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2)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쓰라.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다른 사람이 결정하게 두라. 그들이 결정하는 동안
더 많은 작품을 만들어라. - 본문 중에서
독서 자료 보냅니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고 행복한 나날이 되시기를요. - 이 수 영
■ 류시화
◎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라,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후회되는 글은 생각만 하고 쓰지 않은 글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실패한 모든 글은 ‘미룬 글들’이며 가정 실패하고 기억될 가치조차 없는 글은 ‘쓰지 않은 글’이다. 가장 후회되는 여행은 ‘떠나지 않은 여행’이다.
한 달 동안 인도 여행을 할 생각인데 비용이 얼마나 필요한지 묻는 친구가 있다. 나는 그에게 전혀 돈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10년 넘게 같은 질문을 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든 새로운 추구이든 혹은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든 생각만 하는 데는 아무 비용이 들지 않는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젊었을 때, 한 여자가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칸트가 청혼해 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칸트는 만날 때마다 철학적인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느낀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그러지 칸트는 말했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나는 생각하는 일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도서관에 가서 사랑과 결혼에 관한 책에 집중했다. 그리고 결혼에 찬성하는 354가지 이유와 반대하는 350가지 이유를 노트에 기록했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며, 결혼에 찬성하는 쪽에 4가지가 더 많았으므로 마침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칸트는 여자의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고, 그녀의 아버지가 나와서 말했다.
“내 딸은 이미 결혼했네. 아이가 둘이나 있지. 그동안 자네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그가 결혼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3년이 흐른 것이다. 그 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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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도 칸트에게 청혼하지 않았고 그는 평생 미혼으로 남았다.
우리가 생각에 붙들려 있을 때 삶은 흘러간다. 삶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며, 그런 식으로 삶을 놓친다.
◎ 평범한 사람이 특출난 사람을 이기는 방법
내가 좋아하는 제리 율스만이라는 사진작가가 있다. 독특한 흑백 이미지들로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표현하는, 몽타주 사진 기법의 대가이다. 플로리다대학교 사진학과에서 가르칠 때 율스만은 수업 첫날 수강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A그룹의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제출하는 사진의 질 같은 건 보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촬영한 작품의 양으로만 성적이 매겨질 것이다. 100장을 낸 학생은 A, 90장을 낸 학생은 B, 80장의 사진을 낸 학생은 C를 받을 것이다.
B그룹의 학생들은 사진의 질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 그룹은 촬영한 작품의 우수성을 기준으로 성적을 매길 것이기 때문에, 한 학기 동안 단 한 장의 사진만 제출해도 된다. 하지만 A를 받으려면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어야만 했다.
한 학기가 끝났을 때, 율스만은 최고의 사진들이 모두 ‘양’에 치중한 그룹에서 나온 것을 알고 놀랐다. 이 그룹의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수많은 사진을 찍고, 구도와 조명을 실험하고, 암실에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느라 바빴다. 수백 장의 사진을 만드는 그 과정에서 기술을 연마했다. 실패의 경험들이 모여 재능이 되었다.
반면 질에 초점을 둔 그룹은 완벽에 대해 고민하고 상상하면서 둘러앉아 있었다. 결국 검증되지 않은 이론과 평범한 사진 한 장 외에는 자신들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보여 줄게 없었다.
행동의 횟수가 행동의 질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벽에 부딪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뛰어난 글을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못해서가 아니라 잘 쓰지 못한다고 절망하기 때문에 많은 이
들이 글쓰기를 포기한다. 창조는 길고 긴 반복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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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하는 행위가 우리의 삶을 결정 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특출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의 결과이다. 창조적이 되는 비밀은 ‘창조적이 될수록 더 창조적이 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창조하려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미국 팝아트 선구자 앤드 워홀은 말했다.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완성하라.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게 두라. 그들이 결정하는 동안 더 많은 작품을 만들어라.”
세잔은 청년 시절 파리의 살롱전에 번번이 떨어졌다. 놀라지 말라. 드가, 르누아르, 모네도 매번 떨어졌으니까. 10년 동안 조롱과 야유를 견디다 못해 낙향한 세잔은 기존 미술계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리고 선언한다.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어.”
그는 끝없이, 정말로 끝없이 사과를 그렸다. 앞에 놓고 그리고, 뒤에 놓고 그리고, 높은 곳에 놓고 그리고, 낮은 곳에 내려놓고 그리고, 나란히 놓고도 그리고, 바구니에 포개 놓고도 그렸다. 하나만 놓고도 그리고, 열 개를 놓고도 그렸다.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 그렇게 해서 세잔의 사과는 세계 3대 사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 세계 3대 사과
1. 아담과 이브의 사과. 2. 뉴턴의 사과. 3. 세잔의 사과
일상의 순간에 예술적 생명감을 불어넣은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특출난 사람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를 죽어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 ‘재미있게’라는 단어를 넣으면 더 완벽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특출한 사람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를 ‘재미있게’ 죽어라고 하는 것이다.”
◎ 봄의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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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으로 망명한 러시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봄의 제전>은 티베트와 인도를 여행한 신비주의 화가 니콜라스 뢰리히가 무대 배경 그림을, 천재 무용수 니진스키가 안무를 맡았다. 파리의 상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1913년) 파격적인 발레를 이해하지 못한 관객들은 고성과 야유를 퍼부었다. 소동에 묻혀 음악이 들리지 않았고, 결국 공연은 아수라장 속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1년 후 발레 없이 음악으로만 발표되었을 때는 대성공을 거두며 <봄의 제전>은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명성을 얻었다.
<봄의 제전>은 당대의 급진적인 음악 기법을 모두 사용한 복잡하고 강렬한 리듬으로 가득하다. 변칙적인 박자가 계속 엇갈리면서 관악기와 현악기들이 불안한 음향을 빚어낸다. 긴 겨울 끝에 봄을 맞이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흥분과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긴장과 불안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기존의 상투적인 환희와 기쁨으로 연상되는 봄의 경배와는 사뭇 다르다. 판을 뒤엎으며 들썩거리는 새로운 봄의 세상에 겨울이 얼마나 완강히 버티려 드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악기 연주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추기 원하고 또 그것을 위해 노력하지만, 때로는 중요한 부분에서 핵심을 놓칠 수 있다. 그 일에 마음과 혼이 담기지 않는 일이다. 시인 지망생이나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종종 자신의 작품을 보내오고 의견을 묻는다. 언어를 다루는 실력이 뛰어나 장래가 기대되는 이도 있다. 그들은 머지않아 작가의 대열에 설 것이다. 그러나 언어 기교가 돋보이기 때문에 읽는 이의 가슴으로부터는 오히려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작품세계와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떨림이 서툰 언어 속에 녹아들어 있는 글은 독자의 혼을 건드린다. 아직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젊은 시인이 보낸 ‘흙이 숨겨 놓은 봄을 발견할 때까지 / 눈을 감고 오직 밑바닥에 닿아야 한다.’라는 시구는 어딘지 뭉클하다. 어쩌면 우리가 작가에게 기대하고 감동하는 것은 삶과 세계에 대한 능숙한 해석이 아니라 그 불확실한 계절에 가닿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우리는 시도하고, 시도하다가 생을 마치는 운명이다. 그것이 시든, 음악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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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이든 그대가 ‘이룬 것’을 들고 내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툴고 거칠더라도 혼을 담아 ‘시도한 것’을 들고 오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이 삶에서 시도한 것들을 보여줄 것이다.
시인이며 소설가인 찰스 부코스키는 “네가 사랑하는 것을 찾으라. 그리고 죽을 만큼 그것에 빠져 보라.”고 했다. 영혼의 작업에 집중하라는 의미이다. 불꽃을 계속 태우는 것이 삶이다.
생을 불태우려면 자신이 불타는 것을 견뎌야 한다.
◎ 네가 어떤 기분인지 내가 잘 알아
‘모두가 겪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다.’라는 식의 암시는 조언이 아니라 무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 화살을 다섯 개나 등에 꽂고도 성공해서 잘 살고 있다고 예를 든다. 위로도 아니고 격려도 아니며 호러일 뿐이다. 그때 관계는 멀어진다. 영혼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호러 : 공포심을 일으키도록 의도한, 공포
지금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서 “당신 말이 옳아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자기도취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면 이타주의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교사의 교사로 불리는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는 40대의 10년간 삶이 산산조각 나는 우울증에 걸려 참담한 시간을 보냈다. 무기력과 절망감으로 외부 활동도 할 수 없었고 집에 갇혀 지냈다. 수개월 동안 커튼을 친 채 어두운 방에 갇혀 지내자. 친구는 그에게 외출을 자주 하는 게 어떻겠느냐며 자연의 치유를 권했다.
파커는 대답했다.
“그럴 수가 없어. 세상이 칼날로 가득 찬 느낌이야.”
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자아상을 북돋아 주려고 노력했다.
“자신감을 갖도록 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잖아.”
하지만 우울증에 걸리면 마음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자신이 아무 쓸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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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켜 우울증을 더 깊어지게 했다.
한 친구는 달랐다. 그 친구는 어느 날부턴가 파커의 허락을 얻어 매일 오후 그의 집에 들러서 그를 의자에 앉히고는 무릎을 꿇고 신발과 양말을 벗긴 후 30분 동안 발 마사지를 해 주었다. 말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학적인 충고에서부터 사랑과 성실에 대한 조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도와줄게, 내 말 들어봐”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무엇이 다른 사람에게 최선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인간의 영혼은 조언을 듣거나 바로잡아지거나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주고, 들어주고, 동반자가 되어주기를 원할 뿐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의 영혼에 깊은 절을 할 때, 우리의 그러한 존중은 그 사람의 고통을 극복하는 중요한 치유 자원이 된다.”
◎ 나는 기린이었구나
기린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새끼 기린은 태어나면서부터 일격을 당한다. 키가 하늘 높이 만큼 큰 엄마 기린이 선 채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수직으로 곧장 떨어져 온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이다. 충격으로 잠시 멍해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번에는 엄마 기린이 그 긴 다리로 새끼 기린을 세게 걷어찬다. 새끼 기린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났고 이미 세게 부딪쳤는데 또 걷어차이다니!
아픔을 견디며 다시 정신을 차리는 찰나 엄마 기린이 또다시 새끼 기린을 힘껏 걷어찬다. 처음보다 더 아프게!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진 새끼 기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흔든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계속 걷어차이리라는 것을.
그래서 새끼 기린은 가늘고 긴 다리를 비틀거리며 기우뚱 일어나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엄마 기린이 한 번 더 엉덩이를 세게 걷어찬다. 충격으로 자빠졌다가 벌떡 일어난 새끼 기린은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발길질을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엄마 기린이 다가와 아기를 어루만지며 핥아주기 시작한다. 엄마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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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은 알고 있는 것이다. 새끼 기린이 자기 힘으로 달리지 않으면 하이에나와 사자의 먹잇감이 되리라는 것을. 그래서 새끼 기린을 무조건 걷어차는 것이다. 일어서서 달리는 법을 배우라고.
당신은 엉덩이를 걷어차인 적이 몇 번인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면 각오하는 게 좋다. 조만간 연타로 발길질을 당할 테니. 당신이라고 해서 삶이 살살 기분 좋게 굴리는 법은 없다. 그러나 걷어차이고 또 걷어차여도 당신은 일어설 힘이 있다. 당신은 기린이니까.
카뮈는 “눈물이 나도록 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년 동안의 고독>의 저자 마르케스는 “인간은 어머니가 세상에 내놓은 그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태어남을 강조하는 것은 삶이다.”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엄마 기린과 같다. 때로 인생이 우리를 세게 걷어차면 우리는 고꾸라진다. 하지만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야만 하고, 또다시 걷어 채여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일어난다. 그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다.
◎ 찾아오지 않으면 찾아가기
숲속을 걷는데 개 한 마리가 나무 아래 앉아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개는 성난 이빨을 드러내고 당신에게 달려든다. 당신은 겁에 질리고 화가 난다. 하지만 곧 개의 다리 하나가 덫에 걸려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 순간 당신의 감정은 분노에서 염려로 바뀐다. 그 개의 공격성이 고통과 취약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라고 명상 교사이며 심리상담가인 타라 브랙은 말한다.
북인도 바라나시의 인도인 친구 집에서 한 달 남짓 묵은 적이 있다. 가정식 인도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고, 낮에는 햇볕 드는 베란다에서 번역 일도 하고 글을 쓸 수 있어서 좋았다. 처음에는 일주일 정도 머물 예정이었는데, 의외로 편하고 글도 잘 써져서 눈치 없이 눌러앉았다. 그 집 아이들도 나를 좋아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갠지스강에서 배를 타자거나 영화관에 가자고 졸랐다.
그 집과 벽을 사이에 둔 옆집에 중년 여성이 혼자 살았다. 처음부터 나를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더니, 아니나 다를까 날카롭고 성마른 사람이었다.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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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와 행상인 등 거의 모두에게 언성을 높였다. 내 방 창문이 거리로 나 있어서 아침부터 그녀의 갈라진 목소리와 욕설을 들으며 잠이 깼다. 분노에 찬 고성이 멈추지 않았으며 곧잘 싸움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사소한 말과 행동도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이유 없이 이빨을 드러내고 덤비는 그녀를 누구도 이길 수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이어지기 때문에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그녀의 분노 속에 고통이 있음이 느껴졌다. 단순히 성격 문제가 아니라 상실감과 원한의 표현이었다.
친구의 아내가 설명했다. 계급이 다른 결혼으로 인해 그녀는 시어머니와 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분가해서 시댁과 단절된 상태로 살았다. 그리고 몇 해 전 디왈리(인도의 추석에 해당하는 큰 축제) 때 다른 도시에 있는 시댁에 다니러 간 남편이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형제자매들은 그녀에게 알리지도 않고 장례를 치렀으며, 그녀는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두 달이 지나서야 그 도시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큰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두바이에서 직장에 다니고, 그녀는 어둡고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졌다.
어느 날 아침, 배가 꾸르륵거려 과일에 묻혀 먹으려고 다히(우유에 유산균을 넣어 발효시킨 수제 요구르트)를 사 가지고 오다가 부엌 창문으로 내다보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시비를 걸까봐 내가 먼저 소리쳤다.
“나마스테, 바비지(형수님)!”
나이를 분간할 수 없는 장발의 외국인이 갑자기 “형수님!”을 외치자 그녀는 흠칫 놀랐다. 나는 인도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배우처럼 하이톤으로 외쳤다.
“바비지, 다히 카엥키(형수님, 요구르트 드실래요)?”
그리고 거부당하기 전에 다히 컵을 얼른 창턱에 올려놓아 주었다. 잠시 후 베란다에 나와서 살펴보니 (원숭이가 훔쳐가지 않았다면) 그녀가 들여간 게 분명했다.
그날 이후 아침마다 “바비지, 다히 카엥키?”가 내 노래가 되었다. 내가 갈 수 없을 때는 아이들을 시켰다. 이제 그녀는 나와 아이들에게는 화를 내지 않게 되었으며, 골목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언쟁도 눈에 띄게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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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주로 단절과 고립에서 온다. 이때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연결’이다. 그것이 나의 경험이다. 비록 이것을 깨닫는데 생의 반이 걸렸지만 피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 꽃이 자라는 환경을 바꿔야 한다.
누구나 삶에서 고립을 경험하고, 그때 세상과의 연결을 위해 나름의 몸짓을 한다. 우리에게는 그 몸짓을 읽는 연민과 공감의 눈이 필요하다. 홀로된 그녀의 분노와 싸움 역시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다.
◎ 웃음은 마지막 눈물 속에 숨어 있었어
대학생 때 낙제를 해 후배들과 한 학년 다시 다녀야 했다. ‘저 선배가 왜 우리와 함께 수업을 듣지?’ 하고 어색해하는 시선이 불편해 수업을 빠지거나 또다시 낙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문학평론 시간에는 시집을, 시론 시간에는 소설책을, 소설 창작 과목일 때는 평론서를 나름 규칙적으로 읽었다. 천재 시인을 몰라보고 낙제시키는 국문학과에 대한 일종의 저항 정신이었다.
그런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 학생이 한 명 있었다. 특이함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였지만, 그녀는 특이함을 넘어 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같았다. 그녀도 나처럼 늘 뒷자리에 앉았는데, 어느 날 내가 팔이 접히는 오목한 곳에 코를 파묻고 자는 척하다가 이상한 기척에 고개를 드니 옆에 앉은 그녀가 자지러지게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우스운지 몰라도 몸을 연신 접었다. 폈다 하면서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어 댔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그런 식으로 웃는데도 교수와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수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연신 숨이 넘어갈 듯이 웃으면서도 웃음소리를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매우 특별한 웃음법이었다.
괜찮으냐고 차마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물론 괜찮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웃을 리는 만무했다. 그저 놀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그러더니 그녀는 또 갑자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한 얼굴로 돌아가 교수의 강의를 경청하고 열심히 필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지구 행성에 와서 낙제한 외계인이 다른 외계인과 조우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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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기상천외한 웃음에 전염되어 하루는 나도 발작하듯이 무음으로 웃었는데, 그녀는 자기를 흉내 내는 나를 보고 손을 번쩍 들어, 교수에게 나를 정신이상자라고 고자질을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참다 못한 문학개론 교수가 그녀에게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가? 나도 좀 같이 웃어보자.”하고 물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수준 높은 사유에 도달한 것이다. 그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 후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세 가지의 진리가 있다. 신의 존재, 어리석음, 그리고 웃음이 그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의 이해 너머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한다.”
자주 큰 웃음을 터트리기 때문에 나는 달라이라마를 좋아한다. 중국에 부당하게 나라를 빼앗긴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데도 온갖 이유로 파안대소한다. 고통이 없어야 웃는 것이 아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더 크게 웃는 것이다. 그 여학생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녀에 비하면 나의 저항 정신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날개가 없는 대신 웃는다. 웃음은 가슴의 날갯짓이다. 웃음과 울음은 같은 지점에 있고, 희망과 절망도 같은 곳에서 태어난다. 미국 시인 골웨이 키넬의 시 <울음>이 있다. 꼭 ‘소리내어’(‘하하하’ 부분에서는 큰소리로!) 읽어 보자.
단지 조금 우는 것은 소용없다.
베개가 온통 젖을 때까지 울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너는 일어나서 웃을 수 있다.
그런 다음에야 샤워를 하며
얼굴 가득 물을 끼얹을 수 있다.
그런 다음에야 창문을 활짝 열고
‘하하하!’하고 웃을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하고 물으면
‘하하하!’하고 노래하듯이 답하라.
‘기쁨은 마지막 눈물 속에 숨어 있었어!
그래서 그 눈물까지 다 울었어. 하하하!’
◎ 천국과 지옥에 대한 내 친구의 기준
한 남자가 개를 데리고 길을 걷고 있었다. 남자는 주변 풍경을 즐기다 문득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음의 순간을 기억했고, 옆에서 걷는 개도 몇 해 전에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는 그 길이 자신들을 어디로 이끄는지 궁금했다.
잠시 후, 그들은 흰색 돌담이 높게 둘러쳐진 언덕에 이르렀다. 고급 대리석으로 지어진 성 같았다. 언덕 꼭대기에 높다란 아치형 입구가 보였다. 그 앞에 가서 보니 진주로 장식된 큰 문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순금으로 도금 되어 있었다. 그들이 다가가자 문지기가 문 안쪽에 탁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웠을 때 남자가 소리쳐 물었다.
“실례지만, 여기가 어딘가요?”
문지기가 대답했다.
“여기는 천국입니다.”
“와! 혹시 마실 물 좀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안으로 들어오면 곧 시원한 얼음물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문지기가 손짓을 하자 대문이 열렸다. 남자가 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 친구도 함께 들어가도 될까요?”
문지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반려동물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한 뒤에 발길을 돌려 개와 함께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한참 동안 걸은 후, 그들은 또 다른 언덕 꼭대기에 있는 농장 입구에 이르렀다. 그곳은 문이 한 번도 닫힌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흙길에 울타리조차 없었다. 그들이 다가갔을 때 문 안쪽에서 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문지기가 보였다.
“실례합니다. 혹시 마실 물이 있을까요?”
남자가 묻자. 문지기는 문 안쪽의 보이지 않는 곳을 손짓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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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물론입니다. 저기 펌프가 있어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남자가 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내 친구는요?”
문지기가 말했다.
“펌프 옆에 물그릇이 있을 거예요.”
남자는 개를 데리고 문을 통과했고, 남자의 말대로 구식 수동 펌프 옆에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릇에 물을 가득 채워 자신도 마시고 개에게도 물을 먹였다. 갈증을 해결한 뒤, 그와 개는 나무 옆에서 기다리는 문지기를 향해 들어갔다.
남자가 물었다.
“이곳을 뭐라고 부르나요?”
문지기가 대답했다.
“여기는 천국입니다.”
남자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약간 혼란스럽네요, 길 아래쪽에 있는 성의 문지기도 그곳이 천국이라 했거든요.”
“아, 금으로 도금한 거리와 진주로 장식된 문이 있는 곳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곳은 지옥입니다.”
남자가 물었다.
“그들이 이곳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괜찮은가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나요?”
문지기가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장 가까운 친구를 뒤에 떼어놓고 떠나게 하는 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 테니까요.”
◎ 달을 보라고 하면 달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자를 보라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것은 불교의 명언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는 “누군가가 달을 보라고 하면 달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자를 보라.”고 했다. 당신이 달을 보면 누구에게 유리하며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살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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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우리가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지식은 권력을 가진 집단이 만들며, 그 지식이 다시 그 권력 집단을 지탱한다고 보았다. 진리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또는 권력 집단에 의해 정해지는 하나의 지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그 사람은 죽어본 적도 없고 천국을 본 적도 없으므로, 그 말을 진리라고 믿고 따르기 전에 말하는 그 사람을 봐야 한다. 어떤 사람이 영적 깨달음을 이야기하거나 어떤 정치인이 정의와 국민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은 왜 그것을 말하며, 당신이 그의 추종자가 됨으로써 그 사람은 어떤 권력을 얻는가?
세상은 우리에게 기성복을 주면서 그 옷이 절대 치수인 양 우리가 그 옷에 맞지 않으면 전적으로 우리 잘못이라고 결론 내린다. 옷이 몸에 맞지 않을 때, 자신이 둥근 구멍 속에 박힌 사각 나사 같은 생각이 들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최선을 다해 옷과 구멍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가?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불행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결핍되고, 부족하다고 믿게 한다. 일단 불행하다는 인식을 심어 놓은 다음 종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믿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선전한다. 사업가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상품을 소유해야만 삶을 문제 없이 누릴 수 있다고 광고한다. 이들 모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행복해지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조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스스로 불구가 되는 길이다. 옷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는 것이 불구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세상이 재단해 주는 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이 재단한 옷을 입어야 한다.
세상의 기준이 자신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그때가 바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야 할 때이다.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자신을 그 사람에게 맞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맞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 미움받는 것이 덜 위험하다. 다른 사람들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현실 적응자가 되지 말고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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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인어를 만났어요
글은 단순하게 쓰는 일이 가장 어렵다. 작가라면 미사여구를 동원해 글을 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이십 대 초반에 신춘문예로 등단해 자칭 언어의 연금술사로 행세할 만큼 화려하고 감각적인 문체를 자랑했다. 번역을 하면서도 나만의 특징적인 문장을 구사하려고 힘썼다.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부사와 형용사를 곳곳에 배치하면서.
그러나 나는 안다. 중첩된 수식어나 멋진 묘사 없이 글 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지금은 글을 쓴 다음 부사와 형용사들을 지워나가는 것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되었다. 편집자에게도 원고 교정시 빈약하고 현란한 작가로 남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한글의 2만여 개 부사와 형용사를 나열한다 한들 그것이 글의 진정성을 심화시켜 주지는 않는다. 진실하지 않다면 그 단어들이 무슨 소용인가? 또 진실하다며 굳이 그런 수식어들이 왜 필요한가?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일이 더 어렵다.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스스로의 에고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멋지게 과장하기란 오히려 쉽다.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일수록 있는 척한다. 부족하거나 결여된 것일수록 더 많이 가진 것처럼 과신한다. 세속의 일만이 아니다. 명상이나 요가 수행이 깊지 않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수행한 햇수를 내세운다. 내가 아는 수도승은 출가 이후 평생을 하안거 동안거마다 선방에서 지냈으나 그 사실을 입에 올리는 적이 없다. 다만 여름과 겨울이면 그가 지금 선방에 앉아있겠구나, 하고 나도 따라서 허리를 바로 세우고 앉게 된다. 내면에 내세울 것이 적은 사람일수록 명품을 들고 다닌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아무것도 필요없는 사람, 오직 모를 뿐인 사람이다.
좋은 글은 가슴에 새겨지는 점자처럼 다가온다. 생텍쥐페리가 말했듯이, 더
이상 덧붙일 게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덜어낼 게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완벽에 이르는 순간이다.
어떤 세계를 진실로 경험하면 말을 잃는 법이다.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깊이 경험하지 않았거나 말을 꾸며 내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글이든 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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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든 종교든 다르지 않다. 장황하게 자신을 포장하거나 교묘하게 만드는 자는 거짓의 능력자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말을 하지만 의미 없는 말과, 의미는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말이 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언어에 대해 고찰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명언이다..
진정으로 경험하는 순간 정신에 빛이 스며들어, 말의 유희를 벗어나 깊어지고 겸허해진다. 진실이 우리 안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침묵만이 거주하는 공간이 생겨난다. 자신에게 돌아오라는 의미가 이것이다.
◎ 우리 모두는 도움이 필요하다
한 남자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차 가까이 갔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옆에 멈춰서는 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부랑자 차림의 노숙자였다. 집도 직장도 없고 물론 차도 없어 보였다. 몇 푼의 돈을 구걸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말했다.
“차가 아주 멋지네요!”
멈칫하며 남자가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몇 초 망설이다가 혹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 노숙자의 대답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은가요?”
그 한 마디에 남자는 깨달았다. 돈이 있고, 잠잘 곳이 있고 직장이 있지만 자신 역시 때때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넉넉한 재산과 성공을 누리고 있다 해도 우리 모두는 도움이 필요하다. 잠남는 지갑을 꺼내, 가진 돈을 노숙자에게 건네 주었다.
먹을 것과 그날 밤 잘 곳을 위해.
자만은 ‘나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이다. 그리고 겸손은 ‘나는 다른 존재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이다.
인도 아쉬람의 어느 카페, 구석 자리에 앉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들썩이며 드러내 놓고 흐느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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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금발 머리에 붉은 고동색 산야신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다가가서 들썩이는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었다. 내 손길에 고개를 쳐든 그녀는 놀랍게도 아쉬람 안에서 내가 가장 동경한, 누구보다 우아하고 평화로운 미소를 짓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위로해 주는 내 팔에 콧물을 문지르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포자기한 상태로 중얼거렸다.
“내 삶은 엉망진창이야 차라리 이대로 끝내는 게 나아.”
그녀의 아픔과 고통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나는 큰 해방감을 느꼈다. 나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만 우울하고, 나만 불행하고, 나만 소똥 밟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같은 여행을 하고 있는 동지들이었다. 단지 누구는 더 멋있게 구미고, 누구는 더 빛나 보이고, 누구는 더 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타지마할 배경의 사진을 찍을 뿐이었다. 웃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내가 일종의 포모 증후군에서 놓여난 첫 순간이었다.
다들 잘 나가고, 일 잘하고, 자유롭게 삶을 즐기고 있는데 자신만 뒤처지고, 소외되어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난 것이다.
카프카가 말했다.
“당신이 내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볼 때, 당신은 내 안에 있는 슬픔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고 나는 당신의 슬픔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다른 사람이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그들이 말하지 않는 전체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완벽하게 미소지은 얼굴과 멋진 요가 포즈 뒤에서 그들이 어떻게 서로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어떤 불만과 생의 피로감이 드리워져 있는지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이 그곳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이며 명상 교사인 잭 콘필드가 샌프란시스코의 큰 강당에서 3,000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연민에 관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젊은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몇 주 전 자기 남편이 자살한 일로 인한 마음의 고통을 토로했다. 심한 슬픔과 혼란, 죄책감과 분노, 상실감과 두려움이 그녀 이야기에서 드러났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잭 콘필드는 연민심을 느끼며 청중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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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있는 분들 중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자살을 경험한 분이 있으신가요?”
그러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어났다.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마치 거대한 사원에 있는 것처럼 서로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 새는 노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노래한다
동화와 현실 중간에서 살아가는 듯한 외국인 친구가 서울에 와서 한 달 남짓 머물렀다. 이틀에 한 번씩 만나 함께 일한 후 점심을 먹고 시내를 산책했다. 겨울 끝자락이었지만 기록적인 한파가 연일 이어졌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도 히말라야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장갑 낀 손으로 귀를 녹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귀가 빨개졌는데도 연신 감탄하며 “하늘 좀 봐! 정말 파란색이야!”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움츠렸던 고개를 빼고 올려다보니 찬 공기 때문인지 독특한 파란색이었다. 목이 긴 나는 추위가 파고들어 얼른 펭귄처럼 움츠렸지만, 그 친구는 혹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가 인사동을 한 바퀴 돌고 조계사 경내를 지나 안국동과 정독 도서관 앞뜰을 거쳐 삼청동과 가회동 쪽으로 긴 순례를 하는 동안 한국의 겨울 하늘이 지닌 아름다운 블루 컬러를 계속 예찬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 덕분에 강렬하게 파랗지도 않은, 무심하게 우주 공간을 투영하는 듯한 파란색을 자주 바라볼 수 있었다. 하늘의 아름다움을 자각하는 순간 추위가 훨씬 견딜 만해졌다.
하늘에 관한 것은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다. 그 친구는 매사에 그런 식으로 모든 일과 모든 사물들 속에서 아름답고 기쁜 요소를 발견했다. 한번은 버스가 늦게 와서 한참 기다리게 되었는데 미안해서 택시를 타자고 하는 내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거리에 더 오래 서 있게 돼 기쁘다.”라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제주대학교에 일이 있어서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갔다가 저녁에 올 예정이었는데, 폭설로 발이 묶이자. ‘신이 준 선물’이라며 좋아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종말 좋은 일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니까?”라고 말하는 동화 속 소녀 같았다. 그래서 함께 일을 하는 데도 즐거움이 따랐다. 에고의 주장이나 설득이 불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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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설가 엘리너 포터의 명작 <폴리애나>의 주인공 폴리애나는 불행한 삶 속에서도 매 순간 ‘다행한 일 찾기’를 한다. 열한 살에 고아가 되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노처녀 이모 집에 얹혀살게 된 폴리애나는 매일 ‘대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대저택 같은 집에서 좁고 퀴퀴한 다락방이 주어지지만 전망이 좋아서 그림 같은 경치만 봐도 정신 수양이 되어서 다행이라거나, 방에 거울이 없어도 주근깨 난 얼굴을 안 봐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기차역으로 자신을 마중 나와주지 않은 이모에 대해서는 이모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일이 좀 더 연장되어서 대행이라고 여긴다. “다행이야.”는 폴리애나가 불우한 삶을 견디는 만트라이다.
폴리애나는 이것을 ‘기쁨 찾기 놀이’라고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 놀이를 함께 할 것을 권한다.
기쁨찾기 놀이는 억지로 지어낸 자기 위안이 아니라 삶을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정신의학자 아들러가 말하듯이, 인간은 자극에 반응만 하는 반응자가 아니라 그 자극에 대해 창조적 결정을 하는 행위자이다. 사람들이 있는 데서 자신도 모르게 방귀를 뀌면 ‘똥을 싸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긍정적인 정신(!), 단호한 낙관주의는 행복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고난을 지탱하는 것은 기쁜 일을 발견하는 마음이다.
◎ 바닷가재는 스물일곱 번 허물을 벗는다
젊은 날의 한 달을 다 바쳐 읽은 신화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의 명저 <황금 가지>에는 남태평양 바누아투군도에 사는 멜라네시아인들의 신화가 채록되어 있다. 태초에 신은 인간을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했다. 불사의 비결은 이것이었다. 나이가 들고 노쇠해지면 인간은 정기적으로 낡은 몸을 허물처럼 벗고 젊은이로 거듭났다.
노파가 된 한 여인이 늙은 몸을 벗으러 과거에도 여러 번 그랬듯이 숲의 강으로 갔다. 일설에 의하면 그녀는 모계사회 부족의 족장 울타마라마였다. 그의 이름은 ‘세상의 허물을 벗기는 자’라는 뜻이다. 그녀는 강으로 걸어 들어가 몸의 허물을 벗었다. 그리고 그 허물이 물에 떠내려가다가 하류에 떠 있는 나뭇가지에 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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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젊음을 되찾은 모습으로 돌아오자, 집에 있던 딸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딸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을 낯선 이방인 보듯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자신이 엄마라고 말하자 딸은 놀라 달아나며 말했다.
“아니야 당신은 나의 엄마가 아니야. 나의 엄마는 그런 모습이 아니야.”
아무리 이해시키려 해도 소용없었다. 자신보다 젊어 보이는 엄마의 얼굴과 피부에 처녀인 딸은 울면서 화를 내고 괴로워했다. 결국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울타마라마는 강으로 돌아가서 나뭇가지에 걸린 자신의 쭈글쭈글한 허물을 다시 건져 뒤집어썼다.
그녀가 늙은 모습을 되찾아 돌아오자 딸은 크게 안도하며 “엄마, 우리 엄마!”하면서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 후 인간은 허물 벗기를 중단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불사의 능력을 잃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신화는 말한다.
* 프레이저의 설명에 따르면 초기 인류는 허물 벗기가 불멸을 준다고 믿었고 비슷한 전설이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 호주 북부의 파푸아뉴기니 - 솔로몬제도의 부족들
- 북부 보르네오의 두순 족 - 동 아프리카의 부족들, 등
우리가 탈피해야 하는 ‘허물’은 무엇인가?
굳어진 생활습관, 고정관념, 익숙한 방식, 믿음 등이다. 이 허물들은 주기적으로 벗지 않으면 단단한 껍질로 굳어져 성장을 가로막는다.
허물 벗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변화를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가까운 이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허물을 벗어던지고 나타나면 우리의 새로운 자아를 알아차리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라고 충고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의 아내이고 엄마라면, 당신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을 때 남편과 아이는 그것이 당신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소리치며 주장할 것이다. 아이는 자신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와 달라고 울며 애원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부모는 허물 벗기 같은 허황된 소리는 집어치우고 당신이 안정된 자리를 지키기를 원할 것이다. 당신을 심리 상담소로 데려갈지도 모른다.
우리가 랍스터라고 부르는 바닷가재는 딱딱한 껍질 안에서 사는 부드럽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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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말랑한 생명체다. 그 딱딱한 껍질은 절대로 커지지 않는다. 바닷가재가 성장함에 따라 그 껍질이 몸을 점점 조여 오고, 당연히 바닷가재는 매우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바닷가재는 포식자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한 바위 밑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자신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껍질을 만든다. 하지만 바닷가재는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껍질마저 불편해진다. 그러면 또다시 바위 밑에서 껍질을 벗고 새로운 껍질을 만든다. 이 과정을 27번 반복한다.
랍비이며 정신과 의사인 아브라함 J. 트워스키는 이 바닷가재 이야기를 하면서 만약 바닷가재에게 의사가 있다면 불편함을 느끼자마자 의사에게 가서 신경 안정제를 처방받아 먹고 기분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정곡을 찌른다.
통증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통증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고, 그 통증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일이다.
불편함과 갑갑함을 느끼는 시간들은 당신이 성장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이 역경을 제대로 활용하면 그것을 통해 정장할 수 있다.
◎ 입술은 마지막으로 발음한 단어를 보존한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앨리스 카하나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화가이다. 열다섯 살 때 독일군에 의해 가족 전체와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의 한 명이다. 전쟁 후 미국으로 이주해 텍사스주에서 살며 화가로 활동했다.
그녀에게 일생 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는 뼈아픈 기억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수용소로 이송되면서 그녀는 강제로 부모와 분리되었고, 여덟 살 남동생을 책임지게 되었다. 다시 트럭에 실려 어느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고서야 동생이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중의 어딘가에서 다른 한 짝을 잃어버린 것이다.
누나가 동생에게 흔히 하듯이 그녀는 부주의한 동생을 나무라며 소리쳤다.
“넌 왜 그렇게 바보 같니! 너 자신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니?”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갑자기 밀어닥친 혼란과 바극 속에서 모두가 신경이 불안하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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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동생은 다른 트럭으로 끌려갔고 그 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앨리스 키하나는 마음의 구멍을 메울 수 없는 그 아픈 기억을 이야기하며 눈물지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사건 이후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그 사람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전시관에 가면, 그곳에서 희생된 어린아이들의 신발이 쌓여 있는 곳을 지날 때가 가장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한다. 키하나의 남동생도 그곳 가스실에서 숨졌다.
어떤 것이 진실과 사실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서로의 관점에서 대부분 옳다. 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사람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기억이 오래도록 자신을 아프게 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다른 인간관계까지 공허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의 공동 저자인 정신과의사 하워드 커틀러가 달라이 라마에게 약간의 유머를 곁들여 물었다.
“당신은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일이 있었나요?”
달라이 라마는 정색을 하며 “그런 적이 있었다.”라고 대답하고는 그 일을 이야기 했다.
“은둔 생활을 하던 노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 나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사실 나보다 깨달음이 높은 사람이어서 그냥 의례적으로 나를 찾아왔을 것입니다. 하루는 그 노승이 나에게 높은 차원의 어떤 수행법에 대해 물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별생각 없이 노승에게 “그것은 힘이 드는 수행법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이나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십 대 중반에 그 수행을 시작한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얼마 후 나는 그 노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젊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 그 수행을 더 효과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커틀러는 깜짝 놀라며,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무척 아팠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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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커틀러는 달라이 라마에게 그 후회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끝낼 수 있었는지 물었다.
달라이 라마는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나는 그 감정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는걸요.”
그리고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후회하는 마음이 아직 있더라도, 그것은 나를 짓누르거나 과거에 얽매이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후회스러운 감정이 내가 최선을 다해 사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의 입술은 마지막으로 발음한 단어의 형태를 보존한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하는 마지막 말도 입술의 형태로 그 사람 가슴에 남을 것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한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 헤어진 후에도 남는 그 말은? 영어의 ‘말word’과 ‘칼sword’이 같은 단어를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둘을 잘못 사용할 때 같은 결과를 낳는 것도.
◎ 문제를 발견하는 문제
삶에 대해 늘 불평하는 제자가 있었다. 인간은 생로병사뿐만 아니라 온갖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것들이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매사에 행복하지 않았다.
어느 날 스승이 그를 불러 물 한 잔을 가져오게 시켰다. 그리고 그 물에 소금 한 줌을 타서 마시게 하고는 물었다.
“물맛이 어떤가?”
제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무 짜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스승이 근처 호숫가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맑은 호수에 똑같은 소금 한 잔을 뿌리고는 호수의 물을 한 모금 맛보게 했다. 물 맛이 어떠냐고 묻자, 제자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시원합니다.”
“짜지 않느냐?”라는 스승의 물음에 제자는 “전혀 짜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제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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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이를 알겠는가? 불행의 양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다만 그것을 어디에 담는가에 따라 불행의 크기가 달라진다. 유리잔이 되지 말고 호수가 되라.”
인생의 문제는 소금과 같다는 것이다. 소금의 양은 같지만, 우리가 얼마만 한 마음의 넓이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짠맛의 정도가 달라진다.
2024. 6. 22
모두 열심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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