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정통론은 정치갈등,좌우갈등이 극심한 한국사회에 새로운 분란의 불씨
학문의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이, 우리나라 역사학계에도 다양한 학설이 분분하게 존재하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 사학계는
민족종교 계열 인사들(단단학회 교주 이유립, 태백교도 출신 계연수 - 실존여부 불분명 -등)이 깊숙이 개입되어 만들어진 위서(僞書) 환단고기의 불에 단단히 데인 경험이 있어서인지 정통사학계의 흐름과 너무 어긋나거나 배치되는 주장을 이단시,터부시 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위서에 데인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주류의 학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비난하는 이와같은 사학계의 경향은 마땅히 시정되고 개선되어야 할 문제다.
헌데 최근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또다른 이단적 주장이 힘을 싣기 시작 눈길을 끌고 있다. 우리민족의 뿌리는
신라이며 또 그 기원이 흉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른바 ‘신라정통론’ 또는 ‘흉노조상론’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신라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이종욱 교수에게서 출발한 ‘신라정통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산] 신라정통론이 아니고 신라회복론이다 즉 소외되고 비참해진 반도사관에 의해 천자국 신한조선의 신한을 이은 신라가 사방 100리의 부용국이라는 개새끼 우똥이가의 삼한설, 삼한이라도 사방 4000리면 사방 4000리는 그려야지 이건 1/10로 400리안에 도시국가로 전락시킨 개자식이 우똥이가 병신도다, 감히 쪽발이 개쪽 원숭이 엉덩이 햝는 개새끼 집안의 소똥의 쥐새끼가 무슨 한문을 읽고 무슨역사를 한 것인가? 이에 대한 비판은 수십년 된 과정에서 박헌영역사문제연구소 박원순의 북조선 산돼지론으로 예맥족이 정통이다 즉 고구려 패러다임에 1980년대부터 통일신라시대가 "남북국시대"로 발해가 정통으로 국통맥으로 이는 매국행위로 매족행위입니다, 북조선 아새끼론이라고 그게 김용옥은 문사철 짱개 철학으로 언어해독학이 아니다, 일말의 서지학적 고찰도 없는 뻘해 발해가 왜 만주냐? 왜 한반도아래에 4000리냐고? 단 한마디도 못하는 개병신 마르크스 개새끼론으로 뭘 없애고 지랄하고 있냐고 이 닭대가리 유태잡배놈들아, 뭐가 단군이 신이야, 뭐가 아브라함이 니네 시조면 너나 꺼져 主神이 애비면 니가 대신 군대에 가서 서울시경 의무경찰하라고, 이 늙어 찌부러든 바크 원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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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여에서 시작 고구려-백제로 이어지는 고대국가와 신라는 그 형성과정과 민족 구성원 그리고 그 뿌리가 다를 수 밖에 없으며, 둘째로 현존 우리나라 성씨중 5대 성씨에 해당하는 김(金),이(李),박(朴),최(崔),정(鄭)을 비롯한 대다수 성씨가 그 뿌리가 신라에서 시작되었으며 정작 고구려나 백제의 성씨는 현재 남아있는 성씨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며, 셋째로 신라의 풍속이 흉노와 비슷한점이 많음을 들며 그 뿌리가 신라에서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히 이와같은 신라 정통론은 근래들어 일부 보수진영이나 소위 ‘영남 인종주의자’들의 호남이나 북한을 배척하는 분위기나 목소리에 제법 힘을 실어주고 있기도 하다. 즉 신라정통론이 다분히 정치적 목적에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그림이 기원후 3세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라고 하는데 전혀 맞지도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사방강역과 그 내용이 한반도에 꾸역꾸역 집어넣은 것으로 무얼 이야기하는가? 년대표도 없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이것이 기원후 3세기의 저술이리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삼국건국년대를 부인한 이유가 없다, 과연 신라의 초기 徐羅伐이 저 경상도 경주인 이유를 설명하란 말이다 그 어디에도 없는 개소리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대륙백제-신한을 진한이라고 해서 斯盧國으로 사방 10리? 사방 100리가 국가냐? 나라라고 하는가? 어디서 저런 개소리로 마한 백제, 신한-신라- 변한/가야로 어디에 그렇게 나오고 사방 4000리라면, 한반도가 대략 사방 3000리로 이게 무슨 개그림이냐고? 이는 "족발이 우똥이가의 개새끼론으로 삼한론/원삼국시대" 삼국유사/삼국사기 초기내용 불신이라고 하는데 이는 기본 개념상실증 개쪽발이 삼한설로 조작된 의도적인 백제말살과 신라말살 그리고 고구려로 눌러서 똥칠하는 개새끼론이다.
하긴 이와같은 소위 신라정통론은 비단 사학계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그와같은 주장을 한 사람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사가 5공 실세 3허(許)중 한 사람인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이다. 허씨 주장의 핵심은 ‘남북 분단이 장기화 되면 고구려가 북한처럼 보이고 신라가 남한처럼 보일수 있으니 고구려를 낮추고 신라를 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근래에는 그와같은 허씨의 주장을 대표적인 보수 언론인이자 논객인 조 모씨가 계승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신라의 삼국통일 자체가 광활한 만주땅을 잃었다는 점에서 날이 갈수록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고, 오히려 드넓은 땅을 지배한 고구려가 갈수록 우리 민족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있는 판에 오히려 고구려를 배척하고 신라를 띄워주어야 한다는 ‘신라정통론’은 대중정서와도 정면으로 배치되고 너무 괴리감이 있는 주장이라 매우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종욱 교수가 뿌리인 ‘신라정통론’은 과연 온당한 주장일까. 필자는 한번 작심하고 이교수 주장의 문제점을 파헤쳐보기로 했다.
1. 백제-고구려와 신라는 그 뿌리와 혈통이 다른가 ?
우리나라 고대3국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신화를 놓고보면 확실히 부여-고구려-백제는 한 계통임을 짐작할수 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부여에서 나왔고 백제 역시 주몽 이후의 왕권다툼에서 밀려난 세력(비류,온조)이 남쪽으로 내려와 터전을 잡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경우는 ? 일단 박혁거세나 김알지 또는 석탈해등의 탄생설화를 볼때 확실히 외부에서 유입된 이들이 왕권을 잡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산] 우선 민족의 계통으로 우리는 韓族으로 "하나겨레"입니다.
,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
[94]에 이르기를 구한(九韓)의 첫째는 일본(日夲), 둘째는 중화(中華), 셋째는 오월(吳越), 넷째는 탐라(乇
[95]羅), 다섯째는 응유(鷹逰), 여섯째는 말갈(靺鞨), 일곱째는 단국(丹國), 여덟째는 여진(女真)
[96], 아홉째는 예맥(穢貊)이라고 하였다.
신라는 - 신한으로 日本으로 이 일본은 夫餘로 나 알은 북극성이라는 소리지 해가 아니다, 즉 나 일릐 뿌리는 알[●]로 一이다,
고구려는 마한조선으로 "말갈, 거란, 여진, 예맥"의 4족을 말합니다.
즉 우리는 "신한[辰韓]"이 단군조선이고 고조선의 단군의 태자 알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도록 교육받아서 신라 금씨와 가야 금씨 그리고 신라는 부여로 동명 부여에서 신한지지의 신한사람이다는 사실을 말살당한 것으로 난생설화란 북극성의 수정자로 태자 알자로 알이로 아리다.
우선 한반도는 고조선 강역중 1개주일 뿐이다 즉 "강동주"로 江東州"로 이는 고조선의 9州중 삼한중 신한조선의 "강동주, 알주/간도와 연해주 그리고 아사달주"의 고조선강역과 일치하는 신한조선=단군조선으로 "번한/변한조선"의 료하촌이나, 마한-숙신/숙사 즉 만주평원과 구월산, 대흥안녕산맥 재서와는 차이가 있다, 즉 현재 예맥족중 맥족으로 북맥/북부여의 해모수를 시조로 한다는 고구려는 맥족으로 마한조선인이다, 백제는 고구려 고주몽의 후손으로 貊족-百族으로 나오는 남삼한입니다.
이 고조선 강역은 우선 '신한조선"으로 대부여 등으로 "단군조선지지"입니다. 착각하는 것이 고조선은 이미 대부여로 폐관한 것이 기원전 238년입니다,
참고로 단군왕검의 9州로 사방 3만리의 고조선중, 신한과 마한 그리고 변한을 대강이라도 알아야 서로 이야기가 됩니다.
戊午五十一年. 洪水旣平, 化被四土. 北曁大荒, 東窮滄海, 南至海岱, 西率獗猶, 東西五千餘里, 南北六千餘里. 區劃天下之地, 分封勳臣爲諸侯. 環南西地封蚩尤氏之後, 曰藍國侯, 在遼河近地, 宅奄慮忽. 環北東地封臣智氏之後, 曰𠐍侲國侯, 在黑水東南地, 宅夙沙忽【肅愼】. 環南東地封高矢氏之後, 曰靑丘侯, 在大同江近地, 宅樂浪忽. 封朱因爲蓋馬侯, 在太白山東南地. 封余守己爲濊國君, 在黑龍江近地, 治濊城. 封緋天生爲南海長, 在渤海上, 守閻洋. 封夫餘爲餘州侯, 在濊地南. 封夫宇爲眞蕃侯. 封夫蘇爲句麗侯.
戊午(무오, BC2283) 51년. 홍수가 이미 평정되고 교화가 사방을 덮었다. 북쪽은 大荒(대황)에 미치고 동쪽은 滄海(창해)에 닿으며 남쪽은 海岱(해대)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獗猶(궐유)[32]를 다스렸으니 동서 5000여리이고 남북으로 6000여리이다. 천하의 땅을 나누었는데 군신은 공적에 따라 제후로 임명하였다.
남서쪽을 둘러싸도록 蚩尤(치우)씨의 후손을 봉했는데 藍國(람국) 侯(후)라고 하였으며 遼河(료하) 근방의 땅이고 奄慮忽(엄려홀)에 도읍하였다.
북동쪽을 둘러싸도록 臣智(신지)씨의 후손을 봉하여 𠐍侲國(속진국)[33] 侯(후)라고 하였고 黑水(흑수) 동남쪽의 땅이고 夙沙忽(숙사홀)【肅愼(숙신)】에 도읍하였다.
남동쪽을 둘러싸도록 高矢(고시)씨의 후손에게 봉하여 靑丘(청구) 侯(후)라고 하였는데 大同江(대동강) 근방에 있고 樂浪忽(락랑홀)에 도읍하였다.
朱因(주인)씨를 봉하여 蓋馬(개마) 侯(후)가 되게 하였고 太白山(태백산) 동남쪽의 땅에 있다.
余守己(여수기)를 봉하여 濊國(예국) 君(군)이 되게 하였고 黑龍江(흑룡강) 근처에 있으며 濊城(예성)에서 다스렸다.
緋天生(비천생)을 南海(남해) 長(장)에 봉하였고 渤海(발해) 위에 있는데 바다의 관문을 지킨다.
夫餘(부여)를 봉하여 餘州(여주) 侯(후)가 되게 하였고 濊(예)의 땅 남쪽에 있다.[34]
夫宇(부우)를 봉하여 眞蕃(진번) 侯(후)가 되게 하였다.
夫蘇(부소)를 봉하여 句麗(구려) 侯(후)가 되게 하였다.
즉 이는 동서 5000리 남북 6000리로 사방 3만리로 강동주 대동강변 낙랑홀은 강동주로 "한반도"로 이는 사방 3천리로 보면 9개주로 삼개주씩 삼한이 관리한 삼삼주의 9주로 진단 구변의 도로 강 제후로 봉한 기록입니다, 구려는 부소로 수분하, 즉 료하의 남단의 구려라고 합니다.
9월에 첫째 동생 부여를 遼西(료서)에 봉하고 茫球王(망구왕)이라 하였고, 둘째 동생 부우를 東海(동해)가에 봉하고 東平王(동평왕)【혹은 東海王(동해왕)이라 하는데, 三韓(삼한)은 즉 그의 후손이다.】이라 하였고, 셋째 동생 夫蘇(부소)를 綏芬河(수분하)에 봉하여 句麗王(구려왕)이라 하였다.[2]
즉 현재 말하는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의 발견지역으로 "고조선강역"은 신한조선으로 단조로 단군세기의 단군조선입니다, 고지신국으로 고조선의 신한이라는 소리로 이는 "한사군"으로 번한조선-위만조선-한사군-이부로 이는 濊로 東濊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자세히 나오는 지역입니다.
貊族은 고조선기에서는 마한조선에 거주한 1개족으로 맥족으로 마한/막한/맥한으로 기원전 425년 대부여후에는 "북막, 북맥"으로 북맥의 족장이 해모수로 웅심산에서 대부여에 대한 북부여로 반란입니다.
癸丑十五年. 封弟嘉祿爲阿闍王, 賜國, 號曰阿斯達, 都唐莊京【白岳】, 築城, 設邑. 人民多聚成都, 作一萬戶.
계축(癸丑, 2168) 15년. 아우 嘉祿(가록)을 阿闍王(아도왕)으로 봉하고 국가를 주고 국가이름을 아사달(阿斯達)이라 하고 당장경(唐莊京)【白岳(백악)】에 도읍하였다. 성을 쌓고 마을을 건설하니 인민들이 많이 모였으니 1,0000호가 되었다.
甲寅十六年. 阿闍王 以韓天寬爲太宰, 吳善爲都統.
甲寅(갑인, BC2167) 16년. 阿闍王(아도왕)은 韓天寬(한천관)을 太宰(태재)로 하고 吳善(오선)을 都統(도통)으로 삼았다.
乙卯十七年. 阿斯達遺族貊酋據黃州而叛, 阿闍王遣吳善討平.
乙卯(을묘, BC2166) 17년. 阿斯達(아사달)의 遺族(유족)인 貊(맥)의 추장이 黃州(황주)를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阿闍王(아도왕)이 吳善(오선)을 보내 토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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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
병진(丙辰) 원년 (전545년)
신묘(辛卯) 36년 태자 달음이 즉위했다
[맥(貊)은 부여 사람이 알유에 살다가 돌아온 사람으로 가죽 옷을 입었다. 남하하여 엄독홀(奄瀆忽) 북쪽에 살다가 람(藍)국의 백성이 되었다.
남(藍)후(侯)는 고죽국의 군주(君主)를 몰아내고 남쪽으로 도읍을 옮겨 엄독홀에 정착했다. 무척 강성하여 빈(邠)기(崎)에 군사를 보내 흘달 단군때부터 그 곳에 옮겨 정착해 살던 우리 백성들을 모아 여(黎)국을 세웠는데 여(黎)홀(忽중심도읍)은 은나라 제후들과 서융(西戎)들 사이에 함께 했다. 남(藍)국의 위세는 항산(산시성 오대산)에 까지 이르렀고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남국이 말기(46대)에는 제후국을 거느리는 강국이 되었다./ 위 내용은 <규원사화>에 기록된 내용이다]
貊족 阿斯達[扶餘로 夫餘가 아니다, 평양으로 수도라는 말]에 살던 유족으로 가죽옷을 입고 엄독홀 엄리홀로 수분하의 구려지역에 살게 된 것으로 고죽국 句麗/高麗로 나오는 맥족입니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庚辰) 원년(전 461년)
을묘(乙卯) 36년 (전 426년) 융안(隆安)-맥족의 사냥꾼 우화충(于和沖)이 장군(將軍)을 칭하며 수만 명을 이끌고 신한 서북 36군(郡)을 함락시켰다. 제(帝)가 군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하자 궁인과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갔으나 그곳에서 죽었다. 그해에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도왔다.
[남(藍)후(侯) 검달이 청구후 구려후 속진후와 더불어 은나라를 제압하고 회대(淮岱)의 땅에 제후국을 세웠는데 청주(산동성)땅에 엄(奄)국을 세우고 박고씨에게 맡기고 회북(淮北)의 서주(徐州) 땅에 서국을 세워 영고씨에게 통치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규원사화에 있다.]
[여기서 장군(將軍)은 천자(天子)를 의미한다.][해두=해란강 끝자락?] [이때 단군조선 특히 신한은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丙辰) 원년 (전 425년) 3월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우화충의 병사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이 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제거해 버렸다. 3월 16일 구물이 장수들의 추대로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병진년(전425년)에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 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하였으며 도읍을 백악에서 장당경으로 옮겼다. 금팔조(禁八條)를 만들고 책읽기와 활쏘기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과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에 힘쓰도록 하였다. 산과 못에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였고 죄가 처자에게 미치지 않았으며(연좌제 금지) 백성(화백)과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여 일을 처리했다. 삼조선은 단군(진조선의 통치자)을 최고 지존으로 모시지만 군사통제권은 각 조선(韓)들이 갖는 형태가 되었다. [장당경은 그 당시 평양이었으며 지금의 개원이다. 구물의 즉위를 다른 한(韓)들이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상 연방해체의 전단계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변(弁)한은 번(番)조선으로 호칭하게 된다.]
7월에 해성(海城)을 개축하여 평양이라 하고 이궁(離宮)을 짓도록 하였다.
정사(丁巳) 2년 3월 16일 삼신(三神)영고(迎鼓)의 제를 올렸다. 천제(天祭)는 삼육대례(三六大禮)(369) 방식으로 한다.
임신(壬申) 17년 감찰관을 각 주군(州郡)에 파견하여 효자와 청백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갑신(甲申) 29년 태자 여루가 즉위하였다.[주(州)는 지금의 도(道) 규모이다.]
이 내용은 弁韓이 번한으로 이름변경의 이유로 기원전 425년 "신한조선"이 대부여로 개창하면서 삼한조선이 붕괴된 마한의 도발에 의한 맥족, 거란족등 마한족들의 신한 북부 36개군과 아사달 백악산을 휩쓴 대란입니다.
貊족은 강성한 기질의 "마한조선"의 족으로 이는 마지막으로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북맥을 "북부여"로 천제를 칭한 고조선/대부여의 패망의 주요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7세 단군 고열가 58년
병인(丙寅) 원년 (전 295년)
기묘(己卯) 14년 백악산에 단군왕검의 묘를 세우고 제(帝)께서 1년에 한번 제사를 지냈다.
계축(癸丑) 48년 시월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이해 겨울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임술(壬戌) 57년 (전 239년) 4월 8일 해모수가 웅심산(길림성 서란)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句麗] 사람이었다.[고리는 고려와 같고 료주[遼州]를 의미한다]
계해(癸亥) 58년 (전 238년) 제(帝)는 어질고 순하지만 결단력이 없어 여러 장수들이 난(亂)을 일으켰다. 3월 제(帝. 고열가)가 정치를 오가(五加 조정의 신하들)에게 넘기고 입산(入山)하였다. 그 후 오가에 의한 공화정치가 6년간 지속되었으나 사가들은 전238년 이때를 단군조선(신한조선)=대부여의 멸망시기로 본다.
단군조선[신한 대부여]은 단군왕검이 무진년(전2333년)에 건국하여 47명의 단군에 의해 2096년간 지속되다가 전238년에 폐망하였다. 단군전기(前期)는 단군삼한이라 하고 후기(後期)는 단군조선으로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 바람직 할 수 있다. 단군조선 멸망후 북쪽지방은 흉노가 주도하게 되고 남쪽지역은 북부여[북맥]세력이 그 권력을 계승하였다.
이 이야기는 물론 단군세기의 내용으로 다 믿어라가 아니고 우선 대강의 이야기로 北貊으로 알려진 해모수의 북부여는 원 부족명이 貊族으로 마한의 북막, 북맥으로 마한/막한/맥한의 韓에서 기원전 425년 탈퇴? 대반란으로 마한세가의 계보가 흐지부지된 상태로 이를 또, 해모수가 대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북부여기 등의 미화는 결코 용납이 아니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중에서 貊족과 흉노족?이라고 하는데 匈奴는 사마천의 사기에 凶奴라서 그러한 것이고 須臾족으로 수유는 바로 서우여로 번한세가 하. 변한의 번한으로 기원전 1285년에 변한 료하촌의 제후로 番汗으로 제후로 삼한의 하나인 변한조선의 제후 汗의 자손으로 奇子로 불린 분이 바로 "須臾" 서우여로 은나라 패망시 子, 胥餘[서여]로 태행산으로 도피한 분의 자손이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48년
병신(丙申) 원년 (전1285년) 제(帝)께서 녹산(鹿山 제단이 있는 산)에서 도읍을 세우(築)시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에 장당경에 고등의 묘를 세웠다. 11월 구환(九桓 환웅)의 군사를 이끌고 은나라 도읍을 공략하여 화친하고 또 싸웠다.
정유(丁酉) 2년 (1284년) 2월 변한의 백성들을 회대(淮岱 회하와 대수 사이)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신축(辛丑) 6년 신지 육우가 아사달(阿斯達)은 천년 왕도라 하지만 대운이 이미 다하였고 영고탑(寧古塔)은 왕기(王氣)가 짙어 백악산(白岳山)을 오히려 능가하므로 도읍을 옮길 것을 간청하였으나 신도(新都 장당경)에 이미 거처가 있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신도(新都)는 장당경을 말하며 도읍을 옮긴 것 보다는 두 개의 도성(都城)을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장당경은 제2의 도성이다.]
을묘(乙卯) 20년 람국(藍國 남국)이 강성하여 고죽국과 함께 적을 남으로 축출하고 엄독골(제남의 南西지역)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누어 빈(邠 산서성 중남부), 기(岐)에 나누어 웅거 하도록 하여 그곳 유민과 함께 나라를 세우니 여(黎)이다. 이들은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에 있었는데 람(藍)의 위세는 항산(恒山)에 까지 이르렀다.[기자(箕子)=기(箕)국의 지도자] [기(箕)=산서성 태원시 주변=수유사람][여(黎)=산서성 여성현][항산(恒山)=산서성 오대산]
신미(辛未) 36년 (1250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켜 제(帝)가 영고탑으로 피신하니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백악산 아사달에 있다가 난을 맞았다.]
계미 48년 제(帝)가 죽고 태자 아홀이 즉위하였다.
번한세가에서는 須臾로 서우여로 변한조선의 제30대 번한으로 봉해진 분으로 箕국으로 기산으로 료산옆으로 산서성 태원시 즉 "료주의 평양" 료양입니다, 은나라 패망전의 기원전 1285년 - 1250년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奇子朝鮮으로 箕子朝鮮과는 다르다? 같다는 이야기로 우똥이가 병신도는 전면 부정한 한씨조선설로 얼버무린 것으로 "번한세가 하."의 이야기 기원전 1285년 ~ 기원전 194년 74대 번한 기준까지의 번한세가 하.편의 이야기입니다.
족으로 匈奴라고도 하나, 須臾族으로 이를 흉노라고 하고 후에 묵돌 單于로 흉노로 "국호"로 개창한 것으로 국호입니다, 즉 선우씨란 太原시가 본관인 鮮于씨로 기자조선 奇子 수유, 서우여의 후손으로 우리는 번한세가의 삼대성씨로 奇씨, 箕子씨의 기후[기원전 323년 제69대 번한] 에서 기준[기원전 194년] 그리고 기 준이 청주 韓씨로 馬韓을 건국한 사람으로 청주 한씨족보에는 기원전 17년 백제 온조에게 정복당함,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기원후 9년 정복하여 그 위에 "백제"가 들어선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즉 이들 번한조선은 삼한족으로 신한조선의 일족으로 이들이 "번한조선"이 연나라 위만에게 찬탈당하고 海[료해, 발해, 한해]라는 곳을 지나, 남하하여 漢水지역으로 대이동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해모수 북부여 개창 기원전 239년 - 기원전 86년
임술년(壬戌年, 기원전 239년) 진(秦) 시황제(始皇帝) 때 신인(神人) 대해모수(大解慕漱)께서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셨다. 정미년(丁未年, 기원전 194년) 한(漢) 혜제(惠帝) 때 연(燕) 유민들의 우두머리 위만(衛滿)이 서쪽 변방 땅 일부를 도적질하여 차지했다. 이에 번한(番韓)의 왕인 준(準)이 맞서 싸웠으나 당해내지 못하고 바다로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삼한(三韓)에 속해있던 백성들은 대부분 한수(漢水) 이남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후 한때 군웅들이 요해(遼海)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켜 서로 힘을 겨뤘는데, 계유년(癸酉年, 기원전 108년) 한 무제(武帝) 때 한(漢)이 쳐들어와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멸망시켰다.
단순하게 보는데 이 북부여/북맥은 반란 쿠데타로 적고 있고 이를 그렇게 보는 것이 고려시대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사관입니다, 즉 신한조선 =대부여, 고조선 폐관을 이끈 이가 바로 해모수로 웅심산은 몽골자치구로 료서지역에서 "단군 천자"가 계신 대부여로 천자위의 "천제"를 칭하고 천자국의 夫餘로 북부여로 북맥족장이 북부여로 칭하고 강압을 한 것으로 기원전 239년의 일로 이에 대한 답이 바로, 수 2096년의 고조선/대부여의 폐관으로 하야하고 산신령이 되어 고조선/대부여 폐관이고 오가에게 일러서 공화정으로 행하라, 절대 해모수에게 단군위를 줄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종묘사직에 고하고 고조선/대부여 폐관으로 패망시점입니다, 일제시 렬국 고조선/대부여 신한조선의 렬국시대로 고하고 있습니다, 이에 다시 공화정 6년째인 기원전 232년에 다시 번한의 기비와 자고 해모수가 아사달 백악산과 장당경을 무력으로 찬탈하고 옥새와 단군위를 탈취한 것으로 이 또한 반란으로 신한조선의 지지중 아사달주의 강취입니다,
해모수를 좋게 본 것은 마한계 사학자들로 마한, 즉 고구려-발해와 료나라, 금/청의 마한계 예맥족, 말갈족-거란족 그리고 여진족으로 마한족들입니다, 일관되게 북부여기-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국본기로 마치 고려가 천자국인데 국으로 대진국을 이은 나라로, 료나라의 하국으로 고성이가 망족가문의 개소리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유립으로 전혀 환단고기는 환단 고조선기지 그 정통성을 마한족에게 넘길 의미가 없는 개소리의 연속이 되고, 천자국에서 國으로 썼다는 망언을 유포하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이 맥의 개소리다.
해모수에 대한 반발은 심하여 분렬로 렬국입니다, 북맥으로 연나라와 함께 한나라 고조를 도와 초나라를 쳐서 한나라 건국의 공로자로 북맥의 해모수가 등장하고 노관이 흉노 수유족의 국인 "동호"의 왕으로 도망치나, 묵돌 선우의 등장으로 이 동호의 선비족 노관의 일족은 참수로 싸그리 목을 베는 참화를 겪고 북부여 북맥을 인정치 않고 독자적인 흉노로 單于로 당리의 고도로 천자 하늘의 아들로 단간[檀干]으로 단군의 칭으로 번한세가로 고조선의 맹주로 떠오릅니다. 그게 국호 흉노로 흉은 旬 하늘의 광명의 사람으로 旬人으로 十日人으로 東으로 韓이다 이는 순다음의 음은 [훈]이지 흉이 아니다, 奴는 종놈 노가 아니고 누리로 천지 누리로 나라이름 노로 奴禮夫, 奴里夫=世宗, 黃宗이라는 신라향찰에서도 그대로 누리 奴로 나라이름 노로 盧로 斯羅/斯盧로 신라와 같이 바로 천자국호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북맥? 북부여의 이야기는 전무하고 "흉노열전"으로 흉노안에 신한으로 나오는 조선열전 -번한조선의 북부, 단군조선 신한을 고지신한 신국으로 고조선의 신한, 신국으로 신국[辰國]으로 한대신 국으로 해서 국명을 國으로 낮춘 것으로 匈奴로 이는 족이 아니고 국명으로 봐야하고 천자국으로 북방제족의 연맹체라는데 천자국이고 중심 천자는 太原시가 본관인 鮮于씨입니다, 그 내용은 이미 환단고기에 가륵단군시의 료주의 평양 료양의 태수 색정이 시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甲辰六年. 太學太士高辛【一云高信】請行父母喪三年服制帝曰善. 愛苗氏無道, 帝遣兵討伐于悉段. 遼陽太守索靖治績不善, 帝震怒命遷流于弱水【今黑水】, 終身棘置, 後赦之仍封其地, 因居而終爲匈奴單于之祖稱曰摚犁孤塗單于卽天【摚犁】子【孤塗】大皇帝【單于】之義也.
甲辰(갑진, BC2177) 6년. 太學(태학)에 있는 太士(태사)인 高辛(고신)【혹은 高信(고신)이라고도 한다.】가 부모의 상에는 3년 服制(복제)할 것을 청하니 帝(제)가 좋다고 하였다. 愛苗(애묘)씨가 무도하여 帝(제)가 병사를 보내 悉段(실단)에서 토벌하였다. 遼陽(료양)[1] 太守(태수) 索靖(색정)의 치적이 좋지 못하여 帝(제)가 진노하였으며 弱水(약수)【지금의 黑水(흑수)이다】로 귀양보내 종신토록 갇혀 지내게 하였으나 후에 그를 용서하여 또한 그 땅을 봉국으로 삼았으니 흉노 선우의 조상이 되었다. 이르기를 摚犁孤塗單于(당리고도단우)라 하는데 즉 하늘【摚犁(당리)】의 아들【孤塗(고도)】 大皇帝(대황제)【單于(단우)】라는 뜻이다.[2]
이에 잘못 알려진 것은 신한조선 신한 대부여 삼한인이 전부 북맥에게 충성하였다/ 염병질엘이다는 소리로 단군계 금천 금씨는 대반발로 3만명의 병사를 이끌로 흉노 조정으로 가서 몸담게 되는 사실이 나옵니다 바로 흉노 선우의 제2인자로 좌현와의 지위로 직접 북맥의 한군과의 조력은 지극히 못마땅하여 바로 대적을 하는 좌현왕 지역을 담당하는 흉노조정에 몸담은 이가 바로 휴도왕이고 그 태자는 '김일제"로 이 분은 제천지윤으로 제천장급은 단군서열이라는 소리로 단군계 직계로 종손이라는 소리입니다, 신한조선으로 대부여로 오가중 주력 알타이다 제천으로 金天으로 임검, 임금계로 제천지윤으로 제천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신라 금씨와 가락 김씨의 소호 금천씨라고 하는데 이는 사마천의 사기의 황제 헌원의 黃帝씨가 아니다, 즉 황제는 月 5. 黃帝 10. 太土인데 아니다, 벼리가 다르다고 삼국유사 기이편에 벼리가 다름으로 명확하게 소호 금천씨는 "白帝"의 후손 신동의 자손이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의 들판에서 놀다가 자칭
백제[30]의 아들이라는 신동과 정을 통하여
소호(小昊)를 낳았다.
이는 알타이 金天으로 쇠 부족 구리[九黎]로 티우씨족으로 배달나라의 "主刑"으로 군신족으로 제4, 우가입니다 바로 티우씨족으로 티우씨 좌오지 천왕이 자부선인에 의해 화관지후로 화투, 화서 등 火神으로 추존된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벼리가 아닌 日 알태로 바로 북극성의 수정자로 알태다, 알이로 三辰아이다 이게 金閼智의 의미로 日 4. 白帝 9.太金이다, 여기에서 흉노조정에 몸담은 것으로 신라의 왕은 박혁거세인데 계속 흉노족? 흉노제국의 조정에 몸담았다 북맥, 북부여에서는 떨어져서 좌현왕으로 그래도 신한조선지지를 친 기록이 없다, 같은 민족이고 신한지지는 바로 금천 금씨의 고향지지다, 이에 기원전 57년의 박혁거세는 파소/사소라는 고두막한의 따님의 숫될 서열 제1위로 잘못알려진 신라의 왕계는 박씨지 김씨가 먼저가 아닙니다, 김알지전의 신라초기의 내용에도 신라 금천 금씨는 갈문왕으로 박씨왕계의 왕비족으로 6두품계가 아닌 성골이었고 김알지의 등장은 바로 신한조선-대부여의 제천 천군으로 김알지를 星漢王으로 부를 수가 없는 天干의 신라에서 왕으로 호칭한 것은 바로 단군계로 종손임을 말합니다, 알타이 금천 금씨의 종손의 귀환으로 박혁거세의 부계도 알타이 금천 금씨다, 그래서 금씨와 박씨의 혼인은 성골계로 바로 왕비족으로 서로 뒤바뀌로 미추이사금이후 기원 356년 내물마립간이후 김씨세습왕이 나오기 전까지는 박씨, 석씨로 박씨왕조로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의도적 신라 박씨왕조에 대한 모욕이다.
삼한으로 본 성씨는
신한은 현 대한민국 土姓으로 신라성씨로 신한=부여[동명]으로 신라다,
번한/변한은 奇子씨로 삼성이 나오는데 奇, 箕子의 韓씨, 그리고 鮮于씨로 흉노? 수유족이라는 것은로 이들은 전부, 삼한족이다. 고두막한 동명 국호는 대부여로 바로 고열가 단군의 후손으로 북부여를 몰아내고 대부여의 수도 장당경을 회복하고 국호 동명이지 북부여라는 불명예의 북맥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점으로 이는 마한 맥족의 조작이다.
고두막한 동명성왕 동명 개창
서압록(西鴨綠)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께서 의병을 일으켜 또한 단군이라고 칭하셨다. 을미년(乙未年, 기원전 86년) 한 소제(昭帝) 때 고두막한께서 부여의 옛 수도를 점령하고 나라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칭하셨는데, 이 곳이 바로 신라(新羅)의 옛 땅이다.[삼성기전 상.]
즉 이는 동명이고 부여[대부여의 동명부여]로 장당경으로 아사달은 홍산문화권으로 백악산은 홍산/ 무엽산으로 중요 거점을 말합니다, 북부여가 동부여로 가섭원은 료나라 발해의 동경으로 臨黃으로 이는 서안평으로 알려진 곳으로 료주의 경계지 아사달 료녕산맥 위가 아니다.
즉 이는 아사달이 바로 홍산문화권으로 아사달이 아사 서라벌로 샛벌로 바로 신라의 옛땅이다는 소리입니다 신한조선의 신한지지다, 북방고토 및 유목 초원문화권으로 마한인데 번한의 선우씨가 올라가서 흉노라는 대제국을 건설한 곳을 말하고 신한계 금천 금씨의 좌현왕 지역이기도 합니다, 이에 료주의 태행산맥 료산산맥의 료서라는 료주의 맥족이 신한의 대부여 장당경과 백악산을 강탈하였다가 기원전 86년 고두막한 동명성왕에게 재탈환당한 곳입니다, 이 곳은 고무서 단군이 이어서 기원전 60년 즉위하나 안타갑게도 재위 2년만에 기원전 58년 음 10월에 붕어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夫餘로 동명으로 부여건국자는 고두막한 동명성왕으로 고주몽은 고두막한 동명성왕과는 무관한 동부여에서 태어난 북부여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의 후손일 뿐이고 기원전 58년 고구려 건국은 년도가 맞지 않는 발해의 북부여기 조작입니다 고무서 단군은 음 10월에 붕어하셨는데 고구려 句麗는 기원전 58년 정월에 건국했다고 나오면 전혀 무관한 졸본주, 句麗 수분하의 료하촌이지 아사달 홍산문화권의 지지가 아니다.
계해년(癸亥年, 기원전 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추모(高鄒牟, 고주몽)께서도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셨다. 그리하여 단군의 옛 법을 되돌리시고 해모수를 태조(太祖)로 하여 제사지내셨으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시니 이분이 바로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시다.
고구려의 건국으로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 갑신년으로 22세가 되던해라고 금와 동부여의 이야기로 함께 하는 동명왕의 설화는 동명성왕의 설화로 이는 신한계 북극성의 알이로 삼신아이의 알태 설화지, 맥족의 산돼지족의 설화가 아니다,
기원전 58년이면 최소한 기원전 86년 동부여로 옮긴 해에 태어나야 하는데 이는 동부여 가섭원으로 제후국으로 옮긴 해에 북부여의 정인의 이야기로 보기에는 시간적이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고구려사의 이야기대로 발해인이나 마한의 이야기로 기원전 58년 음 정월이라고 해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단 동명 부여는 북부여 후기가 아니다, 동명 부여로 夫餘라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후한서의 내용은 동명부여로 신한 신라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고구려의 건국으로
해모수를 시조로 한다는 것이지 북부여의 적통은 동부여로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 무휼이 대소왕을 죽이고 정복한 기록이 기원 22년이고 그 갈사천 曷思國으로 갈사부여?라고 하는 것은 북부여로 扶餘로 땅이름 扶餘지 천자국칭인 夫餘는 쓸 수가 없다입니다 기원 22년 ~66년 그리고 연나부 부여?? 어째서 部가 부여로 천자국인가? 이에 김부식은 고구려내 部의 하나로 夫餘를 삭제해 버립니다, 그것이 천자국칭에 대한 예다, 예법은 제발 좀 지켜라, 이 마한 병신들아.
즉 고구려 단군위라는 북부여는 기원전 232년에 북부여로 정식으로 인정되나, 이는 렬국일 뿐이다는 것이 한국의 역사학자들 사관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나와도 이는 일개 국으로 천자국으로는 쓸 수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폄훼하고 이는 기껏해야 맥족의 대반란군이다는 것으로 도리어 고조선/대부여 싲신한을 패망케 한 것이다, 신한6부로 정확하게 표시한 것도 못알아 아니 읽기를 거부하는 것들이 무슨 한민족사를 연구하고 있는가?
기원전 232년 ~ 기원후 668년 약 900년이다, 그건 고구려사의 이야기로 아니,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적통도 아닌 고진의 후손이라고 다 자기가 단군이고 천자위 천제다/ 그럼 아이고 상제님하냐고 엿소리다는 것으로 이런 쓰레기 역사조작을 발해 맑갈 예맥족과 여진족의 개소리 역사 국통맥으로 예맥족은 9韓으로 말단 濊貊족으로 하나일 뿐이다,
이 맥족이 고구려 해모수로 그 후손이고 료주를 중심으로 한다 신한조선지지가 아니다, 그 소서노의 온조와 비류가 온조는 맥족으로 百으로 온조의 온으로 백족 백제족인데 마한을 정복하였다 그 번한세가의 奇子의 후손 청주 한씨를 정복하고 번한세가의 삼한인으로 신한/번한은 삼한인이다, 그 위의 귀족 8대 성은 전부 맥족으로 백제족이라는 맥족으로 이는 귀족성으로 현재도 중국내륙의 대성으로 백제는 한반도 강동주의 토성이 아닌 료주의 마한족으로 맥족-백족이고 5세기 전후로 가야를 정벌한다고 거점확보지 담라를 설치한 기록이 없습니다, 즉 주력 강역이 남삼한으로 사방 4000리중 남북으로 2000리의 강역이 백제의 강역이다, 즉 대륙백제여야지 모든 이야기가 맞아들어가고 삼한의 변한은 가야가 아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전부 '신한"을 중심으로 신라로 신한지지 신한인이 바로 신라다 그 신한이 대부여로 부여로 대부여지 북부여는 그 자체가 북맥 맥족일 뿐이다,
료동-료서로 료주로 료산료주로 료동경계라고 하는데 전부 이상하게 부여로 마치 신한으로 신라라는 곳에 고구려를 넣는 이유는? 산돼지족 돼지새끼들이 놀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국통맥으로 북부여가 아니고 동명/부여로 신한-신라의 일 맥통을 말살하고 있습니다, 북부여-동부여로 고구려가 멸한 것은 기원후 22년의 일로 이는 료주 산서성의 사방 2000리의 句麗로 해모수인데 성을 高씨로 言씨로 조금은 의아한 부분으로 맥족임에는 틀림이 없다, 발해, 대진국이 국통맥이라는 것은 폄훼로 매국노 이 맥의 개소리 짱개 당나라 이가의 개소리 이간질이다.
고구려 강역 사방 6000리를 회복해도 그곳은 료주/산서성, 유주/하북성으로 발해는 한해로 남대방군으로 이미 아는 지역으로 이는 예맥으로 예/동예가 하북성 호타하로 한사군, 위만조선지지로 전혀 한반도? 아사달도 못미치는 료녕성?이 언제 만들 지명인데 1926년 짱개 蔣介石 병신이 지 멋대로 료산 료주가 료녕성이라고 한 것을 가지고 겨우 100년만에 전부 다 내주는 병신들이다.
이 대명여지도의 지명에 기산, 료산 료산산맥 등등 우리가 알고자하는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지명이 전부 대륙에 포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전부 거짓말이다,
강동주 한반도는 삼국시대 주 강역이 아니라는 소리로 낙랑군지에 있다는 경순왕 마지막 신라의왕의 도읍 동경의 경주는 낙랑군지라고 하는데 왜? 무엇때문에 믿을 수 없다?? 그럼 왜 경상도 경주 신라는 경상도 경주 사방 10리의 사로국이라고 개새끼 쪽발이 소리를 하고 질알하고 있는가? 어디에 사방 100리가 신라인가?
북대방(北帶方)[편집]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기원전 27년)에 대방인들과 낙랑인들이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101] 이는 모두 전한(前漢) 때에 설치한 두 군의 이름인데, 그 후에 주제넘게도 ‘나라’라고 부르다가 이제 항복한 것이다.
남대방(南帶方)[편집]
조위(曹魏) 때(220~265년)에 처음으로 남대방군(南帶方郡)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이다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불렀다. 대방의 남쪽으로 바닷물이 1천리인데 이를 한해(澣海)라 한다후한(後漢)의 건안 때(196~220년)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으로 삼으니 왜(倭)와 한(韓)이 이에 속했다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도대체 한국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뭐가 사대주의고 뭐가 불신이냐고? 渤海를 뻘해[澣海]라고 했다고?? 남대방 해수 1천리면 400킬로미터인데 이런 대료택 대야택 海,료해 등이 어디 한반도인가? 기원전 27년, 노례왕때 일개 군인 대방군? 사방 200여리가 나라라고 칭했다가 항복을 해?? 그런데 신라는 사방 10리의 사로국이었다?? 뭔 개소리냐고? 왜 國을 썼냐고 무슨 신한으로 사로로 서라로 쓰고 지증왕때 기원후 503년에 신라고 고정한 것이다고 놀리면서, 무슨 신라가 아무곳에나 다 나오고 있냐고 광개토대왕비문에 왜 新羅/? 사로국이지, 사로라고 하든지 서라든지 해야지 무슨 三韓이라고 했다가, 徐羅이라고 했다가 斯盧로 鷄林이라고 햇다는데 꼭 중요한 곳에는 新羅라고 해서 말하고는 신라다, 신한으로 신의 나라다 白木으로 백목,夫餘[日本]이 백목인데, ㅎㅎㅎ 웃기지 말자고.
족으로도 흉노를 국명으로 아니보고 족명 국족으로 해도 선우씨를 모욕하지 말라고, 신한계 알타이 김알지는 기원전이냐고? 왜 박씨왕조까지 전부 흉노족으로 몰아요? 그게 쪽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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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국사서인 후한서나 삼국지(정사) 동이전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전신인 진한 신한(辰韓)의 백성들은 진(秦)나라의 노역을 피해 도망온 망명자들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선 신라 토착민들을 옛 조선(고조선)의 유민들이라고 했다. 이와같이 진한 신한 또는 신라 토착민들의 뿌리에 관한 중국사서와 우리의 기록이 상반된다.
[산] 삼국지 동이전을 정사라고 하는데 정사신 베드신이 없다,년대표가 없다로 이는 직접 답사도 안하고 베낀 것으로 적군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쪽발이들의 합창이다. 신라의 전신 신한6부는 부여 6가로 고조선의 신한으로 대부여다 신한이 어째서 진한?인가 秦韓인가 말이다, 이는 삼국유사에 단호하게 역작[亦作]으로 역시 조작된 것이다.
辰 별〯신 日月會次又北辰北極也又미르〮진地支屬龍
별 신을 별 진으로 한 놈들 辱한 것이다. 이는 북극성, 북두 북신으로 宗으로 夫와 같은 문이다, 일월성이 三辰으로 삼신 기[示]로 일체 마루 宗으로 일월성신이다 辰[신]이다 즉 신한은 신라로 신한6부란 바로 신한조선 =대부여로 그 신한6부로 대부여 부여[동명]이 바로 신한이다, 원 단군조선지지로 이는 夫餘=신한 신라의 옛 땅이다, 즉 이는 동명 부여는 기원전 58년 고무서 단군 붕어후, 바로 신한 6부에서 신한 고조선의 신국?이라고 한을 국으로 쓴 병신들로 이는 신한이다 바로 부여다, 동명이다는 개념조차 없다, 그저 말살하여 신한조선 =대부여-동명/부여로 신한이라고 한 신라의 이름 국명도 왜곡하려는 것이다.
기원후 3세기에 마한이 있었는가? 즉 마한 기준이 청주 한씨로 한수아래에 건국한 마한은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7년 [삼국사기 기원후 9년] 백제에 정복당했다, 그럼 백제라고 해야지 이게 마한이다? 그리고 기원전 57년 신라로 신한이라도 그대로 된 것이 아니고 신한의 일부면 신한으로 언제냐고? 단순 진한의 진나라 노역을 피해서 온 노예다/ 미쳤냐고? 년도가 안맞는다 즉 진나라가 언제냐고? 기원전 221년에서 15년간? 기원전 206년? 한나라 이후에도 진나라 속국 한이 있엇다고 언제냐고? 번한세가가 위만에게 찬탈당하고 그 삼한인이 海를 건너 한수이남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마한으로 기 준이 나라를 건국하고 동쪽에 신한 남쪽에 변한이 들어섰다 그럼 진나라 노역자냐고/ 이게, 왠 언제부터/ 즉 기원전 206년에/? 이미 삼한이 들어섰다는 것인가? 그리고 언제까지냐고? 신라가 건국한 것은 기원전 57년인데 그럼 신한이라도 신라로 마한과는 다르다.
삼국사기의 조선의 유민이다 맞는 소리로 신한조선의 신한이 대부여로 大는 韓으로 삼한이다 그 삼한 조선의 유민이 신한조선으로 대부여로 부여/동명의 신한6부라고 한 것을 뭐가 잘못인가?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로 한다.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사방 사천리이다.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신한'이고, 셋은 '번한'이다. '신한'은 고조선의 '신국'이다
이 말에서 사방 사천리는 어디가고 사방 400리냐고?
동서남북이 완전 개판이 방위판단이 없는 무뇌아, 쪽발이 우똥이가의 개소리다,누가 國이냐고? 마한, 변한 신한은 이미 나라이름 한으로 國名으로 국위에 대국이라는 소리로 12소국? 신한 6부고 부여 6가로 그렇게 마구잡이로 國을 쓰지 않는다, 郡도 몰랐다 邦이다? 완전 개떡이다 사방 4000리면 사방 3000리는 넘겨야지, 이게 뭐냐? 도대체/? 어디서 저런 개병신 지도가 나오냐고? 아무리 남삼한이라도 사방 4000리에 신라 신한이면 사방 2000리? 마한 남북 2000리로 변한 변신은 12국 등으로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라, 이건 뭐 기자라고 단 한줄의 사서의 내용 사방 4000리요 해도 그저 이이 병신도 반자이, 도대체 늬들 뇌는 뭐할려고 달고 다니냐? 눈깔은 없고 전부 똥구녁 구멍으로 한문을 읽고 있냐고 ? 번역판도 다 있는데 손가락 계산도 못하는 닭대가리 유태한인들이냐고? 도대체 뭘 쳐먹어야 낙동강 오리알처럼 전부 헛소리냐고? 예, 동예, 구려 2000리에서 겨우 사방 1000리로 위와의 전쟁, 구당서 사방 6200여리 남북 2000리, 동서 3100리 발해는 사방 6000리로 고구려 옛 강역을 되찾다, 그게 어디 남북 3000리에 동서 2000리로 한반도에 어디 동서 3000리가 나오냐고? 료주면 료주 산서성, 태원으로 료주의 평양 료양이 평양이고, 유주로 예/동예가 조선/위만조선과 한사군 이부설치지역이라고 하면 알아 쳐먹어야지, 이건 광복 72년동안 뭘 먹으면 저런 헛소리가 나오는지 참 웃기고 질엘하다 똥통에 똥만 쳐먹은 것들이 사는 엘리트의 엘리스나라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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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삼국사기 박혁거세 38년 2월의 기록을 보면 호공을 마한에 보냈을때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진한.변한이 모두 우리(마한)의 속국인데, 근래에 조공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호공이 이에 반박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미루어볼때 애초에 진한은 마한의 속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사서에도 마한사람이 항상 진한의 왕이 되어 다스리고 계승했다고 되어있어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또한 삼국사기 같은 혁거세 이사금 38년 2월 기록에 ‘중국에서 난(亂)을 피하여 오는 사람들이 마한 동쪽에서 진한과 섞여살다 점차 성하게 되었다’고 되어있으니, 대체적으로 보면 진한과 마한은 동류(同流)의식이 있었던것 같고, 진한의 구성원들은 대개 고조선 유민이거나 중국에서 난을 피해 도망온 사람들이었던것 같다.
[산] 이는 신한 신라 부여 신라라는 개념이 없으니 그러한 것이고 이 마한옆의 신한은 소국들로 초기부터 다 신라의 내부국이 아니다.
대륙신라의 이야기로 부여=신한 신라를 말살한 것이다, 즉 전부 중국의 난을 피해왔으면 중국내륙을 말해야한다.
한편 백제가 처음 수도를 정한곳은 풍납토성 유적 발굴에서도 알수 있듯이 지금의 서울 한강유역임이 100퍼센트 확실하고, 초창기 백제는 마한의 소국들을 완전히 병합하진 못한 상태였다. 백제의 마한경략은 대개 근초고왕대에 이르러서 완성된 것으로 보는것이 학계의 정설이니 백제나 신라 건국 초창기 마한지역은 아직 백제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을것이다.
[산] 완전 돌았다, 아직도 위대한 산돼지족 바크 헌영의 수령동지 호남백제 바크족의 북조선지령에 의해 무당 박원순의 영매를 통해 얍, 한성은 풍납토성이야 바람막이 토성이란 말이야, 바람아 불어다오 2조원 펀딩하여 호남왜 백제인을 위햐야 임기내 유네스코에 등재합세다.. 미쳤고나, 미쳤어, 광산 공산 맥길의 도올이로세..
2. 문무왕릉비의 수수께끼
“나는 죽어 용이되어 이 나라를 지킬것이다. ”
삼국유사의 일화에 따르면 그와같은 말을 남겼다는 문무왕. 아버지 태종무열왕에 이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낸 문무왕은 그후 수중릉(水中陵)에 잠들었다고 전해져 내려왔다. 하지만 정작 문무왕릉비는 1790대 후반 밭갈이 하던 농부에 의해 대편(大片) 2개가 발견되었고, 이 사실이 경주부윤 홍양호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청의 금석학자 유희해가 ‘해동금석원’에 수록하였고, 당시에 작성된 4매의 탁본이 전한다. 그러나 비석 자체는 전하지 않다가 1961년 경주 동부동 주택에서 18세기 발견된 대편중 하나가 재발견되었다.
여하튼 현재 논란이 되고있는 부분은 바로 문무왕릉 비문에 나오는 ‘투후제천지윤(?侯祭天之胤)’이니 ‘성한왕(星漢王 : 문무왕의 15대조 ?)’이니 하는 구절 때문이다. 이종욱 교수등 신라정통론 및 흉노조상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문무왕릉비에 언급된 ‘투후’라는 인물이 흉노족 출신으로 한나라에 투항 벼슬을 한 김일제(金日磾)란 사람이라는 것이다.
김일제(기원전 134-86년)는 누구인가 ? 흉노족 번왕 장수 휴도왕의 장남으로, 휴도왕이 한무제때 곽거병에 의해 토벌되자 14세때 한나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했다. 이후 무제의 눈에 띄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한나라에서 시중,광록대부,부마도위등을 지내며 살았다. 그리고 김(金)씨성은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내던 것에서 비롯되어 하사한 성이다.
헌데 과연 ‘투후제천지윤’ 운운한 표현으로 단순히 문무왕과 신라 김씨의 자손이 흉노족 출신인 김일제의 후손이라 단정할수 있을까 ? 실제 김일제는 한나라에서 투정후(秺敬侯)를 제수받긴 했으나 투후(?候)란 판독문 자체가 글자가 정확치 않고, 게다가 발음상을 놓고 봐도 투후가 반드시 김일제가 받은 ‘투정후(秺敬侯)’를 말하는 것인지 단정하기가 힘들다.
[산] 흉노족이 아니고 흉노 국으로 천자국이다, 번한세가의 료주의 평양 료양태수의 색정, 번한세가의 수유족, 서우여의 후손으로 태원이 본관인 鮮于씨가 세운 천자국, 맥족보다도 신한 삼한족과 가깝다, 그곳 흉노 조정에 몸답았다 왜? 북맥 북부여는 개새끼잖아, 안해, 안하다고 한군에 직접 대항하여 싸우겠다고 왜? 뭐가 잘못이냐고?
(金日磾)를 거쳐 신라 김씨로 이어졌다고 기록
되어 있다.
김일제(少昊金天氏)에서 시작하여 투후
소호금천씨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 부인의 묘지명이다. 신라 김씨의 조상이
당나라(大唐故金氏夫人墓銘)은 중국 대당고김씨부인묘명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
[3]에 숨어 살게 되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비문에 나오는 대로 휴도왕의 태자 금천 금씨로 바로 알태의 종손이다 신한의 적장자로 제천지윤으로 금천/ 제천장이 천군으로 天干의 지위로 단군서열의 종손이라는 소리다, 그래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뒈져야 하냐고?
북맥보다는 흉노 조정에서 좌현왕으로 한군을 직접 때려부수었다 그게 뭔 잘못인가?
맥족이야 돼지산적해서 먹으면 되지, 뭔 잡소리야, 어디서 족쪽쪽하냐고? 金閼智 성한왕은 종손으로 그 전에도 신라 박씨왕조에서는 갈문왕으로 왕비족으로 나와요, 즉 김알지는 금천 금씨의 종손이라는 알자로 태자라는 소리다, 그 부족 씨족이 3만명이 흉노로, 한군에 볼모로 산동으로 5만명이 잡혀 갔다가 신한지지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박씨왕조 기원전 57년에서 기원후 356년 내물마립간까지의 기록은 불신이냐고? 흉노족 이야기가 아닌데 왜 박씨왕조 이야기는 전부 불신이냐고? 그게 이상한 것이지 누가 경주 경상도 경사스러운 땅이 초기 박씨의 '금성? 서라벌이냐고? 누가 그래요? 흉노족 금씨면 김알지가 무슨 꿈에 박혁거세의 신이냐고? 도대체 무슨 바크족 원순이의 꿈에 똥은 누었어요, 맛이게도 냠냠 해서 쳐드세요? 그걸 믿냐/ 웃긴 기자도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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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이와같은 구절은 결국 왕의 비문에서 자신의 조상을 칭송한 내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개 한 나라를 세운 건국시조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미화했다.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신화를 봐도 그렇고, 고려태조 왕건 역시 자신들의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했다. 한 나라를 세운 시조가 자신들의 조상이 외부에서 왔다고 주장하는것은 아무래도 자신들의 특별함을 강조 신격화,미화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크며, 특히 그와같은 미화속엔 자신들의 조상이 왔다는 ‘외부지역’에 대한 동경심도 어느정도 들어있다 봐야할 것이다. 고려태조 왕건이 자신의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한것, 금나라 태조가 자신들이 신라 마의태자 후손이라 주장한것. 그와같은 주장들엔 결국 해당 국가에 대한 동경심이 어느정도 깔려있는 것이라 봐야할것이다.
따라서 고대국가의 왕실이 자신들의 조상을 미화하여 어디에서 왔다는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