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명희, 명순, 명구, 그리고 막내까지 아이들의 틈새에 끼어 자면서도 단숨에 자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이따금 툭툭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며칠만 좀 참아주면 쓸 것이그만, 비가 오는가 보다, 하며 중얼거렸다.
오늘까지 보리 베기를 마치면 내일과 모레는 구례댁과 돌이네 집 보리 베기에 부부가 나서고 나면 그동안 베어놓은 보리 이삭들이 마르면 거두어들일 계획이었다. 하늘에서 맑은 날을 허락하지 않은 줄 알고 문을 열고 나오니 비가 아니고 아침 안개가 잔뜩 끼어 있다.
장독대 옆에 주렁주렁 열린 앵두가 어제 아침에 볼 때보다는 한층 붉어졌다. 내일모레면 장독대 앵두나무 아래로 삼 남매는 쉼 없이 드나들 것으로 생각하니 산동댁이 행복했다. 산동댁이 잠결에 들렸던 소리는 지붕을 타고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아니었던 걸 알았다. 누가 얹어 놓았는지 고추장 동이 위에 세숫대야가 놓여 있었다. 미세한 안개 가루들이 앵두나무잎에 쌓여 옥구슬 은구슬을 만들더니 미끄럼을 타고 놀다 대야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산동댁이 잠결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로 들린 거였다.
부지런히 밥을 지어야 삼 남매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명희와 명순의 점심 도시락을 싸야 하니 산동댁의 일과 중에 아침이 제일 바쁘다. 다른 때 같으면 일찍 일어나 소에게 먹일 풀을 베러 갔어야 할 덕형이 정원과 함께 아직 잠에서 깨지 않고 있다.
소에게 풀을 한 아름 안고 구유에 던져주는데 소가 쭈그리고 앉은 채로 꼼짝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산동댁의 가슴이 심히 벌렁거린다. 겁이 났다. 배냇소로 기르면서 힘들게 얻은 소인데 만약에 죽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여보 명구 아부지! 얼런 나와보라니까요, 얼런 나와보람 말이요.” 잠들어 있는 남편을 불러대자 덕형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어이 멩구 어무이 누가 보면 호들갑 떤다고 하지 않겠는가?” “호들갑이 아니당게요.” “왜 그러는데?”
어젯밤 늦게까지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다 닭이 울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으므로 눈까풀이 떨어지지 않아 덕형이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왔다.
“풀을 주는데도 소가 꼼짝 않는다니까요.” 덕형도 덜컥 겁이 났다. 마구간으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아니그만, 새끼를 날라고 그러고만…….”
새끼를 낳을 모양이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산동댁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덕형이 마구간으로 들어가 천장에 묶여 있는 고삐를 풀어주고 깔짚을 깔아 주며 소가 출산하도록 도왔다. 작두를 꺼내 어제 오후에 베온 풀을 짤막짤막하게 썰고 등겨도 한 바가지 떠다 붓고 쇠죽을 끓이는데 등겨가 들어있는 통에 문을 여는 소리만 나고 소식이 없자 돼지가 꿀꿀거리다 꿱꿱 고함을 질러댔다.
사람들이 왔다 갔다 설쳐대고 돼지가 고함을 질러대자 닭장의 닭들도 어서 문을 열어달라고 꼬꼬댁대고 있었다. 밖이 소란해선지 정원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이 왜 이러케 밖이 시끄러운가?” “우리 집 소가 몸을 푸는 중이네.” “허허, 이 집에 경사가 났구먼. 그런디 저놈의 돼지 새끼가 해산허는디 방해하는구먼. 저놈 입을 막게.”
아무리 배가 고파도 소는 먹을 것을 달라며 소리를 지르지 않지만, 돼지는 다르다. 식사 때가 지난다든지 인기척이 나면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먹을 것을 달라는 신호음이다. 질러대는 소리가 귀청이 찢어질 것 같으니 정원은 먹을 것을 줘야 조용할 거라며 돼지 먹이부터 주라고 말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설거지 구정물이 나와야 돼지의 식사시간이었지만 고함을 질러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양동이를 들고 가 도랑물을 퍼다 붓고 등겨를 한 바가지 부어 주었다. 덕형이 재빠르게 닭장 문도 열어주고 나니 돼지와 닭들의 소동은 일단락된 셈이었다.
“이런 모양을 보고 청계천 호떡집에 불났다고 하는 거 아닌가?” 헛간 쪽에 놓여 있는 소변 통에 소변을 보면서 정원이 말했다. “자네는 방으로 들어가람 말이시.”
이런 와중에 마을 사람 누가 불쑥 찾아오기라도 할까 봐 걱정인데 정원이 태연한 것 같아 재차 방으로 들어갈 것을 주문했다.
“소가 새끼를 낳으면 사립문에 금줄을 치등만, 글고 마구간 앞에 정화수를 상 위에 올리등마.”라고 정원이 말했다. “정화수는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한 정성기도이지만, 소는 인간이 아니잖은가?”
발산마을 사람들이 소가 새끼를 낳으면 마구간 앞에 삼신상을 차리고 대문에는 금줄을 치는 걸 봤다는 정원의 말에 덕형의 뇌리에 전광석화 같은 묘안이 떠올랐다. 쇠죽 솥 아궁이에는 고주바기를 모아 불타게 해 놓고 뒤꼍으로 돌아갔다. 가지와 잎이 무성한 대나무 윗부분을 잘라다가 사립문에 걸치고 나서 정원 때문에 묘안이 떠오른 것이라며 말했다.
“정원이 자네가 말해서 떠오른 묘안이구먼.” “이 사람아! 대나무만 잘라다가 걸치고 말라고 하는가? 삼신상도 차려야 하지 않응가?” “삼신상은 안 차리려네, 대나무 가지를 금줄 대신에 했다니까.” 사립문에 걸쳐놓은 대나무 가지가 금줄과 삼신상 대신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덕형이 말했다. 정원은 자신 때문에 대나무 가지를 잘라다 사립문에 걸쳐놓은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드디어 덕형네 소 마구간에 새 생명이 탄생했다. 첫배치고는 건강한 덩치의 수송아지였다.
“이러케롬 새끼가 커 가꼬 낳느라고 욕을 봤는가 보네.” “수놈이 암송아지보단 값이 더 나간다네.”
탯줄을 자르고 마른걸레로 송아지 몸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덩치가 큰 수송아지를 낳느라 어미 소가 애를 쓴 거라고 말했다. 옆에서 덕형을 돕던 정원은 수송아지가 값이 더 나간다는 말을 언젠가 들었던 적이 있어 말했다.
“개나 돼지 새끼, 염소 새끼는 암놈이 비싼데 유독 송아지는 수송아지가 비싸담 말이시.” “그런디 자네가 배냇소를 키운 지가 언제인디 시방 소도 배냇소라 허는가?” “금메 말이시, 장리곡 묵은 것이 있어 가꼬 도무지 안 되겠더라고. 팔아 가꼬 장리 빚을 갚고 또다시 배냇소를 키운 거라니까!”
정원이 입산 생활하기 전에 덕형이 배냇소를 키운 거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새끼를 출산한 소도 배냇소란 말을 언뜻 듣고는 물었었다 . “그러니깐 장리곡 빚을 갚느라고 아직까장 배냇소 키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데 앞으로는 절대로 장리곡은 빌려 먹지 않아야 한단 말이네.” “어이 정원이!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안 굶어 죽으려면 어쩔 수 없는디.”
미 군정일 때 쌀을 구할 수 없어 이웃 마을 친일 부잣집에 봄에 쌀 한 가마를 빌려 먹고는 가을 추수 때 반 가마니를 이자로 한 한 가마니 반을 갚는 장리곡을 빌려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두 가마 먹은 쌀을 그해에 못 갚게 되어 다음 해에 네 가마니 반을 갚을 길이 없어 배냇소를 키워 얻은 송아지를 팔아 장리곡을 갚았다고 말했다.
어느새 삼 남매가 아침을 먹고 책 보따리를 들고 메고 도시락도 들고는 마구간에 아버지 있는 곳까지 오지 않고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나가자 한숨 돌린 산동댁이 마구간 쪽으로 왔다.
“서울짐샌이 우리 집 소에게 해복(解腹) 수발허로 오셨고만요.” “하하하, 그렇고만이라. 가는 날이 장날이라등만 그 말이 맞당게요.” “일이 희한하게 됐고마라. 사립문에 금줄 표시가 되어 있응게 말이요.”
해복 수발하려고 왔다는 말에 정원이 폭소를 터뜨렸다. 어미 소가 열심히 송아지를 핥아 주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