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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문 (原文) 자료 스크랩 10강. 녹취-저주 속의 구원
jtr28114 추천 4 조회 51 15.06.20 15:48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10강. 저주 속의 구원 (창 6:9-22)

 

창 6:9-22=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15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16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우리 서로 인사합시다.

은혜 받는 시간 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렇게 만나게 된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오늘 기도해주신 집사님의 기도가 너무 은혜로웠습니다.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의 마무리를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사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에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맞아요.

예수님이 타자(他者)가 되면 안 됩니다.

나의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 앞에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서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래서 벧엘 광야에 머무는데 거기서 한 돌을 취하여 잘 때 우리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야곱을 부릅니다.

내가 이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니까 야곱이 그럽니다.

진실로 진실로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된다고 그러잖아요.

내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들은 많이 들어서 어쩌면 머리는 커져 있는데 가슴들은 냉냉하단 말이지요.

우리가 성경을 듣고 배우는 것은 어떤 지적 허영심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구절 많이 안다고 그것이 신앙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현재 우리 안에 오셔서

지금 현재 우리와 동행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이야기도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야곱이 벧엘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하겠다고 했는데 야곱은 늘 하나님을 떠나 살았지 야곱이 하나님을 쫓아가지 않았어요.

우리는 생래적(生來的)으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능은 하나님이 싫어요.

이는 의와 거룩이 함께 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면 자꾸 우리의 꿈들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자아확장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세계를 넓혀 가고 내 영역을 키우려는 본성들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 오셔서 우리 영역을 하나씩 빼앗습니다.

우리의 세계를 차압하고 예수의 세계를 넓혀 가고자 하십니다.

 

이게 가나안 전쟁이에요.

우리 안에 옛 사람이라는 가나안 7족속이 있어요.

아담의 본성이에요.

이걸 예수님이 군대 장관이 되셔서 하나씩 정복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입지가 점점 줄어간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렸을 때 땅 따먹기 해 보셨지요?

조금이라도 더 따 먹으려고 손가락을 잡아 당겨 뼘을 늘리고 하잖아요.

한 뼘이라도 더 늘려서 땅을 따먹으려고 애를 쓰잖아요.

 

그러다 저녁 때가 되서 엄마가 찾아옵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따 먹었던 그 땅은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친구랑 땅 따먹기 할 때는 한 뼘이라도 더 따 먹으면 그것이 내게 기쁨이고 그랬는데

저녁 때가 되서 엄마가 부르면 그 땅 따먹기 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니까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그래요.

우리는 눈만 뜨면 내 꿈을 펼쳐라 라는 세상의 소리를 듣습니다.

얼마나 인간들의 그런 갈망이 강했으면 어느 가수가 그런 노래까지 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꿈을 펼치게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우리 속에 들어 오셔서 당신의 꿈을 펼쳐 가십니다.

하나님의 꿈을 우리 안에서 펼쳐 가십니다.

이게 ‘동행’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한다 하시면 그 때 부터 우리에게는 곡(哭)소리가 납니다.

아이쿠 이젠 죽었구나,

이젠 끝났구나.

그런데 그 끝난 것이 슬퍼보여야 하는데 슬프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기쁨 말고 하늘에 있는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었다고 해서 맨 날 열심히 지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줬지요?

그 은혜가 비록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게 하더라도 그 은혜 때문에 노아는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했어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세요?

아니지요,

예수를 믿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잖아요.

그렇지요.

 

똑같아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기쁘고 감사한 것은 무엇으로 그렇게 됩니까?

그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고 이렇게 우리의 만남이 기쁘고 소중하듯이 노아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왔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보면 참 고통스러운 일일지 몰라도 그 은혜가 노아에게 임하니까 노아가 감사함으로 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아서 엉덩이에 피가 흐르고 하는 그런 상황에서 찬송과 기도가 나올 것 같아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거기에서 찬송과 기쁨이 나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덮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그들 속에서 역사를 하기 때문에 찬송과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간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케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가 어떤 시대라고 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눈여겨보아야 하는 두 단어가 나옵니다.

가장 충격적인 말은 11-12절에 보면 ‘패괴’와 '강포'입니다.

 

11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패괴한다’는 것은 ‘썩었다’는 말입니다.

태고 이래로 모든 인간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이 시대에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썩었다는 말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인간들을 예수님께서 한마디로 뭐라 그랬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판다 했습니다.

이건 인간이 본능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잊어버리고 있나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단절을 말합니다.

 

제가 전에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 드렸는데, (그림 설명)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밑에는 우리 인간들이 있습니다.

이 사이에 죄라는 것 때문에 가로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죄인과 화목케 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화목제물이라 그럽니다.

화목 제물이란? 화목케 하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있는 제물입니다.

이를 중보자라고 해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 화목 되는 것이 아니라 화목케 하는 중보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과 화목을 하시는데 그냥 하시는 게 아니고 화목 제물을 통해서 화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교회 갑시다,

그러면 싫어합니다.

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예수 믿고 교회갑시다!

그러면 싫어합니다.

 

그런데 절에 갑시다!

그러면 짜증 안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 안되면 본능적으로 껄끄럽고 두렵습니다.

거부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절 간에 가자는 것은 죄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가면 되니까요.

편하게 생각합니다.

 

이상하게 사람들에게 교회 가자 그러면 짜증을 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은 죄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화목제물로 인해서 해결이 되었어요.

소통하는 길이 생겼기 때문에 껄끄럽지가 않은 것입니다.

 

중요한 애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살다가 속된 말로 비윤리적으로 좀 살았다고 합시다.

그렇게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할 것 같으면 전혀 껄끄러움이 없지요?

 

론 인간적인 양심으론 좀 껄끄러울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이것으로 저주받을 텐데…하는 두려움은 없단 말이지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중보해 주시고 화목케 하는 일을 해주시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예수를 믿게 되면 첫 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 이게 잘 안됩니다.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 오면 한 형제를 알아봐요.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건 기가 막히게 알 수가 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도 복음이 증거되면 그 안에서 친숙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얘기할 때는 항상 하나님과의 화목도 이루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너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

거짓말 하지 마라!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것은 예수를 믿는 성도에요.

인간과 인간은 실제에요.

그래서 성경은 네 형제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상징해요.

교회 안에 모이는 자들은 서로 서로 예수 안에서 화목이 이루어져요.

그래서 안 보면 보고 싶어지고, 만나고 싶어지고, 반갑고 그런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소 닭 보듯이 하면 안 됩니다.

전 그런 사람들은 그 속에 예수가 없다고 봅니다.

예수가 있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노아 시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니까 자기 몸뚱이 챙기는 일만 남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성경에서는 패괴했다, 썩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부터 단절이 되었기 때문에 썩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중매쟁이가 되어서 예수라는 한 신랑을 너희들에게 중매를 해준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중매를 하는가 하면 마귀라는 놈이 하와를 꼬셔서 그 마음을 부패케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부패’란 단어가 지금 노아시대의 ‘패괴’와 같은 말입니다.

죄는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패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죄(罪)’가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단절 시킨 것이라면 ‘의(義)’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우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과 사람을 단절시켰지요?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단절시켰는데 ,

예수님의 십자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이젠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도 차별성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인간적인 차별성이 있을 수가 없어요.

 

세상은 힘의 법으로 다스려지기 때문에 반드시 서열(序列)이 있고 우열(優劣)이 있고 상하(上下)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이 자체가 없어집니다.

모든 인간의 조건은 다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덧 씌웠기 때문입니다.

 

너도 예수의 피로서 구원받았고,

나도 예수의 피로서 구원받았고,

그래서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에수 그리스도의 피만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성도를 대할 때 그 사람의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보시면 안 됩니다.

예수를 거쳐서 그 사람을 보시란 말이지요.

그러면 그와 내가 차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그러잖아요.

교회 안에는 부부지간에도 여보, 당신 하지 말라고요.

교회는 교회로서 부르시는 호칭이 있어요.

집사님이면 집사님, 권사님이면 권사님이라고 하세요.

가정에서 부르는 호칭이 있듯이 교회 안에는 교회 안에서 부르는 호칭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 저의 집사람에게도 교회에서는 저를 목사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목사입니다

목사의 위치에 있을 때는 저의 집사람도 말씀을 들어야 할 위치입니다.

우리 남편이 목사니까 난 다 알지

이러면 혼나는 겁니다.

 

이건 무슨 조폭집단의 위계질서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직분이고 질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직분을 부르세요.

직분은 귀한 거에요.

어쨌든 인간들이 이 노아시대에 패괴했다는 이야기는 결국 인간과 인간의 가치로 얘기를 하니까 우열이 생기고 서열이 생기고 차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모임 자체가 조폭집단이 되는 겁니다.

 

노아 시대가 그랬듯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지위가 그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세상의 사장님은 교회 안에서도 사장님이 되어 버립니다.

어느 교회는 교회 안에서도 자기 동문끼리 모인다고 합니다.

Y대 출신은 Y대 출신끼리 모이고, S대 출신은 S대 출신끼리 모입니다.

무슨 그런 교회가 다 있어요?

그건 교회 아닙니다.

세상 집단입니다.

그런 상태를 노아시대와 마찬가지로 패괴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단어는 ‘강포’입니다.

‘강포’는 쉬운 말로 짐승의 법칙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약탈자’라는 얘긴데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강제로 빼앗는 것입니다.

이게 자본주의 시대를 말하는 거잖아요.

지금 이 시대 세상의 힘은 돈입니다.

돈 있는 자는 돈 없는 자를 억압해요.

 

이번에 서울 가서 강의를 하는데 거기에 참석하신 개그맨 한 분이 지금 이 말씀에 꽂혔습니다.

예전에 유명한 개그맨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방송에 출연을 해요.

 

이 분이 은혜를 받고 몇 달 전 부터 블로그 글도 열심히 본다고 합니다.

메일을 보내서 저와 사귐을 갖고 싶다고 하면서 이 언약을 알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성경을 잘 볼 수 있는지 방법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방법론은 없으니 강의에 참석을 해보라 했습니다.

수학 공식 외우듯이 성경을 보는 방법은 없다고 제가 그랬습니다.

만약에 성경 구절을 보고 어떤 연대기적인 것이나 성경 시대적인 상황을 알려면 방법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얘기해주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건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는 그 분에게 ‘우세요…’ 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깨달아지지 않으면 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안 우는 것은 뭔가 만족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 말고도 성경 말고도 뭔가 만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안 우는 것입니다.

진짜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생길 것 같으면 말씀 놓고 울어야 합니다.

그게 기도란 말입니다.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기도가 안 되는데요’

‘안 되더라도 한 번 해 보세요,

형식적으로라도 교회에 가서 자더라도 한 번 가 보세요.’

그 분이 가서 잠 잘 거면 왜 갑니까 라고 반문을 했지만 가서 자더라도 한 번 해보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형식을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도라는 형식을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형식을 갖고 있다 보면 하나님께서 채울 때가 옵니다.

처음서부터 기도가 그렇게 되던가요?

기도가 뭡니까?

 

우리는 자꾸 기도를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뭔가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얘긴데 자, 보세요.

이방 종교는 내가 신에게 가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주문을 많이 외우는 겁니다.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달라고 한단 말이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내가 뭐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듣는 신앙이라니까요.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자꾸 뭔가를 얘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분에게 ‘들으세요!’ 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듣는 것입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 같지요?

 

내가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말하는 것을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감찰하시는 분인데 내 속에 뭐가 있는지 다 아세요.

우리가 내어 놓는 건 전부 내 욕심이잖아요.

하나님은 그거 안 들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얘기를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얘기 들으라는 것은 말씀 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내 뜻을 알으라는 것입니다.

니 뜻을 내 앞에 와서 관철시키려 하지 말고 내 뜻이 무엇인지 좀 알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자꾸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많은 말을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고

조용히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주시고 들려지게 해주십니다.

제가 요즘 기도회를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자꾸 생깁니다.

여러분들 보니까 얼굴빛이 안 좋아지시는데 이거 큰 일입니다.

주일날 한 번 모이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중간에 또 모이라고?

그런 얼굴이시네요.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내가 복음을 알아도 삶이 없으면 가짜에요.

아이에게 연장을 줘도 그 연장을 다룰 수 있는 재능이 있어야 그 연장을 다루잖아요.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도 그 말씀을 듣고 그것을 내 삶에 적용을 시키고 하는 것, 이런 것이 하나의 경건의 훈련입니다.

성화주의자처럼 말씀대로 살아서 내가 거룩해지고 하는 그런 훈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보세요.

노아 시대는 극명하게 두 부류가 나타나잖아요.

노아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나니까 그 은혜가 노아와 함께 동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노아는 다른 삶을 살더란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본능적으로 살았는데 노아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더란 말이지요.

 

죄인이 본능적으로 사는 것은 죄 짓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지니까 자기 육신의 본능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가는 걸로 나타납니다.

그 뜻은 심판 속에서 구원 얻는 일을 하게 하더란 말이지요.

 

제가 주보 칼럼에 이걸 써놨는데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참 안타까운 게 왜 주보는 전부 접은 다음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는지 모르겠어요.

이 칼럼을 고심해서 쓰는데 이걸 모아서 두고 보면 한 편의 설교가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버리는지 모르겠어요.

뭘 줘도 몰라요.

 

저는 과거에 은혜를 받을 때,

지금 생각하면 그게 은혜가 아니지만 신앙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과정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 개그맨에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 현재 집사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확 열어 주면 집사님이 그걸 감당을 못합니다.

모든 생명은 자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도 마찬가지란 말이지요.

 

도 바울이 고린도서 13장에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어린아이 같을 때는 어린아이 같은 말을 하고, 어린 아이 생각을 하고,

그러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를 버렸다고 하잖아요.

그러듯이 그 과정이 있다니까요.

율법 아래에선 율법 아래에서 주는 은혜가 있어요.

여러분 율법 생활할 때 기쁨 없었어요?

저는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기쁨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내 신앙의 경륜에 따라 깊어지고 넓어지고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지경을 넓히라고 늘 말하잖아요.

 

내 신앙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이게 협소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나와 색깔이 다르면 전부 이단으로 내쳐버리게 됩니다.

이건 아니에요.

 

우리는 유한(有限)에 속해 있고 우리가 신앙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한(無限)의 것을 추구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역사 속에서 묵시로 산다 그러잖아요.

역사는 묵시를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소리는 하지 말란 말이지요.

나는 이런 식으로 은혜를 받았고,

저 사람은 저런 식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하지 않는 한은 그 사람을 내치면 안 된다니까요.

제발 색깔 맞추기 좀 하지 마시라니까요!

 

사도 바울같이 내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대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대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대하고,

율법 없는 자에겐 율법 없는 자처럼 대하고…

제가 이걸 보자기 신앙이라고 하잖아요.

 

보자기는 뭐에요?

보자기는 어떤 것이든 다 감쌀 수 있잖아요.

동그란 것이든 네모만 것이든 삼각형이든 다 감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신앙이 만약에 세모라는 틀을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세모 모양 아니면 담아내질 못합니다.

동그란 것도 못 담아내고 네모도 못 담아내요.

오로지 세모만 담을 수가 있어요.

그런 신앙은 가난한 신앙입니다.

 

리 어렸을 때 엄마가 사탕을 사와서 형은 파란 거 주고 나에겐 빨간 것을 주면 괜히 형이 가진 파란 게 더 맛있는 거 같죠?

그게 어린 아이라니까요.

어른이 되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어렸을 때는 어린 아이 같은 생각을 했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를 버렸다고 합니다.

버렸다는 말은 다 포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어떤 사람은 발목에 차이고, 어떤 사람은 무릎에 차이고, 어떤 사람은 허리에 차이고, 어떤 사람을 창일한 사람이 있잖아요.

언제까지 발목에 채이는 그것으로 다닐 거에요?

푹 빠져야죠.

물에 푹 빠지면 그 때부터는 내 힘으로 다니는 게 아니라 물의 힘으로 가게 된다니까요.

 

제가 어렸을 때 바닷가에 살아서 수영을 참 잘합니다.

몇 년 전에 교회 식구들과 바닷가에 갔다가 어느 집사님 때문에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영덕 출신인 그 집사님은 당연히 수영을 할 줄 알았는데 세상에 수영을 전혀 못하는 겁니다.

파도가 한 번 치니까 홀라당 넘어지는 바람에 제가 그 집사님을 끄집어내느라 아주 혼이 났었습니다.

바다에서 보면 수영을 하는 사람은 그냥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면서 떠 있습니다.

크게 안 저어도 됩니다.

그런데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온 힘으로 휘젓습니다.

그러면 빠져 죽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그래요.

뭐 그렇게 크게 할 것 없어요.

그저 사소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고백을 드렸잖아요.

과거에 제가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오셨구나…하나님이 나오게 하셔서 오셨구나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은 세상에 세상에 어쩌자고 이 바쁜 시기에 교회를 다 나왔을까…세상에 세상에…

부산에서 여기가 어디라고 오셨을까

하나님께서 그 마음들을 움직여 손길과 발길을 옮긴 그 모습이 너무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감사가 됩니다.

 

사소한 것 속에서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근데 우린 이러한 것을 놓치고 살아요.

이런 것을 놓치고 산다는 것은 곧 노아시대와 같이 심령들이 강포하고 패괴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어 있으니까 그런 거에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감사와 찬송이 사라져요.

감사와 찬송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에요.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면 결국 내 몸뚱이 챙기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까, 어떻게 하면 편할까, 그 생각 밖에 없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게 된단 말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결국 그 방주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노아에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항상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실 때에 어떤 인물을 볼 때에 항상 거기서 이중 계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5장 29절에 노아를 뭐라 그러셨나요?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는 저주받은 땅에서 안식을 주는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받은 땅에 노아를 안식을 주는 사람으로 주셨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저주받은 세상 속에 안식을 주시려고 보내신 분이 있습니다.

누구에요?

예수님이죠?

 

노아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노아가 예수님을 상징하고 저주받은 땅을 안식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노아를 주셨다면 노아가 한 일이 곧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되겠지요?

그러면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똑같은 일인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노아가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 방주는 낚시하고 노는 유람선이 아니죠?

심판 속에서 구원받는 방주입니다.

노아도 하나님의 저주에서 다 죽어야 될 자인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서 방주 안에 밀어 넣어서 태웠습니다.

 

노아 스스로 방주에 들어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그렇게 안 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 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노아는 메시야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럼 노아가 저주 속에서 방주로 구원을 받은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면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저주를 풀어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야 할 그 저주를 예수님에게 몽땅 부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늘이 깜깜해진 것입니다.

하나님도 외면을 했다니까요.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 속에 태워 놓고 저주의 비를 쏟아 부으십니다.

저주의 비를 쏟을 때 방주가 그 비를 몽땅 맞는 것입니다.

방주 안의 노아는 안위하고…안식을 합니다.

그걸 그대로 신약으로 당기면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홀로 다 담당하시고 우리는 그 예수 안에서 평안을 얻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시는 것이 하늘의 평강을 주시는 일입니다.

평강이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화목 되는 것입니다.

평강을 다른 말로 화목으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나타나셔서 하늘의 평강을 주는데 그 하늘의 평강이 무슨 근거로 주어지는지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 죽음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평강이 주어진다고 얘기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노아가 방주 안에서 두려워하면서 살았겠어요?

아니면 평안하게 살았을까요?

평안하게 살았겠지요.

 

그러면 노아가 얻은 평안은 결국 방주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지요.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자는 다 구원을 받았듯이 지금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노아의 가족이 구원을 받지요?

전부 몇 명입니까?

여덟 명이죠.

 

8 이라는 이 여덟의 의미는 항상 묵시에 속한 것입니다.

방주 안에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 들어갔다는 것은 그 여덟 명은 온 인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 모든 무리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지금 노아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장차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누구의 가족만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의 가족만 구원을 받지요!

예수에게 속한 사람이 예수의 가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를 보고 너와 나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한 ‘권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나온 사람들이 노아의 여덟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식구를 구하기 위해서 방주를 줬듯이 우리에겐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7절의 말씀처럼

창세전에 어린 양에 생명책에 녹명된 그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을 자기 백성들에게 믿어지고 깨달아지고 그것이 자기화 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 주셨고,

그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예수가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나를 위해서 살아난 예수가 되더란 말입니다.

 

성령이 오니까 예수가 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예수를 남 구경하듯이 하지 마세요.

저 쪽에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지 마세요.

그건 구약입니다.

율법에서는 그랬습니다.

율법에선 그러잖아요.

내가 애굽에서 너희를 데려 나올 때는 남편이 되어 너희들 손을 잡고 왔는데 그들이 그 언약 속에 못 머물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내가 너희들과 새 언약을 이루겠다고 합니다.

그 새 언약은 내가 너희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육체로 오신 예수를 알아야 되고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는 옛 남편과 같아요.

제자들이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삼 년 동안 따라 다녀도 결국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했어요.

자기 육신에 위협이 처하면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그랬잖아요.

 

그게 구약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는 절대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성신이 ‘에피 성령’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우리 가운데 오는 성신은 없습니다.

성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인 구약에서는 바깥에서 계속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와줘도 결국엔 안 되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신약에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파고 들어 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뚫고 들어 오셨단 말입니다.

나와 상관없이 어느 날 들어 오셔서 그 때 부터 예수님이 내 인생을 책임지시는 겁니다.

우리 속에 들어 온 것은 내가 독자적으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내 것으로 내가 네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겁니다.

이게 새 언약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절대 실패가 안 됩니다.

 

지금 이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이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의 모든 세계가 패괴하고 강포했다 했잖아요.

다시 말해서 다 썩어 버리고 모두 하나님을 떠난 상태였는데,

그 때 노아에게는 은혜를 주셔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노아는 그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을 하니까 노아는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되더라는 겁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똑 같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오니까 우리가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더란 말이지요.

노아가 그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고 하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안 했다는 게 아닙니다.

노아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했습니다.

단 하나,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주고 나니까 노아가 그런 삶을 살면서도 다른 일을 하나 하더란 말입니다.

그게 방주 짓는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니까 우리도 세상 사람과 사는 방식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여러분 직장생활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다른 것이 예수를 믿고 살더란 말입니다.

 

그 예수 믿기가 우리 힘으로 됩니까?

왜 우리가 예수를 믿는가 하면,

그 예수가 우리 속에 들어 오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다는 그 믿음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믿어지게 해주시기 때문에 믿는 겁니다.

 

노아가 방주를 자기 힘으로 지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지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짓게 했지요.

세상에 어떤 사람은 이 방주 짓는 얘기를 가지고 얼마나 웃긴 얘기를 하는지

노아가 목공들 일당 줘 가면서 지었다는 겁니다.

제가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방주는 남이 짓는 게 아닙니다.

예수는 남의 예수를 가지고 내가 덤으로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흔히들 아버지가 예수를 믿으면 아들, 딸도 자동적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그런 얘기를 하기도 하지요.

 

예수 믿는 네가 천국 갈 때 나는 니 바짓가랭이 붙잡고 간다고요

아니에요.

아버지가 목사기 때문에 자식들이 예수 잘 믿는다,

그런 거 없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아들들 보세요.

아니란 말이지요.

 

이 땅에서 부모와 자식과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를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 알으라고 부교재 주신 것입니다.

가정이라는 제도 자체도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신 제도에요.

그래서 한 집 안 속에서도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음이라는 것은 독자적이고 개개인 적인 것이지 어떤 무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으로 연합하여 구원하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그 몸의 지체로 불러주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혈육에 속한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체로 붙여주셔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가족 중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있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내치지 말고 여러분 속에서 긍휼의 마음이 나와야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 가족이 믿지 않는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언제까지 이렇게 두실 것인지 내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줬듯이 내 가족에게도 그 복음이 들려지도록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셔야죠.

그런 마음을 가지시란 말입니다.

우리는 아는 자잖아요.

저들은 모르잖아요.

 

여러분이 자녀들의 공부를 가르칠 때 그 아이가 문제를 못 풀면 누가 답답합니까?

엄마도 수학 문제를 모르고 아이도 그 문제를 모를 때 엄마가 답답할까요?

답답하지 않아요.

나는 아는데 그 아이가 모르면 그 때 답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항상 모르는 사람에 대해 구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답답한 심령 때문에 엄마는 그 아이가 알아갈 때 까지 훈육하잖아요. 교육하잖아요.

우리 신앙도 만찬가지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노아 가족 여덟 식구 타는 그 방주를 뭘 120년 동안 만들 게 있어요?

한 달 정도 뚝딱 만들면 되지

그러고 하나님께서 그 어떤 저주 속에서도 구원하실 능력이 계신 분인데 뭘 굳이 방주를 만들게 하십니까?

심판으로 쓸어 버릴 때 잠시 끌어 올려 놨다가 다시 내려놔도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방법을 안 쓰고 120년 동안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들이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제가 제 장인 어른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가 볼 때 그 분은 교회는 다녔는데 예수는 안 믿었습니다.

장모님이 하도 가자고 하니까 마지못해 교회는 다녔지만 예수는 안 믿은 겁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눈 밭에서 미끄러져서 쓰러진 다음 뇌출혈로 인해서 의식불명 상태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몇 달 동안 계시게 됐습니다.

그 당시 제가 가슴이 아픈 게 그거에요.

 

아버님은 복음도 모르고 그러니 얘기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명절 때 가도 그냥 통상적인 사위와 장인 관계를 벗어나지 않고 사무적으로 만나곤 했는데 막상 그런 일이 닥치고 나니까 목사 입장에서 굉장히 가슴이 아픈 겁니다.

왜 진작 살아계실 때 복음을 얘기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때부터는 하나님 앞에 울어야지요.

‘저렇게 데려가시면 안 되는데 하나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강렬한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집 사람에게 아버님 저렇게 식물 인간으로 있다 할지라도 청각은 있으니까 내가 가서 얘기를 해야 겠다 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처남이 병원에 있던 아버님을 자기가 있는 요양원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이상하게 처남도 아버지를 병원에 두는 것 보다 요양원에다가 모셔서 자기가 간호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 날 옮겨 놨는데 저도 그 날 아버님을 찾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요양원에 옮겨 논 그 날 의식이 잠깐 돌아 오신 거에요.

그래서 제가 약 한 시간 정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 말을 다 알아 들으시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의식불명이 오고 쇼크가 와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그렇게 병원으로 돌아간 얼마 후에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전 그걸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식 없던 그 분을 잠깐 복음 듣게 하기 위해서 요양 병원에 보내놓고 그 때를 맞춰 제가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고 다시 의식불명 된 다음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전 장인 어른이 구원받았다고 보는 겁니다.

복음을 들었구나,

세상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해나가시는구나..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복음 모르는 사람들을 배척해선 안 됩니다.

그 분들을 위해서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다가가면 싫어할 수도 있어요.

우셔야 합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을 때 그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하나님, 우리 여덟 식구 구원하려고 왜 이렇게 큰 방주를 짓습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그러셨을 겁니다.

‘이 방주에 탈 인원이 있느니라’

그 방주 속에 탈 인원이 여덟 명인데 그 여덟 명 속에 온 인류의 자기 백성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나가는데 있어서

자기 백성들은 반드시 건져 내는데

그 건져내는 일들을 남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예수가 믿어지도록 해서 구원을 얻게 하신다 말이지요.

그래서 방주는 노아가 방주를 지었듯이 자기가 지은 방주에 들어가서 노아도 구원 받은 겁니다.

 

아까 말했듯이 노아가 방주를 지어서 자기 가족들을 구원할 때는 메시아적 사명이었고,

노아가 방주 속에서 구원을 받을 때는 노아도 우리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중적 계시로 보라고 한 것입니다.

노아는 예수의 역할도 하면서 죄인 노아의 모습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노아같이 창세전에 구원을 할 자들은 은혜를 부어 주셔서 구원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임하고 나니까 방주를 짓더란 말이지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울산 목양교회 사람들에게 저 미국의 모퉁이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니까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 예수를 믿더란 말이지요.

복음을 쫓아 가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복음 안에서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노아가 구원을 받은 것은 자기가 방주를 지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걸 모르면 또 ‘여러분, 방주 지읍시다! 방주 지읍시다! ‘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주는 우리가 짓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말년에 그러잖아요.

내가 좋은 궁궐에 있고 하나님은 저 천막으로 지어진 성막에 계시니 자기 마음이 안 편하다고 하나님 앞에 전을 짓겠다고 하잖아요.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 그러십니까?

왜 니가 내 집을 짓느냐?

내가 니 집을 짓는 것이지…

하나님이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어 주시는데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해서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노아에게 은혜를 입혀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그냥 하나님의 은혜가 덮여 오니까 그 은혜에 이끌려서 방주를 짓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방주 지었다고 하면 안 된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은 방주를 지어서 방주 안에서, 저주 속에서 구원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하셨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시고 일하시고 하나님이 성취하십니다.

예레미야 33장 2-3절을 한 번 봅시다.

 

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성취하는 여호와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이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다 끝냅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도 하나님이 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우리와 의논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의 의견을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계획을 세우신 다음 역사를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계획을 세우신 분이 몰라라 하지 않아요.

일을 직접 하시잖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 구원을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다는 뜻이 뭡니까?

내가 가지고 있었다가 잠시 소실됐다는 것이잖아요.

원래 내 거 였는데 잠시 떠나 있다가 다시 내 것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것 찾으러 온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예수 안에서 나왔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것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신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대해서 염려를 하지 마세요.

내가 애써서 구워시켜 주세요 해서 얻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계셔도 예수님께서는 자기 것 찾아 가십니다.

 

이게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목자는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집에 가서 잔치를 벌입니다.

누가 기쁩니까?

구원은 우리 기쁨입니까? 예수님의 기쁨입니까?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기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자기 것 찾기 위해서 하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을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개죽음이 아니고 내가 죽음으로 인해서 내 백성을 다 자기에게 끌어 당기는 일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그 십자가 자체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기쁨이고 감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하나 하나 찾으실 때 마다 천국에서 잔치를 한다고 하잖아요.

구원은 그렇게 주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어떻게 하시는지를 보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결국에는 노아라는 사람을 통해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주 속에 집어 넣어 놓고 구원시키더란 말이지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이런 일들을 이런 과정을 하나님께서 다 만드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성령께서 창세전의 그런 일들을 하게 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지금 그러는 겁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는 자라 말하노라 하면서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하잖아요.

이것을 또 부르짖으면 보여준다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어떻게 구원했는가 하는 것들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 정낙원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지를 작정했고 내가 너를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할 것인가 하는 모든 것들을 깨달아지게 한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은혜를 받고 보니까 세상에 저희 아버지께서 58세에 저를 낳고 어머니가 47세에 저를 낳아 난 없어야 될 자인데 이런 자를 그냥 두시지 않고 마지막 때에 복음 전하는 자로 사용하는 것은 내 계획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이었다는 것이 깨달아지니까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비밀인 것입니다.

뭘 자꾸 보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건 없어요.

그러면 무당 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지금도 끊임없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아느냐…

마치 자식들이 철들어 가면서 부모의 은혜를 아는 것과 같아요.

 

자식이 철들어 가면 부모님이 나에게 뭘 많이 해줬다는 것 보다 나를 낳아 주고 길러줬다는 그 은혜만 생각해도 고맙고 감사해 합니다.

그게 자식이 철드는 거잖아요.

그러듯이 신앙생활도 쉬운 말로 철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겁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포괄적으로 큰 덩치로만 이해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니까 세세한 것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더란 말입니다.

풀 한 포기 속에서도 그 은혜가 보이더란 말입니다.

진짜 그래요.

 

과거에는 몰랐는데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만 맡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불어주는 바람같이 느껴지고 참새 한 마리를 봐도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참새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뭔가를 교훈하기 위해서 보여줬구나…

이런 것들이 깨달아 지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 내 주변에서 나를 둘러 진치고 지금 나와 동행하는 하나님으로 보여지고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범사가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눈들이 넓어지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들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귀를 열어 주시고 눈을 보여지게 해주시는 겁니다.

 

요한 1서 1장에 뭐라 그래요?

태초에 계시던 그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바 되고 귀로 들은 거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하나님과 경험이 되시라니까요.

 

그냥 추상적으로 성경에 있는 하나님 말고,

이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을 끄집어내서 내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보여지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고,

그 성령은 문자 속에 있는 이 하나님을 우리 삶 속으로 끄집어내신단 말이지요.

 

제발 이 책 속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마세요!

책 속에 있는 하나님은 화석화 된 죽은 하나님이에요!

책 속에 있는 하나님이 저벅저벅 걸어 나와서 우리 삶 속에 나와 여러분과 동행이 되어야 한다니까요.

그렇게 됐을 때 우리는 보고 느낀다니까요.

그럴 때 사소한 것 속에서도 주여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자식이 대학에 떨어지면 두문불출하면서 사람들을 피할 텐데,

은혜를 입고 보니까 늠름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웃집 아주머니가 그러잖아요.

철이 엄마, 아이가 대학 떨어졌는데도 기뻐요?

 

기쁘지요,

아이 대학 떨어진 거랑 제가 천국 가는 거랑은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요.

이런 마음의 여유들을 좀 가지세요.

쫓기지 말고요.

 

여러분, (그림 설명)

우리가 가야 할 나라는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른 말로 천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아래 세상인 땅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땅의 생각을 가지고 희노애락을 찾으려면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에게 땅의 것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줬지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우리 눈을 자꾸 위로 끌어 올립니다.

자꾸 위를 바라보게 한다니까요.

여기가 변화산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봤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초막 짓고 살자고 하지요?

밑에는 지금 제자들이 귀신 쫓아내고 있는데 못 쫓아 내고 있지요?

아래에선 금식해도 안 됩니다.

땅의 문제는 여러분이 금식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결해 주시는 것은 땅의 것을 구하면 하늘의 것을 줘서 땅의 것을 잊게 만드시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땅의 것 달라 그러잖아요.

하나님께서는 땅의 것은 없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 시선들이 하늘로 올라가서 땅을 바라볼 때 우리는 현실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위를 보고 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삼층천을 보고 오니까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복음 전하다가 매 맞고 욕 먹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더란 말이지요.

결국 위가 있는데

성령께선 우리를 끌고 가셔서 이 위의 세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땅에다 짓지 말고 산에 지으라는 겁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산의 종교입니다.

그런다고 또 계룡산에 올라간다 하지 마세요.

산이라는 것은 땅과 다른 세계,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노아가 산에다가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땅의 것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늘의 것 보잖아요.

그러면 우리 신앙 자체가 산 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죽니 사니 하지 말고 어차피 이 땅에는 파도가 늘 일어나는 세상이니까 지금은 좋았다 하더라도 내일이면 또 나쁜 일이 생기니까 이걸 보지 말고 저 위를 바라보세요.

그리하여 현실을 이겨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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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6.21 01:30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15.12.17 23:02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 16.07.25 23:17

    자료 감사합니다.

  • 18.02.10 22:43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

  • 19.02.03 12:21

    감사합니다.

  • 19.05.13 23:04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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