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통도사승가대학지관 월운 홍법 종범 원산 스님 등 배출한 ‘강원 큰줄기’ |
“학인 ○○, ○○실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군부대 중대장실 앞에서나 벌어지는 풍경인 줄 알았다. 치문반 스님들의 표정과 걸음걸이에도 ‘승기(僧紀)’가 바짝 들어 있었다. 지난 4월21일 통도사 천왕문 앞엔, 신임 방장 원명스님을 맞이하려 일단의 학인 스님들이 도열했다. 국방부 의장대 뺨치는 형식미다. 학인들은 얼굴이 사진에 나오는 것을 극구 거부했다. 개인의 욕망을 최소화해야 조직의 번영이 극대화된다. 병영을 비롯해 사회주의와 유신헌법, ‘호랑이 아버지’가 받드는 믿음이다. 개중엔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법을 섬기는 강원의 모습을 보고, 전체주의적이라고 악담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다. 물론 법이라고 다 같은 법이 아니다. 절반은 죽여야 하는 군법이 아닌 모두를 살리는 불법을 배우겠다고 모인 사람들이다. 강원생활은 한눈에 봐도 녹록치 않다. 하지만 ‘영장’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다. 스스로 다물고 낮춘다. 그래서 낯설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僧紀 바짝…휴식없는 정진으로 ‘교리 肉化’
강주 우진스님 ‘지식 교육화’반대하며 학인들 철저 단속
일제강점기엔 강원제도 개선 위해 ‘결집된 힘’ 보이기도
통도사승가대학장 우진스님에게 학인 수를 묻자 “치문 22명, 사집 16명, 사교 16명, 대교 10명 등 총 64명”이라는 대답이 즉각 날아왔다. 강사는 학장을 포함해 5명. “학장 스님만큼 학인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는 스님도 드물 것”이라고 어느 강사 스님이 귀띔했다. 그만큼 학인들의 사정도 잘 안다. 누구나 갖는 휴대폰을 가질 수 없고 인터넷 사용도 제한된다. 상당수의 번뇌가 세속과 승가 간 생활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이다. 스님의 교육방식은 ‘훈남’의 외모와는 대조적이다. “안에서는 힘들었지만 나와서는 고맙더라”는 졸업생들의 응원을 업고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결국 최고 학년인 대교반조차 농땡이를 피울 수 없다. “강원에 입방해 〈초발심자경문〉을 펼쳐들었는데 ‘마음 심 자’ 빼고는 한 글자도 모르겠더랍니다. 4년 열심히 하니까 대교반에서 〈화엄경〉을 볼 때는 난자(難字)가 전혀 없더라며 좋아하더군요. 다른 건 몰라도 한문공부 하나는 확실히 할 수 있다는 게 소득이었다고.”
그렇다고 한문 떼기가 강원의 궁극적인 교육목표라면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학장 스님의 엄한 채근도 단순한 심술과는 거리가 멀다. 통도사 강원이 정한 학인의 일과표엔 휴식의 ‘휴’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새벽 3시에 일어나 4시20분까지 예불. 5시30분까지 개별공부. 아침공양 뒤 7시20분부터 수업. 사시예불.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간경. 예불 마치고 8시30분까지 정진시간. 취침 9시. 몸이 좀 편해진다 싶으면 고개 드는 개인플레이의 싹을 아예 잘라버린 것이다. 전통을 고수하는 스님은 강원의 ‘지식 교육화’에 반대한다. 예로부터 강원에선 간경(看經)을 가장 중시한다. 틈만 나면 경전을 읽어야 하고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몸에 흠뻑 밸 때까지. “이해가 공부의 목적이라면 굳이 출가해서까지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읽고 이해하고 토론하면서 교리를 육화(肉化)하는 것이 강원교육의 핵심이란 지적이다. “요즘 학인들은 우리 때보다 참 ‘약게’ 공부해요. 관련서적을 훑어보고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은 뒤 개요를 이해하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저나 제 도반이나 선배들이나 내용을 완전히 외우지 못하면 이해한 게 아니라고 여겼죠. 책을 읽으면 기본적으로 목이 쉬었어요. 하도 암송을 해서요. 외다 보면 묘한 경쟁심리가 생겨서 서로 녹초가 됩니다. 잠꼬대를 간경으로 하는 사람도 많았고.”
통도사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이 지난 4월21일 신임 방장 원명스님을 맞이하려 천왕문 앞에 서 있다.
우진스님은 “거짓말 좀 보태면 전국 승가대학 강사 중 70%는 통도사 강원 출신”이라고 말했다. 비단 교직자만이 아니다. ‘불지종찰(佛之宗刹) 국지대찰(國之大刹)’이란 명성에 걸맞게 많은 스님들이 수행과 포교 전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1950년대 불교정화운동 이후 초대 강주는 운허스님(1892~1980)이었고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 동국역경원장 월운스님, 통도사 전 주지 홍법스님(입적)이 1기 졸업생이다. 스님들은 운허스님 아래서 〈선문염송〉을 중점적으로 배웠다. 이때만 해도 강원의 학제는 4년이 아니라 1년 주기였다. 의무교육제도도 아니었고 일정 기간 동안 특정 경전을 수학하기 위해 입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에 밝은 ○○스님이 ○○사에 계신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부리나케 찾아가 강론을 듣는 식이었다. 월운스님을 위시해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스님, 전 조계종 교육원장 원산스님과 무비스님, 승가대학원장 지안스님, 부산 화엄사 회주 각성스님 등 종단의 원로와 중진이 강주로 거쳐 갔다.
조선일보 1934년 10월13일자 신문은 통도사 학인들의 농성을 기사로 다루고 있다. 이들은 단식 투쟁에 돌입하면서 사찰 측에 4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학칙 제정 △교복 착용 △3년 전문교육과정의 고등과(高等課) 설치 △외래교수 1인 충원이다. 학교다운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바램이다. 동맹휴학까지 결의한 학인들의 거사는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주지는 인터뷰에서 “그처럼 불온한 행동을 하는 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주모자 3명의 승적을 박탈하는 동시에 퇴학처분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 논문 ‘1930년대 강원제도 개선문제’에서 이즈음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전 한국 불교계의 교육제도는 강원(講院)과 선원(禪院)의 양대 체제였다. 1910년대 이후 서양식 교육 우선 정책으로 인해 기존 강원은 신문화에 밀려 도태되거나 그마저 폐교됐다. 김광식 교수는 위의 논문에서 1928년 1월호 월간 〈불교〉에 실린 ‘최기정’이라는 사미의 글을 소개하며 피폐했던 강원의 정황을 알리고 있다.
‘강원은 쓸쓸하고 적막하며, 학인들도 아무 용기 없이 그저 두 어깨가 축 처지고 낙오의 한숨만 쉬며 취식객적(取食客的), 낭만적(浪漫的), 허명적(虛名的)으로 지내고 있다’고 말이다. 이유는 지방 강원의 학인들을 자타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낙오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조계종 교육원이 발간한 〈조계종사〉에 따르면 교육의 붕괴는 승가의 붕괴에 따른 결과였다. 일제가 1911년 한국불교를 식민화할 목적으로 제정한 사찰령의 제1조는 다음과 같다. ‘사찰을 병합, 이전하거나 폐지하고자 할 때는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2조는 ‘본산 주지는 총독, 말사 주지는 도장관(道長官)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전국 팔도 사찰을 31개 본산으로 임의로 나눈 후 주지 인사권과 경제권을 틀어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식민화의 수용이었다. 일부 주지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배 권력과 야합했다. 재정운용은 불투명했고 이문이 남지 않는 교육에 돈을 투자할 리 만무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본산 주지들이 모인 어느 강연회에서 ‘한여름에 썩어가는 송장보다 더러운 게 너희들’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와중 1929년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기점으로 몇몇 선각자 중심의 불교자주화 운동이 기지개를 켰다. 종헌을 제정하고 교정(지금의 종정)을 선출하며 어용 종단에 저항하는 독자적 조직을 출범시켰다. 이에 발맞춰 철저히 소외됐던 강원교육을 부활하자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전국의 학인들은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개최하고 학인연맹을 결성해 강원제도의 방향과 대안을 갖춘 개선안을 마련했다. 마침내 ‘고등강원 1개소를 서울에, 중등강원 6개소 이상을 지방에, 초등강원은 중등강원 부설 또는 그 이외의 사원에 설치’키로 한 개선안이 종회를 통과했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결정된 강원규칙은 그 이후 정상적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 종헌은 유명무실해졌고 종헌기구인 종회가 규정한 개선안 역시 자연 말소된 것이다. 이후 관치(官治)는 극에 달했고 대처육식도 날로 증가했다. 근대화란 이름의 타락이었다.
수포로 돌아가긴 했지만 강원제도개선 운동사에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공헌도도 높았다. 조선불교청년회의 후신으로 1930년 창립된 개혁단체였던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은 강원제도 개선을 현안으로 삼아 개선안의 종회 통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총동맹의 주역은 강원 출신 스님들이었고 통도사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지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결국 1934년 통도사 학인들의 집단행동은 정법안장과 민족 정체성 회복을 외치다 시들고 만 마지막 불꽃이었던 셈이다. 부분적인 신문기사로만 남아있는 그날의 거사는 이젠 거의 풍문으로 구겨졌다. 통도사 학인들이 기거하는 감로당엔 울타리가 둘러쳐졌다. 울타리 밖은 아주 가끔 시끄러워진다. 법회의 번잡함을 틈타, 잡상인까지 잠입해 똬리를 틀고 호객을 벌인다. 반면 울타리 안은 을씨년스러울 만큼 고요하다. 삐죽삐죽 솟은 나무 바리케이드가 70여년전 결집의 힘을 재현하는 듯하다. 통도사=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승가대학의 운영
강주 공식명칭은 학장
승가대학 행정 결정권
강주 우진스님
1996년 조계종 승가대학령이 제정되면서 강원의 공식 명칭은 승가대학으로, 강주는 학장으로 바뀌었다. 강사는 교수, 중강은 부교수가 됐다. 물론 교육법과 시행령 등에 모두를 혼용할 수 있도록 부칙을 두었다. 학장은 말 그대로 승가대학을 대표하며 제반 행정의 결정권을 갖는다. 학인의 학습지도 및 생활지도 사항도 처리했다. 부교수의 임용 제청권도 지녔다. 예전엔 학인들을 가르치는 강주를 따로 두고 학장은 주지 스님이 맡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은 어느 강원이나 강주가 곧 학장이다. 독립성이 강화된 것이다. 학감은 학장을 보좌하고 학인의 생활지도와 학사업무를 수행한다. 원칙적으로는 행정직이지만 교수를 겸직하기도 한다. 세간의 교감 혹은 사감에 해당한다.
입승은 총학생회장을 연상하면 된다. 승가대학의 학인을 대표하며 대중화합과 승풍진작에 솔선수범해야 한다. 학인을 통솔할 수 있다. 찰중은 입승을 보좌하는 역할이며 학인들이 계율에 어긋난 행동을 할 경우 경책권을 갖는다. 반장은 학년별 회장이다. 반을 통솔해, 제반사항을 지시 전달하며 화합을 유도한다.
[불교신문 2327호/ 5월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