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시선 카페를 통하여 주님과 말씀과 기도로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서론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언적인 측면에서 볼 수 있고, 예수의 이름의 측면에서도 볼 수 있고, 구원론적인 면에서도 볼 수 있고, 또는 율법적인 면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만 지금은 우리 모두가 교회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지도자(제자)들을 위해서 하신 깊은 말씀들이 많이 들어 있 습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우리 주님이 직접 택하셔서 그 분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하여 특별한 사람들을 골라서 쓰셨기 때문에 지도자들의 사고 방식과 그분들의 생활 방식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서 우리 예수님께서 어떻게 지도자들을 훈 련시키셨으며, 지도자들을 어떤 관점에서 보셨으며, 또 지도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한번들여다보고, 또 2천년대를 향한 한국교 회를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1.구약시대의 지도자 성경에 보면 우선 하나님이 택하신 지도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모세, 다 윗으로 연결되는데 하나님은 꼭 지도자를 통해서만 역사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하나 님은 특히 모세의 리더십에 상당히 많은 기대를 하셨는데 모세는 민중을 끌고가는 힘 은 있었지만 교육하는 지도자로서는 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출애굽에서 광야 생활까지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 밑의 사 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을 잘 훈련시켜서 여호수아가 가나안으로까지의 지도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요즈음의 경영학에서도 자기 밑의 사람을 자기보다 더 훌륭하게 교육시키는 것이 진짜 지도자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모세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넓 은 사람이고 복음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를 보면 모세가 갖고 있던 훈련 부분에 비해 좀 약했습니다. 그는 자기 밑의 사람들을 훈련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 민 족은 하나님을 잊어버렸는데, 그 이유는 대를 이어 민족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를 훈련 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가 오면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려움을 당 한 것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을 다 잊어 버렸다는 말이 나옵니다(삿2:10). 그 말은 지도자가 연결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큰 교회나 중간 교회를 갖고 있을지라도 자기 밑의 지도자들을 키우지 않고 자기 왕국(교회)만 크게 하다 보면 우리나라 교회는 앞 으로 10년, 20년 이상 못버팁니다. 그것이 우리나라만의일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를 공 부해 보면 그렇게 되어 왔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지도자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 다윗, 솔로몬, 12제자, 바울 등 그분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그들마다 리더십의 특징이 다 다릅니다. 또한 우 리 주님은 다른 것을 원하셨습니다. 꼭 누구를 닮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정성을 다하여 원칙만 지키면 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주님이 갈릴리 지방 자기 고향 나사렛에 가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백성을 구하려 왔다"라는 그 분의 의지가 이름 속에 서려 있다고 말씀했습니다(눅 4:12~19). 2.마태복음에 나타난 지도자의 자질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주님이 사역을 시작하려고 할 때 완전한 인간이시고, 완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귀가 덤벼들기 시작한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령 충만하고 주의 영이 나와 함께 있어도 내가 하나님의 일을 조금 크게 하려고 하면 꼭 마귀가 덤빕니다. 그런데 덤비는 내용이 아주 특수합니다. 영광을 위해서, 출세를 위 해서, 물질적인 유혹을 위하여 아주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덤빕니다. 주님이 마귀의 세력과 싸워 이기신 후 제자를 뽑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른 데 보면 정말 기도를 많이 하시고 뽑으셨습니다. 뽑으신 후 제자들한테 금방 유대인을 상대로 전도를 안 시키고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기 시작하십니다. 지금 주님과 제자 사이는 금방 아이를 낳은 산모와 신생아 같은 사이입니다. 관계 성에서 볼 때 아직 유년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리더십과의 관 계로 볼 때, 미숙한 제자 12명을 그 분의 이름 속에 들어 있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 제자들을 훈련시켜, 자기의 파트너로 만들어서 땅끝까지 증인이 되는 수준까지 끌 어올리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제자들을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대로 주 님의 뒤를 이으려면 얼마 동안,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훈련을 시킬까 하고 연구를 하 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12명의 제자들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 들이고 또한 그들의 선생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성령에 이끌 려서 따라만 다니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도행전 1장 8절 의 말씀대로 끌고 올라가려면 약 3년의 기간이 걸리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요새 경영학에서도 신입 사원이 한 회사의 직원이 되는 데는 적어도 3년이 걸린다 고 합니다. 그 다음에 인원수인데 인원수도 많이 뽑으면 좋을 것 같지만 서로가 서로 를 배우는 데 있어서 최대로 배울 수 있는 숫자는 12명이라고 합니다. 현대의 경영학 자들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그 유명한 8복이 나오는데 주님은 미래의 지도자가 될 제자들 에게 8복 강해라는 영적인 말씀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미래의 영적 지도 자들일지라도 금방 태어난 어린아이들인데 알아듣겠습니까? 그래서 8복 강해를 통해서 비록 알아듣긴 힘들지만 체하지 않도록 미리 결론을 내려 주십니다. 8복 강해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인 "너희들이 성령을 받으면 나의 증인이 될텐 데 내 증인이 되려면 너희들이 먼저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 성령이 충만하려면 은사를 받아야 되는데 은사는 은사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거기서 열매를 맺어야 된다."고 하는 말씀의 결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먼저 인간적인 면에서 인격 완성이 되어야지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8복을 보시면 알겠지만 거의가 성령의 열매(갈5:22)에 대한 말씀입니다. 미래의 지 도자가 될 사람들은 이 열매가 정확하게 맺혀 있어야 합니다. 첫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입니까? 욕심이 없는 자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의 정열이 있는 자입니다. 온유한 자란 훈련이 잘됐다는 말인데 제멋대로 노 는 사람이 아니라 훈련이 잘된 사람을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주님을 무 지무지 갈망하여 주님 아니면 못산다고 하는 사람이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다른 사람 을 보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항상 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어디에 가서든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육적으로 싸움하는데 그 사람이 들어가면 싸움이 그치고,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연결 시 켜 주는 전도, 증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13절 이하는 리더십을 구체화시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즉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니다. 소금은 죽는 것이며 빛은 강한 힘을 발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도자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서 5장 마지막은 전부가 율법에 관련된 얘기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율법 에 관한 얘기를 하시는데 이것을 그들이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지도자들한테 일반적인 아이디어를 주시는 내용입니다. 제자들보고 구약에 나오는 율법대로 살지 말고 용서 안에서 살고, 은혜 안에서 살라는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같 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며 은혜안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잘나서 뽑은 게 아니라는것입니다. 마음에 복음의 정 열을 가지고 서로서로 이해하고 도와주며, 아주 넓은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꼬집는 쪽집게 놀이하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주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것들이 리 더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복음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군중이 많지만 주님이 군중들을 향하여 설 교하실 때 제자들은 항상 옆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듣는 사람들은 제자들이었 습니다. 우리 주님은 군중들에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3년 동안 군중들을 엑스트라로 사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미래의 지도자로 만들 기 위해 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제자들이 잘못했을 때 직접 야단치시지 않고 항상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군중들한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바로 옆에서 듣고만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을 건드리지 않으십니다. 특히 자기 일꾼들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냥 살살 달래시면서 일을 하십니다. 우리도 그것이 참 필요합니다. 6장,7장은 계속 율법 안에서 살지 말고 용서 안에서 살라는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 습니다. 그러다가 7장 15절부터는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 다. 거짓 선지자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좋은 열매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입 니다. 그분이 정확한 지도자냐 아니냐는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이냐에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뜻은 나가서 예수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열매가 맺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볼 때 '저 사람은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됩 니다. 성령의 열매가 안 맺혀 있다면 잘못하다간 마귀가 하는 행위와 꼭같습니다. 그 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 혼돈을 합니다. 나에게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없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면 마귀가 들어가서 역사합니 다. 그러니 받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혼돈해 버립니다. 복음의 색깔은 변하므로 조심해 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에 지은 지혜로운 자와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아버지의 뜻을 아는 자입니다. 8장에서도 보면 위와 같은 말씀을 하실 때 군중들을 향하여 하셨지만 실상은 제자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군중들은 예수에 관한 인상을 말합니다. '이는 가르 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다.' 제자들도 분위기를 보면 저분이 '권세있는 자답다.' 라는 인상까지는 받았지만 이분이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다니는데 가끔 가다 군중들이 하는 얘기가 '이분이 누구같다.' 즉 '권세있는 자같다.'라고 하면 주님이 그 것을 받아서 "옳다, 너희들이 말 잘했다."하시면서 작전을 바꾸십니다. 제자들로 하여 금 예수가 누군란 것을 다른 각도로 알려주기 위해서 병자를 고치기 시작하십니다. 8장에 보면 처음에 문둥병 환자부터 고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 다. 주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사고방식을 하나하나 고쳐 주기 시작하 십니다. 예수가 누구라는 것을, 이것은 하루 아침에 안 되고 3년이나 걸린다고 생각하 셨습니다. 우리가 제자 훈련을 시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1,2년 갖고는 안 됩니다. 다음에 5절부터 보면 가버나움에 백부장이 나타납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습니 다. 제자들은 유태인이기 때문에 주님은 '유태인에게만 관심이 있을 것이다.'고 생각 했지만 주님은 이방인에게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십니다. 백부장과 만나 이야기하면서도 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만한 믿 음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했다. 이스라엘 사람보다도 이방인이 더 낫 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제자들의 사고방식을 고쳐 주셨습니다. 14절에는 주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오고, 23절에는 자연을 정 복하는 장면이 나오고, 28절에는 귀신들린 자를 쫓아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29절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이 행하신 이적을 보고 정신이 혼미해져 있는데 귀신이 예수님더러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군요."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일부러 귀신 이 말하는 것을 허용하셨스비낟. 그러나 옆에서 들은 제자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신이 한 말은 "아마 저게 미쳐서 그랬겠지."하고 한쪽 귀로 흘 려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니기만 했지, 전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생각 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9장에 보면 주님은 "이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너희도 들었지?"하 시고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사함받았다."라는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영적 인 단계를 올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제자들도 놀랬지만 거기 있던 이스라엘 서기관들 은 참람(僭濫)하다고 하며 덤벼듭니다. 어찌 이럴 수 있느냐며 제자들도 말은 안하지 만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한번 그 당시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했다는 말은 전혀 안 나옵 니다. 그냥 따라만 다니는데 너무도 놀라서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8절에 보면 무리가 보고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9절부터는 제자를 데리고 악명높은 세리 마태의 집 에 가서 마태를 제자롤 만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너희들이 율법 안에 있으면 마태 같은 사람은 날 따라다닐 수 없지만 용서 안에 있기 때문에 따라다닐 수 있는 것 이다."하며 마태복음 6,7장에서도 제자들을 향한 훈년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다가 18절에 들어가면 한 단계 더 높여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과거에는 감기든 베드로의 장모를 고쳤고, 자연도 정복해 보시고, 귀신도 쫓아내고 하시다가 제자들이 그래도 깨닫지 못하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십니다. 27절부 터는 소경 된 자의 눈을 뜨게 합니다. 그러니까 31절에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져버렸다 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1차 훈련기간이 끝납니다. 훈련이 끝나고 난 후에야 제자들을 내보내셨습니다. 처음에는 이방인한테 보냈다가 다시 훈련시켜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또 훈련시켜서 이방인들한테 보내는 장면이 10장 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다녀온 후 주님 하시는 말씀이 다음과 같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한테 화 평을 주려고 온 줄 아느냐. 너희들은 추수꾼이고 영적인 싸움을 하는 게릴라 요원이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한다. 너희는 이제 완전히 자기 삼을 희생하 고 나를 좇아야 된다."라는 훈련 각서를 그들한테 주십니다. 이제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기 때문에 저희들을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훈련을 계속 시키는데 11장을 보면 옥에 같혀 있던 요한이 12제자가 훈련받 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의 제자를 불러서 "예수가 도대체 누구냐? 이사야 40장에 나 오는 그분이 맞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12장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한테 율법을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의 주인이 나다."라 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손마른 사람의 손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안식일에 직접 일을 하셔서 안식일의 주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16절에 보면 "자기를 나타내지 마라."경계하셨는데 아직까지 3년 기간이 안 되었기 때문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13장부터 다시 훈련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니 그들의 생각이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집안 걱정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들끼리 싸우고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이 비유로 무리들을 향하여 얘기를 해도 제자들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제자들 보고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인데 어떤 사람은 마음이 길가에 있고, 어떤 사람은 돌밭에 있고, 어떤 사람은 가시떨 기에 있는데 좋은 땅에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마음이 지금 이렇 다는 것을 비유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좋은 땅에 뿌렸다는 것은 결실이 30,60,100배가 되는 것으로 리더십에 대해 훈련 받은 대로 하기만 하면 나중의 세계 선교의 열매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4절부터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복음은 농사짓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 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 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이요, 가라지를 심는 이는 마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일을 하다보면 마귀의 시험도 있고 여러 가지 일들을 다 겪을텐데 그걸 준비하려면 복음이 농사와 관계된다는 비유의 말씀으로 가르치면서 겨자씨와 누 룩의 얘기를 하십니다. 복음은 겨자씨나 누룩처럼 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초장기의 씨뿌 리는 단계라 복음 전파가 무척 힘들지만 조금만 있으면 겨자씨가 누룩처럼 퍼지게 되 니까 참고 예수만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감춘 보배 같은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복음의 핵심을 알고 나면 제자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어진다는 것을 말씀하 십니다. 이렇게 훈련시키는 데 1년 반 정도의 기간이 걸렸습니다. 16장 중간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로 올라 가십니다. 12제 자만 데리고 가십니다. 그곳에서 주민은 12명을 않혀놓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생각 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랬더니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선지 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그들도 그러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어보시는데 하나님이 베드로의 입을 사용해서 주 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쓰시려 고 하는 피조물의 입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베드로가 처음입니다. 하 나님이 일부러 피조물의 입을 통해서 11제자가 듣게끔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너무나 기분좋아서 베드로를 축복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20절에는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직 제자들을 충분히 훈련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은 마태복음의 분수령이 되는데 이때부터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 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그리스도라고 한 베드로를 축복하시다가 또 돌아가신다고 하니까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죽지 마옵소서."하니 까 "사탄아 물러가라."그러지 않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을 한 단계 올려보려고 생각해보니 12명의 개성이 다다릅니다.성격이 다르고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다릅니다. 그래서 성격이 다른 제자들을 어떻게 쓰셔야할 지 고민하십니다. 그래서 그중에서 제일 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뽑아서 한 단계 앞선 훈련인 천국을 보여주십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시샘을 합니다. 목사님들간 의 인간 관계가 복잡하듯이 제자들끼리의 인간 관계도 아주 복잡합니다. 큰 교회의 사 람일수록 목이 곧아집니다. 그걸 꺾어야 된는데 안 꺾고 점점 곧아지다 봄년 나중에는 뒤로 넘어집니다. 여기 보면 똑같습니다. 베드로가 그중 세 사람들 중에서도 최고입니다. 주님이 중 요한 것은 베드로한테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보기에 주님은 몇몇에만 관심이 있고 나머지한테는 별 관심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안에서 일 어나는 갈등을 다 알고 계시지만 아무 말도 안 하십니다.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그랬 더니 자기들끼리 시비가 붙었습니다. 18장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께 물어봅니다. "천국에선 누가 제일 큽니까?"그랬더니 주님은 평소에 그들이 생각하던 리더십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크리스찬 지 도자는 세상에서 지도자 관념을 가지면 안 된다. 앞으로 세상에 나가서 크리스찬 지 도자가 될 사람들은 이 땅의 사람들과 똑같아서는 안 된다. 적은 자가 봉사하는 것이 고 밑에 있는 자가 지도자를 하는 것이다."고 하시며 리더십의 자질을 말씀합니다. 제 자들은 이런 사고방식을 갖지않으면 사도행전 1장 8절의 주님이 나중에 주실 비밀의 말씀을 제자들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리더십의 자질에 대해 이때부터 철저하게 훈련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아직까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자세한 비유를 들어 주십니다.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 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지도자들이 자기보다 조금 낮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깔보고 목이 곧아서 그 사람을 우 습게 알면 나중에 하늘에 올라가서 다 두드려맞는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저 사람 이 마음 아파 했고, 내가 너무너무 잘되니까 밑의 사람들이 샘나서 마음 아파한 것도 남을 실족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왜 샘나게 만들어 놓습니까? 지도자들은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샘나게 해선 안 됩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이런 것은 세상 사 람들의 리더십 스타일입니다. 8절을 보면 "만일 네 손이나 네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이건 보통 중요한 말씀이 아닙니다. 나의 중요한 곳까지 잘라버린면서까지도 이것을 지켜야 된다 는겁니다. 만약에 교회 건물이 크다는 것을 가지고 남을 아프게 하거나 밑의 사람에게 교만하게 하면 교회를 떠나든지 아니면 조그만 교회 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12절에 보면 잃어버린 소자를 얘기하기 위해서 양을 비유하십니다. 우리는 다 99마 리의 양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중의 어떤 사람이 조그만 교회에서 아주 고생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 사람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관심이 있는 베드로에게 우리 주님은 적나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을 지도자로 세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리더십의 사고방식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시니까 15절부터 실족에 관한 예화를 또 듭니다. 형제 중 한 사 람이 실족했을 때는 인격적으로 우선 그 사람과 얘기합니다. 다음에는 두세 사람에게 하고 다음엔 전교회에 말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는데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을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고 껴안아 주어야 하 는것입니다. 그 적은 자를, 마음 아파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사랑해 주라는 것 입니다. 용서를 끝없이 해주는데 용서를 받을 만한 약한 자에게는 지도자들이 그만큼 더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작은 교회 하는 목사들이 마음 아파하고 마음 답답해 하고 큰 교회 하는 분들을 보면 마냥 부러워할 때 그 사람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위로 는 커녕 무시해 버리면 안 됩니다. 같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일하는 동역자 들인데 결코 계급사회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자기 사고방식과 주님의 사고방식이 너무나 반대라서 약간 불평조롤 말합니다. "주님,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7번 까지 해야 됩니까?"하니 주님 이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는 "아직 멀었구나. 70번씩 7번이라도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못알아들으니 또 비유를 하십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도 리더십의 개성이 상당히 권위적이고 강하고 생각이 좁고 자기밖에 모릅니다. 주님이 돌아가신 후 약 30년 동안 복음 사역할 때도 자기 성격이 남아 있어서 무척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를 보면 지도자들한테 자기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지를 쓴 것이 5장인데, 거기에 보면 맡기운 자들에게 권위주의로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어 지도자의 삶을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이런 말을 안 했습니다. 알다시피 주님한테 덤벼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30년 사역 후 두드려맞고 배운 것입니 다. 재미있는 것은 12명의 제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끼리 내적인 갈등이 있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그런 문제는 다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해 결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문제를 알기 때문에 요한복음 13장을 보 면 자기가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만찬회를 하시면서 무척 괴로워하셨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제자들 훈련은 다 시켰는데 아직까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 들끼리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놓고 올라갈 수가 없어서 새 계명을 주셨습 니다. "너희들은 나의 증인이 될 지도자들인데 너희끼리 갈등이 있으면 어떻게 하느 냐. 너희가 삐딱하면 사탄이 들어와 너희들 사이를 이간질시킬텐데 그러면 너희는 증 인 역할 할 기회가 없어진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 라. 그렇지 않으면 내게 걱정거리가 생긴다. 너희들이 사랑해서 하나가 되었을 때 다 른 사람들이 보고 과연 너희들이 나의 제자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단다."하시면서 심 각한 리더십의 자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마태복음 28장에 가서 소위 말 하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내리시면서 제자들한테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마태 복음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마태복음은 사도행전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3.사도행전의 지도자 (1)베드로
사도행전은 예수를 안 사람들이 성령 세례를 받은 후 예수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인 데 그분들이 증인이 되는 과정을 보면 성령 충만을 받아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됩니다. 2장에 보면 주님의 수제자 되는 베드로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는 완전히 변화된 사 람이 되어 설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몇천 명 앞에서 설교하는 것을 보고 "저들이 술먹었구나, 저들이 이상하다."고 조롱하는데 설교 내용을 들으니 더욱 기가 막힙니다. 베드로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인데 올라서서 하는 소리가 '우리는 술취한 게 아니 다. 유대인들이여'하면서 요엘서 2장 28절 이하, 시편16편을 인용합니다. "시편 16편 8절의 그 말씀이 누군지 아느냐. 그분이 예수라는 분이시다." 그러면서 "저쪽에 다윗 무덤이 있지. 다윗 무덤은 너희들이 해마다 제사지내러 가지 않느냐. 50일 전에는 거 기에 예수라는 분이 계셨다. 50일 전에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건 이 조 그만 동네인 예루살렘에선 다 아는 얘기가 아니냐.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느냐? 너희들 이 듣고 다니는 시편 16편 말씀인 저 무덤을 두고 얘기하는 것이다. 다윗의 뼈가 아직 거기 있지 않느냐."베드로가 논리적으로 설교를 하니 이 사람들의 마음이 찔려 너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말에 3 천명이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떡을 떼고 예배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3천명의 남자만 회개했다고 가정하면 하루아침에 교인이 5,6천명이 모이는 교회의 지 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3장의 내용은 조그만 마을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인구도 많지 않으니까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이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그분들에게 능력이 있는 줄 아는 동네 사람들은 그냥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손만 대기만 하면 병이 낫고 기적이 일어났습니 다. 4장에는 병고친 얘기, 표적이 일어난 얘기가 계속 나오고 은혜받은 바나바가 등장 하며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건을 통해 더욱 힘있는 지도자가 된 베드로의 얘 기가 나옵니다. 당시 베드로는 보통 힘이 있는 지도자가 아니었기 대문에 이분 지나가 는 곳의 그림자만 밟아도 나을 것 같다면 그림자만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 니다. 이런 상태의 예루살렘 교회는, 우리나라 교회하고 비슷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 교인이 많아지다 보니 여러 가지 파도 많이 생겼습니다. 헬라인,유대인,이방 인이 들어가 있고, 돈많은 사람, 돈없는 사람 등 교회안이 복잡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교회 조직을 구성하게 됩니다. 집사를 7사람 뽑는데 전부 이방 인입니다. 이 교회가 그때부터 지방색이 있었고 소위 민족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유 대인들은 전부 다 높은 사람들이고 집사들은 이방인이라 인종 갈등이 있었으며 또 계 급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일하는 것도 완전히 갈라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만 전념하고, 이방인들은 교회 청소하고 연보 걷는 등 잡동사니 일만 하도록 하였습니다. 교회는 커졌지만 그 안에 계급 차이가 있고 권위주의가 들어 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 했습니다. 점차 교회가 썩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12제자, 120문도, 500여명에게 하신 "너희들이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는 이 말씀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의 증인이 되라는 것까지만 기억하고는 다 자기 교회를크 게 하는데만 신경을 썼습니다. 이 사람들이 복음을 들고 사마리아로 가야 되는데 교회 의 힘이 커지고 권위가 생기고 능력이 나타나니까 나갈 생각은 안하고 "여기가 좋습니 다."하고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몹시 답답해서 기도중에 알려주어 도 이분들이 알지 못하니 주님이 당분간 이들을 안쓰는 방법으로 바꾸십니다. 지도자 들이 분명히 말씀 전하고 기도한다고 해놓고 아무것도 안 하니까 새 사람을 등장시키 는데 그가 바로 6장 8절에 나오는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집사입니다. 그는 그 조직 안에서 설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7 장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설교할 수 없는 평신도 집사지만 성령 충만해서 그 무서운 사람들 앞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얼마나 멋 있게 설교를 합니까? 8장에 보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완전히 어두워져서 안에서 싸움을 자 리싸움만 하고 있으니 보다 못한 하나님은 이들이 아끼는 스데반의 피를 흘리게 하는 데 그래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스데반이 피를 흘린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게 해서 주 님은 지도자들을 강제로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다 흩어졌는데 사도들은 두드려맞으면서도 권력을 놓기 싫어서 그냥 남 아 있습니다. 여기서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였다는 소식 을 듣게 되자 그곳도 복음을 받았느냐고 하면서 놀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이들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지위가 높아지고 몸이 편하고 대접받고 영광받으면 다 잊 게 돼있습니다. 환경 때문에 사람이 변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 라함을 쓰시려고 환경을 바꾸게 하셨고 바벧탑으로 사람들이 점점 높아지니까 환경을 낮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교회를 크게 하려고 욕심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커지면 하나 님의 축복이라고 하지만 어떤 때는 축복이 아닙니다. 목이 곧아지고 교만해지는 게 축 복이 아닙니다. 높이 올라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크게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소 위 교회성장학에 문제가 상당히 많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신학자들도 교회성장을 재고 해 보자고 합니다.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과거 20~30년 동안 교회성 장학 때문에 특히 남미 같은 곳은 엉터리 교인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교회성장이 물질 위주로, 성공 위주로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공이란 말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5절부터는 흩어진 사람들의 행적이 나오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빌립입니다.빌립 역 시 전도도 못하고 말씀도 못전하고 청소나 허드렛일이나 해야 하는 집사인데 하나님께 서 강제로 보내시니까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아프리카까지 내려가길 원하시는데 지도자들이 내려가지 않으니까 에티오피아의 내시를 빌립이 있는 근방에다 보냅니다. 이사야 53장을 읽고 잇는 내시에게 빌립이 다가가서 그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해줍니다. 9장부터는 하나님게서 사도 바울을 쓰시는 내용입니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을 비교 해 보면 나름대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바울 선생은 더욱 기막힌 사람입니다. 우선 베드로는 주님이 초창기 때부터 데리고 다니면서 훈련시킨 사람입니다. 사도 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자꾸 힘만 키우려는 지도자로 변질이 돼버렸습니 다. 그러니까 주님은 '안되겠다. 이 사람은 눈의 각도가 한 동네에만 국한되어 있는 사람이구나. 적어도 눈의 각도가 세계를 보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럴려면 제대로 교육 받은 사람이 필요하다.'해서 뽑은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난 후의 바울의 심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올라가다가 거기서 자기가 완전히 예수쟁이가 돼버렸으니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친구들한테 얼마나 민망스럽겠습니까. 배반해도 보통 배반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창피해서 예루살렘으로 내려올 수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예루살렘으로 내려갈려고 하니 교회에 있는 높은 분들은 바울이 옛날에 예수쟁이를 잡으러 찾아다니던 사람인데 갑자기 예수 믿는다고해도 믿어주지 않을테고, 지금 오도 가도 못하는 입장이 돼버렸습니다. 예수는 만났지만 인간적으로는 참 외로운 사람이 돼버렸습니다. 그렇게 날고 기던다사람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알았다 하 시고 바울을 3년 동안 사막 한가운데로 보내 훈련시키십니다. 그는 3년 동안 사막에서 주님과 대화를 한 뒤 너무나 사람이 그립고 고향이 그리워 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바울이 돌아와도 친구가 없고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다 쳐다봅니다. 전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할 하나님의 종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 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종들이 볼 때는 영안이 막혀 보 지 못하기 때문에 바울을 아주 우습게 여겼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중에도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얼 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교계에서는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데 거기에 하나님의 사람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항상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영의 사 람들은 영적인 감수성이 많아야 됩니다 누구를 갑자기 만나게 될 때도 '주님, 이 사람 왜 만나게 하십니까'하고 영적인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한걸음 걸어가는 것도 다 그분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분이 만나라고 해서 만나는 것이고,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모든 것이 영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그분의 시간입니다. 하여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바울에게 긍휼한 자의 리더십의 자질에 대해 보여주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베드로를 만나게 해주려 고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과거에 그의 동료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죽이려 하기 때 문에 도망을 갔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단지 15일밖에 못 있었으며 다소로 도망가서 10년 동안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10장을 보십시오.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이 대구라면 인천쯤 되는 곳입니다. 거기는 해변가이고 이태리하고 가깝기 때문에 로마 군대가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정략적 으로 뛰어나시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이방인을 보내셨습니다. 그리 고 올라가서 복음만 전하면 그들은 배를 타고 자기 나라에 돌아갈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베드로에게 복음 전하라고 일을 하나 주셨는데 영안이 어두워서 몰랐습니 다. 안 되겠다 싶어서 주님은 베드로를 욥바까지 보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욥바에 가있었지만 자기가 왜 욥바까지 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까 주님은 '네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내가 알도록 너에게 환상을 보여주겠 다.'하고 3번이나 보여줍니다. 내용은 이방인에게 전도하라는 환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가 환상을 봐도 모를거라는 것을 아시고 미리 고넬료에게도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환상이 끝난 후 베들로가 이상히 여기고 있는데 누가 문을 똑 똑 두드려 나가보니 로마 군인들이 가자고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따라갔습 니다. 선교하러 간 게 아니라 선교를 당했습니다. 하룻밤 자고 가이사랴에 올라가서 선교집회를 멋있게 하셨습니다. 34절을 보면 고넬료 집에 가서 예수가 누구란 것을 설교하고, 44절에는 선교가 끝 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 언급되는데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 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부어 주심을 인하여 너무도 놀랐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베드로와 같이 갔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방언하고 성령충만 한 사건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우리만 받는것을 너희가 받느냐."면서 굉장히 언짢아 합니다. 이들에게는 소위 내나라, 내 민족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이 끝난 후 선교 보고하러 예루살렘으로 막 달려갑니다. 그래서 선교 보고하는 장면이 11장입니다. 15절부터 보고를 하는데 "내가 말을 시작할 때 성 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 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언제 하신 것입니까? 사도행전 1장 5절에 주님이 말 씀하셨습니다. 이때는 그 말씀을 한쪽 귀로 흘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가이사랴 지방에 가서 이방인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더니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더라 하는 것 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늦은 사람입니까? 지도자가 늦으면 아랫사람이 고생합니다. 지도자는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받아 서 두는 감수성이 있어야 하는데 감수성이 둔한 지도자들에게는 교인들에게 문제가 생 깁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사건까지만 베드로를 쓰시고는 더이상 안 쓰십니다. 17절에서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것과 같은 선물 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이 말은 무슨 뜻입니 까? 이때까지 오순절의 성령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전유물로 알고 생각했는데 내가 가 이사랴에 가서 이방인들이 성령받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속은 씁씁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덤비겠느냐 이 말입니다. 베드로 생각에 기분이 몹시 언짢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유대인의 전유물 로 생각했다고 하니 얼마나 생각이 좁은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면 18절에 소위 유대인 지도자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했다고 했습니다. 진짜 기뻤으면 할렐루야 했을텐데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이 이루어졌으니 속으로는 싫지만 겉으로는 영광돌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한국 교회가 "마지막 때다"하면서 어디다 제일 돈을 많이 쓰는지 아십니까? 교회 건물 짓는데 제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주님이 내일 모레 오신다는데 왜 건물 짓는 데 돈을 씁니까? 교회도 아주 일류로 짓습니다. 그러니 일반 사람들이 '마지막 때다. 예수 믿어라.'해도 교인들 하는 것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왜 예루살 렘 교회처럼 계속 힘만 키웁니까?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 국내에서, 국외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이 남이 하니까 하 는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사를 20명이나 보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주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보에 선교사 명단이 나옵니 다. 그 이름들이 다른 교회에 가면 또 있고, 그리고 주보에 보면 누가 십일조를 냈고 누가 무슨 헌금을 했고 그 내용이 다 적혀 있습니다. 무슨 뜻으로 적는 겁니까? 돈 많 이 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 다 경쟁시키는 것 아닙니까? 또 교인들도 자기 이름이 안 나오면 이제는 섭섭하다고 합니다. 그건 교인 잘못이 아닙니다. 지도자들이 훈련을 잘못시켜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리더십의 문제입니다. 18절까지가 사도행전의 분수령인데 여기서 베드로의 사역이 끝이 납니다.
(2)사도 바울 사도행전 11장 19절 부터 새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분이 누구입니가? 바로 사도 바 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높은 분들이 안디옥에 복음 전할 사람을 보내야 하는데 아무 도 안 갈려고 해서 바나바를 보냅니다. 바나바는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세계 선교를 위해 쓰시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나바 는 하루 아침에 안디옥으로 가서 그곳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사람들 은 아주 뜨거웠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바나바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바나바야, 네 가 여기서 목회를 해야 하는데 너는 제한이 있다. 너는 10년 전에 다소라는곳으로 간 바울을 알고 있지. 그와 같이 일을 해야 하느니라"고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 다. 바나바는 바울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잘못하면 교회의 지도자 자리를 뺏기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바나바는 자리쯤은 뺏겨도 괜찮다는 아름다운 마음 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리를 사랑한 게 아니라 복음을 사랑한 인격적 으로 갖춰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다소에 가니 10년 전에 만났던 바울이 있는데 완전히 폐인이 다 되었습니 다. 하나님이 쓰려고 하는, 전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이 초라한 모 습으로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세계를 뒤집어놓 는 사적인 만남이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더러 같이 안디옥으로 가서 목회하자고 했을 때 바울은 혼자서 별별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바나바는 10년 전에 자기가 예루살렘에 서 가장 외로웠을 때 그를 껴안아 주고 위로하여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 바을 믿고 안디옥을 내려갑니다. 성경에 바나바 이름이 먼저 나오지만, 13장 중간쯤 가면 이름의 순서가 바뀝니다. 바울이 먼저 나오고 바나바 이름이 뒤로 나오기 시작합 니다. 즉 리더십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바울이 나보다 낫구나.'하고 그대로 따랐습 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이 두 사람은 1차, 2차 선교 여행하고 나중 에는 스페인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이 두사람으로 해서 중동에서부터 남부 유럽이 복 음화됐습니다. 그러나 남부는 복음화됐지만 북부까지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자 북쪽에 있는 바이킹 민족을 밑으로 내려보내서 남쪽에 있는 그리스도 여자들을 강제로 데리고 올라가게 하 셨습니다. 복음의 역사를 보면, 전달이 안 되면 그리스도인의 아픔을 통해서도 전파됩 니다. 주후 500~1,000년 사이는 가톨릭이 지배하던 시대인데 이때 가톨릭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패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마틴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거기에 예수 중심으로 하는 청교도 사람들이 나타나 가톨릭 에 핍박을 받습니다. 당시 유럽은 어느 정도 복음화됐으므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야 된는데 유럽에서 머물러 있으니 복음을 들고 나가려면 또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톨릭 을 통하여 청교도들을 핍박하여 북미대륙으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정신차려 지금부터 100~200년 전부터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뜨겁 게 전하여 동쪽 끝에 있는 우리나라까지 오게 되었고 우리가 예수님의 자녀가 된것입 니다. 4.한국 교회의 지도자의 할 일 전세계 사람들이 말하길 복음이 발상지인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유럽이 초토화되 고 , 미국도 지금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가 있고, 뜨거운 곳은 남미와 아시아가 뜨겁고 아프리카가 뜨겁다고 합니다. 세계가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만 19C에는 영국 전세계를 쥐고 있으면서 선교의 주종국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것은 복음을 전하 기 위하여 영국이 뜨거웠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통해서 전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영국 사람들 중 복음주의 사람은 5%밖에 안 됩니다. 우리나라도 언 제, 그렇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같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 당시 영국이 세계 복음을 주도할 때 7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 영적 으로 왕성했습니다. 둘째, 신학자도 많았고 신학교도 많았습니다. 셋째, 교회 숫자가 많았고 또 뜨거웠고 복음주의였습니다. 넷째, 사회풍조가 기독교를 인정했고 또 도와 주는 사회였습니다. 다섯째, 정치적으로도 도와주었고 많은 정치인들이 기독교인이었 습니다. 여섯째, 교육적으로도 신학교가 많았고 교육받은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일곱째, 경제적으로도 부유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 10,20년 사이에 무척 부유해져서 지금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교학자들이 말하길 세계 선교의 측면에서 볼 때 영국과 유럽은 밤9시이 고, 미국은 오후 2시인데, 한국은 새벽 7시라고 합니다. 이렇게 선교적인 면에서 한국 에 대한 기대가 참 높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지금 실정이 영국에서 갖고 있었던 7가 지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교신학자들은 이런 말은 합니다. 영국이 19C의 선교 주종국이었는데, 20C말 에는 어느 나라일까 하고 얘기할 때 어떤 사람은 남미의 브라질 혹은 아르헨티나, 아 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아닐까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신교를 믿는 숫자 만도 우리의 2배입니다. 우리가 천만 기독교인이라면 그들은 2천만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7가지 요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인도도 우리보다 그리스도인 숫자가 몇 배 나 많습니다. 그러나 인도도 7가지 요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20C의 선교 종주국은 한국일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지금 세계의 선교사들은 15만명이 된다고 합니다. 북미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8만 5천명 , 유럽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3만 5천명, 제3세계에서 파송된 분들이 3만명인 데 우리나라에서는 부부를 포함하여 천 6백명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회 숫자는 전국적으로 4만 5천개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한인 교회가 2,000~2,200개, 소련도 지금 50개라고 하는데 금년 말에는 백몇 개가 될거라고 합니다. 교회 성장의 속도를 따지면 우리나라는 세계 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인은 전국민의 25%라 하고, 세계 20대 최대 대형교회 중에 우리나라 교회가 6~8개가 있습니다만 선교사를 내보내는 순서를 보면 55등입니다. 인도네시아보다 적고 필리핀 보다 적고, 태국이나 일본보다 선교사의 숫자는 적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내 적으로 싸움만 하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세계의 상황을 보면, 전세계의 언어가 6,000개라고 합니다. 그중 성경이 신약과 구 약으로 완역된 언어는 260개밖에 안 됩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그 리고 신약만 번역된 것이 580개 언어이고, 일부만 번역된 쪽복음 번역이 920개입니다. 지금도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 지역의 성경을 번역하고 있는데 그 언어가 1,667개라 고 합니다. 그래서 이걸 다합하면 3천개의 언어는 번역에 손도 못대고 있는 형편입니 다. 부족 숫자로 보면 24,000여개 부족이 아직까지 성경이 없는 부족이라는 것입니다. 전세계 인구 53억 중 22억이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대부분이 모슬렘입니다. 다른 종교는 모르지만 모슬렘은 아브라함의 자 녀들입니다. 이스마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세계 선교는 모슬렘에다 집중을 해야 합 니다. 선교신학자인 짐 몽고메리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부터 1990년도까지 전세계 교회는 250만 개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2,000년까지를 신학자들은 상 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10년 동안 복음이 타민족까지 전파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750만 개는 개척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1990년 동안 250만 개의 교회를 세웠는데 10년 동안 750만 개의 교회를 세우는 일은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님만으로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소위 자비량 선교사들을 많이 파송해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의 할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꾼들, 많은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입니다. 아무나 선교사롤 파송할 수 없는 일이고 보면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 니다. 지금 전세계 크리스챤 지도자들은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 다.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는 우리 주님 오실 때가 멀지 않은 이때에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주님 오실 것을 대비하자고 하여 전세계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모임이 흐지부지 됐다가 15년만에 마닐라에서 다시 모여 각 나라 가 정신을 차려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방법을 연구하자는 A.D.2,000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의 대회를 어디서 할 것인가 하고 의논하다가 결정한 곳이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94년 6월에 열릴 예정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88년 서울에서 일어났던 올림픽의 불길 같이 성령의 불길이 서울에서 일어났으면 하고 큰 기대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나라를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살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고 진단해 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교회는 개교회 위주입 니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우리는 범교회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 도를 나의 구주로 생각하고, 그분의 동정녀 탄생을 믿고, 그분의 육적인 부활을 믿고, 그분의 육적인 재림을 믿고, 그분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시고,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시고, 나의 구주심을 믿어 우리들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개교단주의에서 범교단주의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뭉쳐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은 세속주의 사고방식에서 예수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권위주의 사고방식에서 민주주의 사고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분열주의 사고방 식에서 연합주의 사고방식으로 예수 안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안 되면 우리 한국 교회는 큰일납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처럼 대형 교회가 많은 우리나라에 지도자들 의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예루살렘에서 촛대를 옮겼듯이 우리 한국 교회에서 촛대 를 옮길 가능성이 있음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계속 그렇게 흘러 왔습 니다. 우리는 물량주의를 제거하고 후세를 위해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 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서로서로 경쟁 시키는 제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이 30대, 40대, 50대가 되어 이들이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장 로가 됐을 때 얼마나 싸움을 할까 생각을 하면 가슴이 뜨끔합니다. 우리도 이제는 세 계를 향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의 눈이 세계로 향할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흩어지는 교회를 만들라고 요구하십니다. 결론 창세기 12장에 보면 바벧탑 사건이 나오는데, 한 사람이 커지면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흩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대형교회를 꿈꾸 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만 목사란 영어로 쉐퍼드(shepard), 즉 목자입니다. 목자는 자기의 양들과 맨투맨(man to man)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대화하는 사 람들입니다. 항상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하는데 300명만 넘어서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 니다. 교인이 500명만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목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자기도 모르게 변질돼 버립니다. 자기 왕국이 커지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 밑에 많은 목사님을 거느리게 되는데 그들이 자기 명령을 좇는 목사로만 생각하지 자기의 동역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커지게 되면 교인들을 나누어서 교회를 하나 더 세워 주십시오. 그 교회 지을 때까지 재정적으로 도와주고 기도해 주고 장로, 집사 붙여줘서 그 교회가커 가도록 키워 주십시오. 그랬다가 그 교회도 커지면 똑똑한 사람 하나 붙여서 또 분가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는 계속해서 많이 퍼집니다. 교회는 내 통제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통제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분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서로서로 도와주고 누가 교회 짓는다고 하면 돈 걷어주고 영적인 지도자들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밑의 전도사를 키워주고 밀어줘야 합니다. 그 정신을 그분한테 주면 그 분도 그 정신 받아서 또 그렇게 합니다. 한국 교회가 살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흩 어지는 교회가 됐을 때 한국 교회는 살아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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