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이사10,5-7.13-16/마태11,25-27) | |
제1독서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존재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물으십니다.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아버지는 아들을 아시고, 아들도 아버지를 아십니다.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도 아버지를 압니다. 우리는 자기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을 알아갑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앎이 철저히 예수님께 달려있다는 뜻이지요.
세상은 소위 발전과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로지 과학, 기술, 의학 등 인간의 지력과 능력으로 여기까지 도달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로써 "앎"의 영역은 철저히 신의 영역과 분리되어 기술의 차원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하느님 안에서 "앎"은 곧 사랑이니, 사랑이 제외된 "앎"은 자칫 폭력도 무기도 될 수 있지요. 자본주의의 도구가 된 "앎"이 되려 인간을 소외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외치십니다. "철부지"에 불과한 제자들을 통해 이루신 일들이 놀랍고 신비로울 뿐입니다. 이렇듯 자기 힘으로 지식의 탑을 쌓았다고 믿으며, 스스로 만족하고 도취하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지혜는 모습을 감추십니다. 반면 세상이 인정하는 학벌도 가문도 타이틀도 직업도 지니지 못한 단순 소박한 이들에게는 당신을 마음껏 드러내시며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아버지는 스스로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모자란 철부지라 느끼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앎"을, 곧 사랑을 퍼뜨리십니다. 그에게는 애초에 내세울만한 제 것이 없기에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을 알지요. 그래서 스스로도 놀라고 신비스러워합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커갈수록 그의 겸손도 깊어갑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시리아에 대한 주님의 매서운 심판이 울려퍼집니다.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이사 10,5)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벌하시려 주님은 아시리아를 "막대기"처럼 도구로 쓰십니다. 하지만 아시리아는 기고만장해져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징벌적 수준을 넘어 아예 하느님 백성을 "멸망"시키고 "파멸"하려 들지요. 아시리아는 잠시 분노하셔도 결코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화답송)시는 주님의 본심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선을 넘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시리아의 첫째 과오입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이사 10,13).
그들은 승리와 약탈을 자기 손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오만히 떠들어댑니다. 아시리아의 둘째 과오지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문화가 달라도 인간의 바벨탑 근성은 본능적 욕망인가 봅니다. 하지만 이런 교만을 주님은 그냥 넘기시지 않으시지요. 이는 역사가 증명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판단하자면 제 힘과 제 지혜로 재물과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이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철부지는 영원히 약자이고 가난하고 변두리만 맴도는 가련한 인생 같지요.
하지만 구원은 양편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세상 꾀와 힘으로 성공한 듯 보이는 이들도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자기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신 이유를 찾아 그분 뜻을 이루려 협력할 때 구원 상태를 누립니다. 또 비록 세속적으로는 힘겹게 허덕이며 살더라도 자신의 지혜와 힘이 오로지 주님 것임을 믿고 의탁하는 가난한 이 역시 구원의 상태를 누립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고 목적이십니다. 아무리 자유 의지를 발휘하며 산다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 섭리 안을 걷는 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존중하신다고 해서 그분께 있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에게로 가는, 그분께 속한 존재니까요. 이것이 하느님을 아는 지혜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보나벤투라 주교학자는 겸손하게 하느님의 지혜를 탐구한 프란치스칸이었습니다. 우리 삶을 통틀어 주님께서 철부지인 내게 쏟아 주신 사랑의 업적을 기억하고, 아울러 나를 도구로 쓰시느라 내게 안겨 주신 과분한 성취와 보람의 순간들도 함께 떠올려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하여 보잘것없는 우리를 통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져가는 신비를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벗님에게도 "보나 벤투라"(Bona ventura!), 즉 "좋은 일이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