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왕과 궁녀
5장, 전환점 (8)
덕로는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허공을 뚫어지게 보았다.
" 마냥 귀여운 손아래 누이셨지. 내키지 않는 마음 꾹 참고 왕실에 가겠노라 나서준 것이 고마웠고, 욕을 보면서도 의연한 체하시는 것도 고마웠소."
애잔한 가을의 정취는 쓸쓸하게 스러진 후궁의 자취와도 같았다.
" 전하께서 나를 외척으로 삼으신 건 모종의 시험이 아니었나 싶소. 성상의 입맛에 맞는 조정을 구측할 여러 구상 중 하나였겠지. 허나 난 당장 눈앞에 닥친 과제를 푸는데 급급했소. 하여 어심을 붙들 답안은 내놓은 데 실패했고,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지."
문득 그의 음성에 비장함이 서렸다.
" 그걸 다 알면서도, 나는자꾸 숙창궁께서 원손만 낳으셨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으리란 미련을 떨칠 수가 없소."
뜻밖의 고통스러운 표정 하나가 훅 스쳤다.
" 원망보다 저열한 게 미련이지."
덕로는 쓰게 운으며 소매로 눈시울을 훔쳤다.
" 나는 참 끔찍한 인간이라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누이가 나 때문에 죽은 것보다, 간신히 차지한 권좌를 잃은 게 더 가슴 아프단 말이지."
덕임은 경멸이나 연민처럼 섣부른 감정을내비치지 핞았다.
" 그래서 아직도 완풍궁을 가까이 하시는 겁니까?"
" 아니오. 내겐 미련이 있다 뿐이지 희망은 없소."
그 들의 속성은 아주 다른 것인 양 단호한 말투였다.
" 그냥 나 스스로 벌을 주는 것뿐이요. 그게 내 비밀이라오."
그러곤 대뜸 미친 사람처럼 껄껄웃더니 미처 잡을 세도 없이 떠나 그날밤은 일찍 자리를 펴고 누웠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 경황이 없었지?"
바느질을 하던 연애가 슬그머니 운을 띄었다.
" 안타깝지만 자주 있는 일일세. 종친 댁에선 본디 주의할 게 많네. 대감께선 행여 완풍군께서 말썽에라도 휘말릴까 봐 저어하시는 게야."
말투에선 긴장감이 느껴졌다.
" 한데 자네, 봉조하 영감과는 잘 아는 사인인가? 아까 완풍군께서 분위기가 심상치않더라고 하시던데."
" 그럴리가요. 숙위대장으로 지내실 적에 대전에서 몇 번 뵈었을 뿐입니다."
덕임은 당황하지 앓고 미리준비해 둔 답변을 꺼냈다.
" 별말씀 없으셨고?"
" 그냥 성상에 대해 조금 여쭈셨습니다."
" 사적으로 엮일 일은 앞으로도 없는 게지?"
" 예. 물론이지요."
"오해하진 말게. 여기선 시종들 처신 하나하나까지 중요한 문제라서. 도성의 계집치고 그 영감께 홀리지 않은 이가 없다고 소문이 자자하니, 원.... ."
어딜 가든 얼굴값은 하는 모양이다.
" 전에 계집종이 하나 있었는데 영감께서 오실 때마다 분을 찍어 바르고 요망을 떨기에 내쳐야 했네. 고것이 주제도 모르고 덜컥 애라도 뱄으면 그 치정痴情에 대한 화살은 대감께로 향했을 게야."
" 한데 조정의 고관이 어찌 스스럼없이 방문한답니까? 사대부가 종친과 교류하는 게 보기 좋은 모양새는아닐 테지요?"
"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영감이신데 무어가 허용되지 않겠는가."
연애는 복잡한 한숨을 쉬었다.
" 말이 나와서 말인데, 훈련대장 영감의눈에도 띄지 말게. 반반한 계집이면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질 못하는 분이거든."
" 전 별걱정 없겠는데요."
" 아이고, 요렇게 고운데 무슨 소리를 한담?"
덕임은 얼굴을 붉히며 과하게 칭찬하신다는 둥 어물거렸다.
" 흠 흠! 나머지 한 분은 영의정 댁 자제분이라면서요?"
" 아,그래.부수찬 나으리는 좋은 분일세. 쌀 떨어질 즈음 머슴을 시켜 슬그머니 한 가마니 던져 놓는다든가, 살뜰히 챙겨주시거든."
" 그분도 봉조하 영감의 친우십니까?"
" 아닐쎄. 부수찬 나으리는 원래 대감마님의 지우知友일세. 대감마님 출궁하실 적부터 친하게 지내셨지."
" 사정이 어려운 벗을 오랜 세월도록 돌봐준신다니 대단한 분이네요."
뜻밖에도 연애는 쓴웃음을 지었다.
" 글쎄, 마냥 이유 없는 친절은 아닐쎄. 지금에 와선 진짜 친해지긴 했지만 처음에는
아마 부친이신 영상께서 우리 대감마님을 좀 들여다 보라고 시키셨을 걸세. 선왕 시절부터 조정에 계셨던 중신들은 우리 대감마님은 딱히 여기시니까."
점점 속삭이는 목소리를 따라 바늘을 놀리는 연애의 손도 느려졌다.
" 아마 당시에 국본을 지키지 못한 데 죄책감을 느끼는 게지."
호기심이 들긴 했다. 그러나 홍덕로의 일침에 아프게 찔렸으므로 감당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야기에 귀를기울이기에는지쳤다. 애끛은 손만꼼지락거렸다. 그러나 경계가 허물어진 연애는 분명 말문이 트일 기세였다.
"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고들 하지."
연애는 쓰고 남은 천과 자투리 실을 교두交頭(가위)로 싹둑싹둑 잘랐다.
그렇지만 경모궁께선 언제나 선왕 전하의 안 아픈 손가락이셨네."
그녀는 기어이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선왕께선 성군의 귀감이셨고 궁비들에게도 다정다감하셨지. 하지만 한편으론 대단히 예민한 분이셨네. 눈물을 곧잘 흘려 주위를 당혹케 하셨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섭게 윽박지르셨으며, 한번 응어리를 품으면 여간해선 풀지 않으셨어.
뜩히 수신修身에 민감하셨지. 술과 담배를 혐오하셨다고 먼거리라도 연輦을 타지 않고 걸어서 거동하셨네. 수라를 들 때에는 늘 소식을 강조하셨지."
풍만함을 숭배하는 이 시대에, 날씬한 체형을 높이 사던 선왕의 특이한 취향은 덕임도 익히 들었다. 선왕의 휘하에선 적게 먹어 날렵함을 유지하라는 꾸지람을 듣지 않은 궁인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 복연은 지나가다 자신을 볼라치면 혀를 끌끌차시던 선왕 때문에 부들부들 떨곤 했었다.
" 헤아리기 어려운 습관도 많으셨네. 나쁜 말을 들으면 즉시 깨끗한 물을 내어오게 하여 귀를 씻어내셨으며, 대궐의 문을 하나하나 좋은 문과 나쁜 문으로 나누어 용무에 따라 달라 드나드셨지. 아끼는 옹주 아가씨를 보러 행차하실 적에 행여 환관이 실수로 나쁜 문으로 이끌기라도 했다간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었네."
덕임은 어리둥절했다. 하찮은 생각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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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로도 자기가 과한 욕심을 냈었다는 것을 알고 있군요.
반성하는 모양입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요 이제 뫄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