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住宅)의 추억들!
1970년대 수몰 직전의 자양면 용산동을 백암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계천(溪川)의 오른쪽이 인구마을이다.
삼휴공(18世)께서 영천 석동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일생을 사신 마을이며,
모재공(21世)께서도 귀미마을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일생을 사르셨다.
그 후 우리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
댐건설로 수몰되었던 증조부 경암공(휘 진우 27世)께서 농와고택에서
살림나 사셨던 집터가 나타났다.
이 터에서 조부 용헌공 남매분이 태어나셨고,
부공(父公) 송당공 3남 3녀분께서도 그 집에서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그리고 대를 이어 송당공 자녀 우리 4남 2녀가 그 집에서 태어났다.
그 집은 고가(古家)로 송당공께서 마을 입구의 밭에 새로 집을 지어
옮기고 그 자리는 채전밭이 되었다.
송당공께서 심혈을 기우려 지은 새집이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타벼린 그 자리가 댐건설로
용궁이 되었다가 물이 줄어 집터에 담과 주축돌이 나타났다.
一. 인구마을의 새집에서
1.아버지께서 새집을 지으시다.
1938~9년 그르니 내가 5~6살 때 쯤 아버지께서 증조부님께서 살림나신 옛집이 낡아서 집을 뜯어 채소밭을 만들고, 마을 입구의 우리 밭에 새집을 지으셨다. 도목수가 ‘평촌노인’였고, 나는 자주 집짓는 모습을 재미있게 구경한 기억이 난다. 특히 초가집이지만 앞으로 기와를 이을 계획으로 기와집에 맞는 굵은 재목으로 튼튼히 지었다.
집은 ㄷ자형으로 안채(부엌, 큰방, 마루, 머리방 4간)는 남향이고, 사랑채(방 2간과, 대청 한간 3간)는
서향이며, 아랫채(방앗간, 광, 작은 방 3간)도 서향 집이였다. 마구깐은 바깥마당의 동남쪽에 별채로 지었다. 마당이 두 곳으로 안마당과 바같마당이 구분되어 있었고, 또한 우리 마을에서는 처음으로 집안에 우물을 파서 사용하였다.
특히 아래, 위채의 대청 바닥마루는 송판을 등겨 불에 구웠기 때문에 청을 물걸레질하면 언제나 색깔
이 붉고 광택이 났다. 그리고 모든 외벽은 흰 석회를 발라서 그 당시 석회 바른 집은 우리 마을에는 우
리 집 뿐이었다. 그 흰 벽에 철없던 나는 연필로 마구 유아화를 여기저기 그리기도 했다.
집을 높게 짓기 위해 안채의 터는 흙을 쌓아 높이고 둘레에는 돌로 약 90CM의 뚝담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으니 집이 우뚝하게 높이 지어졌다.
그런데 어릴 때 나는 군위형님과 장난을 치다가 자주 툇마루에서 뚝담을 거쳐 마당으로 약 1.5미터
높이에서 떨어져 머리뼈가 폭 들어가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병묵도 자주 떨어져 이마나 머리가 푹 파이는 상처를 입는 것을 봤다. 나는 지금도 뒷머리에 그때 흔적이 남아있다.
아버지의 존영 어머니의 존영
그 당시 미제작은아버지께서는 20대인 1930년 초에 결혼한 후 일본으로 가시어 토목회사에 근무
하시다 '카토구미'라는 토목회사를 경영하여 성공하셨다. 그때 경산형님이 삼촌의 도움으로 초급중학교
를 졸업했다.
다리골 작은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신용산에서 상점을 경영하셨다.
2.경사스런 일들
1938년경 새로 지은 새집에서 덕동고모, 포항고모, 일본의 둘째 아드님이신 미재숙부, 모두 6남매분이 모두 모여 할머니 몇해 늦은 회갑잔치를 벌렸다. 그때 기념으로 할머니 독사진을 찍어서 집집마다 나누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학야 누님의 혼례를 올렸고, 경산형님도 일본에서 유학하여 중학교과정을 마치고 귀국 결혼을 하여 신행을 그 집에서 했고, 양동형님과 군위형님도 그 집에서 결혼하여 신행을 하였다.
형수님들의 신행 때의 모습이 회상된다. 특히 군위형수님의 신행 날이 월요일이라 영천중학교에 다니
던 나는 결석을 하고 잔치를 거들려고 하였드니 경산형님의 영천 가라는 독촉을 받고, 투덜거리며 영천
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자정이 남다르신 어머니께서는 서운해 하는 눈치였다. 그처럼 철두철미한 경
산형님의 교육관의 일면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교단에서는 결석을 싫어했고, 나 자신도 결근은 일
생동안 자제를 하며 지냈다.
1938년 때늦은 할머니 회갑잔치 때의 기념사진이고 뒤에 고종인 권혁철이가 폼을 잡고 있다.
동계공께서 1939년 4월 1일~1941년 3월26일 일본국 니이카다현 유자와(湯澤)심상고등소학교 2년을 수학한
졸업사진이다. (3남 윤기가 일본 가서 구해 옴) 동계형님은 뒷줄 왼쪽에서 4번째이다.
동계형님의 1940년대 유자와(湯澤)심상고등소학교 재학 중에 찍은 사진.
뒷줄의 한복 입으신 아버지와 셋째 줄 왼편 셋째의 양동형님의 앳된 모습
앞줄에 면장으로 계시던 한복 입으신 울산할배가 보인다.
아버지 39세 때인 1939년 3월 23일 양동형님의 초등학교 졸업사진에서
아버지와 양동형님의 모습을 확대하였다.
3.막내아들과 장손이 그 새집에서 태어나다.
그 새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1939년에 병묵, 1944년에 태기, 1949년에 순옥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1950년 형기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특히 태기는 윤달에 출생하여 ‘윤이’이라 아명(兒名)이 지어졌다. 또한 증조모님 살아계시고, 윤달에
태를 짊어지고 태어났기에 좋은 이름이라고 ‘증태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4.경산형님 일본군에 입대하다.
1945년 6월 20일 경산형님께서 일본군의 영장을 받아 입대하시던 날의 일이 생생히 기역난다. 그때는 면민들이 모여 군 입대 환송행사를 하였고, 경산형님께서는 어머니의 정성으로 천명의 손으로 바늘 뜸
을 받은 ‘센닌바리’(千人針)를 두르고 답사를 하시던 경산형님의 늠름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날 형님과 이별하고 오후에 우리 집 황소 먹이기를 하였다. 소의 고삐를 잡고 떠난 형님 생각을 하다가 부주의로 황소의 떠받침을 당했다. 다행히 하늘로 붕 솟았다 동작 빠르게 바르게 떨어져 다치지
는 안했다. 그때 아버지께서도 그 광경을 보시고 놀라시며 조심하라고 이르셨다.
5.한없는 손자 사랑에 보답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윤이’
특히 어머니께서는 아들보다 손자에 정을 더욱 솓으시니 윤이의 응석이 아주 대단했다. 하루가 할매로 시작하여 할매로 끝났다. 어머니는 ‘우리 윤’이 뿐이셨다. 그런 사랑을 지금도 잊지 않고 할머니의 음덕
이 우리 후손들이 잘 되고 있다는 신념으로 산소관리는 물론이고 성묘를 자주가고 있으며, 대소가의 좋
은 일 나쁜 일들을 고해드리고 도와주시라고 기원도 하고 있다.
二. 6.25전쟁으로 새집이 불에 타버렸다.
1.6.25전쟁으로 힘들었던 피란살이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국군이 후퇴하여 9월 어느 날 북괴군이 포항의 죽장을 거처 영천방면으로
침공해왔다. 피란가기 전날 우리 집은 뒷귀미 벼논을 머슴이 매고 있어 나는 점심을 가지고 논을 찾았다. 그런데 오후 3시쯤 되어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북괴군의 전차, 대포차 등의 기동력을 멈추게 하려고. 사갓바위 근처 강가의 도로를 해군에서 폭파를 한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에 피란가라는 소개령이 내려 소달구지에 중요한 물건을 싣고 임고면의 ‘알뫼(용천마을)’라는 곳의 존이모가로 온 대소가가 피란을 갔다. 피란을 나오며 재봉틀 등 중요한 것은 큰 독에 넣어 채전밭에 묻어 두었다.
2.우리 집이 폭격으로 불타 버렸다.
임고 용천, 영천 조교, 금호 순람, 섬들 등지에서 오랜 기간 피란을 마치고 고향이 수복이 되어 돌아와 보니 미군의 폭격으로 우리 집은 불타버렸고, 그때까지 연기가 나고 있었다. 불탄 이유는 우리 집이 크
고 우물이 있어 북괴군의 사령부로 이용하여 군인들이 들락거리니 정찰기가 확인하여 폭격을 하여 불살랐다.
온 식구의 실망은 말할 나위도 없고. 특히 아버지의 실망은 아주 크셨다. 일생의 대업으로 새집을 크게 지어 자자손손 살게 하려고 정성을 솓아 지으셨는데, 불타 버렸으니 대성통곡을 하셨다. 그리고 처마 밑에 쌓아둔 보리가마니도 다 불타버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재종조부이신 월연의 원산댁 사랑방에 임시로 온 식구가 살기 시작했다.
3.불탄 터에 새로 경산형님이 새집을 지었다.
그런 생활 중에 할머니께서 1951년 1월 25일(음12월 29일)에 돌아가시자 남의 집에 빙소를 차릴 수 없다하여 미재적은집에 영위를 모셔놓고 맏아들인 우리 집에서 아침, 저녁의 상석(上食)을 월년의 우리 집에서 앞 시내를 건너 매일 날라다 상식을 올렸다.
그래서 경산형님께서 할머니 빙소를 우리 집에 모셔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념이라 불탄 새 집터에다 장차 원래 가옥처럼 ㄷ자형, 몸채, 사랑채, 아랫채로 지을 연차 계획을 세우는 평면도를 그리시며 나에게 어떠냐고 물으시던 기억이 난다.
그 연차계획에 의해 1952년에 먼저 예산이 적게 드는 아랫채 넷 간을 지어 식구들 이 입택토록 하였다.
3년상 동안 상주(喪主) 복장으로 계셨던 아버지 3형제분의 모습
다행히 1952년 가을에 새집이 완공되어 온식구가 입택하였고, 할머니 대상은 1953년 1월에 치루고 난후 봄에 경산형수께서는 형기를 대리고 영천으로 합가하였다. 그 새집에는 군위형님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으셨고. 또한 양동형님은 따로 집을 얻어 살림을 하고 있였다.
4.자양에서 정미업을 시작하다.
경산형님께서 신용산에 정미소를 차렸고, 그 뒤에 노항의 정미소도 인수하여 아버지께서 운영을 맡아 하셨다. 그러나 그때 유류값이 높아 운영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나는 1953년 3월 20일에 학교를 졸업하고 발령을 대기 중이었으며, 용산의 정미소에 나가 일을 돕기도 하고 지냈다.
1953년 설날에 새로 복구한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6남매!
나는 옷이 없어 군위형수의 배려로 형님의 명주옷을 빌려 입었다.
53년 겨울 방학 때 고향을 방문하여 3종반이 다정히 찰각!
5.나의 학교생활
나는 1950년 6월 5일에 안동사범학교 본과에 입학하여 1학년 과정을 밟고 있었을 때 6.25전쟁으로 휴
교가 되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와 1951년 영천고등하교에 위탁 교육인 이수교육을 받았고, 1952년
4월 1일부터 복학하여 3년의 사범교육을 마치고 1953년 3월20일 학교를 졸업했다.
1951년 영천고등하교 이수기간 때의 친한 친구들! 교복과 교모는 안동사범의 모습이다.
지금은 연락되는 친구는 성대현 한 사람 뿐이다.
三. 영천읍에서의 셋방살이
1.‘부처만댕이’에서의 생활
우리 집이 자양에서 영천시내로 생활근거지를 옮긴 과정을 살펴보면 경산형님께서 1950년 7월 10일
자로 영천군청 기원으로 발령을 받아 교촌동 제종고모가에서 하숙한 것이 시작이다.
그르다 6.25사변이 일어나 국군이 후퇴하여 낙동강 까지 밀리자 영천도 피란명령이 내려 온 식구는 피란의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폭격으로 자양의 우리 새집이 불타버려 원산댁 사랑방에 임시로 살기 시작했다.
영천읍의 경산형님은 1950년 가을에 부터 ‘부처만댕이’에 있는 돌밭댁의 방을 얻어 병숙과 남매가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나는 1950년 6.25전쟁 발발 후에는 전시 중이므로 다니던 학교가 휴교상태라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있던 차에 1950년 가을에 신병으로 영천의 주의원에 통원치료를 받게 되어 영천에 경산형님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르다 그 후에 옆집인 이씨집으로 옮겨가서 몇 년간 그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였다.
1952년 봄 그때 어머니께서 신병치료차 영천으로 오셨다가 경산형님의 권유로
어머니의 독사진과 우리 3남매의 사진을 찍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2.창구동으로 주택을 사서 이사하다.
1953년 4월 1일자로 교사발령을 받아 병곡으로 떠나 생활 하면서 경산형님의 다정하고 교훈적인 편
지를 위시하여 군위형님, 병집, 병숙, 병묵의 고향소식에 위로를 받으며 객창생활이 시작되었다.
1953년 4월 1일자로 병묵이 영천중하교 입학하여 창구동으로 왔으며, 1953년 4월 25일 자로 병집이 영천군청 임시직으로 발령을 받아 창구동에 합류하니 넷 식구가 되었다.
허물어진 초가 4간 집을 사서 부지런하신 경산형님께서 손수 고치고, 다듬어서 집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전서방댁의 말에 의하면 먼지를 덮어쓰고 집수리와 청소 등 집안 정리에 힘들었던 일이 지금
도 회상된다고 했다.
四. 창구동의 즐거웠던 일들
1.아들 딸 2남 1녀가 태어나다.
1953년 그 무렵 경산형수님은 자양에서 영천창구동으로 경산형님과 합가하였다. 그래서 군위형님이 새집에 입택하여 아버지, 어머니를 모셨다.
그 집에서 1954년에 윤기, 1956년에 정애, 1959년에 우석 삼남매가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 생전에 1958년에 둘째집에서 수진, 네째집에서 석윤이가 태어났으니 그때에 손자 6명에 손녀 6명이었다.
2.나는 그 집에서 신행을 했고, 전서방댁의 혼례도 치르다.
나는 1956년 12월 29일 결혼을 하여 그 다음해에 1957년 가을에 그 집에서 신행을 하였고, 그 뒤 1960년 4월 3일에 전서방댁도 혼례를 그 집에서 올렸다.
1956년 12월 29일 능계 처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60년 4월 3일(음3월 8일) 일요일. 창구동 집에서 전서방댁 결혼식을 올리다
.
병묵이 고등학교 시절 첫 시집온 파마하지 않은 형수와 같이
경산형수님이 능계동서, 시누이와 함께 창고 앞에서
경산형님의 배려로 시어머니 병위문을 위해 시댁을 방문한 제수와 동생
아들들을 대리고 경주 나들이 중 불국사에서
언제나 영천 다니려갔다 경주를 향해 주남다리를 건너가면 어머니께서는
조양각 옆의 이 언덕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셨다. 그 자리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전서방댁과 나의 뒷모습
3.경산형님께서 다양한 사업을 하시다.
동계형님이 소유하고 있던 911호 화물자동차로 청송 중왕산에
군청직원들과 관광의 한때
경산형님께서는 자양의 정미업은 그만두고 현직에 계시면서 운수사업을 시작하여 트럭을 2대나 굴리셨다. 대인관계가 좋으신 형님의 노력으로 점점 사업은 번창해 갔으나 그때만 해도 지방의 소도시
라 일감이 적고 경쟁이 심해서 힘 겨우셨다.
한편 수완이 좋으신 경산형님께서는 허가 받기 힘 드는 주유소를 인가 받아 운영 하셨고, 정부 도정 공장도 합작으로 설치하여 운영하셨다. 그르니 사업이 다양하게 운영 되었고, 또한 자금 등 힘에 겨우 셨기에 소위 스트레스가 심하여 병을 얻으셨다. 그래서 불행이 우리 집에 찾아오기 시작하여 아주 힘 드는 시기가 닥쳐 왔다. 그 불행한 일들은 회고하기조차 싫어서 생략 한다.
그러나 남은 가족들은 경산형수의 굳은 신념과 가정 수호의 강한 의지로 피나는 노력을 하셔서 우리
집이 보존되었다. 이제는 다들 제 몫을 하는 후손으로 자라서 자랑스럽고, 반가운 소식들만 들려오고 있다.
작년 10월에 군위형님께서 돌아가셨다. 만학으로 한문실력을 쌓아 각종백일장에 여러 번 장원으로 입상하였고, 또한 유가의 후손으로 서원 등 유생의 활동을 많이 하셨으며, 그리고 매사를 솔선수범으로 우리 대소가를 이끄시던 군위형님께서 갑자기 병을 얻어 돌아가시니 온대소가가 슬픔에 잠기기도 하였다.
4.창구동 시절 우리 7남매의 상황들
o포항누님은 딸만 3형제를 낳아 키우셨다. 불행히도 자형이 경찰공무원으로 가정에 소홀했다. 그르니
셋 딸을 힘들게 키우셨다.
o경산형님께서는 1945년부터 자양면사무소에 서기로 근무하다, 1950년 7월 10일부터 영천군청 기원으
로 출발하여 56년에 기사로 승진, 1957년에 상주로 전근되어 사직 하였다. 그리고 현직에 있으면서
각종 사업을 하시다 사직 후는 본격적인 사업에 몰두하셨다.
o양동형님께서는 1947년부터 1954년 까지 자양면사무소에 서기로 근무하였다. 그르다 경산형님의
사업이 번창하므로 영천으로 이사하여 그 사업을 도우는 일을 하였다. 경산형님 작고 후는 모든 사업
을 맡아 정리하기에 애를 먹으셨다.
o군위형님은 1952년 5월 31일부터 자양초등학교에 근무하다가 1958년 7월19일에 대구로 전근하여
1972년 2월 28일 까지 열심히 근무하여 대구시내 근무연한의 상한선인 8년 근무의 벽을 넘어 14년간
근무의 기록을 새우셨다. 그 이유는 근무 성적이 우수하였기 때문이었다.
o나는 1953년 병곡초등하교 교사로 출발하여 1955년 경주월성초등하교로 전근하여 열심히 근무 하고
있었다.
o전서방댁은 큰오빠 뒷바라지의 살림을 맡아 온힘을 기우렸고, 1960년 4월 3일에 서울의 교도직 공무원과
결혼하여 서울로 시집을 갔다.
o병묵은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운의 꿈을 품고 경대 법대에 입학하였다. 그르다 경산형님의
작고로 집안형편의 어려움으로 휴학하고 운수업을 맡아 다시 경산형님의 꿈을 계승하려고 애를
썼으나 고생만 무척하고 끝내었다.
*다음은 나의 사진첩에 붙어 있는 우리 7남매의 젊은 날의 사진들
학야누님의 회갑때의 모습 경산형님의 젊은 시절의 모습
양동형님의 젊은 시절 모습 군위형님의 젊은 시절의 모습
나의 젊은 시절의 모습 전서방댁의 젊은 시절의 모습
병묵의 64년 때의 모습
4.우리의 다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는 말이 우리 부모님께 어울리는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마음씨가 곱고 약하시어 매일 이 자식 저 자식 걱정으로 날을 보내셨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일은 우리 후손 모두가 선조님의 훌륭하신 얼을 이어받아 안으로는 삼체계정신인 숭조, 목족정신을 실천하고, 밖으로는 민주시민의 자질을 길러 맡은 바 책무를 충실히 다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지금 후손들은 스스로 힘을 길러, 사회의 일원으로서 직장에서 책임과 의무를 충실히 다하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 대소가는 희망이 넘치는 집안이 될 것이다.
하늘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님들, 부디 자손들에게 더욱 많은 음덕을 베풀고 보호해 주십시오.
六. 창구동과 관계되는 편지들의 사연을 발췌하여 옮겨본다.
1.1953年 11月2일자 경산형님의 편지 중에서는
....자식(子息)에 대한 자정(子情)이 극심(極甚)하신 부모(父母)이시기 때문 우리들은 참으로 행복(幸福)하다. 인자(仁慈)하신 부모님(父母任) 이 게시고 여러 형제 무사 (無事)하니....
책상(冊床)위 벽에는 어머니의 사진(寫眞)을 모서놓고, 그 아래는 정철씨 (鄭澈氏) 의 시조(詩調)가 붙어있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김일........” 아버지 사진(寫眞)이 없음이 유감(遺憾) 쓰럽다.
병극(炳極)아 우리 제남매(諸男妹)는 이를 악물고 성공(成功) 출세(出世) 하여야 한 다. 우리들의 영광(榮光)을 바라는바 아니요, 다만 노쇠(老衰) 하신 부모님(父母任)을 즐겁게 함으로서 혈육(血肉)을 노나 주신 부모님 (父母任)에 대(對)한 자식지도리 (子息之道理)일 것이다.
.....정원(庭園)의 당국화(唐菊花)-과꽃)도 시들어지고 봉선화(鳳仙花) 열매도 입을 벌리는 것을 보니 가을도 낙엽(落葉)과 함께 저물어가는구려! ‘다리아’마는 고독 (孤獨)히 곱게 피어 정원(庭園)을 곱게 장식(裝飾)하며 설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고 개를 흔드니 만추(晩秋)의 정서(情緖)를 자아내고 있는 듯!
석야(夕夜)에 각색(各色) 꽃씨를 명춘(明春) 파종(播種) 할려고 단속 (團束)하니 병숙(炳淑)이가 딴봉지를 사서 왜 사나고 물른즉 “동무에게 선사한다” 나.....
<효성이 지극하신 경산형님의 아우들과 자녀교육을 위래 정철의 효도시조를 붓으로 써 어머니 사진 밑에 걸러두신 이야기와 창구동에 입주하여 꽃도 심고, 가을에 꽃씨 도 챙기는 정겨운 남매의 이야기가 잘 나타나 있다.>
2.1953년 10월 10일자 병묵의 편지 중에서
....오늘도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데 형님도 저 구름을 보고 고향을 그르시지요 나는 무고히 학교에 다닙니다.
그리고 형님에게 편지를 두 번이나 부쳤는데 답장이 오지 아니하기에 궁급기 짝이 없습니다. 요번에는 꼭 부쳐주시요!!
그리고 자양에는 어머니는 외가에 가시고 아버지는 나와 소풀 살이다가 손가락을 다치셨어요 지금은 치료 중입니다. 누님은 여전이 읍에 와서 수고를 하고 있지요. 벌서 무 배추는 머리를 실렁 실렁 제잘란채하고 푸른 물결 강가에 빨래를 하는 여자들을 볼 때 완전이 앞으로 겨울이 온 표시입니다.....
.... 우리는 어제 강가에 가서 형님 이명 누님 나 네 식구가 철립(천렵)을 하였습니다. 오후 한시나 되어서 출발하여 완산 앞 걸에 가서 빵, 과자, 사과를 사다 놓고 먹을 때 형님 생각이 한쪽 머리에 남아 있었읍니다. 형님 카매라로 사진을 찌고 집에 돌아오면서 온가것 구경하면서 이야기하며 왔습니다.
양동아주머니는 해산하여 여아(女兒)를 낳았습니다.
저도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달도 없고 깜캄한 밤입니다 형님도 벌서 꿈나라로 가셨지 싶습니다. 벌써 전기불은 가고 큰형님도 새형님께 편지 쓰려다 꿈나라로 가시고 촛불 밑에서 대고말고 섰으니 용서하여 읽어보시고 꼭 답장을 서서 꼭꼭꼭꼭꼭꼭꼭꼭꼭꼭꼭꼭. 형님 편으로 부쳐주시기 부탁하고 저도 꿈나라로 가겠습니다 형님 안녕히 계십시요!! 몸조심하시어 병내시지 말기를 부탁부탁부탁합니다.
<그때 고향소식을 가장 자세히 적어 보냈지! 셋 종반의 완산보 근처에 가서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준비해간 빵, 과자, 사과 등을 먹은 이야기에서 경산형님의 아우사랑의 큰 정을 느낄 수 있군! 다행히 그 날의 사진이 있어 회고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시절은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서 밤 9시인가 되면 가정등이 꺼졌기에 촛불을 켜서 공부했던 그 시절이 회상되는구나! 내가 왜 답장을 해주지 않았지? ‘꼮’자가 12자이군! 답장을 못해주어 미안하기 그지없네 하하하...>
3.1953년 12월 10일자 전서방댁 편지 중에서
....용락이는 오빠오시면 재미나게 놀려고 결심하고 있어요. 오빠요 용락이를 내내 잊이말으소서, 오늘도 시간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집에 와서 지공기(축음기)를 실우면서(돌리면서) 이것저것 온갖 것을 시루고(돌리고) 오빠가 조와 하시는 ‘갈매기 바다 위....’에도 실아봄니다(돌려봅니다) 오빠요 할 말은 만사오나 이로서 끝이오며 나중에 방학 때 오시거든 우편국 맞은편 대문도 보이고 이다(판자)가 울(울타리) 하였는 것이 보이니 찾기는 참으로 쉬웁니다. 끝으로 오빠 방학 동안 무사히 계시다가 오시시를 바라고 이번 시험에 꼭 합격되기를 두 손 합쳐 비나이다.
<경산형님께서 1950년 겨울 처음 ‘부채만댕이’에 자취생활을 할 때 구입한 헌 축음기 를 수리하여 우리 여러 남매들이 다들 노래를 좋아했고, 남보다 먼저 유행가를 배울 수 있었으며, 많이도 틀고 같이 노래 불렀지!
그리고 새로 매입한 창구동 우리 집을 쉽게 찾아오도록 길 안내를 잘도 하였군!>
4. 1954년 4월 2일자 병묵의 편지 중에서
실버들 가지가지 새싹이 파릇파릇하여 이것도 한결 고향소식 전하려 하내~
그리고 형님 기체후만강 하옵나이까 아버지 어머니도 기체후만강 하옵나이다. 형기(亨基)도 봄을 맞이하여 기쁨에 넘쳐 뛰놀고, 자양(紫陽) 우리 집에 요번에 가서 호박구덩이를 15개쯤 파놓고 왔는데 올해는 호박을 많이 심어서 형님께 올 방학에 오시면 범벅 티를 내게 할것입니다. 많이 바라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천(永川)에는 형님의 꾸준한 노력으로 꽃밭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가지 꽃씨를 뿌리고 여러 가지 꽃나무를 심어서 형님 여름방학에 오시면 기쁘게 반기여 주실 꽃송이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형님 고대 하소서 감자도 많이 갈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몇일 전 누님종반 오셔서 자미 있게 놀다가 가셨습니다.
중학생인 병묵의 창구동의 꽃밭에서의 귀여운 모습과 나의 모습
<병묵이가 중학교에 다니며 토요일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을 방문하여 호박구덩이를 많이 팠고, 경산형님께서 영천의 텃밭에는 감자도 심고, 온 집안이 꽃밭으로 만든 소식이 정겹다.>
5.1954년 5월 31일자 전서방댁 편지 중에서
....오빠요 우리 집은 화원과 같읍니다 화단의 자약은 그림같이 피어나고 거기에 해당화는 어여쁘게 피여 나며 푸른 장막을 펼친 나무에는 여러 새들이 모여앉아 멜로디를 자아내니 흥분에 넘쳐 나비들은 춤을 추는 광경은 우리 집이 안이면 맛볼 수 없는 낙원의 극치인 것 같습니다.....
포항의 고종인 혁정이가 영천외가에 왔구나! 창구동 꽃밭에서
<경산형님께서 온 집안을 꽃집으로 만드니 뭇 새들이 와 재잘거리는 낙원 같은 우리 집의 정경을 잘도 전하고 있네! 지금 남아있는 사진 중에 꽃밭에서의 사진이 많이 남아있어 그때가 회상되는구나!>
6. 1954년 12월 2일자 병묵의 편지 중에서
....이곳 사랑스러운 형기동생 윤기는 돌도 지나지 안았는데 제법 사실을 하면서 집안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으며, 동생에게 빼긴 정을 찾으려 5살짜리 형기는 응성과 트집도하고 밉상거리가 되었읍니다.
자양에 게시는 부모님께서는 우리들 형제를 위하여 매일 같이 우리 오형제 성공을 빌며 하늘님께 기도하시겠지요
.... 경산형님 밑에서 따뜻한 방안에서 마음 놓고 공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님은 200리 타향에서 남의 집에서 하숙하며 계시는 형님 정말 고향과 부모님 그리울것입니다. 이제는 겨울준비가 다되어서 농촌도 일막을 내리고 집에서 배깔고 누워서 몸부림치고 노는 농촌의 광경!....
자양에서는 어머니께서 김장 빨레 등 그리고 먼저 번 묘사(하절)때에 정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형님께서는 상상도 못할것입니다. 어머니는 정말 오십이 넘어서 육십이 가까우신데도 그래도 우리 형제들이 부모님께 “효성 효성” 말만하고 있을뿐 그누가 정지아이 사서 그 보답도 없습니다. 어머님 한평생도 멀지 않는데도요. .....
겨울방학에 오시면 반갑게 맞이하겠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계십시오
<다섯 살짜리 형기의 응석 및 트집부리는 귀여운 모습과 윤기의 사실(유아가 말 하듯 소리 내는 것)이 집안의 웃음을 자아낸다는 우리 집의 화목한 집안소식과 그때 하절묘사 판공을 맡아 차리기와 또한 김장, 빨래 등 어머니의 고생하시는 모습을 본 어린마음에 형들을 원망하는 순진한 모습을 보니 불효막심했던 그때가 후회스럽구나!>
첫댓글 이글을 읽어본 저의마음이 증조모님 슬하에 할아버지내외분 어머님은 국민학교3학년때 영천창구동으로가시고
할아버지내외분께서 군위숙부님가족이 새로지은 용산동집에 살면서 군위숙모님께서 몇년 시집살이 하셨지요.
중학교 입학동시에 아버지내외분 슬하에 오게되였습니다.
어린시절 할머님 사랑을 많이받고 자라 6.25사변통에 사고,초등학교시절에 머리에 소버즘때문에 수없이 애을태우신
할머님 생각은 하루도 잊어본적이 없습니다.
정신적 지주이신 할머님이 저의 일생을 옳바르게 살아갈수있도록 인도해주신 음덕이라 봅니다.
올해도 4대조상님 백중기도 열심히 드릴께요.
숙부님 더운날씨에 자료수집 편집하시어 고맙습니다.
숙부님께서 애쓰신 덕분에
어릴 때 방학이면 가보던 자양집이 아련히 생각 났습니다.
나중에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집을 팔아서 대문앞에서 들여다 보기도 했던 이쁜 집이었는데
창구동집은 지난달에 울산 다녀오면서 우석이네 집에 들려서 하루 자고 옛날 생각하면서 주변을 들러보았습니다.
우리집이나 그렇게 크다고 생각되었던 군수관사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웅장하던 조양각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국민학교 때는 교실이 모자라 조양각위에서 업드려 공부하다가 소나기라도 오면 비를 피해 이리저리 옮겨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기나긴 우리 가정사를 정리해서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애들에게 꼭보도록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할아버지.몰랐던 집안 얘기도 이렇게 알게 되고 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진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항상 건강하십시오.
현수가 바쁜데도 방문했구나! 몸 건강히 잘 지내겠지!
너의 할아버지는 우리들의 영웅이시다. 그 연세 즉 30대초반에 사고하고 처리하는 힘이 남다르셨다. 편지마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과 동기간의 우애가 가득한 글이셨다. 앞으로 손자들인 너희들은 할아버지의 얼을 계승토록 하여라.....
적은아버지 덕분에 자양과 영천의 집과 관련된 역사와 가족사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적은아버지들의 마음씀씀이와 가족사랑을 다시 한번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후손들을 위해서 장시간 자료를 정리하시고 좋은 설명을 덧 붙여 주셔서 고마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관리 잘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작은할아버지의 글 덕분에 할아버지와 과거 가족사를 알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가족들간 위하는 마음 갖고 살겠습니다. 날이 많이 더워졌는게 건강 조심 하세요
백부님을 비롯하여 여러 형제분들의 지극한 효성과 두터운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글인 것 같습니다.
굴곡 많은 가정사를 다시금 되돌아 볼수 있게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글을 읽고 저희 가족분들이 여러가지로 많이 어지럽고 힘들었던 시절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시절 선대 조상님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인해 지금의 저희가 있을수있음을 기억하겠습니다.
작은아버님이 애써 정리하여 주신 덕택에 어렴풋이 알고 있던 가족사와 가족애를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모두 삼복더위 잘 이겨내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오랜만에 카페에 들어와 친정의 역사를 다시금 새깁니다. 작은 아버님의 자애가 온 가족을 뭉치게 만드시는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힘든 시절을 묵묵히 헤쳐 나오신 조상님들의 음덕으로 우리 후손들이 떳떳이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않고 저도 씩씩하게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