔노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불상을 옮겨가는 대신에 후한 제사를 모셔줄 것을 바라는 주지의 요구에 응한 그는 약간의 비용을 헌납하고 그 석불을 양도받기에 이르렀다. 이때가 1911년 10월이었다.

그런데 와다라는 일본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알고 봤더니 그의 이름은 '와다 유지(和田雄治; 1859-1918)'. 그 시절에 꽤나 유명했던 기상학자였다. 오전, 오후의 구분을 없애고 오후 1시를 13시라는 식으로 부르게 했던 것은 그의 창안으로 알려져 있다. 통감부 시절에 한국으로 건너와 초대 인천관측소장(仁川觀測所長)을 지냈으니, 말하자면 지금의 기상청장쯤 되는 위상이었다.

이러한 탓인지 그가 정리한 조선의 천문기상에 관한 문헌조사 및 연구결과가 잔뜩 남아 있다. 경주 첨성대나 마니산 참성단에 관한 조사자료가 그러하고, 특히 전국 각지에 흩어진 측우기(測雨器)와 측우대(測雨臺)에 관한 수집정리 역시 전적으로 그가 주관하여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 강원도 원주에서 출토된 '철제약사불좌상'의 원래 모습으로 1912년에 촬영된 것이다. 원주에는 원래 다섯 구의 철불이 있었으나 조선물산공진회 통에 모두 서울로 옮겨지고 이제야 겨우 하나만 고향 땅 근처로 되돌아 왔다.

 

원래 공주감영에 있었으나 일본으로 흘러나갔다가 1971년에 국내로 되돌아와 보물 제561호로 지정된 바 있는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 또한 바로 그의 손을 거쳐 무단 반출된 물품이었다. 더구나 관측소장이라는 본업 이외에 그가 다니는 곳마다 고적유물과 관련된 것이라면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끼여들었던 것이 그의 행적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그가 난데없이 강릉지역에 나타났다 한들 그것이 하등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나타난 데는 분명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총독부 관보로 확인해 본즉 강릉측후소(江陵測候所)가 정식으로 개설된 것이 1911년 10월 1일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강릉지역에 부지런히 드나든 것은 여기에 측후소를 만드는 일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리고 그가 한송사지 불상을 찾아낸 것은 짬짬이 그 주위에 흩어진 고적유물을 조사하던 차에 얻어낸 수확이었다고 보면 될 듯싶다. 그 무렵에 강릉지역에 산재한 당간지주(幢竿支柱)에도 주목하여 <역사지리>라는 잡지에 '강원도 강릉의 석주(石柱)'라는 글을 수록한 일이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그가 보여준 행적의 한 단면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그가 색출했다고 하는 두 구의 석조보살상은 그후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 이번에 경주박물관에서 춘천박물관으로 이관된 염거화상탑지. 염거화상탑의 조성연대가 844년이라는 사실은 전적으로 이 탑지를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는 일이다.

 

깨어진 것은 깨어진 것대로, 또 멀끔한 것은 또 멀끔한 것만큼이나 그 운명은 크게 갈려졌다. 우선 처음 그의 눈에 띄었던 불상은 그다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탓인지 강릉측후소 내로 수습하여 옮겨두는 것에 그쳤다.

그 후 이 석조보살상은 강릉군청으로 옮겨졌다가 나중에 명주군청 시절을 거쳐 1992년에 이르러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이관되어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의 보물 제81호 '한송사지 석불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도 제 고향에 그대로 남았다는 것이 큰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뒤늦게 색출된 '백옥불'의 경우는 그 운명이 완전히 달랐다.

칠성암에 있던 이 석조보살상을 얼렁뚱땅 수습한 와다는 어떤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그 이듬해인 1912년에 동경제실박물관(東京帝室博物館)에 선뜻 헌납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한 번 일본으로 흘러나간 것이 무심코 세월이 흐르기를 50여 년.

그나마 천신만고 끝에 한송사 백옥불이 우리 나라로 되돌아 올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1965년에 이른바 '문화재협정'이 체결된 덕분이었다. 그 결과야 매우 미흡했지만 어쨌거나 이 백옥불은 그래도 제실박물관의 후신인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것이라 하여 용케도 반환문화재 목록에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 <박물관진열품도감>에 수록된 영전사지보제존자사리탑 출토 사리구 일체의 모습. 원주의 영천사에서 3기의 석탑이 옮겨지던 와중에 탑지기록이 발견되어 그것이 보제존자 즉 나옹화상의 사리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화재협정의 효력발생으로 이듬해인 1966년 5월 27일에 한송사 백옥불은 마침내 이 땅에 되돌아왔다. 또한 그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어 곧이어 1967년 6월 21일에는 국보 제124호에 지정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간신히 우리 땅으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더 이상 제 고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흐르길 36년, 그리고 애당초 강릉 땅을 떠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무려 90년만에야 한송사 석조보살상은 겨우 귀향의 첫걸음이나마 뗄 수 있게 되었다. 지난해 10월에 국립춘천박물관이 개관되면서 그곳으로 이관되어 춘천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탓이다.

하지만 비록 같은 강원도 땅이라고는 하지만 춘천은 서쪽 끝에 있고 강릉은 또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으니 여전히 갈 길은 멀다고 하겠다. 게다가 한송사에 있기 이전에는 경주 쪽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했으니 과연 제 고향이 맞기는 한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불구(不具)이기는 하지만 원래 제짝이었을 '한송사지 석불상' (보물 제81호)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으니 딱히 고향이 아니라고 할 건더기도 없다. 직선거리로만 무려 100km남짓한 간격을 남겨두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 어느 쪽이든 간에 두 석불이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도록 순회하여 전시할 수 있는 기회라도 마련해 주는 것은 더 늦기 전에 우리네가 일궈내야 할 당연한 배려가 아닐는지?

개관 반 년째를 맞는 '마지막' 국립박물관

2002년 10월 30일, 국립춘천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로써 각 지방마다 최소 한곳이상의 국립박물관을 갖추게 되었으며, 앞으로 국립박물관을 추가로 건립할 계획이 없다고 했으니 국립춘천박물관은 한동안 '마지막' 국립박물관으로 남을 전망이다.

국립춘천박물관이 착공된 것은 지난 1994년. 그러니까 8년 가까이 쉬엄쉬엄 건물을 지어 올린 셈이 된다. 가장 최근에 지어진 박물관이니 만큼 시설은 가장 수준급에 속한다는 소문이다. 전시유물의 부족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전시공간도 충분히 확보된 편이다.

각 시대별로 풍부한 역사유물의 출토지였던 것에 비해 그 동안 변변한 전시공간을 갖추지 못했던 강원지역의 주민들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겠지만, 교통의 편의 내지 절대거리를 감안하면 수도권 지역의 주민들 역시 그 수혜를 함께 누릴 수 있다는 것도 기대할 만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주목할 만한 전시유물로는 역시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이 가장 손꼽을 만하고, 원주지역에서 출토된 '철제약사불좌상'과 홍천지역에서 출토된 '청동쌍사자광명대'가 눈길을 끈다. 해방 직후 양양의 선림원지에서 출토되어 월정사에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통에 녹아 내렸던 동종(銅鐘)이 이번에 복원되어 전시공간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명문이 있는 부도로는 그 시기가 가장 빠른 염거화상탑이 844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염거화상탑지' 또한 이번에 국립경주박물관을 떠나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원주 영천사지에서 조선물산공진회 때 야외전시유물로 수집되면서 서울로 옮겨질 때 발견된 바 있는 '영전사지보제존사사리탑'의 사리구 일체도 국립중앙박물관을 떠나 제 고향에 가까운 국립춘천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금강산에서 출토된 '이성계발원 사리구 일체'도 주목할 만하며, 박정희 대통령이 기증한 '신사임당초충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전시유물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20호인 '청풍부원군 김우명 상여'도 전시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밖에 비교적 풍부한 향토자료 역시 망라되어 있어 지역주민은 물론 외지 탐방객의 눈길을 잡기에는 충분하다.

강원도 춘천시 석사동 산21-1에 자리잡은 국립춘천박물관은 춘천 시내의 강원대학교 인근에 있는 탓에 이곳을 목적지로 가늠하고 표지판을 따라가면 되므로 외지인들조차도 그곳을 찾아가기에는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다. 서울 쪽에서 출발하는 탐방객은 도로구조의 편의상 의암댐 쪽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곧장 이어지는 우회도로를 통해 진입하다 중앙고속도로 종착지에서 좌회전하여 강원대학교 방향으로 진입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

박물관 관람시간은 여느 박물관과 다를 바 없고, 다만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므로 이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관람요금은 일반 성인 기준 400원 정도이며, 문의전화는 033-260-1500이다. 상설전시유물의 도록은 지난해 개관과 더불어 제작되어 있으며, 판매가격은 27,000원이다. / 이순우

 

▲ 국립춘천박물관 위치도. 서울 쪽에서 진입한다면, 의암댐 방면에서 중앙고속도로 방면으로 이어지는 우회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강원대학교'를 목표로 하여 표지판을 따라가도 되므로 '국립춘천박물관'을 찾아가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 <오마이뉴스/이순우 03.03.07 >
 
 

한송사석조보살좌상(寒松寺石造菩薩坐像)

국보  제124호

 

 

 

 
원래 강원도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으로 1912년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되돌려 받았다. 잘려진 머리 부분을 붙일 때의 흔적과, 이마 부분의 백호(白毫)가 떨어져나가면서 입은 손상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관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볼이 통통한 네모난 얼굴에는 눈이 가느다랗게 새겨져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목에는 굵은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3줄의 목걸이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검지 손가락을 편 오른손은 연꽃가지를 잡고 가슴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 역시 검지 손가락을 편 채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발은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하고 왼쪽 다리를 밖으로 하고 있어서 같은 곳에서 발견된 한송사지 석불상(보물 제81호)과 반대이다.

한국 석불상의 재료가 거의 화강암인데 비하여 이 보살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조각 수법과 아울러 재료에서 오는 질감이 좀 더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듯한 얼굴과 몸은 풍요로우며, 조각수법 또한 원숙하고 정교하다.
원통형의 보관이나 풍만한 얼굴, 입가의 미소 등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과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인데, 이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만든 시기는 고려 초인 10세기로 추정된다.
 
 
(이 석조보살이 특이하게 원통형보관을 쓰고 있는 것은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듯 합니다.  월정사 8각9층석탑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도 이와같은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 블로그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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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9.03.02 05:39

    첫댓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19.03.02 05:43

  • 19.03.02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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