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關東大震災
信天함석헌
관동대지진
1923년 9월 1일일본의 동경, 횡빈(橫濱)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일대에 큰 지진이 일어났던 일이 있습니다. 본래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 이어서 평상시에도 집이 흔들흔들 울리는 정도의 것은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일본 역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큰 것이어서, 또 큰 지진에는 으레히 그런 법이라지만, 곳곳에서 일시에 불이 일어나서, 사람이 여러 십만이 죽고 상하고, 집이 무너지고, 이루 헬 수 없는 물자가 타버리고, 당시에 직경이 6,7십리는 됐을,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의 하나였던 대동경시가 하룻밤 새에 그 3분의 2가 잿더미가 돼버렸습니다. 일본에서 그 지방을 관동지방(關東地方)이 라 부르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은 이 끔찍했던 사건을 흔히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라 합니다마는, 한때 일본은 이 관동대진재로 나라 터가 흔들렸다는 말까지 나돌았으리만큼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봐도 이것은 인류가 당했던 재난 중 가장 큰 것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이웃의 불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살과 뼈와 피와 부르짖음으로 빠져들어 같이 당했던 재난이요, 더구나 일본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천재지변이었는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자연의 불행만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겸해서까지 받은 것이기 때문에 더 지독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일본 군국주의에 나라가 먹히우고 총독정치 밑에 압박과 업신여김을 받는지 13년이 되던 때입니다. 나라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는 지배자의 학정에 수백 년 지쳐 모든 참된 의욕을 잃고 고식주의운명론의 종이 되어 곤한 잠을 자던 씨이 나라가 팔려 넘어가는 줄은 알지도 못했다가 사슬이 목에 감긴 다음에야 겨우 알아차리고 몸부림을 시작했고, 그러기를 아홉 해 하다가 세계대전 후 부는 새 바람을 맞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어 삼일운동을 일으켜 세계 인류의 정의감에 호소하여 잃었던 주권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에 돌아가고 말자, 낙심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차분히 실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산업에 힘을 쓰고 교육에 열중하는 풍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원해서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생활을 통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때쯤 해서는 동경에 유학하는 우리나라 학생도 상당히 많았고 그 시외 변자리로는 날품팔이로 비참한 살림을 해가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사람 중에도 그 지진 화재로 희생이 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불행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진이 나자 일본 사람들은 난데없이 조선 사람들이 난동을 꾸민다고 풍설을 돌려가지고는 우리 사람을 닥치는 대로 마구 죽여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소위 조선인 학살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잊지 못할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인간의 악까지를 겸해서 받은 재난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금년 9월 초하루는 바로 그 50돌이 되는 날입니다. 나는 그때 그 동경에서 그것을 몸으로 겪고 살아난 사람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것을 한번 돌이켜 되새겨보자는 것입니다.
일본 유학의 설음
그해 3월 나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리타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외국 유학이라면 별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기 깊은 설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생각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서 뜻을 찾자는 마음에는 그것은 슬플지언정 그저 단순히 성공의 층층대를 올라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1962년 미국 국무성 초청 케이스로 시찰 여행을 갔으면서도 미국 사람들보고 “나는 너희 나라에 전쟁 포로로 왔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문명의 경쟁장에서 그들에게 지지 않았던들 내가 미국 구경이랍시고 엉금엉금 갔을 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때에 일본유학이야말로 정말 전쟁 포로로 잡혀가는 일입니다. 좋아서 간다기보다 할 수없이 잡혀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젖이 떨어지자부터 제 나라 말이 아니고 외국말로, 그나마도 착한 이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강도질한 원수의 말로, 강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이었던가? 오늘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넓어져서 그럴까요? 골목마다 일본어 강습소가 들어섭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은 효자는 그 부모의 손때가 묻은 것은 몇 해 동안은 차마 만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한다면 저 일본말이 제 아비가 어린아이 때부터 학대를 받아가며 강제로 시킴을 받던 말인 것을 생각해서라도 차마 그것을 못하면 사람이 아닌 것같이 미쳐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더러 마음이 좁다 마십시오. 나는 “일본놈” “왜놈” 하는 말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세계의 입이 우리를 가리켜 일본의 돈닢을 보고 스스로 제 몸을 팔려 기어들어가는 갈보라고 하도 흉을 보니 하는 말입니다.
생각이 바른 이는 어떻게 말을 하나 보십시오. 내 존경하는 일본인 선생에 쯔까모도(塚本虎二)라는 분이 있습니다. 해방 직후 오산 출신 후 배 한 사람이 동경 유학을 하며 그의 성서연구집회에 다닌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일요일 그 모임에서 선생이 그더러 성서 낭독을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 시키는 대로 낭독을 했는데, 아마 발음이 좋게 잘했던 모양입니다. 선생은 듣고 나서 “외국말을 외국말인줄 모르리만큼 잘하는 것은 수치야요” 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칭찬으로 하는 농담이지만 거기 콕 찌르는 것이 있는 무서운 말입니다.
그것을 그때 우리 유학생들이 일반으로 흔히 그랬던 것같이, 발음이 일본 사람과 꼭 같다고만 하면 기뻐하고 슬그머니 뽐내려 들던 것과 대조한다면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나는 그때 이름은 중학 졸업이라지만 나이는 스물 셋입니다. 제대로라면,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 될 나이 입니다. 내 학교가 늦은 데도 우리 역사의 작용이 있습니다. 나는 한국 시대에 나서 소학교를 다니다가 합병 후 다시 공립보통학교를 다녀서 졸업을 했고, 그 다음 중학교육은 먼저 관립학교에 들어가서 받다가 삼일운동 때 버리고 나와서는 몇 해를 놀다가 다시 오산을 다녀서 졸업을 했습니다. 그러노라니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늦은 것은 부끄럽지만 생각을 좀 할 수 있었으니 고마운 일이요, 더구나 소학 중학을 다 사립 관립을 겸해 다녀볼 수 있었다는 것이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도매금으로 한데 묶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사학에는 자유정신이 있고 관학에는 벼슬아치 버릇이 붙기 쉽습니다. 다른 나라는 또 몰라도 우리나라나 일본은 적어도 그렇습니다. 나도 만일 양시(楊市)공립보통에서 관립 평양고등보통으로만 올라가 졸업을 했다면 대통령 보좌관쯤이나 되고 맡았을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시골 상놈의 집에 나서 사립 덕일(德一)소학교물 먹고 사립 오산중학교 물먹었기 때문에 벼슬은 못 했어도 얼반둥이 일본 사람 됐던 일 없고, 남에게 종살이 아첨질 가르쳐준 일 없습니다.
떠나는 첫 발걸음부터 문제입니다. 집의 부모와 선생께 하직을 하고 나올 때는 ‘일본’을 가는 것인데 길에서 관리를 만나면 ‘내지’(內地)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말이 아니라 국어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요해 놓고는 그들이 우리보고 뭐란지 아십니까? ‘봉야리상’ 이라고 했습니다. 멍청이란 말입니다. 나라를 뺏기고도 허허 하고, 원수의 나라를 내지, 원수의 말을 국어라고, 시키는 대로 하며 입을 헤벌리고 걸어다니니, 멍청이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참 너무한 짓입니다. 사립 덕택으로 나는 그 수모는 않받았습니다.
우리 친구 김교신은 “연락선 갑판을 발 구르며 조선 사람인 것을 알았노라”고 부르짖은 일이 있습니다마는 그때 일본 유학 간답시고 부산 하관(下關)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연락선을 들락날락하면서 망국민(亡國民)으로서의 설움을 뼈에 못 느낀 놈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일본 사람과 꼭 같은 돈을 내고, 하라는 대로 국어를 지지거리고, 내지엘 가노라 해도 대접은 짐승대접이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혹 이따금은 밸이 있는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내 족형(族兄) 석은(錫殷)이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유학생이 집에 돌아오노라 연락선을 탔는데 거기 조선 나와서 보통학교 선생 노릇하는 사람이 하나 탔더랍니다. 그때 사내(寺內)총독시대인데 학교 선생에도 모두 칼을 채웠었습니다. 이 일본 교사가 일본 안에서는 그런 법이 없으므로 부끄러워서 연락선 안에서는 칼을 감춰두고 있다가 배가 부산에 와 닿게 되니 그때는 슬슬 끄집어내서 차더랍니다. 이 유학생이 그것을 보고 일어서서 배 안의 사람들을 보고 한바탕 연설을 하면서, 이 사람을 보라고, 학교 선생이라면서 칼을 찼으니 아마 이걸 가지고 아이들을 위협을 하는 모양이지요하며 놀려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지더라는 것입니다.
아주 망하지는 말라고 이따금은 이런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짐승대접을 받으면서도 짐승처럼 모는 대로 이리 가고 저리 갔습니다.
그러나 짐승처럼 가만있는 것은 또 괜찮은데, 적지 않은 수의 것들이 아주 일본이 다 됐노라고 으스대는 데는 참 질색이었습니다. 가짜 일본종이 진짜 일본종보다 더 고약했습니다. 내 눈으로 당했던 꼴, 사립학교도 교련을 하라고 해서 오산에서도 교련 선생을 구해왔던 일이 있습니다. 그래도 일본 사람보다는 나을까 하는 생각에 일본 육군사관 학교를 나오고 예비역 소좌(少佐)로 있다는 이OO라는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자기 스스로 이충무공의 직계손이라고 하는데, 하루는 아침 조회 시간에 단에 올라서더니 한다는 소리가 “천황폐하의 군인이 돼서 전장에 나가서 죽게 되면 ‘천황폐하 만세’ 하고 죽어야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나라가 망했기로서 다른 데도 아닌 오산학교 마당에서 감히 그런 소리를 합니까? 치가 떨려 견딜 수가 없어 당장 끌어내리려 했더니 여럿이 말려서 하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마는 나는 오늘까지도 그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쩌면 그런 것들이 있습니까?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났다고 다 한국놈도 아니요, 이충무 소리를 한다고 다 이충무도 아닙니다. 도대체 그놈의 대일본육군사관학교란 무엇입니까? 거기서는 피도 삭고 역사도 변했습니다. 그러니 그 군국일본은 망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지진과는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모르고는 조선인학살사건을 알 수 없고, 조선인학살을 모르고는 관동대진재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품고 갔다 품고 돌아온 것
삼일운동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사람질을 못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지금은 감히 사람질 한단 말 아닙니다. 깊은 밤 내 마음의 지성소 앞에 엎드릴 때 나는 언제나 몸둘 곳이 없어하는 나입니다. 그렇지만 그 형편없는 나로서도 만일 삼일운동의 세례를 받은 것이 없었더라면, 깊은 깨달음은 그만두고라도, 인생과 역사에 대한 방향감각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내 실감에서 하는 말입니다.
나만 아니라 그 시대에 젊은이였던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 않을까 나는 믿습니다. 아마 오늘의 젊은이는 8·15나 4·19에 대해 같은 체험을 가질 것입니다. 시대의 정신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밀물 같은 것이요, 폭풍 같은 것이요, 지진 같은 것입니다. 달이 뜨고 저기 앞이 생기고, 땅이 흔들리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영향을 아니 입을 수 없듯이, 시대가 한 번 움직이면 그 안에 사는 모든 마음이 그 구조의 핵심에까지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나는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또 그렇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밀물이 아무리 들이밀어도 외로운 바위 등에 달라붙는 소라에게는 소용이 없듯이, 폭풍이 아무리 몰아쳐도 구멍에 숨는 지렁이에게는 의미가 없듯이, 지진이 아무리 일어도 무덤 속에 썩는 시체에는 아무 영향이 없듯이, 시대의 대세가 아무리 아우성을 쳐 부르고 그 선물을 골고루 나눠주려 손짓을 해도 제가 스스로 역사의 나가는 행렬을 외면하고 골동품 상점에 들어가 앉았는 마음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골동품 상점이 어떤 것입니까? 대일본육군사관학교 같은 것입니다.
받는 교육의 영향이 큽니다. 3·1 이후이면서도 더욱이 나는 “다섯 뫼 그늘에서 흘러나는 물”의 말류(末流)나마 마실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가도 얼반둥이 일본이 아니될 마음의 태세가 돼 있었고, 군국주의 나라엘 가도 육군사관학교 같은 데는 기웃해볼 리도 없을 만큼 나갈 방향이 잡혀져 있었고, 땅이 쩍쩍 갈라지고 불길이 하늘을 태우는 재변(災變)을 당해도 자아는 잃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慈母手中線(자모수중선)
遊子身上衣(유자신상의)
臨行密密縫(임행밀밀봉)
意恐遲遲歸(의공지지귀)
難將寸草心(난장촌초심)
報得三春輝(보득삼춘휘)
(사랑하는 어머니 손가운데 실 나들이 가는 아들 몸 위의 옷이네 떠나는 마당에 꼼꼼이 꼼꼼이 꿰매줌 돌아올 날 더딜까 더딜까 걱정함일세 어쩌면 풀끝 같은 이 마음 들어 긴긴 봄 햇볕같은 그 은혜 갚으리)
집은 가난하지만 사랑은 봄볕보다 더합니다. 나라는 깨졌지만 역사의 은혜는 변할 줄이 없습니다.
나는 뵈는 옷, 뵈지 않는 옷을 안팎으로 껴입고 길을 떠났습니다. 뵈는 옷은 가늘고 가는 실 손톱이 닳도록 다듬고 자아 짜내고 꿰매서 지은 것, 뵈지 않는 옷은 실보다 더 가는 마음을 뽑아내고 자아내어 하늘볕에 바리워서 역사 흐름에 행기워서 엮어서 지어낸 것, 바람 들세라, 물들세라, 궂은 것 붙을세라, 독한 것 침노할세라, 마지막 순간까지 한 바늘 뜸 뜰 때마다 기도하며 당기고 조여 실 끝 풀리지 않게 맺고 또 맺은 후 당부하며 당부하며 입혀주고는 말 못 하고 고개 숙이던 어머니입니다.
나는 현해탄을 건널 때 품고 간 것이 있습니다.
비바람보다 더한 눈총 속에서도, 땅을 태우고 하늘을 지키는 불길 속에서도, 번쩍이는 창검 속에서도, 내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하던 일 다 마치고 얼굴빛 더 끄슬러지고 현해탄도로 넘어 다시 돌아올 때도 품고 돌아온 것 있습니다.
속알 여물라면 물론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이미 씨로서의 갱이는 넣어주심을 받은 것이 있었노라고 믿고 있습니다.
무덥던 한 여름
3월 하순에 동경을 갔는데 처음 한 학기는 마음도 놓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한 해를 준비해 가지고 명년에는 꼭 어디나 입학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젊어서부터 의지가 강한 사람이 못됩니다. 마음이 찬찬해서 모든 일을 계획을 짜서 해나가는 편도 못됩니다. 결단성은 더구나 부족합니다. 그래서 평고(平高)시대에도 공부를 파지 않았습니다. 별로 호걸스런 성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난꾸러기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잠잠은 한 편이면서도 남들 성적 다투며 공부 파는 것이 어쩐지 속돼 보여서 그것을 공부벌레들이라고 웃고, 그저 하는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늦게 오산을 가니 후배가 선배된 사람들도 있고 해서 인제 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으나 그때도 그리 열심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그때 소위 부활 오산, 3.1때의 헌병이 불질러 다 타고 선생 다 잡혀가고 학생들 다 양떼처럼 흩어져 한때 학교가 아주 없어졌다가 졸업생들의 의론으로 다시 세운 것을 부활이라 합니다만, 그 오산은 참말 형편없었습니다. 집도 임시로 지은 초가에 책상도 걸상도 없이 마룻바닥에 앉아 하는 공부였는데 선생들조차 자꾸 변동이 많아 실력 있는 교수를 할 수가 없었고, 자격조차 없는 학교였습니다. 그러니 거기서 두 해 지난 학력 가지고 대학에 들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자격이 없으니 검정시험을 쳐야겠는데, 그러려면 모든 학과를 다 준비해야 합니다.
또 집 형편으로는 동경 유학이란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므로 학교에서 주는 보조를 받아서 왔으니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관계로 자연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경 같은 것은 본래 즐기는 버릇이 없습니다마는 첨으로 간 대동경인데도 별로 구경하러 나간 것도 없이 한 학기를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먼저 가 있던 남강(南岡) 선생 둘째아드님 이택호(李宅鎮) 선생의 주선을 받아 탕도(湯島)의 어떤 하숙에 들어서 그때 우리 학생이면 거개 한번 씩은 거쳐서 가는, 신전구(神田區)에 있는 정측학교(正則學校)에를 다니다가, 낯이 좀 익어진 다음 그때에 같이 오산을 나왔던 돌아간 명재억(明在億)을 만나서 그가 있던 본경구(本卿區) 효정(肴町)으로 하숙을 옮겼습니다.
명은 그때 자기 삼촌 희조(義朝)씨와 같이 가 있었는데 그는 나이 40 넘어 50이 가까워 머리에 벌써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분이었습니다. 또 그와 같이 한집에 채필근(蔡弼近)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도 명희조씨와 같은 연배나 돼 보였고 머리도 같이 반백이었습니다. 채목사는 그때 동경제대 선과(選科)에 다니던 때였습니다. 두 늙은이가 늦게 공부를 한다고 힘을 쓰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점도 많습니다.
동경도 그때만 해도 옛날입니다. 효정(肴町)이란 그리 구석진 곳도 아닌데도 저녁이면 동리 아이들이 반딧불 벌레 사냥을 하느라고 “호다루 고이 호다루 고이” 하며 떠들고 다녔고 낮이면 쓰르라미가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나뭇가지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자연이 그런만큼 사람도 그랬습니다. 처음 갔을 때 주인이 고취(高取)란 사람이었는데 가정 공업으로 염색을 해서 팔고 있었습니다. 아직 시골 할아버지 티가 있는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아니 있다가 주인이 바뀌고 우리는 그냥 눌러 세로 들어 있게 됐는데 고림(高林)이란 그 새 주인 역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라에 있을 때는 일본 사람이라면 다 여우나 승냥이 같은 것으로만 알았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동경 안에 살면서도 조선은 독립한 나라인 줄 알지 자기네 식민지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보고 당신네 나라에서는 어떤 옷을 입고 무슨 글자를 쓰느냐 물었습니다. 목수 노릇을 하는 사람인데 우리가 기독교인 것을 보고 이것저것 묻기에 예수도 목수였다고 했더니 아주 좋아했습니다.
나는 지금은 민중과 국가와는 분명히 구별해 생각합니다마는 그때도 벌써 두 개의 일본을 느꼈습니다. 일본 민중으로서의 일본과 대일본제국이라는 일본 첫째 것에는 죄 있을 것 없습니다. 민중은 세계 어디가도, 세계 어느 구석의 물도 물은 물과 서로 섞여 하나가 되는 물이듯이, 다름없는 민중입니다. 죄 있는 것은 그 둘째 것, 소위 정치가라는 도둑들의 손에서 노는 국가라는 것입니다.
그해 따라 참 무더웠습니다. 동경의 여름은 본래 무덥다는 것이지만 그해는 각별히 더 무더웠습니다. 다 벗고 팬츠만 입고 앉았어도 그저 땀이 죽죽 흘러내렸습니다. 혹은 내 심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수험생의 참혹한 살림을 뼈에 저리게 느꼈습니다. 시험이란 것에 몰려 미처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지내는 내 모습을 사냥꾼에게 쫓겨가는 짐승의 얼굴 같을 거라고 일기에 썼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의 무더운 여름이 있고는 금년 무더위가 일생에 처음입니다. 그러고 보면 금년 무더위도 내 심리인지도 모릅니다. 일기가 무더워지기 전에 마음이 벌써 무더위에 눌려 있습니다.
집 생각도 별로 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에도 내가 인정이 무딘 것 같지는 않은데 이날껏 어디를 가나 집 생각이 나서 못 견디었다는 일은 없습니다. 남의 손의 밥을 먹어본 것이 열 네 살 때부터인데 그때부터 그렇습니다. 평양에 나간 것이 열여섯 때인데 한 하숙에 있는 동무가 중학생이라면서 집 생각난다고 눈물 짜는 것을 보고 사람답지 않게 생각했던 기억 지금도 있습니다.
입학시험 준비 때문인 것이 주되는 이유지만 내 천성인 점도 있는 듯합니다. 나는 지금도 어디를 가도 잘 자고 무엇을 만나도 잘 먹습니다. 나 스스로 타고난 민주주의라고 감사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 집안에서 배운 점도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버지 어머니도 또 우리 형제자매끼리도 인정은 깊으면서도 대범합니다. 우리는 감상주의도 냉정주의도 모릅니다.
성재천(成在天)
한여름이 다 가고 9월 초하루가 됐습니다.
그 동안에 채 목사는 다른 데로 이사를 갔고 명 선생은 본국으로 나갔고 재억씨는 자기 다니는 삽곡농대(澁谷農大) 부근으로 임시로 나가 있게 됐고 나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가을 학기부터는 정말 본격적으로 해야겠지만 아직 준비 학교들이 개학도 아니했으므로 그날 아침을 먹고는 탕도(湯岛)에 있는 함덕일(咸德ᅳ) 형제를 오랜만에 만나보러 나갔습니다. 함덕일은 내가 평고 있을 때 하숙을 하고 있던 주인입니다. 나이는 나보다 수년 아래고 동생 순일(純一)이와 함께 홀어머니를 모시고 경창리(昌里)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하숙을 하게 되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경창리 5번지가 내게는 잊지 못할 곳입니다. 나는 그때 상급생이라 해서 우리 같은 고향의 여러 친구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3·1운동 만세를 부르려 할 때 그때 청년 지휘의 책임자였던 석은 형의 명령을 따라 평고 대표들을 모아 첫 의논을 한 곳도 이 집이요, 숭실전문 지하실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가져다 두었던 곳도 이 집이요, 덕일소학교에서 공부할 때 배웠던 지식을 살려 태극기를 내 손으로 목판에 새겨 밤새 찍어냈던 곳도 이 집입니다. 그 집이 만일 지금까지 그냥 있다면 이제라도 가면 기를 다 찍고나서 감추어두었던 그 목판이 들어있는 그 영 날개를 들치고 이제라도 찾아낼 자신이 있습니다. 55년이 꿈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때 물불을 모르고 그저 신이 나서 그 태극기를 찍고 이튿날 3월 1일 맡은 자리인 평양 경찰서 앞거리에 그것을 뿌리고 해가 넘어가 어둡도록 만세를 부르고 달리다가 일본군대의 군화에 짓밟혀 넘어지면서도 마음이 조금도 죽을 줄 모르던 그때에 내 말년이 이럴 줄은 꿈도 못 꾸었습니다.
이제 덕일이도 죽었고 순일이도 죽었고 석은 형이 간지도 46년이 됩니다. 그는 평양서 활동을 하다가 경찰이 잡으라고 해서 한때 친구가 경영하는 관앞 서경(西京)병원에 피신해 있다가 형사대의 습격을 받아 창문을 넘어 도망해서 만주로 갔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수비대의 습격을 받아 두번씩이나 총상을 입었고, 이름도 모를 중국 농부의 헌신적으로 하는 간호를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는 이 아지도 못하는 외국의 죽게 된 독립투사를 5리도 넘는 산중에 업어다가 토굴을 파고 숨겨두고는 날마다 미음을 쑤어가지고 가서 갈대통으로 불어넣어 먹여서 살려냈습니다. 그러나 종시 일본군에 잡혀 신의주로 끌려나와 여러 해 징역을 하고 나왔으나 그 옥중에서 얻은 폐병으로 마침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내가 오산에 부임하던 1928년의 일입니다. 아직 서경병원에 있을 때 찾아가니 걱정도 아니하고 쾌활한 얼굴로 친구 되는 의사보고 웃으면서 포도주 한 잔만 만들어내라 하던 그 얼굴 그 음성을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데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 그 투쟁하던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만 것이 유감입니다.
그가 평양에서 만주로 가려 할 때 변성명을 하려 하자 아버지되는 일형(一亨)숙(叔)이 성재천(成在天)이라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모사 재인(謀事 在人)이요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사재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어째서 이렇습니까? 나도 이사야 마냥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역시 오늘도
“성읍들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그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실까요? 그렇습니다. 함석은(咸錫殷)은 지금도 성사재천을 믿고 재천을 성취해 가지고 있습니다.
탕도는 내가 아직 어렸을 때 그 석은 형이 그의 일본 유학하는 것을 하늘같이 알고 있을 때에 그가 명치대학을 다니며 하숙하고 있던 곳입니다. 나는 그 이름을 그때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 탕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지진이다!
만세 부르고 헤어진 후 못 만나고 있던 그를 5년 만에 여기서 만나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동안에 정오가 거의 다 됐습니다. 그래 시계를 끄집어내 보며 일어서 가려고 하니 덕일이가 붙잡으며 점심때가 다 됐으니 점심을 같이 하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앉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갑자기 우르르 하고 진동이 왔습니다. 입 마다 “지진이다!” 하고 외침이 나왔습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일본서는 지진이 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가자마자 지진 온다고 뛰어나가면 비웃음 받으니 그러지 말고 침착해야 된다는 주의부터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큼 흔들어도 다 나가지들 않습니다. 그래 우리도 첨엔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지진이다!” 하면서도 나가려고는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조금 있다간 흔들흔들 또 조금 있다간 흔들흔들 점점 심하게 오는데 보통이 아닙니다. 순간 겁이 번개같이 머리들을 스쳤습니다. “나가야 한다!” 입마다 서로 외치며 복도로 나와 층층대를 내려가려 하니 낡은 집이라, 계단이 왼통 찌글찌글 금새 무너질 듯합니다. 황급히 층계를 달려 내려와 현관을 썩 나서니 지붕에서 떨어지는 기왓장이 비 오듯 합니다. 빈 곳으로 달려가려 하니 어찌 심히 흔드는지 걸음을 옮겨놓을 수가 없습니다. 전신주를 바라보니 노대 만난 뱃대처럼 누웠다 일어났다 합니다.
조금 있다 숨을 내쉴만하면 또 흔들고 또 숨을 쉴 만하면 흔들고 사람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레 오도가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습니다.
조금 뜸해지는 것을 타서 사방을 바라보니 사람마다 집 앞에 서서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오 가미사마. 오 가미사마”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비는 겁니다. 나는 평소 그저 믿으면 믿었지 새삼 그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니 저것이 인간이로구나, 종교는 어쩔 수없이 삶의 바닥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로이 강해졌습니다.
조금 있노라니 사람들이 모두 이삿짐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첨에는 우리는 웬 영문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후에 들으니 지진이 심하면 반드시 화재가 난답니다. 그래서 그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지진국이니 만큼 그것은 경험에 의해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 길로 곧 내 하숙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는지. 그들도 어서 가보란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것이 그렇게 심한 재난인 줄은 몰라 심상하게 생각하고 급히 서둘지를 않았는지? 큰일을 당했으니 차마 나는 내 생각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낼 수 없어 그랬는지. 그 어느 것인지 혹은 그 둘 다 인지. 아마 그 둘이 다 작용했다 해야 옳겠지만, 하여간 지금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내 집으로 갈 생각을 아니하고 있었습니다.
대동지환(大同之患)이란 말이 있습니다마는 환난(患難)은 확실히 사람을 하나로 묶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뿔뿔이 제 몫을 가지고 헤어지지만 생사가 문제되는 어려움을 당하면 도리어 저만 피해보려는 생각은 아니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본성, 지상명령적인 지혜가 가르치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내 발등의 불을 끄고야 남의 발등의 불을 끈다는 말도 있습니다마는 아직 네 발등 내 발등 하리만큼 큰 불이 아니니 그러지 정말 큰 불이어서 전체를 삼키는 정도면 각각 제 발등을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문제가 환난이냐 기쁨이냐 하는 데 있는 것 아니라 작은 부분이냐 전체냐 하는데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환난만 아니라 기쁨도 아주 큰 기쁨이면 역시 사람을 하나로 만듭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해방의 소식 같은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아무리 욕심쟁이라도 저 혼자 축하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은 전체에만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삶도 전체가 사는 것이 참 삶이요 죽음도 전체가 죽는 것이 참 죽음입니다. 전체가 나타나기 전에 사람들은 참이 아닌 나에 기쁨 슬픔이 있는 듯해 혼자 그것을 당해보려 하지만 전체 그 자체가 스스로 나타날 때 그것이 참인 것이 번개가 동에서 번쩍 해서 서에까지 하나로 번쩍 하듯이 환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어리석게 그것을 혼자 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는 나를 부정하는데 있습니다. 그 사람은 큰 사건이 나타나기를 기대될 것 없이 날마다의 작은 일에서 벌써 전체인 참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분 속에 전체를 항상 보고 시간 속에 영원을 끊임없이 보고 있으면 화복의 구별, 생사의 대립이 없어집니다. 큰 생(生)이 곧 큰 사(死)요, 큰 사가 곧 큰 생입니다.
우리는 그때 알지 못하는 동안에 그 큼의 바닷가에 서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쪽에서 화광(火光)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때가 바로 정오 직전 모든 집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이므로 불을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한 지진이 왔기 때문에 모두 집이 무너지고 치어 죽을 생각만 하고 미처 불을 끌 생각을 못하고, 그냥 놓고 달려 나왔기 때문에 사방에서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지진으로 수도관이 모두 끊어진 데가 많기 때문에 불 끌 물을 구할 수가 없어져서 더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전 시가 다 타버렸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지진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우리는 불구경을 나갔습니다. 벌써 중심지인 신전구(神田區)에서는 불이 훨훨 붙고 있었습니다. 잠깐 보다가 돌아서는 동안 벌써 불티가 우리를 습격해옵니다. 그래 덕일네 하숙으로 돌아오니 벌써 사람들이 다 짐을 내어놓고 바로 그 옆인 불인지(不忍池)가 으로 피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우리도 밧줄로 짐을 이층 창문으로 달아 내려져서 그 못가로 나갔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내 집으로 갈 생각은 못했습니다. 정말 차마 못가(不忍池畔)서 그랬던가?
不忍池畔의 하룻밤
해가 넘어가고 밤이 됐습니다. 사실 하늘에 해가 있는지도 몰랐고 하늘을 쳐다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어둠이 내리덮였을 때 이제 밤이로구나 했을 뿐입니다. 이제 누구도 일이 어떻게 될지를 알 사람이 없습니다. 나라도 문명도 제도도 법도 다 나타나고 그저 얼크러져 모여 있는 인간의 한 무리가 절대의 자연에 직면하는 원시에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날 밤의 그 광경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것을 말로 할 수 있어야 사람이요, 그것 하잔 것이 말의 목적이요, 그 속에서도 아니 죽고 살아남아 오늘까지 있는 것은 그것 하라고 시키시는 일인데 그것을 할 수가 없다니 부끄럽고 슬픈 일입니다. 장엄이라 할까 처참이라 할까 처절이라 할까, 지옥, 연옥이 있다면 그런 곳일까?
돈을 주고사려 해도 살 수 없고 권력을 가지고 만들려 해도 만들 수 없고, 지혜로 찾아내려 해도 찾아낼 수 없는, 그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면 기회요 계시라면 계시입니다.
불인지(不忍池)란 공야공원(工野公園) 안에 있는 못입니다. 깊지도 않고 옅은 물인데 면적이 상당히 넓습니다. 몇천 평이나 되는지 그때의 인상으로는 만 평도 되지 않나 하고 보았습니다마는 꽤 넓은 못입니다. 그 옆에 상당히 넓은 공지가 있었습니다. 이제 지진에 내쫓기우고 불길에 몰린 그 부근 일대의 사람들이 몇만 명인지 모르나 거기 다 몰린 것입니다.
어느 예술가도 이런 무대장치를 할 수는 없습니다. 시력이 가 닿을 수 있는 끝에 캄캄한 어둠의 장막이 내려 무한대의 원형극이 열려있는데 거기 하늘에 닿는 불길과 연기와 구름으로 배경을 그렸습니다. 단번에 하늘을 핥아버리는 억만 길이나 되는 악마의 붉은 혓바닥, 땅을 갈기갈기 찢어버려 할퀴고 낚아채는, 피가 뚝뚝 흐르는 손톱 발톱, 그런 가운데서도 태연한 듯, 신출귀몰하는 듯 엄숙이 굽어보다 또 히죽이 웃어보다 탄식하는 듯, 달래는 듯, 가지가지로 변화하는 천사의 얼굴 같은 구름송이, 거기다 바람소리와 폭발하는 소리와 인간의 아우성으로 음악을 아뢰고 있습니다. 그러는 밑에 이름도 차마 못한다는 불인지(不忍池) 못가에 뒤에는 물로 배수진을 치고 앞에는 몰아치는 불길의 군대를 놓고 거기 인간의 거품이 끼어 생사의 숨가뿐 숨바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네로는 시를 짓기 위해 로마 시에 불을 놓았다 하고 나도 그날 밤 그 자리에서 그 생각도 해봤습니다마는 그 불타는 로마의 광경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내가 보던 그 불인지 가에서 봤던 광경은 고금에 다시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 내 집으로 내빼어 죽어도 내 것을 안고 쥐고 죽자 하지는 않고 누가 붙잡는 것도 아닌 불인지 가의 목불인견의 그 자리를 못 떠나고 서성이다가 그 광경을 당했을까? 아마도 그것 하나를 꼭 보여주고 싶으셔서 하신 일 아닐까? 오늘까지 그 생각이 머리 속에 그날 밤의 그 구름기둥 그 아우성처럼 오가고 있건만 아무것도 붙잡은 것이 없습니다. 남은 길 가다 벼락 떨어져 친구가 죽는 것보고 시대를 건지는 큰 깨달음을 했다는데, 나는 종교가 나와도 위대한 종교가 나올 만하고, 철학이 나와도 깊은 철학이 나올 만하며, 시가 나오고 그림이 나오고 음악이 나와도 사람의 마음을 그냥은 아니 두도록 뒤흔드는 것이 나을 만한 것을 보았는데, 왜 이러고만 있을까? 부끄럽습니다.
남에게는 몰라도 내게는 참 신기합니다. 모든 것이 꼭 짜인 각본대로 된 것만 같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이 몇만 명인지 모르나 그 사람이 살아난 것은 소방펌프의 힘 때문이요, 그 사람들이 산 것은 나 하나 살리기 위해서요, 나를 살려둔 것은 증거할 것이 있어서 하신 것 같이만 뵙니다.
신전구(神田區) 쪽에서 불어오던 불이 어슬어슬할 무렵 이 피난민들이 몰려 있는 데서 2,3백 미터밖에 아니 되는 데 있는 큰길 건너편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왔는지 자동소방펌프 두대가 거기 와서 물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데서는 수도가 다 끊겨 물을 얻을 수 없는데 여기는 불인지가 있으니 물은 거의 무진장입니다. 아, 밤새나 그 엔진 소리의 고맙던 생각! 과학의 고마움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를 살린 것은 펌프가 아니고 바람이었습니다. 이때까지 바람이 이쪽으로 불어와서 사람들의 간장을 태우고 있었는데 밤이 깊으면서부터 누가 명령이나 하는 듯 반대로 저리로 불어가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 기세를 타서 펌프가 밝도록 작업을 하니 그 불을 멈출 수가 있었지 만일 그 바람세 아니었다면 그 몇만 명은 다 죽었을 것입니다. 추측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밝은 아침 우리가 떠난 후 불이 다시 역습해 오기 시작해서 그 불인지 가에 있던 사람이 거의 다 죽었다고 합니다. 뒤가 물이니 도망갈 수도 없고 물속에 뛰어들어 날아오는 불티를 피하려 이불 같은 것을 적셔 머리에 쓰고 물속엘 들어갔다, 숨을 쉬어야겠으니 나왔다가, 나오면 뜨거우니 또 물속에 들어갔다가, 그것을 반복하다가 기진맥진해 모두 죽어 정말 불인지가 돼버렸답니다. 그러니 신기하게 생각을 아니할래도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숨이란 모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살려주어서 살아난 목숨인데 글쎄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모진 목숨이란 말을 이래서 하는 말인가?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아직 말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하늘에도 있지 않고 땅에도 있지 않습니다. 지진도 불도 아닙니다. 내 마음이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집이 무너지고 불이 일어나서 사람이 타죽어서 무서움이요 비참이 아니라, 그러한 밖의 변동으로 한때 무법천지가 되고 이성 오성(悟性)의 한때 공백기가 생기자 그 틈을 타서 일어나는 본능 충동의 불길이 정말 무섭고 비참한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남은 아니 그랬고 나만이 그렇게 약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끄러워도 내가 이 말을 아니하면 다른 모든 말의 의미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지진의 흔들림과 불길과 싸우고 있는 동안 나는 마음의 밑바닥을 터치고 그 틈으로 치솟는 불길과 연기와 진동과 밤새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참 의미에서 살아났었습니다.
그런 대동지환(大同之患)을 만나니 한편 좋은 것도 있었습니다. 제도나 법이나 교리의 구속이 없어지고 말없는 동안에 일종의 혁명이 선포되자 사람들에게서 자유로 하는 선심이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네 것 내 것 없이 서로 나눠 쓰고 네 집 내 집 없이 서로 동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반면 깊은 속에서는 은근히 딴 것이 움질거려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평소에 저도 그런 것이 제 속에 있는 줄 모르던 것이 물 밑에서 일어서는 ‘레비아단’처럼 일어납니다. 물론 나 스스로도 픽 웃으며 ‘고약한 생각’ ‘우스운 생각’ 하며 곧 쓸어버립니다만, 하여간 일어나는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나 스스로도 부끄럽고 두렵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저 사람의 손에 반지가 있고 팔목에 시계가 있는 것도 뵈고 저 여자의 얼굴이 예쁘고 그 보드라운 살갗이 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언제 죽을 시간이 올지 모르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서도 인기를 얻고 싶고 내 잘난 것을 뵈고 싶은 생각이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 이럴까 나 스스로 반문하지만 그것으로 그 지진 그 불길은 쉬지 않습니다. 붙는 불을 몽둥이로 때리면 점점 더 뛰어 번져나가 듯이 그것을 쓸어버리려 하면 할수록 더 펄펄 일어나고 섞이고 끓고 꼬여 돌아갔습니다. 그것이 지진보다 무서운 지진이요 불길보다 사나운 불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음행하다 잡힌 여인과 고소하는 바리새인을 놓고 말없이 땅에 글씨를 쓰고는 지우고 지우고는 또 쓰셨다 합니다만, 그때 무슨 글자를 쓰셨는지 모릅니다만, 나는 불인지가 그 밤에 밤새도록 내 마음의 밑바닥의 모래 위에 백팔(百八) 번뇌의 가지가지의 글자를 쓰고는 지우고 또 쓰고는 또 지웠습니다. 이튿날 아침 먼동이 환난의 하늘 위에 훤히 터올 때 친구들의 손을 잡고 내 하숙으로 가자 일으키어 나는 지옥에서 놓여나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내 양심은 남은 듣지도 못할 가는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는 터진 땅 밑에서 무슨 새싹이 삐죽이 올라오는 것 같은 것을 느끼며 피난민 사이를 빠져나갔습니다.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50년간 어디서도 누구 보고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오늘이 처음입니다.
이게 진짜다!
불꽃 지옥 속에 앉아 밤새 바라보는데 사방이 다 불인데 내 하숙이 있는 본향구(本鄉떻) 한 모퉁이 임직한 한 곳만이 그 불꼬리가 끊어져 보였습니다. 그래 힛득 밝자 덕일이와 그 동생 순일이와 또 한 하숙에 있던 일본 친구 강두(江頭)라는 사람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가자고 이끌고 나섰습니다. 길이 메어 옮겨설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빈 몸뿐으로, 말하자면 목숨 하나만을 들고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가는 사람에게 주고 있었습니다. 집에 가보니 과연 무사했습니다.
주인에게 간밤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제 밥을 지어먹어야 할 참입니다. 쌀가게에 갔더니 벌써 쌀이 다 떨어지고 현미만을 겨우 구할 수 있었습니다. 현미 맛을 이때 첨으로 알았습니다. 백미보다 물을 더 받을 줄 알아 좀 더 두노라고 했으나 어림이 없었습니다. 쌀은 아직 반이나 익었는데 물은 바짝 말랐고 밥이 솥뚜껑을 들치고 올라왔습니다. 그래 물을 다시 더 두고 다시 끓였더니 그 현미 알이 툭툭 튀어 한 알이 두 알 만큼씩이나 됐습니다. 그것을 먹어보니 맛이 어찌 구수한지 흰밥으로는 아니 바꿀 것이었습니다.
앉았노라니 집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나징이 도둑질을 하니 주의들 하십쇼!” 하는 소리를 큰 목소리로 거듭거듭 외치며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정회(町會)니 청년단이니 재향군인회(在鄉軍人會)니 하는 기관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나는 조금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그저 서로들 웃고만 말아 버렸습니다. 그 시대에 시나징이란 말 일반으로 흔히 썼기 때문입니다. ‘시나징’이란 지나인(支那人)의 일본 발음입니다. 지금은 참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이것만 해도 민주주의의 발달입니다. 그때까지도 일본 사람은 물론, 우리까지도 지나라고 많이 불렀습니다. 업신여기고 배척하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계급과 계급, 단체와 단체 사이에서 서로 그런 말을 많이 썼습니다. 우리는 중국을 ‘되놈’ 일본을 ‘왜놈’이라 불렀고, 중국은 우리를 ‘꺼우리’ 일본을 ‘소귀자’ (小鬼子)라 불렀으며, 서양 사람들은 중국을 ‘차이나’ 혹은 ‘챵’이라 일본을 ‘쨉’이라 했고 일본은 서양을 ‘계도’(毛唐)라 했습니다. 소귀자란 중국 사람이 서양 사람을 양귀자(洋鬼子)라는 대신 일본은 그것보다는 작은, 후배인, 앞잡이인 것이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요 계도(毛唐)는 ‘털 돋은 외국놈’이란 뜻입니다. 당(唐)은 일본이 옛날 당나라와 많이 교통하던 데서 일반으로 외국이란 뜻으로 쓰게 된 말입니다.
하여간 이런 모든 말로 자기는 서로 잘났노라 했고 남은 모두 못나고 나쁜 것들이라고 흉보고, 배척하고, 업신여기는 말로 불렀는데, 따지고 보면 이 죄는 국가주의, 더 자세히 말해서 정치주의에 있습니다. 권력을 숭배시키기 위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 어떤 몇몇이서 짜고 드는, 지배를 목적하는, 힘의 조직체가 생길 때 그런 것은 반드시 나오고 맙니다. 어떤 시킴을 받지 않은 민중은 살빛이 아무리 다르고 말과 풍속 아무리 달라도 그런, 남을 배척하고 깔고 앉으려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옛날 사회에서는 손님, 낯선 사람을 잘 대 접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아니하면 하늘의 벌을 받는, 미덕으로 돼 있었습니다. 옛날 사회일수록 인정의 사회였습니다. 인정이 박해 진 것은 권력 ‘폭력을 숭배하는 소위 근대국가가 발달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본에서 유교문화, 불교문화를 빼면 무엇이 그래 남겠습니다. 일본 사람이 문화다운 문화를 지을 줄 알게 된 것은 불교의 가르침, 유교의 가르침을 받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일본에 만일 공자가 오고 석가가 온다면 그래 ‘시나징’이라 하고 ‘계도’라 하겠습니까?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본이 감히 시나징이라고 하게 된 것은 청·일전쟁의 싸움 하나 이겼기 때문이요, 이 싸움을 감히 진 것은 서양에서 근래에 총 만들고 대포 만드는 법 하나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힘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쇠망치를 하나 얻어 들었다고 이천 년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대해 감히 시나징이라 했으니 차마 못할 일입니다. 차마 못할 일이건만 정치는 그것을 했습니다. 일본사람이 한 것 아닙니다. 정치가 한 것입니다. 근대국가가 한 것입니다.
시나징이 도둑질을 하다니, 시나징이 누구입니까? 시나징은 다 도둑 입니까? 그저 도둑이 더러 나면 났지, 시나징이 도둑질을 한다고야 할 수 있습니까? 이치에 아니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국민지도, 사회봉사의 깃발을 들고 거리를 누비고 있습니다. 평상시에 일본 사람이 그런 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큰 환란으로 겁에 질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지진이 아니라 인진(人震)입니다. 천재(天災)가 아니라 심재(心災)입니다. 인간성이 흔들리고 심리가 어지러워진 것입니다.
지금의 이 마음이라면 달려 나가서라도 그렇지 않은 것을 풀어 일러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어느 마음도 다 “어떡하지?” 하는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럴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도 그 시나징이라는 소리는 좀 불쾌하게 들렸지만 그저 가볍게 웃고 말았습니다.
환란의 제2일도 저물어 저녁때가 됐습니다. 주인 격인 내가 식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쌀은 아침에 사온 현미가 있지만 반찬은 어떻게 할까? 멸치라도 사다 된장국이라도 끓여 훌떡 할 생각으로 거리를 나갔습니다. 덕일이가 따라 나갔습니다. 늘 다니던 가게에 가서 멸치를 한 봉 사들고 돌아오는 때입니다. 상점에서 조금 오면 파출소가 있고 그 파출소 앞에서 좁은 옆 골목길을 꺾어 들어오면 거기 우리 사는 집 앞 한길이 나옵니다. 파출소를 지나 그 옆 골목으로 막 꺾어지려는 순간, 어디서 오는지 사람의 떼가 갑자기 몰려들며 “고래가 홈모노다. 고레가 홈모노다.” 와와 외치는 겁니다. 이게 진짜라는 말입니다. 수가 얼마나 되는지 미처 짐작도 할 수 없으나 손에는 모두 번쩍번쩍 하는 일본도, 몽둥이, 대창, 철창 하는 것들을 들었습니다. 정말 벼락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 죄가 없으니 별로 겁도 나지 않았습니다. 문득 ‘시나징’ 하는 명사가 내 머리를 스치고 갔습니다. “옳지 그렇구나, 시나징이 도둑질 한다고 아침에 소리치더니 아마 나를 중국 사람으로 본 모양이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미처 대답을 하려 하기도 전에 파출소로부터 순경이 나와서 우리와 군중 사이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는 흥분하는 군중을 타이르고 떠밀며 헤져 가라고 했습니다. 쌀통에 쥐 나들듯 그 골목을 늘 드나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몰라도 순경은 아마 나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린 것입니다. 군중들은 슬몃슬몃 헤져 갔습니다. 조금 우습다면 우습게 된 일막극이지만 나는 본래 모든 것을 모나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인지라, 별로 이상한 감정 없이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덕일이는 똑똑하다면 똑똑하고 좀 날카로운 성격입니다. 후에는 복도고상(福島高商)을 나오고 거기서 신문기자 노릇을 하며 일본여자와 결혼을 해서 만주 하르빈인가 어딘가 가서 살다가 일찍 죽어버렸습니다만, 돌아가려는 나를 끌어당기며 그냥 미시하게 갈 것 아니라 좀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내 심정은 별로 그럴 것 없지 않느냐 하는 느낌이었지만 또 구태여 막자는 마음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대로 옆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나는 도리어 고맙게 아는 순경한테 가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진짜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가 무슨 범인이냐? 죄 없는 사람보고 군중이 까닭 없이 그랬으면 경관으로서 분명한 설명을 해주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이렇다 할 아무런 책망 하나 없이 그저 미시하게 돌려보내고 만다니 그게 무슨 처사냐?” 하는 뜻의 말이었습니다. 경위로 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돋히지 않아도 좋을 거스러미를 돋힌다 하고 듣고만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순경은 발끈 화를 냈습니다. “이 사람아 때가 때 아니냐? 그렇게 알고 싶거든 그럼 가자!” 하며 잡아끌었습니다. 나는 내가 각별히 다른 마음이 없으니 그 “때가 때 아니냐?” 하는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경은 아무 내용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만 말하면 당연히 알 거라는 태도로 그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덕일이를 끌고 가는 데는 좀 걱정스러웠습니다. 물론 아무 죄야 없지만, 또 따질 만도 하지만, 우리와 일본 관리와의 사이는 이유 이론이 서지 않는 처지인 것이 분명합니다. 경찰이란 데 간다 해도 우리에게 이로운 일이 있지 못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도 같이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순경은 나를 보고 “자네는 일없어, 괜찮아”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를 한두 차례 거듭한 다음 순경은 “정말 가보고 싶으면 가도 좋아” 하고 데리고 갔습니다. 간 곳은 구입(駒込) 경찰서였습니다.
똑똑해야 살 것 같지만 똑똑이 늘 이익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온순해선 못살 것 같지만 온순이 늘 손해를 보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는 또 기대대로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새옹(塞翁)은 “복이 될지 누가 알아?” “화가 될지 누가 알아?” 하면서 당장에 내려지는 판단에만 집착하지 않고 길게 두고 일 그 자체로 하여금 일을 말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안정한 마음의 처세를 할 수 있었다는 옛말이 있지만, 역사의 의미야말로 그러지 않고는 실현할 수 없습니다. 구입(駒込)경찰서 유치장엘 썩 들어서면서야 “그렇다, 일은 바로된 일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당히 따지려다가 터무니없는 손해를 봤는데 그 불행이 아니었던들 사건의 진상을 모를 번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모르고는 잘해도 잘이 아니요 못해도 못이 아닙니다. 진실을 붙잡으면 미래는 거기서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잘했던 것만 아니라 잘못했던 것까지도 잘한 일이 됩니다. 그것이 참 의미의 선이요 구원입니다.
“그렇게 알고 싶거든 가자” 할 때 나는 무슨 조사나 할 줄 알았지 덮어놓고 유치장에 넣을 줄은 몰랐는데, 가더니 이런 말 저런 말 물을 것도 없이, 첨에는 오지 말라던 나까지 데깍 넣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들어가니 꿈도 못 꾸었던 세계입니다. 사방 아홉 자나 되는 살창 우리인데 그 안에 설 수도 앉을 수도 없이 사람이 가득 찼습니다. 그것이 다 조선 사람입니다. 거기서 들으니 난데없이 조선 사람들이 도둑질하고 불 놓고 우물에 독약을 치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면서 청년단 재향군인 또 일반시민을 일으켜 칼로 죽창으로 마구 죽인다는 것이요, 여기 잡아넣은 것은 보호한다면서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일은 바로 됐다고 한 것은 이 설명을 듣고 나서 느낀 말입니다. 일이 이런데 이것을 모른다면 산 의미가 어디 있으며 평안이 어디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 있을 때 경찰서 앞을 지나면 죄 없이도 치가 떨렸지만 유치장을 본 일은 없었고, 만세를 부르고도 이상하게 빠져서 들어갈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여기서 그 구경을 하게 됐습니다. 후에 몇 차례씩 가보고는 “감옥은 인생대학이다” 했습니다마는 그 입학은 여기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입학식이야말로 이름에 합당하게 참 훌륭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때에 한 번 미리 경험했던 것이 후에 그것을 이겨가는 데 픽 도움이 됐습니다.
여기는 어제 밤의 불인지와는 또 다른 체험이었습니다. 본능이고 번뇌고 그런 것은 일어날 여지도 없었습니다. 어제 밤의 극은 우주적인 것이었지만 오늘 밤은 민족극입니다. 어제 밤은 무한 대공(大空) 아래서였지만 오늘 밤은 감옥 안입니다. 밤새 생각한 것이 자유, 자유, 자유입니다. 길이 넘는데 뚫린 살창으로 어제부터 붙는 그 불길이 아직도 붙고 있는 것이 뵈는데 그것을 바라면서 밝도록 한 생각은 “저 불이 여기까지 올 때 이놈들이 이 문을 열어주고 도망갈 리가 없지” 하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제각기 노하고, 저주하고, 한탄하고 떠들지만 나는 한 마디 입을 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처음에 들어가던 대로 맨 앞 살창 밑에 이마를 살창에 대고 앉아, 기도를 했는지, 생각을 했는지. 그 안에 이방인이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본 사람인데 조선 사람으로 보여 잘못 잡혀온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 사람인데 역시 잘못 잡혀왔습니다. 그 일본 청년은 간수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자꾸 자기는 조선 사람은 아니라는 변명을 했고, 중국 사람은 울면서 “나 지나 유학생이오” 하며 밤새 애걸을 했습니다. 세 국민성이 제각기 나타났습니다. 일본 사람은 자신이 있어 그러는지 울지는 않았고, 한국 사람도 우는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중국 학생은 내가 보기에도 비겁하다 하리만큼 체면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또 그런다고 한국 사람들은 그를 몰아쳤습니다. 나는 혼자 우리 차비에 누구를 비웃을 거야 없지 않느냐 속으로 항의를 했지만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밤새 사람을 잡아들이는데 모두 불 난데 가서 도둑질하던 것들입니다. 그중 무서운 것은 벽창호 같은 장사인데 사내놈이 여자의 속옷을 입고 목을 홀켜 숨을 못 쉬고 짝짝하며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조선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 없었습니다.
“이게 진짜다”라고 칼을 빼들고 부르짖었는데, 하는 그 사람의 뜻은 무엇이었든 간, 그 참 의미는 진짜 자아, 진짜 일본, 진짜 중국, 진짜 한국을 드러내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모른 아버지 마음
한 밤을 또 꼬박 세웠습니다. 아침이 됐을 때 한 사람이 살창 밖에 와서 이리저리 돌아보더니 문득 나를 보고 “아, 자네도 왔던가?” 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