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 관한 시모음 15)
늦가을 /홍해리
이제 그만 돌아서자고
돌아가자고
바람은 젖은 어깨 다독이는데
옷을 벗은 나무는 막무가내
제자리에 마냥 서 있었다.
찌르레기 한 마리 울고 있었다
늦가을이었다.
어느 늦가을 날의 사유 /은파 오애숙
너의 고운빛 아련해
너를 향해 달려 가본다
만추 풍광은 사라지고
소슬바람 사이사이에서
낙엽만 나뒹구는 가을
어느새 다가온 겨울
가을인가 했는데 벌써
산기슭에서 준비 없이
첫눈을 맞이 하는 기쁨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이제 살갗 에워싸는
공포의 날 다가오는데
삭막한 겨울 속 함박눈
가슴에 기대해보기에
겨울이 따사롭구나
늦가을 반달 /임재화
손톱만큼 작은 초승달이
가슴 부풀어 상현으로 기울더니
이제, 노란 반달이 되었습니다.
스산한 바람 부는
늦가을 밤 차마 애타는 마음
온 누리 캄캄한 어둠 속
빛고운 모습의 반달이
얼굴은 노랗게 물들이고
마음마저 더욱더 예뻐서
찬 바람 부는 깊은 밤
어느새 중천(中天)에 떠올라
수줍은 듯이 웃고 있습니다.
늦가을 서정 /임재화
밤새워 기온이 떨어지고
희붐한 새벽 지나 먼동이 터도
산촌에 하얀 안개 가득하다.
세상은 희뿌연 안갯속에
잠겨 있는 늦가을 이른 아침
저만치서 때맞춰 덜커덩거리며
내달려오는 철마의 기적 소리가
힘찬 심장의 박동을 자랑하는
늦가을 이른 아침 풍경
텅 빈 들녘에도 하얀 안개가
몽환적인 모습으로 피어나서
세상은 온통 꿈속에 잠겨 있다.
늦가을 억새 /성백군
늦가을
산마루를 거닐던 노신사
오름길이 힘든지 잠시 멈춰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실바람에도
흰 머리카락은 먼 길 떠나려 하고
굽은 등은 수렁에 빠진 양 휘청거리는데
발밑, 저 유년의 산기슭에는
아직도 세상을 이기려고 악착 떨던
초록의 모습이 선명합니다
버리면 되는데
이 나이 먹도록 포기가 안 돼
삶을 놓을 수가 없어서
골짜기에 이는 고운 단풍은 울긋불긋 피멍인 것 같고
언덕 위 나목의 힘찬 가지들은 쓸쓸합니다
그래도, 낙엽은 지고
떨어지면서 바람과 함께 멀리 뜨나 가는데
늦가을 억새는
몇 안 남은 홑 씨 그걸 놓지 못해서
바람에 목을 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보이는 것이 다인 것처럼
아등바등 살아가는 세상사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늦은 가을 그곳에서 있었던 일 /최숙경
사람들이 거두려 하지 않는 씨앗들은
스스로 터져 다음 계절이 오기 전
땅이 얼기 전에 툭툭 멀리 깊게
자기 몸을 숨겨 계절 숨바꼭질을 한다
가만히 들어보면 바람 소리에 묻혀
터뜨릴 때도 있고
소규모 폭죽처럼 크고 작은 소리를 내며
짧은 늦가을 햇살에 힘을 빌려 터진다
어쩌면
몇 번은 늦은 가을 속에 서서
스스로 힘을 내어 일어날 이유를
만들고 또 만들어야 했던 날도 있었을 게다
해가 뜨면 약속처럼 몸을 일으키고
어디엔가 숨겨 놓은 씨앗
하나씩 꺼내어 심고 키워 놓으면
다시
어느 늦은 가을 속에 서 있을지라도.
늦가을에 /배창환
- 아이들
떠날 사람들은
오래전에 이 들녘을 떠났다
파장에, 끝까지 남은사람들끼리
기울어가는 술막에 모여
꼬리 길어진 저녁 햇살 배웅하듯이
잎 다 털어버린 백양목 사이로
산그늘 내려오는 학교 운동장
여학생 몇, 양지 돌계단에 쪼그려 앉아
사내아이들 공 차는 그림자 좇으며
웃고 떠들고 재잘대면서
바람이 몰아가는 낙엽처럼
조금씩 여길 떠나는 꿈을 익히고
늦가을 땡감 /성백군
우리 이제 가을이라
자식들 다 분가시키고 손자 손녀도 여럿
단풍 들만 한데
금방 잊어버리고,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영감, 나 땡감 된 것 아니냐”고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아내
봄, 여름, 지나면서
때 이른 반시, 홍시, 단맛에 취해서
가을이 오기도 전에 아내를 과식한 것 아닐까
갑자기 땡감이 되다니……
다 내 탓인 것만 같다
괜찮아
땡감이면 어때
깎아 문설주에 달아놓고
들며 나며 사모하다 보면
겨울에는 속이 빨간 달콤한 곶감이 되겠지
아내는 하얗게 웃고
나는 입맛을 다시지만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서방은 서방대로
백치처럼 찔끔찔끔 눈물이 난다
늦가을 /해련 류금선
스산한 벌판에
가을을 휘젓는 소리
모두들 떠나는 계절 앞에
나뒹구는 기억들이
갈 곳을 몰라 하고
시름을 달래듯이
서성이는 들녘 바람 뒤에는
울음만 남는다
싸늘한 목덜미
원색의 그리움만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이 가을
난 어디에도 없다.
늦가을 만가 /고재종
상여는 떠난다, 상여 떠나면
조금은 시린 바람이 칠 법도 한데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빗질 소리 낸다.
그러니 때까치인들 왜 안 짖겠느냐.
그렇게 꽃상여의 꽃송이처럼
화사하게 빛나지 못했던 날들이여,
휘날리는 만장들이여, 그 위로 떠가는
흰구름은 마냥 눈부시다.
그러니 앞냇물인들 왜 안 흐르겠느냐.
상여 떠나면, 동구밖의 느티나무쯤은
우수수 떨어댈 법도 한데
뒤따르는 상주들의 눈물마저, 길에
듣는 족족 들국송이로 빛난다면
그가 평생 어둠만 건졌던 빈 들판이
이때쯤 만가 소리로 차오른들
어떠랴, 평생 분노로 세웠던 뒷산이
이때쯤 울긋불긋 물감칠을 한들
어떠랴, 그 갈채 속으로 떠나는 상여,
상여 떠나도 서로의 마음에
한 둘금 서리 치는 법도 없이
상여는 자꾸만 가벼워지고
상여 구경하는 마을 노인들
마음은 자꾸만 흥건하게 젖어들어
한순간 생의 관절통마저 그만 잊는다면
저기 산 초입에서, 새하얀 억새인들
어찌 꽃사래쳐 마중하지 않겠느냐.
어찌 서러움인들 빛나지 않겠느냐.
서러움으로 더욱 맑아진 빛살 속으로
어허- 어영차 여엉차- 상여는 간다.
늦가을의 침묵 /김수열
호연지기
가을 품에 안겨 익어가는
세월만큼 익어가는 인생이면
그도 좋으련만
깨고 나면 서릿발 입은
애호박처럼 초동이 섧기만 하다
삶은 입동 잎에 내려앉아
가시 발 세운 서리되어 가슴을 찌르니
어이 아프지 않을 가슴 있으랴
늦게 핀 정열의 꽃은
뭉게구름 핀 노을 같아
가슴만 섧어 우는 늦가을의 침묵,
익어야 하는데
익지 못할 애호박 같은 인생은
세월만 탓하니
밤 낮 깨고 깨도 그 자리인 듯해
노을 보는 인품은 섶청올치라
늦서리에 시들은 호박잎이 된듯해
먼 발 갈 길에 노을은 빨리도 지는구나.
늦가을의 사념 /송태봉
파스텔톤 맑은 하늘
눈이 아프게 짙푸른 바다
그리고 하얀 갈매기가 노래하는데
뼈마디 마디 가슴속 깊은 곳까지 아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요
먹물을 뿌려놓은 하늘에
다이아몬드 깨어진 조각처럼 빛나는 별
아직은 수줍은 듯 가늘게 눈 띄어 파르르 떠는 달 빛마저 흐르는데
살 저미도록 외로움에 웃음마저 흩뿌려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요
한껏 들뜨고 설레이던 그 느낌들은 어디가고
뻥터진 허전함으로 다가와 내 숨줄을 욺켜쥐는
이 느낌은 또 무슨 까닭인지요
긴 긴 동안의 목마름의 해소....
나 자신이 비가 되어 온통 뿌려지고픈 마음인데...
보슬비처럼 살갗을 쓰다듬어주는 밤이슬이 고마워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다
별안간 창피함에 고개를 떨꿉니다
어느 늦가을에 /이재환
모든 걸 버리고
빈털터리로
찬바람 맞는 앙상한 가로수
가지마다
세찬 바람에도
꿋꿋한 모습이 좋구나
너처럼
텅 빈 내 가슴에도
희망의 새싹이 자라게
따뜻한 맑은 햇볕에
깨끗한 생명수로
내 가슴을 적셔준다.
늦가을의 편지 /주영헌
당신, 벌써 늦가을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찬란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멀지 않아서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계절도 오겠지요. 산과 들에, 창문 밖에 훨훨 타오르는 저 단풍잎의 붉은 열기도 휘날
리는 차가움에 식어 무채색으로 변해가겠지요. 여름 내내 손을 뻗어 허공을 간지럽
혔던 잔가지들도 야위어 부러져 버리겠지요. 녹음의 푸르름 속에 몸을 숨겼던 작은
동물들도 몸 숨기지 못해 추위와 두려움 속에서 떨겠지요.
늦가을에 도착해야 환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 몸 한 뼘 더 어두워지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쉬운 것이 많아서, 저 풍경까지도
후회와 아쉬움으로 보이는 것입니까. 왜 이 감정은 이맘때쯤이면 나를 지독하게 괴롭
히는 것입니까. 내 마음 만족을 모르고 차오르는 삭월(朔月)이기 때문입니까.
찬란한 겨울은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소박한 식을 올렸을 때, 서로 가진 것이 없어, 빚을 빛처럼
얻어 생활을 시작했을 때, 세상의 바람은 삭풍(朔風)처럼 매서웠지만 우리는 참 따뜻했
지요. 둘만의 열기로도 차가운 방을 훈훈하게 데우고, 추운 겨울은 봄처럼 따뜻했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봄날, 푸른 씨앗이 싹을 틔웠을 때 얼마나 신기했는지요. 우리는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지만, 마음은 봄의 축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속에서 긴
잠을 자던 씨앗이 깨어나 꼬물거리며 눈곱만한 이파리를 내밀었을 때, 그리고 그 작은 이
파리를 손잡았을 때, 천만년 동안 쌓였던 빙하가 녹는 듯 눈물 흘렀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온 매서운 추위에 뿌리까지 말라 버렸지만…
언젠가 이겨낼 수 없는 혹독한 추위가 다시 찾아올지 모르지만, 후년의 봄을 기약할 수
있는 까닭은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눈비로 질척질척한 땅을 서로의 발이
되어 건너는 것임을 오래 살다 보니 알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이 길 함께 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나에게 고백했던 말처럼, 당신이 발이 되어 걸어가겠습니다.
늦가을 /성원근
먼 하늘에 별이 하나 떨어진다.
거리에서
한가닥 음률을 달고 낙엽이 구른다.
무거운 외투 속에서
선명히 내다보이는 세상,
나뭇가지에
내일 눈이 쌓일 것이다.
늦가을 서정 /세영 박광호
스산한 늦가을
찬바람은 옷깃에 스며들고
움츠린 어깨위로 낙엽 또한 흩날리니
마음조차 나목인 듯
쓸쓸하고 허전하다
세월을 등에 업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바라보며
한소절의 노래를 부르고나면
또 한소절의 음표를 그려야하는
숨 가쁜 여정에서
삶의 길 되돌아보는
가을타는 남자의 가슴에도
낙엽은 쌓이는데
여생에 바라는 것 있다면
걷는 황혼 길에 노을빛만이라도
고왔으면 싶다.
늦가을 /靑山 손병흥
뉘엿뉘엿 해가 기우는 해거름녘에
그윽한 향기 풍기는 서늘해진 바람
느티나무 단풍그늘에 가득 내려앉은
노랗고 알록달록하게 뿌려진 가을햇살
그늘진 숲에서부터 가을이 끝나는 무렵
점차 기온변화의 추이로 겨울을 맞는계절
약화된 북태평양 고기압은 남쪽으로 가고
시베리아 고기압이 대륙에 형성해지는 시기
낮의 길이 일조시간 짧아져 기온 내려간
안개 서리도 내려 일교차가 큰 쓸쓸한 풍경
늦가을 하늘 올려다보기 /정민기
저녁놀 지는 하늘에 쓰여 있는
구름을 읽는 듯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새가 날고 있다
무인 정찰기는 한 대인 듯
그렇게 너무 낮게 날지는 않고
중간만큼 떠서 날아다닌다
어디선가 레이저를 쏘았을까
햇살에 눈이 다 부시다
서녘에 잘 발효된 메주로 만든
된장이 가득한 장독
어스름 저녁은 어두운 밤을 꿈꾸고
어두운 밤은 어스름 새벽을 꿈꾸는 겨울이 오기 전
울긋불긋 단풍으로 세상은
아랫목처럼 뜨끈 하다못해 뜨끔해진다
의자 위에 엉덩이가 있듯
낙엽 위에 낙엽이 떡하니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