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6월 4일. 어느 덧 가정의 달인 5월은 푸르름 속에 지나고 6월이 되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월 6일이 현충일이고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니 그에 알맞은 달 구호 설정이다.
오늘은 마침 중국에서는 신경쓰는 날이란다. 8964
1989년 6월 4일에 천안문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날.
중국공산당 정권에서는 자신의 체제를 부정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니...
대입수능모의고사 보는 날이라고 방송에서는 알려준다...
앞산 지족산에서는 검은등뻐꾸기 네박자 울음소리가 밤꽃향기 속에 들린다.
오늘 경천(敬天) 일대 둘러보는 것으로 지난 주에 약속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대전지하철 월드컵역에서 내려 걷는다 .약속 장소에서 합류한다.
지하철역에서 집어든 <일류도시 대전> 2024 6월호(Vol.243) 첫 페이지에는 국립대전현충원이 특집으로 꾸며져 있다.
명당터에 자리잡은 국립대전 현충원 산세.
계룡산을 태조산으로 삼고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을 지난다
게재된 사진에는
왼쪽 갑하산 위의 신선봉(572m)과 멀리 북쪽으로 우산봉(573m) 이 보인다.신선봉 아래 두리봉을 중심으로 현충원 묘역은 펼쳐져 있고,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며 삽재를 넘어서 1번 국도를 타고 계룡시(옛날 신도안)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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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을 지나 공주 동학사 가는 삽재를 넘어 계룡시로 향한다.
차창 너머로 계룡산 장군봉이 보인다.
'바깥거리'가 '팥거리'가 되고 ' 팥거리'는 한자로 '팔갈이''가 되어 두마(豆磨)로 둔갑 표기되고 두마면은 이제는 계룡시가 되어 있다.
지명의 유래 속에 이렇게 많은 사실들이 들어 있음을 떠올리면서 계룡시 ' 팥거리'를 지나 양정고개를 넘어 후백제 최후의 결전장 개태사 골찌기를 지난다.
달리는 차창으로 , 오른쪽으로 계룡산 천황봉(상봉)이 보인다..
연산을 지나 황산성을 오른쪽으로 끼고 북으로 올라간다.
계룡산 남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청명한 날씨에 아름다운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에서부터 연천봉, 관음봉 쌀개봉으로 해서 상봉(천황봉)으로 돌아 다시 남쪽으로 난 줄기가 국사봉(향적봉)으로 이어져 끝자락에 황산성까지 내려온다.
지명에 관심이 많은 성지기가 왕우래를 지정해서 찾아 들어간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 무슨 사연이 있는 곳인가?
(논산)상월면 지경2리에 있단다.
우물이다. 보통은 동네 우물가에는 향나무가 있는 데 이곳은 팽나무가 함께 있다.
귀신 쫒는 나무로 알려져 있어서 마을의 서낭나무로 심어지는 것이 보통인데..불 때면 나무타는 소리가 팽팽 소리난다 해서 얻어진 나무 이름..
그 팽나무 아래에 기와지붕을 한 아래에 우물이 있다. 녹색 펜스까지 둘러쳐져 있는 것이 범상치 않다.
우물이 기와지붕을 하고 있는 모습도 드문 모습이고...
왕의 우물이라니.. 무슨 사연인가?
우선 둘러본다. 안내판도 없고.
궁금증만 자아낸다.
시멘트 구조물이 맘에 안들지만 물은 풍부한지 흘러내린다.
지경2리 마을회관은 텅 비어 있고, 사람을 찾으니 마침 회관 아래쪽 집안에서 주민을 만난다.
궁긍한 것들을 물어본다.
붉은 점 표시 쪽 부분을 주민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설명해준다.
자세한 것은 마을회관 안에 있다고 해서 들어 가 본다.
'백제의 혼이 살아 숨쉬는 지경리 마을이야기"라는 제목의 안내문이 적혀 있는 것이 보인다.
<왕우정 용왕제 모습>
왕우정이다. 왕우래. 한자식으로 王又來(왕우래) '왕이셔, 또 오소서' 의 의미인가?
자세히 들여다 본다.
" 백제시대 문주왕이 사냥을 와 늘 왕우정 물을 먹고 좋아하여 공주까지 날라다 먹었단다.
(왕이) 민가에서 눈이 와서 숙박하는데 반대파인 병관좌평 해구에 의해 시해되어.지명을 왕우래로 되었고"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용왕제 지내는 시기를 물어보니 4월 5일 경이란다. 양력으로...
지경2리에서 바라 본 계룡산 모습, 남쪽의 국사봉 아래까지 잘 보인다.
무겁교 이야기도 듣고 찾아 나선다. .
지경리 마을회관 이웃에 정려각이 있다.
효자 박상문 정문
효자 박상문(1615-1672)의 효행록이 책모양의 비석으로 새겨져 있다. 송시열선생, 송준길 선생 김집 선생 들이 효행의 모범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는 내용.
그러고 보니 이근처에는 신라시대의 향덕의 효행비가 계룡면 효포리에 지금도 남아 있고, 지명도 혈흔천이라는 .내도 있고,.
무겁교 조석교 돌비석도 찾아나선다.
지경리 회관에서 노성 가는 쪽으로 벌판 가운데 있다.
겁도 없이 물고기를 잡았다 해서 , 무겁교, 아침저녁으로 부모 봉양했다는 뜻의 조석교,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는데, 구전으로 전해 오는 것을 이렇게 만고불변의 돌에 새겨서 길이길이 ....
건너편에는 노성산이 보인다.
노성의 이전 이름은 이성( 尼城) 현인데 송시열 등의 유생들이 감히 공자 이름(중니,공구)을 함부로 쓰다니, 개명을 요청하여 노나라 노(魯) 노성현으로 바뀌고, 경북 대구의 구(丘)도 구(邱) 로 바뀌게 되고. 유학의 핵심적인 고장임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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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우정과 무겁교 사연을 보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신원사 근처의 밥집으로 향한다.
이름이 "밥꽃"
특이한 식당 이름.
들어가기 전에 차에 내려서 주위를 둘러본다.
신원사 뒷산의 계룡산 일대가 한층 가까이서 바라보니 남다르다.
왼쪽이 연천봉(連天峰) - 하늘과 이어진다는 뜻이니 범상치 않다.
바로 아래에는 등운암이라는 암자도 있고, 정상 암반에는 조선이 망하고 새나라가 들어선다 뜻으로 해석되는 각자가 있고..
점 두개 부분은 쌀개봉 그 오른쪽이 상봉 (이곳에서는 천황봉을 상봉으로 지칭함).아래로는 중악단에서 보면 누워있는 부처님 모습이라는 와불 형세도 보인다.
점심을 한 상 대접받고... 구경에 나선다.
식후 산책로에 나왔다가 우연히 주인어른과 한담을 나누게 된다.식당하는 분은 자제분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답사의 진면목은 현지 주민과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살아있는 역사를 읽는데에 있다.
게룡산의 요지 중의 요지속에 자리잡고 있단다.
금계포란형국의 계룡산이란다. 그러면 "그 닭이 품고 있는 알은 어드메인가요?" 하고 물어도 보고,
자신이 있는 이 일대가 제일이라고 . 그래서 신원사가 있는가.? 중악단이 있고?
언제쯤 새알에서 병아리가 깨어나올까? 정감록 예언서는 말하는가?
계룡산을 중심으로 동학이 있고, 정감록이 생기고, 이태조가 궁궐 역사 하다가 중단하고, 지금도 민속종교가 여기저기에 있고,
신비한 산 계룡산......
다함 없는 이야기는 아쉽게 중단하고 중악단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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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그냥 들어가도 된단다. 달라진 모습이다.찻속에서 사진 찍고..
-중악단 앞 마당에 주차한다. 많이도 변했다.
신원사 금당 자리가 탐이 났나? 부처님이 중악단 산신령님에게 양보하고 옮겨 가셨나?
망해 간다고 했샀고, 민심은 흉흉하고, 빌 것은 산신님이시여. 나라를 구해주소서,,
신원사(神院寺)에서 신원사(新元寺)로 바뀐다. 신기원의 뜻을 담은 절 이름, 얼마나 간절했으면 명성황후는 이웃의 냇물에서 목욕재계하고 재를 올렸을까? (그때 목욕재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은 수방댐으로 묻혀버렸다고 애석해 하던 단청공의 이야기도 생각나고, 공주 능치고개 아래 물안주에서 만난)
궁궐식으로 지은 중악단. < 중악단산신각>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명성황후 민비는 갑오동학농민운동이 있던 1894년 다음 해인 을미년(1895)에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당하고.. (을미사변)
나라는 결국 일본에게 강제 합병 당하는 비운의 길로 가고...
두번째 문 현판: <계룡산신제일도량>
중악단 건물이 보인다. 단(壇)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단 앞 정원 양쪽에는 구골나무 두 그루가 각각 있었는데,, 어느새 없어지고 지금은 동백나무로 보이는 것만 심어져 있다.
호랑가시나무와 흡사한 구골나무인데. 산신령이 타고 다니는 호랑이와 어울리는 나무가 아닌가?
중악단 현판은 구한말 대신 이중하(李重夏) 글씨.
그는 감계사로써 간도 일대의 영토 협상에 임했던 시절 '내목을 벨 지언정 한치의 땅도 넘겨 줄 수없다'는 기개 높은 정신의 소유자의 글씨에서 그의 기백을 읽는다. 기와지붕 위의 잡상도 볼만하고... 궁궐식 건축양식도 담장의 아름다움도 두루두루 보고...
중악단 중앙에 모신 산신할아버지 초상화
계룡산에는 호랑이와 관계되는 일화가 있는 곳이 또 있다.
오뉘탑(남매탑)이 있는 곳 전설, 호랑이 입에서 가시 빼준 일화도 생각해보고....
구골(狗骨)나무는 요사채 안쪽에 아직 남아있었다.
11월 말쯤 자그마한 하얀 꽃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좋았는데...
호랑가시나무는 변산반도 일대에 자생하는 천연기념물.. .
늦게서 얻은 만보 사진 속에서 기념사진편을 추가로 싣는다.
중악단을 둘러보고는 갑사 쪽으로 해서 마티고개 터널을 지나 다시 동학사쪽으로 해서 원점회귀, 현충원역 앞에서 헤어진다.
경천 일대를 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문주왕에 얽힌 우물을 보면서 한성백제에서 웅진백제로 이어지는 역사와 다시 사비백제로 가게 되는 과정을 짚어 보게 된다. 신원사라는 절 이름에서, 경천이라는 지명에서,, 계룡산이라는 산이름에서 오늘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된 하루 나들이었다.
한성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죽자 그 아들 문주왕이 창황 중에 웅진(공주)로 천도하게 되고(475년),, 3년 후 시해당하고, 어린 삼근왕이 겨우 3년, 동성왕도 가림산성 쌓은 백가에게 시해당하고, 그리고 무령왕 때야 비로소 안정기에 들어서고, 성왕 때 다시 현재 부여인 사비백제 즉 남부여로 옮겨간다(538년) 그 성왕도 관산성 전투에서 죽고....
혹시 장깃대나루라는 지명이 동성왕을 죽인 백가의 목을 효시한 곳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즉도 해보게 된다. (문주왕을 시해한 해구 또한)
자세한 것은 백제왕조편을 들여다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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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카페지기 자부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