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머리
황영
“머리 좀 자르고 와”
아내가 이발을 권했다. 날씨도 점점 더워지고 있으니 겸사겸사 시내로 이발하러 갔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곳에 들렀다.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예약을 하지 않아서 한참 동안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나는 조급증이 들어 그대로 돌아 나왔다. 주위를 살피니 근처에 미용실 간판이 몇 군데 눈에 들어왔다. 막상 가게 앞으로 갔더니 장사를 하지 않아서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했다. 아직 오월인데도 내리쬐는 햇빛이 만만치 않아 그늘진 골목길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에 아기자기한 꽃들로 가꿔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울창하게 여러 식물이 자라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ㅇㅇ미용실. 허름한 간판 아래 원래는 빙글빙글 돌아가야 하는 원통의 미용실 입간판이 멈춰있는 곳이었다.
"계세요?"
미용실 내부로 들어서니 곳곳에 미용 관련 용품들로 세월이 보이는 곳이었다. 내부에 TV 소리는 들리는데 사람이 없어 더 크게 미용실 원장님을 불렀다.
"밖에 많이 덥죠?
원장님이 머리를 다듬으면서 나왔다.
"테레비 본다고 밖에 누가 왔는지도 몰랐네."
미용 의자에 앉아 무슨 머리를 할지 살짝 고민되었다.
“시원하게 잘라주세요.”
“스포츠머리 하면 되죠?”
나는 옆머리만 짧게 다듬을 생각이었지만, 원장님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서 왠지 모르게 믿음이 생겼다. 하지만 스포츠머리가 얼마나 짧은 머리일지 알 수 없어 고민이 되었다.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보자기가 목을 둘렀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안경을 내려놓으니, 세상이 흐릿해졌다. 바리깡 소리가 들리고 내 머리카락이 후드득 잘려 나갔다.
우리 부부는 종종 서로의 머리를 잘라준다. 이발비를 아껴볼 요량이긴 했지만, 둘 다 미술을 전공해서인지 이발에는 제법 소질이 있었다. 아내는 20살 이후로는 줄곧 자기 머리를 잘라 왔다고 한다. 나도 질세라 이발병 출신임을 강조하며 아내에게 은근히 자부심을 드러낸다. 아내는 단발머리를 선호하는 편이라 귀밑에 맞춰 튀어나오는 머리카락이 없이 자르면 된다. 머리를 풀어 헤치면 별로 티가 나지 않아 못 잘랐다고 타박을 들을 일도 없다.
문제는 내 머리다. 남자 머리는 짧아서 기술이 없으면 머리카락이 단이 지거나 쥐 파먹은 것처럼 되기 마련이다. 차라리 머리를 많이 기르면 윗머리는 묶어두고 옆과 뒷머리를 바리깡으로 밀면 요즘 유행하는 투블럭컷이 된다. 하지만 어중간하게 긴 상태에서는 망치기 십상이다. 한번은 아내가 이발하다 말고 “안 되겠다. 그냥 미용실 가자.”라며 울상이 되었다. 내가 거울로 보기엔 괜찮아서 그냥 지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가 이상하다고 놀리는 바람에 아내가 난처해했다. 그 이후로는 미용실을 찾았다.
나는 군대에서 처음으로 이발을 했다. “너 미대 다니지? 머리 좀 잘라봐.” 자대배치 받고 내무반에 짐도 풀기 전에 얼떨결에 바리깡을 잡았다. 소대에 이발병이 있긴 했지만 다들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손재주 좋은 신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나는 이발을 해보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흉내는 낼 줄 알았다. 그렇게 시작된 이발은 남들 쉬는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되었다. 무엇이든 하면 할수록 실력은 느는 모양이다. 나도 이발이 싫지만은 않아서 후임들에게는 실험했고 선임들에게는 실력을 뽐냈다.
소문은 선임들의 입을 타고 소대에서 대대로 퍼져나갔다. 일과를 마치고 관물대를 열어보면 빵과 콜라, 컵라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휴가나 외박을 기다리는 선임들이 번호표를 뽑을 정도였다. 소문이 어느새 간부들 귀에도 들어갔는지 중대장의 어린 아들까지 부대로 와서 나에게 이발을 했다.
그즈음 상급 부대인 연대본부에서 간부들의 미용을 책임질 이발병을 뽑기 위해 이발대회를 열었다. 나는 소대 대표로 이발대회에 참가하였다. 미용과 출신도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쉽게 볼 시합은 아니었다. 게다가 포상 휴가가 걸려있었기 때문에 필승을 위한 작전이 필요했다. 소대에서 가장 머리가 작고 두상이 예쁜 모델 출신의 후임을 데리고 대회를 치렀다. 아무래도 머리빨 보다는 얼굴빨이 승산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상위권의 실력은 팽팽했다. 내가 데려간 후임의 덕이 컸던 모양이다. 나는 운이 좋게 이발대회에서 입상을 하고 휴가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머리 괜찮아요?” 원장님이 보자기를 풀면서 물었다. 나는 인상을 써가며 거울에 비친 머리의 형태를 살폈지만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스포츠머리가 스포츠머리지 뭐’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감고 안경을 썼더니 웬걸, 내가 군대에서 자주 자르던 머리 스타일이라서 반가웠다. 오랜만에 까슬해진 머리를 손으로 쓸었더니 보송한 기분이 들었다.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태양 빛이 누그러져 있었다. 별다른 것 없는 하루였지만 평소보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운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