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한국 로봇 ‘롭해즈’,
세계로봇경진대회서 1위 입상
2004년 4월 27일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로봇이 세계 로봇경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강성철 지능로봇연구센터 박사팀이 제작한 위험작업 로봇인 ‘롭해즈(ROBHAZ)’가 이날 미국 뉴올리언스대학에서 열린 세계 로봇경진대회 구조로봇 부문에서 우승한 것이다.
롭해즈는 지형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두 개의 트랙을 로봇 몸체 양쪽에 설치, 계단
이나 울퉁불퉁한 길에서도 최대 시속5km
로 이동할 수 있어 폭발물 탐지와 화재 현장
에서의 인명 구조 등 위험한 작업을 위해 제작됐다.
세계 로봇경진대회는 97년부터 시작한 권위 있는 대회로 강 박사팀 외에도 구조
로봇 부문에만 미국 카네기멜론대,뉴올리
언스대, 독일 브레멘대, 캐나다 마니토바
대 등이 참여해 경쟁을 벌였다.
이번 구조 로봇 부문은 지진 상황을 연출
한 모의현장에서 20분 동안 어느 로봇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얼마나 많은 모
의 희생자를 탐지하는가를 측정했다. 경기 결과 강 박사팀은 대회 사상 가장 높은 점
수(123점)로 우승했다고 KIST는 밝혔다.
▶2015년 평창올림픽 한국 국적 선택한 노르웨이 스키 스타 김마그너스
👉🏿 크로스컨트리 스키 기대주 김마그너스(17·노르웨이명 마그너스 보어·사진)가 태극 문양을 달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나선다.
그의 소속사인 브리온컴퍼니는 27일 “김마그너스가 한국 스키 발전에 대한 강한 포부와 어머니의 나라에 대한 애정으로 한국 대표를 택했다”고 밝혔다. 마그너스는 1998년 부산 선박회사에서 일하던 노르웨이인 아버지 오게 보어(59)씨와 한국인 어머니 김주현(55)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부산서 보내 지금도 부산 사투리를 쓴다. 그는 크로스컨트리 시작 1년 만인 2012년 노르웨이 전국스키선수권에서 남자 15세 클래식 및 스프린트 우승을 차지한 차세대 유망주이다.
노르웨이는 ‘스키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크로스컨트리에서 올림픽 최다 금메달(31개)을 딴 이 분야 최강 국가다. 반면 한국의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올림픽 30위 안에 든 적이 없다. 마그너스는 최근 3차례의 전국체전에서 무려 1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며 압도적 기량을 과시했다.
마그너스는 최근 올림픽 출전 국적 선택 문제로 고민해왔다. 최종적으로 노르웨이가 아닌 한국 대표를 선택한 그는 “태극 마크를 다는 것은 아주 가슴 뛰는 일이고, 어머니가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평창 시상대에 올라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요한 23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시성.
▶2013년 노진혁,KBO리그 NC다이노스 최초로 인사이더 파크홈런을 달성.
▶2012년 파키스탄에 거주 중이던 오사마 빈 라 덴의 유족 전원, 사우디아라비아로 추방.
▶2012년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페트
로우시크 에서 연쇄 폭탄 테 러 발생(최소 29명 부상).
▶2012년80~90년대 가요 황금기 연 이호준 별세
▶2011년4·27 재보궐선거
▶2010년 세계 최장의 방조제인 '새만금 방조제' 준공.
▶2010년 산악인 오은선 대장, 여성으론 세계 최 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
👉🏿 2010년 4월 27일 오후 6시 16분(이하 한국시간) 대한민국의 오은선(44·블랙야크) 대장이 안나푸르나(해발 8091m) 정상에 태극기를 꽂았다. 여성 산악인 세계 최초로 8000m급 고봉(高峰)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지난 1997년 갸셔브롬 2봉(8035m) 등정 이후 13년만에 이룬 쾌거였으며 이중 12개봉은 무산소 등정이다. 1985년 수원대학교 산악부에서 처음으로 산악계와 인연을 맺은 오은선은 1993년 故 지현옥 대장을 중심으로 한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참가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여성 산악인으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오은선은 이날 오전 1시 40분 라이벌이었던 고(故) 고미영 대장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서 캠프 4(해발 7200m)를 출발했다. 고미영은 2009년 7월 낭가파르바트(8126m)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다가 추락해, 결국 사망했다.
캠프4를 출발한지 18시간이 지난 오후 6시 16분, 드디어 정상에 오른 오은선은 태극기를 들고 두 손을 흔들었다.
지구상에서 해발 8000m가 넘는 산은 에베레스트(8848m), K2(8611m), 캉첸중가(8603m) 등 모두 14곳으로, 모두 히말라야 산맥에 있다. 지금까지 1986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66)가 세계 최초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이후 24년 동안 14좌를 완등한 19명은 모두 남성 산악인이었다. 우리나라 산악인으로는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등 3명이 포함돼 있다.
오은선의 강력한 경쟁자인 에두르네 파사반(스페인·Pasaban·37)은 5월 17일 오후 11시30분쯤 마지막 시샤팡마 정상을 오르며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했다. 스페인 바스크족 출신인 파사반은 2001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9년만에 14좌를 완등했다.
파사반은 오은선이 2009년에 오른 칸첸중가 등정에 의문을 제기하며 오은선의 하말라야 14좌 완등에 국내외에서 의혹이 제기되었다. 대한산악연맹은 8월 26일 오은선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부정하는 입장을 밝혔으며, 네팔 히말라야 탐험에 대해 기록하는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는 9월3일 현재 이 문제를 '논란중'으로 기록하고 있다.
▶2009년 타쉬켄트에서 견제민 주우즈
베키스탄 대한민국대사와 atipov 우즈베
키스탄 정보통신담당 부총리 간에 서명된 "대한민국 정부와 우즈베 키스탄 공화국
정부 간 과학기술문헌 전자도서관 시스템 및 도서네트워크 구축을 위한사업 시행에 관한 약정"
▶2008년 대한민국 서울 성화봉송 행사 도중 중 국인폭력시위 사건이 발생.
👉🏿 2008년 4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베이징올림픽 성화봉송행사도중 6500명의 짱깨바퀴벌레들이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와 티베트 독립문제와 중국인권탄압 규탄 시위를 하던 180명 한국인 시민단체 회원들을 돌, 공구, 국기대 등등 흉기를 휘두르는며 잔혹하고 미개하게 집단폭행한 사건. 이들은 당시 현장에 있던 한국의 경찰들에게 까지도 폭력을 휘두렀다.
이 사건으로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 까지도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은 간악무도 한 짱깨들의 미개함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 자신들의 나라가아닌 다른나라에서 저 짓거리를 했다는 것 부터가 짱깨들이 글러먹었다는 것이다. 재작년 2019년 홍콩프리운동때도 짱깨유학생놈들이 홍콩프리데자보를 훼손한 것도 저거랑 같은 유형이다.
아니 2008년 당시 이명박정부였는데 왜 베이징올림픽 성화봉송 행사를 한국에서 한 건지 모르겠다.
▶2008년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수도 카불에서 열 린공식 행사에서 무장세력 탈레반의 공격을받아 피신.
▶2008년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수석
비서관, 부동산 투기 및 서류조작 의흑 으로 이명박 대통령 에게 사의 표명.
▶2007년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옛 소비에 트 연방군 병사를 새긴 동상을 이전하는 문제로 경찰과 시위대가 층돌.
▶2006년 밥퍼 300만 그릇, 무료급식 "빛나는 기록"
👉🏿 ‘밥퍼 운동’18년 … 300만 그릇의 기적
18년 전 처음 무료 급식을 시작했을 때 쓰던 양푼 냄비는 찌그러지고 흑백 사진은 색이 바랬지만 어려운 이웃을 대하는 최 목사의 따뜻한 웃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 한준호 기자 gokorea21@chosun.com
1988년 라면으로 시작한 무료 급식이 18년 동안 이어져 지난 달 27일 300만 그릇을 넘어섰다. 서울 청량리역 창고 사무실에서 시작된 다일공동체는 이제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2002년 불우이웃의 무료 진료를 위한 다일천사병원이 들어섰고, 2004년과 2005년에는 부산과 목포에도 무료 급식소가 세워졌다. 이웃 사랑은 해외로도 뻗어나가 현재 중국·베트남·캄보디아·필리핀·미주·호주·유럽에서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3일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의 다일천사병원에서 다일공동체 대표인 최일도 목사(51세)를 만났다.
/ 조찬호 기자 chjoh@chosun.com
▶2005년 마널라 한국 아카데미, 예장 통합 선교부 인수 이양 계약서 작성
▶2004년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 15년 만에 유럽 방문
▶2004년민주당 당직자 일괄사표, 사무처 해단식
▶2004년국가보훈처, 이애라 선생
▶2004년 5월 독립운동가에 선정
▶2004년제5회 광주인권상에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 선정
▶2003년 아르헨티나에서 '카를로스메냄'
과 '네 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결한 대통
령 선거 2차 투 표 실시(메냄 24.140/0, 키르치네르가 22.040/0).
▶2002년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확정
▶2002년수원 영통동 여성 연쇄살인사건 발생
▶2002년부산 동의대사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2002년 핸들러 사망(바비 인형 창안).
▶2001 년 파키스탄, 민주화 운동가 등 1 천 500 명연행
▶2001년페루, 미주 대륙 최초의 고대문명 새로 발견
▶2000년삼성자동차, 르노자동차에 매각
▶2000년헌법재판소, 과외교육금지 위헌 결정
▶1993년이만섭 국회의장 피선
▶1993년소설가 황석영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1992년한국-타지키스탄, 국교 수립
▶1989년분당-일산 신도시 건설 발표
▶1983년소련, 우주무기 금지협정 제의
▶1981년한일은행 민영화 발표
▶1978년아프가니스탄에 군부쿠데타, 칸 대통령 피살
▶1977년일본 중의원, 한일대륙붕협정 비준안 통과
▶1972년아프리카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사망
▶1972년미국 우주선 아폴로 16호 지구 귀환
▶1971년제7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당선
▶1969년김대만 부산시장 수뢰혐의로 구속
▶1968년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동상 제막
▶1966년페루여객기 안데스산맥에 추락. 49명 사망
▶1966년소련 타시겐트 지방 대지진
▶1962년혁명재판소, 통사당-통일민전사건 선고
▶1961년시에라리온,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0년토고,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0년허정 외무장관, 대통령직 대행
▶1959년유소기, 중국 주석에 선출
▶1957년중국, 정풍운동에 관한 지침 공포
👉🏿 중국 현대사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정풍(整風)운동’만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사건도 드물리라.
“무엇이든 말하라. 말하는 자에게는 허물이 없고, 듣는 자는 그것을 교훈으로 삼는다.”
마오 주석이 1957년 4월 27일 발표한 ‘정풍운동에 관한 지시’의 한 대목이다. 국민에게 당 운영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취지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공산당 정부가 어느 정도 비판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꼴이 됐다. 공산당 독재와 마오 신격화에 대한 비난이 가열되면서 지도부는 충격에 휩싸였다.
공산당은 곧바로 정풍운동의 방향을 바꿨다. ‘사상자유화 운동’으로 시작된 이 운동을 2, 3개월 만에 ‘반우파(反右派) 운동’으로 대치해버린 것. 정풍운동 초기 당 지도부의 장려 속에 기탄없이 불만과 비판을 털어놓았던 이들이 갑자기 숙청 대상으로 전락했다. 정풍운동의 여파로 투옥되거나 직위가 박탈된 중국인은 50여만 명에 이르렀다.
최근 공개된 공산당 내부문건을 보면, 당 지도부가 반동분자를 추려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정풍운동을 시작했다는 설이 제기됨 직하다. 당시 마오 주석은 측근에게 “우리는 뱀들을 소굴에서 나오도록 유인 중이야. 그러고 나서 그놈들을 모두 제거해버리는 거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중국에서는 최고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정도만 다를 뿐 한 차례씩 정풍운동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비판과 이견을 허용할 경우 혁명으로 변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공산당 정부로 하여금 합리적인 논쟁보다는 외형적인 정치운동을 일으켜 이를 폭력적으로 통제하는 통치방식에 끊임없이 매달리게 했다.
“잘못된 이론과 정치적 여론을 처벌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조그만 징후라도 강력하게 제압해 초기에 백지화시켜야 한다. 적은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음험한 전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9월 중국 공산당 제16기 전국대표대회 4차 중앙위원회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했던 비공개 연설문 일부다. 약 반 세기 전 무자비하게 우파 숙청에 나섰던 마오 주석의 연설을 듣는 듯하다.
아무리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다 해도 중국이 세계는 물론 아시아의 리더도 되기 힘들게 만드는 멍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공산당 정부의 기본자세다.
▶1949년농지개혁법 국회 본회의 통과
▶1945년이탈리아 무솔리니 애인과 함께 처형
👉🏿 미군과 소련군이 감격의 악수를 교환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직후였다.하지만 이들은 탈출 이틀 만에 목적지인 스위스 땅을 밟지 못하고 북부 코모 호수 근처에서 체포됐다. 무솔리니는 “살려만 주면 제국을 주겠다”고 목숨을 구걸했으나, 용서받기에는 그의 죄악이 너무나 컸다. 4월 27일 약식재판을 거쳐 이들 둘은 사형에 처해졌고,
다음 날 밀라노 로레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군중 앞에 공개됐다. 그야말로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였다.그 이틀 뒤 독일의 히틀러도 권총을 입에 넣고 스스로 방아쇠를 잡아당겼고, 그 애인 브라운은 청산가리를 마시고 숨졌다. 역사는 독재자들의 비참한 최후를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지만, 권력에 취한 집권자들은 역사를 과거의 일로만 치부하려는 것 같은 현실이 안타깝다.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0326&cid=59014&categoryId=59014
▶1935년손기정, 서울에서 개최된 마라톤에서 2시간25분14초로 세계신기록 수립
▶1908년제4회 런던올림픽 개막
▶1906년영국-청 티베트조약 조인
▶ 1906년 영국-청 티베트조약 조인
▶ 1882년 미국 시인, 철학자 에머슨 사망
▶ 1822년 미국 제18대 대통령(1869-1877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 출생
▶ 1794년 청나일강 원류에 도달한 스코틀랜드 탐험가 짐 브루스 사망
▶ 1791년 미국 무선부호(전신기) 발명가 모스 출생
▶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 필리핀 막탄섬에서 전사
👉🏿탐험가 마젤란
1519.9 다섯 척의 함선을 이끌고 신항로 개척 항해를 떠나다
어느 역사학자의 말마따나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유럽의 식탁 위 풍경은 그야말로 단조로운 흑백이었다. 음식의 맛이라곤 싱겁거나 짜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던 유럽의 식탁이 지금처럼 다채로운 색깔과 그윽한 향기를 지닌 음식들로 가득 차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아시아 산 향신료의 도입이란 일대 사건이었다.
고국을 등지고 나선 일생일대의 신항로 개척 원정
향신료는 원산지인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아랍 상인들을 거쳐 유럽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5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중해 동부를 장악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 간의 육로무역이 단절되자, 그 대안으로 대서양을 이용한 해상무역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동남아시아의 향료 제도까지 가는 뱃길을 개척하기 위해 바다로 나섰다. 실패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지만,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해상무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선수를 친 쪽은 포르투갈이었다.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를 적극 지원한 엔리케 왕자(1394-1460)의 선구적인 노력의 결과로 1488년에는 바르톨로메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착했고,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에스파냐에서는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도착함으로써 사실상 신대륙의 발견자가 되었다. 그리고 1519-1522년에 에스파냐에서는 사상 최초로 세계일주 원정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니, 그 중심에는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있었다.
마젤란 원정대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빅토리아 호
당시의 모험가들이 종종 그러했듯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똑같은 이름이 다르게 불리는 일이 허다했다. 가령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고국인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원정 후원국인 에스파냐에서는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영어식 철자며, 그의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Fernão de Magalhães), 원정 후원국인 에스파냐에서는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Fernando de Magellanes)로 불렸다. 하지만 보통은 영어식 철자가 유명하므로 이 글에서도 ‘페르디난드 마젤란’으로 통일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1480년에 포르투갈에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 왕궁에 들어가 시동으로 일했다. 1495년에는 인도 원정에 참가했고 8년 동안 동남아시아 여러 교역소에서 해상무역 경험을 쌓았다. 1513년에는 모로코에서 전투 도중에 무릎을 다쳤고, 그로 인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후 그는 향료 제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겠다는 열망에 불타서 포르투갈 왕실에 세 번이나 원정 후원을 요청했지만 연이어 거절당했다. 고민 끝에 마젤란은 다른 나라를 찾아가 방법을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마젤란이 고국인 포르투갈을 버리고 에스파냐와 협력해 원정을 떠난 것은 마치 변절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모험을 꿈꾸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외국 정부의 후원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가령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에스파냐 정부의 후원을 받았고, 이탈리아인 아메리고 베스푸치 역시 서로 앙숙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양쪽 모두에서 후원을 받았다. 마젤란의 원정대만 해도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프랑스인, 영국인 등 여러 국적의 선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517년에 에스파냐의 세비야에 도착한 마젤란은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접근했다. 당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서경 46도 30분을 기준으로 각각 동쪽과 서쪽에 대한 영유권을 소유하기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에스파냐로서는 포르투갈의 영역인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기존 항로 대신, 자신들의 영역인 남아메리카 하단을 우회하는 신항로를 통해 향료 제도로 가자는 마젤란의 제안이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었다. 과연 그런 항로가 있는지 여부는 물론이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목적지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상 반란을 제압하고 마젤란 해협과 태평양을 지나 필리핀에 도착하다
1518년에 카를로스 1세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젤란은 곧바로 원정 준비에 착수했다. 트리니다드, 산안토니오, 콘셉시온, 빅토리아,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함선 다섯 척으로 이루어진 ‘몰루카 함대’(목적지인 몰루카 제도에서 따온 이름)에는 모두 260명의 선원이 승선했다. 마젤란이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아 원정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포르투갈 측은 뒤늦게야 회유와 협박을 동원해서 마젤란에게 원정 포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이런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격분한 포르투갈 정부는 마젤란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그를 붙잡기 위해 훗날 대서양이며 향료 제도로 추적대를 급파했다.
1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친 원정대는 1519년 8월 10일에 세비야를 떠났다. 일주일 뒤에 에스파냐 남단의 항구도시 산 루카르 드 바라메라에 도착한 일행은 대서양에 접어들기 직전 그곳에서 마무리 준비를 했다. 이때 마젤란은 24일자로 미리 유서를 써서 남겼다. 1519년 9월 20일, 마젤란의 원정대는 드디어 역사적인 첫 걸음을 내디뎠다. 대서양을 횡단하던 도중에 함대는 두 달 가까이 폭풍에 시달리며 악전고투했다. 하지만 마젤란에게는 자연의 위력보다도 더 심각하고 더 고질적인 고민거리가 있었다. 바로 부하들의 반항이었다.
마젤란의 선원 가운데에는 에스파냐인이 절대적으로 많았으며, 이들은 마젤란을 비롯한 포르투갈인 동료들에게 은연중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젤란은 신항로를 개척한다는 임무를 줄곧 비밀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의혹을 샀다. 네 척의 함선을 지휘하는 선장들도 마젤란에게 불만을 품었다. 특히 왕의 측근으로 마젤란을 감시하기 위해 원정에 동행한 후안 데 카르타헤나는 노골적으로 총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했다. 분노한 마젤란은 카르타헤나를 체포했다가 다른 선장들의 만류로 풀어주었는데, 이는 머지않아 더 큰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출발 4개월 만인 12월 13일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한 원정대는 본격적으로 남쪽의 우회 항로를 찾아 다닌다. 그러나 아무 성과 없이 시간만 흐르자 선원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다. 1520년 3월 31일, 원정대는 남반구의 겨울을 나기 위해 훗날 푸에르토 산 훌리안이란 이름이 붙여진 자연항에 닻을 내린다. 바로 이곳에서 선원들의 불만은 결국 반란으로 폭발했다. 4월 2일, 다섯 척의 함선 가운데 세 척이 반란자의 손에 들어갔다. 마젤란은 협상을 도모하는 척 하면서 부하를 시켜 반란 주모자를 제거하고 함선 한 척을 탈환한 다음, 세 척의 배로 항구를 봉쇄하고 나머지 두 척의 항복을 받아냈다.
마젤란 해협 지도
재빠르고 단호한 조치로 반란을 신속히 제압한 마젤란은 카르타헤나를 비롯한 주동자를 가혹하게 처벌했고, 사형 선고를 받은 40명의 선원은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면해 주었다. 10월 21일, 원정대는 남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무려 10개월 만에 훗날 마젤란 해협으로 알려지게 된 곳의 입구를 발견한다. 한 달 만인 11월 28일, 함대는 해협을 무사히 통과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낯선 바다에 들어섰다. 마젤란은 이전까지의 바다와는 달리 훨씬 넓고 깊고 잔잔한 이곳에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함선의 숫자는 세 척으로 줄어 있었다. 산티아고 호는 해협에 들어서기 직전에 그만 좌초했으며, 산안토니오 호는 명령에 불복하고 단독으로 귀향길에 올랐던 것이다. 산안토니오 호의 이탈은 원정대에 큰 타격을 가했다. 한편으로는 그 함선에 식량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귀환한 선원들이 원정이 실패했다고 단언하며 모든 책임을 마젤란에게 덮어씌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에스파냐에 남아 있던 마젤란의 가족은 당국의 탄압을 받았으며, 이런 오해는 마젤란의 사후까지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원정대는 해협을 통과한 지 4개월 만인 1521년 3월 16일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훗날의 필리핀 제도에 도착한다. 마젤란은 본격적으로 원주민과 접촉해 식량과 정보를 얻는 한편,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마젤란은 원주민 간의 분쟁에 불필요하게 끼어드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한다. 원정대의 막강한 무력을 과신한 마젤란은 우호 관계를 맺은 부족을 거들어 다른 부족을 정벌하러 나선다. 그러나 막탄 섬으로 쳐들어간 마젤란과 부하들은 원주민의 거센 반격으로 인해 패배했고, 마젤란은 그곳 해안에서 원주민의 칼에 난자 당해 죽고 말았다. 1521년 4월 27일의 일이었다.
위대한 탐험가인가, 아니면 무자비한 침략자인가?
전기작가 로런스 버그런은 마젤란의 허망한 죽음이 지나치게 무력에 의지해 자만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제까지의 항해에서 마젤란은 여러 번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폭풍에서 괴혈병에 이르는 자연 재난은 물론 선상 반란이라는 위기도 극복했다. 결국 그가 극복하지 못한 가장 큰 장애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총지휘관을 잃은 함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향료 제도를 향한 여정은 계속되었지만 연이은 원주민과의 충돌로 상당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콘셉시온 호도 완전 파손되었다. 1521년 11월 8일, 두 척의 함선에 나눠 탄 원정대는 드디어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다. 에스파냐를 떠난 지 무려 27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원정대는 귀한 향신료를 헐값에 잔뜩 사들여 귀향길에 올랐다. 트리니다드 호는 중도에 포르투갈 함대에 나포되었지만, 빅토리아 호는 1522년 9월 6일, 천신만고 끝에 고국에 도착했다. 함선 5척과 선원 260명으로 이루어졌던 원정대의 규모는 3년여 만에 함선 1척과 선원 18명으로 줄어들었다.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했다는 명예로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나 배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배에는 무엇보다도 값진 보물이 들어 있었으니, 바로 유럽에서도 최고로 치는 향신료 정향이었다. 그 한 척에 실려 있는 정향만 팔아도 원정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건지고 심지어 막대한 이익을 남겼을 정도였다.
마젤란의 초상(왼쪽)과 라푸라푸의 동상(오른쪽)은 이 탐험가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시선을 상징한다
하지만 원정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마젤란에 관한 평가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반역자 취급을 받았고, 후원을 받은 에스파냐에서도 자칫 원정을 수포로 만들어버릴 뻔했던 위험인물 취급을 받았다. 원정대의 일원이었으며 마젤란과도 절친했던 베네치아 출신의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비교적 공정한 항해 일지가 간행되었지만 그런 여론을 바꾸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중에 마젤란의 항로를 따라간 후속 원정대가 연이어 큰 손실을 입고 돌아오자, 그제야 사람들은 갖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비교적 적은 손실만으로 목적지에 도달한 마젤란의 비범한 능력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마젤란은 워낙 꼼꼼한 성격이어서 배에 싣는 물품을 일일이 확인하고, 종종 말단 선원들의 일까지 직접 챙겨주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원정 내내 부하들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지 못했고, 항상 반란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마젤란의 성격에 대해서는 성미가 급하고 분별이 없다는 평가와 함께, 지나치게 고지식한 것이 탈이라는 평가도 있다. 나아가 그는 워낙 왜소하고 볼품없는 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종종 남에게 얕잡아 보이곤 했다. 포르투갈에 살다가 중년이 되어서야 에스파냐로 건너왔기 때문에 평생 에스파냐어에 능통치 못했다는 것 역시 원정대 지휘관으로서는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마젤란의 세계일주’라는 표현은 적절치가 않다. 왜냐하면 마젤란은 애초에 세계일주를 의도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도중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원정대의 세계일주는 그 이전까지 서양인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트렸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되었고, 여러 대륙과 항로에 관한 여러 가지 잘못된 지식들도 수정되었다. 나아가 에스파냐는 마젤란의 위업을 계기로 포르투갈을 앞서는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로런스 버그린은 세계일주보다도 훗날 마젤란 해협으로 알려진 곳의 발견 및 통과가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단언한다. 1914년에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해협은 무척이나 중요한 통행로로 각광을 받았다.
유럽에서는 여전히 위대한 탐험가로 칭송되는 마젤란이지만, 막상 그가 최후를 맞이한 필리핀에서는 침략자에 살인자로 기억된다. 그를 죽인 원주민 추장 라푸라푸는 시신을 반환해 달라는 원정대의 요청을 거절했고, 그리하여 마젤란은 무덤은커녕 변변한 유품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막탄 섬에는 오늘날 마젤란의 동상 대신 라푸라푸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비 한쪽에는 “포르투갈의 위대한 탐험가 마젤란이 살해된 곳”이란 설명이, 또 한쪽에는 “위대한 족장 라푸라푸가 마젤란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쫓아냈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마젤란에 대한 극단적인 시각차를 이것보다 더 잘 보여주는 증거가 또 있을까.
▶ BC 399년 소크라테스 독배 마시고 사망
소크라테스는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까지도 토론을 벌였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유화 '소크라테스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