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4.2.11.) 말씀/ 마가복음 3:13-14 함께 있게 하신 예수님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명절 기간 가족들과 함게 하며 즐겁고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들 가지셨나요? 저도 사모와 누각ㅏ내려오고 금요일에는 루디아와 사위가 와서 함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또 우리 지체들과 예배드리며 함께하는 시간을 갖게되니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와 함께 있게하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절 읽고 시작 합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마가복음 3:13-14을 보면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모두 열두 명입니다. 열두 제자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메,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입니다. 제자들은 어부, 세리, 열혈당, 의심 많은 자, 후에 배반자까지 다양한 직업과 기질의 사람들입니다. 이름이 각자 다르고 또 예수님이 각 사람의 특질대로 별명을 붙여주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각자에게 맞는 교육 목표를 두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를 부르셨다는 것은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는 주님의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름 받은 제자들은 나는 도마인지, 왜 너는 베드로 인지, 안드레와 빌립은 누가 더 훌륭한지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쌩떽쥐베리도 그이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오직 그대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 행하라. 용기를 가지고 그대가 결정한 길을 따라 망설이지 말고 걸어가라. 지금은 한 배를 타고 배우지만 각자의 길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3년 반 제자 훈련이 끝난 후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났을 때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켜 이 사람은 어떻게 될른지요하고 예수님께 묻는 내용이 나옵니다. 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각자이 길이 다른데 너는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있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가? 가장 큰 목적은 예수님과 가까이에서 생활하며 공통적으로 배우는 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기적 안목을 가지시고 제자를 양성하여 예수님과 똑같은 사역을 계승하여 섬길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수는 딱 열둘을 정하신 것은 함께 하기에 딱 좋은 수이기 때문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길을 걷고, 함께 전도도 하고, 함께 무리들을 섬기고..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며 듣고 묻고 배우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명 역사에 직접 참여하며 실천하는 교육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함께 살면서 보고 듣고 체험하면서 가장 잘 배울 수 있습니다. 멀리서 수많은 군중들 큰 교회에 출석하면 혜택도 많고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가까이 듣고 묻고 삶으로 배우는 점에서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매주 예배 후면 둘러앉아서 떡을 떼며 들은 말씀을 서로 나눕니다. 매주 수요일에도 역시 둘러앉자 음식을 떼며 책을 읽고 또 늦게까지 독서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혼자도 집에서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훌륭한 강사의 집회에 가서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함께 좁은 생활공간 속에서 서로 호흡하며 배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이는 큰 모임에서는 누릴 수 없고 작은 무리들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2016년 겨울에 해남에 사시는 임근오 형제님이 우리 교회에 와서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한 시간 거리 주일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주중에 와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꼬박 꼬박 와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 후에는 주중에 한 번씩 제가 해남에 가서 지홍 집사랑 어떤 때는 효주선교사님이랑 가서 식사하고 스타렉스 봉고 차에서 엘리디 등을 켜놓고 성경을 공부하였습니다. 공부할 때마다 듣고 질문하며 깨달은 바를 감동으로 소감을 말하며 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2020년까지 신앙생활하다가 사정상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화요일 지홍집사님이 한 밤에 전화가 왔습니다. 근호 형제님이 연락이 왔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하고 다시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여기 저기 다른 교회도 나가보았지만 결론으로 내가 가야할 곳은 푸른 초장교회라고 ...저는 너무 감동이 되었습니다. “아! 임근오 형제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그동안 말씀이 근호 형제 안에서 숙성의 시간을 갖고 있었구나” 그게 바로 스쳐지나가는 말씀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듣고 물으며 깊은 울림이 있는 말씀공부를 한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동안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 배운 말씀들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내가 비어져야 주님이 하신다는 깨달음도 들고...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지만 끝까지 남아서 계승자가 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소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곁에서 함께 먹고 자고 함게 걸으며 말슴을 가까이 듣고 묻고 배운 제자들입니다. 그들 역시도 약한 자들이라 한 번씩 다 떠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말씀을 기억하고 붙들고 돌아와서 인류 역사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일 말씀도 듣고 흘러보내지 않고 묵상하고 새기고 교제하고 각자 반복하여 들고, 수요독서모임도 서로 나누며 배우는 시간들 정말 중요한 시간 입니다. 고현옥 집사님 왈 너무 귀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근오 형제님 독서모임도 참여하며 함께 한다면 더욱더 깊은 맛을 느끼는 소중한 신앙의 길을 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레오버스가 글리오는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책을 통해서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사는 동안에는 살며 사랑하는 것과 배우는 것이 계속 되어야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 작가 사이토 다카시는 점수를 위한공부, 인정 받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공부라고 하라. 무엇인가를 즐기며 배우는 호흡이 깊은 공부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주 메시지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어떻게 성장하셨는가 배우지 않았습니까? 어린 나이에 고명한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며 배우셨으며,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고(눅 2:46-47)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배우시며 성장하신 핵심 단어는 듣고 묻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가서 부모를 공경하며 실천하셨습니다. 정말 잘 배우는 사람은 세가지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듣는 것, 묻는 것. 실천입니다. 잘 듣고 묻는 사람만이 답을 얻을 수 있고, 실천하면서 다음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런데 큰 무리 중에 있다면 가능하겠습니까? 천명 만 명 몰려와서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지만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배울 수 없고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제자들은 예수님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어떻게 기도하시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을 증거하시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사시는지, 어떻게 양들을 사랑하며 섬기시는지. 어떻게 자연을 관찰하시느지, 예수님이 얼마나 약하고 병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는지 바로 피부로 느끼면서 세세히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동거 동락하면서 가까이 배우며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후안 까를로스가 지은 제자임니까라는 책이 있습니다. 서문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교회에 부임했을 때 184명 이었습니다. 2년 동안 열심히 해서 600명이 되었습니다. 3배가 부흥된 것입니다. 교회가 커니지니까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행정체제를 갖추게 되고, 교인 주소록을 만들어 효율적 관리도하고, 교회 세미나도 열고, 주 강사로 초청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에 하루 16시간 몰두하면서 무엇인가 잘 되는 것 같은데 무엇인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긴장을 풀면 모든 것이 와를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당회에 말을 하고 2주 동안 어디로 가서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적한 곳으로 갔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코카콜라 팔듯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자라나고 있지 않다. 네 생각에는 내가 교인수를 200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와서 그는 제자양성의 뜻을 두게 되었고 <제자입니까?> 라는 책도 내게 되었습니다. 살찌는 것과 성장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2 년만에 3배 성장 이것은 성장이 아니라 살찐 것이라는 것입니다. 살만 찌며 사람의 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복음은 생명이고, 생명은 자라는 것인데 살만 찌면 어떻게 됩니까? 에베소 교회나 라오디아교회를 보십시오. 성장이 아니라 살찐 교회들 아닙니까? 건물 크기 많은 교인 수 한국교회를 성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마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같다고 한 것도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씨앗은 아주 작지만 나 중에는 나무처럼 커서 새들이 깃들인다고 했습니다. 성장하고 자라는 것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회 그게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12제자는 수는 작지만 끝까지 남아서 성장하고 자라서 이들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후안까르로스는 우리들에게 정체성의 질문을 합니다. ”당신 제자입니까? 아니면 그냥 성도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훌륭한 제자가 되고, 제자들은 어떠한 자세로 배우고 성장해야 겠습니까? 위대한 스승들 밑에는 언제나 제자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밑에는 유명한 플라톤이란 제자가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 밑에도 많은 사람들이 배우러 왔습니다. 그 중에 혜장선사와 초의 선사, 아청도 있고, 또한 황상이란 제자가 있습니다. 어느날 황상이 서울에서 온 훌륭한 선생님이 아이들 몇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주막 집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몇일을 내쳐 찾아가 쭈뼛쭈뼛 엉거주춤 글을 배웠습니다. 다산이 황상에게 문사(文史)를 공부하라고 권하자, 황상이 머뭇거리며 부끄러운 듯 말합니다. "선생님, 저에게는 세 가지 병통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가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꽉 막혀 답답하며, 셋째는 미욱하여 빨리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제가 배울 수 있을가요? 그러자 다산이 말합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큰 병통이 있다. 그런데, 너에게는 그러한 문제점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데 민첩한 자는 매사에 소홀하고, 둘째, 글재주가 좋은 사람은 자만하여 글이 들떠 날리며,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한 번 깨친 것을 대충 넘기고 곱씹지 않으니 깊이가 없는 것이 폐단이다. // 둔탁한 끝으로는 처음에 뚫기 어렵지만 한 번 뚫리면 막힘이 없고, 막혔다가 트이게 되면 그 흐름이 장대해지며, 답답함을 이기고 꾸준히 연마하면 마침내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될 것이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부지런하면 된다." "탁 트이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부지런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부지런하면 된다." "제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해야 할까요" "그 마음가짐을 확고하게 가져야 한다." ”그렇다. 반복보다 좋은 스승은 없다. 제목만 주면 글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똑똑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저도 모르게 경박하고 들뜨게 되는 것이 문제다. 한마디만 던져주면 금세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곱씹지 않으므로 깊이가 없지.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나 대단하겠니? 둔한 끝으로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웬만해서는 막히지 않는 큰 구멍이 뚫릴 게다. 꼭 막혔다가 뻥 뚫리면 거칠 것이 없겠지.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첫째도 부지런함이요, 둘째도 부지런함이며, 셋째도 부지런함이 있을 뿐이다. 너는 평생 '부지런함'이란 글자를 결코 잊지 말도록 해라. 네 마음을 다잡아서 딴 데로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들어 매야지. 황상은 머리가 둔하고 앞뒤가 꽉막힌자라고 하였지만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따랐습니다. 다산이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가 되었고, 다산이 죽은 후에도 아들과 친분의 정을 이어갔습니다. 배움의 본 , 참 제자이 본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 황상보다 더 둔하고 IQ가 두자리를 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함은 어느 누구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 김득신입니다. 책을 읽어도 한번ㅇ 아니라 수없이 반복반목 읽엇느데 그래도 잊어버립니다. 백이전은 1억 일만 3천번을 읽고, 노자전 분왕 벽려금, 주책, 능허대기. 의금장, 보망장은 2만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백ㅇ전의 한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말고비를 잡은 질리게 들ㅇㄴ 바라 알려주었습니다. 노둔함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후에느 성균과 S 고거도 급제하고, 시로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 예수님을 따른는데도 그렇게 명석함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그렇기에 주님께 늘 가까이 나아가서 듣고 묻고 배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다른 사라들보다 더 부지런히 반복하며 배우면 됩니다. 비리립은 잔머리 굴리던 사람이고, 도마는 의심이 많았단 사람이지만 유다 외에는 낙오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도 황상처럼 머리가 명석하지 못합니다. 암기력이 약합니다. 대신 부리런함과 성실함이 있습니다. 단거리보다 마라톤 기질입니다. 순발력보다 천천히 오래 지속. IQ보다 EQ가 발달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저를 받아주시고 지금껏 제자라 받아주시고 쓰고 계십니다. 지금 돌아보니 이런 기질들이 오히려 예수님 제자의 조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공보다 성장을 목표로 주의 길을 가는 것이 정말 행복입니다.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니 비교도 할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나는 부족하다고 낙심할 필요 전혀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물을 수 있고 답을 얻게 됩니다. 둔하니까 자꾸 반복하게 되고 구래서 마씀이 안에서 숙성도어가니 감사입니다. 결핍이 배움의 조건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능력이 많지 않으니 성공보다 성장의 길을 택하게 되고 진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이 얼마나 큰 은혜요 기회로 여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열심히 배움을 엄추지 않고 나아가는 자세 이것이 중요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 가까이 제자가 되는데 다른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학벌 문벌 안 좋아도 됩니다. 깨닫는 것이 둔하고 느려도 괜찮습니다. 반본 반복해서 부리런히 배우려는 향상심, 배운 바를 실천하고자 하는 진심이 있으면 누구나 다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약용 선생의 교훈처럼, 첫째도 부지러함, 둘째도 부지런함, 셋째도 부지런함 그렇게 겸비한 마음으로 배우고 익혀서 세상에 작은 Jesus 가 되어 좋은 영향을 끼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