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잡문 사이
- 사례를 중심으로
하길남
수필과 잡문이 어떤 글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과 잡문을 자신있게 골라 쓰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어쩌면 이른바 수필을 두고 ‘일정한 형식없이 붓 가는 대로 자유스럽게 쓴 글’이라는 일부의 정의와 잡문을 두고 ‘일정한 문장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닥치는 대로 쓴 글’이라는 정의가 비슷한 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는 위와 같은 수필 이론에 대해 적잖은 논란을 벌여 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앞으로 이러한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필자는 ‘붓 가는 대로’란 말은 논리적 언술이 아니라, 비유적 언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예컨대 ‘붓이 간다’는 말은 사실상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붓은 사람의 손이 움직이는 곳으로 갈 뿐이다. 사람의 손은 역시 생각에 따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자유로운 생각을 좇아 쓰여지는 글’이 될 것이다. 이 ‘생각을 좇아’ 쓴 글이란 ‘닥치는 대로’ 쓴 글과는 다르다.
진실로 숙련된 경지에서는 고양된 의식의 조명이 가능한 것이다. 한석봉의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똑같은 크기로 떡을 썰 수 있었던 것 역시 오랫동안 단련된 솜씨였듯이 말이다.
물론 그 어느 장르의 작품들보다 수필이 잡문 시비에 휘말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면, 위와 같은 사실 탓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른바 변두리 문학이라는 수필에 씌워진 멍에도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수필문학 이론의 다양성과 미정립이라는 문제와도 맞물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문수필의 맥을 잇지 못한 한글수필의 새로운 걸음마 시대, 그 공백기 또한 이에 가세한 결과가 됐다 하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장르 즉 시나 소설의 경우, 문예사조에서 보듯 수많은 이즘들에 의한 창작적 기법 창안이 계속되어 온 반면, 수필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여기에 많이 뒤쳐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기본적인 관건은 수필가들의 수필이론과 창작기법에 대한 수련의 부실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 이러지면서 시일이 지날수록, 일반적으로 작품의 수준이 더 나빠지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저간의 사정이 아니었나 싶다.
Ⅱ-1
해방직후 서울은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서 좌익분자들이 우익계 사람들을 죽이는 혼란한 시절이었다. 남편은 사상검사로서 생명을 내놓고 반공에 투신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국가안보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다. 남편은 보도연맹과 형무소를 지켜야 된다며 나가고 나는 6남매를 데리고 시아버님과 같이 공주군 정안면에 숨어 있다가 9․28 때 상경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온 남편과 만났다. 그 후에 다시 1․4후퇴 때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가고 남편은 내무부 정보수사과정으로 조병옥 박사와 같이 일하며 서울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연속적인 이산가족 생활을 겪어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 후 부산으로 내려와서 남편은 장 면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던 중 장 면 박사가 대통령 후보로 유리하게 되자 자유당에서 장 면 박사와 남편을 빨갱이로 몰아 부산 5․26 정치파동을 일으켰고, 남편은 할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만 8년 만에 귀국해야만 했다.
세월이 수유(須臾)라 했지만 생각하면 변전무쌍의 시간이었다. 그 후 남편은 조폐공사 사장으로 재임, 5․16혁명이 터지면서 반혁명 세력으로 지목되어 수감되고 사형을 구형받기도 하였다. 재심에서 5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2년 3개월 만에 무죄 석방되었다.
남편은 그 후로 국회사무총장, 평통 부의장을 역임하며 현재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5남 1녀를 두었고, 그 중 4명이 박사고 2명이 석사이다. 손자 손녀 17명, 증손자 1명 모두 건강하여 열심히 살고 있으니 다행으로 생각한다.
인용한 글은 어느 전문 문예지에서 신인상을 받은 「○婚」이라는 수필의 일부이다. 이 글의 작품성 여부를 잠시 제쳐두고 우선 문제가 될 만한 발췌부분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위 인용부분은 결국 6․25전쟁부터 지금까지의 삶의 내력을 쓴 것이지만, 그 줄거리는 남편이 내무부 수사과장을 거쳐 국무총리 비서실장, 조폐공사 사장, 국회사무총장, 평통 부의장으로 일해왔다는 직명 위주로 쓰여진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5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4명이 박사이고 2명이 석사라고 하여 결과적으로 6명 모두가 대단한 학력 소유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한 편의 작품에서 이러한 벼슬을 했다는 이야기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러한 직명은 지나온 이력을 설명하는 입장에서 사실대로 술회한 것일 뿐, 과시욕을 앞세운 의도적 진술은 아니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현실적 인식의 깊이나 통찰 또는 비판 등은 찾아보기 힘들고, 다만 직책 등의 나열식 서술에 그친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인용된 부분이 작품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된다고 볼 때, 그러한 긴 서술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 쉽게 말하자면 이러한 서술은 수필적 서술이라기보다 사실의 전달을 위한 언어의 도구화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비해 다음에 인용하는 나가이 류우의 수필 로사리오의 사슬」에서, 자신이 걸어온 역정을 그린 부분은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다분히 분석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월 사십 원의 생활은 칠년간 계속됐다. 가족의 옷은 전부 아내의 수제품이었다. 내 양말에서부터 와이셔츠에 이르기까지 한 땀 한 땀 정성을 쏟아 만든 것이었다. 그걸 보고 연구실의 아가씨가 “선생님은 낮에도 사모님에게 안겨 있군요”라고 했다. 아내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빠리의 입술연지도 이태리제 향수도 손쉽게 살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거리에는 유한마담이라고 불리는 계급의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시대였다. 식량도 썩어나도록 풍부했다. 아내는 개인 날엔 거름통을 메고 밭에서 일하고 비가 오는 날은 바느질이랑 뜨개질로 일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을의 부인회 연합반장의 바쁜 역할도 해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나의 아내로서의 임무, 반미치광이의 시중도 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한 가지 새로운 연구에 착수하면 나라는 인간이 변해버린다. 연구테마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버린다. 며칠씩 도서실에 틀어박혀 선인들의 업적을 조사한다. 카드를 만든다. 그리고 그걸 정리해서는 나의 새로운 방법을 구상한다. 실험장치를 만든다. 드디어 실험에 착수한다. 몇 개월 만에 성적이 나온다. 그걸 정리하여 논문을 쓴다. 교정을 본다. 이런 수순인데 그러는 동안에는 연구 이외의 것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를 걸어오면 대답은 한다. 밥이 나오면 먹기는 한다. 아이가 울면 노려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대학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아내가 스쳐 지나가는데 모르고 그냥 지나친 일이 두 번 있었다고 한다. 뒤에 아내에게서 그 말을 듣고 나는 저런 하고 놀랐다. 그럴 때의 나는 허공을 쏘아보면서 입 속에서 무언가 중얼중얼하기 때문에 어쩐지 무섭다고 한다. “마치 몽유병자를 간호하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아내가 말한 적이 있다. 꼭 의논해야 할 집안 일이 생겨도 말을 못하고, 남편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도 없고, 두뇌를 씀으로 특별요리를 만들어야 하고, 자칫 방심하고 있으면 넥타이도 잊어버리고 뛰쳐나가기 때문에 몸에 걸치는 일상사도 신경을 늦출 수가 없고, 방안에 가득히 늘어놓은 조사 카드, 노트, 참고서, 사진, 휴지 등등 치워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알 수가 없고, 저녁 귀가 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이런 남편의 시중을 용케도 아내는 그 연약한 팔로 해낸 것이다.
작가는 7년 동안 계속된 생활의 애환을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담담하면서도 절실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수필 전편을 통해 작가 자신이 동경대학의 권위있는 물리학 교수라는 것을 밝힌 일은 없다. 아내는 남편의 양말과 와이셔츠를 한 땀 한 땀 정성을 쏟아 만들 뿐 아니라, 화장도 하지 않았고, 개인 날에는 거름통을 메고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작가 자신도 연구에 몰두해서 며칠씩 도서실에 틀어박혀, 점심때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기억이 안날 만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실을 어떤 기교나 수사도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질박하게 그리고 있다. 스스로의 삶을 통찰에 의해 조명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 나가이 교수와 그의 아내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알게 된다. 문장 하나하나에 그들의 땀과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먼저 인용된 글에서는 어떻게 흘러왔다는 사실만 우리에게 알려 주었을 뿐, 작가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그 속깊은 심성을 알 길이 없다. 다만 비교적 높은 양반들이었다는 사실과 어려운 시대에 나름대로 나라에 헌신하면서 살아왔다는 것만 부각될 뿐이다.
말미에서 먼저 인용된 글은 “60년이 바로 나의 삶이었기에 그것은 어쩌면 나의 자서전이며 나의 생활이라는 생각이다”고 하여, 그의 일부 서정적이며 서경적 서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활을 보고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이 부분 때문에 글 전체의 인상이 흐려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뒤에 인용된 수필은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 가슴에 안긴 아내가 바스락바스락 인산석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들었다”면서 끝내고 있다.
원자탄 연구에 매달렸다가 백혈병에 걸려 죽게 된 작가가 공습에 의해 먼저 죽은 아내의 숯덩이로 변해버린 시체를 양동이에 주워 담으면서, 그 바스락거리는 인산석회 소리가 ‘미안해요’라는 소리로 들린다고 말하면서 끝맺고 있는 것이다.
먼저 예로 든 부분은 벼슬깨나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일지(日誌)를 듣는 느낌이라고 한다면, 뒤에 든 작품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처절한 자기 성찰을 읽게 된다 하겠다. 지면 관계상 작품 전편을 싣지 못했지만 여기서 수필과 잡문의 한계를 짐작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Ⅱ-2
나의 문집 출판 기념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이 참석했고 아내는 결혼 이후 세 번째의 한복을 입은 날입니다. 첫 번째는 90년도 수사입문 첫 출판기념회, 두 번째는 92년 교회에서 아내 권사 취임식, 세 번째는 이번 문집 출판기념회였습니다. 한복은 언제 어느 때 입어도 우아하고 멋있고 운치가 있으며 식장을 환하게 조명해 줍니다. 예식장 불빛 아래 사람들한테 취하고, 분위기와 조명해 줍니다. 예식장 불빛 아래 사람들한테 취하고, 분위기와 조명에 취하고, 꽃다발과 박수소리에 취한 감격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축하전문 40통, 화환 16개, 참석자 300명이 식장을 가득 채우고 동료, 문인, 교인, 고향사람, 동창생이 뜨겁게 축하해 줬습니다.
목사님이 주관하는 식전예배를 내 사무실에서 간단하게 올리고 축도를 받았습니다. 소○○ 시인의 사회로 국민의례와 약력소개가 있었고 문협 서○○ 회장의 발기인 인사, 허○○ 박사의 작품해설, 박사이며 교수이신 김○○ 서장, ○○문학 김○○ 회장, 죽마고우 최○○ 사장의 축사가 있었고, 조○○ 시인의 「도라지꽃」 시낭송, 기념패와 꽃다발 증정, 답사, 참석인사 소개 순으로 장장 1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그때 K형은 아코디온을 메고 식장에 늦게 참석했으며 식사중인 하객을 위하여 우리 가요를 정성스레 연주해 주어 식장 분위기는 고조되고 화기애애하게 유종의 미를 장식할 수 있었습니다.
위 글은 어느 문학지에 실린 「나의 …」라는 수필이다. 인용된 부분 이외에도 “8월 31일 아침에는 MBC TV 부부 대담과, 9월 21일 오후에는 KBS 라디오 초대가 있었고 기념회가 끝난 뒤에도 사진 및 문집 발송, 전화 인사로 너무 바쁜 나날이었습니다” 등과 같이 이 글의 2분의 1정도가 자신이 참석한 각종 행사명이나, 행사의 진행과정 등이 소상하게 나열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러한 나열식 보고문과 같은 서술이 매양 진을 칠 때, 작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 편의 작품이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고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이와 같은 수박 겉핥기식의 상황 보고식 서술이 어떻게 절실성을 갖겠는가.
이미 설명한 바 있는 것처럼 먼저 인용한 글이 은근한 자기 과시용의 글이 된다면 지금 인용한 글은 은근한 자기 과시와 약식 현장보고 형식의 글이 될 것이다. 몇 연도에 무슨 행사를 했고, 축하전문은 몇 통, 화환이 몇 개, 참석자가 몇 명, 국민의례와 발기인 인사는 누가 했고, 약력소개는 누가 했으며, 작품해설은 어느 박사가 했고 등등 유명인사를 늘어놓고 있다. 영락없는 보고문이다. 이처럼 힐끗 눈에 보이는 대로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 작품이 되지 않는 것은 그 현장이 평면적이며 외피적으로 진술되었을 뿐, 작가의 창작적 치열성에 의해 재구성되지 않아 혼의 입김이 불어 넣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현장 재구성이란 말은 의미의 천착을 위한 고양된 의식의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허구적 조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래채에는 삼촌의 젊은 소실이 살았다. 식구들은 누구도 아래채 근처에는 얼씬도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지켜졌다. 어쩌다 그 방 가까이 지나다보면 축음기에서 긴 노랫가락이 가늘게 흘러나오곤 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측간길에 보니 불꺼진 아랫방 지겟문 앞에 우두커니 숙모가 서 있었다. 미동도 없이 한참을 섰더니 부리나케 우물가로 달려가 두레박 물을 활활 뒤집어썼다. 그리곤 우물가에 퍼질고 앉아 줄담배를 피웠다.
이 부분은 김원숙의 수필 「내동댁」에서 인용한 것이다. 다 같은 현장 묘사나 그 진행과정을 쓴 것이라 하더라도, 그 수법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보고형식으로 쓴다면, ‘삼촌은 소실과 같이 살았다. 식구들은 그를 멀리했다. 삼촌은 가끔 축음기를 틀었다. 어느 날 밤에 숙모가 우물가에서 물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담배를 피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단순 상황보고도 작품의 성향이나 경우에 따라 부분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사건의 진행과정만 덩그렇게 남게 된다. 그러나 「내동댁」에서 인용한 글에서는 사건을 그대로 메모하는 형식이 아니라, 그 행위 유발의 전말을 분석적으로 서술하여 그 인과에 따른 의미체계까지 드러내 보이고자 한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예컨대 “식구들이 아래채에 얼씬도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지켜졌다”는 표현에서, 조강지처를 둔 채 젊은 소실과 같이 한 집에 사는 사촌이 가족들에게 대단히 엄격했다는 것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삼촌의 성품과 그 인간성까지 유추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축음기에서 긴 노랫가락이 가늘게 흘러나오곤 했다”는 부분에서는 젊은 소실과 얼마나 정이 깊었으며, 그러나 그러한 낌새를 가족들이 눈치채지 않게 하기 위해 축음기에서 나오는 노랫가락을 들릴 듯 말 듯 가늘게 흘러나도록 배려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가족 관계에서 얼마나 속을 썩였으면 밤중에 나와 작가의 숙모는 우물가에 퍼질고 앉아 하염없이 줄담배까지 피웠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축음기를 갖고 있었다면 꽤 잘 사는 집안이었던 것도 알게 된다. 또한 그 당시 금기시되어 오던 젊은 여인이 담배까지 입에 대게 되다니 얼마나 홧병에 시달렸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된다.
김원숙 수필가는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그 사건의 절절한 정황 묘사만으로 우리는 훤히 이 집안의 내력을 꿰뚫어 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정황이 의미를 불러내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수필은 작가가 거두어들이는 새로운 의미에 공감하는 일이 됨을 본다. 작품이 곧 새로운 의미를 건져내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으로 장식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가끔, 아내가 외출하고 없는 날, 혼자 마당을 서성일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발길을 절로 아내의 꽃밭에 가서 멈춘다. 거기에는 티없이 밝은 소녀들의 웃음 같은 꽃들이 언제나 환히 피어있다.
바람도 그곳을 지날 때면 숨을 죽이고, 구름도 멀리서 기웃이 건너다 볼 뿐, 그곳은 언제나 햇빛이 밝았다.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으면 시름도 저만치 물러나 앉는 듯, 마음의 공허마저 밝은 빛으로 가득 채워진다.
위 인용은 손광성의 「아내의 꽃밭」이라는 수필의 일부다. 여기에는 사물이 한낱 사물로서만 묘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가끔 꽃을 본다”고만 기록해 두었다면 거기에 무슨 새로운 서정이나 뜻을 새겨 보게 될 것인가. 사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와서 인간과 관계를 맺게 되는 모습에서 손광성 수필가의 창작적 지평을 우리가 엿듣게 되는 것이다.
결국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주제를 조립하는 벽돌 구실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속에는 의도가 응결되어 하나의 의미체로 나타나야 한다. 서술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무늬를 짜서 아름다운 한 폭 마음의 그림을 그려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의미를 찾아 무늬를 짜내는 예를 이정림의 수필 「산 길이 보이는 창」에서도 볼 수 있다.
생텍쥐페리가 불시착한 리비아 사막에서 생사를 헤매고 있을 때 구원처럼 들려온 것은 수탉의 울음소리였다. 그것이 결코 환청이 아님을 확인하자, 그는 이제 자신이 구제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닭의 울음소리는 여명을 예고하는 시작의 소리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인간이 있고 생활이 있음을 알리는 또 하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또 하나의 의미를, 그 정서적 구체화의 실상을 수필가는 그의 작품 속에서 찾아내어야 하는 것, 그것이 수필과 잡문을 구분하는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Ⅲ-3
그렇다면 다음 글은 과연 수필이 될 수 있을까.
마테오 팔코네는 사르데냐섬 산속 외딴집에 사는 농부다. 출타중에 외국군에게 저항하는 독립 파르티잔이 헌병에 쫓겨 외딴집에 숨어든다.
짚더미 속에 숨는 것을 본 사람은 집을 지키던 농부의 나이어린 아들뿐이었다. 헌병이 따라 들어와 숨은 곳을 대라면서 회중시계로 소년을 꾀었다.
그 꾐에 넘어간 소년은 턱으로 숨은 곳을 가리켰고 파르티잔은 묶여갔다. 돌아온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자 아무 말 않고 장총을 들고 이 아들을 앞세워 개울가로 나가면서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시킨다. 총소리가 울렸고 혼자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놈을 위해서 기도해주라’는 한마디만을 한다.
어렸을 적에 겁을 먹으며 읽었던 메리메의 단편 소설 「마테오 팔코네」의 줄거리이다.
비록 소설 속이긴 하지만 서양에 있어 아이들의 도덕적 기틀을 잡는 아버지의 힘을 절감했던 것이다. 자식들의 잘잘못에 끊고 맺는 부성원리의 삼엄함은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형사 판례집인 추관지에 적힌 영조 19년 황해도 황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고을 처녀 김자근년이가 몸을 버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혼담에 거절당한 김취흥이가 겁탈하려다 미수에 그친 것이 화근이었다. 이 소문만으로도 가문을 욕되게 했다 하여 아버지는 그녀를 돌덩이를 안겨 묶고 깊은 소(沼)에 감기게 했던 것이다.
총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뿐 자녀의 버릇을 바로잡으려는 부성원리(父性原理)는 「마테오 팔코네」와 다를 것이 없다. 비인간적이라는 지탄은 면할 수 없으나 그만큼 초강성의 아버지 나라였다. 새벽 2시에 술냄새 풍기며 들어온 여고생 딸의 뺨을 때렸다 해서 아버지를 경찰에 고발하고 앞으로 때리지 못하도록 하는 각서를 아버지에서 요구한 그런 처량한 아버지의 나라가 돼버렸다.
미완성의 인간 그릇을 다듬는 스승과 아버지의 손이 112에 묶인 몰골이요 가공할 모럴의 지각변동이 아닐 수 없다. 제도적 보완이 있었으면 한다.
이규태의 「딸의 뺨」이라는 이 글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인간적 도덕 규범이 어떻게 실천되어 왔는가를 보여주는 비정한 부성 원리를 밝힌 글이다. 이 짧은 글에서 우리는 인간교육이 이처럼 처절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에 대해 자성하게 된다. 가히 한 편의 장편(掌篇)수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결미가 의미를 규정하고 전달하기 위한 단순서술로 끝맺었기 때문에 행간에 나부끼는 정서적 구체화, 즉 형상화 과정을 유도하지 못해 칼럼 수준에 머물고 만 것을 알게 된다. 예의 유사한 사건과 사건을 접목시켜 그 결론만을 내려놓았을 뿐, 서정적 여백이나 미학적 구조, 작가의 체취나 개성적 문체 등을 통한 유기적 구조미가 조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한다면, 가령 장미꽃이라는 제목의 시나 수필을 한 편 썼을 때,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그러한 꽃을 마음속에 재구성하여 보다 아름다운 꽃을 그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꽃이 어떻게 생겼다고 설명해 놓는 것이 아니라, 바로 꽃 한 송이 그 자체를 독자의 의식 속에 정확히 그려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단 꽃이라는 사물이 아니더라도 정(情)이나 그 어떤 관념적인 것이라도, 정확하게 하나의 유형물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랑’이란 것이 육안으로는 어떻게 생긴 것인지 우리는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작품으로 남긴다는 것은 바로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사랑’의 모형을 언어로서 정확하게 만들어서 육안으로 보듯 의식으로 만져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서의 촉감으로 분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사랑’이라는 생명체를 창조해 놓아야 한다. 자기만의 가장 영롱하고 빛나는 ‘사랑’의 보물을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가장 값비싼 ‘사랑’의 물질적 실체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언어의 조련사요 마술사가 되는 것이다.
도예가나, 무용가나 혹은 꽃꽂이 연구가들이 모두 저들의 몸짓이나 재료를 가지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작품을 연출해 내듯이. 물론 글을 가지고 하나의 작품을 연출해 내는 것이 어느 경우보다 더 힘든다 하더라도, 사실 수필 작품의 경우 그 실패율이 더 많은 것은 그만큼 수필가들의 기량이 못 미친 탓이라 하겠다.
Ⅲ.
지금까지 주마가편(走馬加鞭)식으로 수필과 잡문에 대해 나름대로 소견을 적어 보았으나, 작가에 따라 작품을 보는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글에 대해서도 이견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서는 아주 기초적인 사항만 언급하려 했던 셈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항목별로 짚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대체로 수필 문장을 근간으로 하여 주변 사항을 언급한 격이 됐다. 물론 이 항에서도 좀더 심층적인 다양한 분석이 요청되겠지만, 우선 가장 기본적인 것만 문제점으로 제시한 채, 다음과 같은 수필 한 편을 사례로 들면서 아쉬운 대로 끝을 맺고자 한다.
예시된 수필은 윤오영의 「염소」다. 이 작품은 어린 염소 세 마리가 달달거리며 주인을 따라 팔려가는 정경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서두에서 말미까지 전편을 통해 석양의 보도 위를 달달거리며 주인을 따라가는 염소의 이른바 ‘죽음의 여행’이 이어진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은 이 글에서 ‘길 떠나기’의 행진, 그 죽음에의 끝없는 행렬 속에서 문득 자신의 존재를 되묻게 된다. 「염소」의 경우, 그 줄거리를 읽어가면서 두드러지게 비극성이 비유되거나 노출된 부분을 보면 ① 달달거리며 ② 주인을 따라 가는데 ③ 그 다리는 짧다. 때문에 ④ 종종걸음으로 빨리 따라가야 한다. 역시 ⑤ 떨어질세라 열심히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그 길은 ⑥ 석양이 보도 위에 음영을 던졌다. 그래서 그 길은 ⑦ 슬펐다. 그러나 염소는 ⑧ 눈앞의 운명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⑨ 어린이와 같이 천진난만하고 성스럽다. 그 턱밑의 귀여운 수염 그 어린애 목소리로 우는 그 울음 진정 짧은 꼬리 밑에 감추지 못한 연하고 검푸른 항문조차 가여운 것이다.
다시 이 작품에서 우선 비극성이 염소라는 그 본태성에서 오는 것을 골라 보면 ① ‘다리가 짧다.’ ②‘뒤뚝거리는’ ③‘검푸른 항문’ ④‘어린이 목소리 같은 울음’ 등이다. 그리고 그 비극성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을 보면 ①‘앙징한 턱밑의 수염’ ②‘천진난만한 모습’이나 ③‘온순하고 충실한 천성’ 등이다. 특히 ‘수염’이란 말은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외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①‘석양’, ‘황혼’이란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고, ②‘염소를 어린이와 비교’한 표현이 네 번, 직접 ③‘슬프다’는 표현을 쓴 것이 세 번, ④‘운명’이라는 말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외 앞에서 예를 든 바와 같이 걷는 모습에서 비극성을 강조한 ①‘달달거리다.’ ②‘종종걸음’ ③‘뒤뚝거리는’ ④‘타달거리다’ ‘총총히’ 등의 표현도 일곱 번씩이나 반복된다.
더구나 “길가에 버려 있는 무청 시래기 옆에 세워두면 다투어 잎을 뜯어 먹는다”는 표현이나, “주인은 기저귀처럼 차곡차곡 갠 염소 껍질 네 개를 묶어서 메고 간다”는 표현은 그 비극성을 한층 더 고양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이 수필은 “염소를 끌고 팔러 다니는 저 주인은 또 지금 자기가 걸어가는 그 길을 알고 있는 것인가”라고 하여 존재하는 자의 비극, 그 허무의 의지 같은 것을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반복해서 읽는 동안 이 수필은 그 비극적 전경과 더불어 아련히 서러운 곡절을 되새기게 된다. 이와 같이 결국 수필과 잡문은 어쩌면 수석과 평범한 돌과의 차이쯤 되는지 모를 일이다.
-[좋은 수필 쓰는 법] 중에서